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베 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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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베 노리오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은퇴했으며, 통산 2번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세이부 라이온스, 한화 이글스에서 코치를 역임했고, 2014년에는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대행을 거쳐 정식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25년부터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3군 야수 코치로 현장에 복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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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베 노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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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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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나베 노리오 (田辺 徳雄) |
출생일 | 1966년 5월 11일 |
출생지 | 야마나시현 후지요시다시, 일본 |
포지션 | 내야수, 코치, 감독 |
타격 | 우타 |
투구 | 우투 |
등번호 | 76 |
프로 데뷔 | 1985년 8월 26일, 세이부 라이온스 |
마지막 경기 | 2000년 6월 1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
타율 | 0.268 |
홈런 | 87 |
안타 | 926 |
선수 경력 | |
소속 팀 | 세이부 라이온스 (1985년–199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년) |
코치 경력 | |
소속 팀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02년–2009년, 2010년–2014, 2020년-2022년, 2025년-) 한화 이글스 (2017, 2019) |
감독 경력 | |
소속 팀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14년–2016년) |
수상 경력 | |
베스트 나인 | 2회 (1989년, 1992년) |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 | 2회 (1989, 1992) |
NPB 올스타 | 2회 (1992, 1994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7회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2000) |
기타 정보 | |
최종 업데이트 | 2024년 11월 16일 |
2. 선수 시절
요시다 고교 시절 하계 고시엔에 출전했으며, 1984년 드래프트 2순위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42][5] 입단 초기에는 2군과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경험을 쌓았고, 1987년부터 1군 주전 유격수로 발돋움했다.[43][6][44][7]
1989년에는 타율 .316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처음 수상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1][12] 이후 세이부의 주전 내야수로서 팀의 리그 5연패(1990~1994)에 기여했으며, 1992년에는 다시 한번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3][14][15] 1994년에는 1994년 일본 시리즈에서 만루 홈런을 치는 등 활약하며 연봉 1억엔 (추정)을 돌파했다.[18]
팀 내 경쟁과 마쓰이 가즈오 등 후배들의 성장으로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으나, 3루수와 2루수를 오가며 꾸준히 활약했다. 1997년 199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대타로 나와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세이부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19]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2000년 한 시즌을 더 뛰었으나 주전 경쟁에서 밀려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55] 2000년 일본 시리즈 종료 후 방출되었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42]
2. 1. 아마추어 시절
야마나시 현립 요시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83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1차전에서 요시이 마사토와 야마시타 노리토가 있던 미노시마 고등학교와 맞붙었으나 연장 13회 접전 끝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42][5]당초 대학 진학 의사를 밝혔으나, 198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스의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등번호는 51번을 받았다. 입단 당시 세이부는 황금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는데, 다나베는 주변 동료 선수들의 뛰어난 체격과 실력을 보며 프로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42][5]
2. 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84년 드래프트에서 2위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등번호는 '''51'''번이었다. 당시 세이부는 황금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주변 선수들의 뛰어난 체격과 플레이를 보고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5]입단 초기 2군에서는 히노 시게루 감독과 히로세 오사무 수비 코치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낮 경기가 끝나면 특별 수비 훈련을 받았고, 저녁 식사 후에도 야간 연습을 하는 등 혹독하게 단련되었다.[42][5] 이러한 노력 덕분에 데뷔 첫 해인 1985년에는 이스턴 리그에서 3할 타율을 기록했고, 가을에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린 교육 리그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1986년에는 미국 1A 리그인 캘리포니아 리그의 새너제이 비즈에서 1번 타자로 활약하며 140경기에 출전해 .306의 타율을 기록했고,[43][6] 1A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44][7] 그는 낡은 스파이크를 신고 뛰는 동료 선수들을 보며 헝그리 정신을 배웠다고 회고했다.[44][7]
한편, 1986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부임하면서 아키야마 고지가 3루수에서 중견수로, 이시게 히로미치가 유격수에서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다나베는 이시게의 후임 유격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1987년에는 등번호를 '''6'''번으로 변경하고 개막전부터 주전 유격수로 나섰다. 하지만 지나친 의욕 탓에 연습 중 부상을 당했고,[44][7] 벤 오길비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후반기를 2군에서 보냈다.
