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모토 다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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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지모토 다카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와 코치를 역임했다. 다지미 공업고등학교 시절 활약하며 프로 구단의 주목을 받았고, 1954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개막전 선발 투수로 승리했다. 그는 1957년 9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을 세웠으며, 통산 254승을 기록하며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패전 수가 승수를 넘었다. 은퇴 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주니치 드래건스 등에서 코치로 활동했으며, 1979년에는 한큐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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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모토 다카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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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가지모토 다카오 |
| 로마자 표기 | Kajimoto Takao |
| 출생일 | 1935년 4월 8일 |
| 사망일 | 2006년 9월 23일 |
| 출생지 | 기후현 다지미시 |
| 신장 | 186cm |
| 체중 | 75kg |
| 던지는 손 | 좌투 |
| 치는 손 | 좌타 |
| 선수 경력 | |
| 포지션 | 투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54년 |
| 데뷔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
| 데뷔 팀 | 한큐 브레이브스 |
| 최종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
| 최종 팀 | 한큐 브레이브스 |
| 첫 출장 | 1954년 3월 27일 |
| 마지막 출장 | 1973년 10월 3일 |
| 선수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1954–1973) |
| 기록 | |
| 승-패 | 254–255 |
| 평균 자책점 | 2.98 |
| 완봉승 | 43 |
| 투구 이닝 | 4,208 |
| 탈삼진 | 2,945 |
| 수상 경력 | |
| 올스타 선정 | 12회 |
| 20승 투수 | 4회 |
| 일본 시리즈 MVP | 1992년 |
| 명예의 전당 헌액 | 2007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 선정 유형 | 경기자 표창 |
| 감독 및 코치 경력 | |
| 감독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1979–1980) |
| 코치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1974, 1978, 1981–1986) 오릭스 블루웨이브 (1989–1996) 주니치 드래건스 (1998–1999) |
| 기타 정보 | |
| 학력 | 기후현립 다지미 공업 고등학교 |
2. 프로 입단 전
기후현 다지미시에서 태어났으며, 중학생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24] 다지미 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3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기후 대회 2회전에서 구조 고등학교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7회 콜드), 준준결승전에서 세키 이치 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결승전에서도 기후 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1] 그러나 미에현과의 2차 예선인 산기 대회 결승에서 쓰 고등학교에게 완봉패하며 고시엔 출전에는 실패했다.
가지모토 다카오는 1954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단한 가지모토는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시무라 마사오 감독에 의해 개막전 선발 투수로 발탁되는 파격적인 기회를 얻었고, 이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며 성공적인 데뷔를 알렸다.[24] 데뷔 첫 해, 55경기에 등판하여 20승 12패를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팬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24] 그러나 다쿠와 모토지에게 밀려 신인왕을 수상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신인으로 20승을 거두고도 신인왕을 받지 못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큐 브레이브스, 주니치 드래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24] 한큐는 계약금 50만 엔, 주니치는 120만 엔, 요미우리는 200만 엔을 제시했다.[24] 가장 낮은 금액을 제시한 한큐에 입단한 것은 "비싼 돈을 받고 형편없으면 면목이 없다. 그렇다면 가장 싼 곳으로 가라"라는 어머니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24] 노무라 가쓰야는 자신의 저서에서 같은 다지미 공업 OB 선배인 시바타 에이지가 한큐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언급했다.[2]
3. 선수 시절
1956년에는 28승을 거두며 리그 최다 탈삼진(327개)을 기록,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7년에도 24승, 평균자책점 1.92(리그 4위)를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1959년 6월 12일 경기에서는 9회 2사까지 무안타로 막아냈으나 마지막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노히트 노런 달성에 실패하기도 했다. 요네다 데쓰야와 함께 '요네카지 시대'(ヨネカジ時代일본어)를 구축하며, 하위권을 맴돌던 한큐를 지탱했다. 두 선수 모두 연간 50경기 전후로 등판하는 강철 어깨를 자랑하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26]
1967년에는 팜볼을 익혀 15승을 거두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고,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1966년에는 시즌 15연패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73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4승 255패를 기록했는데, 200승 이상 거둔 투수 중 유일하게 패전 수가 승수보다 많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빈약한 타선을 지원하기 위해 3번 타자로 출전하거나, 1루수, 외야수로 출전한 기록도 있다.
3. 1. 9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
1957년 7월 23일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가지모토 다카오는 9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25] 이는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이었다. 처음에는 "평소보다 조금 삼진이 많았다" 정도로 생각했지만, 9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했을 때 포수 야마시타 다케시로부터 "가지모토, 이거 신기록이야"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기록을 의식하게 되었다. 10번째 타자는 투수 미나가와 무쓰오였는데, 조심성 없이 스트라이크를 던진 것이 방망이에 맞아 중견수 플라이가 되면서 기록이 중단되었다. 가지모토는 훗날 "혹시 미나가와에게 다시 삼진을 잡았다면 20개는 가지 않았을까"라고 회고했다.[25] 이 기록은 2022년 사사키 로키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3. 2. 20초 룰
1972년 4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경기에서 공인 야구 규칙 8.04조에 규정된 20초 룰[27]에 따라 2루심 쓰유자키 모토야에게 볼 판정을 받았다. 쓰유자키는 스톱워치로 시간을 측정했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가지모토는 일본 프로 야구 공식전에서 투구 지연 행위로 이 규정이 적용된 최초의 선수였다.[28]
