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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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는 1814년 에든버러에서 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해양 생물학과 무척추동물에 대한 관심으로 약학 실습을 포기하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물질론적 자유 사상가이자 정치적 급진주의자였으며, 찰스 다윈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랜트는 런던 대학교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진화론적 견해를 옹호했다. 말년에는 잊혀졌지만, UCL의 그랜트 동물학 박물관으로 그의 이름을 남겼으며, 아프리카 뱀의 한 종의 학명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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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 | 1793년 11월 11일 |
| 사망 | 1874년 8월 23일 (80세) |
| 출생지 | 에든버러 |
| 사망지 | 런던 |
| 국적 | 영국 |
| 학문 분야 | |
| 분야 | 비교해부학 동물학 |
| 모교 | 에든버러 대학교 |
| 지도 학생 | 찰스 다윈 |
| 영향 |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 |
| 경력 | |
| 직업 | 해부학자 동물학자 |
| 근무처 | 런던 대학교 (1827-1874) |
| 1827년 | 비교해부학 및 동물학 풀러리아나 교수 |
| 1837년 | 린네 협회 회원 |
| 1841년 | 왕립 학회 회원 |
| 1852년 | 로열 메달 수상 |
| 기타 | |
| 배우자 | 메리 앤 왓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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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는 에든버러 아가일 광장에서 알렉산더 그랜트 WS와 제인 에드먼드의 아들로 태어났다.[1] 에든버러 고등학교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교육받고 1814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아버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해양 생물학과 무척추동물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의업을 포기했다. 그는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으며, 정치적으로 급진주의 성향을 가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복적으로 여겨지던 생물학적 아이디어, 특히 진화론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박사 학위 논문에는 진화의 개념을 시적으로 소개한 에라스무스 다윈의 ''조오노미아''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랜트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을 널리 여행하며 라마르크와 유사한 진화론적 견해를 펼쳤던 프랑스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 등과 교류했다. 1824년 존 바클레이 박사의 추천으로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2] 19세기 초 에든버러의 주요 박물학자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런던 대학교(UCL)의 초대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어 1827년부터 1874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 재직했다.[3] 그는 젊은 찰스 다윈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진화 사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3] 1836년에는 왕립 학회(FRS)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37년부터 1838년까지 로열 연구소의 풀러리안 생리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847년에는 UCL 의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1853년에는 영국 박물관의 스위니 지질학 강사로 활동하는 등 학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든버러의 아가일 광장(후에 챔버스 스트리트를 만들기 위해 철거됨)에서 아버지 알렉산더 그랜트 WS와 어머니 제인 에드먼드 사이에서 태어났다.[1] 에든버러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1814년 에든버러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해양 생물학과 무척추동물 동물학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활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급진주의 성향을 가졌던 그랜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보수적인 영국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소 파격적으로 여겨지던 생물학 사상에 열려 있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는 에라스무스 다윈의 ''조오노미아''가 인용되었는데, 이 책은 시적인 형태로 진화의 개념을 소개한 작품이었다.
그랜트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 과정에서 라마르크와 유사한 진화론적 관점을 제시했던 프랑스의 저명한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같은 학자들과 교류했다.
1824년에는 존 바클레이 박사의 추천으로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2. 2. 유럽 유학과 진화론 연구
1814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랜트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해양 생물학과 무척추동물의 동물학 연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인해 의업을 포기했다.[1] 그는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으며, 정치적으로 급진주의 성향을 가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복적으로 여겨지던 생물학적 아이디어, 특히 진화론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시적인 형태로 진화의 개념을 소개한 에라스무스 다윈의 ''조오노미아''를 인용하기도 했다.그랜트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대학을 방문하며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이 과정에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유사한 진화론적 견해를 공표했던 프랑스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접촉하며 학문적 교류를 가졌다.[3]
포스 만 주변의 해양 생물을 연구하며 프레스턴팬스 근처 해안과 어선에서 표본을 수집했고, 이를 통해 해면과 갯민달팽이 생물학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생명의 동일한 법칙이 가장 단순한 생명체('단세포' - 이 맥락에서는 가설적인 원시 생명체 또는 유기 생명의 단위를 의미)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조프루아의 영향을 받아, 생명체를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점차 복잡한 형태로 나아가는 일종의 사슬 또는 단계적 발전 과정으로 이해했다.
