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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아스파라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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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롬멜의 아스파라거스(Rommel's asparagus, 롬멜슈파르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연합군의 공수 작전에 대비하여 설치한 방어 시설이다. 에르빈 롬멜은 프랑스 주둔 당시 수백만 개의 나무 기둥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글라이더나 낙하산 부대의 착륙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드래군 작전 등에서 연합군의 공수 작전에 피해를 입혔으며, 해변에 설치된 장애물과 유사하여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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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아스파라거스
명칭
독일어Rommelspargel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설명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설치한 공중 착륙 장애물
특징
재료통나무
강철 기둥
크기13 ~ 16 피트 (4 ~ 4.9 미터)
설치 방법지면에 수직으로 박고, 전선으로 연결하거나 지뢰를 부착함
목적글라이더 또는 낙하산을 이용한 공수부대의 착륙을 방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킴
역사
사용 시기제2차 세계 대전
사용 주체독일군
주요 사용 지역프랑스, 네덜란드
영향연합군의 공수 작전에 어려움을 초래함
피해많은 사상자 발생
관련 인물에르빈 롬멜
기타
참고 자료Hymoff, Edward (1972). The OSS in World War II. New York: Ballantine Books. ISBN 978-0-345-02882-2.
Whitlock, Flint (2004). The fighting first: the untold story of the Big Red One on D-day. Boulder, Col.: Westview Press. ISBN 978-0-8133-4218-4.

2. 디자인과 설계

연합군 공수부대글라이더 착륙을 방해하고 착륙 시 피해를 주기 위해 설계된 이 장애물은 독일어로 '루프트란데힌데르니스'(Luftlandehindernisde)라고 불렸다.[4][27]

장애물의 주요 설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 글라이더가 착륙할 가능성이 있는 내륙의 들판이나 초원에 지름 15cm에서 30cm 정도 되는 나무 기둥을 땅에 박아, 기둥의 약 2m에서 4m가 지면 위로 돌출되도록 설치하는 것이었다.[5][26] 설치 밀도는 1km2당 약 1,000개였으며, 이 기둥들은 주로 나무줄기나 매우 두꺼운 나뭇가지로 만들어졌다.[5][26] 일부 지역에서는 나무 기둥 대신 선로에서 가져온 강철 레일을 사용하기도 했다.[12][28]

기둥의 꼭대기는 가시철사나 트립와이어(인계철선)로 서로 연결되었으며,[1][22]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세 번째 기둥마다 그 위에 지뢰수류탄 같은 폭발물을 설치했다.[5][26]

2. 1. 롬멜의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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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에르빈 롬멜은 점령된 프랑스에서 독일 B 집단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영국과 마주한 프랑스 해안의 대서양 방벽 방어 임무도 맡았다. 롬멜은 요새 시설을 시찰하면서 방어 체계를 신속히 개선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연합군의 공수부대 침투에 대비하기 위해 수백만 개의 나무 기둥과 통나무를 이용한 장애물 설치를 명령했다.[5][26] 이 장애물은 나무 말뚝 사이에 가시철사나 트립와이어(인계철선)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구상되었으며,[1][22] 롬멜이 부하들에게 전달한 계획에서는 이 방어 시스템 전체를 '루프트란데힌데르니스'(Luftlandehindernisde)라고 불렀다.[4][27]

롬멜은 적 글라이더가 착륙할 가능성이 있는 내륙의 들판이나 초원에 지름 15cm에서 30cm 정도 되는 나무 기둥을 땅에 박아, 기둥의 약 2m에서 4m가 지면 위로 돌출되도록 지시했다. 1km2당 약 1,000개의 기둥을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 기둥들은 주로 나무줄기나 매우 두꺼운 나뭇가지로 만들어졌다. 기둥 꼭대기에는 인계철선을 연결했고, 세 번째 기둥마다 그 위에 지뢰수류탄을 설치하여 파괴력을 높였다.[5][26] 일부 지역에서는 나무 기둥 대신 선로의 강철 레일을 사용하기도 했다.[12][28]