1988년에는 세이케 마사카즈와 주전 유격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여 개인 최다인 51안타, 타율 .258을 기록하며 타격 능력을 앞세워 포지션을 확보했다.[45][8] 그러나 시즌 중 팔꿈치 부상을 입었고, 이를 감싸고 뛰다 8월에는 어깨까지 다쳐[46][9] 후반기에 다시 1군에서 제외되었다.
1989년에는 3월 11일 시범 경기에서 수비 중 타구에 뛰어들다 오른쪽 어깨 쇄골 관절 탈구 부상을 당해 개막 후 16경기에 결장했다.[10] 하지만 복귀 후 맹타상을 6차례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타순도 8번에서 6번으로 상승했다.[10] 이 해 주전 유격수로 완전히 자리매김했고, 7월에는 만루 홈런을 기록했으며,[11] 최종적으로 부머 웰스에 이어 리그 타율 2위(.316)를 달성하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같은 해 12월 7일에는 3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식을 올리고 독신자 기숙사를 나왔다.[12]
1990년부터는 주전 유격수로서 팀의 리그 5연패에 기여했다. 1992년 올스타 게임 1차전에서는 7번 타자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5회, 고마쓰 다쓰오를 상대로 6번 타자 이시이 히로오, 8번 타자 사사키 마코토와 함께 3타자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웠다.[13] 이 경기에서 3안타를 치며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14] 정규 시즌에서는 리그 3위인 타율 .302를 기록했는데,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 3할 타자는 다나베, 사사키 마코토, 켈빈 토베 단 3명뿐이었다.[15] 이 해 다시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4차례 연장전 끝에 4승 3패로 승리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992년 일본 시리즈를 자신이 출전한 일본 시리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시리즈로 꼽았다.[16]
1993년에는 나라하라 히로시의 성장으로 출전 기회가 감소하여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구단으로부터 꾸준한 활약을 인정받아 775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7] 1994년에도 규정 타석에는 미달했지만 개인 최고 타율인 .338을 기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94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미즈노 유지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터뜨렸고, 시즌 후 계약 갱신에서 연봉 1억엔(추정)을 돌파하며 억대 연봉자가 되었다.[18] 같은 해 오프 시즌에 이시게 히로미치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면서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유격수 자리는 마쓰이 가즈오와 나라하라가 맡게 되었다. 이후 스콧 쿠퍼와 스즈키 켄이 주전 3루수로 자리 잡으면서 다나베는 2루수와 3루수를 오가며 활약했다.
1997년 야쿠르트와의 1997년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연장 10회 대타로 나와 이토 도모히토에게 끝내기 안타를 쳤다.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행사하지 않고 팀에 잔류했다. 1999년에는 베테랑으로서 여름에도 정오 12시에 가장 먼저 구장에 나와 런닝, 전력 질주, 티 배팅 등 개인 훈련을 전체 훈련 전에 소화하며 경기에 대비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19] 그러나 같은 해 10월 6일, 팀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2.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99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이적했다. 이적 당시 연봉은 약 3200만엔였으며,[55] 다나베 본인은 다음 시즌이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고 한다.[42]이적 첫 해인 2000년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7경기 출전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2000년 일본 시리즈가 끝난 다음 날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고, 약 한 달간 고민 끝에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42]
3. 야구선수 은퇴 후
200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후 은퇴했다.[42]
은퇴 이듬해인 2001년에는 분카 방송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2002년부터는 친정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2군 타격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등번호 '''76'''). 이 시기 나카무라 다케야, 구리야마 다쿠미 등 젊은 타자들을 육성하여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006년 12월 25일에는 와세다 대학 인간과학부 통신 교육 과정에 합격하여[21] 4년 만에 졸업했다.
