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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널리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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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코널리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1963년부터 1969년까지 텍사스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1917년 텍사스주에서 태어나 텍사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해군 중령으로 전역했으며, 1961년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2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여 주지사가 되었으며,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 당시 대통령의 차에 동승하여 부상을 입었다. 1971년에는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73년에는 공화당으로 당적을 변경했다. 1980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으나 실패했으며, 1993년 폐 섬유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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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널리 (정치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0년의 코널리
이름존 보든 코널리 주니어
출생일1917년 2월 27일
출생지미국 텍사스주 플로레스빌
사망일1993년 6월 15일
사망지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배우자넬리 브릴(1940년 결혼)
자녀4명
형제자매웨인 코널리(형제)
정당민주당(1973년까지)
공화당(1973년부터)
학력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BA, LLB)
서명
경력
미국 재무부 장관임기 시작: 1971년 2월 11일
임기 종료: 1972년 6월 12일
대통령: 리처드 닉슨
전임자: 데이비드 M. 케네디
후임자: 조지 슐츠
텍사스 주지사임기 시작: 1963년 1월 15일
임기 종료: 1969년 1월 21일
부지사: 프레스턴 스미스
전임자: 프라이스 대니얼
후임자: 프레스턴 스미스
미국 해군 장관임기 시작: 1961년 1월 25일
임기 종료: 1961년 12월 20일
대통령: 존 F. 케네디
전임자: 윌리엄 B. 프랭크
후임자: 프레드 코스
군 복무
소속미국 해군
계급중령
참전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정보
안장 장소텍사스 주립 묘지

2. 어린 시절과 교육

존 코널리는 1917년 2월 27일 텍사스주 플로레스빌에서 태어났다. 플로레스빌은 샌안토니오 남동쪽에 있는 윌슨 카운티의 군청 소재지이다.[1] 그는 렐라(결혼 전 성은 라이트)와 존 보든 코널리 사이에서 태어난 7명의 자녀 중 하나였다. 그의 부모는 낙농업과 소작농을 했다.[1] 그의 형제자매로는 네 명의 형제인 골프리, 메릴, 웨인, 스탠포드와 여동생 카르멘과 블랑쉬가 있었다.[2]

코널리의 가족은 원래 가난했지만, 아버지 존 보든 코널리가 버스 노선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빈곤에서 벗어났다. 이후 1932년에는 1,000에이커 규모의 농장을 구입했다.[3] 코널리는 플로레스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에 진학하여 문학사와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텍사스 대학교에서 학생회 회장을 역임했고, 프라이어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 또한, 미래의 아내인 넬리 코널리를 만났다.

1936년, 코널리는 린든 B. 존슨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평생 동안 정치적 동맹이자 친구로 지냈다.[3] 존슨은 코널리가 대학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얻도록 도왔고, 코널리는 1937년 존슨의 국회의원 출마에 작은 역할을 했다. 1939년 존슨은 코널리를 워싱턴으로 데려갔고, 코널리는 1941년 미국 해군 예비군에 입대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3] 코널리는 텍사스 대학교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3. 군 복무

코널리는 1941년 해군 예비 함대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측근에서 잠시 복무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USS ''에식스'' 항공모함에 배치되어 전쟁의 가장 격렬한 전투들을 경험했다. 해군 중령 계급까지 진급했으며, 용맹함을 인정받아 청동성장 2개를 수여받았다.[4] 이후 USS ''베닝턴''으로 전출된 후에는 공로 훈장을 받았다.[4]

4. 정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코널리는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존슨의 라디오 방송국 KTBC에서 일했으며, 1946년에는 25000USD를 빌려 새로운 라디오 방송국 KVET를 설립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해당 방송국의 사장을 지냈다. 코널리는 린든 존슨의 1948년 상원 선거에서 수석 전략가가 되었으며, "나는 그 해 선거를 실제로 이끌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3] 존슨이 선거 참여를 꺼려 코널리가 대신 출마할 뻔했지만, 존슨이 결국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3]

