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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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닉슨 쇼크는 1971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발표한 일련의 경제 정책으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베트남 전쟁, 국제수지 적자, 달러 가치 하락 등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닉슨은 금 태환 중단, 임금 및 물가 동결, 수입 할증세 부과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고정 환율제가 변동 환율제로 전환되었고, 국제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과 환율 변동성 증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닉슨 쇼크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과 평가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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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경제 - 스미소니언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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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충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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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명칭 | 닉슨 쇼크 |
주요 내용 | 금 태환 정지 선언 및 수입관세 부과 |
발표 | 1971년 8월 15일 |
발표자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
배경 | 브레턴 우즈 체제의 붕괴 위기 미국의 금 보유량 감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 |
결과 | 브레턴 우즈 체제의 공식적인 붕괴 변동 환율 제도로의 전환 미국 달러 가치 하락 세계 경제에 큰 영향 |
배경 | |
브레턴 우즈 체제 | 미국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하는 고정 환율 제도 |
미국의 금 보유량 감소 |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금 보유량 감소 |
금 태환 요구 증가 | 다른 나라들의 미국 달러에 대한 불신 심화로 금 태환 요구 증가 |
주요 내용 | |
금 태환 정지 선언 | 미국 달러와 금의 교환 중단 |
수입관세 부과 | 다른 나라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10%의 수입관세 부과 |
영향 | |
국제 경제 | 브레턴 우즈 체제 붕괴 및 변동 환율 제도로의 전환 미국 달러 가치 하락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증가 |
미국 경제 | 인플레이션 심화 무역 적자 확대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미국 달러의 가치를 안정시키고 미국 경제를 보호했다는 평가 미국이 더 이상 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통화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평가 |
부정적 평가 | 세계 경제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는 평가 미국 달러의 가치 하락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평가 |
2. 배경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턴우즈에서 44개국 대표들이 모여 브레튼우즈 체제를 성립시켰다. 이 체제는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하고,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하여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고정 환율제였다.[7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마셜 플랜의 도움으로 일본과 유럽 국가들이 전쟁 피해를 복구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는 초기에 안정적인 국제 무역과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77][78] 1947년을 기준으로 미국 정부는 전 세계의 금보유고 가운데 70%을 가지고 있었다.[77]
그러나 1950년부터 1969년 사이에 서독과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이 세계 경제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에서 27%로 감소했다. 또한 국제수지 적자,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국가채무 증가, 통화 팽창 등은 1960년대 달러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프랑스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미국의 과도한 특권이라 비판하며, 미국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미국의 생활 수준을 지지하고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을 보조하게 되는 불균형적인 재정 제도라고 지적했다.[7] 1965년 2월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프랑스가 보유한 달러를 금과 공식적인 환율로 바꿀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79] 1966년에는 미국 이외의 나라들은 각국의 중앙은행에 140억 달러 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단지 132억 달러 만큼을 갖고 있었다.[79]
1971년 5월에 서독이 마르크를 절상하지 않으며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으며, 이어 달러의 가치는 마르크 대비 7.5% 하락했다.[81] 스위스는 7월에 5천만 달러 만큼을 바꾸었고 프랑스는 1억 9100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었다.[81] 8월 5일에 미국 의회는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 평가절하를 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81] 8월 9일에 달러의 가치가 유럽의 통화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자 스위스도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다.[81]
1960년대 후반, 미국은 베트남 전쟁 장기화와 과도한 재정 지출, 그리고 통화 팽창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34] 국제수지 적자가 확대되면서 달러 가치는 하락했고, 금 보유고는 감소하여 달러의 금 태환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79][34] 특히 1965년 베트남 전쟁 개입에 따른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으로 국제 수지 적자 폭이 확대됨에 따라 1966년에 처음으로 외국의 달러 준비가 미국 재무성이 보유한 금 보유액을 넘어섰다.[34]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8][81] 이는 미국의 금 보유고 감소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1971년에는 프랑스가 1억 9100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었다.[11]
1971년 당시의 선진 각국의 경제력·경쟁력과 비교하여 미국의 달러는 현실의 경제력·경쟁력보다 높은 환율이 되었고, 대 달러 환율은 현실의 경제력·경쟁력보다 낮은 환율이 되어 미국은 국제 무역에서 적자를 내는 불리한 상황이었다.[34] 더욱이 해외로 유출된 달러는 무역 흑자국의 대외 준비로 축적되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34]
1971년 8월 13일에는 영국이 미국에 30억 달러의 금 교환을 요구했다.[35] 이러한 국제적인 압박은 미국이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나야 한다는 압박을 더욱 거세지게 만들었다.
