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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라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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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는 프랑스의 박물학자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활동하며 생물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군 복무, 의학 공부, 식물학 연구를 거쳐 무척추동물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 식물상', '무척추동물 체계', '동물철학' 등의 저서를 통해 진화론을 제시했다. 라마르크는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며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획득 형질 유전'과,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용불용설'을 주장했지만, 그의 이론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대립하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생물학에서 용어 "생물학"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무척추동물 분류 체계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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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라마르크
기본 정보
이름장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슈발리에 드 라마르크
라마르크의 초상화, 샤를 테베냉 그림,
출생일1744년 8월 1일
출생지바장탱, 피카르디, 프랑스 왕국
사망일1829년 12월 18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국적프랑스
분야생물학
자연사
동물학
알려진 업적진화
획득 형질의 유전
동물철학
식물학 약칭Lam.
동물학 약칭Lamarck
경력
소속 기관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국립 자연사 박물관
식물원
영향
영향 받은 사람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
기타
로마자 표기Jangbpatiseuteu Pieleu Antoan deu Mone, Syuballie deu Ramaleukeu

2. 생애

프랑스의 저명한 자연주의자이자 진화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의 가난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4] 가문의 전통에 따라 군에 복무했으나,[4] 이후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4] 의학 공부를 잠시 시도하기도 했으나,[4] 결국 베르나르 드 쥐시외 밑에서 식물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4]

1778년 《프랑스 식물지》(Flore française|프랑스 식물지fra)를 출판하며 학계에서 명성을 얻었고,[4] 이는 뷔퐁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고[10] 왕립 식물학자로 임명되는[10]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며 귀족 작위를 포기했고, 왕립 정원의 명칭 변경에도 관여했다.[11] 1793년에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무척추동물 담당 교수로 임명되어[4] 이후 무척추동물 연구에 집중했다.

라마르크는 무척추동물의 분류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11] 오늘날 널리 쓰이는 '생물학'(biology)이라는 용어를 현대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한 인물 중 하나이다.[6][13] 그는 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진화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를 《동물 철학》(Philosophie Zoologique|동물 철학fra, 1809) 등의 저서를 통해 발표했다. 그의 진화 이론은 흔히 용불용설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생물학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진화론적 사고는 의 불변성을 주장했던 동시대의 저명한 과학자 조르주 퀴비에 등으로부터 비판과 반대에 부딪혔다.[15] 말년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음에도[25] 두 딸의 도움을 받아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하여 방대한 저작인 《무척추 동물지》(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sans vertèbres|무척추 동물지fra)를 완성했다. 평생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 연구에 매진했으며, 1829년 파리에서 가난 속에 생을 마감했다.[16]

2. 1. 생애 초반

장바티스트 라마르크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바장탱(Bazentin)에서 태어났다.[4] 그는 소귀족 가문의 11번째 아이였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그의 가문은 모계 혈통으로 922년부터 923년까지 프랑스의 임시 국왕이었던 로베르 1세의 후손이었다. 라마르크 가문의 남성들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군대에 복무하는 전통을 따랐으며, 그의 형 중 한 명은 베르헌오프줌 공방전에서 전사했고, 다른 두 형제도 그가 십대일 때 복무 중이었다.

라마르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750년대 후반 아미앵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입학했으나,[4] 1760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말을 구입하여 독일에서 복무 중이던 프랑스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라마르크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의 전투에 참전하여 용맹함을 보였고,[4] 전투 중 소속 부대원이 14명으로 줄어들자 지휘권을 맡아 구원 병력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러한 용기와 충성심 덕분에 즉석에서 장교로 임명되었으나, 동료와의 장난으로 목 림프절(Lymph node)에 염증이 생겨 치료를 위해 파리로 보내졌다.[4]

이후 모나코에 배치되었고,[4] 그곳에서 제임스 프랜시스 쇼멜(James Francis Chomel)의 식물학 서적인 ''Traité des plantes usuelles''을 접하며 식물학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4] 군 복무 중 부상과 연금 삭감으로 인해 라마르크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4] 그는 은행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4년간 의학을 공부했으나 형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4]

라마르크는 특히 왕립 식물원(Jardin du Roi)을 방문한 후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자크 루소와 함께 식물을 채집하기도 했다. 그는 저명한 프랑스 자연주의자인 베르나르 드 쥐시외의 제자가 되어 10년간 프랑스 식물상을 연구했다.[4] 이 시기 그는 의학 공부를 하는 동시에, 왕립 식물원에서 쥐시외의 지도 아래 식물학 연구에 몰두했다.

