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대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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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쇼 대분화는 1914년 일본 사쿠라지마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산 폭발이다. 이 분화는 약 1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58명의 사망자를 냈고, 막대한 양의 용암과 화산재를 분출하여 주변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용암류는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를 연결했고, 지진으로 가고시마 시내가 큰 피해를 입었다. 다이쇼 대분화는 20세기 일본에서 가장 큰 분화였으며, 이후 사쿠라지마에서는 분화 기록 수집, 관측 시스템 구축, 피난 계획 수립 등 재해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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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지마 지진은 화산 활동과 관련된 지각 변동으로, 마그마 움직임과 응력 축적이 지각 강도를 초과하여 발생하며, 1914년 지진은 가고시마시에 큰 피해와 사회적 혼란, 쓰나미, 지반 침하를 일으켰다.
다이쇼 대분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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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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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 사쿠라지마 |
날짜 | 1914년 1월 12일 - 1915년 9월 경 |
유형 | 프리니식 분화 |
위치 | 가고시마현 가고시마군 니시사쿠라지마무라・히가시사쿠라지마무라 |
화산 폭발 지수 (VEI) | 4 |
피해 | 사망자 58명, 부상자 112명, 소실 가옥 2,268채 |
2. 사쿠라지마 분화사
사쿠라지마는 일본을 대표하는 활화산 중 하나로, 주로 안산암과 데이사이트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다이쇼 3년) 1월 12일에 분화가 시작되어 약 1개월간 폭발이 반복되었고, 다량의 용암이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58명이 사망했고, 유출된 용암의 부피는 약 1.5km3, 용암으로 덮인 면적은 약 9.2km2에 달했다. 용암류는 사쿠라지마 서쪽과 남동쪽 해상으로 뻗어 나가, 해협(최대 거리 400m, 최심부 100m)으로 분리되어 있던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를 육지로 연결시켰다.
2. 1. 선사 시대의 활동
아이라 칼데라는 약 29,000년 전 대규모 분화로 형성되었다.[7] 이 분화로 현재의 칼데라 지형이 만들어졌다. 약 26,000년 전부터 아이라 칼데라 남쪽 끝에서 사쿠라지마의 분화가 시작되었다.[8] 사쿠라지마는 아이라 칼데라 분화 이후에 생긴 후 칼데라 성층 화산이다.[9]사쿠라지마의 분화 활동은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된다.[17][18]
- 고기 북악 활동 (약 26,000년 전 ~ 24,000년 전)
- 신기 북악 활동 (약 12,800년 전 ~ 5,600년 전)
- 남악(미나미다케) 고기 활동 (약 4,500년 전 ~)
- 남악(미나미다케) 신기 활동
고기와 신기 북악 활동 사이에는 10,0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었다. 활동 재개 시기(신기 북악 첫 번째 활동)인 약 12,800년 전의 분화는 사쿠라지마 분화 활동 중 가장 큰 규모로, 약 11 세제곱 킬로미터의 분출량을 기록했다. 신기 북악기 전반에는 규모가 큰 플리니식 분화가 발생했다. 확인된 북악의 마지막 활동은 약 3,800년 전이다.[19][20]
약 4,500년 전부터 북악 남쪽 산허리에서 남악(미나미다케)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남악 고기 분화 활동 중 용암류 유출은 약 4,000년 전과 약 3,000년 전에 집중되었다.[21][22] 약 1,600년 전까지 화산재를 분출하는 불카노식 분화가 계속되었는데, 이는 1955년부터 단속적으로 계속되는 분화와 유사하다.[23] 특히 3,000년 전쯤에는 불카노식 분화가 빈번하게 반복되었다. 그 결과, 산기슭에는 두꺼운 화산재층이 쌓였고, 남악(미나미다케)도 약 2,700년 전까지 거의 현재 모습으로 성장했다.
2. 2. 역사 시대의 활동
1914년(다이쇼 3년) 1월 12일에 분화가 시작되어 약 1개월간 빈번하게 폭발이 반복되어 다량의 용암이 유출되었다. 이 분화로 5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출된 용암의 부피는 약 1.5km3이고, 용암으로 덮인 면적은 약 9.2km2이다. 용암류는 사쿠라지마 서쪽 및 남동쪽 해상으로 뻗어 나가, 그동안 해협(최대 거리 400m, 최심부 100m)으로 분리되어 있던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다.
2. 2. 1. 안에이 분화의 전조 현상과 경험 전승
1779년(안에이 8년)에 시작된 안에이 분화는 다이쇼 대분화와 유사한 전조 현상 및 분화 과정을 보였다.[34] 현지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분화 전에 우물물이 마르는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35] 분화 전날부터 군발 지진이 발생했고, 분화 당일에는 우물물이 끓어오르거나 수위가 높아지고, 바닷물이 변색되는 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36]안에이 분화는 1782년(덴메이 2년) 초까지 이어졌으며,[37] 이후 벚꽃섬(桜島) 내에 화산재가 내리는 정도의 소규모 분화가 종종 있었으나, 1799년(간세이 11년)을 마지막으로 이러한 활동도 멈추고 벚꽃섬은 평온한 시기에 들어갔다.[38][39][40] 19세기 이후 다이쇼 대분화까지는 분화 기록도 수차례 정도였다. 다이쇼 대분화 전, 벚꽃섬은 온 산이 녹색으로 덮였고, 분화구에서도 연간 수차례 정도의 분화가 관측되는 정도였다. 벚꽃섬 산 정상 부근까지 녹색으로 덮이면 분화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안에이 분화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분화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 사이에서 희미해져 갔다.
3. 1914년 다이쇼 대분화
1914년(다이쇼 3년) 1월 12일에 사쿠라지마에서 분화가 시작되어 약 1개월간 빈번하게 폭발이 반복되었고, 다량의 용암이 유출되었다. 이 분화로 58명이 사망했으며, 유출된 용암 부피는 약 1.5km3, 용암으로 덮인 면적은 약 9.2km2였다. 용암류는 사쿠라지마 서쪽 및 남동쪽 해상으로 뻗어 나가, 이전까지 해협(최대 거리 400m, 최대 수심 100m)으로 분리되어 있던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를 연결시켰다.
