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밴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르네상스는 1969년 결성된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이다. 야드버즈의 멤버였던 키스 렐프와 짐 매카티가 결성했으며, 포크 록에 클래식 음악을 결합한 독특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1970년대에는 애니 해슬람의 보컬을 중심으로 마이클 던포드의 작곡, 베티 대처의 작사가 더해져 전성기를 맞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신시사이저를 도입하며 음악적 변화를 시도했으나, 1980년대 중반 해체되었다. 1998년 재결성 이후 여러 차례 멤버 교체를 거쳐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2024년에는 오리지널 멤버 존 호켄이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98년 재결성된 음악 그룹 - 컬처 클럽
컬처 클럽은 1980년대 뉴 로맨틱과 뉴 웨이브 음악을 선도하며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와 "Karma Chameleon" 등의 히트곡을 낸 영국의 팝 그룹으로, 보이 조지의 독특한 보컬과 다양한 음악적 장르의 조합이 특징이다. - 1998년 재결성된 음악 그룹 - 모던 토킹
1983년 서베를린에서 결성된 독일 유로 디스코 듀오 모던 토킹은 디터 볼렌의 작곡 및 프로듀싱, 토마스 안데르스의 보컬로 "You're My Heart, You're My Soul"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해체와 재결합을 거쳐 전 세계적으로 1억 2천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다. - 1987년 해체된 음악 그룹 - 허스커 두
허스커 두는 1979년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결성되어 하드코어 펑크 기반에 멜로디를 강조한 음악으로 1980년대 미국 인디 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멤버 간 갈등과 매니저의 죽음으로 1987년 해체된 밥 몰드, 그랜트 하트, 그렉 노턴으로 구성된 미국의 록 밴드이다. - 1987년 해체된 음악 그룹 - 베이 시티 롤러스
베이 시티 롤러스는 1965년 결성된 스코틀랜드 록 밴드로, 1970년대 중반 롤러마니아 팬덤을 형성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여러 멤버 교체와 재결성을 거쳐 2023년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프로그레시브 팝 음악가 - XTC
XTC는 1972년 영국 스윈던에서 결성되어 글램 록으로 시작, 펑크와 뉴 웨이브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후대 밴드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멤버 건강 문제와 갈등으로 스튜디오 밴드로 전환 후 2005년 사실상 해체된 록 밴드이다. - 프로그레시브 팝 음악가 - 버글스
버글스는 트레버 혼과 제프 다운스가 결성한 영국의 뉴 웨이브 듀오로,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의 세계적인 성공과 실험적인 음악, 기술과 예술의 융합으로 평가받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르네상스 (밴드)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신지 | 런던, 영국 |
장르 | 프로그레시브 록 |
활동 기간 | 1969년–1987년 1998년–2002년 2009년–현재 |
레이블 | 아일랜드 레코드 사이렌 레코드 (미국) 워너 브라더스 엘렉트라 레코드 (미국) BTM 레코드 I.R.S. 레코드 Giant Electric Pea Illegal Records Repertoire Records HTD 레코드 Friday Music |
관련 활동 | 야드버즈 네바다 일루전 아이 앤드 다우 르네상스상 |
공식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현재 멤버 | 애니 해슬램 레이브 테사 마크 램버트 프랭크 파가노 레오 트라베르사 제프리 랭글리 |
이전 멤버 | |
이전 멤버 | 참고 |
2. 초기 르네상스 (1969년 ~ 1971년)
야드버즈의 창립 멤버였던 키스 렐프와 짐 맥카티는 1968년 어쿠스틱 록 듀오 "투게더"를 결성했다.[3] 1969년 1월, 이들은 록, 포크, 클래식 형식을 실험하는 새로운 그룹을 조직했다. 루이스 세나모(베이스), 존 호켄(피아노), 제인 렐프(렐프의 여동생, 보컬)를 영입하여 5인조 밴드를 구성하고, 일렉트라 레코드(미국)와 아일랜드 레코드(영국)를 통해 앨범을 발매했다. 첫 앨범 ''르네상스''(1969)는 야드버즈 출신 폴 샘웰-스미스가 프로듀싱했다.[5]
밴드는 1969년 5월부터 공연을 시작,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지만 벨기에와 프랑스 등 해외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1970년 2월 북미 투어를 시작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늦봄, 투어로 인한 피로가 쌓이면서 밴드는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키스 렐프와 짐 맥카티는 공연 활동 중단을 결정했고, 루이스 세나모는 콜로세움에 합류했다.[1] 존 호켄은 밴드의 두 번째 앨범 ''일루전''(1971)을 완성하기 위해 새로운 라인업을 구성했다.
