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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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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돔은 1701년부터 1708년까지 건설된 베를린의 역사적인 교회이다. 칼뱅주의와 루터교의 심투네움으로 시작하여, 1780년 돔형 탑이 건설되었으나 붕괴 후 재건되었다. 1848년 3월 혁명 희생자들의 관이 전시되기도 했으며, 1881년 신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된 후 1983년부터 1996년까지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독일 의회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묘지가 있으며, E. T. A. 호프만,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노벨스도르프, 앙투안 페스네 등이 관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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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돔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독일어 이름Neue Kirche (노이에 키르케); colloquially "Deutscher Dom" (콜로키알리 "도이처 돔")
독일어 이름 (표기 언어)de
영어 이름New Church (뉴 처치), colloquially "German Cathedral" (콜로키알리 "저먼 커시드럴")
위치프리드리히슈타트, 베를린의 지역
종교적 소속profaned since its reconstruction (재건 이후 신성 모독)
originally a 개혁 교회 (i.e. 칼뱅주의) and 루터교 simultaneum, 1830s?–1943 united Protestantism (Prussian Union)
지역last: 구 프로이센 연합 복음교회
구역March of Brandenburg (마르히 오브 브란덴부르크) 교회 관구, Kirchenkreis Berlin Stadt I (키르헨크라이스 베를린 슈타트 I) (딘어리)
건축
건축가Martin Grünberg (마틴 그린베르크) (디자인), 조반니 시모네티 (교회 건설 1701–8); 칼 폰 곤타르트 (디자인); Georg Christian Unger (게오르그 크리스티안 웅거) (탑 건설 1781–85); 요한 빌헬름 슈베들러 (디자인); 헤르만 폰 데어 후데, Julius Hennicke (율리우스 헤니케) (새 기도실 1881–82); 오토 레싱 (외부 조각 1885); Manfred Prasser (만프레드 프라서), Roland Steiger (롤란트 슈타이거) and Uwe Karl (우베 칼) (외부 재건 1977–81)
완공 년도1708년 4월 9일, 1882년 (새 기도실), 재건 1988년
이미지
겐다르멘마르크트의 노이어 키르케,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겐다르멘마르크트의 노이어 키르케,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2. 역사

독일 돔, 또는 '새 교회'(Neue Kirchedeu)는 베를린 프리드리히슈타트에 세워진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18세기 초(1701-1708년) 처음 건립될 당시에는 호엔촐레른 왕가의 영향으로 칼뱅주의 신자들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점차 루터교 신자들이 유입되면서 두 교파가 함께 사용하는 심투네움(Simultaneum) 교회가 되었다.[1]

18세기 후반(1780년대)에는 카를 폰 곤타르의 설계로 인상적인 돔형 탑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광장의 미관을 개선하고 파리의 팡테옹과 같은 당대의 유명 건축 양식을 반영하려는 의도였다. 건설 과정에서 탑이 붕괴되는 사고도 있었으나, 결국 완성되어 오늘날 독일 돔의 상징적인 모습의 기초가 되었다.[2]

19세기에 들어서는 프로이센 복음주의 교회의 일부가 되었으며, 특히 1848년 3월 혁명 당시에는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을 추모하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어 프로이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880년대에는 기존 예배당이 철거되고 신 바로크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었다.

20세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를린 폭격으로 인해 건물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독일 통일 이후인 1983년부터 1996년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복원된 건물은 더 이상 종교 시설로 사용되지 않고, 독일 의회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Wege - Irrwege - Umwege. Die Entwicklung der parlamentarischen Demokratie in Deutschland|길 - 잘못된 길 - 돌아가는 길. 독일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deu)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새 교회의 교구는 인근 예루살렘 교회 등과 함께 크로이츠베르크의 할레셰스 토어 남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묘지들을 공동으로 관리해왔다.