2. 1. 브레튼우즈 체제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턴우즈에서 44개국 대표들이 모여 브레튼우즈 체제를 성립시켰다. 이 체제는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하고,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하여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고정 환율제였다.[7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마셜 플랜의 도움으로 일본과 유럽 국가들이 전쟁 피해를 복구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는 초기에 안정적인 국제 무역과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77][78] 1947년을 기준으로 미국 정부는 전 세계의 금보유고 가운데 70%을 가지고 있었다.[77]그러나 1950년부터 1969년 사이에 서독과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이 세계 경제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에서 27%로 감소했다. 또한 국제수지 적자,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국가채무 증가, 통화 팽창 등은 1960년대 달러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프랑스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미국의 과도한 특권이라 비판하며, 미국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미국의 생활 수준을 지지하고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을 보조하게 되는 불균형적인 재정 제도라고 지적했다.[7] 1965년 2월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프랑스가 보유한 달러를 금과 공식적인 환율로 바꿀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79] 1966년에는 미국 이외의 나라들은 각국의 중앙은행에 140억 달러 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단지 132억 달러 만큼을 갖고 있었다.[79]
1971년 5월에 서독이 마르크를 절상하지 않으며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으며, 이어 달러의 가치는 마르크 대비 7.5% 하락했다.[81] 스위스는 7월에 5천만 달러 만큼을 바꾸었고 프랑스는 1억 9100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었다.[81] 8월 5일에 미국 의회는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 평가절하를 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81] 8월 9일에 달러의 가치가 유럽의 통화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자 스위스도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다.[81]
2. 2.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
1960년대 후반, 미국은 베트남 전쟁 장기화와 과도한 재정 지출, 그리고 통화 팽창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34] 국제수지 적자가 확대되면서 달러 가치는 하락했고, 금 보유고는 감소하여 달러의 금 태환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79][34] 특히 1965년 베트남 전쟁 개입에 따른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으로 국제 수지 적자 폭이 확대됨에 따라 1966년에 처음으로 외국의 달러 준비가 미국 재무성이 보유한 금 보유액을 넘어섰다.[34]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8][81] 이는 미국의 금 보유고 감소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프랑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두고 미국 시민이 아닌 시민들이 미국의 생활 수준을 지지하고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을 보조하게 되는 불균형적인 재정 제도를 낳는 '미국의 과다한 특권'이라고 비판했다.[7] 1965년 2월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 골은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금과 공식적인 환율로 바꿀 의향을 밝혔으며,[8] 1971년에는 프랑스가 1억 9100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었다.[11]
1971년 당시의 선진 각국의 경제력·경쟁력과 비교하여 미국의 달러는 현실의 경제력·경쟁력보다 높은 환율이 되었고, 대 달러 환율은 현실의 경제력·경쟁력보다 낮은 환율이 되어 미국은 국제 무역에서 적자를 내는 불리한 상황이었다.[34] 더욱이 해외로 유출된 달러는 무역 흑자국의 대외 준비로 축적되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34]
1971년 5월에 서독이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으며,[11] 7월에는 스위스가 5천만 달러 만큼을 금으로 바꾸었다.[11] 8월 5일에 미국 의회는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 평가절하를 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8월 9일에 달러의 가치가 유럽의 통화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자 스위스도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다.[11] 8월 13일에는 영국이 미국에 30억 달러의 금 교환을 요구했다.[35] 이러한 국제적인 압박은 미국이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나야 한다는 압박을 더욱 거세지게 만들었다.