1970년, 르네상스는 신작 앨범 제작에 착수하여 몇 곡을 녹음했지만, 점차 분열되기 시작하여 결국 렐프와 매카티는 하차했다. 그러나 앨범 계약 이행을 위해 두 사람은 계속 프로듀싱과 작곡에 관여했으며, 호켄은 전 내슈빌 틴스의 마이클 덤포드 (기타) 등을 영입하여 제작을 계속했다.[1] 이듬해 1971년, 렐프의 프로듀스 하에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2집 앨범 『환상의 르네상스』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베티 대처와의 오랜 협업의 시작을 알렸다.
제인 렐프는 앤-마리 "빙키" 컬럼으로 대체되었고, 존 하우켄이 스푸키 투스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면서, 피아니스트 존 투가 그를 대신했다.[1] 1971년 1월, 애니 해슬람이 합류하면서 밴드의 새로운 라인업이 구성되었다.
2. 1. 결성 배경
야드버즈(The Yardbirds)가 1968년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뉴 야드버즈를 거쳐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으로 변화하는 동안, 야드버즈의 창립 멤버였던 키스 렐프(Keith Relf)와 짐 맥카티(Jim McCarty)는 "투게더"(Together)라는 어쿠스틱 록(Acoustic rock) 듀오를 결성했다.[3]1969년 1월, 렐프와 맥카티는 록, 포크, 클래식 형식을 실험하는 새로운 그룹을 조직했다. 이 그룹은 렐프(기타, 보컬), 맥카티(드럼, 보컬), 루이스 세나모(Louis Cennamo, 베이스), 존 호켄(John Hawken, 피아노), 제인 렐프(Jane Relf, 렐프의 여동생, 보컬)의 5인조로 구성되었다.[1] 이들은 일렉트라 레코드(Elektra Records)와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를 통해 앨범을 발매했다.[5]
2. 2. 1969년 르네상스 결성
야드버즈(The Yardbirds)가 1968년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뉴 야드버즈를 거쳐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으로 변모하는 동안, 야드버즈의 창립 멤버였던 키스 렐프(Keith Relf)와 짐 맥카티(Jim McCarty)는 "Together"라는 어쿠스틱 록(Acoustic rock) 듀오를 결성했다.[3]1969년 1월, 렐프와 맥카티는 록, 포크, 클래식 형식을 실험하는 데 전념하는 새로운 그룹을 조직했다. 이들은 루이스 세나모(Louis Cennamo)(베이스), 존 호켄(John Hawken)(피아노), 제인 렐프(Jane Relf, 렐프의 여동생)(보컬)를 영입하여 5인조 밴드를 구성했다.[5] 이 밴드는 일렉트라 레코드(Elektra Records)와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를 통해 두 개의 앨범을 발매했으며, 첫 번째 앨범인 ''르네상스(Renaissance)'' (1969)는 야드버즈 출신 폴 샘웰-스미스(Paul Samwell-Smith)가 프로듀싱을 맡았다.[5]
2. 3. 데뷔와 초기 활동
야드버즈(The Yardbirds)가 1968년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뉴 야드버즈를 거쳐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으로 변모하는 동안, 야드버즈의 창립 멤버였던 키스 렐프(Keith Relf)와 짐 맥카티(Jim McCarty)는 "Together"라는 어쿠스틱 록(Acoustic rock) 듀오를 결성했다.[3] 1969년 1월, 렐프와 맥카티는 록, 포크, 클래식 형식을 실험하는 새로운 그룹을 조직하면서, 베이시스트 루이스 세나모(Louis Cennamo), 피아니스트 존 호켄(John Hawken), 그리고 렐프의 여동생인 제인 렐프(Jane Relf)를 추가 보컬리스트로 영입하여 5인조 밴드를 구성했다.[1]이들은 일렉트라 레코드(Elektra Records, 미국)와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 영국)를 통해 두 개의 앨범을 발매했으며, 첫 번째 앨범인 ''르네상스(Renaissance)'' (1969)는 야드버즈 출신인 폴 샘웰-스미스(Paul Samwell-Smith)가 프로듀싱을 맡았다.[5]
밴드는 1969년 5월부터 공연을 시작하여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지만, 벨기에(Belgium)와 프랑스(France) 등 해외 페스티벌에도 종종 참여했다. 1970년 2월에는 북미 투어를 시작했으나, 한 달간의 투어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늦봄부터 투어로 인한 피로가 쌓이면서, 오리지널 밴드는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키스 렐프와 맥카티는 공연 활동 중단을 결정했고, 세나모는 콜로세움(Colosseum)에 합류했다.[1] 호켄은 밴드의 두 번째 앨범인 ''일루전(Illusion)'' (1971)을 완성하기 위해 새로운 라인업을 구성했다.