다이쇼 대분화의 용암 분출량은 1.34km3, 테프라 분출량은 0.5km3, 마그마 환산 분출량은 1.54km3로 추정된다. 이는 20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화산 활동 중 가장 많은 분출량이다.[41][42]
다이쇼 시대 초기에는 아직 근대적인 화산 관측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지만, 과학적인 관찰 방법이 알려지면서 1888년 반다이산 분화 때와 달리 일반인들에게 사진기가 보급되어 분화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남았다. 특히 분화가 가고시마 시가지 근처에서 발생하여 지역 주민들의 체험담, 수기, 스케치, 사진 등이 많이 남아있다. 언론 및 출판 업계의 성장으로 신문 보도나 출판물을 통해 다이쇼 대분화가 널리 알려졌다.[44][45]
지질 조사소의 사토 덴조, 도쿄 대학의 오모리 후사키치, 고토 분지로 등 전문가들의 조사 보고 외에도, 가고시마 고등 농림학교의 카나이 마스미, 가고시마 측후소 등 지역 전문가들의 조사 보고도 이루어졌다. 오모리 후사키치의 보고는 1년여에 걸친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분화에 대해 상세히 검토하여 높은 평가를 받는다.[46] 다이쇼 대분화는 분화 시 기록이 풍부하고 분출물 잔존 상황도 좋아 안산암질 화산 분화의 귀중한 사례로 여겨진다.[47]
그러나 가고시마 대공습으로 가고시마시의 많은 문헌이 소실되었고, 잦은 읍면 합병으로 시정촌 소유 문헌들이 흩어졌다.[48] 관동 대지진으로 중앙 기상대의 지진 조사 원본 자료 등이 소실되는 등 다이쇼 대분화 관련 문헌 중 유실된 것도 적지 않다.[49] 현존하는 문헌 중에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분화 후 약 1개월 반까지의 기록은 많지만, 활동 전체를 조망한 문헌은 부족하며, 특히 활동 후반 분화 실태에 대해 불명확한 점이 많다.[50]
다이쇼 대분화 전, 남큐슈 주변에서는 1909년 휴가나다 지진, 1911년 기카이섬 지진, 1913년 미야자키현 및 가고시마현 내 군발 지진 등 지진 및 분화 활동이 활발했다.[51]
1913년 7월, 사쿠라지마 섬내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아리무라 산기슭 골짜기에서 이산화탄소 중독 추정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는 다이쇼 대분화 전 사쿠라지마에서 나타난 최초의 이상 현상이었다.[52] 1913년 12월에는 사쿠라지마 북부와 남부 우물에서 물이 고갈되거나 수위가 낮아졌는데, 이는 마그마 유입에 따른 지반 융기(수십 센티미터 추정)로 인한 현상으로 보인다.[54]
1914년(다이쇼 3년) 1월 9일부터 사쿠라지마 섬내 동부와 북부에서 유감 지진이 발생했고, 10일부터는 섬 전역에서 유감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들은 사쿠라지마 지하 얕은 곳을 진원으로 한 마그니튜드 2 이하로 추정된다.[55] 1월 10일 새벽에는 사쿠라지마 북동쪽 해상에서 불기둥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것이 목격되었고, 7~8일경에는 미나미다케 산정 부근이 밝아지는 화영 현상으로 추정되는 현상이 목격되었다.[57]
1월 11일에는 지진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오전 9시 57분과 12시 43분에 진도 5(최대 마그니튜드 5 추정)의 지진이 발생했다.[60] 섬 내에서는 끊임없는 흔들림으로 오후 4시경 실내에 있기 어려웠다는 증언도 있다.[62] 이날 오전 9시경부터는 산정부 붕괴가 확인되었고, 낮부터는 서쪽에서 백연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가고시마 시가지에서 관측되었다.
1월 12일에는 지진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오전 10시경 분화 직전까지 가고시마 측후소에서 관측된 유감 지진은 111회였다. 아침에는 섬 내 우물에서 물이 넘치고 해안에서 물이 솟는 등 지하수 수압 상승 현상이 나타났다.[65][66] 이날 아침부터 사쿠라지마에서 백연이 솟아올랐고, 8~9시경부터 미나미다케 산정, 9시 반경부터 서쪽 중턱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며[69][70] 마그마 가스 분출이 시작되었고, 이는 본격적인 분화의 시작을 알렸다.
분화 시작 시각은 오전 9시 45분(이른 기록) 또는 10시 10분(늦은 기록)으로, 종합적으로 10시 전후 검은 분연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72] 분화는 사쿠라지마 서쪽 해발 약 200m 지점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약 500m 지점 분화가 더 강해졌다.[73] 서쪽 분화 직후 동쪽 산복에서도 분화가 시작되었다.[74] 분화 초기에는 소리가 없었지만, 몇 분 후 큰 소리와 함께 분연이 솟아오르며 플리니식 분화가 동서 산복에서 시작되었다.[75][76]
3. 1. 분화 경과





1914년(다이쇼 3년) 1월 12일, 사쿠라지마에서 분화가 시작되어 약 1개월간 폭발이 반복되면서 다량의 용암이 흘러나왔다. 이 분화로 58명이 사망했고, 유출된 용암의 부피는 약 1.5km3, 용암으로 덮인 면적은 약 9.2km2에 달했다. 용암류는 사쿠라지마 서쪽과 남동쪽 해상으로 뻗어 나가, 이전까지 해협(최대 거리 400m, 최대 수심 100m)으로 분리되어 있던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를 연결시켰다.[43]
다이쇼 대분화는 용암 1.34km3, 테프라 0.5km3, 마그마 환산 1.54km3의 분출량을 기록하여, 20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화산 활동 중 가장 많은 분출량을 보였다.[41][42]
다이쇼 대분화는 분화 양상의 변화에 따라 3개의 스테이지로 구분된다.[77] 각 스테이지는 다음과 같다.
스테이지 | 기간 | 주요 특징 |
---|---|---|
스테이지 1 | 1914년 1월 12일 ~ 1월 13일 23시경 | 사쿠라지마 동서 산록의 여러 분화구에서 발생한 플리니식 분화. 대량의 화산재와 경석 분출, 화산쇄설류 발생. |
스테이지 2 | 1914년 1월 13일 23시경 ~ 1월 말 | 간헐적인 화산재 분출과 격렬한 용암 유출. 서쪽 산록의 아카미즈, 요코야마, 코이케 취락과 동쪽 산록의 세토, 아리무라, 와키 3개 취락이 용암에 매몰.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 사이의 세토 해협이 메워짐.[108] |
스테이지 3 | 1914년 2월 ~ 1915년 가을 (추정) | 동쪽 산복에서 장기간에 걸친 완만한 용암 유출. 서쪽에서는 3월 상순에 활동이 거의 종료되었으나, 동쪽에서는 1915년 5월 초까지 강회를 동반하는 분화 활동 지속. |
분화 기간 동안 활동은 지속되었으며, 각 스테이지 사이에 휴지 기간은 없었다.[78]
스테이지 1 (1914년 1월 12일 ~ 1월 13일 23시경)사쿠라지마 동서 산록의 여러 분화구에서 플리니식 분화가 발생했다. 분화 시작 직후, 서쪽 산복에서는 서북서-동남동 방향으로 해발 약 200m에서 500m 부근에 소규모 분화구 열이 형성되었고, 동쪽 산복에서도 같은 방향의 소규모 분화구 열에 의한 열하 분화가 시작되었다.