2. 2. 학자, 교육 활동

식물학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라마르크는 파리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며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의사가 되지는 않았다.[4] 그는 장자크 루소를 만나 함께 식물을 채집하면서 다른 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식물학에 집중하여 베르나르 드 쥐시외 밑에서 10년간 프랑스 식물상을 연구했다.[4]

1778년, 뷔퐁의 후원을 받아 3권짜리 저서 《프랑스 식물지》(Flore française)를 출판하여 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그를 프랑스 과학계에서 유명하게 만들었고,[4] 1779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10] 1781년에는 왕립 식물학자로 임명되어 독일, 헝가리 등 외국의 식물원과 박물관을 여행하며 희귀 식물과 광물 표본을 수집했다.[10] 여행 후 《식물 사전》을 출판하였다. 1788년에는 왕립 정원의 허바리움(herbarium)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4]

라마르크는 프랑스 혁명(1789년)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공화주의 사상을 가졌다. 그는 왕립 정원을 '꾸르 식물원'(Jardin des Plantes)으로 개명하는 데 참여했으며,[11] 1793년에는 새로 개편된 국립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에서 무척추동물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다.[4]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무척추동물 연구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무척추동물 분류 체계를 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는데, 린네의 분류 체계에서 곤충류와 환형동물류로만 나뉘었던 무척추동물을 점차 세분화하여 1801년 《무척추동물의 체계》(Système des Animaux sans Vertèbres)에서는 7개의 강(綱)으로, 이후 《동물 철학》(Philosophie Zoologique, 1809)에서는 10개의 강으로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거미류를 곤충에서 분리하고, 갑각류를 별개의 강으로 분류하는 등 현대 분류학의 기초를 다졌다.[11]

말년의 라마르크


파리 분지의 연체동물 화석 연구 등을 통해 라마르크는 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4] 1800년 5월, 그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 강연에서 자신의 진화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밝혔고,[4] 1801년 출판된 《무척추동물의 체계》에서는 조르주 퀴비에격변설을 비판했다.[26] 1802년에는 "생물학"(biologie)이라는 용어를 현대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며,[6][13] 같은 해 출판된 《생명체 조직 연구》(Recherches sur l'Organisation des Corps Vivants)에서 자신의 진화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동물 철학》(1809)은 진화와 유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집대성한 책으로, 흔히 용불용설로 알려진 이론을 담고 있다. 다만 이 책은 라마르크가 새롭게 주장한 이론이라기보다는 당시 자연사학계에서 논의되던 이론들을 정리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계몽서적 성격이 강했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적 사고는 고정설을 지지했던 동시대의 저명한 고생물학조르주 퀴비에와 같은 인물들과의 학문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변형 이론을 조롱하며 종의 고정성을 옹호했고,[15] 라마르크 사후에는 그에 대한 찬사를 쓰는 형식을 빌려 라마르크를 비판하기도 했다.[17] 또한 라마르크는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는 영적 존재는 관찰 불가능하므로 과학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상호부조가 공공의 행복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1815년부터 1822년까지 그는 총 7권으로 이루어진 대작 《무척추 동물지》(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sans vertèbres)를 출판하여 고대 무척추 동물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1820년경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두 딸의 도움을 받아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25]

2. 3. 생애 후반



라마르크는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다섯 명만이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가 맡았던 직책들은 대부분 명예직이어서 보수가 매우 낮았고, 이로 인해 평생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4] 1793년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무척추동물학 교수 겸 큐레이터로 임명된 후[4], 남은 생애 동안 무척추동물학을 포함한 동물학 연구에 전념했다. 당시 박물관의 기록에는 그가 "50세, 두 차례 결혼, 여섯 자녀, 곤충, 유충, 미생물 전공의 동물학 교수"로 기재되어 있다.

