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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수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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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발수기능은 270년 서진에 반란을 일으킨 선비족의 수장이었다. 그는 하서 지역으로 이주한 선비족의 일파를 이끌었으며,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전략으로 서진에 장기간 저항했다. 270년 6월, 반란을 일으킨 독발수기능은 서진의 여러 군사들을 격파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279년 양주를 점령하는 등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서진의 장수 마륭의 활약으로 280년 부하에게 피살당하며 반란이 종결되었다. 독발수기능의 반란은 진나라 초기의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후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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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수기능
인물 정보
이름독발수기능
로마자 표기Dokbal Sugineung
출생미상
사망280년
직업선비족 추장
활동 시기서진
민족선비족 독발부
생애 및 활동
주요 활동270년, 서진에 반기를 들고 봉기
279년, 진나라 장군 마륭을 패배시킴
최후280년, 부하에게 살해당함
기타
관련 인물마륭

2. 생애

270년 6월, 독발수기능은 서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독발수기능의 난) 269년 신설된 진주 자사 호열은 만곡퇴(오늘날의 간쑤성 고란현)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했지만, 사마량의 명을 받고 지원하러 온 유기가 돕지 않아 패배하고 전사했다. 서진은 토벌을 위해 행안서장군 석감과 후임 진주자사 두예를 파견했으나, 토벌 시기를 놓고 갈등하여 두예는 정위에게 압송당하고 석감은 독발수기능에게 패퇴했다.[16]

271년 5월, 독발수기능은 양주(涼州)를 침공하여 청산(오늘날의 간쑤성 배현)에서 양주자사 견홍과 맞섰다. 양주의 다른 선비족들이 호응하여 견홍은 고립되어 패배하고 사망했다. 이후 진에서는 실권자 가충이 토벌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정벌을 미루다 의 혼인을 이유로 눌러앉았다.[16]

272년, 양주자사로 파견된 양흔(楊欣)은 돈황에서 영호풍의 난이 일어나고 독발수기능의 세력이 강대해져 직접 맞서지 않고 강족들과 화친했다. 사마준은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키웠으며, 독발수기능은 주변 이민족들을 포섭하여 연맹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4년간의 평화기 동안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20여만으로 늘어났다.[16] 274년 10월, 사마준은 양주 금성군을 침공한 걸문니(乞文泥)의 부대를 격퇴하고 독발수기능의 본대를 공격하여 삼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독발수기능은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고 휴전했으며, 사마준은 연맹을 해체시키기 위해 다른 연맹원들을 격파해나갔다.[16] 275년 6월, 선비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276년에는 아라다(阿羅多)가 이끄는 선비족을 패퇴시키고 사천을 죽이고 9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16]

독발수기능은 후탄발(侯彈勃)과 서진의 둔전을 파괴하려 했지만, 277년 문앙(文鴦)의 지휘 하에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가 대규모 전진배치를 하자 선비족 연맹은 와해되고 길가라(吉軻羅), 후금다(侯金多), 열경(熱冏) 등 선비족 20만여 명이 항복하여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16] 278년, 양흔은 강족과의 화친을 끊었고, 강족 약라발능(若羅拔能)이 양주를 침공해 무위에서 양흔을 패퇴시키고 전사시켰다. 279년 1월, 독발수기능은 양주를 침공해 금산(오늘날의 간쑤성 산단현)에서 후임 양주자사 소유의 군사를 격멸시키고 양주를 점령했다. 양주 방위군 전원이 채 만이 안 되는 독발수기능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투불능이 되었는데, 양주가 함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16]

279년 12월, 서진은 무위태수 마륭에게 3000의 병사를 주어 토벌하게 했고, 마륭은 수레를 이용해 제갈량의 팔진도를 펼쳐 독발수기능의 수만 군사를 패퇴시켰다.[16] 280년, 독발수기능은 부하에게 피살당했고, 사촌동생 독발무환이 그 뒤를 이었다.[16]

