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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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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획물은 전쟁 시 적국의 선박이나 재산을 합법적으로 획득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해상에서 주로 발생했다. 15세기부터 국제법적 규칙이 형성되었으며, 후고 그로티우스의 저서 등을 통해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노획 법은 7년 전쟁과 미국 남북 전쟁 시기에 발전했으며, 영국 판례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해상에서 노획은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당시 최고의 법률가들을 끌어들였고, 관할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포 절차는 임검, 수색, 나포, 포획 심검소 심사를 거쳐 이루어졌으며, 사략면허와 위임장을 통해 합법적인 노획이 가능했다. 1856년 파리 선언으로 사략 행위가 종식되었고, 이후 해군 장교에게 전리품을 지급하는 관행도 점차 사라졌다. 현대에는 국가는 적 선박을 포획하여 판매할 수 있지만, 포획에 참여한 개인에게 지분을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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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물
개요
유형전쟁 중 나포된 선박, 화물 또는 장비
관련 법률해상 포획법
목적적의 해상 자원 약탈 및 약화
역사적 맥락
기원고대 해전에서 비롯
발전국제법 및 해상법의 발전과 함께 변화
주요 시대대항해시대, 나폴레옹 전쟁, 세계 대전
법적 근거
국제법1856년 파리 선언
헤이그 협약
기타 국제 조약 및 협약
국내법각국은 국내법을 통해 포획 규칙 및 절차 규정
절차
포획군함이나 사략선이 적의 선박, 화물 등을 나포
심사국내 법원에서 포획의 적법성 및 정당성 심사
처분합법적인 포획으로 인정되면, 포획물은 경매 등을 통해 처분
논란 및 제한
민간 재산 보호제네바 협약 등에 따라 민간인 소유 재산 보호 강화 추세
현대전해상 봉쇄 및 경제 제재 등 다른 수단으로 대체되는 경향
관련된 용어
사략선정부의 허가를 받아 적의 선박을 공격하는 민간 선박
해상 봉쇄적의 해상 교통을 차단하는 행위
불법 행위국제법 위반 시 처벌 대상
참고
관련 문서해상법
전쟁법

2. 역사와 법원(法源)

해상 나포법은 15세기경부터 국가 간 해상법이라는 지침과 규칙이 생겨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3] 17세기 후고 그로티우스의 국제법 관련 저술은 이러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4]

7년 전쟁과 미국 남북 전쟁 사이, 특히 항해 시대의 마지막 1세기 동안 노획 법은 완전히 발전했다.[6]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 전쟁,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유사 전쟁 등이 있었다. 앵글로-아메리카 노획 법은 18세기 영국 선례, 특히 윌리엄 머레이 제1대 만스필드 백작의 ''1753년 법률 관계자의 보고서''에서 파생되었으며,[6] 윌리엄 스콧 로드 스토웰의 고등 해군 법원 판결과 함께 영어로 출판된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조셉 스토리 판사와 프랜시스 업튼도 노획 법 발전에 기여했다.[7][8][9]

해상 나포는 전시 상황에서 교전국이 해상의 사유 재산(선박 및 화물)을 나포 또는 몰수하는 것을 의미한다.[62] 영국 해상 보험 관련 판례에서는 포획(capture)을 "전시 중 또는 복수와 함께 지배권과 소유권 탈취를 목적으로 적이 보험의 목적을 prize(포획물)로 잡는 것"으로 정의한다.[63]

2. 1. 초기 발전

후고 그로티우스(Grotius)는 국제법의 기초를 다진 17세기 네덜란드의 학자이다.


후고 그로티우스는 1604년에 ''노획 및 전리품 법에 대한 주석''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해상 나포법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4] 특히, 이 책의 제12장 "자유해론"은 바다의 자유 원칙을 확립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에 대한 네덜란드의 나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4] 그로티우스는 고대 그리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어원이 "붙잡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들어, 국가의 법이 적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을 합법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하며 노획 행위를 단순한 관습이 아닌 정당한 행위로 옹호했다.[5]

도널드 페트리는 그의 저서 ''노획 게임''에서 "처음에는 노획이 보석상 창문을 깨는 것과 같은 덮치고 빼앗는 행위였지만, 15세기 무렵에는 국가의 해상법이라는 일련의 지침 규칙이 생겨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했다.[3]