2. 4. 키스 렐프와 짐 매카티의 탈퇴
1970년 신작 앨범 제작에 착수하여 몇 곡을 녹음했지만, 점차 분열되기 시작하여 결국 키스 렐프와 짐 매카티는 하차했다.[38] 그러나 앨범 계약 이행을 위해 두 사람은 계속 프로듀싱과 작곡에 관여했으며, 존 하우켄과 마찬가지로 전 내슈빌 틴스의 마이클 던포드 (기타) 등을 영입하여 제작을 계속했다. 1971년 렐프의 프로듀스 하에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2집 앨범 『환상의 르네상스』를 발표했다.렐프와 매카티가 결성한 르네상스는 1971년 이후 던포드가 주도한 르네상스와 구별하기 위해 "'''오리지널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38] 그 음악은 후에 전 멤버가 "또 하나의 르네상스"로서 결성한 "일루전"에 계승되었다. 이 밴드명은 『환상의 르네상스』의 원제이다.
2. 5. 2집 《환상의 르네상스》 발표
1970년, 르네상스는 신작 앨범 제작에 착수하여 몇 곡을 녹음했지만, 점차 분열되기 시작하여 결국 레르프와 매카티는 하차했다. 그러나 앨범 계약 이행을 위해 두 사람은 계속 프로듀싱과 작곡에 관여했으며, 멤버는 호우켄과 마찬가지로 전 내슈빌 틴스의 마이클 덤포드 (기타) 등을 영입하여 제작을 계속했다.[1] 이듬해 1971년, 레르프의 프로듀스 하에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2집 앨범 『환상의 르네상스』를 발표했다.[38]이 앨범은 시인 베티 대처-뉴스징어와의 르네상스의 오랜 협업의 시작을 알렸다.[1]
3. 신생 르네상스 (1971년 ~ 1987년)
마일스 코플랜드 3세는 1971년 르네상스의 매니저가 되면서, 애니 하슬람의 목소리와 존 토트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밴드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윌 로마노는 "르네상스는 피아노와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설명했다.[1] 테리 크로우와 코너가 탈퇴하고 존 웨튼, 프랭크 파렐, 대니 맥컬로치 등 여러 베이시스트를 거쳐 존 캠프가 합류했다. 던포드는 작곡에 집중하고, 믹 파슨스가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1972년, 진저 딕슨을 대신하여 테렌스 설리번이 드러머로 합류했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파슨스를 대신하여 로브 헨드리가 기타를 맡았다.[7]
1972년 후반, 새 밴드의 데뷔 앨범 ''서곡''이 발매되었다. 던포드가 대부분의 곡을 작곡하고, 베티 대처-뉴스징거가 가사를 썼다. "Spare Some Love"는 미국 북동부와 클리블랜드의 록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주 방송되었고, 예스와 에머슨, 레이크 & 파머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2]
헨드리가 탈퇴하고 ''서곡'' 투어에서 피터 핀버그로 교체되었지만, 핀버그는 다른 밴드 활동으로 인해 영구적인 멤버가 될 수 없었다.[7] 캠프는 다음 앨범 ''Ashes are Burning''에서 대부분의 기타를 연주했다. 위시본 애시의 앤디 파웰이 "Ashes are Burning"에서 일렉트릭 기타 솔로를 연주했다.[7] 이 곡은 밴드의 대표곡이 되었고, 라이브 공연에서 20분 이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71위에 올랐다.[8] 앨범 발매 직후, 마이클 던포드가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복귀하여 5인조 라인업을 완성했으며, 이들은 5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 했다.
