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모토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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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모토 유키오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20년에 태어나 2011년에 사망했다. 선수 시절에는 2루수와 1루수를 맡았으며,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54년부터 선수 겸 코치를 맡았고, 1955년에 은퇴했다. 감독으로서는 다이마이 오리온스, 한큐 브레이브스, 긴테쓰 버펄로스를 이끌며 총 8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그는 팀의 재건과 선수 육성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비운의 명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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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시모토 유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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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니시모토 유키오 |
| 원어 이름 | 西本 幸雄 |
| 로마자 표기 | Yukio Nishimoto |
| 출생일 | 1920년 4월 25일 |
| 출생지 |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 사망일 | 2011년 11월 25일 |
| 사망 장소 | 다카라즈카시, 효고현 |
| 신장 | 171 |
| 체중 | 64 |
| 타석 | 좌 |
| 수비 위치 | 1루수 |
| 투구 | 좌 |
| 선수 경력 | |
| 프로 입단 년도 | 1950년 |
| 첫 출장 | 1950년 |
| 마지막 출장 | 1955년 |
| 선수 소속팀 | 도요 금속 야하타 제철소 젠교토 벳푸호시노구미 마이니치 오리온스(1950 ~ 1955) |
| 감독 및 코치 경력 | |
| 감독 및 코치 소속팀 | 마이니치 오리온스/다이마이 오리온스 (1954 ~ 1960) 한큐 브레이브스 (1962 ~ 1973) 긴테쓰 버펄로스 (1974 ~ 1981) |
| 수상 및 업적 | |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1988년 |
| 헌액 방법 | 경기자 헌액 |
| 기타 | |
| 출신 학교 | 구제 와카야마 중학교 구제 릿쿄 대학 |
2. 선수 시절
西本 幸雄|니시모토 유키오일본어는 1950년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라는 양대 리그가 출범하면서 그해 퍼시픽 리그 팀인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9] 30세의 늦은 나이였지만 1번(또는 2번), 1루수 포지션을 확보하여 마이니치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였다.[9] 1952년에는 주장을 맡았고,[10] 1954년부터는 선수 겸임 코치를 맡았다.[10] 1955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10]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50년 | 마이니치 | 76 | 219 | 197 | 22 | 50 | 9 | 1 | 1 | 64 | 18 | 13 | 7 | 0 | 22 | 0 | 6 | 4 | .254 | .329 | .325 | .654 | ||
| 1951년 | 67 | 178 | 165 | 17 | 36 | 7 | 1 | 2 | 51 | 17 | 5 | 3 | 1 | 12 | 0 | 9 | 3 | .218 | .271 | .309 | .580 | |||
| 1952년 | 106 | 319 | 280 | 42 | 69 | 10 | 5 | 0 | 89 | 23 | 10 | 4 | 10 | 29 | 0 | 21 | 6 | .246 | .317 | .318 | .635 | |||
| 1953년 | 94 | 225 | 193 | 33 | 58 | 6 | 2 | 0 | 68 | 20 | 5 | 4 | 5 | 24 | 3 | 5 | 5 | .301 | .386 | .352 | .739 | |||
| 1954년 | 107 | 319 | 268 | 35 | 58 | 8 | 5 | 3 | 85 | 15 | 10 | 9 | 5 | 0 | 43 | 2 | 14 | 5 | .216 | .329 | .317 | .646 | ||
| 1955년 | 41 | 39 | 30 | 2 | 5 | 1 | 0 | 0 | 6 | 6 | 1 | 0 | 2 | 2 | 5 | 0 | 0 | 3 | 0 | .167 | .286 | .200 | .486 | |
| 통산 : 6년 | 491 | 1299 | 1133 | 151 | 276 | 41 | 14 | 6 | 363 | 99 | 44 | 27 | 23 | 2 | 135 | 0 | 5 | 58 | 23 | .244 | .327 | .320 | .647 | |
2. 1. 유년기 및 아마추어 시절
니시모토 유키오는 1920년 와카야마현에서 니혼 칸교 은행 와카야마 지점장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47] 1933년 야구 명문 학교였던 구제 현립 와카야마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당시 야구부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포기할 각오가 필요'했기 때문에 입단을 포기하고 3학년 때 럭비부에 소속됐다.[48] 그러나 4학년 가을, 5학년생 7명이 은퇴하여 5명 밖에 남지 않았던 야구부에 입단하여 2루수와 1루수를 맡았고, 때로는 구원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49]1937년 여름, 고시엔 대회 기와 대회 예선 결승에서 시마 세이이치가 이끄는 구제 와카야마현립 가이소 중학교에 패해 고시엔 대회 진출에 실패했다.[50] 시마 세이이치는 훗날 더불어민주당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된다.