1824년에는 존 바클레이 박사의 추천으로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2], 같은 해 존 바클레이를 대신하여 무척추동물의 비교 해부학을 포함한 강의를 시작했다.[4]
2. 3. 에든버러에서의 활동과 찰스 다윈과의 만남
그랜트는 에든버러의 아가일 광장에서 알렉산더 그랜트 WS와 제인 에드먼드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1] 에든버러 고등학교를 거쳐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1814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해양 생물학과 무척추동물 동물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고, 정치적으로는 급진주의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보수적인 영국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소 급진적으로 여겨졌던 생물학적 사상, 특히 진화론에 열린 자세를 가졌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는 에라스무스 다윈의 ''조오노미아''가 인용되었는데, 이 책은 시적인 형태로 진화 사상을 담고 있었다.1824년, 그는 존 바클레이 박사의 추천으로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19세기 초 에든버러의 주요 박물학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이후 런던 대학교의 초대 비교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진화론적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젊은 찰스 다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3]
그랜트는 학생 박물학자들의 모임인 플리니안 협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찰스 다윈은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부 2학년이던 1826년 가을, 이 협회에 가입하면서 그랜트를 만났다. 다윈은 그랜트의 가장 열성적인 제자가 되어 표본 수집을 도왔다.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 동안, 그랜트는 주로 해면의 알과 유충에 관한 연구 논문 20편을 에든버러 저널에 발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논문들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랜트는 다윈을 로버트 제임슨의 방에서 열리는 베르너 협회 모임에 손님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이 협회는 의학 박사(MD) 학위 소지자만 회원이 될 수 있었기에, 학생 신분이던 다윈에게는 특별한 기회였다. 다윈은 그곳에서 존 제임스 오듀본의 조류 박제 시연을 참관하기도 했다.
1827년 3월 24일, 그랜트는 베르너 협회에서 굴 껍데기에서 흔히 발견되는 검은 포자가 사실 가오리 거머리의 알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견은 실제로는 다윈이 먼저 해낸 것이었다. 이 일로 다윈은 스승이었던 그랜트에게 실망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5] 다윈은 사흘 뒤인 3월 27일, 플리니안 협회에서 이 발견과 더불어 바다 달팽이 유충에 대한 자신의 관찰 결과를 직접 발표했다.
이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그랜트가 연구하던 동물의 '계획의 통일성' 개념에 기여했다. 그랜트는 베르너 협회에서 바다 달팽이를 해부하여 연체동물에도 포유류와 유사한 췌장이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단순한 생물과 고등 생물 간의 상동성을 보여주며 생명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그의 진화론적 관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 4. 런던 대학교 교수 임용과 갈등
그랜트는 1827년 런던 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의 초대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임용되어 1874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3][6] 당시 그의 연봉은 39GBP였다.[6] 그는 급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대의에 참여하여, 귀족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가 운영하는 새로운 동물학회 박물관 설립 운동을 벌였고, 대영 박물관을 프랑스식 연구 기관으로 개혁하고자 노력했다.그러나 그랜트의 이러한 활동과 진화론에 대한 지지는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보수당원들은 그가 "파충류 언론"과 "기독교 진리의 신성 모독적인 조롱"을 지지한다고 비난하며 공격했다. 이러한 보수 진영의 압박으로 인해 그는 결국 런던 동물학회에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의 자리는 그랜트의 진화론에 강하게 반대했던 리처드 오웬이 차지하게 되었다.