이후 세이부에서 여러 보직을 거쳤다. 2007년에는 2군 야수 종합 코치, 2008년에는 2군 수비·주루 코치, 2009년에는 다시 2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10년에는 잠시 구단 프런트로 이동했으나, 같은 해 7월 22일 오쿠보 히로모토 2군 타격 코치가 부적절한 행위로 해임되자[21] 29일자로 다시 2군 타격 코치로 복귀했다(등번호 '''82''').[22] 2012년까지 2군 타격 코치를 맡다가[23][24] 2013년부터 1군 타격 코치로 승격되었다.[25]
2014년 시즌 초, 팀이 최하위로 부진하자 6월 4일 이하라 하루키 감독이 휴양을 신청했고, 다나베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27] 이후 6월 27일 이하라 감독이 정식으로 사임한 후에도[28] 감독 대행직을 유지했으며, 시즌 종료 후인 10월 2일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29] 등번호는 '''90'''번으로 변경했다. 2015년 시즌 후 연임이 결정되었고,[30] 2016년 1월 29일에는 세이부 철도 도코로자와역에서 일일 역장을 맡기도 했다.[31] 그러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팀을 A클래스(리그 3위 이상)로 이끌지 못했고, 2016년 9월 27일 구단에 사의를 표명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32][33]
2017년 2월 1일, 세이부 구단 본부 팀 어드바이저로 취임했다.[34] 같은 해 2월부터 3월까지는 KBO 리그의 한화 이글스에서 임시 순회 타격·수비 코치를 맡았으며, 임기는 5월 15일까지 연장되었다. 2019년에는 한화 이글스의 정식 타격 코치로 계약했으나, 그해 10월 계약이 해지되었다.
2020년 다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복귀하여 3군 통괄 코치(등번호 '''71''')를 맡았다.[35] 이후 팜(2군) 야수 특명 코치를 거쳐 2022년 시즌 종료 후 코치직에서 사임했다.[36] 2023년에는 구단 팀 스태프로 남아 프로 담당 겸 기획실 업무를 맡았다. 2025년부터는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여 3군 야수 코치를 맡을 예정이며, 등번호는 '''76'''번이다.
4. 플레이 스타일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1A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경험을 쌓고[43][44] 귀국한 후에는 이시게 히로미치의 뒤를 이을 유격수로 기대를 모았다. 초기에는 부상 등으로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44][46] 1989년 마침내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해 타격에서 부머 웰스에 이어 리그 2위의 타율을 기록하고, 수비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공수 양면에서 핵심 선수로 발돋움했다.[47] 이후 세이부 라이온스가 리그 5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주전 유격수로서 활약했으며, 1992년에는 다시 한번 리그 타율 3위,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50]
1993년부터는 팀 내 경쟁자인 나라하라 히로시의 성장으로 인해 출전 기회가 점차 줄어들었다.[52] 1994년 시즌 종료 후, 팀의 간판선수였던 이시게 히로미치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자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이로 인해 마쓰이 가즈오와 나라하라가 주로 유격수를 맡게 되었다. 이후 스콧 쿠퍼나 스즈키 겐 등 새로운 선수들이 주전 3루수로 기용되면서, 다나베는 주로 2루수나 3루수 백업, 또는 대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1997년 야쿠르트와의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대타로 나와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베테랑으로서 중요한 순간에 활약했다. 선수 생활 말년인 1999년에는 주로 대타로 출전하면서도, 경기 전 개인 훈련을 가장 먼저 시작하는 등 성실한 자세를 유지했다.[54]
4. 1. 타격
미국 유학 시절 크라우칭 스타일을 익혔으나, 일본 투수들의 좌우로 흔드는 투구에 대처하기 어려워[9] 발을 들어 올리며 공을 끌어들이는 스타일로 변경했다[16]. 타격 포인트를 가까이 두면서 광각 타법이 몸에 익었고, 1루와 2루 사이를 빠져나가는 안타나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이른바 '텍사스 히트'가 증가했다[16]. 아키야마 고지와 기요하라 가즈히로로 이루어진 AK포의 뒤를 치는 6번 타자를 맡던 시절에는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아 안타를 노리고 타석에 섰다고 한다[37].가운데로 들어오는 직구는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어 놓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높은 공은 볼로 보이는 공이라도 적극적으로 타격했다[16]. 이러한 공격적인 타격 스타일 때문에 상대 팀 포수였던 다무라 후지오 등은 그를 상대하기 까다로워했다고 한다[16]. 하지만 팀 내 미팅에서는 타격 코치로부터 호된 지적을 받는 일도 잦았다[16].
