맨위로가기

노르웨이 왕국 (1814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노르웨이 왕국 (1814년)은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덴마크-노르웨이가 해체된 후 노르웨이가 독립을 시도하고 스웨덴과의 연합을 거쳐 성립된 시기를 의미한다.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가담하여 영국 해군의 봉쇄로 어려움을 겪었고, 킬 조약으로 스웨덴에 양도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독립 운동을 주도하여 1814년 5월 17일 노르웨이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모스 협약을 통해 스웨덴과의 동군 연합을 수용하고, 1814년 11월 4일 스토르팅에서 스웨덴 국왕 칼 13세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새로운 연합이 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14년 설립 - 웰링턴 공작
    웰링턴 공작은 아서 웰즐리에게 수여된 영국 귀족 작위로, 초대 공작은 "나폴레옹 정복자"로 불리는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현재는 9대 웰링턴 공작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가 작위를 계승하고 햄프셔주와 런던에 주요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 1814년 설립 -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는 1787년 토마스 로드가 설립한 잉글랜드 런던의 크리켓 경기장으로, 메릴본 크리켓 클럽의 홈 구장이며, 크리켓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노르웨이의 역사 - 베저위붕 작전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철광석 수송로 확보와 영국 해군 기지 건설 저지를 목표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베저위붕 작전은, 주요 도시 기습 점령, 해상 및 육상 전투, 노르웨이 왕실 망명, 연합군 개입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전개에 영향을 미쳤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쟁점이 되었다.
  • 노르웨이의 역사 - U-2기 사건
    U-2기 사건은 1960년 5월 1일 미국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어 미국의 첩보 활동이 드러나면서 미·소 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적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노르웨이 왕국 (1814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814년의 노르웨이 왕국
1814년의 노르웨이 왕국
기본 정보
공식 명칭노르웨이 왕국
현지 이름Kongeriget Norge (노르웨이어)
일반 명칭노르웨이
지위사실상 국가
시대나폴레옹 전쟁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존속 기간1814년 2월 25일 – 1814년 11월 4일
이전 국가덴마크-노르웨이
이후 국가스웨덴-노르웨이
수도크리스티아니아
최대 도시베르겐
국가 모토Enig og tro til Dovre faller (도브레 산이 무너질 때까지 단결하고 충성하리라)
국가 모토 (라틴어)Et usque ad perfectum est unitum montibus Dovre iactata fatiscit
왕실 모토Gud og fædrelandet (하느님과 조국)
국가노르웨이의 축배
공용어다노-노르웨이어
덴마크어 (문어)
노르웨이어 방언
사미어
종교루터교
통화릭스달러
현재 국가노르웨이
주민노르웨이인
정치
국왕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총리프레데리크 고트샬크 폰 학스타우센
의회스토르팅
상원라그팅
하원오델스팅
역사
주요 사건킬 조약 체결 (1814년 1월 14일)
인구 통계
1814년902,100명

2. 1814년 이전 – 독립 운동

덴마크-노르웨이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서서 포격 전쟁에 참여했으나,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노르웨이는 고립되었다.[4] 이로 인해 노르웨이는 자체적으로 외교를 처리해야 했으며, 1809년에는 독립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1808~1809년 스웨덴의 노르웨이 공격을 격퇴한 것과 1812~1813년의 기근은 노르웨이인들의 덴마크와의 연합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했고, 독립 열망을 더욱 강화시켰다.

2. 1.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과 나폴레옹 전쟁

덴마크-노르웨이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측에 가담하여 포격 전쟁에 참여했다. 해군을 잃은 후, 전황이 프랑스에 불리하게 작용하면서 해상 방어가 무력해졌다.[4] 1808년부터 영국 해군은 모든 노르웨이 항구를 효과적으로 봉쇄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 간의 연결을 끊었고, 노르웨이는 자체적으로 외교를 처리하게 되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노르웨이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1809년에 독립 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4]

1808~1809년 스웨덴의 노르웨이 공격은 노르웨이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는데, 이는 노르웨이인들이 독립에 더 경도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1812년과 1813년은 봉쇄로 인한 극심한 기근으로 알려졌으며, 이 또한 노르웨이인들이 덴마크와의 연합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원인이었다.