2. 5. 말년과 죽음

그랜트는 런던 유스턴 스퀘어 2번지 유스턴 그로브 자택에서 사망했으며,[18] 사망 당시에도 UCL의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미 시대에 뒤처진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는 유언을 통해 1500GBP 미만의 재산을 UCL에 기증했다.[19]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 동쪽에 묻혔다.
그랜트의 긴 경력 후반부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그의 동물학 강의 방식은 T. H. 헉슬리의 제자이자 새로운 조드렐 동물학 및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 E. 레이 랭커스터에 의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랭커스터는 그랜트가 설립한 대학 동물학 박물관을 유지하고 재조직하여 확장했으며, 이 박물관은 현재 UCL의 그랜트 동물학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는 아프리카 뱀의 한 종인 ''Gonionotophis grantii''의 학명으로 기념되고 있다.[20]
3. 과학적 업적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는 해양 생물학, 비교 해부학, 진화론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에딘버러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해양생물과 무척추동물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연구에 전념했다.[1] 그는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으며,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진화론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그랜트의 주요 연구는 스코틀랜드 포스 만 주변 해역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해면과 갯민달팽이 연구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같은 진보적인 학자들과 교류하며 라마르크주의와 유사한 진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생명체가 단순한 형태('단세포')에서 복잡한 형태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모든 유기체에 동일한 생명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1827년부터 1874년 사망할 때까지 UCL에서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재직하며[6], 상동성 개념과 반복 이론 등 진화론적 아이디어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8] 그는 조프루아의 이론, 즉 환경이 유기체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유도한다는 관점을 지지했으며[9], 이는 조르주 퀴비에와의 유명한 제프루아-퀴비에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11][12]
에든버러 대학교 시절에는 젊은 찰스 다윈에게 큰 영향을 주어, 다윈이 해면 연구와 라마르크주의 사상을 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5] 그러나 그랜트의 급진적인 과학적, 정치적 견해는 보수당원들의 반발을 사 런던 동물학회에서의 직위를 잃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진화론에 강하게 반대했던 리처드 오웬이 임명되었다.
3. 1. 해양 생물학 연구
1814년 에딘버러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해양생물과 무척추동물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인해 약학 실습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물질론적 자유 사상가이자 정치적 급진주의자로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보수적인 영국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소 파격적으로 여겨지던 생물학 사상, 특히 진화론적 관점에 개방적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에는 이래즈머스 다윈의 《주노미아》를 인용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진화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그랜트는 연구를 위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대학을 방문하며 폭넓게 여행했다. 이 과정에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유사한 진화론적 견해를 가진 프랑스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
본격적인 연구는 스코틀랜드의 포스 만 주변 해역에서 이루어졌다. 프레스턴팬스에 집을 마련하고 인근 해안과 어선에서 직접 표본을 수집하며, 특히 해면과 갯민달팽이의 생태와 구조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생명의 기본적인 법칙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그는 이를 '단세포'라고 지칭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세포 생물과는 다른, 가설적인 원시 생명체나 유기 생명의 기본 단위를 의미했다)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에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믿었다. 조프루아의 생각을 따라, 그는 생명체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사슬 또는 상승하는 계단(에스컬레이터)으로 보았으며, 가장 아래 단계에서는 '단세포'가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생겨나 이 흐름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1824년에는 존 바클레이를 대신하여 무척추동물의 비교 해부학에 대한 강의를 맡았으며, 같은 해 왕립 에든버러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
3. 2. 비교 해부학 연구
그랜트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대학을 방문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 과정에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유사한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프랑스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교류했다.스코틀랜드 포스 만 주변의 해양 생물 연구에 몰두했으며, 프레스턴팬스 근처 해안과 어선에서 직접 표본을 채집하여 해면과 갯민달팽이 연구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생명의 동일한 법칙이 '단세포'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단세포'는 현대적 의미의 단세포 생물이라기보다는, 그가 상정한 원시적인 생명체 또는 유기 생명의 기본 단위를 의미한다. 조프루아의 영향을 받아, 그랜트는 생명체를 사슬이나 에스컬레이터처럼 배열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단세포'가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점차 상위 단계로 나아가는 개념이었다.