2. 1. 건립 초기 (18세기)

1701년부터 1708년까지 조반니 시모네티(Giovanni Simonetti)는 마틴 그린버그(Martin Grünberg)의 설계를 바탕으로 첫 번째 교회를 건설했다. 이 교회는 1688년에 세워진 프리드리히슈타트(Friedrichstadt)의 세 번째 교회였다. 당시 프리드리히슈타트는 군주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고, 인접한 구 베를린과 쾰른은 도시 특권을 가진 독립적인 도시였다. 처음에는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칼뱅주의를 믿는 신자들만 있었으나, 점차 루터교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1708년 '새 교회'(Neue Kirche)는 칼뱅주의와 루터교 신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심투네움(Simultaneum)이 되었다.[1]

교회 부지는 원래 위그노들에게 제공되었던 '스위스 묘지'에서 분리된 땅이었다. 이 위그노들은 1698년에서 1699년 사이에 스위스에서 잠시 피난 생활을 한 후 베를린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건물은 반원형 앱스(apsis, 후진)가 있는 오각형 평면 구조였으며, 내부는 입구 맞은편 동쪽 중앙 기둥에 기대어 있는 전형적인 개신교식 제단과 설교단이 특징이었다.

1781년 탑 붕괴 후의 새 교회


1780년, 카를 폰 곤타르(Carl von Gontard)는 실제 예배당 건물 동쪽에 인접하여 탑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다. 그의 돔형 탑 디자인은 프랑스 교회에도 추가된 두 번째 탑과 함께 팔라디안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자크-제르맹 수플로(Jacques-Germain Soufflot)가 건설 중이던 파리의 생트-제네비에브 교회(현재 팡테옹)의 형태를 참고했다. 이러한 돔형 탑 건설은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을 로마의 피아차 델 포폴로처럼 웅장하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건설 중이던 새 교회의 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후 게오르크 크리스티안 웅거(Georg Christian Unger)가 곤타르의 계획을 이어받아 탑을 완성했다.

크리스티안 베른하르트 로데(Christian Bernhard Rode)는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을 제작하여 탑을 장식했다. 돔 꼭대기에는 '승리의 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세워졌으며(현재 설치된 것은 전쟁 후 복제된 것), 박공(pediment)의 부조에는 바울의 회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2]

2. 2. 확장과 재건 (18세기 후반 ~ 19세기)

1780년, 카를 폰 곤타르는 실제 예배당 동쪽에 인접한 탑을 설계하고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의 돔형 탑 디자인은 프랑스 교회에도 추가된 두 번째 탑과 함께 팔라디안 건축 전통을 따랐으며, 당시 파리에서 건설 중이던 생트-제네비에브 교회(현재 팡테옹)의 형태를 참고했다. 이러한 돔형 탑 건설은 젠다르멘마르크트를 로마의 피아차 델 포폴로와 유사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건설 중이던 새 교회의 탑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후 게오르크 크리스티안 웅거가 곤타르의 계획을 이어받아 완수하도록 위임되었다.

크리스티안 베른하르트 로데는 구약과 신약의 주요 인물들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을 제작하여 탑에 추가하였다. 돔 꼭대기에는 '승리의 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설치되었으며(현재는 전쟁 후 복제품), 박공 부조에는 바울의 회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2]

1817년, '독일 교회'의 두 교구는 당시 대부분의 프로이센 개혁교회 및 루터교 교구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복음주의 교회라는 공동 단체에 가입하였다(1821년부터 이 명칭 사용). 각 교구는 기존의 교파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연합 교파를 채택할 수 있었다.[1]

아돌프 멘젤의 그림, 1708년에 지어진 예배당이 있는 독일 교회에서 3월 혁명 (1848년)의 희생자들의 관


새 교회는 프로이센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로 기억되기도 한다. 특히 1848년 3월 혁명 당시, 3월 22일에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베를린 시민 183명의 관이 교회의 북쪽에 안치되어 추모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 복음주의 목사, 가톨릭 사제, 랍비가 차례로 연설하며 희생자들을 기렸고, 이후 군중들은 이들의 관을 묘지로 운반했다. 이 장면은 화가 아돌프 멘젤의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1881년에는 기존의 낡은 예배당이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요한 빌헬름 슈베들러의 신 바로크 건축 디자인에 따라 헤르만 폰 데어 후데와 율리우스 헤니케가 오각형 평면의 새로운 예배당을 건설하였다. 조각가 오토 레싱은 새 예배당 다락방에 설치될 여섯 개의 조각상을 디자인했다. 이 새로운 예배당은 1882년 12월 17일에 봉헌되었다.