분화 초기에는 서쪽 산복의 C1, C2, C3 분화구가 활동 중심이었으며, 대량의 화산쇄설물을 분출하여 화산쇄설구를 형성했다.[79] 동쪽 산복에서도 C1, C2, C3 분화구에서 대량의 화산쇄설물 분출과 화산쇄설구 형성이 이루어졌다.[80]
높이 솟아오르는 연기 기둥으로 인해 사쿠라지마 섬 내에는 고온의 화산쇄설물이 쏟아졌다. 특히 동쪽에서의 분출이 격렬하여 아리무라, 와키, 구로카미 3개 집락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소실되었다.[81]
서쪽에서는 분화 시작 30분 만에 연기 높이가 약 7,000~8,000m에 달했고,[82] 최대 15,000m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산재와 경석은 편서풍을 타고 도호쿠 지방까지 도달했다.[83]
플리니식 분화는 12일 22시부터 13일 새벽까지 최성기였으며, 13일 낮부터 약화되었다. 서쪽 산복에서는 13일 내내 플리니식 분화가 지속되었고, 동쪽에서는 이보다 빨리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화산쇄설류도 자주 발생했으며, 13일 20시경 비교적 큰 규모의 화산쇄설류로 아코바루 등의 집락이 전소되었다.[84]
빠른 목격 정보에 따르면 서쪽 산복에서는 1월 12일 밤에 용암류 유출이 보고되었다. 동쪽 산복에서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12일 또는 늦어도 13일에는 용암 유출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테이지 2 (1914년 1월 13일 23시경 ~ 1월 말)사쿠라지마 동서 산록의 여러 분화구에서 간헐적으로 화산재 분출과 격렬한 용암 유출이 발생했다. 화산재 분출량은 스테이지 1보다 감소했고, 화산재 색깔은 회색에서 검은색 계열로 변했다.[100]
서쪽 산복에서의 용암 유출로 1월 15일에 아카미즈, 요코야마 취락이 용암에 매몰되었고,[101] 코이케 취락도 용암에 매몰되었다.[102] 니시사쿠라지마 촌의 중심지였던 요코야마 취락이 매몰되면서 촌사무소, 우체국, 파출소, 심상 소학교 등 주요 시설이 파괴되었다. 1월 19일에는 카라스지마가 용암에 완전히 매몰되었다.[103][104][105] 서쪽에서의 용암 유출은 1월 말에 종료되었다.[106]
동쪽 산복에서는 스테이지 2에서 가장 많은 용암이 분출되었으며, 세토, 아리무라, 와키 3개 취락이 용암류에 매몰되었다.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의 중심지였던 아리무라 취락도 매몰되어 촌사무소, 우체국, 파출소, 심상 소학교 등 주요 시설이 파괴되었다. 용암은 세토 해협으로 유입되어 1월 말에는 사쿠라지마와 오스미 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다.[108]
스테이지 2 초기에는 화쇄류 발생도 확인되었으나, 다이쇼 대분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작다.[110]
스테이지 3 (1914년 2월 ~ 1915년 가을 (추정))동쪽 산복에서 장기간에 걸쳐 완만하게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종료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915년 가을경까지 용암 유출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쪽에서는 2월 상순까지 화산재 분출이 활발했으나 중순 이후 쇠퇴하여 3월 상순에는 활동이 거의 종료되었다. 동쪽에서는 2월 내내 폭발적인 분화가 계속되었고, 3월에는 활발한 활동과 휴지기가 반복되었다. 4월 중순 이후 점차 진정되었지만, 5월 하순에 다시 활성화되어 6월 중순까지 폭발적인 분화가 발생했다. 이후 1915년 5월 초까지 강회를 동반하는 분화 활동이 지속되었다.
동쪽 산복에서는 1914년 2월 상순부터 새로운 용암 유출(다이쇼 Ⅱ 용암류)이 시작되었다.[111] 다이쇼 Ⅱ 용암류는 이산화 규소 함유량이 가장 적고 고철질 용암이었다.
다이쇼 Ⅱ 용암류 유출 후, 용암류 선단 부분에서 이차 용암류가 유출되었다. 이차 용암류는 구 아리무라 취락 부근의 아리무라 지역과 구 세토 해협 부근의 세토자키 지역에서 확인되었다.[112] 아리무라 지역에서는 1914년 2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세토자키 지역에서는 5월 말부터 9월까지 이차 용암이 유출되었다.[114][115] 아리무라 지역의 용암 삼각주는 1914년 7월부터 1915년 여름 또는 가을경까지 성장했다.[116]
이차 용암 유출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제시되었다.
- 유출된 용암류의 굳어진 선단 부분이 파열되어 미고결 부분이 유출되었다는 가설.[118]
- 분화구에서 용암 터널이 형성되어 화구에서 공급된 용암이 용암 터널을 통해 해안 부근의 이차 용암으로 유출되었다는 가설.[119]
이차 용암 유출에 관한 기록은 1915년 4월이 마지막이며, 이후 기록이 없어 다이쇼 대분화의 정확한 종료 시기는 알 수 없다.[120] 다만 측량 결과에 따르면 1915년 4월부터 9월까지 아리무라 부근의 용암 삼각주가 해안 쪽으로 14m 연장되어, 1915년 여름 또는 가을 무렵까지 용암 유출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21]
3. 2. 사쿠라지마 지진
1914년(다이쇼 3년) 1월 12일 18시 28분경, 규모 7 정도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의 진원은 사쿠라지마 서쪽 또는 남쪽의 긴코만 안으로 추정된다.[89] 이 지진은 가고시마현 본토 지역에서 관측된 지진 중 최대 규모이며, 화산 폭발에 수반되어 발생한 지진으로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이다.[93] 지진 후, 가고시마시 연안에서는 소규모의 쓰나미가 관측되었다.