4. 2. 수비
유격수 시절 2루수인 쓰지 하쓰히코와 3루수인 이시게 히로미치라는 간판 수비수들과 함께 안정적인 내야 수비를 구축했다. 유격수 경험이 많았던 이시게 히로미치에게서는 수비에 대한 엄격한 지도를 받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공을 잡는 바람에 이시게를 격노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44] 쓰지 하쓰히코와는 스프링 캠프 때부터 연계 플레이 연습을 함께 했지만, 6-4-3 병살 플레이 송구를 할 때는 매우 긴장했다고 한다.[44]당시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는 다나베가 여유를 갖고 타구를 쫓아가는 고도의 신체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41]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이시게 히로미치가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 약 10년간 세이부 라이온스의 주전 유격수로서 팀 수비를 지탱했다.[41]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1989년과 1992년 두 차례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30세를 지나면서 유격수 수비에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51] 1994년 시즌 후 이시게 히로미치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면서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이후 마쓰이 가즈오, 나라하라 히로시가 주로 유격수를 맡게 되었다. 그 후 스콧 쿠퍼나 스즈키 겐이 주전 3루수가 되면서 다나베는 2루수나 3루수를 맡았다. 그는 2루나 3루 수비를 통해 새로운 시점을 얻을 수가 있어서 공부가 됐다고 한다.[51]
그의 수비 능력은 2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통해 다져졌다. 2군 감독 히노 시게루와 코치 히로세 오사무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는데, 낮 경기를 마친 후에는 특훈을 받았고 저녁 식사 후에도 야간 연습을 했다.[42][5]
5. 감독으로서의 특징
2014년 감독 대행으로 취임했을 때, 선수들의 수염 기르기, 염색, 긴 바지 착용을 금지했던 전임 감독 이하라 하루키(伊原春樹)[38]와는 달리, 이러한 것들을 허용하는 방침을 밝혔다.[39] 이는 선수들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선수 및 코칭스태프 간의 원활한 대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리더십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39][40]
6. 상세 정보
2군 시절 히노 시게루 감독과 히로세 오사무 코치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며, 미국 교육 리그와 캘리포니아 리그 경험을 통해 기량을 연마했다.[5][6][7] 1987년 등번호 '''6'''번을 달고 1군 주전으로 도약했으나 부상으로 주춤하기도 했다.[7] 1989년 주전 유격수로 자리매김하며 리그 타율 2위(.316)에 오르고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처음 수상하는 등[10][11][12] 세이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90년부터 팀의 리그 5연패 시절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1992년에는 다시 타율 3할(.302)을 넘기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고 올스타전에서도 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13][14][15][16]
이후 나라하라 히로시, 마쓰이 가즈오 등 후배들의 성장으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이시게 히로노리의 이적 후에는 3루수나 2루수로도 출전했다.[17][18] 199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대타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베테랑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1999년 시즌 후 세이부에서 방출되어 현금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고,[19][20] 2000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5]
은퇴 이듬해 분카 방송 해설가를 거쳐 2002년부터 친정팀 세이부의 코치로 복귀했다. 2군 타격 코치를 시작으로 여러 보직을 거치며 나카무라 가쓰야, 쿠리야마 쇼고 등 젊은 타자 육성에 힘썼다. 코치 재임 중 와세다 대학 인간과학부 통신 교육 과정을 이수하여 졸업하기도 했다. 2013년 1군 타격 코치로 승격되었고, 2014년 시즌 중 이하라 하루키 감독의 사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았다.[21][22][23][24][25][26][27][28] 2015년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여 등번호 '''90'''번을 달고 2016년까지 팀을 지휘했으나,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29][30][32][33]