1824년, 그랜트는 존 바클레이를 대신하여 무척추동물에 대한 강의를 맡았으며, 여기에는 무척추동물의 비교 해부학 내용을 포함했다. 같은 해 왕립 에든버러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
1827년부터 1874년 사망할 때까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39GBP였다.[6] 그랜트는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개혁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귀족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새로운 동물학회 박물관 설립을 주장했으며, 대영 박물관을 프랑스식 연구 기관처럼 개편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보수당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그랜트가 "파충류 언론"과 그 "기독교 진리의 신성 모독적인 조롱"을 지지한다고 비난했으며, 결국 이로 인해 런던 동물학회에서의 직위를 잃게 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그랜트의 진화론적 사상에 강하게 반대했던 리처드 오웬이 임명되었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 항해를 떠나기 직전인 1831년, 표본 보존 방법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그랜트를 방문했다. 다윈이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그랜트는 그의 표본 연구를 돕겠다고 제안했으나, 다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의 교류는 더 이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랜트는 유럽 대륙을 자주 방문하며 프랑스의 저명한 비교 해부학자 조프루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에든버러 외래 의학 학교는 조프루아의 사상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었고, 스코틀랜드의 급진주의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는 훗날 정신 병원 개혁과 신경 정신 의학에 기여한 골상학자 윌리엄 A. F. 브라운도 포함된다. 그랜트는 이러한 사상을 런던으로 가져와 UCL 학생들에게 상동성(조프루아의 핵심적인 연구 방법) 개념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라마르크와 드 블랑빌의 아이디어도 발전시켰는데, 이들의 사상은 비슷한 맥락이었으며 반복 이론에 대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다.[8]
조프루아는 유신론자였고, 그의 이론은 공통 조상을 가정하기보다는 특정 유형 내에 존재하는 잠재력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환경이 유기체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유도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관점을 에른스트 마이어는 '제프루아주의(Geoffroyism)'라고 명명했다.[9] 이는 습관의 변화가 동물의 변화를 이끈다고 본 라마르크의 견해와는 명확히 달랐다. 로렌스는 1816년에 이미 기후가 인간 종 간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조프루아의 비교 해부학은 다양한 동물에서 동일한 기관이나 뼈 그룹을 비교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 그는 1818년부터 1822년 사이에 모든 척추동물이 '구성의 통일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10] 그의 주요 발견 중 하나는 어류의 아가미 덮개 뼈와 포유류 내이의 이소골 사이의 상동성을 밝힌 것이었다. 조프루아의 방법론은 척추동물 연구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무척추동물을 뒤집어 내부 구조를 비교하려 했을 때는 한계에 부딪혔다("모든 동물은 척추 기둥의 안쪽 혹은 바깥쪽에 있다"는 주장). 이는 그의 네메시스가 되었다. 1830년 2월 15일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열린 제프루아-퀴비에 논쟁에서 조르주 퀴비에는 동물의 네 가지 주요 분류군(퀴비에 분지)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는 조프루아의 주장을 반박했다.[11] 조프루아와 퀴비에의 관점 차이는 "퀴비에에게는 구조가 기능을 결정하지만, 조프루아에게는 기능이 구조를 결정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단순히 과학적인 문제를 넘어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12]
3. 3. 진화론 옹호
