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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바라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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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바라 마코토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1962년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여 포수, 1루수, 3루수를 거쳐 1980년까지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198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통산 330홈런과 1172타점을 기록했으며, 1975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다이요, 요미우리, 히로시마 등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했고, 야구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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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바라 마코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마쓰바라 마코토
로마자 표기Makoto Matsubara
가나 표기まつばら まこと
한자 표기松原 誠
별칭(미스터 웨일스)
출생일1944년 1월 13일
출생지사이타마현 한노시 (구 이루마군 이노정)
2017년 11월 23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017년 11월 23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선수 정보
포지션1루수, 3루수, 외야수, 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프로 입단 연도1962년
첫 출장1962년 4월 15일
마지막 경기1981년 10월 20일
신장184
체중81
타율.276
홈런331
안타2,095
타점1,180
클럽 경력
선수 경력다이요 웨일스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62년–198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년)
코치 경력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82년–198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5년–1991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01년–2003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04년)
기타 정보
고등학교사이타마현립 한노 고등학교

2. 선수 시절

사이타마 현립 한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다이요 웨일스포수로 입단했으나, 포수로서의 능력에 한계를 느껴 1963년에 1루수로 전향했다. 1966년부터 주전으로 활약, 1967년에는 3루수로 전향했다.

1970년에는 시즌 30홈런을 기록, 이후 8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장타력을 갖춘 간판 타자로 침체된 팀의 4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1971년 1루수로 다시 전향했고, 1974년에는 처음으로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타격 부문 타이틀은 없었지만, 오랜 기간 팀의 리더로서 선수들을 이끌었다. 1980년 4월 2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1회말에 하세가와 쓰토무로부터 좌월 3점 홈런을 때려내며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19]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를 사단법인화하여 선수회장으로서 선수들의 선봉에서 구단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구단으로부터 기피 대상으로 지목되어 1981년 고가 마사아키와의 맞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했다. 이 때 “요미우리에 이적해도 기쁘지 않다. 다이요에서 우승하는 것이 목표였다”라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렸다. 같은 해 요미우리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경험했고(닛폰햄 파이터스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9회말에 대타로 등장, 마무리 투수였던 에나쓰 유타카로부터 홈런을 때려냈다), 그 해를 끝으로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2. 1. 다이요 웨일스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62년 ~ 1980년)

1962년 다이요 웨일스포수로 입단했다. 그러나 포수로서의 능력에 한계를 느껴 1963년에는 1루수로 전향했고, 1966년부터는 주전을 차지해 1967년에는 3루수로 전향했다.[3]

1970년에는 시즌 30개의 홈런을 날려 그 해부터 8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등 장타력 있는 간판 타자로서 침체를 겪고 있던 팀의 4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1971년 1루수로 재전향했고 1974년에는 처음으로 3할 대의 타율을 남겼다. 타격 부문 타이틀에는 인연이 없었지만 긴 세월에 걸쳐 팀의 리더로서 선수를 이끌었다. 1980년 4월 2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1회말에 하세가와 쓰토무로부터 좌월 3점 홈런을 때려내며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19]

1962년에 다이요 웨일스에 포수로 입단했다. 1년 차에는 4월 15일 주니치전(가와사키)에서 9회말 시마노 마사타카의 대타로 첫 출전했고, 5월 8일 주니치전(나고야)에 8번 타자·포수로 첫 선발 출전을 하여 7회초에 반도 히데지를 상대로 첫 안타를 쳤다. 같은 해에는 5경기에 선발 마스크를 썼다.[3]

1963년부터 내야수를 겸했다.

1964년에는 4월 12일 고쿠테쓰전(도쿄)에서 2회초에 가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적시 2루타를 쳐서 첫 타점, 5월 6일 한신전(고시엔)에서 3회초에 무라야마 미노루를 상대로 좌중간 솔로 홈런을 쳐서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와모토 다카시 코치의 지도로 주력 타자로 성장했다.[4]

1965년에는 중견수로 자리를 옮긴 곤도 가즈히코의 후계자로 1루수 자리를 꿰차고 75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1966년에는 첫 규정 타석을 채웠고, 리그 9위의 타율 .294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같은 해부터 1972년까지 올스타전에 7년 연속 출전했다.

1967년에는 딕 스튜어트가 입단했기 때문에, 시즌 전반에는 외야수로 출전했고, 6월부터는 3루수를 겸하며 구와타 다케시와 번갈아 기용되었다.

1968년에는 구와타가 감독인 벳토 가오루와의 불화로 인해 주전에서 제외되었고, 결과적으로 3루수에 정착했다.

1969년에는 개막부터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1970년에는 9월 2일 히로시마전(가와사키)에서 7회초에 시라이시 시즈오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쳐서 100홈런을 달성했고, 시즌에서도 30홈런을 기록했으며, 같은 해부터 8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장타력이 있는 슬러거로서 부진했던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했다.