교수 임명 후 초기에는 종(species)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나, 파리 분지의 연체동물을 연구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의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4] 1800년 5월 11일, 국립 자연사 박물관 강연에서 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다.

1801년에는 무척추동물 분류에 관한 중요한 저서인 ''무척추동물 체계''(Système des Animaux sans Vertèbres프랑스어)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극피동물, 거미류, 갑각류, 환형동물 등을 기존의 '벌레'(Vermes) 분류군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자연 그룹으로 정의했다.[11] 특히 거미류를 곤충과 처음으로 분리하고, 갑각류를 곤충과 다른 별개의 강(class)으로 분류하는 등 현대적인 무척추동물 분류의 기초를 마련했다.

1802년에는 ''수문지질학''(Hydrogéologie)을 출판하며 균일설에 기반한 지질학 이론을 제시했고, 같은 해 ''생명체 조직 연구''(Recherches sur l'Organisation des Corps Vivants)를 통해 자신의 진화 이론을 발표했다. 또한 이 시기에 현대적인 의미의 "생물학(biology)"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6][13] 그의 진화론은 1809년 출간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 더욱 발전했는데, 이는 흔히 용불용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 학술서라기보다는 당시 자연사학계의 이론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계몽서적 성격이 강했으며, 용불용설뿐 아니라 진화와 유전 전반을 다루었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적 사고는 당시 주류 학계, 특히 저명한 고생물학자이자 종의 불변성을 주장했던 조르주 퀴비에와 갈등을 빚었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조롱했으며[15], 라마르크 사후에는 추도사를 통해 그를 혹평하기도 했다. 굴드(Gould)는 1993년에 퀴비에의 추도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퀴비에의 라마르크에 대한 찬사는 제가 읽어본 가장 비관적이고 냉혹하게 당파적인 전기 중 하나입니다. 그는 '죽은 자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라'(de mortuis nil nisi bonumla)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 존경하는 논평을 쓰고 있었다고 가정했지만 말입니다."[17]

라마르크는 말년에 점차 시력을 잃어 1820년경에는 완전히 실명했지만, 두 딸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계속하여 방대한 저서인 ''무척추동물지''(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sans vertèbres) 7권을 완성했다.[25]

1829년 12월 18일, 라마르크는 파리에서 가난 속에서 사망했다. 그의 가족은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재정 지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친척의 도움으로 몽파르나스 묘지의 공동 묘지에 5년 기한으로 임시 매장되었다.[16] 나중에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그의 유해는 발굴되어 다른 유해들과 함께 처리되면서 결국 유실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의 혼란 속에서 그의 묘소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3.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

라마르크는 생물 진화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이론 중 하나를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8] 그의 이론은 프랑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의 혁신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뷔퐁보다 더 급진적인 사상을 펼쳤다.

라마르크 이론의 핵심은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특정 기관을 자주 사용하면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며(이른바 용불용설), 이렇게 개체 일생 동안 얻어진 형질(획득 형질)이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획득 형질의 유전)는 생각이다. 그는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 새로운 이 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환경이 동물의 변화를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생명체는 질서정연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14]

그는 자신의 진화 이론을 1800년 강의에서 처음 소개한 뒤, 다음 주요 저서들을 통해 구체화했다.


  • Recherches sur l'organisation des corps vivantsfra (1802)
  • Philosophie zoologique|동물철학fra (1809)
  • 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sans vertèbres|무척추동물의 자연사fra (전 7권, 1815-1822)


라마르크는 진화를 두 가지 주요한 힘의 결과로 설명했다. 하나는 생물을 단순한 형태에서 점차 복잡한 형태로 나아가게 하는 내재적인 힘이고, 다른 하나는 각 생물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여 다양하게 분화하도록 하는 힘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이 초자연적 개입 없이 물리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보며 유물론적 관점을 견지했다.