4. 은퇴 후
1974년부터 1978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를 역임했고, 1979년부터 1980년까지는 한큐 감독을 맡았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한큐 구단 조사부장을 맡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오릭스 2군 투수 코치,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를 역임하는 등 지도자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감독에서 물러난 바로 다음 해에 같은 팀의 코치로 들어간 사례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극히 드문 경우이다.[31][32][33] 1984년에는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의 건강 문제로 인해 몇 경기 동안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현장을 떠난 이후에는 데일리 스포츠 야구 평론가, J SPORTS, 라디오 간사이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지도자로서 이마이 유타로를 에이스로 성장시킨 일화가 유명하다. 이마이는 감독 시절의 가지모토에 대해 "투수 출신이라 투수에게 상냥했다. '조금 더 던지게 해주자.'라며 이끌어줬다."[13]라고 말했다. 사토 요시노리는 "현역 시절, 몇몇 코치들에게 조언을 받았는데, 가장 적절했던 분이 가지모토 씨였다. 좋은 시절의 폼을 기억하고 있어서, 몇 가지 포인트만 지적해줬다. 불필요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저에게는 매우 고마운 코치였다"[14], "코치로서 본보기로 삼는 분은 가지모토 씨"[15]라고 말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퇴단 후에는 라디오 간사이, J 스포츠 해설자, 데일리 스포츠 평론가(2000년 - 2006년)로 활동했다. 2006년 9월 23일 오전 6시 26분, 호흡 부전으로 고베시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사후, 2007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플레이 스타일
가지만 다카오는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스리쿼터에 가까운 폼에서 나오는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았다. 가네다 마사이치를 본받아 전신을 크게 사용하는 투구 폼을 구사했다.[17] 젊은 시절에는 직구와 커브만으로 억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보이자 팜볼을 익혀 부활했다. 이후 타자에게 팜볼이 연구되자 포크볼을 습득하여 위기 때마다 던졌다. 큰 손을 활용하여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했으며, 만년에는 너클볼을 연구하기도 했다.[18] 큰 부상 없이 20년 동안 현역 생활을 이어갈 정도로 뛰어난 내구성을 지녔다.[19]
6. 에피소드
- 타이틀이나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시즌 최다승 경쟁 중에도 구원 등판을 거부한 일화가 있다. “남의 승리를 가로채는 짓은 참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등판을 거부했다고 한다.[35] 승리 투수가 되는 것보다 내실 있는 피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0대 0으로 이기는 것보다는 0대 1로 지는 게 좋다. 승패보다는 내실있는 피칭을 했는지 여부가 나한테는 더 중요했다”라고 말했다.[35]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통산 200승 이상을 올린 투수 중 유일하게 최다승, 최우수 평균 자책점,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35]
- 온화한 성격으로 노무라 가쓰야는 “투수 답지 않고 부처님과 같은 성격”이라고 평가했다.[35]
-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프로 입단 직후 선배의 권유에 병에 물을 탄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고 한다.[35]
- 요네다 데쓰야는 가지모토에 대해 “어떤 무리한 것도 거리낌 없이 바로 받아들여 실행에 옮기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형님(가지모토)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떠한 고생도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35]
- 후배를 잘 챙기는 성격으로, 코치,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 존경받았다. 1군에서 뚜렷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던 이마이 유타로가 술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하여 이마이에게 술을 먹여 등판시키는 등 에이스로 성장시키기도 했다.[35]
- 클래식 음악 감상이 취미였다.
7. 상세 정보
梶本 隆夫|가지모토 다카오일본어는 1954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4]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만에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되어 승리 투수가 되었고,[24] 그 해 55경기에 등판하여 20승(13선발승) 12패를 기록했다.[24] 신인으로서 20승을 올리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쿠와 모토지에게 밀려 신인왕을 수상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유일한 사례이다.
1956년에는 시즌 28승(15선발승)을 기록했지만 미우라 마사요시(29승)에게 방해를 받아 최다승을 놓쳤다. 1957년에도 24승(17선발승)으로 2년 연속 20승을 기록했고, 1960년에도 21승(12선발승)을 올리는 등 한큐의 ‘회색의 시대’를 이끌었다.
1957년 7월 23일 난카이전에서 달성한 공식전 9연속 탈삼진은 현재도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으로 남아있다.[25] 10번째 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기록이 중단되었는데, 가지모토는 “혹시 미나가와에게 다시 삼진했다면 20은 가지 않았을까”라고 회고했다.[25]
요네다 데쓰야와 함께 ‘요네카지 콤비’(ヨネカジ時代일본어)로 불리며 쇼와 30년대 한큐를 지탱했다.[26] 두 선수 모두 연간 50경기 전후로 등판하는 등 팀의 주축 역할을 했다.[26]
1967년에는 팜볼을 익혀 시즌 15승(11선발승)을 올리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73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4승(171선발승) 255패를 기록했는데,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패전 수가 승수보다 많다.
1972년 4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는 공인 야구 규칙 8.04에 규정된 20초 룰[27]에 의거해 볼 판정을 받았다. 가지모토는 일본 프로 야구 공식전에서 투구 지연 행위로 이 규정의 적용을 받은 최초의 투수가 됐다.[28]
빈약한 타선을 지원하기 위해 3번 타자로 출전하거나 1루수로 경기에 출전한 적도 있었다. 1966년에는 시즌 15연패를 기록, 하세가와 료헤이에 이어 200승보다 먼저 200패를 기록한 역대 두 번째 투수가 되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한큐에서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를 맡았고, 1979년부터 1980년까지는 한큐의 감독을 역임했다.[31][32][33]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한큐 구단조사부장을 맡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오릭스 2군 투수 코치,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를 역임하는 등 지도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감독에서 물러난 바로 다음 해에 같은 팀의 코치로 들어간 사례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극히 드문 경우이다.[31][32][33] 1984년에는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건강 문제로 요양하면서 몇 경기 동안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데일리 스포츠 야구 평론가, J SPORTS, 라디오 간사이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코치 시절에는 이마이 유타로의 성장을 도왔으며, 사토 요시노리는 가지모토를 코치로서 본보기로 삼는다고 말했다.[14][15] 1979년에는 신인 감독으로서 개막 연승 타이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16]