1971년에 1루수로 다시 전향했고, 시즌 초에는 왼쪽 손목을 골절했지만, 극심한 고통을 1년 동안 견뎠다.[3] 8월 29일 요미우리전(고라쿠엔)에 5번·3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역대 153번째 1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1972년에 롯데에서 이적해 온 에토 신이치를 참고하여 타격을 개선했고, 8월 31일 요미우리전(고라쿠엔)에서 1회초에 호리우치 쓰네오를 상대로 우월 선제 3점 홈런을 쳐서 역대 34번째 150홈런을 달성했다.

1973년 4월 22일 요미우리전(가와사키)에서 8회말에 오가와 구니카즈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쳐서 역대 82번째 1000안타를 기록했다.

1974년에는 올스타전에 2년 만에 출전하게 되었고, 1976년까지 3년 연속 출전을 했다. 1974년에는 10월 14일 야쿠르트전(가와사키)에서 5회말에 아이다 테루오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쳐서 역대 20번째 200홈런을 달성했고, 리그 3위의 타율 .317로 처음으로 3할을 넘었다. 타격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팀 리더로서 선수를 이끌었다. 같은 해부터는 첫 최다 안타를 기록했고, 1975년 올스타전 제2전에서는 7회에 무라타 조지를 상대로 대타 역전 2점 홈런을 쳐서 MVP에 빛났다. 같은 해 8월 21일 야쿠르트전(미야기)에 3번·1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역대 49번째 15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1976년에는 6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 동안 한신전(가와사키)에서 4타수 연속 홈런을 쳤다.[3] 7월 11일 히로시마전(히로시마 시민)에서 8회초에 사에키 가즈시를 상대로 좌전 안타를 쳐서 역대 31번째 1500안타, 8월 17일 주니치전(나고야)에서 4회초에 도조 데루를 상대로 좌월 솔로 홈런을 쳐서 역대 12번째 250홈런을 달성했다.

1977년에는 자기 최고인 34홈런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홈 구장이 좁은 가와사키 구장에서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옮겨져 홈런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여 타율을 노리는 쪽으로 전환했다.[3] 6월 8일 히로시마전(요코하마)에서 1회말에 다카하시 사토시를 상대로 좌익선상 2루타를 쳐서 역대 12번째 1000타점, 7월 6일 야쿠르트전(요코하마)에서는 2회말에 스즈키 고지로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쳐서 역대 11번째 300홈런을 달성했다. 자기 최고로 두 번째 3할을 넘는 리그 3위의 타율 .329를 기록했고, 당시 센트럴 리그 기록인 45개의 2루타를 달성했다.[3][5] 2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되었지만, 이 해가 마지막이었다.

1979년 8월 12일 요미우리전(고라쿠엔)에서 5회말에 모토미쓰 마나오를 대신하여 1루로 들어가 역대 14번째 2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1980년, 오픈전 도중부터 4번 자리를 다카기 요시카즈에게 양보했다.[6] 개막도 5번으로 시작했고 극심한 부진이 이어져, 11경기에서 7안타밖에 치지 못했고, 타율은 .167이었다.[6] 4월 23일 한신전(요코하마)에서 1회말에 나가사와 쓰토무를 상대로 좌월 3점 홈런을 쳐서 역대 12번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6][7] 2000안타 달성 시점에서 우승 경험이 없는 것은 도이 마사히로에 이어 역대 2번째였다.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년)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를 사단법인화시켜 선수 회장으로서 선수들의 선봉에 서서 구단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구단으로부터 기피 대상으로 지목되어, 1981년 고가 마사아키와의 맞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하게 되었다. 이 때 "요미우리에 이적해도 기쁘지 않다. 다이요에서 우승하는 것이 목표였다"라고 말하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19] 같은 해, 요미우리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경험했다.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9회말 대타로 등장, 마무리 투수였던 에나쓰 유타카로부터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그 해를 끝으로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한 이듬해인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친정팀인 다이요에서 1군 타격 코치를 맡아 다카기 유타카, 야시키 가나메의 타격 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다.[20]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요미우리 2군 타격 코치,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요미우리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요미우리 코치 시절 지도한 선수의 컨디션을 떨어뜨렸을 때부터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론 주위에서 말하는 정도로 지도력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20] 다만 선수 개개인에 너무나도 높은 이상을 요구했던 것이 선수의 혼란을 초래하게 하여 1988년에 ‘아시아의 대포’라고 불리며 화려하게 데뷔하였지만 그 후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뤼밍츠가 마쓰바라의 지도를 비판한 것과 당시 요미우리는 투수진의 레벨이 매우 높았고 일반적으로 ‘투고타저’의 팀으로 보였던 점도 타격 코치로서의 낮은 평가를 받게 된 요인이 되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분카 방송TV 가나가와의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2001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고지의 요청으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수석 겸 타격 코치, 2004년에 야마시타 다이스케 감독의 지휘 하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수석 겸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05년 이후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분카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고 있으며[21] 또한 동시간대인 TV 가나가와의 《베이스타스 나이터》의 해설도 맡고 있다(특히 1년에 한 차례 사가미하라 구장에서의 경기 해설은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KBO 리그 팀인 KIA 타이거즈 임시 인스트럭터를 맡아 일본에서의 춘계 캠프와 시즌 중에는 대한민국에 초빙되어 타자들을 지도했다.