비록 그의 이론 중 핵심인 획득 형질의 유전 가설은 이후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등에 의해 비판받고 현대 유전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18], 라마르크는 찰스 다윈 이전에 진화 개념을 과학적 논의의 장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윈 자신도 라마르크가 생물의 변화를 기적이 아닌 자연 법칙의 결과로 설명하려 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20] 최근 후성유전학의 발전은 환경 요인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고 일부가 유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라마르크의 아이디어를 일부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3. 1. 핵심 개념

라마르크는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8] 그는 1800년 강의에서 처음 진화 이론의 개요를 설명하고 이후 여러 저서를 통해 구체화했다. 그의 이론은 프랑스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뷔퐁보다 더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은 크게 두 가지 핵심 원리로 구성된다. 첫째는 생물이 환경 변화에 따라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나아가려는 내재적인 경향이며, 둘째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이 기본적인 물리적 원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며, 생물학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 내재적 진보 경향과 자연 발생 ===

라마르크는 생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더 복잡한 구조로 발전하려는 경향, 즉 "진보의 사다리"를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생명의 힘'(Le pouvoir de la vie|fra) 또는 '끊임없이 질서를 만들려는 힘'(la force qui tend sans cesse à composer l'organisation|fra)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진보 경향은 생명체 내 유체의 움직임과 같은 물리적인 과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다.

또한 라마르크는 가장 단순한 생명체는 자연 발생을 통해 무생물로부터 계속해서 생겨난다고 믿었다. 이렇게 새로 생겨난 단순한 생명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기 때문에, 현재에도 다양한 복잡성 수준의 생물들이 공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생명의 진보가 어떤 목적론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금술적 세계관에 기반한 물리 법칙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강조하며 생기론과는 선을 그었다.

=== 환경 적응: 용불용설과 획득 형질 유전 ===

라마르크 진화론의 두 번째 핵심 요소는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이는 생물이 '진보의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나타나거나, 특정 환경에 고도로 적응하여 더 이상의 변화가 어려운 상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적응이 환경과의 상호작용, 특히 기관의 사용과 불사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법칙을 제시했다.

# 제1 법칙 (용불용설): 동물이 어떤 기관을 자주 사용하면 그 기관은 발달하고 강화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약화되고 퇴화하여 결국 사라질 수도 있다. 이는 흔히 용불용설로 알려져 있다.

# 제2 법칙 (획득 형질 유전): 환경의 영향이나 기관의 사용/불사용으로 인해 개체가 일생 동안 얻게 된 형질(획득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 이를 획득 형질의 유전이라고 한다.

이 두 법칙, 특히 획득 형질의 유전은 라마르크 이론의 특징적인 부분이지만, 그의 전체 사상의 일부일 뿐이다. 비록 고전적인 의미의 획득 형질 유전은 현대 생물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후성유전학 연구는 환경이나 행동의 영향(메틸화 등)으로 유전자 발현이 변화하고 이것이 일부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라마르크적 과정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기도 했다.

3. 2. 한계점

라마르크의 진화론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는 개체가 살아가면서 환경에 적응하여 얻게 된 형질이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는 획득 형질 유전 가설이다. 이는 그의 두 번째 법칙으로 설명된다.[14]

그러나 이 획득 형질 유전 가설은 현대 유전학의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후반,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생식 세포의 유전 물질(생식질)이 몸을 구성하는 다른 세포(체세포)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직접 전달된다는 생식질 연속설을 주장했다. 이는 부모가 후천적으로 얻은 신체적 변화(획득 형질)는 생식질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자손에게 유전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스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쥐의 꼬리를 잘라도 꼬리가 없는 쥐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실험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비판은 획득 형질 유전 가설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현대 분자생물학의 중심 원리 역시 유전 정보가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로 흐른다는 단방향성을 강조하며, 환경에 의해 변화된 단백질(형질)이 DNA 정보 자체를 바꾸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생각과는 배치된다.

