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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일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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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청일통지는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가경제 시기에 걸쳐 편찬된 중국의 지리지이다. 1686년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되었으나 삼번의 난 등으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였고, 옹정제 때 편찬이 본격화되어 건륭 9년(1744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이후 건륭 29년(1764년) 신장 지역의 편입을 반영하여 증보되었고, 가경 16년(1811년)에는 3차 수정이 이루어졌다. 대청일통지는 각 성별로 통부를 설치하고, 건치연혁, 형세, 직관, 호구, 전부, 명환 등 다양한 항목을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초기 판본에서는 대만에 대해 일본에 속했다는 오류가 있어 비판을 받았다.

2. 편찬 과정

『대청일통지』는 청나라 강희 25년(1686년)부터 도광 22년(1842년)까지 약 2세기에 걸쳐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 지리서이다.

편찬의 시작은 순치 18년(1661년) 지방지 감수 지시에서 비롯되었으며, 강희 11년(1671년) 보화전 대학사 위주조(衛周祚)가 천하의 지리 정보를 집대성한 『통지』(通志) 편찬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그러나 삼번의 난 발발로 인해 실제 편찬 작업은 지연되었다.

본격적인 편찬은 삼번의 난이 진압된 후인 강희 25년(1686년) 일통지관(一統志館)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방대한 작업량과 편찬 책임자의 교체 등으로 인해 강희 연간에는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후 옹정제 시기에 편찬 작업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어 각 성의 자료를 취합하고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마침내 건륭제 9년(1744년) 총 342권으로 구성된 『대청일통지』 초판이 간행되었다. 이후 준가르 정복과 신장 지역의 영토 편입 등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건륭 29년(1764년)부터 증보 작업이 시작되어 건륭 49년(1784년)에 완료되었다.

마지막으로 가경제 16년(1811년)에 세 번째 수정 작업이 시작되어 도광제 22년(1842년)에 총 560권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이처럼 『대청일통지』는 여러 황제를 거치며 편찬과 개정을 거듭하였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강희 연간본, 건륭 연간본, 가경 연간본의 세 가지 주요 판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2. 1. 강희 연간의 편찬

청나라 강희 연간에 보화전 대학사 위주조(衛周祚)가 처음으로 『대청일통지』 편찬을 제안했다. 강희 11년(1671년) 위주조는 상주문에서 각 성의 통지를 편찬하여 천하의 산천, 형세, 호구, 전부, 풍속, 인물, 강역 등을 모아 『통지』(通志)라는 이름의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 12년(1672년) 12월에 삼번의 난이 일어나면서 편찬 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삼번의 난은 강희 20년(1681년)에 진압되었고, 강희 24년(1685년)에는 제정 러시아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청 왕조는 안정기를 맞았다. 이에 강희 25년(1686년) 청 조정은 다시 일통지 편집을 명하고 이를 위한 일통지관(一統志館)을 설치했으며, 진정경(陈廷敬)과 서건학(徐乾学)에게 총괄을 맡겼다.

하지만 서건학은 허삼례(许三礼)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길 청했다. 강희제는 과거 사마광(司馬光)이 관직에서 물러나 《자치통감》을 편찬했던 예를 들어, 서건학에게 편찬국(書局)을 그대로 가지고 고향에서 편찬 작업을 계속하도록 명했다. 또한 강진영(姜宸英)과 황우직(黃虞稷)을 보내 그를 돕게 했다.

강희 29년(1690년), 서건학은 소주(蘇州) 동정산(洞庭山)에 편찬국을 설치했다. 이곳에는 고조우(顾祖禹), 염약거(阎若璩), 황의(黄仪), 호위(胡渭), 제소남(齐召南) 등 여러 학자가 참여했다. 그러나 방대한 규모 때문에 편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강희 33년(1694년) 서건학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한수(韓菼)가 뒤를 이었으나, 5년 뒤 한수마저 사망하면서 『대청일통지』 편찬은 다시 중단되었다.

2. 2. 옹정 연간의 편찬

옹정제가 즉위한 후에도 《대청일통지》 편찬 작업은 계속되었다. 옹정 3년(1725년)에는 남정원(南廷元)이 교서 내정(內廷)으로 보내져 편찬 작업을 나누어 맡았다. 옹정 6년(1728년)에는 각 성(省)에서 통지(通志)를 편수하여 일통지관(一統志館)으로 보내라는 명이 내려졌으며, 일반 기록을 수정하여 '각 도의 총독'인 동지(同治)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이때 60년에 한 번씩 지방지를 편수하도록 하는 규정도 마련되었다.