1950년대 동안 코널리는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여 텍사스주 석유 부호 시드 W. 리처드슨을 위한 변호사와 진정자가 되었다. 그는 부동산목장에서 소유권을 취득하여 존슨처럼 자신의 젊은 시절의 빈곤을 영원히 탈출하는 데 결심하였다. 정치에 자신을 바친 코널리는 1952년 자신의 당을 탈당하고 대통령을 위하여 아이젠하워를 성원하였다. 4년 후에 그는 집으로 돌아와 보수적 주지사 앨런 샤이버스와 함께 하였다. 코널리의 냉혹함은 존슨을 우둔하게 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코널리는 린든 B. 존슨 상원의원의 지지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존 F. 케네디애디슨병코르티손 의존성 때문에 부적합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케네디는 전당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5] 케네디는 남부 민주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삼았고,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존슨의 비성공적인 입찰을 관리하는 동안 코널리는 존 F. 케네디의 부족한 건강의 소문들을 퍼뜨렸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의 러닝메이트가 된 존슨과 그의 관계와 선거에서 텍사스주의 주축 역할 때문에 대통령 당선자는 그해 12월 코널리를 해군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복무 장관들로부터 권한을 빼앗았어도 그는 맥나마라와 관계들을 유지하였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코널리를 미국 해군 장관으로 지명했지만, 취임 11개월 만에 텍사스 주지사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다. 코널리는 텔레비전에 매일 나와 비지니스의 번창과 교육에서 향상을 약속하였다.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돈 야보러에 투표의 51.2%를, 가을 총선에서 공화당 상대 후보 잭 콕스에 54.2%를 차지하였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주지사로 재임했다. 1964년과 1966년 선거에서 잭 크라이튼(댈러스의 석유 산업가)과 휴스턴의 토마스 에버턴 케너리 시니어(1903–2000) 등 약한 공화당 후보들을 물리치고 각각 73.8%와 72.8%의 득표율로 승리하였다.[8]

코널리는 텍사스 고등 교육이 크게 확장되던 시기에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는 텍사스 고등 교육 조정 위원회의 설립에 서명했다. 그는 이전에 남성만 입학이 가능했던 텍사스 A&M 대학교 칼리지 스테이션에 여성의 입학을 지지하는 섭정들을 임명했으며, 이는 1953년 최초로 이 학교에 여성의 입학을 제안했던 브라이언 출신의 주 상원 의원 윌리엄 T. "빌" 무어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9]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이후, 코널리는 1964년 압도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텍사스 유권자들에게 거의 반신과 같은 상징이 되었다. 주지사는 매우 종교적이 되었고, 그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믿었다.[3] 그는 "이제 나는 선출되기보다는, 아마도 내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3]

1964년 재선 이후 코널리는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고, 텍사스에서 그 시행을 막으려 했다. 또한 노동 조합의 강력한 반대자였으며, 텍사스에서 근로의 권리법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이로 인해 AFL-CIO는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텍사스 공화당은 코널리의 보수적인 견해를 강력히 칭찬했다.[3]

코널리는 솔리드 사우스의 기준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민주당원으로 자리매김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당보다 공화당에 더 가깝다고 믿게 되었다.[3] 존슨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코널리는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대한 주 정부의 거부권을 지지하고, 모든 시민에게 공공 편의 시설 이용을 보장하는 시민권 법과 기타 위대한 사회 입법에 반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했다."[3] 텍사스 민주당의 진보 세력은 코널리가 인종 분리를 지지하고 존슨의 복지 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코널리와 대통령 사이의 균열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분열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더 뉴 리퍼블릭에 따르면 존슨과 코널리는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3]

인종 분리 및 경제 정책 문제에서 존슨과 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동의하고 베트남 전쟁의 확대를 지지했으며, 베트남 전쟁이 매우 인기를 잃은 후에도 존슨을 계속 지지했다.[3] 코널리는 전쟁을 격렬하게 옹호하며, 유진 매카시조지 맥거번과 같은 민주당 진보주의자들이 "유화 정책과 항복"을 지지한다고 비난했고, 피에르 샐린저는 코널리가 "구식 조 매카시즘"을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유진 니커슨은 코널리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견해가 "피에 굶주린" 것이며, 그가 "더 크고 더 나은 전쟁"을 지지한다고 표현했다고 말했다.[3] 코널리는 평생 동안 강경한 매파로 남아 베트남에 대해 공격적인 입장을 유지하도록 존슨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3]