3. 닉슨 쇼크의 전개
1971년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5.84%였으며[82] 8월 기준으로 실업율은 6.1%였다.[13][14]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닉슨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아서 F. 번스, 재무부 장관 존 코널리, 재무부의 국제담당재무국장 폴 볼커와 상의했다.[15]
1971년 8월 13일 금요일 오후, 닉슨은 번스, 코널리, 볼커를 포함한 백악관 및 재무부 고위 고문 12명과 함께 캠프데이비드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다.[16][17][18] 이 회의는 무려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닉슨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48][49] 번스 연준 의장은 달러와 금의 태환 정지에 이의를 제기했지만,[47] 다수는 찬성했다. 결국 닉슨은 코널리의 조언에 크게 의존하여 8월 15일 다음과 같은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를 붕괴시키기로 결정했다:[16][17][18]
# 닉슨은 재무부 장관 코널리에게 특정 예외를 제외하고 달러를 금 또는 기타 준비 자산으로의 전환을 중단하도록 지시하고, 금 태환을 중단하여 외국 정부가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수 없도록 했다.
# 닉슨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임금 및 물가 동결을 90일간 시행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 정부가 임금 및 물가 통제를 시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 환율 변동으로 인해 미국 제품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10%의 수입 할증세가 부과되었다.
8월 15일 일요일, 닉슨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19] 닉슨은 이 조치의 효과는 달러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19] 닉슨의 조치는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설 다음 날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일일 사상 최대 상승폭인 33포인트가 올랐고,[6] 《뉴욕 타임스》는 닉슨이 취한 대담함에 망설임 없이 갈채를 보낸다는 사설을 실었다.[78][22]
12월에는 스미소니언 협정에 따라 G10 통화들의 절상으로 수입 과징금이 철폐됐다. 1973년 3월에는 고정 환율제가 변동 환율제가 됐다.[86] 환율은 더 이상 정부가 통화 정책을 집행하는 주요 수단이 아니게 됐다.
닉슨 대통령의 성명 발표까지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다[41]。
- 2월 11일 - 존 코널리(John B. Connally Jr.)[42]가 미국 재무부 장관에 취임. 3개월 후 미국 은행가 협회 주최 국제 통화 금융 회의에서 "달러를 평가절하하거나 금 가격을 변경할 생각은 없다"고 발언한다. 그러나 닉슨과 코널리는 조만간 금 태환 정지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동시에 물가 임금 통제령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미 이 무렵 닉슨 행정부에 대한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무대책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 6월 29일 - 코널리 재무 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임금 물가 감시 위원회는 설치하지 않는다", "임금·물가의 직접 통제는 하지 않는다", "감세는 하지 않는다", "재정 지출 추가는 하지 않는다"고 명언한다. 그러나 재무부 특별팀이 달러와 금과의 태환 정지 실행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 특별팀은 폴 볼커(Paul Volcker)[43] 재무 차관, 존 페티 재무 차관보, 윌리엄 데일 IMF 이사(미국 대표) 3명으로 구성되어 금 태환 정지의 메커니즘, 필요한 달러 평가 절하 폭, 상대국에 요구하는 시장 개방책, 통화 제도의 개혁안을 포함했다. 이 당시에는 수입 과징금 창설은 포함되지 않았다. 자유 무역주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지만, 코널리가 나중에 정치적 판단으로 추가하여, 볼커 재무 차관은 자국의 보호주의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강력히 반대했지만 코널리는 이를 밀어붙였다.
- 7월 10일 - 일본에서 경제학자들이 모인 환율 정책 연구회에서 엔화의 소폭 절상을 제창.
- 7월 20일 - 일본 은행이 공정 금리를 0.25% 인상.
- 8월 초 - 닉슨에게 코널리로부터 포괄적인 신경제 대책의 제안이 전달된다[44]。그러나 8월은 의회가 휴회 중이므로 닉슨은 9월에 실시할 예정으로 했다. 이 무렵 미국 상하 양원 국제 통화 분과회가 보고서를 발표하여, 달러의 평가 절하, 주요 국가와의 평형 조정, 금 태환 정지, 달러의 변동제 이행 등의 통화 정책 선택지를 제시했다.