젊은 시절에는 직구와 커브만으로 경기를 운영했지만, 팜볼과 포크볼을 익히며 다양한 구종을 구사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쓰리 쿼터에 가까운 폼에서 나오는 빠른 공이 특징이었다. 몸이 튼튼하여 어깨나 팔꿈치 부상 없이 20년간 현역 생활을 마쳤으며,[19]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 '가지모토의 포커 페이스'라고 불렸다.[20]
'''통산 투구 기록'''
| 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승리 | 패배 | 평균 자책점 |
|---|---|---|---|---|---|
| 1954 | 한큐 | 55 | 20 | 12 | 2.73 |
| 1955 | 49 | 18 | 14 | 2.86 | |
| 1956 | 68 | 28 | 17 | 2.25 | |
| 1957 | 53 | 24 | 16 | 1.92 | |
| 1958 | 44 | 16 | 18 | 2.99 | |
| 1959 | 39 | 11 | 17 | 3.25 | |
| 1960 | 48 | 21 | 18 | 2.54 | |
| 1961 | 54 | 17 | 23 | 2.80 | |
| 1962 | 50 | 14 | 15 | 3.28 | |
| 1963 | 46 | 9 | 17 | 4.34 | |
| 1964 | 53 | 9 | 13 | 3.34 | |
| 1965 | 51 | 5 | 11 | 3.60 | |
| 1966 | 39 | 2 | 15 | 3.68 | |
| 1967 | 37 | 15 | 9 | 2.44 | |
| 1968 | 45 | 12 | 8 | 2.97 | |
| 1969 | 40 | 18 | 10 | 2.97 | |
| 1970 | 29 | 4 | 9 | 4.79 | |
| 1971 | 33 | 6 | 8 | 3.44 | |
| 1972 | 17 | 2 | 5 | 3.65 | |
| 1973 | 17 | 3 | 0 | 6.41 | |
| 통산 | 867 | 254 | 255 | 2.98 | |
'''지도자 경력'''
| 연도 | 소속팀 | 직책 |
|---|---|---|
| 1974년 ~ 1978년 | 한큐 브레이브스 |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 |
| 1979년 ~ 1980년 | 한큐 브레이브스 | 감독 |
| 1981년 ~ 1985년 | 한큐 브레이브스 |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 |
| 1986년 ~ 1988년 | 한큐 브레이브스 | 구단조사부장 |
| 1989년 ~ 1993년 | 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 2군 투수 코치 |
| 1998년 ~ 1999년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투수 코치 |
'''개인 기록'''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배 | 탈삼진 | 평균자책점 |
|---|---|---|---|---|---|---|---|---|---|
| 1954 | 한큐 | 55 | 31 | 17 | 2 | 20 | 12 | 228 | 2.73 |
| 1955 | 49 | 34 | 19 | 6 | 18 | 14 | 222 | 2.86 | |
| 1956 | 68 | 33 | 20 | 5 | 28 | 17 | 327 | 2.25 | |
| 1957 | 53 | 33 | 26 | 7 | 24 | 16 | 301 | 1.92 | |
| 1958 | 44 | 29 | 15 | 3 | 16 | 18 | 186 | 2.99 | |
| 1959 | 39 | 27 | 5 | 2 | 11 | 17 | 136 | 3.25 | |
| 1960 | 48 | 31 | 18 | 4 | 21 | 18 | 171 | 2.54 | |
| 1961 | 54 | 31 | 17 | 3 | 17 | 23 | 141 | 2.80 | |
| 1962 | 50 | 23 | 12 | 0 | 14 | 15 | 154 | 3.28 | |
| 1963 | 46 | 26 | 7 | 1 | 9 | 17 | 107 | 4.34 | |
| 1964 | 53 | 28 | 6 | 1 | 9 | 13 | 142 | 3.34 | |
| 1965 | 51 | 16 | 2 | 1 | 5 | 11 | 137 | 3.60 | |
| 1966 | 39 | 19 | 3 | 0 | 2 | 15 | 112 | 3.68 | |
| 1967 | 37 | 26 | 9 | 3 | 15 | 9 | 136 | 2.44 | |
| 1968 | 45 | 31 | 7 | 2 | 12 | 8 | 175 | 2.97 | |
| 1969 | 40 | 24 | 9 | 1 | 18 | 10 | 93 | 2.97 | |
| 1970 | 29 | 17 | 4 | 0 | 4 | 9 | 56 | 4.79 | |
| 1971 | 33 | 15 | 4 | 1 | 6 | 8 | 74 | 3.44 | |
| 1972 | 17 | 12 | 2 | 1 | 2 | 5 | 35 | 3.65 | |
| 1973 | 17 | 1 | 0 | 0 | 3 | 0 | 12 | 6.41 | |
| 통산:20년 | 867 | 487 | 202 | 43 | 254 | 255 | 2945 | 2.98 | |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57년 5월 11일[24]
- 통산 1000탈삼진 : 1957년 8월 24일[25]
- 통산 100승 : 1958년 7월 9일[25]
- 통산 100선발승 : 1961년 9월 27일[25]
- 통산 1500투구 이닝 : 1958년 8월 10일[25]
- 통산 1500탈삼진 : 1960년 7월 12일[25]
- 통산 2000투구 이닝 : 1960년 9월 10일[25]
- 통산 150승 : 1961년 8월 12일[25]
- 통산 150선발승 : 1969년 4월 17일[25]
- 통산 2500투구 이닝 : 1962년 8월 15일[25]
- 통산 500경기 등판 : 1963년 9월 21일[25]
- 통산 2000탈삼진 : 1964년 5월 3일[25]
- 통산 3000투구 이닝 : 1965년 5월 19일[25]
- 통산 600경기 등판 : 1965년 7월 8일[25]
- 통산 200승 : 1967년 6월 6일[25]
- 통산 2500탈삼진 : 1967년 10월 10일[25]
- 통산 3500투구 이닝 : 1968년 4월 29일[25]
- 통산 700경기 등판 : 1968년 5월 26일[25]
- 통산 800경기 등판 : 1970년 10월 16일[25]
- 통산 4000투구 이닝 : 1971년 5월 5일[25]
- 통산 250승 : 1972년 5월 20일[25]
'''기타'''
- 1경기 9타자 연속 탈삼진(1957년 7월 23일)
- 1이닝 3자 연속 3구 삼진(1954년 7월 10일, 1957년 10월 18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36]
- 올스타전 출장 : 12회(1954년, 1956년 ~ 1958년, 1960년 ~ 1963년, 1965년, 1967년 ~ 1969년)
'''등번호'''
| 연도 | 등번호 |
|---|---|
| 1954년 ~ 1977년 | 33 |
| 1978년 ~ 1985년 | 78 |
| 1989년 ~ 1993년 | 91 |
| 1998년 ~ 1999년 | 80 |
7. 1. 출신 학교
- 기후 현립 다지미 공업고등학교
梶本 隆夫|가지모토 다카오일본어는 기후현 다지미시에서 태어났으며, 기후 현립 다지미 공업고등학교 시절 하계 기후 현 대회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우승에 기여하였다.[24] 인접 지역인 미에현과의 2차 예선인 ‘산기 대회’에서 팀은 패하여 고시엔 대회 출전은 놓쳤다.[24]
梶本 隆夫|가지모토 다카오일본어는 다지미 공업고등학교에서 동급생 안도 준조와 배터리를 이루어, 2학년 때인 1952년 추계 주부 대회에 진출했지만, 1회전에서 하마마츠키타 고등학교에 패했다. 1953년 여름의 고시엔 기후 예선 2회전에서 구조 고등학교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7회 콜드), 준준결승에서 세키 이치 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하여, 결승에서도 기후 고등학교를 노히트 노런으로 꺾고 우승했다. 산기 대회에 진출했지만, 결승에서 쓰 고등학교에 완봉패하여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1]
7. 2. 선수 경력
가지모토 다카오는 1954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만에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되어 승리 투수가 되었고,[24] 그 해 55경기에 등판하여 20승(13선발승) 12패를 기록했다.[24] 신인으로서 20승을 올리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쿠와 모토지에게 밀려 신인왕을 수상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유일한 사례이다.1956년에는 시즌 28승(15선발승)을 기록했지만 미우라 마사요시(29승)(17선발승)(최다 선발승 - 시마하라 유키오(19선발승))에 방해를 받아 최다승을 놓쳤다. 1957년에도 24승(17선발승)으로 2년 연속 20승을 기록했고, 1960년에도 21승(12선발승)을 올리는 등 한큐의 ‘회색의 시대’를 이끌었다.