2. 2. 노르웨이 독립 운동의 태동

덴마크-노르웨이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서서 포격 전쟁에 참여했다. 해군을 잃은 후 전황이 프랑스에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해상 방어가 약화되었다. 1808년부터 영국 해군이 노르웨이 항구를 봉쇄하여 덴마크-노르웨이 간 연결이 끊겼고, 노르웨이는 독자적으로 외교를 처리해야 했다.[4]

이런 상황에서 노르웨이 내 긴장이 고조되었고, 1809년 독립 운동이 싹텄지만, 그 뿌리는 17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4] 1808~1809년 스웨덴의 노르웨이 공격이 노르웨이 군대에 의해 격퇴되면서, 노르웨이인들은 독립 열망을 더욱 키웠다.

1812년과 1813년은 봉쇄로 인한 극심한 기근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노르웨이인들이 덴마크와의 연합에 대해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3. 킬 조약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이 프랑스 측의 패배로 끝날 조짐이 보이자 스웨덴 왕국은 덴마크-노르웨이와 전쟁을 벌여 킬 조약을 체결하였다. 킬 조약에 의해 덴마크-노르웨이는 해체되고 노르웨이는 스웨덴에게 양도되기로 합의되었다.[5]

1814년 1월 7일, 스웨덴의 왕세자 칼 요한의 지휘 아래 프레데리크 6세는 유틀란트 점령을 피하기 위해 노르웨이 왕국을 스웨덴 왕에게 양도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그의 특사 에드먼드 버크에게 이러한 조건으로 스웨덴 및 영국과 평화 조약을 협상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대가로 모든 연합군 부대가 덴마크 영토에서 즉시 철수하고 특정 영토 보상을 받기로 했다. 또한 그는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는 연합국에 합류해야 했다.[5] 이러한 조건은 1월 14일 킬 조약에서 공식화되고 서명되었으며, 덴마크는 그린란드,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에 대한 노르웨이의 소유권에 대한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협상했다. 이전 며칠 동안 영국 정부의 비밀 서신은 덴마크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피하기 위해 협상 당사자들에게 합의에 도달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베르나도트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정부에 감사를 표하고 러시아 제국의 평화 협상 역할을 인정하며 북유럽 지역의 더 큰 안정을 기대하는 편지를 보냈다.[5]

이 소식은 1월 18일 덴마크 왕이 노르웨이 국민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1월 말에야 노르웨이에 전달되었으며, 이 편지에서 그는 그들과 그의 왕조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제했다. 1월 17일 왕이 그의 사촌이자 노르웨이 부왕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1월 24일에 특별 특사를 통해 전달되었는데, 이 편지에는 왕자가 자신의 반응을 고려하면서 자신에게만 보관하기로 결정한 조약의 가장 중요한 세부 사항이 담겨 있었다. 이 편지는 그에게 노르웨이 요새를 스웨덴군에게 인도한 후 덴마크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6]

1월 26일, 대중은 신문 ''Tiden''의 검열된 기사를 통해 평화 조약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기사의 제목은 "평화, 북쪽의 평화!"였지만, 왕이 그의 왕국을 역사적으로 노르웨이의 적이었던 스웨덴 왕에게 양도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7] 당시 크리스티아니아에서는 연례 2월 시장이 열리고 있었고, 한 지역 사제는 시장 전체가 조약에 대한 소문과 긴장으로 소용돌이쳤다고 관찰했다. 소식이 퍼지면서 많은 노르웨이 지식인들은 국민이 이 조약에 의해 이방인에게 가축처럼 넘겨진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8]

4.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의 독립 시도

덴마크노르웨이 왕위 계승자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왕자는 국왕의 지시를 거부하고 국가 통합, 가능하다면 덴마크와의 연합 유지를 위해 반란을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국왕은 1813년 12월 비밀 서한을 통해 이 계획을 통보받았다. 왕자는 덴마크와의 연합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는 당시 노르웨이의 바람과는 달랐다. 노르웨이에서는 노르웨이가 숙적인 스웨덴에 "팔렸다"는 여론이 팽배했다.[9]