- 8월 9일 - 전주에 프랑스에서 달러 매도가 가속화되어, 주 초에 투기가 재연되었다.
- 8월 13일 - 영국이 30억 달러의 금 태환을 요구. 이날 캠프 데이비드의 별장에 극비리에 16명의 스태프를 닉슨이 소집했다. 닉슨, 코널리 외에 아서 번스(Arthur Burns) 연준 의장, 폴 매크라켄 대통령 경제 자문 위원회(CEA) 위원장[45], 조지 슐츠(George Shultz)[46] 행정 관리 예산국장, 폴 볼커 재무 차관 등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신정책의 골자가 제시된 후, 달러와 금과의 태환 정지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번스 연준 의장이었다[47]。그러나 다수는 찬성이었고 결론이 내려졌다.
- * 회의는 당일 오후 3시 15분부터 무려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다. 스태프 사이에서는 7월 하순부터 신경제 정책에 대한 입안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설마 8월 13일에 긴급 회의에서 결정되어 발표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워킹 페이퍼를 작성하기 위한 작업 팀이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대통령 연설 작가인 사파이어가 연설 초고를 작성했다. 그 작업 팀에는 "임금 물가 동결"에는 매크라켄, "감세"는 슐츠, "금 태환 정지와 수입 과징금"은 코널리와 볼커가 담당했다. 그리고 다음날 토요일 새벽에 연설 초고가 완성되었다[48][49]。
- * 이 회의에 대해 로저스 국무 장관과 레너드 국방 장관은 사전에 알지 못했고,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50]。
- 8월 14일 - 시장의 혼란으로 일본 은행의 달러 매입이 이날만 1억 달러에 달했고, 전년 말의 외화 준비고가 44억 달러, 그것이 7월 말에 79억 달러로 이미 이날 가볍게 80억 달러를 넘어섰다.
- 8월 15일 - 미국 동부 표준시 오후 9시에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이 신경제 정책을 발표.
- 8월 16일 - 한국 시간 오전 10시에 닉슨 성명을 접한다. 사토 에이사쿠 수상은 10분 전에 로저스 국무 장관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는다. 시장은 이미 개장한 직후였다. 즉시 대장성에서 긴급 간부 회의가 열렸고, 하토야마 이치로 사무 차관은 긴급 조치로 시장의 폐쇄를, 동기인 카시와기 유스케 고문은 시장의 개방을 각각 주장하여 갑론을박 끝에, 시장을 계속 열어두기로 했다. 이날만 일본 은행은 6억 달러의 평형 매입을 실시했고, 도쿄 증권 거래소 주가는 210엔 50전 하락(8% 감소)했다. 한편, 13시간 늦은 뉴욕 시장에서는 다우 평균이 32.93달러 상승하여 이전까지의 최대 상승을 기록했다. 미국 국민은 두 팔을 벌려 신정책을 환영했다.
3. 1. 닉슨의 결정
1971년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5.84%였으며[82] 8월 기준으로 실업율은 6.1%였다.[13][14]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닉슨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아서 F. 번스, 재무부 장관 존 코널리, 재무부의 국제담당재무국장 폴 볼커와 상의했다.[15]1971년 8월 13일 금요일 오후, 닉슨은 번스, 코널리, 볼커를 포함한 백악관 및 재무부 고위 고문 12명과 함께 캠프데이비드에서 비밀 회동을 가졌다.[16][17][18] 이 회의는 무려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닉슨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48][49] 번스 연준 의장은 달러와 금의 태환 정지에 이의를 제기했지만,[47] 다수는 찬성했다. 결국 닉슨은 코널리의 조언에 크게 의존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 재무부 장관 코널리에게 특정 예외를 제외하고 달러를 금 또는 기타 준비 자산으로의 전환을 중단하도록 지시하고, 금 태환을 중단하여 외국 정부가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수 없도록 했다.
-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1970년 경제 안정법에 의거)를 발동하여 임금 및 물가 동결을 90일간 시행했다.