다만, 최근 후성유전학의 발전은 DNA 염기 서열의 변화 없이도 유전자 발현이 조절되고 이러한 변화 중 일부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메틸화와 같은 과정은 DNA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서 DNA 전사를 수정할 수 있으며, 이는 행동이나 환경 변화에 의해 유발될 수 있다. 이러한 후성유전적 변화 중 일부는 유전될 수 있기에, 환경적 요인이 유전형과 표현형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며, 라마르크주의적 과정에 대한 재해석 및 논의를 촉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후성유전적 기작 역시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화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찰스 다윈은 라마르크가 생명의 변화를 자연 법칙의 결과로 설명하려 한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20], 진화의 핵심 기작으로는 자연 선택을 제시하며 라마르크의 이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다윈 역시 진화 메커니즘의 하나로 용불용의 역할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19]

4. 라마르크주의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이후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생태학이 발달하면서, 프랑스 진화학자들 사이에서 환경 요인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이는 라마르크 이론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일부 프랑스 생물학자들은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윈의 이론을 접목하여 진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들은 두 이론이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진화라는 측면에서 양립 가능하다고 여겼다. 실제로 다윈은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설을 명시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연선택 이론을 통해 연속적 진화를 설명했다.

그러나 진화론 초기에 중요했던 자연의 연속성 개념은 19세기 후반 바이스만, 멘델, 더프리스와 같은 신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한 자연의 비연속성 개념과 충돌하게 된다. 신다윈주의자들은 진화의 전제가 되는 변이를 성의 혼합에 따른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 생명체 변이에 대한 설명은 점진적 변이와 돌발적 변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이론으로 나뉘었다. 점진적 변이를 지지한 이들은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설을 받아들여 신라마르크주의를 형성했고, 돌발적 변이를 받아들인 이들은 획득형질의 비유전설을 강조하며 신다윈주의를 형성했다. 이 두 입장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라마르크의 이론은 종종 진화 메커니즘에 국한되어 해석되면서 많은 오해를 낳았고, 생물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위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얽힌 생물학 역사의 복잡한 배경이 작용했다. 동시대 퀴비에와의 대립, 다윈주의 등장 이후 본격화된 진화 메커니즘 논쟁 속에서 라마르크의 이론이 왜곡되거나 부분적으로만 수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라마르크주의가 신라마르크주의에 흡수되면서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려 과학의 영역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외에도 라마르크 자신의 저술에 나타나는 문제점, 예를 들어 당시 물리화학 이론의 한계, 구성상의 결함, 난해하고 반복적인 문체, 모호한 형이상학적 용어 사용 등이 그의 이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라마르크는 유기적 진화를 옹호한 최초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진정으로 일관성 있는 진화 이론을 개발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는다.[8] 그는 1800년 강의에서 처음 진화론의 개요를 밝혔고, 이후 『생명체의 조직에 대한 연구』(1802), 『동물철학』(1809), 『무척추동물의 자연사』(1815-1822) 등의 저서를 통해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생물학 연구는 두 가지 주요 주제를 강조했는데, 첫째는 환경이 동물의 변화를 유발한다는 것이고(예: 두더지의 시력 상실), 둘째는 생명이 질서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 부분들이 유기적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14] 그는 진화의 원동력으로 여러 메커니즘을 제시했으며, 이를 동물을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이끄는 힘과 동물을 환경에 적응시키고 서로 다르게 만드는 힘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자 했다. 라마르크는 이러한 힘들이 기본적인 물리적 원리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으며, 생물학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을 선호했다.

5. 분류학적 업적

자연사박물관에서 곤충 등을 연구하며 무척추동물 전문가가 된 라마르크는 무척추동물 분류 체계를 명확히 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25] 당시 린네의 분류 체계에서는 무척추동물이 곤충류와 환형동물류 두 가지로만 나뉘어 있었으나, 라마르크는 이를 더욱 세분화했다. 1797년에는 5개의 강(綱)으로 나누었고, 1801년 『무척추동물의 체계』에서는 7강으로, 이후 『동물철학』(1809)에서는 10강으로 나누어 현재의 분류 체계에 상당히 근접한 틀을 마련했다. 그는 이 분류군들을 신체 구조의 복잡성이 증가하는 순서대로 배열하여 진화적인 관점을 반영하고자 했다.