재정 문제로 왕자는 1월 27일, "노르웨이 임시 릭스방크"에서 3백만 릭스방크달러에 달하는 지폐를 발행하도록 명령했다. 이 지폐는 릭스방크가 상환하도록 노르웨이 문장이 찍혔다. 이른바 "왕자 지폐"는 정부 운영에 필요했지만, 이미 혼란스러운 통화 상황과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기여했다. 재정 위기의 원인은 프레데릭 6세 국왕이 노르웨이 은행 설립을 거부한 데 있었다.[9]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노르웨이 왕위를 주장하며 독립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1월 30일 전 주에 왕자는 노르웨이 일부 지역을 순회하며 지지를 확인했다. 1월 30일, 그는 몇몇 노르웨이 고문들과 상의했다. 그는 프레데릭 국왕이 상속 포기 권한이 없으며, 자신이 노르웨이의 정당한 국왕이고 노르웨이는 자기 결정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즉석 의회는 동의했고, 이는 독립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순회는 트론헤임까지 이어졌다.

2월 2일, 노르웨이 국민들은 자국이 스웨덴 국왕에게 양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월 8일, 베르나도트는 노르웨이 점령 위협과 헌법 제정 회의 약속, 곡물 금수 조치 지속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 대륙 전투에 집중했고, 이는 노르웨이인들에게 계획 발전 시간을 주었다.

5. 독립 운동의 확산과 위협

1814년 2월,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할 조짐이 보이자, 노르웨이는 킬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을 선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노르웨이의 유력 인사들을 카르스텐 앙케르의 에이즈볼 저택으로 초대하여 회동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 그는 스웨덴의 지배를 거부하고 노르웨이 왕위를 자신이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고문들은 노르웨이의 독립 주장이 국민의 자결권에 기초해야 하며, 그가 당분간 섭정으로서 통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1]

2월 16일 에이즈볼 회의에서 섭정으로 결정된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전국적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제헌 의회 대표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2월 19일,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서 그는 스스로를 노르웨이 섭정으로 선포했다. 2월 25일, 모든 회중은 노르웨이 독립을 지지하는 맹세를 하고, 4월 10일 에이즈볼에서 열릴 제헌 의회 대표를 선출했다.[1]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스웨덴 정부는 2월 20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에게 사절단을 보내 경고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독립 운동이 킬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며, 노르웨이를 전쟁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 결과는 기근과 파산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

이에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유럽 각국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노력이 노르웨이의 자결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비밀리에 나폴레옹과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2월 24일, 스웨덴 사절단은 크리스티아니아에 도착하여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와 만났으나, 그는 스웨덴 국왕의 포고문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하는 편지를 읽었다. 스웨덴 대표단은 그의 결정을 무모하고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스웨덴으로 돌아갔다.[1]

2월 26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스웨덴 정부와 장기간의 서신을 시작했고, 다음 날인 2월 27일에는 독립 노르웨이의 새로운 국기를 도입했다. 이 국기는 단네브로에 노르웨이 사자를 넣은 형태였다.[1]

1814년 2월 27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가 도입한 노르웨이 전쟁 깃발


2월 25일은 "국민의 날"로 기억되는데, 이날 노르웨이의 사실상 독립 선언이 이루어졌다. 크리스티아니아 중앙 교회에는 4,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섭정의 주도 하에 예배를 드리고, 주교가 "노르웨이의 독립을 주장하고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생명과 피를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라고 외치자, 섭정과 회중 모두 이에 동의하는 맹세를 했다. 이 맹세는 노르웨이 전역의 교회에서 계속되었다.[1]

한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카르스텐 앙케르를 런던으로 보내 영국 정부의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영국은 노르웨이에 대한 해상 봉쇄를 재개하고 스웨덴 국왕에게 노르웨이의 주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가 스웨덴 국왕에게 보낸 회유적인 서한은 개봉되지 않은 채 반송되었다.[1]

3월 9일, 코펜하겐 주재 스웨덴 공관은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가 덴마크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그가 노르웨이 독립 운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유럽 열강이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3월 17일, 덴마크 외무장관 닐스 로젠크란츠는 덴마크 정부가 노르웨이 독립을 지지하지 않지만, 국경 초소를 비울 수는 없다고 답했다.[1]