2. 1. 배경

독발수기능은 선비족 탁발부(拓跋部)와 같은 조상을 둔 인물로, 하서 지역으로 이주한 선비족의 일파를 이끌었다. 그의 할아버지 독발수전(禿髮壽闐)은 담요 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발'을 씨족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16] 선비족어로 담요는 '독발'이라고 하였다.[3] 독발수기능은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4]

2. 2. 초기 활동

조위 말기, 등애 장군은 하서 지역에서 수만 명의 선비족의 항복을 받고, 그들을 양주와 옹주 지역에 재정착시켰다. 이들은 그곳의 지역 주민들과 섞였다.[16]

독발수기능 부족은 탁발부와 조상을 같이하는 선비족으로, 북쪽 변경에서 허시 회랑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마이톈(麥田, 현재의 간쑤성 징위안 현)과 첸툰(牽屯, 현재의 닝샤 성 구위안)에서 서쪽으로는 실뤄(칭하이 호 동쪽에 위치)까지, 남쪽으로는 자오허(澆河, 현재의 칭하이 성 구이드 현)에서 북쪽으로는 고비 사막까지 뻗어 있었다.[16]

독발수기능의 할아버지 수전(壽闐)은 포대기 안에서 태어났는데, 선비어로 포대기를 독발(禿髮)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독발'을 씨로 삼았다.[16] 수기능은 용감하고 과감하며 모략을 갖춘 인물로, 할아버지가 죽자 족장이 되었다.[16]

부현은 태시 4년(268년)에 선비족의 위험성을 우려하여 이민족에 대한 대책을 담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7]

3. 독발수기능의 난

269년 신설된 진주를 다스리던 자사 호열은 만곡퇴(오늘날의 감숙성 고란현)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했지만, 사마량의 명을 받고 지원하러 온 유기가 돕지 않아 크게 패하고 전사한다.[7] 서진은 토벌을 위해 행안서장군 석감과 후임 진주자사 두예를 파견했으나, 이들은 토벌 시기를 놓고 갈등하여 결국 두예는 정위에게 압송된다. 석감은 이어진 전투에서 독발수기능에게 패퇴한다.

271년 5월, 독발수기능은 양주를 침공하여 청산(오늘날의 감숙성 배현)에서 양주자사 견홍과 맞선다. 양주에 있던 다른 선비족들이 호응하여 견홍은 고립되고 결국 패하여 사망한다.[9] 이후 진나라에서는 실권자였던 가충이 토벌대장으로 추대되지만,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정벌을 미루다 의 혼인을 이유로 눌러앉는다.

272년 양주자사로 파견된 양흔(楊欣)은 돈황에서 영호풍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고, 독발수기능의 세력이 강대해지기도 해서 직접 맞서지 않고 강족들과 화친한다. 새로 사령관으로 부임한 사마준 역시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키우는 데 열중한다. 독발수기능은 주변의 이민족들을 포섭하고 연맹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4년간의 평화기 동안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20여만으로 늘어났다. 274년 10월, 사마준은 양주 금성군을 침공한 걸문니(乞文泥)의 부대를 격퇴하고 여세를 몰아 독발수기능의 본대를 공격하여 삼천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힌다. 결국 독발수기능은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고 휴전을 맺는다. 사마준은 독발수기능과 휴전을 맺는 한편으로 그의 연맹을 해체시키기 위해 다른 연맹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간다. 275년 6월 선비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276년에는 아라다(阿羅多)가 이끄는 선비족을 패퇴시키고 사천을 죽이고 9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는다. 독발수기능은 후탄발(侯彈勃)과 함께 서진의 둔전을 파괴하기 위해 침공하지만, 277년 평로호군 문앙(文鴦)의 지휘 하에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를 모아 대규모 전진 배치를 한다. 선비족 연맹은 와해되고 길가라(吉軻羅), 후금다(侯金多), 열경(熱冏) 등의 선비족 20만여 명이 서진에 항복하는 피해를 입고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278년 양흔은 독발수기능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강족과의 화친을 끊는데, 독발수기능의 세력이었던 강족 약라발능(若羅拔能)이 양주를 침공해 무위에서 양흔을 패퇴시키고 전사시킨다.[11] 이후 서진이 다시 서북 방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틈을 타서 279년 1월 양주를 침공해 금산(오늘날의 감숙성 산단현)에서 후임 양주자사 소유의 군사를 격멸시키고 양주를 점령한다. 서진군 총수의 1/3에 달하는 양주 방위군 전원이 채 만 명이 안 되는 독발수기능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투 불능이 되었다. 양주는 위나라 시기부터 여러 이민족들과 촉한의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지역이지만, 함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11]