2. 2. 18~19세기 발전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나폴레옹 전쟁, 유사 전쟁 등을 거치면서 해상 나포법은 관습법과 판례를 통해 발전했다. 윌리엄 머레이 제1대 만스필드 백작이 저술한 ''1753년 법률 관계자의 보고서''는 윌리엄 스콧 로드 스토웰의 고등 해군 법원 판결과 함께 영어로 출판된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으로 여겨졌다.[6] 미국의 노획 법 분야 권위자인 조셉 스토리 판사는 1753년 보고서와 로드 스토웰의 판결에 크게 의존했다.[7]

앵글로-아메리카 관습법 판례가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설명이지만, 노획 사건에서 법원은 특정 국가의 법이나 판례가 아닌 국제 관습과 관례, 즉 만국 공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10]

해상에서 노획금으로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C. S. 포레스터와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소설에 생생하게 묘사된 것처럼, 미국 독립 전쟁 동안 미국 해군과 사략선의 노획금은 총 2400만달러에 달했고,[11] 1812년 전쟁에서는 4500만달러였다.[12] 당시 선원에게 관대한 연봉이 200USD였을 때,[13] 한 번의 노획으로 얻는 선원의 몫은 연봉의 10~20배에 달할 수 있었고, 한 번의 항해에서 5~6번의 노획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처럼 많은 것이 걸려 있기에 노획 법은 존 애덤스, 조셉 스토리, 대니얼 웹스터, 리처드 헨리 다나 주니어 등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을 끌어들였다. 노획 사건은 유동적인 만국 공법에 따라 막대한 자금의 처리가 결정되었고, 관할권 및 선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이 제기되면서 당시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의 초기 사건 중 하나인 ''액티브'' 사건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 간의 관할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 무려 30년이나 걸렸다. 기디온 올름스테드는 반란을 일으켜 영국 슬루프 ''액티브''를 지휘했지만, 펜실베이니아의 사략선이 ''액티브''를 빼앗았다.[14] 올름스테드는 미국 연방 대법원 사건에서 승소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사건을 추구했다.[15]

2. 3. 국제법으로서의 해상 나포법

C. S. 포레스터와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소설에서처럼, 해상 나포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앵글로-아메리카 관습법 판례는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설명이지만, 해상 나포 사건에서 법원은 특정 국가의 법이나 판례가 아닌 국제 관습과 관례, 즉 만국 공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10]

2. 4. 막대한 수익과 법률 분쟁

해상 나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이는 복잡한 법률 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독립 전쟁 동안 미국 해군과 사략선이 노획한 금액은 2400만달러에 달했고,[11] 1812년 전쟁에서는 4500만달러였다.[12] 당시 선원의 연봉이 200USD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13] 한 번의 나포로 얻는 몫은 연봉의 10~20배에 달했으며, 한 번의 항해에서 5~6번 나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처럼 큰 금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노획 관련 법률 문제는 존 애덤스, 조셉 스토리, 대니얼 웹스터, 리처드 헨리 다나 주니어 등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을 끌어들였다. 노획 사건은 유동적인 만국 공법에 따라 처리되었고, 관할권 및 선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이 제기되어 당시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일례로, 미국 초기 ''액티브'' 사건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 간의 관할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 30년이나 걸렸다. 포획된 미국 사략선 선장인 20세의 기디온 올름스테드는 영국 슬루프 ''액티브''에서 반란을 일으켜 배를 지휘했지만, 펜실베이니아의 사략선이 ''액티브''를 빼앗았다.[14] 올름스테드는 대륙 회의에 항소하여 노획물 전체를 할당받았지만, 펜실베이니아 당국은 이를 거부했다. 올름스테드는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사건을 추구하여 결국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승소했는데, 스탠리 매튜스 (판사)는 이를 "사법 재판소가 주 권한의 주장에 맞서 헌법의 우위를 강제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15]

3. 나포 절차

해상 나포 절차는 크게 임검 및 수색, 나포, 포획 심검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62]

; 임검 및 수색

: 교전국 군함은 정선 명령(공포 또는 국제 신호기)을 통해 임검을 시작한다.[63][64] 정선 명령에 불응하면 적대 행위로 간주되어 공격이나 나포 대상이 될 수 있다.[63][64] 교전국 군함에서 파견된 장교는 선박 서류를 열람하고 수색하며, 이를 통해 해당 상선의 중립성을 확인한다.[63][64]