1938년 구제 릿쿄 대학에 진학, 당시 릿쿄 대학 야구부에는 감독이 없어 이후 실질적인 감독 역할도 맡았다.[51] 1943년 5월, 문부성의 지시로 리그전이 중지되자 스스로 제의하여 구제 메이지 대학과의 대외 경기를 주도했다.[51]
같은 해 가을, 학생 징집에 의해 소집되어 육군 중위로 복무했으며, 중국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에는 도요 금속, 야하타 제철소, 젠교토를 거쳐 릿쿄 대학 후배인 나가토시 유키치의 권유로 벳푸호시노구미에 이적했다. 벳푸호시노구미 시절인 1949년에는 감독 겸 선수(1루수, 3번 타자)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마이니치 오리온스)
西本 幸雄일본어는 1950년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라는 양대 리그가 출범하면서 그해 퍼시픽 리그 팀인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9] 프로에 입단했을 때는 이미 30세였지만, 선수로서 전성기는 지났어도 1번(또는 2번), 1루수 포지션을 확보하여 마이니치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였다.[9] 1952년에는 주장을 맡았고,[10] 1954년부터는 선수 겸임 코치를 맡았다.[10] 1955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10]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50년 | 마이니치 | 76 | 219 | 197 | 22 | 50 | 9 | 1 | 1 | 64 | 18 | 13 | 7 | 0 | 22 | 0 | 6 | 4 | .254 | .329 | .325 | .654 | ||
| 1951년 | 67 | 178 | 165 | 17 | 36 | 7 | 1 | 2 | 51 | 17 | 5 | 3 | 1 | 12 | 0 | 9 | 3 | .218 | .271 | .309 | .580 | |||
| 1952년 | 106 | 319 | 280 | 42 | 69 | 10 | 5 | 0 | 89 | 23 | 10 | 4 | 10 | 29 | 0 | 21 | 6 | .246 | .317 | .318 | .635 | |||
| 1953년 | 94 | 225 | 193 | 33 | 58 | 6 | 2 | 0 | 68 | 20 | 5 | 4 | 5 | 24 | 3 | 5 | 5 | .301 | .386 | .352 | .739 | |||
| 1954년 | 107 | 319 | 268 | 35 | 58 | 8 | 5 | 3 | 85 | 15 | 10 | 9 | 5 | 0 | 43 | 2 | 14 | 5 | .216 | .329 | .317 | .646 | ||
| 1955년 | 41 | 39 | 30 | 2 | 5 | 1 | 0 | 0 | 6 | 6 | 1 | 0 | 2 | 2 | 5 | 0 | 0 | 3 | 0 | .167 | .286 | .200 | .486 | |
| 통산 : 6년 | 491 | 1299 | 1133 | 151 | 276 | 41 | 14 | 6 | 363 | 99 | 44 | 27 | 23 | 2 | 135 | 0 | 5 | 58 | 23 | .244 | .327 | .320 | .647 | |
西本幸雄일본어는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마이니치 오리온스에서 선수 겸 코치를 맡았고, 1956년부터 1958년까지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와 다이마이 오리온스의 2군 감독을 역임하며 젊은 선수 육성에 힘썼다. 1959년에는 다이마이 오리온스 1군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다. 1960년에는 벳토 가오루 감독의 뒤를 이어 다이마이 오리온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미사일 타선을 이끌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패배한 후 구단주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69]
3. 지도자 경력
1962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1군 코치로 부임했고, 1963년부터 1973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의 감독을 맡았다. 당시 약체였던 한큐를 재건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고, 그 결과 1967년 한큐는 창단 32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니시모토는 1973년까지 한큐를 이끌며 5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는 긴테쓰 버펄로스의 감독을 맡아 약체였던 팀을 강팀으로 만들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3. 1. 마이니치·다이마이 오리온스 (1956~1960)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마이니치 오리온스 2군 감독을 맡아 젊은 선수 육성에 힘썼다. 1959년에는 1군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다. 1960년, 벳토 가오루 감독의 후임으로 다이마이 오리온스 감독에 취임하여 미사일 타선을 앞세워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패배한 뒤 구단주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69]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3. 