벚꽃섬 지진으로 가고시마시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95] 시가지 동부의 매립지에서는 진도 6, 매립지 서쪽에 해당하는 옛 해안선 부근의 사주나 모래가 퇴적된 지역, 그리고 시가지 북동부의 골짜기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진도 5강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96] 이 지진으로 29명이 사망했다.[97]
분화 초기에는 가고시마 시민들이 맞은편에서 불구경을 하고 있었으나, 분화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유언비어가 오갔고, 많은 시민들이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벚꽃섬 지진이 발생하면서 가고시마 시내는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가고시마 시내에서 피난을 시작하여 가고시마 시내는 일시적으로 거의 인적이 드문 상태가 되었다.[98]
3. 3. 2차 피해
다이쇼 대분화로 광범위한 지역에 화산재가 쌓이면서 농작물과 임업에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화산재가 많이 쌓인 지역은 "경지를 둘러보니 황량한 사막으로 변했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심각했다. 당시 가고시마의 주요 농산물이었던 담배, 보리, 뽕나무는 궤멸적인 피해를 보았고, 유채, 과수원, 채소 등도 큰 피해를 입었다.[129][130] 그러나 고구마, 무 등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131]
피해 복구를 위해 재에 묻힌 경지를 정리하고 용수로를 복구하는 작업이 인력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화산재가 두껍게 쌓인 경지에서는 "천지반전"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화산재 층의 두 배 정도 깊이의 도랑을 파고 그곳에 화산재를 묻어 분화 전의 표토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당시 오스미 반도에서 번성했던 임업도 화산재로 인해 많은 나무들이 말라 죽는 등 큰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천연림보다 인공림의 피해가 더 컸다.
다이쇼 대분화의 화산재는 입자가 매우 작아서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해했다. 그 결과, 이전보다 빗물이 땅에 스며드는 능력(침투능)이 약 7분의 1로 줄었고, 1955년부터 계속된 사쿠라지마 화산 분화로 인한 화산재와 비교해도 2분의 1에서 3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다.[134] 또한, 대량의 화산재로 산림의 식생이 파괴되어 물을 저장하는 능력(보수력)이 저하되었다. 게다가 대량의 화산재가 하천 상류에서 흘러내려 중하류에서는 하천 바닥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오스미 반도에서는 적은 비에도 토석류나 홍수가 자주 발생했다.[135]
분화 이후 1914년 2월 8일, 2월 15일, 3월 6일, 3월 8일과 9일, 23일에 잇따라 토석류와 홍수가 발생하여 교량이 유실되고 제방이 붕괴되었으며, 농지와 가옥에 큰 피해를 입혔다.[136] 특히 2월 15일에는 1명이 행방불명되었고, 3월 6일에는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행방불명되는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136] 희생자 중 3명은 사쿠라지마에서 오스미 반도로 피난 온 피난민이었다.[137] 토석류는 30cm 이상 화산재가 쌓인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고, 홍수 역시 30cm 이상 화산재가 쌓인 지역을 흐르는 하천에서 많이 발생했다.[138] 다이쇼 대분화로 인한 토석류와 홍수는 1921년경까지 빈번하게 발생했다.[139] 특히 수원지가 화산재가 많이 쌓인 지역에 위치한 구시라강의 피해가 컸으며, 지역 주민들은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하천을 정비하고 제방을 수리했지만, 전문 지식과 장비 부족으로 인해 홍수가 발생할 때마다 피해가 반복되었다.[140][141]
아이라 칼데라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지반 침하가 발생했다. 침하량은 수십 센티미터에서 2미터에 달했으며, 가고시마 시내에서도 약 30~50센티미터의 침하가 관측되었다.[142] 이로 인해 가고시마 만 안쪽에 에도 시대에 조성된 간척지와 염전이 바다에 잠기는 피해가 발생했으며, 1914년 8월에 닥친 태풍으로 인한 해일로 피해가 더욱 커졌다.[143][144]
3. 4. 주민들의 피난과 가고시마 측후소의 대응 논란

다이쇼 대분화에는 유감 지진[145] 등 여러 전조 현상이 나타났고, 1월 10일에는 일부 주민들이 사쿠라지마 섬 밖으로 피난을 시작했다.[145] 1월 11일에는 유감 지진이 빈번해지고 사쿠라지마에서 붕괴와 백연이 관측되면서, 섬 주민들은 분화를 우려하여 대거 섬을 떠나기 시작했다.[146] 안에이 분화(安永噴火)의 전설도 주민들의 피난을 부추겼다.[147][148] 분화 당일인 1월 12일 아침에는 사쿠라지마 섬 내에서 이상 용수가 발생하여, 위험을 직감한 주민들이 피난에 나섰다.[149][150]
이러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피난 덕분에 다이쇼 대분화는 대규모 플리니식 분화였음에도 사망자는 적었다. 당시 사쿠라지마 주민들은 대부분 반농반어 생활을 하며 자가용 배를 소유한 가정이 많아 섬 밖으로 피난하기 용이했다.[151] 그러나 가고시마 측후소의 대응은 주민들의 피난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152]
가고시마 측후소는 지진이 빈번해지자 지진 관측과 해석에 집중했다.[153] 그러나 당시 측후소에는 구식 밀른식 지진계 한 대만 있어 진원지 특정조차 어려웠다.[154] 각지 경찰서에 지진 정보 보고를 요청하고 진원 추정을 시도했지만 즉각적인 답변을 얻지 못했고, 언론과 현(県)의 문의가 쇄도했다.[155]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은 1월 11일 측후소에 문의 전화를 걸었고, 측후소는 사쿠라지마에 위험이 없다고 답변했다.[156] 분화 당일인 1월 12일 오전 7시, 8시경 문의에도 측후소는 분화 우려가 없다고 답했다.[157] 측후소를 믿고 피난하지 않은 주민들도 있었고, 특히 섬 내 지식인들이 다수 피난하지 않았다.[158] 측후소의 답변을 믿은 촌장 등 촌 간부들은 피난하는 주민들을 만류하려 했다.[159][160]
1월 11일 심야, 경찰 측에서 측후소에 지진 정보가 전달되면서 일련의 지진이 사쿠라지마 화산성 지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파악했다.[161] 1월 12일 새벽에는 화산성 지진임을 확신했지만, 분화 우려를 단정하지 못했다.[162] 측후소가 분화 우려로 방침을 전환한 것은 1월 12일 오전 8시경, 사쿠라지마에서 백연을 관측한 후였다.[163]
측후소는 즉시 가고시마 경찰서에 분화 우려를 통보했다. 경찰서에는 니시사쿠라지마 촌 주재소 순경의 긴급 구조 요청도 들어왔다. 가고시마현 경찰부는 구조선을 파견했고,[164] 경찰은 사쿠라지마 주변 선박에 구조 협조를 지시했다. 구조 활동에는 현경 외에 대일본 제국 육군 수송선,[99] 긴코만 연안 어민들이 협력했다.[165] 다음 날 13일에는 대일본 제국 해군의 사세보 진수부에서 파견된 순양함 도네를 기함으로 하는 구호대가 도착하여 구조 활동을 했다.[166]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은 오전 8시가 넘어 측후소와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촌장은 전 촌민 피난을 결단했다.