1979년까지 밴드는 미국 시장에 집중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환상의 르네상스』(1972) 이후 던포드가 주도권을 잡았고, 1972년경 애니 하슬람(보컬), 존 캠프(베이스), 존 토트(키보드), 테렌스 설리번(드럼)의 새로운 라인업으로 쇄신되었다. 새로운 '''르네상스'''는 오리지널 르네상스와는 사뭇 다른 밴드로 재탄생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1971년 이후의 밴드를 가리킨다.)
던포드는 주도권을 잡으면서도 정식 멤버로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지원했다. 베티 서처는 계속해서 작사를 제공하며 6번째 멤버로 불렸다. 이 라인업으로 3집 앨범 『프롤로그』(1972년), 4집 앨범 『타는 재』(1973년)을 발매했다.
이후, 신흥 레이블 "BTM"으로 이적한 후, 5집 『운명의 카드』(1974년)부터 던포드가 정식 멤버로 참여했다. 이 라인업으로 6집 앨범 『세헤라자데 야화』(1975년),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에서 7집 앨범 『옛날 이야기』(1977년), 8집 앨범 『사계』(1978년) 등의 작품을 남겼다. 『사계』에서 싱글 컷된 북쪽의 빛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최고 10위를 기록했다.[39]
그러나 1979년 9집 앨범 『벽의 환상』 발표 후, 테렌스 설리번과 존 토트가 탈퇴하고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와의 계약도 해소되어 활동이 중단되었다. 남겨진 애니 하슬람, 던포드, 존 캠프는 각자 활동을 하다가 다시 모여 활동을 지속했지만, 신작 앨범 『카메라 카메라』, 『타임 라인』은 1970년대에 구축한 스타일에서 멀어져 갔다. 결국 1985년 존 캠프마저 떠나면서 밴드는 1987년 해산했다.
3. 1. 마이클 던포드의 주도
마일스 코플랜드 3세가 1971년 르네상스의 매니저가 되면서, 밴드의 강점인 애니 하슬람의 목소리와 존 투트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밴드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윌 로마노는 "르네상스는 피아노와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설명했다.[1] 테리 크로우와 코너가 탈퇴하고 존 웨튼, 프랭크 파렐, 대니 맥컬로치 등 여러 베이시스트를 거쳐 존 캠프가 합류했다. 던포드는 작곡에 집중하고, 믹 파슨스가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1972년, 진저 딕슨을 대신하여 테렌스 설리번이 드러머로 합류했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파슨스를 대신하여 로브 헨드리가 기타를 맡았다.[7]1972년 후반, 새 밴드의 데뷔 앨범 ''서곡''이 발매되었다. 던포드가 대부분의 곡을 작곡하고, 대처-뉴스징거가 가사를 썼다. "Spare Some Love"는 미국 북동부와 클리블랜드의 록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주 방송되었고, 예스와 에머슨, 레이크 & 파머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2]
헨드리가 탈퇴하고 ''서곡'' 투어에서 피터 핀버그로 교체되었지만, 핀버그는 다른 밴드 활동으로 인해 영구적인 멤버가 될 수 없었다.[7] 캠프는 다음 앨범 ''Ashes are Burning''에서 대부분의 기타를 연주했다. 위시본 애시의 앤디 파웰이 "Ashes are Burning"에서 일렉트릭 기타 솔로를 연주했다.[7] 이 곡은 밴드의 대표곡이 되었고, 라이브 공연에서 20분 이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71위에 올랐다.[8] 앨범 발매 직후, 마이클 던포드가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복귀하여 5인조 라인업을 완성했으며, 이들은 5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 했다. 밴드는 미국 시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환상의 르네상스』 완성 후, 던포드가 주도권을 잡았다. 1972년경 애니 하슬람(보컬), 존 캠프(베이스), 존 토트(키보드), 테렌스 설리번(드럼)의 새로운 라인업으로 쇄신되었다. 새로운 '''르네상스'''는 오리지널 르네상스와는 사뭇 다른 밴드로 재탄생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1971년 이후의 밴드를 가리킨다.
던포드는 주도권을 잡으면서도 정식 멤버로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지원했다. 베티 서처는 계속해서 작사를 제공하며 6번째 멤버로 불렸다. 이 라인업으로 3집 앨범 『프롤로그』(1972년), 4집 앨범 『타는 재』(1973년)을 발매했다.