2. 3. 1848년 3월 혁명

새 교회는 프로이센 역사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특히 1848년 3월 혁명 당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엄숙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1848년 3월 22일,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베를린 시민 183명의 관이 교회 북쪽에 안치되었다.

예배당에서는 복음주의 목사, 가톨릭 사제, 그리고 랍비가 차례로 연설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연설 후, 모인 군중은 희생자들의 관을 정중하게 묘지로 운반했다. 이 사건은 당시 독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그 과정에서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4. 20세기 이후: 파괴와 재건

1934년, 새 교회(독일 돔)의 교구는 인근 예루살렘 교회 교구와 통합되었다. 이후 추가적인 통합을 거쳐 현재의 복음주의 프리드리히슈타트 교구(2001년 기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이 교구는 예배 장소로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 맞은편의 프랑스 교회와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루크 교회를 사용하고 있다.

1981년 7월, 전쟁 피해가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있는 독일 돔. 돔 지붕이 아직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으로 인해 새 교회는 심각한 피해를 입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흔적은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분단 시기 동베를린에 속했던 건물의 암울한 상황을 보여준다.

전후 동독 치하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교회는 독일 통일 이후 본격적인 재건 과정을 밟게 되었다. 1983년에 시작된 재건 공사는 1996년에 완료되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연방 정부가 건물과 부지를 인수하여 국가 소유가 되었다.

해질녘 재건된 독일 돔의 모습. 앞에는 프리드리히 실러 기념비가 보인다.


복원된 건물은 더 이상 교회로 사용되지 않으며, 1996년에 독일 연방의회 역사 전시관(Wege - Irrwege - Umwege. Die Entwicklung der parlamentarischen Demokratie in Deutschland|길 - 잘못된 길 - 돌아가는 길. 독일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de)으로 재개관하였다. 이 전시관은 독일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3. 건축

독일 돔, 또는 '새 교회'(Neuer Kirche|노이어 키르헤de)는 여러 단계에 걸쳐 건축되고 변화해왔다. 초기 교회는 18세기 초에 세워졌으며[1], 18세기 후반 카를 폰 곤타르에 의해 돔형 탑이 추가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기존 예배당이 철거되고 요한 빌헬름 슈베들러의 설계로 재건축되었다. 자세한 건축 과정은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1817년, 프로이센 내 다른 개신교 교구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복음주의 교회에 통합되었다. 이 교회는 프로이센 역사의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1848년 3월 혁명 당시 베를린에서 희생된 시민 183명의 관이 교회 북쪽에 안치되어 추모식이 거행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당시 복음주의 목사, 가톨릭 사제, 랍비가 차례로 연설하며 희생자들을 기렸다.

1934년에는 인근 예루살렘 교회 교구와 통합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의 통합을 거쳐 현재는 복음주의 프리드리히슈타트 교구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교구의 예배는 젠다르멘마르크트 맞은편의 프랑스 교회와 크로이츠베르크의 루크 교회에서 드려진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 베를린 폭격으로 인해 교회 건물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오랫동안 폐허 상태로 남아있다가 1983년부터 1996년까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일 연방 정부가 건물과 부지를 인수하였고, 종교 시설로서의 기능은 상실(성화 해제)되었다.

1996년 재개관 이후, 독일 돔은 현재 독일 의회(분데스탁)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정표 - 좌절 - 탈선, 독일 의회 민주주의로 가는 길')으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 새 교회 교구는 인근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할레셰스 토어 남쪽에 위치한 중요한 역사적 묘지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3. 1. 초기 건축 양식

1701년부터 1708년까지 마틴 그린버그의 설계를 바탕으로 조반니 시모네티가 첫 번째 교회를 건축했다.[1] 이 교회는 1688년에 세워진 프리드리히슈타트의 세 번째 교회였다. 당시 프리드리히슈타트는 군주가 직접 통치했으며, 인접한 구 베를린과 쾰른은 도시 특권을 가진 별개의 도시였다. 처음에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칼뱅주의를 따랐기 때문에 칼뱅주의 신자들만 교회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루터교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1708년에는 칼뱅주의와 루터교 신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심투네움(Simultaneum, 공동 예배소)이 되었다.[1]