스웨덴 군대는 노르웨이 국경을 따라 집결했고, 침공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스웨덴의 한스 헨리크 폰 에센 백작은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의 군대에 덴마크 관리를 무법자로 취급하고, "왕자 달러"를 사용하는 사람을 위조범으로 간주하라고 명령했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요한 카스파르 헤르만 베델-야를스베르크 백작은 3월 14일 헌법 제정 회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몇 주 후에 열릴 회의가 논쟁적일 것이라는 징후가 나타났다. 3월 말,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의 야망이 노르웨이를 다시 덴마크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라는 의견이 공공연하게 표명되었다.[1]

3월 24일, 런던에 도착한 카르스텐 앙케르는 영국의 외무 차관보와 만났으나, 영국의 입장은 강경했다. 4월 2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카르스텐 앙케르의 형제 페테르를 비공식 사절로 런던에 보냈지만, 4월 3일 카르스텐 앙케르는 빚 때문에 채무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1]

3월 31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덴마크로 함선을 가져가라는 명령을 따르려던 노르웨이 주둔 해군 장교들을 체포하고, 그 배들을 노르웨이 해군의 배로 압수했다. 4월 1일, 프레데리크 6세는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에게 그의 노력을 포기하고 덴마크로 돌아가라는 서한을 보냈으나,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이를 거부했다.[1]

6. 제헌 의회

1814년 4월 10일, 에이즈볼에서 노르웨이 제헌 의회가 소집되었다.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교회 예배에서 군주제를 칭찬하는 설교를 하여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 의회는 세베린 뢰벤스킬드가 독립 운동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후 대표자들의 자격을 인정했다.

4월 11일, 의회는 임원들을 선출했고, 4월 12일부터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니콜라이 베르겔란과 게오르그 스베르드루프는 의회의 권한과 섭정의 정당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독립당'(덴마크당, 왕자당, 긴급파)과 '연합당'(서부당, 스웨덴당, 소극파)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정파가 형성되었다.


  • 독립당: 다수파로, 의회의 권한이 노르웨이 독립을 공식화하는 것에 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섭정으로 하여 덴마크와의 관계를 독립의 맥락에서 협상해야 한다고 보았다.
  • 연합당: 소수파로, 노르웨이가 스웨덴과의 느슨한 연합 내에서 더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헌법 제정 이후에도 의회가 계속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대표자들은 독립이 이상적인 해결책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현실적인 제약 조건에서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헌법 위원회는 4월 16일에 제안서를 발표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독립당이 78대 33으로 승리하여 노르웨이를 독립 군주국으로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징병 문제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는데, 상류층은 징병 면제를 주장했다. 이후 며칠 동안 의회 내에서는 상호 의심과 불신이 커졌다. 특히 유럽 열강의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고, 일부 사실이 은폐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헌법 제정 작업은 계속되었고, 4월 20일에는 크리스티안 마그누스 팔센과 군데르 아들러가 명확히 밝힌 국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이 헌법 제정의 기초로 확립되었다.

7. 헌법 제정

1814년 5월 17일, 노르웨이 헌법이 제정되었다. 크리스티안 마그누스 팔센을 비롯한 헌법 제정 위원회는 국민 주권 원칙에 따라 개인의 자유, 재산권, 평등을 보장하는 내용을 헌법에 담았다.[1]

논쟁 끝에 헌법은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왕은 루터교 신자여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이로 인해 가톨릭 신자였던 베르나도트는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유대인예수회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항(''유대인 조항'', ''예수회 조항'')도 포함되었다.[1]

양원제 입법부인 스토르팅을 구성하고, 상원 (라그팅)과 하원 (오델스팅)으로 나누었다. 세금 부과 및 징수 권한은 입법부에 부여되었다. 스토르팅 의원의 3분의 2는 농촌 지역에서, 3분의 1은 도시 지역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농민 조항"이 통과되었는데, 이 조항은 1952년까지 유지되었다.[1]

징병제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재정 및 행정 엘리트들은 자녀들이 군대에 징집될 경우 대량 이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반대했다.[1]