이후, 신흥 레이블 "BTM"으로 이적한 후, 5집 『운명의 카드』(1974년)부터 던포드가 정식 멤버로 참여했다. 이 라인업으로 6집 앨범 『세헤라자데 야화』(1975년),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에서 7집 앨범 『옛날 이야기』(1977년), 8집 앨범 『사계』(1978년) 등의 작품을 남겼다. 『사계』에서 싱글 컷된 「북쪽의 빛(Northern Lights)」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최고 10위를 기록했다.[39]
3. 2. 애니 해슬램의 영입과 새로운 시작
마일스 코플랜드 3세는 르네상스의 강점인 애니 해슬램의 목소리와 존 투트의 피아노에 집중하여 밴드를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윌 로마노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산"에서 "르네상스는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아티스트들과 달리 피아노와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설명했다.[1] 그때까지 해슬램은 밴드의 메인 보컬이었던 테리 크로우와 보컬을 분담했다. 크로우와 코너는 탈퇴했고, 크로우는 교체되지 않았지만 코너는 존 웨튼, 프랭크 파렐, 대니 맥컬로치를 포함한 베이시스트들이 교체되다가 존 캠프가 합류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던포드는 작곡에 전념하기로 결정했고, 믹 파슨스가 라이브 공연을 위해 영입되었다. 1972년, 새 밴드의 데뷔 LP 녹음 세션 직전, 테렌스 설리번이 합류했다. 파슨스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로브 헨드리가 급하게 교체되었다.[7]''서곡''은 1972년 후반에 발매되었다. ''서곡''의 음악은 던포드가 작곡했으며, 모든 가사는 대처-뉴스징거가 썼다. 록 라디오 방송국들은 "Spare Some Love"를 상당한 빈도로 방송했고, 특히 예스와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의 팬들이 밴드에 주목했다. 커브드 에어의 프란시스 몽크먼은 "Rajah Khan"에서 VCS3 신시사이저로 게스트로 참여했다.[2]
헨드리는 탈퇴했고 ''서곡'' 투어에서 피터 핀버그로 교체되었지만, 영구적인 교체 멤버가 될 수 없었다.[7] 캠프는 1973년에 발매된 다음 앨범인 ''Ashes are Burning''에서 대부분의 기타를 연주하게 되었다. 위시본 애시의 앤디 파웰이 "Ashes are Burning"에서 일렉트릭 기타 솔로를 위해 참여했다.[7] 이 곡은 밴드의 대표곡이 되었고, 종종 라이브 공연에서 긴 베이스 솔로와 다른 기악 연주를 통해 20분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차트에 오른 밴드의 첫 번째 앨범이 되었으며, ''빌보드'' 200에서 171위에 올랐다.[8] 앨범 발매 직후, 마이클 던포드가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복귀하여 대부분의 팬들이 클래식 5인조 라인업으로 간주하는 멤버 구성을 완성했으며, 이 라인업은 5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 했다.
3. 3. 베티 대처의 작사 참여
마일스 코플랜드 3세가 매니저로 합류하면서 보컬 애니 하슬람과 키보드 존 토트를 중심으로 밴드를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대니 맥컬로치 등 여러 베이시스트를 거쳐 존 캠프가 합류했다. 던포드는 작곡에 전념하고, 기타리스트 믹 파슨스가 라이브 공연을 위해 영입되었다. 1972년, 새 밴드의 데뷔 LP 녹음 세션 직전, 드러머 테렌스 설리번이 합류했다. 파슨스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로브 헨드리가 급하게 교체되었다.[7]이후 발매된 ''서곡''의 음악은 매카티의 두 곡을 제외하고는 던포드가 작곡했으며, 모든 가사는 베티 대처-뉴스징거가 썼다.[2] 커브드 에어의 프란시스 몽크먼은 신시사이저로 참여했다.[2]
이후, 위시본 애시의 앤디 파웰이 참여한 "Ashes are Burning"이 수록된 ''Ashes are Burning''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71위에 올랐다.[8] 앨범 발매 직후, 마이클 던포드가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복귀하여 대부분의 팬들이 클래식 5인조 라인업으로 간주하는 멤버 구성을 완성했으며, 이 라인업은 5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 했다.
던포드는 주도권을 잡으면서도, 오리지널 르네상스와의 여러 사정으로 정식 멤버로서는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지원했다. 또한 2집 앨범의 수록곡에 가사를 제공한 베티 서처가, 계속해서 작사 제공자로서 지원하여 6번째 멤버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라인업으로 3집 앨범 『프롤로그』(1972년), 4집 앨범 『타는 재』(1973년)을 발매한다.