텍사스 주지사로서 코널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라틴 아메리카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1966년 주 최저 임금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 350마일을 걸어온 라틴 아메리카인 그룹을 무시했다"고 보도되었다.[3] 이는 코널리에게 반동적이고, 매우 보수적이며, 무감각한 정치인이라는 평판을 얻게 했다. 1966년, 코널리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더러운 사업이지만 부패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

코널리는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텍사스에서 자신의 정치 기구를 설립하고 철저히 공고히 했으며, "텍사스는 일당제 주이며, 내가 그렇게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 로버트 셰릴에 따르면 코널리는 주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였고, "텍사스 정치의 핵심을 장악한 사람들을 통제했다 – 모두 보수적이었다."[3] 이를 통해 주지사는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주에서 시행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3]

1967년 봄, 코널리는 건강 악화로 네 번째 임기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소화성 궤양을 앓고 있었다. 주지사로서 코널리는 헤미스페어 '68을 홍보했는데, 이는 샌안토니오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였으며, 그는 이 박람회를 통해 주가 1200만달러의 직접적인 세수를 올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박람회의 텍사스관을 영구적인 박물관인 텍사스 문화 연구소로 전환하는 것을 지지했다.

1971년 2월 11일, 닉슨 대통령에 의해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어 1972년까지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47] 유럽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표단은 달러와의 환율 변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코널리는 "당신들은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통화다"라고 대답했다.[47]

코널리는 닉슨의 금 가격 인상 및 달러 공식 평가 절하 프로그램인 닉슨 쇼크를 공개했는데, 이는 193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시작된 구 금본위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조치였다.[18]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행정 분과를 재결성하는 데 고문 위원회로 임명하면서 공화당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그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코널리는 록히드에 대한 대부금 2.5억달러를 보증하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임금과 가격 통제를 시행하도록 닉슨을 설득했다. 또한, 코널리의 주도로 미국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달러와 유동 통화를 평가 절하했다. 그는 유럽일본 대표들과의 협상을 통해 가격 인상과 미국 상품 판매에 유리한 외환 환율을 얻어냈다.

"새 경제 정책"으로 알려진 이 프로그램들은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줄여 닉슨의 재선을 도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통제 수단들의 상승이 "대폭등"을 유발하여 1974년 "대불경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널리는 재직 기간 동안 단조로운 내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71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은 그를 "워싱턴에서 가장 활기 왕성한 남자"라고 칭했다.

코널리는 1972년 5월 재무장관 직을 사임하고, 공화당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주당원 닉슨 지지" 캠페인을 이끌며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을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의 표심을 확보하는 활동을 펼쳤다.[47] 코널리의 전 멘토였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지만, 맥거번은 오랫동안 존슨의 외교 및 국방 정책에 반대해왔다.[21] 코널리와 존슨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편에 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지만, 코널리는 1952년1956년에 공화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를 사적으로 지지한 적이 있었다.[21]

1972년 텍사스 연방 상원 선거에서 코널리는 공화당 현직 의원 존 타워 대신 민주당원 해럴드 베어풋 샌더스를 지지했다. 샌더스는 훗날 댈러스 출신의 연방 판사가 되었다. 코널리는 1966년에 타워에 대항하여 출마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주지사 3선에 도전하는 것을 선택했다.

1973년 1월, 존슨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코널리는 LBJ 목장에서 거행된 존슨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했고, 장례식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집전했다.[21]

1973년 코널리는 공화당원으로 등록했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두 달간 대통령 상담 고문이 되었다. 스피로 애그뉴 사임 후 닉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민주당원들과 공화당원들 모두 그의 정치적 전향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코널리는 곧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75년 연방 대법원은 우유 생산자들을 위한 가격 지원 인상을 대가로 10000USD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4. 1. 초기 정치 활동