그러나 이러한 나무 기둥 설치만이 롬멜이 공수부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유일한 전술은 아니었다. 그는 글라이더 부대나 낙하산 부대가 착륙 시 물에 빠져 익사하도록 일부 들판을 의도적으로 침수시키기도 했다. 또한, 보카주(크고 빽빽한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들판의 출구를 기관총 진지로 엄호하도록 지시하여, 착륙 지점에서 벗어나려는 적 보병들이 집중 사격을 받도록 만들었다.[6][29] 실제로 이러한 보카주 지형은 글라이더 부대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데 있어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보다 더 큰 위협이 되었으며,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기도 했다.[9][30]

롬멜은 1944년 4월 방어 시설을 시찰한 후, "대공수 장애물 건설이 많은 사단에서 크게 진전되었다"고 보고했다.[7][31] 그는 한 예로 특정 사단에서만 거의 30만 개의 기둥을 세웠으며, 한 군단은 90만 개 이상을 설치했다고 언급했다.[8][32] 그러면서도 "말뚝을 세우는 것만으로 장애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말뚝은 철사로 연결하고 포탄과 지뢰를 부착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장애물의 완전한 구축을 독려했다.[8][33]

2. 2. 롬멜의 시찰

에르빈 롬멜은 1944년 4월, 자신이 구상한 공중 강습 장애물 설치 현황을 시찰했다.[7] 시찰 후 롬멜은 "대공수 장애물 건설이 많은 사단에서 크게 진전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는 한 예로 특정 사단에서는 거의 30만 개의 말뚝을 세웠으며, 한 군단에서는 90만 개 이상을 설치했다고 언급했다.[8]

그러나 롬멜은 단순히 말뚝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말뚝만 세운다고 장애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뚝은 철사로 연결하고 포탄지뢰를 부착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장애물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또한 "이러한 지뢰 부착물 아래에서 묶인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여, 장애물 설치가 목축 활동에 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8]

3. 실전 역사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는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이 연합군의 공수부대글라이더 착륙을 저지하기 위해 고안하고 설치한 방어 시설이다. 주로 나무 기둥이나 철제 말뚝을 약 22.86m에서 약 30.48m 사이 간격으로 들판이나 개활지에 촘촘히 박아, 연합군 글라이더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것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12] 때로는 기둥 꼭대기에 철조망을 연결하거나 지뢰를 설치하여 파괴력을 높이기도 했다.

이 방어 시설은 특히 1944년 연합군의 대규모 유럽 침공이 임박하면서 프랑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에르빈 롬멜 원수가 노르망디 지역 방어 책임을 맡은 후 강력하게 추진하여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독일군은 이 장애물이 연합군 공수 부대의 기습적인 강하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 남프랑스에서 진행된 드래군 작전 등에서 연합군 공수 부대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일부 글라이더는 착륙 과정에서 이 기둥들과 충돌하여 파괴되었고, 탑승 병력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12][18] 그러나 연합군은 항공 정찰 등을 통해 사전에 이 장애물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착륙 지점을 신중하게 선정하거나[11] 지상 병력이 신속하게 제거하는[13] 등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는 연합군의 공수 작전에 일정 부분 피해를 주었지만, 작전 전체의 성공을 막지는 못했다.

3. 1.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4년 2월부터 연합군 정찰을 통해 착륙장에 약 22.86m에서 약 30.48m 간격으로 설치된 "롬멜의 아스파라거스"가 증가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12] 유럽 침공 시 공중 작전을 책임진 연합 원정 공군(Allied Expeditionary Air Force) 사령관 트래퍼드 레이-말러리(Trafford Leigh-Mallory)는 이 위협을 분석한 결과, 글라이더 부대가 주로 나무 기둥 때문에 최대 70%의 사상자를 낼 수 있다고 예측했다.[9] 1944년 5월 30일, 레이-말러리는 아이젠하워를 만나 두 개의 미국 공수 사단이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지대에 강하하여 "헛된 학살"을 당할 것을 우려하며 서부 지역 강하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 그는 영국군의 강하 지역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공수 부대 지휘관들과 상의한 후, 레이-말러리의 판단이 틀렸다고 결론 내리고 건의를 기각했다.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유타 해변 공격 계획 자체를 취소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10]

