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씨 (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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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치바나 씨는 아스카 시대 말 아가타노 미누카이노 미치요가 겐메이 천황으로부터 씨성을 하사받으면서 시작된 씨족이다. 나라 시대에는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정권을 장악하며 번성했지만, 그의 사후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으로 몰락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다치바나노 가치코가 황후가 되면서 세력을 회복했지만, 이후 구교 배출이 끊기면서 쇠퇴했다. 지쿠고 다치바나 씨, 이요 다치바나 씨 등 분가가 존재하며, 쿠스노키 씨, 라이 씨 등이 다치바나 씨의 후예를 자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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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씨 (공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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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명 (한국어) | 다치바나 씨 |
씨족명 (일본어) | 橘氏 (たちばなうじ, Tachibana-uji, たちばなし, Tachibana-shi) |
씨성 | 橘宿禰 (Tachibana no Sukune), 이후 橘朝臣 (Tachibana no Ason) |
가문 | 황별 |
본관 | 불명 |
창시자 |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 |
설립 연도 | 708년 |
몰락 연도 | 불명 |
주요 근거지 | 불명 |
역사적 배경 | |
기원 | 겐메이 천황의 시대,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가 창설 |
주요 인물 | 다치바나노 모로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다치바나노 가치코 (단린 황후) 다치바나노 하야나리 다치바나노 잇세이 다치바나노 요시후루 고시키부노 나이시 다치바나노 도모야스 구스노키 마사시게(전승) 다치바나노 기미나리 다치바나노 아리요 다치바나노 오토모 |
분가 | |
주요 분가 | 규슈 다치바나 씨 이요 다치바나 씨 |
자손 | |
주요 자손 가문 | 아리요시 씨 히로오카 씨 우스게 가문 (공가) 무샤노코지 가문 (공가) 아오야마 가문 (지하가) 후카이 가문 (지하가) 와다 가문 (지하가) 소데오카 가문 (지하가) 가쿠타 가문 (지하가) 다치바나 씨 (지쿠고 국) (무가) 이와무로 씨 (무가) 시부에 씨 (무가) 나카무라 씨 (무가) 우시지마 씨 (무가) 나카하시 씨 (무가) 도하시 씨 (무가) 구스노키 씨? (무가, 전승) 이와미 료케 씨 (무가) |
가계 | |
혈통 | 황별 씨족 |
2. 역사
아스카 시대 말기 궁녀였던 아가타노 미누카이노 미치요는 덴무 천황 때부터 궁중에서 일했으며, 몬무 천황의 유모로 발탁될 만큼 일본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708년 겐메이 천황은 미치요의 공을 높이 사 '다치바나노 스쿠네'라는 성씨를 하사했고, 이때부터 다치바나 씨가 시작되었다.[4] 736년 미치요의 아들인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 형제는 어머니의 성을 잇겠다는 뜻을 조정에 알렸고, 조정은 이를 허락했다.
덴표 3년(731년)부터 산기(参議)를 맡아 구교로 발탁된 다치바나노 모로에는 덴표쇼호 2년(750년) 정월 16일에 '다치바나노 아손(橘朝臣)'이라는 가바네를 받았다.[5] 다치바나노 모로에의 시대는 다치바나 씨 역사에서 가장 권세를 떨쳤던 시대였다.[5] 그러나 덴표쇼호 9년(757년) 정월에 모로에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와의 정쟁에서 패하고 7월에 모반 혐의를 받아 옥사하였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5]
나라 시대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옥사한 뒤, 다치바나 씨는 의정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라마로의 손녀 다치바나노 가치코가 사가 천황의 황후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822년 나라마로의 손자인 다치바나노 쓰네누시(橘常主)가 구교가 되면서 약 70년 만에 다치바나 씨는 다시 구교 반열에 올랐다.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다치바나 씨 출신으로 구교에 오른 인물은 7명이었다. 983년 산기를 지내다 사흘 만에 사망한 쓰네히라를 마지막으로, 다치바나 씨 출신 구교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후 다치바나 씨는 수령층의 하급 귀족으로서 교토를 떠나 지방에 토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중앙 정계에서는 다치바나노 노리타카의 자손이 적류(嫡流)로서 햐쿠케를 형성하여 다치바나 씨의 씨장자(氏長者)를 배출했다.[10] 햐쿠케는 센고쿠 시대에 대가 끊겼다.[16]
에도 시대에는 지하가(地下家)로서 아오야마케, 후카이케, 와다케 등의 집안이 다치바나 씨를 칭했다.