1. 1. 다이마이 감독 사임 배경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다이마이 오리온스는 다이요 웨일스에게 패배했다. 특히 2차전에서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8회에 시도한 스퀴즈 번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큰 논란이 되었다.[69] 당시 다이마이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는 이 작전에 대해 "미사일 타선을 자랑하는 다이마이가 결정적인 기회에 번트라는 바보같은 작전을 내놓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라며 강하게 비난했다.[69]이에 니시모토는 "작전은 감독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임도 제가 집니다. 그러나 무책임한 평론가가 사후에 말하는 것에 따라 뭔가를 듣는 것은 유감스럽습니다!"라고 반박하며 나가타와 갈등이 심화되었다.[69] 결국 니시모토는 "바보 같은 놈!!"이라는 나가타의 격한 발언에 "바보 같은 놈이라니, 뭡니까, 당장 철회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대응했지만, 나가타는 사과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69]
결국 일본 시리즈는 다이마이의 4연패로 끝났고, 니시모토는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해임에 가까운 형태였다.[69] 당시 다이마이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치조는 나가타가 마이니치 신문 계열 구단 간부들이 니시모토를 온천에 '격리'시켜 만나지 못하게 한 것에 분노하여, 마이니치 측 임원들을 물러나게 하고 니시모토도 함께 퇴임시켰다고 회고했다.[69]
그러나 니시모토는 1967년 좌담회에서 아오키의 주장을 부인하며, 일본 시리즈 후 며칠간 집에 돌아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격리'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70] 그는 후원자 모임에서 사과의 뜻을 전하려 했으나, 이미 감독과 스태프가 결정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70] 니시모토는 2001년 인터뷰에서 "해임된 건지 나 자신 쪽에서 그만둔 건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회고했다.[71]
3. 2. 한큐 브레이브스 (1963~1973)
1962년 니시모토 유키오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코치로 취임했다. 당시 한큐는 '회색 시대'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약체 구단이었다. 오너인 고바야시 요네조로부터 "취미로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디 브레이브스에서 회색 이미지를 없애주십시오"라는 간청을 받고 취임했다.[40] 1963년, 니시모토는 도쿠라 가쓰키의 뒤를 이어 한큐의 감독으로 승격하여 약체 팀을 재건하기 위해 캐치볼 방식부터 다시 시작하는 등 엄격한 훈련 자세로 임했다. 취임 첫해에는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이후 2위, 4위, 5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젊은 선수들의 성장이 보였지만 결과는 따라주지 않았다.[40]1966년 시즌 후, 니시모토는 구단 사장인 오카노 유타카(후에 퍼시픽 리그 회장)에게 "이렇게 지면 그만두는 게 좋을까요?"라고 묻고 잔류를 권유받았다.[40] 그러나 오카노는 한편으로 코노 아키테루를 중심으로 한 유력 선수들을 자주 자택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40] 후쿠모토 유타카는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오카노가 헤드 코치인 아오타 노보루에게 감독을 교체하고 코노를 헤드 코치로 하는 방침을 결정했다고 적고 있다.[40]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니시모토는 그해 가을 캠프 직전에 선수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를 실시하여, 구단 고위층과 선수단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가을 연습 마지막 날 우연히 시작된 니시모토와 선수들의 1대1 타격 연습에는 점차 주력 선수들도 참여하게 되었고, "니시모토 도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0] 이 연습도 효과를 거두어, 이듬해 1967년, 한큐는 구단 창설 32년 만에 염원하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한큐는 니시모토가 1973년을 끝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리그 우승 5차례를 이끌면서 제1기 황금 시대에 들어갔다.