; 나포

: 나포는 평시 국제법에서도 발생할 수 있지만, 전시 나포는 포획을 위한 일련의 행위 중 하나로 간주된다.[63]

; 포획 심검

: 나포된 선박은 교전국 항구로 이동되어 포획 심검소의 심사를 받는다.[63][64] 포획이 유효하다고 판단되면 선박이나 화물은 몰수되고, 무효로 판단되면 교전국은 나포 및 이동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63][64]

3. 1. 사략면허와 위임

사략면허와 해군 선박에 대한 공식적인 위임장은 해상 나포의 법적 근거가 된다.[19]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매사추세츠, 메릴랜드, 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등의 반란 식민지들은 미국 독립 선언 수개월 전인 1776년 7월부터 사략면허를 부여했다.[16]

19세기 초에는 주권 정부가 먼저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프랜시스 업턴은 "해상 전쟁과 노획물"에서 "국가 간의 전쟁의 존재는 해당 국가의 시민 또는 국민 간의 모든 법적 상업적 교류를 종결한다"라고 썼다.[17] 이는 무역과 상업이 민간 계약과 사법 재판소에 의존하는데, 이는 전쟁 상태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17] 한 국가의 각 시민은 "적국의 모든 시민과 전쟁 중"이며, "모든 시민에게 적을 공격하고 그의 재산을 압수할 의무"를 부과한다.[18] 그러나 "확립된 관습에 따라 이 권리는 정부의 위임을 받은 도구에만 제한된다."[18]

3. 2. 나포 과정

C. S. 포레스터와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소설에서처럼, 해상 노획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다. 사략선이나 해군 함정은 어떤 깃발을 달았든, 심지어 깃발을 달지 않은 선박이라도 매력적이면 추격했다.[20] 가짜 깃발 사용은 공격자와 대상 모두에게 흔한 속임수였다. 관례상 첫 발포 전에 실제 깃발을 게양해야 했지만, 가짜 깃발 아래에서 발포하면 노획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하거나 배상 책임을 질 수 있었다.[20]

종종 뱃머리에 대포 한 발을 쏘는 것으로 정선을 유도했지만, 때로는 몇 시간, 심지어 며칠 동안 포격이 이어지거나 칼, 권총, 창을 사용한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투가 끝나면 승리자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포로를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해야 했다.[21] 장교는 선원들이 패배한 적을 약탈하거나 화물을 훔치는 것을 막아야 했다. 프랜시스 업튼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 나포된 화물 횡령, 폭력, 부상, 부적절한 격리, 심문 불출석, 포로의 권리와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노획 무효화 사유가 될 수 있으며, 불법 행위자는 손해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22]

악천후, 승무원 부족, 물과 식량 부족, 적군의 위협 등으로 노획물을 법정으로 가져가기 어려울 때는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략선이나 해군 장교는 선장과 합의된 금액의 증서 (차용증)를 받고 선박을 파괴하지 않았다. 육지에서는 갈취에 해당하지만, 해상에서는 인정되는 관행이었고 차용증은 양도 가능했다.[23]

때로는 나포된 선박이 포로를 본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석방되기도 했다. 로드 스토웰은 "인도주의와 정책"을 위해 해군 법원이 이 관행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24] 카르텔 선박은 임무 수행, 신속 귀환, 무역 금지 조건 하에 재나포로부터 면제되었다.[25]

일반적으로 나포자는 승무원을 태워 나포된 선박을 자국 또는 동맹국 항구로 보내 노획 법원에서 심리받게 했다. 항해 중 아군 선박이 재나포하면 이를 구조라 하고, ''포스트리미니움'' 권리에 따라 소유권이 이전 소유주에게 돌아갔다. 즉, 재나포한 선박의 노획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조자는 침몰 위기 선박 구조와 마찬가지로 구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26][27]

3. 3. 몸값과 카르텔 선박

나포된 선박은 몸값을 지불받고 석방될 수 있었다. 이는 선박을 파괴하는 대신, 사략선이나 해군 장교가 선장의 합의된 액수에 대한 증서 형태의 차용증을 몸값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육지에서는 갈취에 해당되어 법정에서 지불 약속을 이행할 수 없지만, 해상에서는 받아들여지는 관행이었고 차용증은 양도 가능한 증서였다.[23]