- 환율 변동으로 인해 미국 제품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10%의 수입 할증세가 부과되었다.
8월 15일 일요일, 닉슨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19] 닉슨의 조치는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설 다음 날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일일 사상 최대 상승폭인 33포인트가 올랐고,[6] 《뉴욕 타임스》는 닉슨이 취한 대담함에 망설임 없이 갈채를 보낸다는 사설을 실었다.[78][22]
3. 2. 주요 내용
1971년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5.84%였으며[82] 8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6.1%였다.[13][14]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기 위해 닉슨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아서 F. 번스와 재무부 장관 존 코널리, 재무부의 국제담당재무국장 폴 볼커와 논의를 했다.[15] 1971년 8월 13일 닉슨과 고위 자문역들은 캠프데이비드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닉슨은 코널리의 조언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16][17][18]닉슨이 8월 15일에 발표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재무부 장관 코널리에게 특정 예외를 제외하고 달러를 금 또는 기타 준비 자산으로의 전환을 중단하도록 지시하고, 금 태환을 중단하여 외국 정부가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수 없도록 했다.
-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임금 및 물가 동결을 90일간 시행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 정부가 임금 및 물가 통제를 시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 환율 변동으로 인해 미국 제품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10%의 수입 할증세가 부과되었다.[19]
닉슨은 이 조치의 효과는 달러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19]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와서 연설 하루 뒤인 월요일에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일일 사상 최대 상승폭인 33포인트가 올랐고, 《뉴욕 타임스》에는 닉슨이 취한 대담함에 갈채를 보낸다는 사설이 실렸다.[78]
4. 스미소니언 체제
변동 환율로 이행한 이후, 고정 환율로 되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엔화 단독 평가 절상으로 고정 환율을 부활시키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다자간 통화 조정이 이루어질 전망이 되었다. 그리고 G10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를 무대로 한 다자간 통화 조정은 이후, 9월 중순 런던, 9월 말부터 워싱턴, 11월 말 로마를 거쳐 12월 중순 워싱턴에서 결착을 맺게 되었다. 첫 번째 런던에서는 미국이 흑자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흑자국의 상당한 폭의 평가 절상을 요구하고, 금에 대한 평가 절하를 거부했다. 9월 말부터의 워싱턴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고, 미국에 수입 과징금 철폐와 달러 평가 절하를 요구하는 일본과 유럽, 그리고 어디까지나 무역 흑자국의 책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미국과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다. 11월 9일에 방일한 코넬리 재무 장관과 사토 총리의 회담이 11일에 열렸고, 자리에서 10%의 수입 과징금 폐지와 동시에 24%의 엔화 평가 절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55] 11월 말 로마에서 코넬리가 처음으로 달러 평가 절하에 언급하면서 연내 결착의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12월 12~13일에 대서양상의 아조레스 제도에서 열린 미·프랑스 정상 회담에서 닉슨과 퐁피두 대통령 간에 닉슨은 달러의 평가 절하를 확약했다. 이 무렵에는 엔화 환율이 320엔을 밑돌아 실질 평가 절상률이 12%가 되었고, 서독의 실질 평가 절상률을 넘어섰다.