교회가 세워진 부지는 원래 위그노들에게 제공되었던 '스위스 묘지'의 일부였다. 이 위그노들은 1698년에서 1699년 사이에 스위스에서 잠시 피난 생활을 하다가 베를린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초기 건물의 평면은 오각형이었으며, 반원형 앱스(apse, 성당 동쪽 끝의 반원형 공간)가 있는 구조였다. 내부 공간은 전형적인 개신교 양식을 따랐는데, 입구 맞은편인 동쪽 중앙 기둥에 제단과 설교단이 기대어 설치된 형태였다.

3. 2. 곤타르의 증축

1780년, 카를 폰 곤타르는 기존 예배당 동쪽에 탑을 설계하고 건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교회에도 유사한 탑이 추가되었는데, 이 돔형 탑 디자인은 팔라디안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당시 파리에서 자크-제르맹 수플로가 짓고 있던 생트-제네비에브 교회(현재의 팡테옹)의 형태를 참고했다. 이러한 탑 건설은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을 로마의 피아차 델 포폴로와 유사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건설 중이던 새 교회의 탑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후 게오르크 크리스티안 웅거가 곤타르의 계획을 이어받아 완공 책임을 맡게 되었다.

탑에는 크리스티안 베른하르트 로데가 제작한 조각상들이 추가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구약신약의 인물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돔 꼭대기에는 '승리의 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세워졌으나, 현재 있는 것은 전쟁 후 복제된 것이다. 박공 부분의 부조에는 바울의 회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2]

3. 3. 슈베들러의 재건축

1881년, 낡고 오래된 예배당 건물은 철거되었다. 이후 요한 빌헬름 슈베들러가 신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새로운 예배당을 설계하였고, 이 설계를 바탕으로 헤르만 폰 데어 후데와 율리우스 헤니케가 건축을 담당하여 기존의 오각형 평면 구조를 유지한 새로운 예배당을 건설했다. 조각가 오토 레싱은 새롭게 지어진 예배당의 다락방을 장식할 여섯 개의 조각상을 디자인했다. 이 새로운 예배당은 1882년 12월 17일에 봉헌되었다.

4. 주요 인물

독일 돔과 관련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E. T. A. 호프만
  •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노벨스도르프
  • 앙투안 페스네

4. 1. E. T. A. 호프만

E. T. A. 호프만

4. 2.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노벨스도르프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노벨스도르프는 독일의 건축가이자 조경가이다. 원래 교회에 묻혔으나, 후에 할레셰스 토어 남쪽 묘지로 이장되었다.

4. 3. 앙투안 페스네

앙투안 페스네는 프랑스 출신의 로코코 양식 화가이다. 원래 교회에 묻혔으나, 후에 할레셰스 토어 남쪽 묘지로 이장되었다.

5. 묘지

'새 교회'의 두 교구는 인접한 예루살렘 교회의 두 교구와 함께 묘지를 관리했다. 이들 교구가 관리하는 세 곳의 묘지는 다른 교구의 묘지들과 합쳐져 총 6개의 묘지 단지를 이루는데, 이는 베를린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묘지군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묘지들은 할레셰스 토어 남쪽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에 위치한다(할레셰스 토어 앞 묘지).

6. 현대적 의의

1943년, 새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를린 폭격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1983년부터 1996년까지 재건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 정부가 건물과 부지를 인수하였다.

재건된 건물은 기존의 종교적 기능을 내려놓고(성화 해제) 개조 과정을 거쳐, 1996년 독일 의회 역사 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이정표 - 좌절 - 탈선, 독일 의회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 아래 독일 의회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조명하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독일 돔은 과거 교회의 역할을 넘어, 독일의 역사, 특히 독일 민주주의의 복잡한 여정을 성찰하고 기억하는 중요한 공공 역사 교육의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Evangelische Kirchen in Berlin CZV-Verlag, Berlin 1978
[2] 서적 Die Bau- und Kunstdenkmale in der DDR: Hauptstadt Berlin Henschelverlag Kunst und Gesellschaft, Berlin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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