때때로 나포된 선박은 포로를 본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석방되기도 했는데, 로드 스토웰은 이 관행을 "인도주의와 정책을 고려하여" 해군 법원이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24] 카르텔 선박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바로 임무를 수행하고 신속히 귀환하며 그동안 무역에 종사하지 않는 한 재나포로부터 면제되었다.[25]

3. 4. 구조(Salvage)

후고 그로티우스의 국제법에 관한 획기적인 논문인 1604년에 출판된 ''De Iure Praedae Commentarius(노획 및 전리품 법에 대한 주석)''는, 그중에서도 "''Mare Liberum''" 제12장이 바다의 자유 원칙을 세웠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의 네덜란드 압류를 정당화하는 변호사 측 논문이었다.[4]

아군 선박이 전리품을 재나포하는 경우, 이를 구조(salvage)라고 하며, 포스트리미니움(postliminium)의 권리에 따라 소유권이 이전 소유주에게 복원된다. 구조자는 해상 구조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초기 사건 중 하나인 ''액티브'' 사건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 간의 관할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 무려 30년이나 걸렸다. 포획된 미국 사략선 선장인 20세의 기디온 올름스테드는 귀국하기 위해 자메이카에서 영국 슬루프 ''액티브''에 일반 선원으로 승선했다. 올름스테드는 반란을 조직하여 슬루프를 지휘했다. 그러나 올름스테드의 반란군이 노획물을 미국으로 운송하는 동안 펜실베이니아의 사략선이 ''액티브''를 빼앗았다.[14] 올름스테드와 사략선은 노획물의 소유권을 다투었고, 1778년 11월 필라델피아 노획 법원 배심원단은 각자 지분을 할당하는 분할 평결을 내렸다. 올름스테드는 당시 미국의 장군 베네딕트 아놀드의 도움을 받아 대륙 회의 노획 위원회에 항소했고, 위원회는 필라델피아 배심원단 평결을 뒤집고 올름스테드에게 노획물 전체를 할당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당국은 대륙 회의가 주 노획 법원 배심원단 평결에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결정을 시행하기를 거부했다. 올름스테드는 끈질기게 수십 년 동안 사건을 추구하여 결국 미국 연방 대법원 사건에서 승소했고, 스탠리 매튜스 (판사)는 이를 "사법 재판소가 주 권한의 주장에 맞서 헌법의 우위를 강제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나중에 불렀다.[15]

3. 5. 해사 법원 절차 (In Rem)

노획물이 포획 선박의 국가 또는 노획 절차를 승인한 동맹국으로 돌아갔을 경우, 해당 노획물은 해사 법원에서 ''in rem'' 절차를 거쳤다. ''in rem''이란 "사물에 대한" 소송, 즉 선박 자체에 대한 소송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노획 사건 판결에는 ''The Rapid''[28] 또는 ''The Elsebe''[29]와 같이 선박의 이름이 붙는다. ''The Rapid''는 개전 전에 구매한 물품도 전쟁 선포 후에는 금지 물품이 된다는 미국 대법원 판례이고, ''The Elsebe''는 로드 스토웰 경이 노획 법원이 자국법이 아닌 만국 공법에 따른 권리를 집행한다고 판결한 사건이다. 노획 법원의 적절한 유죄 판결은 새로운 소유주에게 선박과 화물에 대한 명확한 소유권을 이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프랜시스 업튼의 논문에 따르면, "4년 동안 소유하고 여러 차례 항해를 했더라도 유죄 판결 없이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변경되지 않는다."[30]

3. 6. 증거 수집 및 심리

노획 위원회는 나포된 선박과 화물을 보관하고 선박 서류, 해도 등 관련 문서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부패하기 쉬운 재산을 신속하게 판매하고, 노획 절차에서 승소한 사람에게 수익금을 보관하기 위해 노획 법원에 통지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었다.[31]

증인들은 표준 양식의 서면 질의서에 따라 증언했다.[32] 해사 법원은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경우가 드물었다. 위원회의 질의서는 선박의 크기, 속도, 무장, 주고받은 신호, 전투 상황, 나포 장소, 날씨, 시야에 있는 다른 선박 등에 대해 질문했다. 이는 해군 노획법이 "신호 거리 내에" 있던 지원 선박에 수익금 일부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서면 질의서와 선박 서류는 노획물의 국적, 승무원, 화물의 출처와 목적지를 밝히는 데 사용되었다. 선박은 "자신의 입으로 몰수되었다"고 한다.[33]