1950년대 동안 코널리는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여 텍사스주 석유 부호 시드 W. 리처드슨을 위한 변호사와 진정자가 되었다. 그는 부동산목장에서 소유권을 취득하여 존슨처럼 자신의 젊은 시절의 빈곤을 영원히 탈출하는 데 결심하였다. 정치에 자신을 바친 코널리는 1952년 자신의 당을 탈당하고 대통령을 위하여 아이젠하워를 성원하였다. 4년 후에 그는 집으로 돌아와 보수적 주지사 앨런 샤이버스로부터 주를 왜곡하는 데 자유주의 텍사스주민들과 가입하여 존슨에게 알렸다. 코널리의 냉혹은 자신의 부하가 동정심의 가장 작은 영향마저 결핍한 것을 은밀히 알아차린 존슨을 우둔하게 하였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존슨의 비성공적인 입찰을 관리하는 동안 코널리는 존 F. 케네디의 부족한 건강의 소문들을 퍼뜨렸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의 러닝메이트가 된 존슨과 그의 관계와 선거에서 텍사스주의 주축 역할 때문에 대통령 당선자는 그해 12월 코널리를 해군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코널리는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존슨의 라디오 방송국 KTBC에서 일했으며, 1946년에는 25000USD를 빌려 새로운 라디오 방송국 KVET를 설립했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라디오 방송국 사장을 지냈다. 코널리는 린든 존슨의 1948년 상원 선거에서 수석 전략가가 되었으며, "나는 그 해 선거를 실제로 이끌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3] 존슨이 선거 참여를 꺼려해서 코널리가 대신 출마할 뻔했지만, 존슨이 결국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3]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코널리는 린든 B. 존슨 상원의원의 지지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존 F. 케네디애디슨병코르티손 의존성 때문에 부적합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케네디는 전당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5] 케네디는 남부 민주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삼았고,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코널리를 미국 해군 장관으로 지명했지만, 취임 11개월 만에 텍사스 주지사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다.

4. 2. 텍사스 주지사

1967년, 주지사 시절의 코널리


코널리는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주지사로 재임했다. 1964년과 1966년 선거에서 코널리는 잭 크라이튼(댈러스의 석유 산업가)과 휴스턴의 토마스 에버턴 케너리 시니어(1903–2000) 등 약한 공화당 후보들을 물리치고 각각 73.8%와 72.8%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거의 모든 민주당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8]

코널리는 텍사스 고등 교육이 크게 확장되던 시기에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는 텍사스 고등 교육 조정 위원회의 설립에 서명했다. 그는 이전에 남성만 입학이 가능했던 텍사스 A&M 대학교 칼리지 스테이션에 여성의 입학을 지지하는 섭정들을 임명했으며, 이는 1953년 최초로 이 학교에 여성의 입학을 제안했던 브라이언 출신의 주 상원 의원 윌리엄 T. "빌" 무어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9]

1965년 텍사스 A&M 대학교 시스템에서 알링턴 주립 대학을 분리하는 법안에 서명하는 코널리 주지사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이후, 코널리는 1964년 압도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텍사스 유권자들에게 거의 반신과 같은 상징이 되었다. 주지사는 매우 종교적이 되었고, 그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믿었다.[3] 그는 "이제 나는 선출되기보다는, 아마도 내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나를 여기 남겨두기로 선택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3]

1964년 재선 이후 코널리는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고, 텍사스에서 그 시행을 막으려 했다. 코널리는 또한 노동 조합의 강력한 반대자였으며, 텍사스에서 근로의 권리법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이로 인해 AFL-CIO는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텍사스 공화당은 코널리의 보수적인 견해를 강력히 칭찬했고, 휴스턴의 공화당원 앨버트 B. 페이는 "그를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공화당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3]

코널리는 솔리드 사우스의 기준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민주당원으로 자리매김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당보다 공화당에 더 가깝다고 믿게 되었다.[3] 존슨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코널리는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대한 주 정부의 거부권을 지지하고, 모든 시민에게 공공 편의 시설 이용을 보장하는 시민권 법과 기타 위대한 사회 입법에 반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했다."[3] 텍사스 민주당의 진보 세력은 코널리가 인종 분리를 지지하고 존슨의 복지 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코널리와 대통령 사이의 균열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분열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더 뉴 리퍼블릭에 따르면 존슨과 코널리는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3]