3. 4. 앨범 발매와 활동
마일스 코플랜드 3세는 1971년 르네상스의 매니저가 된 후, 애니 하슬람의 목소리와 존 투트의 피아노에 집중하여 밴드를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윌 로마노는 "르네상스는... 피아노와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설명했다.[1] 해슬람은 테리 크로우와 보컬을 분담했으나, 크로우와 코너가 탈퇴하면서 해슬람이 메인 보컬을 맡게 되었다. 존 캠프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했고, 던포드는 작곡에 전념하며 믹 파슨스가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1972년, 드러머 테렌스 설리번이 합류했고, 파슨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로브 헨드리가 급하게 교체되었다.[7]1972년 후반, ''서곡''이 발매되었다. 던포드가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고, 가사는 대처-뉴스징거가 썼다. 미국 록 라디오 방송국들은 "Spare Some Love"를 자주 방송했고, 예스와 에머슨, 레이크 & 파머 팬들이 밴드에 주목했다. 커브드 에어의 프란시스 몽크먼은 "Rajah Khan"에서 VCS3 신시사이저로 게스트로 참여했다.[2]
헨드리는 탈퇴하고 ''서곡'' 투어에서 피터 핀버그로 교체되었지만, 핀버그는 다른 밴드 활동으로 인해 영구적인 멤버가 될 수 없었다.[7] 캠프는 1973년 앨범 ''Ashes are Burning''에서 대부분의 기타를 연주했다. 위시본 애시의 앤디 파웰이 "Ashes are Burning"에서 일렉트릭 기타 솔로를 연주했다.[7] 이 곡은 밴드의 대표곡이 되었고, 라이브 공연에서 20분 이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미국 ''빌보드'' 200에서 171위에 올랐다.[8] 앨범 발매 직후, 마이클 던포드가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복귀하여 클래식 5인조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이들은 5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 했다. 밴드는 미국 동해안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1974년 5월 뉴욕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열었다.
밴드는 소버린 레코드를 떠나 마일스 코플랜드의 새 레이블 BTM에 합류했다. 1974년 ''Turn of the Cards''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포크풍에서 더 어둡고 풍부한 오케스트라 록 사운드로 바뀌었다. "Mother Russia"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영감을 받았다. ''Turn of the Cards''는 미국에서 94위에 올랐다.[8]
1975년 ''Scheherazade and Other Stories''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두 번째 면은 ''천일야화''를 바탕으로 한 "Song of Scheherazade"가 차지했으며, 미국에서 48위에 올랐다.[8] 이 트랙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와 "음악적 연관성이 없"지만,[1] 반복되는 6음절 모티프가 있다.[9]
1976년 더블 라이브 앨범 ''카네기 홀 라이브''가 발매되어 미국에서 55위에 올랐다.[8] 르네상스는 카네기 홀에서 3일 연속 매진을 기록한 최초의 영국 밴드였다.[1]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무대에 섰다.
''노벨라''는 1977년 미국에서 46위에 올랐다.[8] 윌 로마노는 르네상스가 "미국, 특히 펜실베이니아와 뉴욕의 북동부 지역에서 매진된 관객 앞에서 공연을 했다"고 묘사했다.[1]
1978년 싱글 "Northern Lights"는 영국에서 10위에 올랐다. 이 싱글은 앨범 ''A Song for All Seasons'' (미국 58위)[8]에서 발췌되었다. 르네상스는 ''미드나잇 스페셜''과 ''Mike Douglas Show''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높였다.
1979년 ''Azure d'Or'' 이후, 신시사이저 기반 사운드에 대한 팬들의 반감으로 밴드는 부진을 겪었고, 앨범은 125위에 그쳤다.[8]
1970년대에 르네상스는 포크 록과 클래식 퓨전을 통해 음악을 정의했다. 그들의 노래는 장 알랭,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프레데리크 쇼팽, 클로드 드뷔시 등 여러 작곡가들의 인용구와 암시를 포함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레코드는 미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주 방송되었다.