노획법과 일반적인 영미 형사법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입증 책임의 전환이었다.[34] 형사 법원에서 피고인은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되지만, 노획 법원에서는 선박이 무죄를 입증해야 했다.[35] 노획 포획자들은 재산이 유죄 판결 대상이라는 "합리적인 의심"만 제시하면 충분했고, 소유주가 그 반대를 입증해야 했다.[36]

3. 7. 중립 선박과 화물

18세기 말, 여러 국가는 중립 선박과 적 선박에 실린 중립국 화물 처리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37]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미국은 "자유 선박은 자유 화물을 만든다"는 원칙을 내세워 중립 선박의 화물은 노획물로 유죄 판결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중립 선박에 실린 적국 상품이나 적국 선박에 실린 중립 상품을 압류할 수 있다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38] 19세기에는 영국의 입장이 우세해졌다.[39] 교전국들은 허위 중립, 허위 서류, 신속한 소유권 이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법망을 피하려 했고, 이는 항해 시대 말기 노획 법원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40]

3. 8. 봉쇄(Blockade)

중립 선박은 봉쇄를 돌파하면 나포될 수 있었다. 봉쇄는 노획 법원에서 인정할 수 있도록, 즉 단순히 선언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행되어야 했다. 중립국은 이에 대해 경고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국기를 게양하든 봉쇄를 돌파하는 모든 선박은 나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41] 그러나 프랜시스 업튼의 ''해상 전쟁과 노획''은 봉쇄 돌파선에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을 전쟁 포로로 취급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일한 처벌...은 [봉쇄 돌파]에 사용된 재산의 몰수이다." 봉쇄 돌파선에 탑승한 사람들은 증인으로 일시적으로 구금될 수 있으며, 증언 후 즉시 석방되었다.[42]

3. 9. 판결의 정당성

판결의 정당성은 정기적이고 공정한 절차에 달려 있었다. 국제적으로 용인되는 공정성 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 불만을 품은 선주와 보험 회사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고, 이는 종종 수십 년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790년대 미국과 프랑스의 준전쟁 동안, 부패한 프랑스 카리브해 노획 법원은 종종 수익금을 공유하면서 중립국인 미국 선박에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 여러 구실과 핑계를 사용했다.[43] 이들은 쌍안경의 나침반이 영국 상표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영국 금지 물품을 운반했다는 혐의로 한 선박에 유죄를 선고했고, 부엌의 냄비와 프라이팬이 영국산이라는 이유로 다른 선박에 유죄를 선고했다. 분노한 미국 선주들과 그들의 후손, 그리고 그들의 후손의 후손(종종 보험 회사의 대리인 역할)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집단적으로 프랑스 약탈 사건(French Spoliation Cases)이라고 불리는 소송을 제기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프랑스 약탈 사건은 1790년대부터 1915년까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조약 위반에 대한 인디언 부족의 청구와 함께, 프랑스 약탈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소송 중 하나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44]

4. 관련 국제 조약

후고 그로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노획 및 전리품 법에 대한 주석》에서 바다의 자유 원칙을 세우며,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에 대한 네덜란드의 압류를 정당화했다.[4] 그는 노획 행위를 단순한 관습이 아닌 정당한 행위로 옹호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적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이 합법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한다.[5]

노획 법은 7년 전쟁과 미국 남북 전쟁 사이, 특히 항해 시대의 마지막 1세기 동안 발전했다.[6]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 전쟁,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의 유사 전쟁 등이 있었다.[6] 앵글로-아메리카 노획 법은 18세기 영국 선례, 특히 윌리엄 머레이 제1대 만스필드 백작의 ''1753년 법률 관계자의 보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보고서는 윌리엄 스콧 로드 스토웰의 판결과 함께 영어로 출판된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으로 여겨진다.[7]

미국의 노획 법 권위자인 조셉 스토리 판사는 1753년 보고서와 로드 스토웰의 판결에 크게 의존했으며, 프랜시스 업튼도 마찬가지였다.[8][9] 앵글로-아메리카 관습법 판례가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설명이지만, 법원은 특정 국가의 법이나 판례가 아닌 국제 관습과 관례, 즉 만국 공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10]

해상 나포와 관련된 주요 국제 조약은 다음과 같다.