코널리는 인종 분리 및 경제 정책 문제에서 존슨과 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동의하고 베트남 전쟁의 확대를 지지했으며, 베트남 전쟁이 매우 인기를 잃은 후에도 존슨을 계속 지지했다.[3] 코널리는 전쟁을 격렬하게 옹호하며, 유진 매카시조지 맥거번과 같은 민주당 진보주의자들이 "유화 정책과 항복"을 지지한다고 비난했고, 피에르 샐린저는 코널리가 "구식 조 매카시즘"을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유진 니커슨은 코널리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견해가 "피에 굶주린" 것이며, 그가 "더 크고 더 나은 전쟁"을 지지한다고 표현했다고 말했다.[3] 코널리는 평생 동안 강경한 매파로 남아 베트남에 대해 공격적인 입장을 유지하도록 존슨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3]

텍사스 주지사로서 코널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라틴 아메리카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1966년 주 최저 임금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 350마일을 걸어온 라틴 아메리카인 그룹을 무시했다"고 보도되었다.[3] 이는 코널리에게 반동적이고, 매우 보수적이며, 무감각한 정치인이라는 평판을 얻게 했다. 1966년, 코널리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더러운 사업이지만 부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열하다... 그것은 거칠다...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비열한 말을 할 것이지만, 이것은 당신이 짊어져야 할 부담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비열한 말을 하고, 올해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3]

코널리는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텍사스에서 자신의 정치 기구를 설립하고 철저히 공고히 했으며, "텍사스는 일당제 주이며, 내가 그렇게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 로버트 셰릴에 따르면 코널리는 주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였고, "텍사스 정치의 핵심을 장악한 사람들을 통제했다 – 모두 보수적이었다."[3] 이를 통해 주지사는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주에서 시행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3]

1967년 봄, 코널리는 건강 악화로 네 번째 임기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소화성 궤양을 앓고 있었다.

주지사로서 코널리는 헤미스페어 '68을 홍보했는데, 이는 샌안토니오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였으며, 그는 이 박람회를 통해 주가 1200만달러의 직접적인 세수를 올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박람회의 텍사스관을 영구적인 박물관인 텍사스 문화 연구소로 전환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이를 "텍사스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의 혈통과 꿈이 우리 주를 건설한 극적인 쇼케이스"로 묘사했다.

4. 3. 민주당 내 갈등과 닉슨 지지

코널리는 1972년 5월 재무장관 직을 사임하고, 공화당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주당원 닉슨 지지" 캠페인을 이끌며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을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의 표심을 확보하는 활동을 펼쳤다.[47] 코널리의 전 멘토였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지만, 맥거번은 오랫동안 존슨의 외교 및 국방 정책에 반대해왔다.[21] 코널리와 존슨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편에 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지만, 코널리는 1952년1956년에 공화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를 사적으로 지지한 적이 있었다.[21]

1972년 텍사스 연방 상원 선거에서 코널리는 공화당 현직 의원 존 타워 대신 민주당원 해럴드 베어풋 샌더스를 지지했다. 샌더스는 훗날 댈러스 출신의 연방 판사가 되었다. 코널리는 1966년에 타워에 대항하여 출마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주지사 3선에 도전하는 것을 선택했다.

1973년 1월, 존슨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코널리는 LBJ 목장에서 거행된 존슨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했고, 장례식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집전했다.[21]

1973년 5월, 코널리는 공화당에 입당했다.[22] 부통령 스파이로 애그뉴가 스캔들로 인해 5개월 후 사임하자, 닉슨은 코널리를 부통령 후보로 고려했지만, 의회 내 민주당원들의 임명 저지 가능성을 우려하여 제럴드 포드를 선택했다.[22]

4. 4. 재무 장관

John Connally영어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행정 분과를 재결성하는 데 고문 위원회로 임명하면서 공화당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그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코널리는 록히드에 대한 대부금 2.5억달러를 보증하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임금과 가격 통제를 시행하도록 닉슨을 설득했다. 또한, 코널리의 주도로 미국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달러와 유동 통화를 평가 절하했다. 그는 유럽일본 대표들과의 협상을 통해 가격 인상과 미국 상품 판매에 유리한 외환 환율을 얻어냈다.