한편, 전철 본사는 이 사건(감독 재신임 투표 사건)을 교훈 삼아 구단과의 의사소통을 개선하기 위해, 그동안 선수 출신자를 배치했던 팀 매니저에 전철에서 파견된 인물을 임명하는 방침을 채택했다.[42]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 1963년 | 한큐 | 6위 | 150 | 57 | 92 | 1 | .383 | 30.5 | 86 | .228 | 3.69 | 43세 |
| 1964년 | 2위 | 150 | 79 | 65 | 6 | .549 | 3.5 | 141 | .245 | 3.01 | 44세 | |
| 1965년 | 4위 | 140 | 67 | 71 | 2 | .486 | 21.5 | 130 | .234 | 3.33 | 45세 | |
| 1966년 | 5위 | 134 | 57 | 73 | 4 | .438 | 22 | 89 | .229 | 3.31 | 46세 | |
| 1967년 | 1위 | 134 | 75 | 55 | 4 | .577 | - | 143 | .251 | 2.79 | 47세 | |
| 1968년 | 1위 | 134 | 80 | 50 | 4 | .615 | - | 154 | .242 | 2.92 | 48세 | |
| 1969년 | 1위 | 130 | 76 | 50 | 4 | .603 | - | 154 | .254 | 3.18 | 49세 | |
| 1970년 | 4위 | 130 | 64 | 64 | 2 | .500 | 16.5 | 116 | .244 | 3.57 | 50세 | |
| 1971년 | 1위 | 130 | 80 | 39 | 11 | .672 | - | 166 | .273 | 3.17 | 51세 | |
| 1972년 | 1위 | 130 | 80 | 48 | 2 | .625 | - | 167 | .260 | 3.19 | 52세 | |
| 1973년 | 2위 | 130 | 77 | 48 | 5 | .616 | 3위·1위 | 151 | .270 | 3.30 | 53세 | |
| 통산 : 11년 | 1432 | 732 | 621 | 49 | .541 | colspan="5"| | ||||||
# 1966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63년·1964년은 150경기제
# 1965년은 140경기제
#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제 도입으로 인해 승차에서의 왼쪽은 전기 순위, 오른쪽은 후기 순위를 표기
3. 2. 1. 감독 재신임 투표 사건
1966년 시즌 후, 니시모토는 선수들에게 자신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실시했다. 니시모토는 선수 전원이 자신을 신뢰하는지 확인하고자 '감독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은 ○, 따를 수 없는 사람은 ×'를 기재하도록 했다.[40]투표 결과는 ○가 32표, ×가 11표, 백지 4표였다.[40][41] '×가 한 표라도 있으면 사임한다'고 결정했던 니시모토는 이 결과에 책임을 지고 고바야시 요네조 구단주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40]
당시 주력 선수들은 니시모토의 엄격한 훈련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에이스였던 요네다 데쓰야는 은퇴 후 "니시모토는 매우 곤란한 감독으로, 연습 태도가 나쁘거나 경기 전에 술을 마시고 숙취가 있는 상태에서 경기에 나가면 설령 주력 선수라도 기용하지 않았다. 시합에서의 활약이 월급에 반영되는 우리로서는 비록 숙취가 있는 상태라고 해도 경기에 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니시모토를 배척할 의도는 없었다. 니시모토가 사임에 집착한 배경에는 구단 프런트에 대한 불신감이 있었다. 니시모토는 주력 선수들이 프런트와의 술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을 알고 있었고, 일부 프런트는 아오타 노보루 수석 코치를 차기 감독으로 밀고 있었다.[40]
고바야시 구단주는 니시모토의 사임을 만류하며 "한큐의 재건은 니시모토 이외에는 없다"고 설득했다. 결국 니시모토는 사임을 철회하고, "선수 개인의 의지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수들을 이끌어나갈 수밖에 없다"라는 결의를 다졌다.[40]
이듬해인 1967년, 한큐는 구단 창설 32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3. 3. 긴테쓰 버펄로스 (1974~1981)
西本幸雄일본어는 1974년 긴테쓰 버펄로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약체였던 팀을 강팀으로 육성했다. 1975년에는 하다 고이치 구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 해 후기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979년과 1980년에는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1981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3. 3. 1. 하다 고이치 구타 사건
1975년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도중, 긴테쓰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하다 고이치를 구타한 사건이다.[43]그해 긴테쓰는 한큐의 신인 야마구치 다카시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니시모토는 경기 전 선수들에게 "초구는 치지 마라. 초구가 볼이면 2구째도 치지 마라"라는 지시를 내렸다.[43] 그러나 하다는 초구 높은 스트라이크를 쳤다가 헛스윙을 했고, 결국 3루 땅볼로 아웃되었다.[43]
하타의 실수에 분노한 니시모토는 경기 중임에도 하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43] 사실 하다는 경기 진행을 위해 웨이팅 서클에 있었기 때문에 니시모토의 지시를 듣지 못했다.[43] 하다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반항한 적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니시모토는 나중에 나시다 마사타카로부터 "하다는 그 때 감독의 지시를 듣지 못했다"라는 지적을 받고 '아차!'하고 느꼈지만, 하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는 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다는 것이 니시모토의 입장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니시모토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문기자는 볼을 치지 마라, 높은 거는 치지 마라라는 지시였다고 기사에 썼었는데 그렇지 않다"라며 부인했다. 그는 '절대로 초구는 치지 마라'라는 단순한 지시였기 때문에 하다를 때렸다고 밝혔다. 또한 야마구치에게 고전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데이터를 분석하면 1구째, 2구째의 볼 타구에 손을 대서 카운트를 나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설명했다.