니시사쿠라지마 촌은 11일에 많은 주민들이 피난했고, 바람 방향 덕분에 화산재와 경석 피해가 적어 구조선으로 대부분 구조되어 희생자는 1명이었다. 그러나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은 잔류 촌민 피난 시 화산재와 경석 직격을 받았다.[167] 촌장, 수입역, 서기 2명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촌장과 서기 1명은 구조되었지만 수입역과 서기 1명은 사망했다.[168] 측후소의 답변을 믿고 피난이 늦어진 주민들 중 희생자가 발생했다.[169] 결국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에서는 사망·행방불명자 25명이 발생했다.
분화 후,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에서는 가와카미 촌장이 사망하고 노조에 촌장이 취임했다. 사망한 가와카미 촌장은 사쿠라지마 이변 시 측후소 말을 믿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여 피난하라는 내용의 분화 기념비 건립을 염원했다.[170] 노조에 신임 촌장은 가와카미 전 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1923년 촌회에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다. 촌회는 "사쿠라지마에 이상이 있을 때는 측후소를 믿지 말고 서둘러 피난하라"는 문구 삽입을 조건으로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노조에 촌장에게 일임했다.[171]
결국 비문은 측후소를 직접 비판하는 대신 "이론을 신뢰하지 말라(理論ニ信頼セズ)"는 표현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비문 기안자가 측후소의 체면을 고려했기 때문이며, 노조에 촌장은 불만을 품으면서도 이를 수용했다.[172] 이 사쿠라지마 폭발 기념비는 히가시사쿠라지마 초등학교 교정에 현존한다.[173][174]
3. 5. 피난 생활과 집단 이주
분화 전부터 피난을 시작했던 사쿠라지마(桜島) 섬 주민들은, 처음에는 사찰, 학교, 공공 시설 등에서 임시로 피난 생활을 했다. 곧 재해민 수용소라는 가설 주택이 건설되어 그곳에서 90일 동안 식비 지원 등을 받으며 생활했지만, 이후에는 자력으로 생활을 재건해야 했다.[195]1914년 6월, 다이쇼 대분화 피해 대응을 위해 내무 대신, 대장 대신, 문부 대신의 권한 일부가 가고시마현 지사에게 위임되는 칙령[196]이 발령되었다. 현 지사는 권한과 예산 면에서 재량이 커졌고,[197] 대학, 지질 조사소, 농사 시험장 등의 연구자들을 동원해 농지 복구에 힘썼다. 황실 하사금, 일본 적십자사 등의 의연금도 피해자들에게 분배되었다.[198]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가고시마현은 홋카이도, 대만, 조선까지 이주처를 알아봤다.[199]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조선에 지정 이주지가 마련되었고,[200] 피해자들은 택지와 경지를 분배받았다.[201] 지정 이주지는 국유림 등을 무상으로 대여하여 개간하고, 일정 기간 후 무상 양도하는 방식이었다. 지정 이주 외에 연고를 따라 임의 이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쿠라지마 다이쇼 분화지"에 따르면 지정 이주자는 1001세대(6245명), 이 중 사쿠라지마 섬 주민은 883세대(5617명)였다. 임의 이주 세대는 1130세대로, 분화 전 사쿠라지마 섬 주민의 약 3분의 2가 고향을 떠났다.
개간은 자력으로 해야 했지만, 이주 여비, 짐 이송비, 가건물 비용, 가구, 농기구, 씨앗, 묘목, 식비 등이 지원되었다. 현의 농업 기술사가 기술 지도도 했다.[202] 그러나 개간은 어려웠고, 음료수 확보도 어려웠으며, 아이들 교육도 문제였다. 기존 주민들과의 갈등도 있었다.[203]
분화가 진정되면서 사쿠라지마 섬 내 피해가 적었던 지역 사람들은 귀환하여 복구에 참여했다. 용암에 매몰되지 않은 지역의 지정/임의 이주자 대부분도 돌아갔다. 그러나 용암에 매몰된 지역 사람들은 이주지에서 생활을 이어갔고, 1936년 5월에 개간지가 무상 양도되었다.[204]
4. 다이쇼 대분화의 영향
다이쇼 대분화는 용암 1.34 세제곱 킬로미터, 테프라 0.5 세제곱 킬로미터, 마그마 환산으로는 1.54 세제곱 킬로미터의 분출량을 기록했다. 이는 20세기 일본에서 분화로 인한 분출량이 가장 많았던 화산 활동이다.[41][42] 가고시마현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이쇼 대분화와 사쿠라지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총 58명이었다. 그러나 황실 구호금 목록 등으로 추정되는 실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71명 이상으로, 공식 발표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43]
다이쇼 시대 초기에는 근대적인 화산 관측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지만, 과학적인 관찰 방법이 알려지고 사진기가 보급되면서 분화 관련 기록이 많이 남겨졌다. 지역 주민들의 체험담, 수기, 스케치, 사진 등이 언론 보도와 출판물을 통해 활발히 소개되었다.[44][45]
지질 조사소의 사토 덴조, 도쿄 대학의 오모리 후사키치, 고토 분지로 등 전문가들의 조사 보고 외에도, 가고시마 고등 농림학교의 카나이 마스미, 가고시마 측후소 등 지역 전문가들의 보고도 이루어졌다. 특히 오모리의 보고는 1년여에 걸친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분화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를 담고 있어 높이 평가받는다.[46] 다이쇼 대분화는 풍부한 기록과 분출물의 보존 상태 덕분에 안산암질 화산 분화의 귀중한 사례로 여겨진다.[47]
가고시마 대공습과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문헌이 소실되었고, 잦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헌이 흩어지는 등 유실된 자료도 적지 않다.[48] 현존하는 문헌 중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특히 분화 후반부 활동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50] 전문가 보고서도 조사 시점의 분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다이쇼 대분화는 분화 양상에 따라 3단계로 나뉜다.[77] 각 단계 사이에 휴지기는 없었다.[78]
- 스테이지 1 (1914년 1월 12일 ~ 13일 23시경): 사쿠라지마 동서 산록 분화구에서 발생한 플리니식 분화.