하지만 연합군 지도부는 독일군이 공수 부대의 착륙 지점을 해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침공 계획은 "롬멜의 아스파라거스"가 상대적으로 적게 설치된 해변 근처 지역에 대부분의 강하 병력을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11]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일, "롬멜의 아스파라거스"와 직접적으로 충돌한 것은 주로 영국 공수 부대였다. 토가 작전(Operation Tonga) 중 노르망디에 강하한 영국 공수 부대의 에어스피드 호르사(Airspeed Horsa) 글라이더 중 일부가 나무 기둥 사이에 착륙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부 글라이더는 미군 낙하산병도 강하했던 생트메르에글리세(Sainte-Mère-Église) 근처에서 파괴되기도 했다.[12] 영국군은 발견하는 대로 "롬멜의 아스파라거스"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증원 부대를 위한 착륙 지점을 확보했다.[13]

1944년 6월 6일 이후, 노르망디 미국 공수 착륙의 대부분은 "롬멜의 아스파라거스"가 촘촘하게 설치되지 않은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부 부대는 이 방어 시설과 심하게 충돌했다. 제82 공수 사단(82nd Airborne Division) 소속 티토 모루자(Tito Moruza)는 D-Day에 민간인 복장으로 파리로 침투하여 게슈타포(Gestapo) 문서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글라이더로 착륙했는데, 그의 글라이더가 나무 기둥 방어 시설에 부딪히면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 명의 병사가 즉사했다.[14] 글라이더 보병 증원 과정에서도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약 16대에서 18대의 글라이더가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밭에 착륙했고, 파괴된 글라이더에서 탈출한 병사들은 즉시 독일군의 소화기 사격에 노출되었다. 이 착륙에서 250명의 병사 중 50명에서 60명만이 살아남았다.[15]

연합군이 지상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일부 독일 부대는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기둥을 잘라내어 급조된 방어 진지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12th SS Panzer Division Hitlerjugend) 소속 슈름만(Sturmmann) 칼 바솔트(Karl Vasold)는 자신의 부대가 부론(Buron)에서 빌롱레뷔송(Villons-les-Buissons)으로 가는 길목의 참호에서 격렬한 포격 속에서 전투를 벌일 때, 잘라낸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기둥을 이용해 참호를 덮어 적의 사격으로부터 엄폐했다고 증언했다.[16]

3. 2. 남프랑스

1944년 6월 29일, 독일 보병 대장 프리드리히 비제는 연합군의 침공이 예상되던 비시 프랑스 남부, 프랑스 리비에라 지역의 방어 지휘를 맡게 되었다. 비제는 니스에서 마르세유에 이르는 넓은 포도밭과 들판에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설치를 지시했다.[17]

같은 해 8월 15일, 연합군은 드래군 작전을 개시하며 로버트 T. 프레데릭 장군이 지휘하는 다국적 부대인 제1공수임무부대를 투입했다. 이 부대에 속한 미국 제551공수보병대대는 해안에서 약 약 41.84km 떨어진 드라기냥 지역에 공수 및 글라이더 강하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글라이더가 '롬멜의 아스파라거스'에 부딪혀 파괴되었으나, 실제로는 나무와 같은 다른 자연 장애물이나 착륙 중 다른 글라이더와의 충돌로 인해 더 큰 피해가 발생했다. 제551대대의 장교였던 "패피" 헤르만 소령은 나무 말뚝이 글라이더에 가한 손상을 목격하고 "나는 낙하산을 고수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8]

제1공수임무부대 전체에서 '롬멜의 아스파라거스'와 같은 나무 말뚝 장애물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는 총 약 300명으로 집계되었다.[19]

4. 대서양 방벽 방어

에르빈 롬멜대서양 방벽의 방어를 맡기 전부터 벨기에프랑스 해변에는 상륙 작전에 대비한 장애물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1944년 2월 3일, 뇌프샤텔-아르들로 해변을 방문한 롬멜은 지역 군대가 고압 물 호스를 사용하여 해변 모래에 신속하게 구멍을 내는 방법을 확인했다. 이 방법은 상륙정에 대한 장애물로 높은 나무 말뚝(Hochpfähle|호흐펠레deu)을 해변에 설치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기존의 말뚝 박는 기계를 사용하는 것보다 15배나 빨랐다.[20] 롬멜은 이 방법을 활용하여 노르망디 해변을 따라 나무 빔, 금속 레일 및 기타 장애물을 설치하도록 명령했으며, 연합군이 상륙하게 될 노르망디 남부 해안에는 약 11,000개의 장애물이 설치되었다.[20]

1943년, 병사들이 유압을 사용하여 해변 모래에 높은 나무 기둥()을 설치하고 있다.