옹정 11년(1733년) 8월, 방포(方苞)가 《대청일통지》 편찬의 총재(總裁)를 맡게 되었다. 그는 편찬의 체계를 잡기 위해 14개의 '행사사항(行事事項)'을 제안했고, 모든 도(道)에서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건륭 5년(1740년) 11월, 총 342권으로 구성된 《대청일통지》의 첫 번째 초고가 완성되었다. 건륭제는 특히 기록 수정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모든 원고를 직접 검토하고 신중하게 살필 것을 명하였다.

마침내 건륭 9년(1744년)에 《대청일통지》가 인쇄되어 간행되었다. 책의 배열 순서는 수도인 경사(京師)를 시작으로 직예(直隸), 성경(盛京), 강소(江蘇), 안휘(安徽), 산서(山西), 산동(山東), 하남(河南), 섬서(陝西), 감숙(甘肅), 절강(浙江), 강서(江西), 호북(湖北), 호남(湖南), 사천(四川),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운남(雲南), 귀주(貴州) 순서로 이어졌다. 외번(外藩) 및 청나라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들에 대한 내용은 부록으로 뒤에 덧붙여졌다.

각 성(省)의 내용은 통부(統部)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도와 표가 첨부되었다. 세부 항목으로는 분야(分野)를 시작으로 건치연혁(建置沿革), 형세(形势), 직관(职官), 호구(户口), 전부(田赋), 명환(名宦) 등이 포함되었다. 성 아래의 각 부(府) 역시 지도와 표를 먼저 제시하고, 분야, 건치연혁, 형세, 풍속, 성지(城池), 학교, 호구, 전부, 산천, 고적, 관방(关隘), 진량(津梁), 제언(堤堰), 능묘, 사관(寺观), 명환(名宦) 및 인물, 유우(流寓), 열녀, 선석(仙釋), 토산(土産) 등 총 21개 항목(門)으로 나누어 상세히 기술하였다.

2. 3. 건륭 연간의 증보

건륭제 29년(1764년) 준가르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가 진압되고 신장 지역이 청나라 영토로 편입되자, 어사 조학문(趙學文)은 『대청일통지』를 증보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1] 조학문은 새로 편입된 신장 지역("서역 신장")을 포함하고, 초판 간행 후 20여 년간 변경된 행정 구역 등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에 건륭제는 증보를 명하였고, 같은 해(1764년) 문화전 학사 화신이 편찬 작업을 주재하게 되었다.[1] 편찬에는 기윤(紀昀), 육석능(陸錫熊), 손사곡(孫士毅) 등이 참여했으며, 육비서(陸費墀) 등이 교감을 맡았다.[1] 또한 청해, 서장, 신장 등 새로 편입된 지역의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한 측량이 이루어졌다.[1] 증보 작업은 건륭 49년(1784년)에 완료되었고, 건륭 54년(1789년)에 정식으로 황제에게 제출되었다.[1]

2. 4. 가경 연간의 수정

가경제 16년(1811년)에 세 번째 『대청일통지』 수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목창아(穆彰阿), 이좌현(李佐贤), 반석은(泮锡恩), 마홍다(廖鸿荃), 공자진(龚自珍) 등이 주도하였다. 편찬 작업은 도광제 22년(1842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당시 국사관 총재이자 대학사였던 목창아 등은 편찬 완료를 보고하는 상주문에서 총 560권과 범례 및 목록 2권으로 구성되었음을 알렸다. 이 결과물을 가경대청일통지라고 부르며, 이로써 청 왕조 시기 편찬된 『대청일통지』는 강희제 연간본, 건륭제 연간본에 이어 가경 연간본까지 총 세 종류가 되었다.

3. 내용

『대청일통지』는 시기 중국 전역의 지리, 역사, 행정 구역의 변화, 관직, 인구, 토지세, 인물, 풍속 등 광범위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관찬 지리지이다.[1] 각 지역별 상세 정보를 담고 있어 당시 중국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3. 1. 구성

『대청일통지』는 크게 서두 부분과 본문으로 구성된다.[1] 서두에는 목록 상(目錄 上), 상유(上諭, 황제의 명령), 표(表), 범례(凡例, 편집 원칙), 번역어해(飜譯語解, 만주어 등 번역 용어 해설) 등이 포함된다.[1]

본문은 총 42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1], 각 성(省)별로 통부(統部)를 두어 내용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각 성의 통부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항목들이 포함된다.