2. 1. 씨성의 하사
아스카 시대 말기 궁녀였던 아가타노 미누카이노 미치요는 덴무 천황 때부터 궁중에서 일했으며, 몬무 천황의 유모로 발탁될 만큼 일본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미누 왕과의 사이에서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을 낳았고, 이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혼인하여 고묘시를 낳았다.[4]708년 겐메이 천황은 덴무 천황 때부터 궁중에서 일해 온 미치요의 공을 높이 사 그녀에게 '다치바나노 스쿠네'라는 성씨를 하사했고, 이때부터 다치바나 씨가 시작되었다.[4]
736년 미치요의 아들인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 형제는 어머니의 성을 잇겠다는 뜻을 조정에 알렸고, 조정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가쓰라기 왕은 다치바나노 모로에로, 사이 왕은 다치바나노 사이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들의 자손들은 대대로 다치바나 씨를 칭했다.
2. 2. 나라 시대
덴표 3년(731년)부터 산기(参議)를 맡아 의정관(議政官, 구교公卿)으로 발탁된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는 덴표 9년(737년) 다이나곤(大納言), 덴표 10년(738년) 고다이진(右大臣), 덴표 15년(743년) 사다이진(左大臣)으로 승진하였다. 쇼무·고켄 두 천황의 치세 아래서 태정관(太政官)의 수반으로서 정치를 맡았다.[5] 처음에는 다치바나노 스쿠네(橘宿禰)라는 가바네(姓)로 통했지만, 덴표쇼호(天平勝宝) 2년(750년) 정월 16일에 모로에에게 '다치바나노 아손(橘朝臣)'이라는 가바네가 내려져 이후 '다치바나노 아손'으로 불리게 되었다.[5]다치바나노 모로에의 시대는 다치바나 씨 역사에서 가장 권세를 떨쳤던 시대였다.[5] 그러나 덴표쇼호 9년(757년) 정월에 모로에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다치바나노 나라마로(奈良麻呂)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와의 정쟁에서 패하고 7월에 모반 혐의를 받아 옥사하였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5]
2. 3. 헤이안 시대
나라 시대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옥사한 뒤, 다치바나 씨는 의정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라마로의 손녀 다치바나노 가치코(橘嘉智子)가 사가 천황의 황후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신하 씨족 가운데 황후를 배출한 것은 후지와라 씨뿐이었기에, 다치바나 씨 황후의 존재는 귀족 사회에서 다치바나 씨의 지위를 크게 상승시켰다. 822년에 나라마로의 손자인 다치바나노 쓰네누시(橘常主)가 구교가 되면서 약 70년 만에 다치바나 씨는 다시 구교 반열에 올랐다. 가치코의 아들이 닌묘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가치코의 오빠 다치바나노 우지키미(橘氏公)는 외척으로서 844년 우대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다치바나 씨 방계인 다치바나노 하야나리(橘逸勢)가 조와의 변으로 조정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가치코가 건재한 동안 다치바나 씨는 큰 세력을 떨쳤다. 황후 가치코는 다치바나 씨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학관원(学館院)을 세웠다.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다치바나 씨 출신으로 구교에 오른 인물은 7명이었다. 우지키미의 장남 미네쓰구(峰継), 나라마로의 5대손 히로미(廣相), 쓰네누시의 증손 스미키요(澄淸), 쓰네누시의 손자 요시타네(良殖), 히로미의 여섯째 아들 기미요리(公頼), 히로미의 손자 요시후루(好古), 요시타네의 손자 쓰네히라(恒平)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산기 또는 주나곤에 그쳤지만, 요시후루는 다이나곤까지 올랐다. 983년 산기를 지내다 사흘 만에 사망한 쓰네히라를 마지막으로, 다치바나 씨 출신 구교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다치바나 씨 출신 구교가 더 이상 배출되지 않으면서, 다치바나 씨는 수령층의 하급 귀족으로서 교토를 떠나 지방에 토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인물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帥)로 규슈에 내려온 산기 다치바나노 기미요리의 자손은 그대로 지쿠고국에 정착하여 무사가 되었고, 지쿠고 다치바나 씨(筑後橘氏)를 칭했다고 한다.