조약내용비고
1856년 파리 선언55개국 수락, 미국 미서명
1907년 헤이그 평화 회의 조약
1909년 런던 선언해상 나포 관련 내용 포함미발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해상 나포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62]

4. 1. 1856년 파리 선언

크림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전권대사들이 1856년 3월 파리 조약에 합의하여 사략 허가증 발급을 금지하는 해상법에 관한 파리 선언에도 합의하면서 19세기 말 사략 행위는 종식되었다.[45][46][47] 이 선언은 콜로나-와레프스키 백작이 제안했다.

파리 회의에 모인 협상가들, 콜로나-와레프스키 백작이 주재. 에두아르 뒤뷔프의 ''파리 회의''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략 행위는 폐지되고 유지된다.
  • 중립국 국기는 전쟁 물자를 제외한 적국의 물품을 보호한다.
  • 전쟁 물자를 제외한 중립국 물품은 적국 국기 아래에서 나포되지 않는다.
  • 봉쇄는 유효해야 한다. 즉, 적국 해안 접근을 실제로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으로 유지되어야 한다.[48]



이 선언은 다자간 조약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했는데, 조약 체결 및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이 나중에 당사국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본 선언은 이를 수락했거나 수락할 국가 간에만 구속력을 갖는다."[49]



선언은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고 영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국가에 배포되어 수락을 요청받았으며, 총 55개국이 수락하여 국제법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미국은 서명국이 아니었으며,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50] 윌리엄 L. 마시 미국 국무장관은 1856년 7월 14일자 서한에서 미국이 모든 조건을 포함한 네 가지 제안을 제한 없이 수락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미국은 사략 행위를 제한하고 싶지 않았으며, 적국 선박이나 중립국 선박의 모든 사유 재산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51][52] 마시는 사략 행위의 종식이 상업 해상 이익이 크고 해군력이 작은 국가들을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국가에 의존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며,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지 않은 국가에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제안에 동의하지 않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4. 2. 1907년 헤이그 협약

1907년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채택된 해상 나포 관련 조약은 다음과 같다.[62]

  • 제6조약("개전 시에 있어서 적의 상선 취급에 관한 조약")[62]
  • 제10조약("1864년 8월 22일 '제네바' 조약의 원칙을 해전에 응용하는 조약")[62]
  • 제11조약("해전에 있어서 포획권 행사의 제한에 관한 조약")[62]
  • 제12조약("국제 포획 심검소의 설립에 관한 조약" 미발효)[62]

4. 3. 1909년 런던 선언

1909년 런던 선언(미발효)[62]은 해상 나포 관련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발효되지 않았다.

4.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해상 나포에 관한 조약은 단 한 건도 작성되지 않았으며, 전쟁이나 무력 행사의 불법화가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론적인 측면에서의 검토나 국가 실행의 실증적 분석이 필요하다.[62]

5. 현대적 의의와 전망

현대 국제법과 조약에 따라 국가는 여전히 적 선박을 포획하여 재판소에 회부해 유죄 판결을 받고 판매할 수 있지만, 포획에 참여한 장교나 승무원에게 지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해상 나포 관행은 자기 이익에 기반한 국제법 수용의 동력이었으며, 규칙의 명확성과 보편성은 상업 거래의 확실성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노획이 단순한 약탈 행위와 유사했지만, 15세기 무렵에는 국가의 해상법이라는 규칙이 생겨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3] 후고 그로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노획 및 전리품 법에 대한 주석''(De Iure Praedae Commentarius)에서 바다의 자유 원칙을 세우고, 노획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했다.[4]

노획 법은 7년 전쟁과 미국 남북 전쟁 사이에 완전히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 전쟁,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유사 전쟁 등이 포함된다.[6] 앵글로-아메리카 노획 법의 많은 부분은 18세기 영국 선례, 특히 윌리엄 머레이 제1대 만스필드 백작의 ''1753년 법률 관계자의 보고서''에서 파생되었다.[7]

미국의 노획 법 권위자인 조셉 스토리 재판관은 1753년 보고서와 윌리엄 스콧 로드 스토웰의 판결에 크게 의존했다.[8][9] 앵글로-아메리카 관습법 판례가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설명이지만, 법원은 특정 국가의 법이나 판례가 아닌 국제 관습과 관례, 즉 만국 공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10]

해상 노획으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는데, 미국 독립 전쟁 동안 미국 해군과 사략선의 노획금은 총 2400만달러에 달했고,[11] 1812년 전쟁에서는 4500만달러였다.[12]