279년 12월, 서진에서는 무위태수(武威太守)로 있던 서진의 장수 마륭에게 3000명의 병사를 주어 토벌하도록 명했는데,[12] 마륭은 수레를 만들어 제갈량팔진도를 펼쳐 독발수기능의 수만 군사를 패퇴시켰다. 280년 독발수기능은 부하에게 피살당했고, 사촌 동생 독발무환이 그 뒤를 이었다.[23]

3. 1. 반란의 시작 (270년)

270년, 현지 중국 관료들의 압박이 계속되자 선비족 추장 독발수기능은 진(晉)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발수기능은 선비족이었지만, 이 반란에는 강족, 저족 등 다른 유목민들도 참여했다.[5][6] 진주 자사 호열(胡烈)은 군사를 이끌고 독발수기능을 토벌하기 위해 완호퇴(萬斛堆; 감숙성 가란현에 위치)에 주둔했다. 그러나 호열의 지원군이 도착하지 못하자 독발수기능과 동맹군은 호열의 군대를 포위하여 그를 살해했다.[7] 양주 자사 소유(蘇愉)가 이끄는 군대 역시 감숙성 산단현에 있는 금산(金山)에서 독발수기능에게 패배했다.

3. 2. 진나라의 대응과 혼란

270년, 선비족 추장 독발수기능이 진(晉)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진나라는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진압하려 했다. 진주 자사 호열(胡烈)은 감숙성 가란현 부근의 완호퇴(萬斛堆)에서, 양주 자사 소유(蘇愉)는 감숙성 산단현 금산(金山)에서 독발수기능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7][8]

사마량이 제거된 후, 무제는 석감(石鑑)과 전장(田章)을 보냈으나, 석감은 부하 두예의 진언을 무시하고 공격했다가 실패했다.[8]

271년, 독발수기능은 북지군의 부족들과 연합하여 금성(金城; 오늘날 우중현 주변)을 공격했다. 양주 자사 전굉은 군대를 이끌고 맞섰으나, 강족 병사들의 배신으로 감숙성 환현 청산(青山)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9]

275년, 사마준이 독발수기능을 토벌하여 3,000명을 살해했다. 문앙은 양주, 진주, 옹주의 군대를 연합하여 독발수기능을 위협했고, 독발수기능은 항복하는 척하며 인질을 보냈다. 이때 안정군, 무위군, 금성의 20만 부족민도 항복했다.[10]

사마염은 독발수기능의 난을 우려하여 가충을 도독 진량 이주 제군사(都督秦涼二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가충은 권력 유지를 위해 이를 거부하고, 순욱(荀勗) 등의 모략으로 취소되었다.

이처럼 진나라 지휘관들 간의 갈등과 전략 부재, 그리고 실권자 가충의 권력욕으로 인해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은 어려움을 겪었다.