4. 플레이 스타일

20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특히 다이요에서는 19년 동안 중심 타자로서 활약하는 등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통산 300홈런과 2000안타를 기록하면서도 타격 부문 3관왕, 베스트 나인,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등의 타이틀은 한 번도 획득하지 못했다.[22] 통산 300홈런과 2000안타를 기록하고도 타격 부문 3관왕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것은 마쓰바라와 기요하라 가즈히로뿐이며, 통산 2000안타 이상을 기록하고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지 못한 선수는 마쓰바라와 오시마 야스노리 두 명뿐이다. 마쓰바라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지 못한 것은 전성기에 오 사다하루가 있었기 때문이며, 통산 20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개인 타이틀과 시즌 수상 경력이 모두 없는 것은 마쓰바라가 유일하다.

‘경기 전의 나카가와 미요시, 경기 후의 마쓰바라’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다리를 크게 벌리고 낮은 자세로 송구를 받는 ‘문어발’ 1루 수비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팀 동료이자 간판 유격수였던 야마시타 다이스케는 “여러분은 저를 유명한 선수라고 생각하지만 마쓰바라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주저없이 낮은 송구를 했는데, 숏바운드라도 마쓰바라가 모두 잡아줬다”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글러브상도 오 사다하루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

요령 있는 선수로 포수와 유격수를 제외한 모든 내야 포지션을 경험했다. 올스타전에서는 센트럴 리그 팀에 오 사다하루가 있어서 2루를 여러 차례 맡기도 했다(정규 경기에서도 2루수로 뛴 경험이 있다). 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경험했으며, 1루에서 내야수의 송구를 받을 때 사용했던 "문어 다리" 포구 스타일은 왕정치를 의식한 것이다.[17]

5. 수상 및 기록

연도소속팀기록
1974년다이요최다 안타[3] (당시 타이틀 미제정)
1975년다이요올스타전 MVP (제2차전)[3]
1978년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최다 안타[3] (당시 타이틀 미제정)
1966년 ~ 1972년다이요올스타전 7년 연속 출장[3]
1974년 ~ 1976년다이요올스타전 3년 연속 출장[3]
1978년요코하마 다이요올스타전 출장 (통산 11회)[3]
1976년 6월 1일 ~ 6월 2일다이요4타수 연속 홈런, 4타석 연속 홈런[3]
통산 330홈런, 1172타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구단 기록)[3]


6. 기타

75 (1989년 ~ 1991년)1993년 ~ 2000년분카 방송, TV 가나가와야구 해설위원(없음)2001년 ~ 2003년히로시마 도요 카프1군 수석 겸 타격 코치712004년요코하마 베이스타스1군 수석 겸 타격 코치992009년 ~ 2010년KIA 타이거즈임시 인스트럭터(없음)

참조

[1] 웹사이트 Makoto Matsubara Japanese & Winter Leagues Statistics & History https://www.baseball[...]
[2] 서적 日本プロ野球歴代名選手名鑑 恒文社 1976
[3] 뉴스 佐賀新聞Live <名球会リレーコラム>元大洋・松原誠氏 目力で4打数連続本塁打 https://www-saga--s-[...] 佐賀新聞
[4] 서적 巨人軍の男たち
[5] 문서
[6] 뉴스 松原誠の我が道㉔。2千安打が花道のつもりだった スポーツニッポン 2022-08-25
[7] 문서
[8] 뉴스 松原誠の我が道㉖ 高木豊と屋鋪を育てた初コーチ業 スポーツニッポン 2022-08-27
[9] 뉴스 日刊スポーツ 1984-10-18
[10] 뉴스 松原誠の我が道㉗ 寝食を忘れた巨人2軍コーチ時代 スポーツニッポン 2022-08-28
[11] 뉴스 松原誠の我が道㉘ 「ぶつけろ!」が許せなかった スポーツニッポン 2022-08-29
[12] 뉴스 松原誠の我が道㉙ 山本浩二に誘われ赤ヘル軍団指導 スポーツニッポン 2022-08-30
[13] 웹사이트 決意した脱“荒川方式” https://gendai.media[...]
[14] 웹사이트 松原誠 | VICTORY https://victorysport[...]
[15] 문서
[16] 뉴스 松原誠の我が㉚ コーチ業の心得は「お・ひ・た・し」 スポーツニッポン 2022-08-31
[17] 웹사이트 【4月23日】1980年(昭55) テスト生から19年 松原誠 無冠の帝王の2000本安打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新聞社 2010-04-01
[18] 뉴스 【データ】村上宗隆プロ野球新5打席連続本塁打 20人「打数」と13人「打席」の両方を更新 https://www.nikkansp[...] 2022-08-02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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