1957년 7월 23일 난카이전에서 달성한 공식전 9연속 탈삼진은 현재도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으로 남아있다.[25] 10번째 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기록이 중단되었는데, 가지모토는 “혹시 미나가와에게 다시 삼진했다면 20은 가지 않았을까”라고 회고했다.[25]
요네다 데쓰야와 함께 ‘요네카지 콤비’(ヨネカジ時代일본어)로 불리며 쇼와 30년대 한큐를 지탱했다.[26] 두 선수 모두 연간 50경기 전후로 등판하는 등 팀의 주축 역할을 했다.[26]
1967년에는 팜볼을 익혀 시즌 15승(11선발승)을 올리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73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4승(171선발승) 255패를 기록했는데,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패전 수가 승수보다 많다.
1972년 4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는 공인 야구 규칙 8.04에 규정된 20초 룰[27]에 의거해 볼 판정을 받았다. 가지모토는 일본 프로 야구 공식전에서 투구 지연 행위로 이 규정의 적용을 받은 최초의 투수가 됐다.[28]
빈약한 타선을 지원하기 위해 3번 타자로 출전하거나 1루수로 경기에 출전한 적도 있었다. 1966년에는 시즌 15연패를 기록, 하세가와 료헤이에 이어 200승보다 먼저 200패를 기록한 역대 두 번째 투수가 되었다.
통산 투구 기록
| 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승리 | 패배 | 평균 자책점 |
|---|---|---|---|---|---|
| 1954 | 한큐 | 55 | 20 | 12 | 2.73 |
| 1955 | 49 | 18 | 14 | 2.86 | |
| 1956 | 68 | 28 | 17 | 2.25 | |
| 1957 | 53 | 24 | 16 | 1.92 | |
| 1958 | 44 | 16 | 18 | 2.99 | |
| 1959 | 39 | 11 | 17 | 3.25 | |
| 1960 | 48 | 21 | 18 | 2.54 | |
| 1961 | 54 | 17 | 23 | 2.80 | |
| 1962 | 50 | 14 | 15 | 3.28 | |
| 1963 | 46 | 9 | 17 | 4.34 | |
| 1964 | 53 | 9 | 13 | 3.34 | |
| 1965 | 51 | 5 | 11 | 3.60 | |
| 1966 | 39 | 2 | 15 | 3.68 | |
| 1967 | 37 | 15 | 9 | 2.44 | |
| 1968 | 45 | 12 | 8 | 2.97 | |
| 1969 | 40 | 18 | 10 | 2.97 | |
| 1970 | 29 | 4 | 9 | 4.79 | |
| 1971 | 33 | 6 | 8 | 3.44 | |
| 1972 | 17 | 2 | 5 | 3.65 | |
| 1973 | 17 | 3 | 0 | 6.41 | |
| 통산 | 867 | 254 | 255 | 2.98 | |
7. 3. 지도자 경력
가지모토 다카오는 1974년부터 1978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한큐에서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를 맡았고, 1979년부터 1980년까지는 한큐의 감독을 역임했다.[31][32][33]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한큐 구단조사부장을 맡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오릭스 2군 투수 코치,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를 역임하는 등 지도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감독에서 물러난 바로 다음 해에 같은 팀의 코치로 들어간 사례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극히 드문 경우이다.[31][32][33] 1984년에는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건강 문제로 요양하면서 몇 경기 동안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데일리 스포츠 야구 평론가, J SPORTS, 라디오 간사이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코치 시절에는 이마이 유타로의 성장을 도왔으며, 사토 요시노리는 가지모토를 코치로서 본보기로 삼는다고 말했다.[14][15] 1979년에는 신인 감독으로서 개막 연승 타이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16]
지도자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소속팀 | 직책 |
|---|---|---|
| 1974년 ~ 1978년 | 한큐 브레이브스 |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 |
| 1979년 ~ 1980년 | 한큐 브레이브스 | 감독 |
| 1981년 ~ 1985년 | 한큐 브레이브스 |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 |
| 1986년 ~ 1988년 | 한큐 브레이브스 | 구단조사부장 |
| 1989년 ~ 1993년 | 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 2군 투수 코치 |
| 1998년 ~ 1999년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투수 코치 |
7. 4. 수상·타이틀 경력
가지모토 다카오는 통산 254승 255패로,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패전 수가 승수보다 많다. 1956년에는 28승을 기록했지만 미우라 마사요시에 단 1승이 모자라 최다승을 놓쳤다. 1957년에는 9연속 탈삼진으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웠다. 1967년에는 팜볼을 익혀 15승을 올리는 등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72년에는 투구 지연 행위(20초 룰)로 일본 프로 야구 공식전에서 이 규정이 적용된 최초의 투수가 되었다.[28]==== 타이틀 ====
-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 아님): 2회 (1956년, 1957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수상 ====
- 베스트 나인 1회 (1956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2007년)
7. 4. 1. 타이틀