6. 1. 출신 학교
야마나시 현립 요시다 고등학교 출신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83년에 열린 하계 고시엔 대회(제6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1차전에서 요시이 마사토, 야마시타 노리히토가 소속된 미노시마 고등학교와 맞대결을 했으나 연장 13회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198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당시 세이부의 황금기가 시작되던 때였는데, 주위 선수들의 뛰어난 체격이나 활약을 보며 프로에서 잘 해나갈 수 있을지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42]6. 2. 수상·타이틀 경력
6. 3. 개인 기록
2군 시절에는 감독 히노 시게루와 수비 코치 히로세 오사무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낮 경기를 마친 후 특훈을 받고 저녁 식사 후에도 야간 연습을 할 정도였다.[42][5] 이러한 노력 덕분에 데뷔 첫 해인 1985년에는 이스턴 리그에서 3할 타율을 기록했고, 가을에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린 교육 리그에 파견되었다. 1986년에는 1A 수준인 캘리포니아 리그의 새너제이 비즈에서 1번 타자로 활약하며 140경기에 출전해 3할대 타율(.306)을 기록했고,[43][6] 1A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44][7] 그는 당시 낡은 스파이크를 사용하는 동료 선수들을 보며 헝그리 정신을 배웠다고 회고했다.[44][7]1986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 내 포지션 변경이 이루어졌다. 아키야마 고지는 3루수에서 중견수로, 이시게 히로미치는 유격수에서 3루수로 이동했다. 다나베는 이시게의 뒤를 이을 유격수로 기대를 받았다. 1987년에는 등번호를 '''6'''번으로 변경하고 개막전부터 주전으로 나섰으나, 과도한 긴장 탓인지 연습 중 부상을 당했고,[44][7] 벤 오글리비에게 발을 밟히는 부상까지 겹쳐 후반기는 2군에서 보내야 했다.
1988년에는 키요이 마사카즈와 주전 유격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여 51안타와 타율 .258을 기록하며 타격으로 자리를 확보했다.[45][8] 하지만 시즌 중 팔꿈치 부상을 입었고, 이를 보호하려다 8월에는 어깨까지 다쳐[46][9] 다시 1군에서 제외되었다.
1989년 3월 11일 시범 경기에서 타구를 잡으려다 오른쪽 어깨 쇄골 관절이 탈구되어 개막 후 16경기에 결장했다.[47][10] 복귀 후 맹타상을 6차례 기록하는 등 활약하며 타순도 8번에서 6번으로 올랐고, 7월에는 만루 홈런을 치기도 했다.[11] 이 해 처음으로 시즌 내내 주전으로 활약하며 부머 웰스에 이어 리그 타율 2위(.316)를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시즌 종료 후인 12월 7일, 3세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며 독신자 기숙사를 나왔다.[48][12] 1990년부터는 주전 유격수로서 팀의 리그 5연패에 기여했다.
1992년에는 올스타전 1차전에 선발 출전하여 이시이 히로오, 사사키 마코토와 함께 코마츠 타츠오로부터 3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등[13] 3안타 활약으로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49][50][14] 정규 시즌에서는 리그 타율 3위(.302)를 기록하며[15] 다시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그는 4번의 연장전 끝에 4승 3패로 승리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992년 일본 시리즈가 선수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일본 시리즈였다고 말했다.[51][16]
1993년에는 나라하라 히로시의 성장으로 출전 기회가 줄어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구단은 그의 기여를 인정하여 연봉 775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52][17] 1994년에도 규정 타석에는 미달했지만 개인 최고 타율인 .338을 기록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94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미즈노 유지로부터 만루 홈런을 치는 활약을 보였다. 계약 갱신을 통해 연봉 1억엔(추정)을 돌파하며 억대 연봉 선수가 되었다.[53][18] 같은 해 오프 시즌, 이시게 히로노리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하면서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유격수는 마쓰이 가즈오와 나라하라가 맡게 되었다. 이후 스콧 쿠퍼나 스즈키 겐이 주전 3루수로 기용되면서 다나베는 2루수와 3루수를 오갔다.