노획 법은 존 애덤스, 조셉 스토리, 대니얼 웹스터, 리처드 헨리 다나 주니어 등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을 끌어들였다. 노획 사건은 유동적인 만국 공법에 따라 막대한 자금의 처리가 결정되었고, 관할권 및 선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이 제기되면서 당시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일례로, ''액티브'' 사건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 간의 관할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 30년이나 걸렸다. 이 사건은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이어졌으며, 스탠리 매튜스 (판사)는 이를 "사법 재판소가 주 권한의 주장에 맞서 헌법의 우위를 강제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15]

5. 1. 사략 행위의 종식과 해군 전리품의 감소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남부 연합 사략선은 북부 연합 상선을 공격했다.[53] 북부 연합은 남부 연합의 사략 허가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해군이 남부 연합 선박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 헌법 제1조 8항에 따르면, 의회는 여전히 사략 허가서를 승인할 수 있지만, 지난 150년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07년 헤이그 협약의 조약 XII에 의해 국제 포획 재판소가 설립될 예정이었지만, 니카라과만이 비준하여 이 조약은 발효되지 못했다.[54]

사략선에 의한 상업 습격[55]은 미국 남북 전쟁으로 끝났지만, 해군 장교들은 잠시 더 전리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해군 장교들에게 전리품을 계속 지급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법률로 이 관행을 포기했다. 미국 포획 재판소는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자체적으로 압류한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SS ''Appam''호 사건에서 대법원은 독일 전리품에 대해 판결을 내렸는데, 이 선박은 Hampton Roads로 가져와 억류되었다.[56] 러시아, 포르투갈, 독일, 일본, 중국, 루마니아, 프랑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을 따라 해군 장교에게 더 이상 전리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14년 11월 9일, 영국프랑스 정부는 양국이 포획한 전리품에 대한 정부 관할권을 설정하는 협정에 서명했다.[57] 러시아 정부는 1915년 3월 5일에 이 협정에 동의했고,[58] 이탈리아 정부는 1917년 1월 15일에 따랐다.[59]

5. 2. 1948년 영국 전리품법



영국은 1948년 전리품법(Prize Act 1948)을 통해 해군 장교의 전리품 참여 자격을 공식적으로 종료했다.[60]

5. 3. 현대 국제법과 해상 나포

현대 국제법과 조약에 따라 국가는 여전히 적 선박을 포획하여 재판소에 회부해 유죄 판결을 받고 판매할 수 있지만, 포획에 참여한 장교나 승무원에게 지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해상 나포 관행은 자기 이익에 기반한 국제법 수용의 동력이었으며, 규칙의 명확성과 보편성은 상업 거래의 확실성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노획이 단순한 약탈 행위와 유사했지만, 15세기 무렵에는 국가의 해상법이라는 규칙이 생겨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3] 후고 그로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노획 및 전리품 법에 대한 주석''(De Iure Praedae Commentarius)에서 바다의 자유 원칙을 세우고, 노획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했다.[4]

노획 법은 7년 전쟁과 미국 남북 전쟁 사이에 완전히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 전쟁,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유사 전쟁 등이 포함된다.[6] 앵글로-아메리카 노획 법의 많은 부분은 18세기 영국 선례, 특히 윌리엄 머레이 제1대 만스필드 백작의 ''1753년 법률 관계자의 보고서''에서 파생되었다.[7]

미국의 노획 법 권위자인 조셉 스토리 재판관은 1753년 보고서와 윌리엄 스콧 로드 스토웰의 판결에 크게 의존했다.[8][9] 앵글로-아메리카 관습법 판례가 노획 법에 대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설명이지만, 법원은 특정 국가의 법이나 판례가 아닌 국제 관습과 관례, 즉 만국 공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10]

해상 노획으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는데, 미국 독립 전쟁 동안 미국 해군과 사략선의 노획금은 총 2400만달러에 달했고,[11] 1812년 전쟁에서는 4500만달러였다.[12]

노획 법은 존 애덤스, 조셉 스토리, 대니얼 웹스터, 리처드 헨리 다나 주니어 등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을 끌어들였다. 노획 사건은 유동적인 만국 공법에 따라 막대한 자금의 처리가 결정되었고, 관할권 및 선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이 제기되면서 당시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액티브'' 사건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 간의 관할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 30년이나 걸렸다. 이 사건은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이어졌으며, 스탠리 매튜스 (판사)는 이를 "사법 재판소가 주 권한의 주장에 맞서 헌법의 우위를 강제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15]