긴테쓰는 그해 후기 우승을 차지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한큐에게 패했다.
4. 감독·지도자로서의 평판
니시모토 유키오는 20년간 감독으로 재임하며 통산 8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해 '비운의 명장'으로 불렸다.[21][22] 선수 육성에 뛰어났고,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특히 한큐 브레이브스와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팀의 기반을 다지고 우승을 이끈 업적은 높이 평가받는다. 히로오카 다쓰로, 노무라 가쓰야, 요시다 요시오 등 많은 야구인들이 니시모토를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리더십으로 선수들의 존경을 받았다.
4. 1. 에피소드
- 미하라 감독 방송 출연 무산 사건
1960년 일본 시리즈 개막 직전, 니시모토와 미하라 오사무 다이요 웨일스 감독의 대담이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하라 감독이 나타나지 않아 니시모토는 매우 화를 냈다.[73]
- 좌완 투수의 2루수
일반적으로 좌완 투수는 1루 송구 동작의 어려움 때문에 1루수를 제외한 내야수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시모토는 선수 시절 좌완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2루수로 출전한 경험이 있다. 1951년 8월 16일 니시테쓰 라이온스전에서 니시모토는 9회 수비 때 2루를 맡겠다고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에게 제안했다. 실제로 2루 수비를 볼 기회는 없었지만, 니시모토가 프로에서 1루 외의 포지션을 맡은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49] 프로 야구 역사상 좌완 투수가 2루수를 맡은 것은 니시모토 외에 기토 가즈오, 야마다 덴까지 단 세 명뿐이다.
- 나가타 오너와의 갈등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니시모토는 다이마이 오리온스를 이끌고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이끄는 다이요 웨일스에게 패했다. 특히 2차전에서 1사 만루 상황에 스크위즈 플레이를 지시했다가 실패한 것을 두고 나가타 마사이치 구단주와 크게 대립했다. 나가타는 "미사일 타선을 자랑하는 다이마이가 번트 같은 작전을 쓴다"며 비난했고, 니시모토는 "작전은 감독이 결정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결국 니시모토는 팀을 떠나게 되었다.