1997년 야쿠르트와의 1997년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연장 10회에 대타로 나와 이토 도모히토에게 끝내기 안타를 쳤다. 시즌 후 프리 에이전트(FA) 권리를 얻었지만 행사하지 않고 팀에 잔류했다. 주로 대타로 출전하던 1999년에는 여름에도 정오에 가장 먼저 구장에 도착해 개인 훈련을 소화하며 경기를 준비하는 성실함을 보였다.[54][19] 그러나 시즌 종료 후인 10월 6일 전력 외 통보를 받았고, 11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의 현금 트레이드가 발표되었다. 그는 연봉 3200만엔(추정), 등번호 '''23'''번으로 계약했으며,[55][20] 다음 시즌이 현역 마지막 해가 될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고 한다.[42][5]
2000년 요미우리에서는 7경기 출전에 그쳤고, 2000년 일본 시리즈 종료 다음 날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한 달간의 고민 끝에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5]
은퇴 후 2001년에는 분카 방송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2002년부터 친정팀 세이부의 2군 타격 코치(등번호 '''76'''번)로 부임하여 나카무라 가쓰야, 쿠리야마 쇼고 등 젊은 타자들을 육성했다. 2006년 12월 25일에는 와세다 대학 인간과학부 통신 교육 과정에 합격하여 4년 만에 졸업했다. 이후 2군 야수 종합 코치(2007년), 2군 수비·주루 코치(2008년), 다시 2군 타격 코치(2009년)를 역임했다.
2010년 잠시 프런트로 이동했으나, 같은 해 7월 오쿠보 히로모토 2군 타격 코치가 해임되면서[21] 7월 29일 다시 2군 타격 코치(등번호 '''82'''번)로 복귀했다.[22] 2012년까지 같은 직책을 맡다가[23][24] 2013년 1군 타격 코치로 승격되었다.[25]
2014년 시즌 중 팀 성적 부진으로 이하라 하루키 감독이 휴양을 신청하자 6월 4일부터 감독 대행을 맡았고,[27] 이후 이하라 감독이 사임하면서 계속 감독 대행직을 수행했다.[28] 2015년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어 등번호를 '''90'''번으로 변경했다.[29] 2016년에도 유임되었으나,[30] 시즌 종료 후인 9월 27일 구단에 사의를 표명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32][33] 2016년 1월 29일에는 세이부 철도 도코로자와역에서 일일 역장을 맡기도 했다.[31]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5 | 세이부 | 2 | 4 | 4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1 | .000 | .000 | .000 | .000 |
1987 | 78 | 241 | 223 | 24 | 50 | 10 | 1 | 7 | 83 | 15 | 3 | 2 | 6 | 1 | 11 | 0 | 0 | 37 | 7 | .224 | .261 | .372 | .633 | |
1988 | 74 | 214 | 198 | 25 | 51 | 8 | 2 | 7 | 84 | 23 | 1 | 0 | 10 | 0 | 6 | 0 | 0 | 27 | 6 | .258 | .279 | .424 | .703 | |
1989 | 114 | 472 | 424 | 51 | 134 | 20 | 3 | 8 | 184 | 68 | 18 | 10 | 21 | 8 | 14 | 1 | 5 | 32 | 8 | .316 | .345 | .434 | .779 | |
1990 | 113 | 371 | 330 | 34 | 79 | 20 | 1 | 6 | 119 | 34 | 8 | 7 | 21 | 2 | 17 | 0 | 1 | 30 | 5 | .239 | .279 | .361 | .640 | |
1991 | 124 | 415 | 359 | 42 | 96 | 19 | 0 | 11 | 148 | 54 | 3 | 3 | 17 | 4 | 34 | 1 | 1 | 63 | 5 | .267 | .332 | .412 | .744 | |
1992 | 126 | 441 | 401 | 50 | 121 | 32 | 0 | 13 | 192 | 63 | 4 | 4 | 16 | 2 | 19 | 0 | 3 | 48 | 10 | .302 | .338 | .479 | .817 | |
1993 | 104 | 291 | 260 | 26 | 64 | 13 | 1 | 6 | 97 | 32 | 4 | 1 | 11 | 3 | 15 | 0 | 2 | 36 | 10 | .246 | .292 | .373 | .665 | |
1994 | 104 | 365 | 337 | 44 | 114 | 18 | 1 | 8 | 158 | 41 | 6 | 4 | 11 | 0 | 16 | 1 | 1 | 41 | 10 | .338 | .370 | .469 | .839 | |
1995 | 117 | 389 | 348 | 38 | 89 | 14 | 1 | 6 | 123 | 40 | 8 | 6 | 14 | 4 | 20 | 0 | 3 | 55 | 16 | .256 | .302 | .353 | .655 | |
1996 | 83 | 229 | 210 | 19 | 46 | 8 | 0 | 7 | 75 | 19 | 1 | 1 | 10 | 1 | 7 | 1 | 1 | 34 | 6 | .219 | .248 | .357 | .605 | |
1997 | 63 | 136 | 122 | 9 | 26 | 2 | 0 | 3 | 37 | 13 | 3 | 0 | 5 | 2 | 6 | 0 | 1 | 21 | 2 | .213 | .256 | .303 | .559 | |