참조

[1] 웹사이트 prize ! Etymology, origin and meaning of prize by etymonline https://www.etymonli[...] 2023-11-14
[2] 서적 Black's Law Dictionary West Publishing Co. 1968
[3] 간행물 The Prize Game
[4] 간행물 De Iure Praedae Commentarius
[5] 간행물 De Iure Praedae Commentarius
[6] 간행물 The Prize Game
[7] 간행물 The Prize Game
[8] 문서
[9] 웹사이트 Upton, Francis H. https://catalog.loc.[...] 2024-01-16
[10] 간행물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11] 웹사이트 While the calculation is complex and inexact http://www.measuring[...]
[12] 간행물 A History of American Privateers
[13] 간행물 A History of American Privateers
[14] 간행물 The Journal of Gideon Olmsted
[15] 간행물 United States Reports, Cases Adjudged in the October Term, 1888 New York: Banks & Brothers 1889
[16] 간행물 Prize Cases Decided in the United States Supreme Court
[17]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18]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19] 간행물 The Prize Game
[20]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21] 간행물 Maritime Law and Prize
[22] 간행물 Maritime Law and Prize
[23] 간행물 The Prize Game
[24] 간행물 Law of Prize
[25]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26] 간행물 Maritime Law and Prize
[27] 간행물 Prize Case Decisions of the United States Supreme Court
[28]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29] 간행물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30] 간행물 Maritime Law and Prize
[31]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32] 간행물 Maritime Warfare and Prize
[33] 간행물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34] 간행물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35] 간행물 Brown v. United States
[36] 서적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37] 서적 The Prize Game
[38] 서적 The Prize Game
[39] 서적 The French Privateers
[40] 서적 The Prize Game
[41] 서적 The Prize Game
[42] 서적 Maritime Warfare and Prize
[43] 간행물 Not-Quite Justice After Never-Was War: A French Spoliation Case from the Quasi-War 2005-2006
[44] 간행물 Not-Quite Justice After Never-Was War
[45] 서적 The French Corsairs
[46] 서적 The Prize Game
[47] 서적 Diplomacy in an Age of Nationalism 1971
[48] 웹사이트 Laws of War : Declaration of Paris; April 16, 1856 https://avalon.law.y[...] Yale Law School 2022-09-30
[49] 서적 De verklaring van Parijs en Neutraliteit - Nederland en de ontwikkeling van het Internationaal Maritieme recht van 1856 tot de Eerste Wereldoorlog https://www.academia[...]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Faculteit der Letteren, Geschiedenis 2015-04
[50] 서적 A History of American Privateers
[51] 서적 De verklaring van Parijs en Neutraliteit - Nederland en de ontwikkeling van het Internationaal Maritieme recht van 1856 tot de Eerste Wereldoorlog https://www.academia[...]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Faculteit der Letteren, Geschiedenis 2015-04
[52] 문서 William L. Macy, proposals of the North-American Government,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5.01, inv. nr. 3465 'Law of the Seas in wartime, letter incoming September 3, 1856) NA, Min. BuZa 1856-09-03
[53] 서적 A History of American Privateers
[54] 웹사이트 Convention relative to the establishment of an International Prize Court https://verdragenban[...] Government of the Netherlands 2017-09-14
[55] 서적 History of American Privateers
[56] 서적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57] 웹사이트 Convention Relating to Prizes Captured during the Present European War http://www.fco.gov.u[...]
[58] 웹사이트 Text of Russian letter of accession http://www.fco.gov.u[...]
[59] 웹사이트 Text of Italian letter of accession http://www.fco.gov.u[...]
[60] 서적 A Treatise on the Law of Prize
[61] 서적 The Prize Game
[62] 논문 伝統的国際法における敵船・敵貨捕獲の正当化根拠(一) https://doi.org/10.1[...] 大阪大学 2014-07-31
[63] 논문 <研究ノート>海上保険における戦争危険の実際 https://doi.org/10.2[...] 公益財団法人 損害保険事業総合研究所 2012
[64] 논문 現代国際法における海上輸送規制法制の地位 https://doi.org/10.1[...] 同志社法學會 2020-05-31
[65] 웹사이트 海上法ノ要義ヲ確定スル為メ西暦千八百五十六年四月十六日巴里公会ニ於テ決定セシ宣言 https://laws.e-go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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