- 킨테츠 감독 시절
1979년 일본 시리즈 7차전, 4-3으로 앞서던 9회말 무사 만루 상황에서 에나쓰 유타카 투수에게 스크위즈 번트를 간파당하며 4-3으로 패배하였다.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1979년) ※감독으로서 수상[26]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 헌액(1988년)[26]
6. 기타
西本 幸雄|にしもと ゆきお일본어는 20년 동안 감독 생활을 하면서 8차례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해 ‘'''비운의 명장'''’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니시모토 본인은 이러한 평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60]
3개 팀을 우승으로 이끈 감독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니시모토, 미하라 오사무, 호시노 센이치뿐이다. 니시모토는 모두 퍼시픽 리그 팀을 지휘하며 현역 시절을 포함해 퍼시픽 리그에서만 야구 인생을 보냈다. 한큐와 긴테쓰 시절에는 선수 육성에 힘쓰며 약소팀을 강팀으로 이끌었다. 니시모토처럼 2개 팀에서 팀의 토대를 쌓아 우승시킨 감독은 드물다.[61]
1978년 시즌 후 감독 사임을 표명했지만 선수들의 만류로 철회했고, 1979년과 1980년에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1981년 긴테쓰-한큐 최종전에서는 양팀 선수들로부터 헹가레를 받았다.[62]
히로오카 다쓰로는 니시모토의 육성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노무라 가쓰야도 니시모토를 대감독으로 존경하며, 요시다 요시오는 니시모토를 명장, 명코치라고 평가했다.[64] 우에다 도시하루는 니시모토의 열정과 책임감, 인내력을 높이 평가했다.[65][66]
니시모토의 긴테쓰 감독 시절 코치였던 오기 아키라는 긴테쓰 감독 취임 기자회견에서 “미하라에게서 지혜를 배우고 니시모토에게서 열정을 배웠다. 두 사람을 합친 것 같은 야구를 하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다.[67]
; 사회인 시대
- 도요 금속
- 야하타 제철소
- 젠교토
- 벳푸호시노구미
; 프로팀 경력
- 마이니치 오리온스(1950년 ~ 1955년)
; 선수 시절 상세 기록
|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50년 | 마이니치 | 76 | 219 | 197 | 22 | 50 | 9 | 1 | 1 | 64 | 18 | 13 | 7 | 0 | 22 | 0 | 6 | 4 | .254 | .329 | .325 | .654 | ||
| 1951년 | 67 | 178 | 165 | 17 | 36 | 7 | 1 | 2 | 51 | 17 | 5 | 3 | 1 | 12 | 0 | 9 | 3 | .218 | .271 | .309 | .580 | |||
| 1952년 | 106 | 319 | 280 | 42 | 69 | 10 | 5 | 0 | 89 | 23 | 10 | 4 | 10 | 29 | 0 | 21 | 6 | .246 | .317 | .318 | .635 | |||
| 1953년 | 94 | 225 | 193 | 33 | 58 | 6 | 2 | 0 | 68 | 20 | 5 | 4 | 5 | 24 | 3 | 5 | 5 | .301 | .386 | .352 | .739 | |||
| 1954년 | 107 | 319 | 268 | 35 | 58 | 8 | 5 | 3 | 85 | 15 | 10 | 9 | 5 | 0 | 43 | 2 | 14 | 5 | .216 | .329 | .317 | .646 | ||
| 1955년 | 41 | 39 | 30 | 2 | 5 | 1 | 0 | 0 | 6 | 6 | 1 | 0 | 2 | 2 | 5 | 0 | 0 | 3 | 0 | .167 | .286 | .200 | .486 | |
| 통산 : 6년 | 491 | 1299 | 1133 | 151 | 276 | 41 | 14 | 6 | 363 | 99 | 44 | 27 | 23 | 2 | 135 | 0 | 5 | 58 | 23 | .244 | .327 | .320 | .647 | |
; 감독 시절 상세 기록
| 년도 | 팀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나이 | |
|---|---|---|---|---|---|---|---|---|---|---|---|---|---|
| 1960년 | 1960년(쇼와 35년) | 다이마이(大毎) | 1위 | 133 | 82 | 48 | 3 | .631 | ― | 100 | .262 | 2.66 | 40세 |
| 1963년 | 1963년(쇼와 38년) | 한큐(阪急) | 6위 | 150 | 57 | 92 | 1 | .383 | 30.5 | 86 | .228 | 3.69 | 43세 |
| 1964년 | 1964년(쇼와 39년) | 2위 | 150 | 79 | 65 | 6 | .549 | 3.5 | 141 | .245 | 3.01 | 44세 | |
| 1965년 | 1965년(쇼와 40년) | 4위 | 140 | 67 | 71 | 2 | .486 | 21.5 | 130 | .234 | 3.33 | 45세 | |
| 1966년 | 1966년(쇼와 41년) | 5위 | 134 | 57 | 73 | 4 | .438 | 22 | 89 | .229 | 3.31 | 46세 | |
| 1967년 | 1967년(쇼와 42년) | 1위 | 134 | 75 | 55 | 4 | .577 | ― | 143 | .251 | 2.79 | 47세 | |
| 1968년 | 1968년(쇼와 43년) | 1위 | 134 | 80 | 50 | 4 | .615 | ― | 154 | .242 | 2.92 | 48세 | |
| 1969년 | 1969년(쇼와 44년) | 1위 | 130 | 76 | 50 | 4 | .603 | ― | 154 | .254 | 3.18 | 49세 | |
| 1970년 | 1970년(쇼와 45년) | 4위 | 130 | 64 | 64 | 2 | .500 | 16.5 | 116 | .244 | 3.57 | 50세 | |