-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 아님): 2회 (1956년, 1957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7. 4. 2. 수상
- 베스트 나인 1회 (1956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2007년)
7. 5. 개인 기록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 1954 | 한큐 | 55 | 31 | 17 | 2 | 0 | 20 | 12 | -- | -- | .625 | 309.1 | 266 | 19 | 118 | -- | 228 | 2 | 1 | 112 | 94 | 2.73 | 1.24 |
| 1955 | 49 | 34 | 19 | 6 | 2 | 18 | 14 | -- | -- | .563 | 273.1 | 232 | 10 | 84 | 3 | 222 | 4 | 1 | 104 | 87 | 2.86 | 1.16 | |
| 1956 | 68 | 33 | 20 | 5 | 2 | 28 | 17 | -- | -- | .622 | 364.1 | 284 | 13 | 118 | 8 | 327 | 5 | 0 | 110 | 91 | 2.25 | 1.10 | |
| 1957 | 53 | 33 | 26 | 7 | 4 | 24 | 16 | -- | -- | .600 | 337.1 | 259 | 13 | 92 | 4 | 301 | 5 | 0 | 95 | 72 | 1.92 | 1.04 | |
| 1958 | 44 | 29 | 15 | 3 | 3 | 16 | 18 | -- | -- | .471 | 265.0 | 232 | 18 | 79 | 6 | 186 | 4 | 0 | 98 | 88 | 2.99 | 1.17 | |
| 1959 | 39 | 27 | 5 | 2 | 1 | 11 | 17 | -- | -- | .393 | 199.1 | 198 | 14 | 58 | 1 | 136 | 0 | 0 | 86 | 72 | 3.25 | 1.28 | |
| 1960 | 48 | 31 | 18 | 4 | 4 | 21 | 18 | -- | -- | .538 | 297.2 | 266 | 31 | 82 | 12 | 171 | 1 | 0 | 97 | 84 | 2.54 | 1.17 | |
| 1961 | 54 | 31 | 17 | 3 | 4 | 17 | 23 | -- | -- | .425 | 269.2 | 261 | 25 | 56 | 6 | 141 | 1 | 0 | 108 | 84 | 2.80 | 1.18 | |
| 1962 | 50 | 23 | 12 | 0 | 0 | 14 | 15 | -- | -- | .483 | 235.2 | 244 | 18 | 59 | 9 | 154 | 7 | 0 | 103 | 86 | 3.28 | 1.29 | |
| 1963 | 46 | 26 | 7 | 1 | 0 | 9 | 17 | -- | -- | .346 | 180.1 | 204 | 19 | 57 | 4 | 107 | 1 | 0 | 98 | 87 | 4.34 | 1.45 | |
| 1964 | 53 | 28 | 6 | 1 | 1 | 9 | 13 | -- | -- | .409 | 231.2 | 237 | 11 | 61 | 8 | 142 | 3 | 0 | 96 | 86 | 3.34 | 1.29 | |
| 1965 | 51 | 16 | 2 | 1 | 0 | 5 | 11 | -- | -- | .313 | 177.1 | 183 | 16 | 50 | 9 | 137 | 1 | 0 | 76 | 71 | 3.60 | 1.31 | |
| 1966 | 39 | 19 | 3 | 0 | 0 | 2 | 15 | -- | -- | .118 | 141.2 | 120 | 18 | 47 | 7 | 112 | 4 | 0 | 69 | 58 | 3.68 | 1.18 | |
| 1967 | 37 | 26 | 9 | 3 | 2 | 15 | 9 | -- | -- | .625 | 188.1 | 167 | 11 | 70 | 7 | 136 | 5 | 0 | 58 | 51 | 2.44 | 1.26 | |
| 1968 | 45 | 31 | 7 | 2 | 0 | 12 | 8 | -- | -- | .600 | 221.1 | 207 | 27 | 63 | 10 | 175 | 1 | 0 | 82 | 73 | 2.97 | 1.22 | |
| 1969 | 40 | 24 | 9 | 1 | 1 | 18 | 10 | -- | -- | .643 | 187.2 | 178 | 16 | 39 | 1 | 93 | 5 | 0 | 73 | 62 | 2.97 | 1.16 | |
| 1970 | 29 | 17 | 4 | 0 | 1 | 4 | 9 | -- | -- | .308 | 103.1 | 116 | 17 | 35 | 2 | 56 | 1 | 0 | 62 | 55 | 4.79 | 1.46 | |
| 1971 | 33 | 15 | 4 | 1 | 0 | 6 | 8 | -- | -- | .429 | 136.0 | 134 | 12 | 43 | 4 | 74 | 0 | 1 | 57 | 52 | 3.44 | 1.30 | |
| 1972 | 17 | 12 | 2 | 1 | 0 | 2 | 5 | -- | -- | .286 | 69.0 | 66 | 11 | 28 | 3 | 35 | 0 | 0 | 34 | 28 | 3.65 | 1.36 | |
| 1973 | 17 | 1 | 0 | 0 | 0 | 3 | 0 | -- | -- | 1.000 | 19.2 | 25 | 2 | 5 | 2 | 12 | 3 | 0 | 16 | 14 | 6.41 | 1.53 | |
| 통산:20년 | 867 | 487 | 202 | 43 | 25 | 254 | 255 | -- | -- | .499 | 4208.0 | 3879 | 321 | 1244 | 106 | 2945 | 53 | 3 | 1634 | 1395 | 2.98 | 1.22 | |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1954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프로 1년 차에 니시무라 마사오 감독에 의해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낙점되어 승리 투수가 되었다.[24] 그 해 55경기에 등판하여 20승(13선발승)을 기록했지만, 신인왕 경쟁에서 다쿠와 모토지에게 밀렸다. 신인으로 20승을 올리고도 신인왕을 받지 못한 유일한 사례이다.[24]
1956년에는 시즌 28승(15선발승)을 기록했지만, 미우라 마사요시(29승)에게 밀려 최다승을 놓쳤다. 1957년에는 24승(17선발승)으로 2년 연속 20승, 1960년에도 21승(12선발승)을 올리는 등 한큐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1957년 7월 23일 난카이전에서 달성한 공식전 9연속 탈삼진은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으로, 이때 첫 번째 삼진은 투수 미나가와 무쓰오였다.[25] 1959년 6월 12일 경기에서는 9회 2사까지 무안타로 처리하다 마지막 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노히트 노런을 놓치기도 했다.