"새 경제 정책"으로 알려진 이 프로그램들은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줄여 닉슨의 재선을 도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통제 수단들의 상승이 "대폭등"을 유발하여 1974년 "대불경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널리는 재직 기간 동안 단조로운 내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71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은 그를 "워싱턴에서 가장 활기 왕성한 남자"라고 칭하며, 비즈니스와 노동 지도자들에게 "더 많은 직업, 이득, 교역을 원한다면 위조품을 빼라"고 말했다고 인용했다.

1973년 코널리는 공화당원으로 등록했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두 달간 대통령 상담 고문이 되었다. 스피로 애그뉴 사임 후 닉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민주당원들과 공화당원들 모두 그의 정치적 전향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코널리는 곧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75년 연방 대법원은 우유 생산자들을 위한 가격 지원 인상을 대가로 10000USD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971년 2월 11일, 닉슨 대통령에 의해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어 1972년까지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47] 유럽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표단은 달러와의 환율 변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코널리는 "당신들은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통화다"라고 대답했다.[47]

코널리의 재무부 공식 초상화


미국 통화에 사용된 코널리의 서명


코널리는 닉슨의 금 가격 인상 및 달러 공식 평가 절하 프로그램인 닉슨 쇼크를 공개했는데, 이는 193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시작된 구 금본위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조치였다.[18]

5. 공화당으로 당적 변경과 이후 활동

코널리는 1972년 5월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나 공화당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주당원 닉슨 지지" 캠페인을 이끌며 1972년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에 대한 민주당 지지를 촉진했다.[19] 그의 전 멘토였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지만, 코널리와 존슨은 이 대선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편에 섰다. 코널리는 1973년 5월에 공화당으로 당적을 변경했다.[22]

스파이로 애그뉴 부통령이 사임하자 닉슨은 코널리를 후임 부통령 후보로 고려했지만, 의회 민주당원들의 반발 가능성을 우려하여 제럴드 포드를 선택했다.[22] 텍사스 민주당의 유력 인사 밥 불록은 코널리의 당적 변경에 대해 "그는 댈러스에서 총에 맞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22]

1980년 대선에서 코널리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25] 그는 훌륭한 웅변가이자 강력한 지도자로 평가받았지만, 경선 과정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25] 코널리는 캠페인 기간 동안 1100만달러를 지출했지만, 단 한 명의 대의원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33]

코널리는 외교 정책에서 중동 문제에 대해 사우디 아라비아의 입장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30][25] 그는 전미 기자 클럽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과 이스라엘의 생존권 보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중동 평화 해법을 제시했다.[25]

경선에서 패배한 후 코널리는 레이건을 지지했으며, 레이건 행정부에서 미국 에너지 장관 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34][35] 그는 대통령 외교 정보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35]

1986년, 코널리는 사업 실패로 인해 파산을 신청했다.[38] 1990년에는 이라크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만나 인질 석방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6. 사망

존 코널리(John Connally)는 1993년 휴스턴에서 폐섬유증으로 사망하였고,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주립 묘지에 안장되었다.[1][39]

존 코널리 묘비,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주립 묘지에 위치


1993년 5월 17일, 코널리는 호흡 곤란을 겪어 휴스턴에 있는 휴스턴 감리교 병원에 입원했으며, 6월 15일 76세의 나이로 폐섬유증으로 사망했다.[1][39]

코널리가 사망하자, 법의학 병리학자 시릴 웨흐트 박사와 암살 기록 보존 및 연구 센터는 미국 법무부 장관 재닛 리노에게 코널리의 몸에서 남은 탄환 파편을 회수해 줄 것을 청원했다. 이들은 이 탄환 파편이 워렌 위원회의 단일 탄환 이론과 단독 범행 결론을 반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법무부는 "코널리 가족이 허락하지 않는 한 파편을 회수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코널리의 가족은 허가를 거부했다.[40][41][42]

그의 장례식은 1993년 6월 17일, 코널리와 그의 아내 넬리 코널리가 1963년부터 회원으로 있었던 오스틴 제일 연합 감리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전 대통령 닉슨이 참석했다.[43] 코널리의 아내 넬리는 2006년에 사망했으며, 그들은 오스틴의 텍사스 주립 묘지에 함께 묻혔다.