1971년 12월 17~18일,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57]가 열렸고, 여기서 달러와 금의 고정 교환율을 실질적으로 7.98% 인하(1온스 35달러에서 38달러로), 미국의 수입 과징금 10% 폐지,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면서 그동안의 변동 폭을 상하 1%에서 2.25%로 확대하기로 했으며, 달러와 각국 통화 간의 교환율을 국가 간의 다각적인 조정으로 결정했다(스미소니언 협정).[39] 이 스미소니언 협정에 의해 각국의 대 달러 환율이 변경되었고, 여기서 고정 환율 제도로 돌아갔다.[39]
그중에서 일본 엔화는 종전의 1달러=360엔에서 16.88%[58] 평가 절상되어 1달러=308엔이 되었다. 이 일본 엔화의 환율이 결정되자 다른 마르크화 이하의 환율이 결정되었다. 이 평가 절상 폭은 각국 통화 중 최대였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서독이 13.5%, 영국과 프랑스가 8.57%, 네덜란드가 11.57%, 이탈리아가 7.48%로 각각 달러에 대한 평가 절상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통화 조정을 한 국가는 50개국에 달했다.[37] 서독이 그동안 몇 차례 평가 절상을 했고, 게다가 쇼크 전에 변동 환율 제도로 이행했으며, 일본은 줄곧 360엔의 고정 환율을 유지하며 평가 절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여기서 일본만 대폭적인 평가 절상으로 이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4. 1. 스미소니언 협정
1971년 12월, 10개국 그룹(G-10) 통화의 재평가의 일환으로 미국의 수입 할증금이 폐지되었고, 스미소니언 협정에 따라 환율 변동폭이 2.25%로 확대되었다.[23]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통화의 공식적인 재평가에 동의하도록 수개월 동안 설득했으나 실패했다.1973년 3월, 고정 환율 제도는 변동 환율 제도로 바뀌었다.[23]
닉슨 충격 이후, 엔화의 가치 상승을 막기 위해 일본은행이 외환 시장에 대규모로 개입했지만, 엔화에 대한 미국 달러의 평가 절하를 막을 수 없었다.[24] 프랑스는 달러가 프랑에 대해 평가 절하되는 것은 허용했지만, 프랑이 금에 대해 절상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24]
변동 환율로 이행한 이후, 고정 환율로 되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엔화 단독 평가 절상으로 고정 환율을 부활시키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다자간 통화 조정이 이루어졌다. G10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9월 중순 런던, 9월 말부터 워싱턴, 11월 말 로마를 거쳐 12월 중순 워싱턴에서 다자간 통화 조정이 마무리되었다. 런던에서는 미국이 흑자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흑자국의 상당한 폭의 평가 절상을 요구하고, 금에 대한 평가 절하를 거부했다. 미국에 수입 과징금 철폐와 달러 평가 절하를 요구하는 일본과 유럽, 그리고 흑자국의 책임을 주장하는 미국과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다. 11월 9일, 코널리 재무 장관과 사토 총리의 회담에서 10%의 수입 과징금 폐지와 동시에 24%의 엔화 평가 절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55] 12월 12~13일에 열린 미·프랑스 정상 회담에서 닉슨과 퐁피두 대통령 간에 닉슨은 달러의 평가 절하를 확약했다.
1971년 12월 17~18일,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57]가 열렸다. 여기서 달러와 금의 고정 교환율을 7.98% 인하(1온스 35달러에서 38달러로)하고, 미국의 수입 과징금 10%를 폐지하며,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면서 변동 폭을 상하 1%에서 2.25%로 확대하고, 달러와 각국 통화 간의 교환율을 국가 간의 다각적인 조정으로 결정했다(스미소니언 협정).[39]
스미소니언 협정에 의해 각국의 대 달러 환율이 변경되었고, 고정 환율 제도로 돌아갔다.[39] 일본 엔화는 1달러=360엔에서 16.88%[58] 평가 절상되어 1달러=308엔이 되었다. 이 평가 절상 폭은 각국 통화 중 최대였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서독이 13.5%, 영국과 프랑스가 8.57%, 네덜란드가 11.57%, 이탈리아가 7.48%로 각각 달러에 대한 평가 절상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통화 조정을 한 국가는 50개국에 달했다.[37]
4. 2. 한계
1971년 12월, 스미소니언 협정을 통해 달러화 가치가 절하되고, 엔화를 포함한 주요 통화의 환율이 조정되면서 일시적으로 고정 환율 제도가 유지되는 듯 보였다.[39] 그러나 미국의 경제력 약화와 서유럽 및 일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30]1972년 3월, 유럽 공동체(EC) 6개국이 역외 달러에 대해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고,[34] 6월에는 영국의 파운드화가 투기적 공격으로 변동 환율제로 이행했다. 1973년 2월에는 이탈리아의 스위스 프랑 매수 증가로 스위스 프랑이 변동 환율제로 이행했고, 이후 달러에 대한 투기가 심화되면서 서독 연방은행이 달러 매수에 나섰지만 시장 폐쇄에 몰렸다.[62] 결국, 1973년 2월 14일 엔화는 변동환율제로 완전히 이행되었다.[54]
결국 1973년 3월, 대부분의 주요 국가들이 변동 환율제로 이행하면서 스미소니언 체제는 붕괴되었다.[62] 1976년 1월, 국제 통화 기금(IMF) 잠정 위원회에서 변동 환율제가 정식으로 승인되면서(킹스턴 협정), 국제 통화 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63]
5. 영향 및 평가
닉슨 충격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초래하고, 변동 환율제 시대를 열었다.