롬멜이 1944년 4월 장애물 빔() 설치를 검사하고 있다.


그러나 1944년 2월 중순에 실시된 테스트 결과, 포획된 영국 상륙정을 이용한 실험에서 초기의 나무 말뚝(Hochpfähle|호흐펠레deu)은 상륙정을 막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20] 이에 따라, 각도를 이루고 다른 두꺼운 빔으로 보강된 더 강력한 장애물인 Hemmbalken|헴발켄deu("장애물 빔")이 고안되었다. 이 새로운 장애물에는 대부분 텔러 지뢰가 부착되어 파괴력을 높였다.[20] 기존에 설치된 수직 말뚝(Hochpfähle|호흐펠레deu)들도 일부는 그대로 남겨졌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지뢰가 부착되기도 했다. 해변에 설치된 이 Hochpfähle|호흐펠레deu는 내륙의 공중 강습 방지용 말뚝과 외형이 유사하여 때때로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또는 Rommelspargel|롬멜슈파르겔deu이라고 불리기도 했다.[21]

미 해군 사령관 에드워드 엘스버그는 이러한 대서양 방벽의 장애물에 대해 "롬멜은 우리의 계획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만조 때 공격했다면, 우리는 저 장애물을 넘어 충분한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 하지만 연합군은 이러한 장애물의 효과를 감소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간조 때 상륙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병력들이 건너야 할 해변의 길이는 늘어났지만,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을 장애물들이 드러나게 되어 무력화시키기 용이해졌다.

참조

[1] 서적 The OSS in World War II https://archive.org/[...] Ballantine Books 1972
[2] 영상 Surviving a WW2 minefield was a tough ask https://www.youtube.[...] Little Dot Studios Network 2023-10-21
[3] 서적 The fighting first: the untold story of the Big Red One on D-day Westview Press 2004
[4] 웹사이트 Bild 101I-719-0240-35 (diagram of ''Luftlandehindernis'', or airborne obstructions.) http://www.bild.bund[...] Das Bundesarchiv, Picture database 1944-04-18
[5] 웹사이트 Tour the Battlefields of Normandy http://www.strijdbew[...] 2009-11-28
[6] 문서 1995
[7] 문서 1979
[8] 문서 1995
[9] 서적 D-Day, June 6, 1944: the climactic battle of World War II Touchstone 1995
[10] 서적 D-Day 1944: The Making of Victory The History Press 2019
[11] 서적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11: The invasion of France and Germany: 1944 - 1945 Univ. of Illinois Press 2002
[12] 문서 1995
[13] 문서 1979
[14] 뉴스 Happy Day http://martinsnapp.b[...] Bay Area News Group 2009-08-16
[15] 서적 The inheritance: how three families and the American political majority moved from left to right Simon & Schuster 1998
[16] 서적 The 12th SS: the history of the Hitler Youth Panzer Division Stackpole Books 2005
[17] 문서 2010
[18] 문서 2010
[19] 서적 Retreat to the Reich: The German Defeat in France, 1944 https://books.google[...] Stackpole Books 2007
[20] 문서 2005
[21] 웹사이트 Rommel's asparagus http://www.corbisima[...] Corbis images 2009-12-29
[22] 문서 1986
[23] 문서 1994
[24] 문서 2004
[25] 문서 2004
[26] 웹인용 TOUR THE BATTLEFIELDS OF NORMANDY: The Obstacles. http://www.strijdbew[...] 2009-11-28
[27] 웹인용 Bild 101I-719-0240-35 (diagram of ''Luftlandehindernis'', or airborne obstructions.) http://www.bild.bund[...] Das Bundesarchiv, Picture database 1944-04-18
[28] 문서 1995
[29] 문서 1995
[30] 문서 1994
[31] 문서 1979
[32] 문서 1995
[33] 문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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