7. 평가

코널리는 백인 남부인들의 운동, 역사적으로 보수적인 단체, 그리고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의 전향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능력과 교활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신임을 얻는 데는 실패했고, 양당 모두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지 못했다. 코널리의 평판은 강력한 대통령들과의 관계로 인해 유권자들을 멀리하고, 그의 가장 밝은 부하들을 변색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

코널리의 논문들은 오스틴에 있는 린든 베인스 존슨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기 허스코위츠와 공동 저술한 코널리의 회고록은 《역사의 그림자에서: 미국의 오디세이》(1993년)이다. 초기의 전기에는 찰스 애슈먼의 《코널리: 빅 배드 존의 모험》(1974년)이 있다. 표준 전기로는 제임스 레스턴 주니어의 《홀로의 별: 존 코널리의 일생》(1989년)이 꼽힌다. 닉슨 행정부에서 코널리의 복무는 헨리 키신저의 《백악관 세월》(1979년), 조안 호프의 《닉슨이 재숙고하였다》(1994년), 앨런 J. 매튜소의 《닉슨의 경제: 붐, 파산, 달러와 투표들》(1998년)에서 다루어졌다. 그의 사망 기사는 뉴욕 타임스(1993년 6월 16일)에 실렸다.[1]

텍사스에는 코널리의 이름을 딴 많은 건물과 기관이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교육 기관으로는 노스사이드 ISD의 일부인 존 B. 코널리 중학교와 플러거빌 ISD의 일부인 존 B. 코널리 고등학교가 있다. 텍사스 A&M 대학교와 텍사스 주립 기술 대학교는 각각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샌안토니오의 주간 고속도로 410호선 일부인 코널리 루프, 카네스 카운티에 있는 텍사스 형사 사법부의 존 B. 코널리 부서 등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플로레스빌에 있는 코널리 기념 의료 센터는 코널리 가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휴스턴 시내에는 코널리 플라자에 코널리의 실물 크기 동상이 있다.[1]

1964년 1월, 코널리는 1963년 11월 22일에 입었던 양복을 텍사스 주립 도서관 및 기록 위원회(TSLAC)에 기증했다. 이 양복은 1964년 3월까지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2000년에는 TSLAC가 검토를 목적으로 이 양복을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에 대여했다. 2013년 10월부터 2014년 2월까지는 케네디 암살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TSLAC 전시의 일부로 전시되었다.[1]

코널리는 아내 넬리와 함께 낮 드라마에 열중했다. 1976년 1월 12일자 타임지 기사에서는, 그들이 "사랑 이야기"를 시청 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1]

8.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62년 선거텍사스 주지사39대민주당53.98%847,038표1위
텍사스 주지사 당선
1964년 선거텍사스 주지사39대민주당73.79%1,877,793표1위
1966년 선거텍사스 주지사39대민주당72.76%1,037,517표1위