1801년 출판된 『무척추동물의 체계』에서는 조르주 퀴비에격변설을 비판하기도 했다.[26] 1802년에는 처음으로 동물척추동물무척추동물로 구분했으며, 같은 해에 '생물학(biologi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25]

라마르크는 생전에 많은 수의 을 명명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나중에 이명 처리되었다. 세계 해양 생물 종 목록(World Register of Marine Species)에는 그가 명명한 기록이 1,634건 이상 있으며,[21] 인도-태평양 연체동물 데이터베이스(Indo-Pacific Molluscan Database)에는 1,781건의 기록이 있다.[22] 여기에는 대합조개과(Arcidae), 바다토끼과(Aplysiidae), 피조개과(Cardiidae) 등 잘 알려진 (科)들이 포함된다. 식물 분야에서도 국제 식물 명명 색인(International Plant Names Index)에 58건의 기록이 있으며, 물개구리밥속(''Azolla'')과 같은 (屬)도 포함되어 있다. 국제식물명명목록(International Plant Names Index)에는 라마르크의 이름을 딴 식물 종 116종에 대한 기록이 있다.[23]

그의 업적을 기려 많은 생물 분류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꿀벌의 아종인 ''Apis mellifera lamarckii''와 푸른불 해파리(''Cyaneia lamarckii'')가 대표적이다. 여러 식물에도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Amelanchier lamarckii''(서양산딸나무), ''Digitalis lamarckii'', ''Aconitum lamarckii'', 그리고 벼과 식물 속인 ''Lamarckia'' 등이 있다.

해양 생물 중에서는 103종 이상의 종 또는 속이 "''lamarcki''", "''lamarckii''" 또는 "''lamarckiana''"라는 종소명이나 속명을 가지고 있다 (이후 이명이 된 경우도 많다). 현재 유효한 이름으로 인정받는 해양 생물 분류군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21]


  • ''Acropora lamarcki'' Veron, 2002
  • ''Agaricia lamarcki'' Milne Edwards & Haime, 1851
  • ''Ascaltis lamarcki'' (Haeckel, 1870)
  • ''Bursa lamarckii'' (Deshayes, 1853), 개구리 고둥
  • ''Carinaria lamarckii'' Blainville, 1817, 작은 플랑크톤 바다 달팽이
  • ''Caligodes lamarcki'' Quidor, 1913
  • ''Cyanea lamarckii'' Péron & Lesueur 1810
  • ''Cyllene desnoyersi lamarcki'' Cernohorsky, 1975
  • ''Erosaria lamarckii'' (J. E. Gray, 1825), 카우리 조개
  • ''Genicanthus lamarck'' (Lacepède, 1802), 솔트워터 엔젤피시
  • ''Gorgonocephalus lamarckii'' (Müller & Troschel, 1842)
  • ''Gyroidinoides lamarckiana'' (d´Orbigny, 1839)
  • ''Lamarckdromia'' Guinot & Tavares, 2003
  • ''Lamarckina'' Berthelin, 1881
  • ''Lobophytum lamarcki'' Tixier-Durivault, 1956
  • ''Marginella lamarcki'' Boyer, 2004, 작은 바다 달팽이
  • ''Megerlina lamarckiana'' (Davidson, 1852)
  • ''Meretrix lamarckii'' Deshayes, 1853
  • ''Morum lamarckii'' (Deshayes, 1844), 작은 바다 달팽이
  • ''Mycetophyllia lamarckiana'' Milne Edwards & Haime, 1848
  • ''Neotrigonia lamarckii'' (Gray, 1838)
  • ''Olencira lamarckii'' Leach, 1818
  • ''Oenothera lamarckiana''
  • ''Petrolisthes lamarckii'' (Leach, 1820)
  • ''Pomatoceros lamarckii'' (Quatrefages, 1866)
  • ''Quinqueloculina lamarckiana'' d´Orbigny, 1839
  • ''Raninoides lamarcki'' A. Milne-Edwards & Bouvier, 1923
  • ''Rhizophora x lamarckii'' Montr.
  • ''Siphonina lamarckana'' Cushman, 1927
  • ''Solen lamarckii'' Chenu, 1843
  • ''Spondylus lamarckii'' Chenu, 1845, 가시 조개
  • ''Xanthias lamarckii'' (H. Milne Edwards, 1834)