그랜트는 젊은 시절부터 당시 영국 사회에서 급진적이고 전복적으로 여겨지던 생물학 사상에 열려 있었다. 그는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으며, 정치적으로도 급진주의 성향을 보였다.[1]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준비하며 에라스무스 다윈의 저서 『조오노미아』를 인용했는데, 이 책은 시적인 형태로 진화의 아이디어를 담고 있었다.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의 대학을 방문했고, 이 과정에서 라마르크와 유사한 진화론적 견해를 가졌던 프랑스의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교류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랜트는 조프루아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고, 그의 아이디어는 에든버러 외래 의학 학교의 급진적인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그랜트는 생명의 동일한 법칙이 가장 단순한 생명체('단세포')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단세포'는 가상적인 원시 생명체 또는 유기 생명의 기본 단위를 의미했다. 그는 조프루아의 관점을 따라 생명체를 일종의 사슬 또는 상승하는 계단(에스컬레이터)으로 배열했으며, 가장 아래 단계에서 '단세포'가 자연 발생하여 끊임없이 위로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상동성 연구로 이어졌는데, 그는 다양한 동물들의 기관이나 뼈 구조를 비교하며 모든 척추동물이 '구성의 통일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10]
1826년, 그랜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화론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13] 그는 '변형'이 모든 유기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지층 속 화석들이 점진적이고 자연스러운 계승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러한 생명 형태들이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 "원시적인 모델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명백히 라마르크주의적인 관점이었다. 더 나아가 식물과 동물이 공통의 기원을 가지며, 생명의 기본 단위('모나드')가 자연적으로 생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환원주의와 유물론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는 조프루아나 라마르크의 이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지만, 아직 완전한 진화론은 아니었다.
그랜트는 에든버러 대학교 시절 젊은 찰스 다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1826년 학생 박물학자 모임인 플리니안 협회에 가입하여 그랜트의 가장 열성적인 제자가 되었고, 그의 표본 수집을 도왔다. 그랜트는 다윈에게 해면 연구와 라마르크주의의 진화 사상을 소개했으며, 다윈은 그랜트의 '계획의 통일성' 연구에도 기여했다. 그랜트는 연체동물에서 췌장과 유사한 기관을 발견하여 포유류와의 상동성을 주장함으로써, 단순한 생물과 복잡한 생물을 그의 '생명의 사슬' 안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랜트가 다윈의 발견(가오리 거머리 알의 정체 규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사건 이후 다윈은 그랜트와의 관계를 멀리하게 되었다.[5]
런던 대학교(UCL)의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1827–1874), 그랜트는 상동성 개념과 함께 라마르크, 드 블랑빌 등의 진화론적 아이디어, 그리고 반복 이론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8] 그는 조프루아의 이론, 즉 환경이 유기체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유도한다는 '제프루아주의'(Geoffroyism)를 지지했다.[9] 이는 조르주 퀴비에와의 유명한 제프루아-퀴비에 논쟁(1830)으로 이어졌는데, 퀴비에는 동물의 네 가지 주요 유형(분지)을 하나의 공통된 계획으로 통합하려는 조프루아의 주장을 반박했다.[11] 이 논쟁은 과학적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12]
그랜트의 급진적인 진화론적 견해와 민주적 대의 활동은 보수 진영의 반발을 샀다. 그는 "파충류 언론"과 "기독교 진리의 신성 모독적인 조롱"을 지지한다는 보수당원들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런던 동물학회에서의 직위를 잃게 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진화론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리처드 오웬이 임명되었다. 비글호 항해를 떠나기 전 다윈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랜트를 방문했지만[7], 이후 둘 사이의 교류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사상과 영향
그는 유럽 대륙으로 자주 여행하며 프랑스의 저명한 비교 해부학자 제프루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8] 이를 통해 라마르크, 드 블랑빌 등 당시 유럽의 진보적인 진화론적 사상을 접하고 발전시켰다.[8] 그랜트는 에든버러 외래 의학 학교와 UCL 등에서 활동하며, 생물 간의 구조적 유사성을 설명하는 상동성 개념과 반복 이론과 같은 아이디어를 영국 학계에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
4. 1. 급진적 사상과 사회적 갈등