참조

[1] 뉴스 John Connally of Texas, a Power In 2 Political Parties, Dies at 76 https://www.nytimes.[...] 2010-05-06
[2] 뉴스 Former Texas Governor Dies https://news.google.[...] 2015-09-16
[3] 논문 "An Analysis and Evaluation of John Connally's May 28, 1971 Speech at Munich, Germany During the International Monetary Crisis https://thekeep.eiu.[...] Eastern Illinois University 1973
[4] 서적 Connally: The Adventures of Big Bad John https://archive.org/[...] William Morrow & Company
[5] 웹사이트 JFK and Texas' John Connally shared a fateful day and fragile past http://www.dallasnew[...] 2015-09-16
[6] 뉴스 Nation: Talking in Texas http://www.time.com/[...] Time 2010-10-06
[7] 웹사이트 Elections of Texas Governors, 1845–2010 {{!}} Texas Almanac http://texasalmanac.[...] 2023-12-30
[8] 간행물 Election Statistics, ''Congressional Quarterly's Guide to U.S. Elections'', Gubernatorial elections
[9] 뉴스 Bull of the Brazos dies: Moore was champion of Texas A&M Bryan-College Station Eagle 1999-05-28
[10] 서적 Barn Burning Barn Building: Tales of a Political Life from LBJ to George W. Bush and Beyond https://archive.org/[...] Bright Sky Press
[11] 문서 Warren Commission Hearings http://www.history-m[...]
[12] 웹사이트 HSCA Report, Volume VII: Entrance (inshoot) wound of the right lateral back (thorax) https://www.maryferr[...] 2022-01-27
[13] 뉴스 Connally told of Kennedy's death https://www.upi.com/[...] 1963-11-23
[14] 문서 The Wounding of Governor Connally --- Burying the Single Bullet Theory https://educationfor[...] The Education Forum 2005-12-17
[15] 뉴스 Connally Says Oswald Acted Alone; Raps Warren Commission Critics https://news.google.[...] 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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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http://www.project-s[...]
[18] 문서 Bruce Schulman: ''The Seventies: The Great Shift in American Culture, Society, and Politics'', Da Capo Press
[19] 잡지 POLITICS: Connolly in Motion https://content.time[...] 2023-03-30
[20] 웹사이트 170. Memorandum From the President's Assistant for National Security Affairs (Kissinger) to President Nixon https://history.stat[...] Office of the Historian 2023-03-30
[21] 뉴스 LBJ Buried in Beloved Texas Hills 1973-01-26
[22] 웹사이트 The Truth About John Connally http://www.texasmont[...] 2015-09-16
[23] 뉴스 Nixon Says He Saved W. Pakistan and Sadat https://www.washingt[...] 2023-03-30
[24] 웹사이트 The Deseret News - Google News Archive Search https://news.google.[...]
[25] 서적 The Lone Star: The Life of John Connally HarperCollins 1989-10-01
[26] 웹사이트 Lewiston Evening Journal - Google News Archive Search https://news.google.[...]
[27] 웹사이트 Connally Pleads Not Guilty to Bribery, Perjury and Conspiracy in the Milk Case https://www.nytimes.[...] 1974-08-10
[28] 웹사이트 Not Guilty https://www.texasmon[...] The jury in John Connally's trial had been the only silent players on the courtroom stage. Now, while everyone else waited, they talked 1975-06
[29] 뉴스 Agnich to head area Connally group Dallas Times-Herald 1979-10-09
[30] 뉴스 The Astrology of Oil and The Art of Survival https://www.washingt[...] 2023-03-30
[31] 서적 Strom Thurmond's America: A History https://books.google[...] Farrar, Straus and Giroux 2012-09-04
[32] 뉴스 Reagan Gains Connally Endorsement https://www.washingt[...] 2016-04-20
[33] 잡지 Adieu, Big John http://www.time.com/[...] 2010-09-08
[34] 뉴스 John Connally rejected the position of energy secretary in... https://www.upi.com/[...] 2023-03-29
[35] 뉴스 JOHN CONNALLY'S BIG INTEREST, FOR NOW IS LAW https://www.nytimes.[...] 2023-03-29
[36] 뉴스 A Four-Decade Secret: One Man's Story of Sabotaging Carter's Re-election https://www.nytimes.[...] 2023-03-19
[37] 뉴스 JUDGE DENIES CONNALLY SUBPOENA IN TRIAL OF 3 ALLEGED MERCENARIES https://www.nytimes.[...] 1981-06-14
[38] 웹사이트 Connally, John Bowden Jr. http://www.tshaonlin[...] 2010-06-12
[39] 뉴스 FREEWHEELING TEXAS GOVERNOR JOHN CONNALLY DIES https://www.washingt[...] 2021-05-29
[40] 뉴스 Wecht presses to recover Connally bullet fragments https://news.google.[...] 2015-03-21
[41] 뉴스 Connally Takes Bullet Pieces to Grave https://www.washingt[...] 1993-06-18
[42] 뉴스 Connally Buried with Bullet Fragments https://www.orlandos[...] 1993-06-18
[43] 웹사이트 Mourners pay last respects to former Texas Gov. John Connally https://www.upi.com/[...] 2021-05-29
[44] 웹사이트 John B. Connally https://houstonartsf[...] 2023-03-23
[45] 웹사이트 Governor Connally's Suit https://www.tsl.texa[...] 2015-09-16
[46] 웹사이트 Gov. John Connally's suit from JFK motorcade gets rare public display in Austin http://www.dallasnew[...] 2015-09-16
[47] 웹사이트 The Dollar Wars Return http://www.project-s[...] Project Syndicate 201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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