== 국제 경제 ==
닉슨 충격으로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다.[24] 1970년대에 달러의 가치는 ⅓가량 떨어졌으며, 변동 환율제 도입으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고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이 증가했다.[24][6] 마르크는 1971년 5월에 변동 환율이 된 뒤로 가치가 상당히 올랐다.[24] 일본은행은 엔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에 크게 개입해야 했다. 1971년 8월 16일과 8월 17일 사이에 일본은행은 13억 달러를 써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행의 대형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를 보였다.[24]
1971년 12월, 10개국 그룹(G-10) 통화의 일반적인 재평가의 일환으로 수입 할증금이 폐지되었으며, 스미소니언 협정에 따라 합의된 환율에서 2.25% 평가절하가 허용되었다. 1973년 3월, 고정 환율 제도는 변동 환율 제도가 되었다.[23]
2011년에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78] 1996년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의 시대를 변동 환율 통화는 이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도 갖고 있다고 요약했다.[87]
닉슨 쇼크는 정치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1973-1975년 불황,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변동 환율의 불안정성을 초래한 경제적 실패로 널리 여겨진다.
== 미국 경제 ==
닉슨 충격은 단기적으로는 경기 회복과 인플레이션 억제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달러 가치 하락과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닉슨 충격으로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다.[65] 1970년대에 달러의 가치는 ⅓가량 떨어졌으며, 마르크는 1971년 5월에 변동 환율이 된 뒤로 가치가 상당히 올랐다. 일본은행은 엔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에 크게 개입해야 했다. 1971년 8월 16일과 8월 17일 사이에 일본은행은 달러의 가치 하락을 막고 엔화와의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13억 달러를 써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행의 대형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를 보였다.
2011년에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볼커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며, 유럽은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자신들만의 통화를 만들었지만 현재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78]
1996년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닉슨 충격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정파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2007년-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고려해 닉슨 충격과 그 통화 정책의 영향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닉슨 쇼크는 정치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1973-1975년 불황,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변동 환율의 불안정성을 초래한 경제적 실패로 널리 여겨진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의 신경제 정책 발표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일본 경제가 불황에 빠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일본은 이미 닉슨 쇼크 1년 전인 1970년 8월부터 경기 후퇴기에 접어들었고, 닉슨 쇼크 시점에는 이미 불황이었다. 닉슨 행정부 하의 미국은, 정권 출범 당시부터 경기 대책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높은 실업률까지 겹쳤으며, 게다가 무역 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1971년 7월 경에는 닉슨의 경제 정책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분명해졌다.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불황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65]
스미소니언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이 1달러 308엔으로 고정 환율로 복귀한 1971년 12월에, 일본 국내에서는 수출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1971년 12월을 저점으로 경기는 상승세에 접어들었다.