유물론자이자 자유사상가였으며, 정치적으로 급진주의 성향을 보였던 그랜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에서 팽배했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전복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생물학적 아이디어에 열려 있었다.[1] 그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에라스무스 다윈의 ''조오노미아''를 인용했는데, 이 작품은 시적인 형태로 진화의 아이디어를 소개한 것이었다.[1] 그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대륙을 널리 여행하며 라마르크의 것과 유사한 진화학적 견해를 공표했던 프랑스의 동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와 같은 인물들과 교류했다.[8] 그랜트는 이러한 교류를 통해 얻은 진보적인 사상들을 에든버러 외래 의학 학교와 이후 UCL로 가져왔다. 특히 에든버러에서는 스코틀랜드 급진파들이 조프루아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골상학자이자 이후 정신 병원 개혁에 헌신한 윌리엄 A. F. 브라운도 있었다.[8]1827년부터 1874년 사망할 때까지 UCL의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당시 그의 연봉은 39GBP에 불과했다.[6] 그는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대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귀족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새로운 런던 동물학회 박물관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대영 박물관을 프랑스의 연구 기관처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보수 세력(토리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그랜트가 "파충류 언론"과 그 "기독교 진리의 신성 모독적인 조롱"을 지지한다고 비난하며 공격했고, 결국 그는 런던 동물학회에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7] 그의 후임으로는 그랜트의 진화론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리처드 오웬이 임명되었다.[7] 젊은 시절 그랜트에게 영향을 받았던 찰스 다윈은 비글호 항해 직전인 1831년 표본 보관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랜트를 방문했으나, 항해에서 돌아온 후에는 그랜트의 표본 검사 제안을 거절했고 이후 교류는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7]
그랜트는 사회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진보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널리 유물론자 또는 무신론자로 여겨졌으며, 그의 생물학적 설명에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배제되었다.[14] 그는 당시 기성 체제에 맞서 싸우던 토머스 웨클리, 의학 저널 ''The Lancet'', 그리고 영국 의사 협회(BMA)의 확고한 지지자였다.[14] 이들 급진 개혁가들은 정부가 의료 법인의 면허 발급 권한을 인수하거나 최소한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랜트 자신도 당시 의료계의 폐쇄적인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런던 왕립 의사 협회(RCP)의 회원이 될 자격이 없었다.[15] 당시 잉글랜드에서 의사로 활동하려면 RCP의 면허를 받거나 약제사 자격을 취득해야 했지만, 그랜트는 RCP로부터 런던 면허를 받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수익성 있는 의료 활동의 길을 막았다.[15] 그는 평생에 걸쳐 RCP와 런던 왕립 외과 협회의 개혁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15]
토머스 웨클리는 그랜트가 ''The Lancet''과 급진적 개혁 프로그램을 지지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화답했고, 1833년부터 1834년까지 ''Lancet''에 그랜트의 비교 해부학 강의 60개 전체 텍스트를 게재했다.[16] 이 강의들은 영어로 된 철학적 해부학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이고 접근 가능한' 설명으로 평가받는다.[16][17]
4. 2. 찰스 다윈에게 미친 영향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찰스 다윈은 2학년이던 1826년 가을, 학생 박물학자들의 모임인 플리니안 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랜트는 다윈의 열성적인 스승이 되었고, 다윈은 그의 해양생물 표본 수집을 도왔다.당시 그랜트는 해면과 그 알, 유충에 관한 연구 논문을 다수 발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다윈을 로버트 제임슨의 방에서 열린 베르너 협회 모임에 손님으로 데려갔는데, 의학 박사(MD) 학위 소지자만 회원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윈은 그곳에서 조류학자 존 제임스 오듀본의 시연을 참관하는 기회를 가졌다.