- 스테이지 2 (1914년 1월 13일 23시경 ~ 1월 말): 간헐적인 화산재 분출과 격렬한 용암 유출.
- 스테이지 3 (1914년 2월 ~ 1915년 가을): 동쪽 산록에서 장기간 완만한 용암 유출.
스테이지 1사쿠라지마 동서 산록의 여러 분화구에서 열하 분화가 시작되었다.
동서 산록의 분화구에서 대량의 화산쇄설물이 분출되어 화산쇄설구가 형성되었다.[79][80] 사쿠라지마 동쪽에서 더 격렬한 분출이 일어나 아리무라, 와키, 구로카미 3개 집락이 소실되었다.[81]
서쪽에서는 분화 시작 30분 만에 연기 높이가 7000~8000미터에 달했고,[82] 최대 15000미터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화산재는 도호쿠 지방까지 도달했다.[83] 스테이지 1 시기에 분출된 화산재는 회색 계열이었다.
플리니식 분화는 1월 12일 22시부터 13일 새벽까지 가장 활발했고, 13일 낮부터 약화되었다. 서쪽 산록에서는 13일까지 지속되었고, 동쪽에서는 더 빨리 종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산쇄설류가 자주 발생하여 아코바루 등의 집락이 전소되었고,[84] 대량의 경석이 바다까지 흘러갔다.[85] 분화 초기 플리니식 분화로 26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86]
서쪽 산록에서는 1월 12일 밤, 동쪽 산록에서는 12일 또는 13일에 용암 유출이 시작되었다. 스테이지 1에서 분출된 용암은 이산화규소 함량이 높고 파편상 결정이 많은 화산쇄설성 용암이었다.[87][88]
1월 12일 18시 28분경, 규모 7 정도의 벚꽃섬 지진이 발생했다.[90][91] 진원은 긴코만 내로 추정되며,[89] 가고시마현 본토 지역에서 관측된 지진 중 최대 규모였다.[93] 가고시마시 연안에서는 소규모 쓰나미가 관측되었다.
764년 덴표호지 대분화 때에도 군발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94]
벚꽃섬 지진으로 가고시마시는 큰 피해를 입었고,[95] 사망자는 29명이었다.[97] 지진으로 인해 가고시마 시내는 혼란에 빠졌고, 대일본제국 육군 보병 제45연대가 치안 유지에 나섰다.[98][99]
스테이지 2사쿠라지마 동서 산록 분화구에서 간헐적인 화산재 분출과 격렬한 용암 유출이 발생했다. 화산재 분출량은 스테이지 1보다 감소했고, 화산재 색깔은 회색에서 검은색 계열로 변했다.[100]
서쪽 산록 용암 유출로 아카미즈, 요코야마, 코이케 취락이 매몰되었고,[101][102] 니시사쿠라지마 촌의 주요 시설이 괴멸되었다. 카라스지마는 1월 18일 육지와 연결되고 19일에 용암에 매몰되었다.[103][104][105] 서쪽 용암 유출은 1월 말 종료되었고, 체적은 동쪽의 약 4분의 1로 추정된다.[106]
동쪽 산록 용암 유출은 스테이지 2에서 가장 활발했고, 총 용암 분출량은 서쪽의 4배 이상이었다. 세토, 아리무라, 와키 3개 취락과 히가시사쿠라지마 촌의 주요 시설이 용암에 매몰되었다. 세토 해협은 폭 약 360미터, 수심 약 75미터였으나,[107] 용암 유입으로 1월 말 사쿠라지마는 오스미 반도와 육지로 연결되었다.[108] 아리무라 앞바다에는 대량의 용암이 흘러들어 해저 용암 두께가 최대 150미터에 달했다.[109]
스테이지 2에서 유출된 용암은 파편상 결정량이 낮고 용결 구조가 뚜렷하지 않다.
스테이지 2 초기에 화쇄류 발생이 확인되었으나, 다이쇼 대분화 전체에서 화쇄류 분출물 비율은 작다.[110]
스테이지 3동쪽 산록에서 장기간 완만하게 용암이 유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종료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915년 가을경까지 용암 유출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14년 2월, 동서 산록에서 폭발적인 분화가 계속되었으나, 서쪽은 3월 상순에 활동이 거의 종료되었다. 동쪽은 2월 중 폭발적인 분화가 계속되었고, 3월에는 활발한 활동과 휴지기가 반복되었다. 4월 중순 이후 분화 활동이 점차 진정되었지만, 5월 하순에 재활성화되어 6월 중순까지 폭발적인 분화가 일어났다. 1915년 5월 초까지 강회를 동반한 분화 활동이 지속되었다.
서쪽 용암 분출은 스테이지 2 종료 단계에서 멈췄다. 동쪽 산록에서는 1914년 2월 상순부터 새로운 용암 유출(다이쇼 Ⅱ 용암류)이 시작되었다.[111] 다이쇼 Ⅱ 용암류는 이산화규소 함유량이 가장 적고 파편상 결정 비율도 낮아, 폭발적인 요소가 없는 용암 유출이었다. 스테이지 3 용암 유출량은 스테이지 2보다 적고, 분출률도 가장 낮았다.