3. 5. 전성기 활동
마일스 코플랜드 3세는 르네상스의 강점인 애니 하슬람의 목소리와 존 토트의 피아노에 집중하여 밴드를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윌 로마노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산"에서 "르네상스는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많은 아티스트들과 달리 피아노와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설명했다.[1] 해슬람은 테리 크로우와 보컬을 분담했으나, 크로우와 코너가 탈퇴하면서 해슬람이 사실상 메인 보컬이 되었다.존 캠프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하고, 던포드는 작곡에 전념하며 믹 파슨스가 라이브 공연을 위해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1972년, 드러머 테렌스 설리번이 합류했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파슨스를 대신해 로브 헨드리가 급하게 교체되었다.[7] 이 라인업은 12번의 공연 후 데뷔 LP ''서곡''을 녹음했다.
''서곡''은 1972년 후반에 발매되었으며, 던포드가 작곡하고 대처-뉴스징거가 가사를 썼다. 록 라디오 방송국들은 "Spare Some Love"를 방송했고, 예스와 에머슨, 레이크 & 파머 팬들이 밴드에 주목했다. 커브드 에어의 프란시스 몽크먼은 "Rajah Khan"에서 VCS3 신시사이저로 게스트로 참여했다.[2]
헨드리는 탈퇴하고 피터 핀버그로 교체되었으나, 핀버그는 다른 밴드에 전념하고 있어 캠프가 1973년 앨범 ''Ashes are Burning''에서 대부분의 기타를 연주했다. 위시본 애시의 앤디 파웰이 "Ashes are Burning"에서 일렉트릭 기타 솔로를 연주했다.[7] 이 곡은 밴드의 대표곡이 되었고, 라이브 공연에서 20분 이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미국 ''빌보드'' 200에서 171위에 올랐다.[8]
마이클 던포드가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로 복귀하여 클래식 5인조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5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함께 했다. 밴드는 미국 시장에 집중하며 첫 미국 콘서트를 열었고,[7] 특히 동부 해안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74년 5월 뉴욕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열었다.
밴드는 소버린 레코드를 떠나 마일스 코플랜드의 BTM에 합류, 1974년 ''Turn of the Cards''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포크풍에서 어둡고 풍부한 오케스트라 록 사운드로 바뀌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대한 헌정곡 "Mother Russia"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영감을 받았다. ''Turn of the Cards''는 미국에서 94위에 올랐고,[8] 1975년 3월 영국에서 발매되었다.
1975년 9월, ''Scheherazade and Other Stories''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천일야화''를 바탕으로 한 "Song of Scheherazade"가 두 번째 면을 차지했으며, 미국에서 48위에 올랐다.[8]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와는 "음악적 연관성이 없"지만,[1] 반복되는 6음절 모티프가 있다.[9]
1976년, 더블 라이브 앨범 ''카네기 홀 라이브''가 발매되어 미국에서 55위에 올랐다.[8] 르네상스는 카네기 홀에서 3일 연속 매진을 기록한 최초의 영국 밴드였다.[1]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무대에 섰다.
''노벨라''는 1977년에 미국에서 46위에 올랐다.[8] 윌 로마노는 르네상스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미국, 특히 펜실베이니아와 뉴욕의 북동부 지역에서 매진된 관객 앞에서 공연을 했다"고 묘사했다.[1]
1978년 여름, 싱글 "Northern Lights"가 영국에서 10위에 오르며 히트했다. 이 싱글은 앨범 ''A Song for All Seasons'' (미국 58위)[8]에서 발췌되었다. 르네상스는 미국에서 투어를 진행했고, ''미드나잇 스페셜''과 ''Mike Douglas Show''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높였다.
1979년 ''Azure d'Or'' 이후, 신시사이저 기반 사운드에 팬들이 공감하지 못하면서 밴드는 부진을 겪었고, 앨범은 125위에 그쳤다.[8]
1970년대에 르네상스는 포크 록과 클래식 퓨전을 통해 음악을 정의했다. 장 알랭,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프레데리크 쇼팽, 클로드 드뷔시 등 작곡가들의 인용구와 암시를 포함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레코드는 미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주 방송되었다.
평론가들은 르네상스의 "클래식" 시대와 음악 스타일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웨인 킹은 1974년부터 1983년까지의 시기에 대해 "유동성이나 즉흥 연주를 허용하는 곡을 작곡할 수 없다는 것은 르네상스의 매력이 고국인 영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미국에서는 기껏해야 컬트적인 수준이었으며, 쇠퇴했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10] 반면, 찰스 스나이더는 ''Scheherazade and Other Stories''를 "애니 해슬람의 맑고 깨끗한 5옥타브의 목소리가 믹스에서 높게 들리고, 피아니스트 존 투와 존 캠프의 독특한 리켄베커 베이스의 뛰어난 재능, 그리고 토니 콕스의 오케스트라 편곡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묘사했다.[2]
1972년경, 애니 하슬람(보컬), 존 캠프(베이스), 존 토트(키보드), 테렌스 설리번(드럼)의 새로운 라인업으로 쇄신되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는 밴드명은 1971년 이후의 밴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단포드는 주도권을 잡으면서도, 정식 멤버로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지원했다. 베티 서처는 작사가로서 6번째 멤버라고 불렸다. 이 라인업으로 3집 앨범 프롤로그(1972년), 4집 앨범 타는 재(1973년)를 발매했다.