요네다 데쓰야와 함께 '요네카지 시대'(ヨネカジ時代일본어)로 불리며 팀을 지탱했다.[26] 1967년에는 팜볼을 익혀 시즌 15승(11선발승)을 올리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73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4승(171선발승) 255패를 기록, 200승 이상 투수 중 유일하게 패전 수가 승수를 넘었다.
1972년 4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는 공인 야구 규칙 8.04에 규정된 20초 룰[27] 위반으로 볼 판정을 받았다. 일본 프로 야구 공식전에서 이 규정 적용을 받은 최초의 투수이다.[28]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달성했다.
- 1경기 9타자 연속 탈삼진(1957년 7월 23일)
- 1이닝 3자 연속 3구 삼진(1954년 7월 10일, 1957년 10월 18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36]
- 올스타전 출장 : 12회(1954년, 1956년 ~ 1958년, 1960년 ~ 1963년, 1965년, 1967년 ~ 1969년)
젊은 시절에는 직구와 커브만으로 경기를 운영했지만, 팜볼과 포크볼을 익히며 다양한 구종을 구사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쓰리 쿼터에 가까운 폼에서 나오는 빠른 공이 특징이었다. 몸이 튼튼하여 어깨나 팔꿈치 부상 없이 20년간 현역 생활을 마쳤으며,[19]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 '가지모토의 포커 페이스'라고 불렸다.[20]
7. 5. 1. 첫 기록
기후현 다지미시에서 태어났다.[24] 1954년에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는데[24] 입단 이유는 “비싼 돈을 받고 형편없으면 면목이 없다. 그렇다면 가장 싼 곳으로 가라”라는 어머니의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24]-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 : 1954년 3월 27일, 대 다카하시 유니온스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6이닝 3실점
- 첫 탈삼진 : 상동, 1회초에 구로다 가즈히로로부터
- 첫 완투 : 1954년 4월 3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1차전(고쿠라호라쿠엔 구장), 8이닝 4실점에서 패전 투수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 1954년 4월 8일, 대 긴테쓰 펄스 5차전(후지이데라 구장)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만에 감독 니시무라 마사오는 "어떤 투수보다도 가지모토의 공이 가장 빨랐다"는 이유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했으며, 3월 27일 다카하시 유니온스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9회에 구원 투수 시바타 에이지의 도움을 받아 5-3으로 승리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3] 올스타전까지 12승을 거두어 팬 투표 1위로 선발되었다.[1] 같은 해 55경기에 등판하여 20승(12패)을 거두었지만, 신인왕 경쟁에서는 26승을 거둔 타쿠와 모토지(난카이 호크스)에게 패했다. 루키로 20승을 거두고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한 선수는 2023년 현재까지 가지모토가 유일하다. 스포츠 신문에서는 "'''5000엔 에이스'''"라고 칭했지만, 실제 월급은 2만 엔이었다. 본인은 "그 해 8월부터 갑자기 월급이 두 배로 올랐다"고 회상했는데, 이는 신문 기사로 이름을 알린 것에 대한 립 서비스였다.
7. 5. 2. 기록 달성 경력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 1954 | 한큐 | 55 | 31 | 17 | 2 | 0 | 20 | 12 | -- | -- | .625 | 309.1 | 266 | 19 | 118 | -- | 228 | 2 | 1 | 112 | 94 | 2.73 | 1.24 |
| 1955 | 49 | 34 | 19 | 6 | 2 | 18 | 14 | -- | -- | .563 | 273.1 | 232 | 10 | 84 | 3 | 222 | 4 | 1 | 104 | 87 | 2.86 | 1.16 | |
| 1956 | 68 | 33 | 20 | 5 | 2 | 28 | 17 | -- | -- | .622 | 364.1 | 284 | 13 | 118 | 8 | 327 | 5 | 0 | 110 | 91 | 2.25 | 1.10 | |
| 1957 | 53 | 33 | 26 | 7 | 4 | 24 | 16 | -- | -- | .600 | 337.1 | 259 | 13 | 92 | 4 | 301 | 5 | 0 | 95 | 72 | 1.92 | 1.04 | |
| 1958 | 44 | 29 | 15 | 3 | 3 | 16 | 18 | -- | -- | .471 | 265.0 | 232 | 18 | 79 | 6 | 186 | 4 | 0 | 98 | 88 | 2.99 | 1.17 | |
| 1959 | 39 | 27 | 5 | 2 | 1 | 11 | 17 | -- | -- | .393 | 199.1 | 198 | 14 | 58 | 1 | 136 | 0 | 0 | 86 | 72 | 3.25 | 1.28 | |
| 1960 | 48 | 31 | 18 | 4 | 4 | 21 | 18 | -- | -- | .538 | 297.2 | 266 | 31 | 82 | 12 | 171 | 1 | 0 | 97 | 84 | 2.54 | 1.17 | |
| 1961 | 54 | 31 | 17 | 3 | 4 | 17 | 23 | -- | -- | .425 | 269.2 | 261 | 25 | 56 | 6 | 141 | 1 | 0 | 108 | 84 | 2.80 | 1.18 | |
| 1962 | 50 | 23 | 12 | 0 | 0 | 14 | 15 | -- | -- | .483 | 235.2 | 244 | 18 | 59 | 9 | 154 | 7 | 0 | 103 | 86 | 3.28 | 1.29 | |
| 1963 | 46 | 26 | 7 | 1 | 0 | 9 | 17 | -- | -- | .346 | 180.1 | 204 | 19 | 57 | 4 | 107 | 1 | 0 | 98 | 87 | 4.34 | 1.45 | |
| 1964 | 53 | 28 | 6 | 1 | 1 | 9 | 13 | -- | -- | .409 | 231.2 | 237 | 11 | 61 | 8 | 142 | 3 | 0 | 96 | 86 | 3.34 | 1.29 | |
| 1965 | 51 | 16 | 2 | 1 | 0 | 5 | 11 | -- | -- | .313 | 177.1 | 183 | 16 | 50 | 9 | 137 | 1 | 0 | 76 | 71 | 3.60 | 1.31 | |
| 1966 | 39 | 19 | 3 | 0 | 0 | 2 | 15 | -- | -- | .118 | 141.2 | 120 | 18 | 47 | 7 | 112 | 4 | 0 | 69 | 58 | 3.68 | 1.18 | |
| 1967 | 37 | 26 | 9 | 3 | 2 | 15 | 9 | -- | -- | .625 | 188.1 | 167 | 11 | 70 | 7 | 136 | 5 | 0 | 58 | 51 | 2.44 | 1.26 | |
| 1968 | 45 | 31 | 7 | 2 | 0 | 12 | 8 | -- | -- | .600 | 221.1 | 207 | 27 | 63 | 10 | 175 | 1 | 0 | 82 | 73 | 2.97 | 1.22 | |
| 1969 | 40 | 24 | 9 | 1 | 1 | 18 | 10 | -- | -- | .643 | 187.2 | 178 | 16 | 39 | 1 | 93 | 5 | 0 | 73 | 62 | 2.97 | 1.16 | |
| 1970 | 29 | 17 | 4 | 0 | 1 | 4 | 9 | -- | -- | .308 | 103.1 | 116 | 17 | 35 | 2 | 56 | 1 | 0 | 62 | 55 | 4.79 | 1.46 | |
| 1971 | 33 | 15 | 4 | 1 | 0 | 6 | 8 | -- | -- | .429 | 136.0 | 134 | 12 | 43 | 4 | 74 | 0 | 1 | 57 | 52 | 3.44 | 1.30 | |