== 한국 경제 ==
닉슨 쇼크는 한국 경제에 단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다.[78]
5. 1. 국제 경제
닉슨 충격으로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다.[24] 1970년대에 달러의 가치는 ⅓가량 떨어졌으며, 변동 환율제 도입으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고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이 증가했다.[24][6] 마르크는 1971년 5월에 변동 환율이 된 뒤로 가치가 상당히 올랐다.[24] 일본은행은 엔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에 크게 개입해야 했다. 1971년 8월 16일과 8월 17일 사이에 일본은행은 13억 달러를 써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행의 대형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를 보였다.[24]1971년 12월, 10개국 그룹(G-10) 통화의 일반적인 재평가의 일환으로 수입 할증금이 폐지되었으며, 스미소니언 협정에 따라 합의된 환율에서 2.25% 평가절하가 허용되었다. 1973년 3월, 고정 환율 제도는 변동 환율 제도가 되었다.[23]
2011년에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78] 1996년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의 시대를 변동 환율 통화는 이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도 갖고 있다고 요약했다.[87]
닉슨 쇼크는 정치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1973-1975년 불황,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변동 환율의 불안정성을 초래한 경제적 실패로 널리 여겨진다.
5. 2. 미국 경제
닉슨 충격은 단기적으로는 경기 회복과 인플레이션 억제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달러 가치 하락과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닉슨 충격으로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다.[65] 1970년대에 달러의 가치는 ⅓가량 떨어졌으며, 마르크는 1971년 5월에 변동 환율이 된 뒤로 가치가 상당히 올랐다. 일본은행은 엔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에 크게 개입해야 했다. 1971년 8월 16일과 8월 17일 사이에 일본은행은 달러의 가치 하락을 막고 엔화와의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13억 달러를 써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행의 대형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를 보였다.2011년에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볼커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며, 유럽은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자신들만의 통화를 만들었지만 현재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78]
1996년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닉슨 충격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정파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2007년-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고려해 닉슨 충격과 그 통화 정책의 영향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닉슨 쇼크는 정치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1973-1975년 불황,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변동 환율의 불안정성을 초래한 경제적 실패로 널리 여겨진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의 신경제 정책 발표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일본 경제가 불황에 빠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일본은 이미 닉슨 쇼크 1년 전인 1970년 8월부터 경기 후퇴기에 접어들었고, 닉슨 쇼크 시점에는 이미 불황이었다. 닉슨 행정부 하의 미국은, 정권 출범 당시부터 경기 대책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높은 실업률까지 겹쳤으며, 게다가 무역 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1971년 7월 경에는 닉슨의 경제 정책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분명해졌다.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불황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65]
스미소니언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이 1달러 308엔으로 고정 환율로 복귀한 1971년 12월에, 일본 국내에서는 수출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1971년 12월을 저점으로 경기는 상승세에 접어들었다.
5. 3. 한국 경제
닉슨 쇼크는 한국 경제에 단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다.[78]6. 닉슨 쇼크와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 (1970년대 초)
6. 1. 정치적 상황
6. 2. 경제적 상황
6. 3. 평가
7. 비판적 시각
7. 1. 진보적 관점에서의 비판
7. 2. 닉슨 독트린과의 연관성
8. 결론
닉슨 쇼크는 전후 국제 경제 질서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78][87] 이는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과 국제 통화 체제의 모순이 결합되어 발생한 결과였다. 닉슨 쇼크는 단기적으로 미국의 경제 문제 해결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변동 환율제 도입, 스태그플레이션 심화,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 증가 등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
1970년대에 달러 가치는 ⅓가량 떨어졌으며, 마르크는 1971년 5월에 변동 환율제가 된 뒤로 가치가 상당히 올랐다.[78] 일본은행은 엔화 가치 상승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에 크게 개입했지만,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를 보였다.[78]
2011년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으며,[78] 1996년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 변동 환율제는 세계 무역상들과 투자자들에게 불확실성을 야기 시킬수 있다고 평가하였다.[87]
닉슨 충격은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경제 체질 개선과 자립 경제 구축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닉슨 충격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정파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2007년-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고려해 닉슨 충격과 그 통화 정책의 영향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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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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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後期10人の首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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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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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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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思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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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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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2014年7月24日に外務省が公開した外交文書の中に、1971年3月12日付けでニクソン大統領が佐藤首相に送った書簡が公開され、この中で、日本側が自主規制案を出したことに「本当に驚いた」として「双方が満足できる交渉は不可能と思われる」「こうした方法であなたに手紙を書くことを遺憾に思う」と述べて、日本政府の対応を批判した書簡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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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時代の証言者
読売新聞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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