다이쇼 Ⅱ 용암류 선단 부분에서 이차 용암류가 유출되었다. 아리무라 지역과 세토자키 지역에서 확인되었으며,[112] 아리무라 지역에서는 2곳에서 용암 삼각주를 형성했다.[113] 이차 용암 유출 시기는 아리무라 지역에서 1914년 2월 중순 ~ 5월 말, 세토자키 지역에서 5월 말 ~ 9월로 추정된다.[114][115] 아리무라 지역 용암 삼각주는 1914년 7월 ~ 1915년 여름 또는 가을까지 성장했다.[116] 이차 용암 유출 지역은 분화 전 골짜기 지형이었다는 지적이 있다.[117]
이차 용암 유출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 굳어진 용암류 선단 부분이 파열되어 내부 미고결 부분이 유출되었다는 가설.[118]
- 용암 터널을 통해 화구에서 공급된 용암이 해안 부근 이차 용암으로 유출되었다는 가설.[119]
이차 용암 유출 기록은 1915년 4월이 마지막이어서 다이쇼 대분화 종료 시기는 불분명하다.[120] 측량 결과에 따르면 1915년 4월 ~ 9월 아리무라 부근 용암 삼각주가 14미터 연장되어, 1915년 여름 또는 가을까지 용암 유출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21]
다이쇼 대분화로 인한 강하는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사쿠라지마 전역에 20cm 이상, 두꺼운 곳은 2m 넘게 쌓였다.[122][123] 구로카미 마을 하라 고샤 신사의 흑신 매몰 도리이는 화산재에 매몰되었다.[124]
겨울철 서풍으로 오스미 반도에 대량의 재가 내렸고, 반도 절반 지역에 10cm 이상 쌓였다. 다루미즈시 우시네 지구는 2m, 시부시시 서쪽 경계 부근은 30cm 가량 쌓였다.[125] 서풍을 탄 화산재는 오가사와라 제도와 캄차카 반도까지 도달했다.[126]
도쿄 제국대학 고토 분지로, 지질 조사소 사토 덴조, 가고시마 고등 농림학교 카나이 마스미가 강하 화산재 등층 두께 선도를 작성했다.[127] 고토와 사토는 단기간 강하를 기록한 반면, 카나이는 장기간 관찰하여 더 넓은 분포역을 나타냈다.[128]
강하가 심한 지역은 농경지가 황폐화되어 담배, 보리, 뽕나무 등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129] 유채, 과수원, 채소류 등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130] 고구마, 무 등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131] "천지반전" 수법 등으로 경지 복구를 시도했다.
임업도 강하로 인해 고사하는 수목이 많아 큰 타격을 입었고, 천연림보다 인공림 피해가 더 컸다.
4. 1. 문화적 영향

다이쇼 대분화 당시 가고시마시 출신인 구로다 세이키는 병상에 있던 아버지를 문병하기 위해 가고시마 시에 머물고 있었다. 분화를 겪은 구로다는 현지 조사를 하러 간 오모리 후사키치와 동행하거나, 제자인 오무레 난토와 야마시타 겐슈를 데리고 몇 차례 사쿠라지마에 갔다.[205] 오무레 난토는 가고시마에서 서양화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야마시타 겐슈는 가고시마 서양화단의 황금기를 만들었다고 한다.[206]
가고시마 시립 미술관에는 다이쇼 대분화를 그린 구로다 세이키의 유화 작품 6점, 야마시타 겐슈의 유화 작품 1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가고시마 현립 박물관에는 야마시타 겐슈의 유화 작품 5점이 소장되어 있다.[207] 국립과학박물관에는 오무레 난토가 그린 다이쇼 대분화 유화 2점, 야마시타 겐슈의 유화 1점이 소장되어 있다.
구로다가 그린 유화는 이마무라 아키쓰네가 물려받아 이마무라 사후 유족이 가고시마 시립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국립과학박물관에 소장된 오무레 난토와 야마시타 겐슈의 유화는 오모리 후사키치의 요청을 받아 그려졌으며, 오모리에게 건네진 후 도쿄 대학의 지진학 교실에 걸려 있다가 1971년에 국립과학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생각된다.[208] 국립과학박물관에 수장된 후 약 40년간 자료 창고에 방치되어 열화가 진행되었지만,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국립과학박물관 소장의 오무레와 야마시타의 유화는 미술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며, 가고시마에서 서양화의 창시자인 오무레, 가고시마 서양화단의 황금기를 만든 야마시타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있어, 미술관 등에서의 전시 등이 기대된다.[209]
1969년, 니이다 지로는 소설 "사쿠라지마"를 발표한다. "사쿠라지마"는 다이쇼 대분화와 당시 가고시마 측후소의 대응을 바탕으로, 사쿠라지마의 분화 관측에 집념을 불태우는 주인공의 분투를 그린 소설이다.[210] "사쿠라지마"를 쓰기 위해 니이다 지로는 현지 사쿠라지마를 답사하고, 가고시마에서 소설을 완성했다.[211] 소설 내에서는 니이다 지로 본인이 오랫동안 근무했던 기상대에서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으며, 니이다의 숙부이며 다이쇼 대분화 당시 가고시마 측후소장이었던 가쿠노 기스케 옹호론을 펼친 후지와라 사쿠헤이의 일화를 더해 화산 연구와 예지, 그리고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212]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활약한 엔카 가수 소에다 아셈보가 발표한 유행가 "시커먼 노래"의 가사에 사쿠라지마 분화의 모습이 담겨 있다.
4. 2. 식생 변화
다이쇼 대분화 이후 용암류 위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식물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분화 후 21년 만에 곰솔이, 36년 후에는 사방오리가 나타났고, 48년 후에는 후박나무와 사스레피나무 등이 확인되었다.[213] 시간이 더 흘러 84년 후에는 붉가시나무, 청미래덩굴, 섬매자나무 등이, 96년 후에는 호랑가시나무, 만병초, 석송 등이 자라는 것이 확인되었다.[213] 이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물의 종류, 특히 상록 활엽수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213] 2015년 조사에서는 다이쇼 용암 위에 호장근과 곰솔 군락을 기본으로 섬매자나무 등이 많이 확인되었다.[214]다이쇼 용암에서는 동쪽과 서쪽의 식생에 차이가 나타났다. 곰솔을 제외한 활엽수 등은 동쪽 용암으로의 진출이 늦어졌고,[215] 2015년 조사에서도 동쪽 용암 위의 식생은 서쪽에 비해 종의 수가 적었다.[216]
다이쇼 대분화에서 서쪽으로 흐른 용암은 용암류가 나타난 후 화쇄류가 발생했기 때문에 표면에 화쇄물이 포함되어 요철이 많고, 물과 토사가 고이기 쉬웠다. 또한 용암 표면 자체가 약하고 풍화되기 쉬운 특징이 있었다.[217] 반면 동쪽으로 흐른 용암류는 표면에 화쇄류의 영향이 보이지 않고 용암이 블록처럼 겹쳐져 있었다.[218] 이러한 이유로 서쪽으로 흐른 용암류는 동쪽보다 식물이 정착하기 쉬웠다.[219] 또한 최근 빈번한 분화로 인한 강회와 아황산 가스의 영향도 동쪽이 더 커서, 동쪽 용암으로의 식물 진출 지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20]
5. 이후 분화 대비
안에이 분화는 역사 시대의 4대 분화 중 총 분출물량이 가장 컸던 것으로 추정되며, 분화 후 지반 침하도 다이쇼 대분화 때보다 컸다.