| 1972 | 17 | 12 | 2 | 1 | 0 | 2 | 5 | -- | -- | .286 | 69.0 | 66 | 11 | 28 | 3 | 35 | 0 | 0 | 34 | 28 | 3.65 | 1.36 | |
| 1973 | 17 | 1 | 0 | 0 | 0 | 3 | 0 | -- | -- | 1.000 | 19.2 | 25 | 2 | 5 | 2 | 12 | 3 | 0 | 16 | 14 | 6.41 | 1.53 | |
| 통산:20년 | 867 | 487 | 202 | 43 | 25 | 254 | 255 | -- | -- | .499 | 4208.0 | 3879 | 321 | 1244 | 106 | 2945 | 53 | 3 | 1634 | 1395 | 2.98 | 1.22 | |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 주요 기록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57년 5월 11일, 대 마이니치 오리온스 2차전(고라쿠엔 구장) ※역대 65번째[24]
- 통산 1000탈삼진 : 1957년 8월 24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15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2회초에 이나오 가즈히사로부터 ※역대 14번째[25]
- 통산 100승 : 1958년 7월 9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6차전(고마자와 야구장), 12이닝 5실점 완투 승리 ※역대 23번째[25]
- 통산 100선발승 : 1961년 9월 27일, 대 다이마이 오리온즈 25차전(고라쿠엔 구장)(더블헤더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 승리[25]
- 통산 1500투구 이닝 : 1958년 8월 10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15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 ※역대 35번째[25]
- 통산 1500탈삼진 : 1960년 7월 12일, 대 난카이 호크스 12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7회초에 후쿠다 마사히사로부터 ※역대 6번째[25]
- 통산 2000투구 이닝 : 1960년 9월 10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4차전(고마자와 야구장) ※역대 19번째[25]
- 통산 150승 : 1961년 8월 12일, 대 긴테쓰 버펄로 16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초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4이닝 무실점 ※역대 14번째[25]
- 통산 150선발승 : 1969년 4월 17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1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 7이닝 3실점 선발승[25]
- 통산 2500투구 이닝 : 1962년 8월 15일, 대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22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역대 12번째[25]
- 통산 500경기 등판 : 1963년 9월 21일, 대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25차전(도쿄 스타디움), 선발 등판으로 5와 0/3이닝 6실점(4자책점)에서 패전 투수 ※역대 12번째[25]
- 통산 2000탈삼진 : 1964년 5월 3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8차전(닛폰 생명 구장), 8회말에 도이 마사히로로부터 ※역대 3번째[25]
- 통산 3000투구 이닝 : 1965년 5월 19일, 대 도쿄 오리온스 5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역대 9번째[25]
- 통산 600경기 등판 : 1965년 7월 8일, 대 도쿄 오리온스 2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회초 2사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3이닝 무실점[25]
- 통산 200승 : 1967년 6월 6일, 대 난카이 호크스 10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12번째[25]
- 통산 2500탈삼진 : 1967년 10월 10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27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초에 이토 고시로로부터 ※역대 3번째[25]
- 통산 3500투구 이닝 : 1968년 4월 29일, 대 난카이 호크스 4차전(오사카 구장) ※역대 6번째[25]
- 통산 700경기 등판 : 1968년 5월 26일, 대 난카이 호크스 1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선발 등판으로 7과 2/3이닝 1실점에서 승리 투수 ※역대 2번째[25]
- 통산 800경기 등판 : 1970년 10월 16일, 대 롯데 오리온스 24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선발 등판으로 3이닝 1실점 ※역대 2번째[25]
- 통산 4000투구 이닝 : 1971년 5월 5일, 대 롯데 오리온스 4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역대 6번째[25]
- 통산 250승 : 1972년 5월 20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6차전(주니치 스타디움),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7번째[25]
- 1957년 7월 23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9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25]
- 1972년 4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 투구 지연(20초 룰)으로 볼 판정을 받았다. 일본 프로 야구 공식전에서 이 규정 적용을 받은 최초의 투수이다.[28]
7. 5. 3. 기타
- 1경기 9타자 연속 탈삼진(1957년 7월 23일)
- 1이닝 3자 연속 3구 삼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36]
- * 1954년 7월 10일 대 긴테쓰 펄스전에서의 6회
- * 1957년 10월 18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에서의 3회
- 올스타전 출장 : 12회(1954년, 1956년 ~ 1958년, 1960년 ~ 1963년, 1965년, 1967년 ~ 1969년)
- 젊은 시절에는 직구와 커브만으로 경기를 운영했지만, 한계를 느끼자 직구와 같은 팔 스윙에서 느린 공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팜볼을 익혀 부활했다. 그 후 포크볼을 습득하여 위기 때 자주 던졌으며, 많을 때는 한 경기에 20~30구도 던졌다. 손이 컸기 때문에 이러한 구종들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너클볼을 연구했지만, 코치 취임 요청을 받고 은퇴하여 실전에서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18]
- 몸이 튼튼하여 어깨나 팔꿈치를 한 번도 다치지 않고 20년간 현역 생활을 마쳤다.[19]
- 이기든 지든 덤덤하게 던지며,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 "가지모토의 포커 페이스"라고 불렸다.[20]
- 큰 키에도 불구하고 쓰리 쿼터에 가까운,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는 폼에서 나오는 빠른 공을 특징으로 했다. 유연하면서도 전신을 크게 사용하는 폼은 당시 최고의 좌완 투수로 칭송받던 가네다 마사이치를 본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에 따르면 "가네 씨의 독특한 전신 사용법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결국 따라 할 수 없었다"고 한다.[17]