5월 13일, 노르웨이 통화 발행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독립 통화의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연합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당은 독립 국가의 존재를 위해 독립 통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앙 은행 설립은 입법부 회의 소집 때까지 연기되었다.[1]

최종 수정된 헌법은 5월 16일에 승인되었고, 5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서명 및 봉인되었다. 5월 18일에는 다른 대표자들이 서명했다. 헌법 기념일로 지정된 5월 17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가 노르웨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8. 국내외 정당성 확보 노력

1814년 5월 22일, 새로 선출된 국왕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노르웨이 부왕으로 처음 도착한 지 정확히 1년 만에 크리스티아니아에 개선했다. 아케르스후스 요새의 대포가 왕실의 경례를 울렸고, 대성당에서 축하 예배가 열렸다. 국제 정세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었고, 5월 24일 정부는 헌법 제정 의회의 대표 두 명을 영국에 있는 카르스텐 앙케르와 합류시켜 노르웨이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결정했다.[10]

5월 25일, 최초의 국무회의가 소집되어 국가의 최고 법원을 설립했다. 5월 31일, 요하네스 클링겐베르그 세예르스테드 소장은 글로마 강에서 스웨덴 침략군에 맞서 싸울 것을 제안했지만, 일부는 스웨덴군을 국경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5일, 영국 사절 존 필립 모리어가 비공식 방문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크리스티아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의 장관 중 한 명의 환대를 받아들였고, 국왕과 비공식적으로 만나는 데 동의했으며, 자신이 하는 어떤 것도 노르웨이 독립의 승인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10]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영국 정부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이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모리어는 독립 노르웨이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신의 정부의 이전 거부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리어는 노르웨이 사절 닐스 올과 빌헬름 크리스티를 자신의 배에 태워 영국으로 데려갈 것을 제안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노르웨이인들에게 영국 정부로부터 어떠한 외교적 지원도 기대할 수 없으며, 자신의 정부 입장을 모든 노르웨이 신문에 인쇄해 달라고 요청했다.[11] 6월 10일, 노르웨이군은 동원되었고 무기와 탄약이 배포되었다.

6월 13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의회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명령했다.

6월 16일, 카르스텐 앙케르는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에게 서한을 보내 최근 고위 프로이센 외교관과 나눈 대화를 언급했다. 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스웨덴의 노르웨이에 대한 주장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고 있으며,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의 먼 친척)는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을 선호하지만, 베르나도트가 국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며, 영국은 노르웨이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9. 전쟁 발발

1814년 7월, 스웨덴칼 14세 요한킬 조약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한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스웨덴-노르웨이 전쟁이 발발했다.[1] 이에 앞서 7월 27일, 스웨덴 해군은 Hvaler를 점령하여 스웨덴이 노르웨이와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알렸고, 7월 29일 스웨덴군이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했다.[1]

10. 휴전

1814년 8월, 스웨덴-노르웨이 전쟁에서 패배한 노르웨이 왕국은 스웨덴 왕국과의 동군연합을 수락해야 했다.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모스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발표했다.[1] 8월 7일, 베르나도트의 대표단이 스피데르그에 있는 노르웨이 군사 본부에 도착하여 노르웨이를 스웨덴과의 연합에 가입시키고 노르웨이 헌법을 존중하겠다는 휴전 제안을 했다.[1]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그 조건에 찬성하여 스웨덴 군대가 글로마 강 동쪽에 머물도록 허용했다.[1] 스웨덴 특사와의 평화 협상은 8월 10일 모스에서 시작되었고, 8월 14일에 모스 협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평화 조건에 기초한 일반적인 휴전으로 이어졌다.[1]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노르웨이가 킬 조약을 인정했다는 언급을 제외하는 데 성공했고, 스웨덴은 이것이 두 국가 간의 미래 연합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수용했다.[1] 베르나도트는 노르웨이를 정복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연합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유리한 평화 조건을 제시했다.[1] 그는 두 나라의 연합을 위해 필요한 수정 사항만 포함하여 노르웨이 헌법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1]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9월 또는 10월에 스토르팅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기로 동의했다.[1] 그는 자신의 권한을 선출된 국민 대표에게 넘기고, 그들은 스웨덴과의 연합 조건을 협상하며, 결국 노르웨이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그 나라를 떠나야 했다.[1]