| 1971년 | 1971년(쇼와 46년) | 1위 | 130 | 80 | 39 | 11 | .672 | ― | 166 | .273 | 3.17 | 51세 | |
| 1972년 | 1972년(쇼와 47년) | 1위 | 130 | 80 | 48 | 2 | .625 | ― | 167 | .260 | 3.19 | 52세 | |
| 1973년 | 1973년(쇼와 48년) | 2위 | 130 | 77 | 48 | 5 | .616 | 전기 3위, 후기 1위 | 151 | .270 | 3.30 | 53세 | |
| 1974년 | 1974년(쇼와 49년) | 킨테츠(近鉄) | 5위 | 130 | 56 | 66 | 8 | .459 | 전기 5위, 후기 4위 | 131 | .230 | 3.63 | 54세 |
| 1975년 | 1975년(쇼와 50년) | 2위 | 130 | 71 | 50 | 9 | .587 | 전기 3위, 후기 1위 | 115 | .246 | 3.09 | 55세 | |
| 1976년 | 1976년(쇼와 51년) | 4위 | 130 | 57 | 66 | 7 | .463 | 전기 5위, 후기 4위 | 102 | .245 | 3.04 | 56세 | |
| 1977년 | 1977년(쇼와 52년) | 4위 | 130 | 59 | 61 | 10 | .492 | 전기 3위, 후기 6위 | 92 | .245 | 3.31 | 57세 | |
| 1978년 | 1978년(쇼와 53년) | 2위 | 130 | 71 | 46 | 13 | .607 | 전기 2위, 후기 2위 | 115 | .266 | 3.21 | 58세 | |
| 1979년 | 1979년(쇼와 54년) | 1위 | 130 | 74 | 45 | 11 | .622 | 전기 1위, 후기 2위 | 195 | .285 | 3.70 | 59세 | |
| 1980년 | 1980년(쇼와 55년) | 1위 | 130 | 68 | 54 | 8 | .557 | 전기 2위, 후기 1위 | 239 | .290 | 4.96 | 60세 | |
| 1981년 | 1981년(쇼와 56년) | 6위 | 130 | 54 | 72 | 4 | .429 | 전기 6위, 후기 4위 | 149 | .253 | 4.10 | 61세 | |
| 통산: 20년 | 2665 | 1384 | 1163 | 118 | .543 | A클래스 12회, B클래스 8회 | |||||||
; 등번호
- '''5''' (1950년 ~ 1955년)
- '''50''' (1956년, 1960년, 1962년 ~ 1971년)
- '''60''' (1957년 ~ 1958년)
- '''51''' (1959년)
- '''65''' (1972년 ~ 1973년)
- '''68''' (1974년 ~ 1981년)
; 방송 출연
- KTV 프로야구 중계〔서력〕(간사이TV)
- 프로야구 뉴스(후지TV)
- 제18회 NHK 홍백가합전(1967년, NHK 종합·라디오 제1) - 심사위원
; CM 출연
- 가와쿠(일본 요리점)
- 총리부「정부 홍보·60세 정년제 촉진 캠페인」
- 시바우라
- 후루카와 기계금속
- 콘택 600(비염용 감기약)
- 메이지 파이&쿠키(1982년)
- 킨키닛폰 투어리스트
- 베츠토라 가마보코
; 라디오 출연
- 닛폰방송 쇼업나이터(닛폰방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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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Hall of Fame manager Nishimoto dies at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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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ily Yomi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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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幸雄さん生誕100年…阪急教え子の福本豊氏と加藤秀司氏が思い出語る(上)「何してんねん」殴られた でも―優し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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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と川上 ともに大正9年生まれの一徹 虎番疾風録番外編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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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監督招聘…近鉄の勇気と阪急の英断 虎番疾風録其の四(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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猛虎水滸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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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幸雄が阪神の監督だったら プロ野球「もしも、もしも・・・の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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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負ける覚悟」求めた米田哲也コーチ/吉田義男氏編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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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ガース血風録 猛虎水滸伝 能力への失望・ついに「中村解任」
https://www.sankei.c[...]