1827년 3월 24일, 그랜트는 베르너 협회에서 굴 껍질에서 흔히 발견되는 검은 포자가 사실은 가오리 거머리의 알이라는 내용을 발표하고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 발견은 다윈이 먼저 알아낸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다윈은 멘토로서의 그랜트에게 실망하며 관심을 잃게 되었다.[5] 다윈은 사흘 뒤인 3월 27일, 플리니안 협회에서 이 발견과 함께 바다 달팽이 유충에 대한 자신의 관찰 결과를 직접 발표했다.
다윈은 그랜트가 주장한 동물의 '계획의 통일성' 연구에도 기여했다. 그랜트는 다윈이 제공한 바다 달팽이 표본을 이용해 연체동물에서도 포유류와 유사한 췌장 구조를 확인했다고 베르너 협회에서 발표했다. 이는 단순한 생물과 복잡한 생물 사이의 상동성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주장하던 진화론적 '생명의 사슬' 개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비글호 항해를 떠나기 직전인 1831년, 다윈은 표본 보관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그랜트를 방문했다. 하지만 항해에서 돌아온 후, 그랜트가 다윈의 방대한 표본 검사를 돕겠다고 제안했을 때 다윈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교류는 더 이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랜트는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로 재직하며 급진적인 사상과 활동을 이어갔으나, 그의 진화론적 견해에 격렬히 반대했던 리처드 오웬과 같은 보수적인 학계 인사들과의 갈등 속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어갔다.
4. 3. 후대에 미친 영향
그랜트는 젊은 시절의 찰스 다윈에게 영향을 미쳤으며,[3] 프랑스의 저명한 박물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제시한 진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그러나 UCL 비교 해부학 교수로서 보낸 긴 경력의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동물학 강의 방식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T. H. 헉슬리의 제자인 E. 레이 랭커스터가 새로운 조드렐 동물학 및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임명되면서 그랜트의 시대는 저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랭커스터는 그랜트가 설립하고 기증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학 동물학 박물관을 유지하고, 재조직하며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 박물관은 오늘날 UCL의 그랜트 동물학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그랜트는 사망 당시에는 다소 잊힌 인물로 여겨졌지만,[18]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 뱀의 한 종류인 ''Gonionotophis grantii''의 학명으로 남아 기념되고 있다.[20] 또한 그는 유언을 통해 1500GBP 미만의 재산을 UCL에 기증하여 교육 기관에 대한 기여를 남겼다.[19]
5. 평가와 유산
(내용 없음)
5. 1. 유산
그랜트는 런던 유스턴 스퀘어 2번지 유스턴 그로브 자택에서 사망했으며,[18] 사망 당시에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학계에서는 이미 시대에 뒤처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는 유언을 통해 1500GBP 미만의 재산을 UCL에 기증했다.[19]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 동쪽에 묻혔다.
그랜트의 긴 전문 경력 후반부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동물학 강의 방식은 T. H. 헉슬리의 제자이자 새로운 조드렐 동물학 및 비교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 E. 레이 랭커스터에 의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대체되었다. 하지만 랭커스터는 그랜트가 설립한 대학 동물학 박물관을 유지하고 재조직하며 확장했고, 이 박물관은 현재 UCL의 그랜트 동물학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는 아프리카 뱀의 한 종인 ''Gonionotophis grantii''의 학명으로 기념되고 있다.[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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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dinburgh and Leith Post Office Directory 1793-94
[2]
서적
Biographical Index of Former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1783–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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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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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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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Grant, Robert Ed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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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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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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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London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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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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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Politics of Evolution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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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owth of Biological Thought: diversity, evolution and inheri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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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hilosophie anatomique
Paris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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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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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ervations on the Nature and Importance of G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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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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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On the Present State of the Medical Profession in England
Renshaw, London
[16]
서적
The Politics of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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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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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iere, London
[18]
서적
Biographical Index of Former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1783–2002
https://www.royalsoc[...]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2006-07
[19]
웹사이트
British India Office Wills and Probate
https://search.findm[...]
2021-10-22
[20]
서적
The Eponym Dictionary of Reptile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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