6. 영향 및 평가

레옹 파헬이 제작한 라마르크 동상, 파리 식물원


라마르크는 주로 그의 진화론적 견해, 특히 획득 형질 유전과 용불용설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론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 등장 이후 주류 생물학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출판 이후 오히려 더 주목받기도 했는데, 다윈의 새로운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미 존재하던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대안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라마르크는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지던 획득 형질 유전 이론과 유기체가 특정 형질을 발달시키거나 퇴화시키는 '사용과 폐용' 모델을 자신의 진화 이론에 통합했다. 그러나 획득 형질 유전(적응 이론 또는 연성 유전)은 1880년대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에 의해 강력하게 반박되었다. 바이스만은 생식질(생식 세포)이 신체의 나머지 부분(체세포)과 분리되어 있어 체세포에서 일어난 변화는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없다는 생식질 연속설을 주장했다. 이 모델은 현대 유전학의 기초가 되었다. 바이스만은 의 꼬리를 여러 세대에 걸쳐 잘라도 자손의 꼬리가 짧아지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마르크 자신은 상처나 절단과 같은 외적인 변화를 진정한 획득 형질로 보지 않았고, 생물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아서 생긴 변화만이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라마르크를 진화론의 선구자로 인정하며, 그가 "생물의 세계에서도 모든 것이 기적적인 개입이 아닌 법칙의 결과일 가능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뛰어난 공로"가 있다고 평가했다.[20] 다윈 자신도 자연선택에 부수적인 메커니즘으로서 용불용설의 역할을 일부 인정했으며, 특히 기관의 '폐용'에 의한 퇴화를 설명할 때 이를 언급했다.[19]

반면, 당대의 저명한 고생물학퀴비에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강하게 비판하며 종의 불변성을 옹호했다. 보울러에 따르면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변형 이론을 조롱하고 종의 고정성을 옹호했다."[15] 라마르크 사후 퀴비에는 공식적인 찬사를 통해 라마르크를 비판했는데,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를 "가장 비관적이고 냉혹하게 당파적인 전기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7]

비록 라마르크의 핵심 이론인 획득 형질 유전은 현대 유전학의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는 유기체 진화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굴드는 라마르크가 제시한 아이디어와 이론 구성 방식이 이후 진화 생물학 사고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를 "주요 진화 이론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최근 후성유전학의 발달은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라마르크주의적 관점의 가능성을 다시금 논의하게 만들었다. 후성유전학은 DNA 서열 자체의 변화 없이 유전자 발현이 조절되고 이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데, 이는 환경이나 개체의 경험이 유전형질 발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후성유전적 변화가 라마르크가 생각했던 방식의 진화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그 메커니즘과 진화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와 논쟁이 진행 중이다. 또한, 인간의 문화적 진화나 의 전달 방식은 학습과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된 정보가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라마르크식 유전 방식과 유사하다고 비유되기도 한다.

6. 1. 류센코주의와의 관계

라마르크의 이론은 후대에 진화 메커니즘에 관련된 논의에 한정되어 이해되면서 많은 오해를 낳았고, 생물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위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는 동시대 퀴비에와의 대립뿐만 아니라, 다윈주의의 등장 이후 본격화된 진화 메커니즘 논쟁 속에서 라마르크의 이론이 왜곡되거나 부분적으로만 수용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마르크주의는 신라마르크주의와 결부되는 과정에서 권력 및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라마르크의 이론은 순수한 과학적 논의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적·이념적 맥락에서 이용되거나 비판받았으며, 이는 과학사에서 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라마르크의 이론 자체가 지닌 몇 가지 문제점(예: 당시 물리화학 이론의 한계, 난해한 문체, 형이상학적 용어 사용 등)도 이러한 오해와 왜곡을 심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7. 주요 저서