20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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暗黒時代の阪神 メジャーの大物や西本幸雄氏に監督打診した
https://www.news-pos[...]
202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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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運の名将”西本幸雄氏、死去…91歳心不全
http://hochi.yomiuri[...]
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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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急、近鉄などで監督…西本幸雄氏が死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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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西本氏の葬儀・告別式は29日兵庫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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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幸雄さん通夜 山田氏が福本氏が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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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氏告別式で梨田氏「愛情やぬくも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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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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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ほかに水原茂・藤本定義・広岡達朗・野村克也・仰木彬・王貞治・梨田昌孝の7人
[28]
문서
他の複数球団優勝監督のうち、就任前年の成績がいずれもBクラスだったのは広岡達朗・野村克也・星野仙一の3人。
[29]
서적
野球殿堂2012 The Baseball 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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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0]
문서
自らが近鉄監督になった時には西本の着けていた背番号68とした。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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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涙!ナニワ野球伝説
朝日新聞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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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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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永久保存版]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1936-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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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小僧 2月号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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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鉄バファローズ球団史195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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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全保存版] 草創期から支え続けた147人の監督列伝 日本プロ野球昭和の名将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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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だけの話 プロ野球どいつも、こいつ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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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野球史再発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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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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伝説のプロ野球選手に会いに行く
白夜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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敗れざる者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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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40]
서적
阪急ブレーブス 光を超えた影法師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41]
Youtube
⑤【優勝の裏側】球団創立以来初のリーグ優勝!監督が辞めるかもしれない前代未聞の大事件【長池徳士】【高橋慶彦】【広島東洋カープ】【プロ野球OB】
https://www.youtube.[...]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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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急ブレーブス 勇者たちの記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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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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伝説の剛速球投手 君は山口高志を見た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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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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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憶の球団 近鉄バファローズ 猛牛伝説の真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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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元近鉄・羽田耕一氏が三田学園監督就任
https://www.daily.co[...]
2015-02-02
[46]
문서
2013년에 星野仙一가 東北楽天ゴールデンイーグル스를 이끌고 우승을 거머쥐었고, 3개 팀에서 감독으로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다른 2개 팀은 중일 (1988년, 1999년) · 한신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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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 역대 감독의 ‘채용력과 인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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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보존판〉 초창기에서 계속 지탱해 온 147명의 감독 열전 - 일본 프로 야구 쇼와 시대(1926 ~ 1989)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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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西本氏の葬儀・告別式は29日兵庫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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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幸雄さん通夜 山田氏が福本氏が涙
http://www.nikkans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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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ikkans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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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도에이 플라이어스를 이끌었던 미즈하라 시게루,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세이부 라이온스를 지휘한 히로오카 다쓰로, 긴테쓰 버펄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이끌었던 오기 아키라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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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매거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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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긴테쓰 감독이 됐을 때에는 니시모토가 입고 있었던 등번호를 68번으로 하였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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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눈물! 나니와 야구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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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영구보존판) - 새로 태어나는 용자의 기억 1936-1988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1
[66]
서적
야구 꼬마 2월호 2012
뱌쿠야쇼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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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긴테쓰 버펄로스 구단사 1950-2004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2
[68]
서적
〈완전보존판〉 초창기에서 계속 지탱해 온 147명의 감독 열전 - 일본 프로 야구 쇼와 시대(1926 ~ 1989)의 명장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2
[69]
서적
여기서만 하는 얘기: 프로 야구 이놈도 저놈도…
북맨사
1989
[70]
서적
프로야구사 재발굴(6)
베이스볼 매거진사
1987
[71]
서적
전설의 프로 야구 선수를 만나러 가다
뱌쿠야쇼보
2008
[72]
서적
패배하지 않는 자들
분슌분코
1979
[73]
문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3개 구단 우승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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