2. 4. 이후
중앙 정계에서는 다치바나노 노리타카(橘則隆)의 자손이 적류(嫡流)로서 햐쿠케(薄家)를 형성하여 다치바나 씨의 씨장자(氏長者)를 배출했다.[10] 햐쿠케는 센고쿠 시대에 야마시나 도키쓰구(山科言継)의 아들로 햐쿠케에 양자로 들어온 다치바나노 모로미쓰(橘諸光, 모치쓰구以継)가 사망하면서 16세기 후반에 대가 끊겼다.[16]에도 시대에는 지하가(地下家)로서 아오야마케(青山家, 나카쓰카사쇼(中務省)의 사생史生), 후카이케(深井家, 찬자賛者), 와다케(和田家) 등의 집안이 다치바나 씨를 칭했고, 특히 후카이 집안은 햐쿠케의 직계(조부인 다치바나노 사다모토(定基)가 모치쓰구의 아들)로 알려져 있었다. 에도 후기의 유명한 학자 라이 산요(頼山陽)는 햐쿠케의 서류(庶流)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3. 분가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시조로 하는 다치바나 씨는 여러 분가를 두었다.
- 다치바나노 히로미(橘広相) - 모로에의 5대손,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 우다 천황을 섬긴 학자
- *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頼) - 히로미의 다섯째 아들, 다자이곤노소치(규슈 지사),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동생 후지와라노 스미노리와 싸움
- * 다치바나노 도시미치(橘敏通) - 기미요리의 셋째 아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 지쿠고국 영주, 지쿠고 다치바나 씨(筑後橘氏)의 시조
- * 센칸(千観) - 기미요리의 넷째 아들, 조도 슈(정토교) 포교자
-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 - 오치 씨 일원, 이요 다치바나 씨(伊予橘氏)의 시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에서 활약
- 다치바나노 도시게(橘遠茂) - 스루가국 모쿠다이(지사), 도야스(이요 분가)의 후손
- 다치바나노 기미나가(橘公長) - 다이라노 무네모리 처형
- 다치바나노 기미나리(橘公業) - 기미나가의 아들, 고카지마 씨 시조
에도 시대 겐나 6년 (1620년) 구조가(九条家) 제대부 시나노코지 무네마스(信濃小路宗増)가 관백 구조 사키이에(九条幸家)의 명으로 다이고 겐지(醍醐源氏)에서 다치바나 씨로 개성, 시나노코지 가문(信濃小路家)이 다치바나 씨 적류로 여겨졌다.[17] 이외 지하가로서 게키방 아오야마 가문(青山家)(나카쓰카사쇼 시쇼)·후카이 가문(深井家)(찬자), 관방 와다 가문(和田家)(벤지) 등이 다치바나 성을 칭했다. 후카이 가문은 사다모토가 후손이라 주장했지만, 후에 겐지(가명: 니시오 가문)·후지와라 씨(가명: 야기 가문)로 개성했다.[18] 국학자이자 가인 다치바나 아케미도 다치바나 씨 후예를 칭했다.[19]
3. 1. 지쿠고 다치바나 씨 (筑後橘氏)
다치바나노 히로미(橘広相)의 다섯째 아들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頼)는 다자이곤노소치로서 규슈로 내려갔다. 그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때 다자이후(大宰府)로 쳐들어온 스미토모의 동생 후지와라노 스미노리(藤原純乗)의 군세를 야나가와(柳川) 동쪽의 가바이케(蒲池)에서 격퇴시켰다.[20]그 공으로 기미요리의 셋째 아들인 다치바나노 도시미치(橘敏通) 대부터 가바이케를 영지로 하사받아 영주가 되었으며, 다자이후 후칸(府官)의 자손은 가바이케 성에서 살았다. 지쇼-주에이의 난에서 세운 공으로 막부의 사이고쿠(西国) 지역 고케닌(御家人)이 되어 지쿠고 미즈마 군(三潴郡)의 지토(地頭)에 임명된 사가 겐지(嵯峨源氏)의 미나모토노 히사나오(源久直)가 다치바나 씨의 사위가 되면서 처음으로 가바이케 씨(蒲池氏)를 칭하였다(가바이케 히사나오).[20]
3. 2. 이요 다치바나 씨 (伊予橘氏)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이요국(伊予國)에서 번성한 호족으로, 본래 왕족의 후예인 다치바나 씨와는 별개이다. 이들은 고대 해상 호족이었던 고노씨(河野氏)의 일족인 오치씨(越智氏)의 분가로서 구마노노 구니노 미야쓰코(熊野国造)의 자손이다.[20]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때 활약한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 등이 이요 다치바나 씨의 일족이다. 도야스는 해상 세력을 이끌고 추포사(追捕使)의 장관(長官)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나 주전(主典) 오쿠라 하루자네(大蔵春實) 등과 함께 무장으로서 활약했다.[20] 스루가국(駿河國)의 모쿠다이(目代)였던 다치바나노 도시게(橘遠茂)도 도야스의 후손이다.[20]