  • 건치연혁(建置沿革): 행정 구역의 설치와 변화 과정
  • 형세(形勢): 지리적 모양새
  • 직관(職官): 관직과 관리
  • 호구(戶口): 인구
  • 전부(田賦): 토지세
  • 명환(名宦): 이름난 관리


성 아래의 각 부(府) 단위에서는 내용을 더욱 세분화하여 총 21개의 문(門)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각 부에 포함된 21개 문은 다음과 같다:

  • 분야(分野): 천문 분야
  • 건치연혁(建置沿革)
  • 형세(形勢)
  • 풍속(風俗)
  • 성지(城池): 성곽과 해자
  • 학교(學校)
  • 호구(戶口)
  • 전부(田賦)
  • 산천(山川)
  • 고적(古蹟)
  • 관방(關防): 관문과 국경 방어 시설
  • 진량(津梁): 나루와 다리
  • 제언(堤堰): 둑과 보
  • 능묘(陵墓)
  • 사관(寺觀): 사찰과 도관
  • 명환(名宦) 및 인물(人物)
  • 유우(流寓): 타지에서 와서 사는 사람
  • 열녀(烈女)
  • 선석(仙釋): 신선과 승려
  • 토산(土産): 지역 특산물

4. 대만 문제

《대청일통지》 초기 판본인 건륭 9년(1744년) 판에는 타이완이 과거 일본에 속했다는 잘못된 내용이 실려 있었다.[2] 이는 당시 청나라를 비롯한 관련국들의 타이완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해당 오류는 이후 도광 22년(1842년) 판에서 수정되었다.[3]

4. 1. 초기 판본의 문제점

《대청일통지》 '대만 청사'조에 실린 대만


이 책의 건륭 9년(1744년) 판본 「대만부 건치연혁」에는 오늘날의 타이완 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대만은 고대부터 황복지지(荒服之地)라 중국과 통하지 않았고, 이름을 동번이라 하였다. 명 천계 중에는 홍모화란이인(紅毛荷蘭夷人)에게 점거되었고 '''일본에 속하였다.'''"[2]

명나라의 천계 연호는 1621년부터 1627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타이오완 사건(하마다 야효에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타이완을 고사국이라고 불렀으며,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점령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타이완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는 일본은 이미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이나 일본 모두 타이완 섬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이런 잘못된 설명이 들어갔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광 22년(1842년)에 간행된 《대청일통지》에서는 "일본에 속한다"라는 네 글자가 삭제되었다.[3]

4. 2. 수정 판본



《대청일통지》의 건륭 9년(1744년) 판본 「대만부 건치연혁」에는 오늘날의 타이완인 대만 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대만은 고대부터 황복지지(荒服之地)라 중국과 통하지 않았고, 이름을 동번이라 하였다. 명 천계 중에는 홍모화란이인(紅毛荷蘭夷人)에게 점거되었고 '''일본에 속하였다.'''"[2]

천계 연호는 1621년부터 1627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타이오완 사건(하마다 야효에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일본은 타이완을 고사국(高砂國)이라고 부르며 네덜란드의 대만 점령에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타이완이 청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일본은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이나 일본 모두 대만 섬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잘못된 설명이 들어간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도광 22년(1842년)에 간행된 《대청일통지》 판본에서는 문제가 된 "일본에 속한다"라는 네 글자가 삭제되었다.[3]

5. 비판적 관점



《대청일통지》 건륭 9년(1744년) 판본의 '대만부 건치연혁' 부분에는 대만 섬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서술이 포함되어 있어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해당 기록은 "대만은 고대부터 황복지지(荒服之地)라 중국과 통하지 않았고, 이름을 동번이라 하였다. 명 천계 중에는 홍모화란이인(紅毛荷蘭夷人)에게 점거되었고 '''일본에 속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2]

명나라 천계 연간(1621년~1627년)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대만 남부를 점령하던 시기이며, 이 무렵 타이오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대만을 고사국(高砂國)이라 칭하며 네덜란드의 점령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고, 이후 청나라가 대만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쇄국 정책을 펴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시기 대만이 일본에 속했다는 기술은 명백한 오류로, 당시 청나라 조정이나 일본 모두 대만 섬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잘못된 서술이 들어간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후 도광 22년(1842년)에 간행된 《대청일통지》 판본에서는 문제가 된 "일본에 속한다"는 네 글자가 삭제되었다.[3] 이는 청나라 조정에서 편찬한 공식 지리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지역 역사에 대한 왜곡이나 오류가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참조

[1] 웹인용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大清一統志 http://ctext.org/wik[...] 2015-04-06
[2] 웹인용 回顧台灣的命運 http://wantan.tacoci[...] 2014-07-29
[3] 웹인용 回顧台灣的命運 http://wantan.tacoci[...] 201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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