다이쇼 대분화 이후 아이라 칼데라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의 지반 침하가 발생했다. 침강은 수십 센티미터에서 2미터에 달했으며, 가고시마시에서도 약 30~50센티미터의 침강이 관측되었다.[142] 이로 인해 가고시마만 안쪽 에도 시대 간척지와 염전이 해몰되었고, 1914년 8월 태풍으로 인한 고조 피해가 확대되었다.[144]
5. 1. 분화 기록 수집 및 보존
가고시마현립박물관은 다이쇼 대분화(1914년) 3개월 후인 1914년 4월, 가고시마현립도서관 내에 설치된 박물부 상임위원회를 전신으로 한다. 이 위원회는 다이쇼 대분화 관련 기록과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는 현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222]
가고시마현립도서관은 다이쇼 대분화 이후 안에이 대분화(1779년)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복사, 보존하고 있다.[223] 1927년에는 가고시마현이 총괄 보고서인 '사쿠라지마 다이쇼 분화지(桜島大正噴火誌)'를 간행했으며, 시정촌, 군청 등에서도 분화 및 재해 기록을 간행했다.[224]
분화 후 피해 지역과 집단 이주지에는 기념비와 이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시간 경과에 따른 풍화를 막고 재해 기억 전승 및 방재 교육을 위해 이 기념비들에 대한 기록 조사가 이루어졌다.[225][226]
일본 내각부 중앙방재회의 재해 교훈 계승 전문조사회는 2011년 '1914 사쿠라지마 분화' 보고서를 작성하고, 다이쇼 대분화 관련 디지털 아카이브를 제작했다. 이 아카이브에는 각지에 남아 있던 기록, 일기, 작문, 스케치, 그림, 그림 엽서 등 약 8.6기가바이트(GB)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5. 2. 분화 경계 및 대책
2019년에는 아이러 칼데라 내 사쿠라지마의 마그마 축적량이 다이쇼 대분화 전의 약 9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2020년대 안에 다이쇼 대분화 전의 축적량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이쇼 대분화급 대분화가 발생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된다.[227]대규모 분화에 대비하여 사쿠라지마에서는 가고시마 지방 기상청의 정규 관측 외에도, 교토 대학 방재연구소 부속 화산 활동 연구 센터 사쿠라지마 화산 관측소가 설치되었다. 가고시마 대학과 오스미 하천 국도 사무소가 설치한 것을 포함하여 사쿠라지마 섬 내에 지진계가 총 18기 설치되었으며, 경사계, 신축계, GPS에 의한 연속 관측 체제도 정비되어 있어, 일본의 화산 중에서도 가장 충실한 화산 관측 감시 체제가 갖춰져 있다. 이 관측망을 통해 대규모 분화의 전조 현상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229]
다음 대규모 분화에서도 지금까지의 대규모 분화와 마찬가지로 사쿠라지마의 산복부에 분화구가 형성되어 사쿠라지마 전역에 화쇄류와 분석의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분화가 시작되기 전에 섬 주민의 피난을 완료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쿠라지마에서 가고시마시 시가지로 페리를 이용한 피난 및 육지로 연결된 오스미 반도로의 피난 계획이 수립되어 있다.[230] 피난 장소는 각 취락마다 지정되어 있으며,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강회 범위 등이 변화하는 것을 고려하여 다른 지역에 복수의 피난처가 준비되어 있다. 사쿠라지마의 각 세대에는 사쿠라지마 화산의 해저드 맵, 피난 매뉴얼이 배포되어 있고, 전 주민의 피난 명부가 작성되어 있으며, 명부와 연동된 바코드가 부착된 방재 헬멧이 전 주민에게 배포되어 있다. 또한, 활동 화산 대책 특별 조치법에 근거한 피난 시설 긴급 정비 지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주민 및 관광객의 섬 내 일시적 피난 시설로서 가고시마시와 가고시마군사쿠라지마정(당시)는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대피호 32기·대피소 20곳을, 가고시마현스이젠시는 1978년에 대피호 5기를 정비했다.[231]

긴급 피난 후에는 피난 생활 장기화에 대비하여 약 1주일 후부터 약 2개월 후까지는 숙박, 입욕 시설 등을 갖춘 연수 시설 등에서 지내고, 그 후에는 재해 가설 주택으로 이동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232]
가고시마시에서는 2017년부터 대량 강하 화산재, 경석에 관한 검토가 시작되었으며, 피난 대응, 응급 의료, 경석 화산재 제거, 라이프라인 대책, 토석류, 하천 범람 대책의 6개 작업 부서가 설치되어 대책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대량의 강하 화산재는 도로망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며,[233] 다이쇼 대분화 후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토석류, 하천 범람, 그리고 입자가 미세했던 다이쇼 대분화와 같은 화산재가 대량으로 강하할 경우, 비에 젖어 시멘트 상태가 된 화산재가 송전선의 애자에 달라붙어 전력 공급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된다.[234] 이러한 도로 복구, 토석류 대책, 정전 대책에는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235]
5. 3. 사쿠라지마·긴코만 지오파크와 대규모 분화
사쿠라지마·긴코만 지오파크는 다이쇼 대분화(大正大噴火일본어) 등 사쿠라지마가 대규모 분화를 반복해 온 사실과 그 실태, 그리고 대규모 분화 발생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다.[241] 이를 위해 지오 투어와 세미나 등을 통해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보급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241]앞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관에 맞춰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유튜브, 게임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홍보 활동이 기대된다. 학교 교육을 통한 재해 경험 전승과 관련해서는, 초등학교 6학년에게 사쿠라지마·긴코만 지오파크가 제작한 부교재 "대지의 구조와 변화"를 배포하고 있으며, 이 부교재에서는 사쿠라지마의 대규모 분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규모 분화 대책과 지오파크 활동과의 연계도 기대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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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桜島村は[[1950年]]、西桜島村([[1973年]]、町制施行により[[桜島町]])は[[2004年]]にそれぞれ鹿児島市へ編入合併し、現在は桜島の全域が[[鹿児島市]]に属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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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中の勅令は「{{ws|[[:s:町村行政ニ關シ主務大臣許可ノ職權ヲ縣知事ニ委任スルノ件|町村行政ニ關シ主務大臣許可ノ職權ヲ縣知事ニ委任スルノ件]]}}」(大正3年勅令第119号)を指す。桜島の大正大噴火による被害に対して鹿児島県知事に権限委任がなされたほかに、同年の凶作の被害に遭った県の知事に対しても同様に権限が委任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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