1998 | 79 | 185 | 168 | 9 | 42 | 4 | 2 | 4 | 62 | 30 | 0 | 0 | 3 | 3 | 11 | 1 | 0 | 23 | 7 | .250 | .296 | .369 | .665 | |
1999 | 41 | 77 | 70 | 3 | 13 | 2 | 0 | 1 | 18 | 9 | 1 | 0 | 0 | 2 | 5 | 1 | 0 | 18 | 4 | .186 | .240 | .257 | .497 | |
2000 | 요미우리 | 7 | 7 | 7 | 0 | 1 | 0 | 0 | 0 | 1 | 1 | 0 | 0 | 0 | 0 | 0 | 0 | 0 | 3 | 0 | .143 | .143 | .143 | .286 |
통산: 15년 | 1229 | 3837 | 3461 | 374 | 926 | 170 | 12 | 87 | 1381 | 442 | 60 | 38 | 145 | 32 | 181 | 6 | 18 | 469 | 97 | .268 | .307 | .399 | .706 |
- 연도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6. 3. 1.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85년 8월 26일, 대 롯데 오리온스 19차전(가와사키 구장), 9번·2루수로서 선발 출장
- 첫 안타 : 1987년 4월 10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5회말에 쓰노 히로시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 1987년 4월 1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2회말에 시바타 야스미쓰로부터 솔로 홈런
6. 3. 2.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경기 출장: 1996년 7월 26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5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3번·3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332번째)
- 1989년: 부머 웰스에 이어 리그 타율 2위(.316)를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0][12]
- 1992년: 올스타전 1차전에서 7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이시이 히로오, 사사키 마코토와 함께 고마쓰 다쓰오로부터 3연속 홈런을 기록했다.[13] 이 경기에서 3안타를 치며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14] 정규 시즌에서는 리그 타율 3위(.302)를 기록했고,[15] 다시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16]
- 199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미즈노 가쓰히토로부터 만루 홈런을 쳤다.[18]
- 1997년: 야쿠르트와의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 연장 10회에 대타로 나와 이토 도모히토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쳤다.
6. 3. 3. 기타
- 올스타전 출장: 2회 (1992년, 1994년)
6. 4. 등번호
- 51 (1985년 ~ 1986년)
- 6 (1987년 ~ 1999년)
- 23 (2000년)
- 76 (2002년 ~ 2009년, 2025년 ~ )
- 82 (2010년 ~ 2014년)
- 90 (2015년 ~ 2016년)
- 75 (2019년)
- 71 (2020년 ~ 2024년)
6. 5. 등록명
- 다나베 노리오 (田辺 徳雄|たなべ のりお일본어, 1985년 ~ 1999년, 2002년 ~ 2014년)
- 다나베 노리오 (田辺 路朗|たなべ のりお일본어, 2000년)
- 다나베 노리오 (田邊 徳雄|たなべ のりお일본어, 2015년 ~ 2016년, 202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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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武】佐藤友亮コーチ退団 田辺徳雄、上本達之氏とも来季コーチ契約結ばず スタッフで残留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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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原監督 初日から鬼説教 ヒゲ、茶髪、ダブダブズボン禁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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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武一新!田辺代行「仏路線」ダボユニ、茶髪、ひげも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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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武・田辺監督代行「厳しくするだけが教育じゃない」昇格後6勝6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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