  • 1778년: Flore françoise, ou, Description succincte de toutes les plantes qui croissent naturellement en France|프랑스 식물상, 또는 프랑스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모든 식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fra 1판. (한국어 제목: 《프랑스식물지》)
  • 1783년–1808년: Encyclopédie méthodique. Botanique|방법론적 백과사전. 식물학fra. 방법론적 백과사전의 일부로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 1791년, 1793년, 1800년: L'Illustration des genres|속의 삽화fra 1권, 2권, 3권. (1823년 푸아레(Poiret)가 보충판을 냈다.)
  • 1795년: Flore françoise...|프랑스 식물상...fra 2판. (1805년 3판은 드 칸돌이 편집했다.)
  • 1795년: Recherches sur les causes des principaux faits physiques|주요 물리적 사실의 원인에 대한 연구fra 1권. 밀라노에서 출판되었다.
  • 1801년: Système des animaux sans vertèbres, ou tableau général des classes, des ordres et des genres de ces animaux; présentant leurs caractères essentiels et leur distribution, d'après la considération de leurs...|무척추동물의 계통, 또는 이들 동물의 강, 목, 속의 일반적인 표;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과 그들의 고려에 따른 분포...fra. (한국어 제목: 《무척추동물의 체계》)
  • 1809년: Philosophie zoologique, ou Exposition des considérations relatives à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라마르크의 진화론적 견해가 가장 포괄적으로 담긴 저서로 평가받는다.

한국어 번역:** 이정희 역, 지만지, ISBN 978-89-6228-259-7
영어 번역:** 1914년 Hugh S. R. Elliot이 서문과 주석을 달아 번역했다. ([https://archive.org/details/ZoologicalPhilosophy/page/n3/mode/2up Zoological Philosophy])

  • 1810년–1817년: Encyclopédie méthodique. Botanique|방법론적 백과사전. 식물학fra 보충판.
  • 1815년–1822년: 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sans vertèbres, présentant les caractères généraux et particuliers de ces animaux...|무척추동물의 자연사; 이들 동물의 일반적이고 특수한 특징을 제시하는...fra. 총 7권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어 제목: 《무척추동물지》)
  • * 1권 (1815년)
  • * 2권 (1816년)
  • * 3권 (1816년)
  • * 4권 (1817년)
  • * 5권 (1818년)
  • * 6권 1부 (1819년), 2부 (1822년)
  • * 7권 (1822년)

참조

[1] 서적 Lamarck http://dictionary.re[...]
[2] 웹사이트 Jean-Baptiste Lamarck {{!}} Biography, Theory of Evolution & Facts https://www.britanni[...] 2021-04-02
[3] 논문 Damkaer (2002)
[4] 논문 Packard (1901)
[5] 웹사이트 Jean-Baptiste Lamarck (1744-1829) https://ucmp.berkele[...] 2023-10-01
[6] 논문 Coleman (1977)
[7] 논문 Jurmain et al. (2011)
[8] 논문 Gould (2002)
[9] 논문 Mantoy (1968)
[10] 논문 Packard (1901)
[11] 논문 Damkaer (2002)
[12] 논문 Szyfman (1982)
[13] 논문 Osborn (1905)
[14] 논문 Osborn (1905)
[15] 논문 Bowler (2003)
[16] 논문 Rudwick (1998)
[17] 논문 Gould (1993) Foreword
[18] 논문 Gould (2002)
[19] 논문 Mayr (1964)
[20] 서적 Darwin (1861–82), 3rd edition, "Historical sketch"
[21] 웹사이트 WoRMS: species named by Lamarck http://www.marinespe[...] 2010-11-17
[22] 웹사이트 Indo-Pacific Molluscan Species Database http://clade.ansp.or[...] 2019-08-22
[23] 웹사이트 International Plant Names Index https://www.ipni.org[...] 2019-08-22
[24]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1-13
[25] 서적 ダーウィン 創元社 2001
[26] 서적 ダーウィン 創元社 2001
[27] 웹사이트 ルイセンコ論争
[28] 서적 The Perversion Of Knowledge: The True Story Of Soviet Science https://books.google[...] Perseus Books Group 2024-04-24
[29] 서적 ユートピア政治の終焉―グローバル・デモクラシーという神話 岩波書店 2011
[30] 서적 主体性の進化論 中央公論社 1980-07
[3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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