- 강속구 투수들이 작은 교타자에게 약한 경우가 많은데, 가네다는 한신의 요시다 요시오를 어려워했고, 가지모토도 니시테츠의 다카쿠라 테루유키를 어려워하여 잘 맞았다. 반면에, 같은 니시테츠의 강타자였던 나카니시 후토시나 도요다 야스미츠에게는 강했다.[17]
7. 6. 등번호
| 연도 | 등번호 |
|---|---|
| 1954년 ~ 1977년 | 33 |
| 1978년 ~ 1985년 | 78 |
| 1989년 ~ 1993년 | 91 |
| 1998년 ~ 1999년 | 80 |
현역 시절 가지모토 다카오가 착용했던 '''33'''번은 은퇴 후 코치 시절에도 1977년까지 착용했다. '''78'''번으로 변경한 후에도 마쓰모토 마사시, 히라이 마사후미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투수가 이 번호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2010년에 일본 야구계에 복귀한 다구치 소(외야수, 메이저 리그 이적 전에는 '''6'''번)가 착용한 이후에는 야수가 이 번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이어졌고, 2023년 시점에서는 외야수 스기사와 류가 착용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永久保存版]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1936-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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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서적
プロ野球 最強のエースは誰か?電子書籍版
彩図社
2014-10-07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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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野球殿堂2012 The Baseball Hall of Fame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5]
뉴스
楽天松井裕樹が記録した3者連続3球三振を過去に達成しているのは?
https://bbcrix.com/a[...]
2017-12-18
[6]
뉴스
ソフトB・モイネロ 史上2人目の大記録達成 複数回「3者連続3球三振」、サヨナラ勝利呼ぶ完璧投球
https://www.sponichi[...]
2023-06-06
[7]
뉴스
佐々木朗希が連続13奪三振、64年ぶり記録更新…六回まで「完全試合」も継続中
https://full-count.j[...]
2022-04-10
[8]
서적
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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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武菊池雄星 55年ぶり同一カードで13連敗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18-08-25
[10]
문서
2007年
[11]
웹사이트
【内田雅也の追球】左投げの二塁手 3番に強打の投手 矢野阪神はまだまだ苦心や工夫があっていい
https://www.sponichi[...]
株式会社スポーツニッポン新聞社
2022-08-30
[12]
웹사이트
日めくりプロ野球 5月【5月12日】1963年(昭38) 先発左腕梶本隆夫、3番でスタメン 第2試合は一塁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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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20-06-25
[1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24年7月1日号、昭和時代の言い残し、今井雄太郎
[14]
뉴스
佐藤義則(ソフトバンク投手コーチ)「勝てない投手を勝たせるのが、私の仕事」 二宮清純レポート ダルビッシュ有、田中将大を育てた「優勝請負人」が明かす
https://gendai.media[...]
[15]
서적
読む野球-9回勝負-No.8
主婦の友社
2015
[16]
웹사이트
ソフトバンク 藤本監督が新人監督初の開幕7連勝!柳田弾の1点を千賀、森が守り切る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22-10-28
[17]
서적
『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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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19]
서적
『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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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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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12年4月2日号
[2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88年5月2日号
[23]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昭和11年‐平成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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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적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영구보존판) - 새로 태어나는 용자의 기억 1936-1988》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1
[25]
서적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 - 부활하는 용사의 기억’
베이스볼 매거진사
[26]
서적
‘야구 전당 2012 The Baseball Hall of Fame’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2
[27]
문서
주자 없는 상황에서 투수가 공을 받은 지 20초 내에 던지지 않으면 심판이 볼을 선언하는데 이것은 경기가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다.
[28]
문서
2007년에 이 8.04 조항이 개정되면서 12초 이내에 던져야 하는 것이므로 한층 더 엄격해졌는데 2009년 8월 1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구도 기미야스]]가 그 해부터 로컬 룰로 제정된 15초 룰에 의해 볼 판정을 받았다. 2011년 7월 18일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엔옐버트 소토]]가 두 번째로 이 규정에 걸렸다.
[29]
뉴스
일 거인팀 입단확정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2-03-23
[30]
뉴스
7일아침발표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2-02-14
[31]
뉴스
前(전)롯데감독 朴永吉(박영길)씨 三星(삼성) 타격코치로 金裕東(김유동) 연봉 깎고 재계약,그라운드 복귀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2022-04-03
[32]
뉴스
許龜淵(허구연)씨 롯데 코치로 崔東原(최동원) 연봉계약 마쳐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2022-04-03
[33]
뉴스
프로야구 前(전)롯데감독 김용희씨 삼성 수석코치 맡기로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2022-04-03
[34]
서적
분슌 비주얼 문고 - ‘호구 열전’
분게이슌주
[3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12-04-02
[36]
서적
일본 프로 야구 기록 대감
고단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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