도야스의 후손들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에서 세운 무공으로 겐지나 헤이시와 같은 무가로 존중받았고, 이른바 '겐페이토키쓰(源平藤橘)'라는 무사 일족의 하나로서 다치바나 씨를 꼽는 경향은 도야스에게서 비롯되었다.[20]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인 다치바나노 기미나가(橘公長)·다치바나노 기미나리(橘公業) 부자의 계보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즈마카가미》(吾妻鏡)의 기록에 따르면 도야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해당 기록에는 "이요 국 우와 군(宇和郡)은 … 기미나리의 선조(先祖)가 대대로 지행(知行)을 맡아 … 도토미노죠(遠江掾) 도야스(遠保)에게 칙정을 내려 그 구니의 적도(賊徒) 스미토모를 토벌한 이래, 그 군에 거주하면서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온 지가 오래되었다."고 적혀있다.
남북조 시대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다치바나노 도야스의 후손이라 칭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20]
4. 주요 인물
- 아카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橘三千代): 덴무 천황 때부터 궁중을 섬겼으며 몬무 천황의 유모로 뽑힐 만큼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겐메이 천황에게서 '橘宿禰일본어'라는 씨성을 받았다.
-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 미치요의 장남으로, 가쓰라기 왕(葛城王)으로도 불렸다. 덴표 9년(737년)에 다이나곤(大納言)이 되었고, 738년에는 우다이진(右大臣), 743년에는 사다이진(左大臣)으로 승진하여 쇼무 천황과 고켄 천황 치세에 태정관(太政官)의 수반으로서 정치를 맡았다. 덴표쇼호 2년(750년) '橘朝臣일본어'이라는 가바네를 받았다.
- 다치바나노 사이(橘佐爲): 미치요의 차남으로, 사이 왕(佐爲王)으로도 불렸다. 모로에와 함께 '橘宿禰일본어' 성을 받았다.
- 무로노 오오키미(牟漏女王): 미치요의 딸로,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아내였다.
-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 모로에의 장남.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와의 정쟁에서 패하고 757년 모반 혐의로 옥사했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 다치바나노 시마다마로(橘島田麻呂): 나라마로의 아들.
- 다치바나노 기요토모(橘淸友): 나라마로의 아들.
- 다치바나노 가치코(橘嘉智子): 기요토모의 딸로, 사가 천황의 황후가 되었다. (단림 황후檀林皇后)
- 다치바나노 우지키미(橘氏公): 기요토모의 아들. 조와 11년(844년) 우다이진(右大臣)의 지위에 올랐다.
- 다치바나노 미네쓰구(橘岑継): 우지키미의 아들.
- 다치바나노 하야나리(橘逸勢): 나라마로의 손자.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조와의 변으로 조정에서 쫓겨났다.
- 다치바나노 히로미(橘廣相): 모로에의 5대손. 학자로 요제이 천황, 고코 천황, 우다 천황을 섬겼다.
- 다치바나노 기미사이(橘公材): 히로미의 차남.
-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賴): 히로미의 5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帥)로 규슈에 내려갔다. 지쿠고 다치바나 씨(筑後橘氏)의 선조.
- 다치바나노 도시미치(橘敏通): 기미요리의 삼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난 진압에 활약했고, 이후 지쿠고 국에 정착해 가바이케(蒲池)의 영주가 되었다. (지쿠고 다치바나 씨)
- 센칸(千観): 기미요리의 사남 도시사다(敏貞)의 아들. 민중에게 정토종을 포교했다.
- 다치바나노 요시후루(橘好古): 히로미의 손자. 다이나곤(大納言)까지 올랐다.
- 다치바나노 노리미쓰(橘則光): 구게(公家)이자 가인(歌人).
- 다치바나노 요시유키(橘善行): 승려로서 출가하여 법명을 성공(性空)이라 했다. 엔교지(圓教寺)를 창건했다.