3. 3. 반란의 확대 (271년 ~ 278년)

271년, 독발수기능은 북지군(오늘날 감숙성 경양시 일대)의 부족들과 연합하여 금성(金城, 오늘날 우중현 주변)을 공격했다. 양주 자사 견홍이 군대를 이끌고 맞섰으나, 견홍의 군대에 있던 강족 병사들이 평소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수기능에게 합류했다. 수기능은 감숙성 환현에 있는 청산(青山)에서 견홍의 군대를 포위하여 그를 죽였다.[9]

275년, 사마준이 수기능을 토벌하여 그의 군대를 격파하고 반군 3,000명을 죽였다. 같은 해, 수기능과 후탄보(侯彈勃) 등은 관중(關中)의 군사-농업 식민지를 약탈하려 했으나, 사마준의 부하 문앙이 양주, 진주, 옹주의 군대를 연합하여 수기능을 위협했다. 이에 수기능은 후탄보와 부족민 20명을 보내 진(晉)나라에 항복하고, 각자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이때 문앙은 안정군, 무위군(오늘날 감숙성 경원현 일대)과 금성에서 20만 명의 부족민의 항복을 받았다.[10]

277년, 수기능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문앙에게 초기에 패배했다. 278년, 양주 자사 양흔은 무위시 단령(丹嶺)에서 수기능의 동맹인 약라발능(若羅拔能)과 싸웠지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후 수기능은 계속해서 진(晉)나라의 국경을 위협했고, 279년 초에는 양주를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11]

3. 4. 양주 함락과 마륭의 등장 (279년)

279년, 독발수기능은 양주(涼州)를 함락하며 세력의 절정에 달했다. 이는 위나라 시기부터 이민족과 촉한의 위협을 받았던 양주가 처음으로 함락된 사건이었다.[11] 이에 진나라는 장수 마륭에게 3,000명의 병사를 주어 토벌하도록 명했다.[12] 마륭제갈량팔진도를 활용하고, 자철석을 이용하는 등 기발한 전술로 독발수기능의 군대를 격파했다.[12]

3. 5. 반란의 종결과 독발수기능의 죽음 (280년)

279년, 마륭은 수기능 토벌에 자원하여 3천 명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수기능 측은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험준한 지형과 복병을 활용하여 저항했으나, 마륭의 뛰어난 병법과 정예병에게 연패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마륭의 전술에 압도된 여러 부족들이 항복하거나 귀순했다. 결국 그해 겨울 12월, 수기능은 부하인 솔선융 몰골능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하면서, প্রায়(거의) 10년에 걸친 반란은 막을 내렸다.[23]

수기능의 사후, 그의 사촌 동생인 독발무환이 부족을 이끌었고, 훗날 독발무환의 후손 독발오고남량을 건국하게 된다.[23]

4. 평가

독발수기능의 난은 진나라 초기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진나라의 서북방 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5][6] 독발수기능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전략으로 장기간 진나라에 저항했다.[8][11]

참조

[1] 역사기록 Jin Shu
[2] 서적 Linguistic Mysteries of Ethnonyms in Inner Asia Lexington Books
[3] 역사기록 Jin Shu
[4] 역사기록 Jin Shu
[5] 역사기록 Jin Shu
[6] 역사기록 Jin Shu
[7] 역사기록 Jin Shu
[8] 역사기록 Zizhi Tongjian
[9] 역사기록 Jin Shu
[10] 역사기록 Jin Shu
[11] 역사기록 Wei Shu
[12] 역사기록 Jin Shu
[13] 역사기록 Jin Shu
[14] 역사기록 Jin Shu
[15] 문서 『晋書』禿髪烏孤伝では樹機能を遡って先祖とするが、同時代の司馬駿や司馬亮の伝では羌虜、陳騫伝や馬隆伝では「羌戎と和を欠き」と、ほとんどが羌族と記載される。
[16] 문서 『晋書』載記26『魏書』列伝87鮮卑禿髪烏孤
[17] 문서 『晋書』傅玄伝
[18] 문서 『資治通鑑』79
[19] 문서 『宋書』志23、『資治通鑑』79
[20] 문서 『晋書』扶風王駿伝
[21] 문서 魏収『魏書』鮮卑禿髪烏孤伝、及び『読史方輿紀要』巻63及び『資治通鑑』80
[22] 문서 『晋書』劉元海伝。『資治通鑑』では李喜の発議をこの頃とする。
[23] 문서 『晋書』馬隆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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