이 소식은 노르웨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군 지휘관에 대한 "겁쟁이"와 "반역"에 대한 분노, 노르웨이 독립의 전망에 대한 절망, 그리고 국가의 선택에 대한 혼란을 야기했다.[1]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건강상의 이유"로 왕위를 포기할 의사를 확인했고, 국무회의에 권한을 위임했다.[1] 8월 28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국무회의에 "최고 권위"의 명령을 따르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분명히 스웨덴 국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1] 이틀 뒤, 스웨덴 국왕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통치자를 자처했다.[1]

9월 3일, 영국 정부는 노르웨이에 대한 해상 봉쇄를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 노르웨이와 스웨덴 간의 우편 서비스가 재개되었다.[1] 9월 8일까지 노르웨이의 저명 인사들은 베르나도트가 제시한 관대한 조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 노르웨이 점령 국경 지역의 스웨덴 장군 마그누스 프레드리크 페르디난드 비에른스티에르나는 노르웨이인들이 휴전 협정을 준수하지 않으면 적대 행위를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1]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고 전해지며,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해 다양한 비난을 받았다.[1]

9월 말, 스웨덴 당국과 노르웨이 국무회의 사이에 크리스티아니아의 빈민들에게 곡물을 분배하는 문제로 분쟁이 발생했다.[1] 곡물은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인들에게 주는 선물로 의도되었지만, 노르웨이 국무회의는 과도기가 공식화될 때까지 노르웨이에 새로운 국왕이 있다는 인상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1] 비에른스티에르나는 적대 행위를 재개하겠다고 위협하는 여러 서한을 보냈다.[1]

11. 새로운 연합으로

10월 초, 노르웨이인들은 베르나도트가 보낸 곡물 수송을 거부했지만, 10월 초부터 스웨덴과의 연합에 대한 지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7일, 노르웨이 스토르팅의 임시 회기가 소집되었다.[4] 외스트폴에서 스웨덴에 점령된 지역의 대표들은 스웨덴 당국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확약을 제출한 후에야 입장이 허용되었다.[4] 10월 10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모스 협약에서 합의된 조건에 따라 공식적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덴마크로 떠났다.[4] 행정 권한은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스토르팅에 위임되었다.[4]

10월 20일, 정전 기한 만료 하루 전에 노르웨이 의회는 72 대 5로 스웨덴과의 개인 연합에 참여하기로 투표했지만,[4] 칼 13세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인정하자는 안건은 통과되지 못했다.[4] 이 문제는 노르웨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류되었다.[4] 그 후 며칠 동안 의회는 연합 내에서 가능한 한 많은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4] 11월 1일에는 노르웨이가 자체 영사를 임명하지 않기로 52 대 25로 투표했다.[4] 11월 4일, 스토르팅은 연합을 허용하는 데 필요한 헌법 개정을 채택하고,[4] 만장일치로 칼 13세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선출'했다.[4]

참조

[1] 웹사이트 Unike dokument viser Larviks danske hemmelegheit https://www.nrk.no/v[...] 2021-06-26
[2] 웹사이트 Bergen - historie https://snl.no/Berge[...] 2023-01-17
[3] 웹사이트 Demographics of Norway http://www.populstat[...] Jan Lahmeyer 2014-03-08
[4] 웹사이트 Jens Moestue – en patriotisk opprører? http://oslohistorie.[...] 2021-05-13
[5] 서적 '1814' J.W. Cappelen 1951
[6] 서적 '1814' J.W. Cappelen 1951
[7] 서적 Christian Frederik og Norge 1814 1962
[8] 간행물 Dagbøker 1812–1822 www.dokpro.uio.no/li[...] 1812-01-26
[9] 웹사이트 Norway Paper Money Prinsesedler Ca. 1815 Issues http://numismondo.ne[...]
[10] 서적 Experiences of War and Nationality in Denmark and Norway, 1807–1815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4-01-14
[11] 서적 Experiences of War and Nationality in Denmark and Norway, 1807–1815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4-01-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