- 조가(蔵賀): 다무봉(多武峰)에 살았다.
- 고케이(皇慶): 천태종 승려.
- 노인(能因): 승려이자 가인. 속명(俗名)은 다치바나노 나가야스(橘永愷).
- 다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측근.
- 고시키부노 나이시(小式部内侍): 미치사다의 딸이자 가인.
- 다치바나노 다메나카(橘爲仲): 가인.
- 다치바나노 기미나가(橘公長):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가(武家) 귀족.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를 처형했다.
- 다치바나노 기미나리(橘公業):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가 귀족. 기미나가의 아들. 고바지마 씨(小鹿島氏)의 시조.
- 다치바나노 나리스에(橘成季): 가마쿠라 시대의 하급 귀족. 구조 미치이에(九條道家)의 근습(近習).
- 가바이케 히사나오(蒲池久直): 사가 겐지(嵯峨源氏). 기미요리, 도시미치의 자손으로 지쿠고 가바이케 씨의 사위가 되어 가바이케 씨(蒲池氏)의 시조가 되었다.
-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 고노 씨(河野氏)의 일족인 오치 씨(越智氏)의 분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난 때 활약. 이요 다치바나 씨(伊予橘氏)의 일족.
- 다치바나노 도시시게(橘遠茂): 스루가 국(駿河國)의 모쿠다이(目代). 도야스의 후손.
5. 다치바나 씨의 후예를 자칭한 씨족 및 인물
다치바나 씨의 시조는 아스카 시대 말기 덴무 천황 때부터 궁중을 섬긴 여관(女官)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이다. 그녀는 몬무 천황의 유모로도 활동하는 등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겐메이 천황은 그녀에게 '橘宿禰일본어'라는 성씨를 내렸고, 이후 그녀의 아들들인 다치바나노 모로에(가쓰라기 왕)와 다치바나노 사이(사이 왕) 형제가 이 성씨를 계승하면서 다치바나 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치바나 씨는 나라 시대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옥사로 잠시 주춤했지만, 사가 천황의 황후가 된 다치바나노 가치코(단림 황후) 덕분에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다치바나노 우지키미가 외척으로서 고다이진까지 오르는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 조와의 변으로 다치바나노 하야나리가 실각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후 다치바나노 히로미, 다치바나노 기미요리, 다치바나노 요시후루 등 구교(公卿)를 배출하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983년 다치바나노 쓰네히라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구교를 배출하지 못했다.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다치바나 씨는 지방으로 흩어져 토착 세력화되었는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다치바나노 기미요리의 후손들은 지쿠고국에 정착하여 무사가 된 지쿠고 다치바나 씨(筑後橘氏)가 대표적이다.
중앙 정계에서는 다치바나노 노리타카의 후손들이 적류(嫡流)를 이어갔지만, 센고쿠 시대에 햐쿠케(薄家)가 단절되면서 쇠퇴했다. 에도 시대에는 아오야마케(青山家), 후카이케(深井家), 와다케(和田家) 등이 다치바나 씨를 칭했고, 특히 후카이 집안은 햐쿠케의 직계로 알려져 있었다.
한편, 본래 왕족의 후예인 다치바나 씨와는 별개로,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이요국에서 번성한 고노씨(河野氏)의 일족인 오치씨(越智氏)의 분가도 다치바나 씨를 자칭했는데, 이들을 이요 다치바나 씨(伊予橘氏)라 부른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때 활약한 다치바나노 도야스가 이요 다치바나 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난보쿠초 시대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다치바나노 도야스의 후손을 자칭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치바나 씨의 후예를 자칭한 씨족 및 인물:
6. 문학 작품에서의 등장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성립된 『마쓰우라노미야 이야기』는 주인공 "다치바나 우지타다"와 신남비 황녀, 당나라 문황제의 후궁 화양공주라는 세 명의 여성과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이다.
분라쿠나 가부키의 연목 중 하나인 『아시야 도만 오우치카가미』에서는 내리의 좌대장인 "다치바나 모토카타"가 비전서의 상속인을 자신의 친족으로 하기 위해, 또한 친족인 미스도코로에게 황태자(친왕)의 아이를 임신시키기 위해 유괴·살인 등을 꾀한다. 이 음모는 아시야 도만과 아베노 세이메이의 활약으로 폭로되어 다치바나 모토카타는 유형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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