신흥 레이블 "BTM"으로 이적 후, 첫 앨범인 5집 운명의 카드(1974년)부터 단포드도 플레이어로서 정식 멤버에 이름을 올렸다. 이 라인업으로 6집 앨범 세헤라자데 야화(1975년),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에서 7집 앨범 옛날 이야기(1977년), 8집 앨범 사계(1978년) 등의 작품을 남겼다. 사계에서 싱글 컷된 북쪽의 빛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최고 10위를 기록했다.[39]
3. 6. 변화와 해체
마일스 코플랜드 3세는 1971년 어느 시점에 르네상스의 강점인 애니 하슬람의 목소리와 존 토트의 피아노에 집중하여 밴드를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윌 로마노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산"에서 "르네상스는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많은 아티스트들과 달리 피아노와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설명했다.[1] 당시 해슬람은 사실상 밴드의 메인 보컬이었던 테리 크로우와 보컬을 분담했다. 크로우와 코너는 탈퇴했고, 크로우는 교체되지 않았지만 코너는 킹 크림슨, U.K., 아시아 출신의 존 웨튼, 슈퍼트램프 출신의 프랭크 파렐, 애니멀스 출신이자 던포드, 크로우와 함께 플렙스에서 활동했던 대니 맥컬로치를 포함한 일련의 베이시스트들이 교체되다가 존 캠프가 합류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던포드는 작곡에 전념하기로 결정했고, 새로운 기타리스트인 믹 파슨스가 라이브 공연을 위해 영입되었다. 1972년, 새 밴드의 데뷔 LP 녹음 세션 직전, 슬레이드의 초기 대체자였던 진저 딕슨이[6] 유럽 투어 후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드러머 테렌스 설리번이 합류했다. 파슨스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로브 헨드리가 급하게 교체되었다.[7] 그 결과로 구성된 라인업은 함께 12번의 공연을 한 후에 스튜디오에 들어갔다.''서곡''은 1972년 후반에 영국에서 EMI-소버린 레코드로, 북미에서 캐피톨]-소버린]으로 발매되었다. ''서곡''의 음악은 매카티의 두 곡을 제외하고는 던포드가 작곡했으며, 모든 가사는 대처-뉴스징거가 썼다. 록 라디오 방송국(특히 미국 북동부와
4. 재결성과 현재 (1998년 ~ 현재)
1990년대 중반, 애니 해슬람과 마이클 던포드는 각자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밴드를 결성하고 다른 라인업으로 앨범을 발매했다.
1998년, 해슬람, 던포드, 설리번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재결성이 이루어졌고, 토스카니 앨범 녹음을 진행했다. 2001년에는 ''떠오르는 태양의 땅에서: 일본 라이브 2001(In the Land of the Rising Sun: Live in Japan 2001)''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밴드의 활동은 곧 종료되었다.
2009년, 밴드 결성 40주년을 기념하여 재결성되었고, 2010년 동부 북아메리카와 일본에서 투어를 진행했다. 2013년에는 새 앨범 ''Grandine il Vento''를 발매했고, 2014년에는 ''Symphony of Light''로 재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밴드의 초창기 작품과 비슷한 방향을 따르며, 이언 앤더슨, 존 웨튼 등 유명 게스트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2012년 마이클 던포드가 사망하고, 2015년 존 토트가 사망하는 등 멤버 변화가 있었지만, 밴드는 활동을 이어갔다. 2019년 결성 50주년 기념 북미 투어를 진행했으며, 오리지널 르네상스를 창설한 짐 매카티가 특별 출연했다.
현재 르네상스의 라인업은 초창기 시절만큼 영국적이지 않으며, 미국 출신 멤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4. 1. 재결성과 활동 재개
1998년, 르네상스는 해슬람, 던포드, 설리번을 중심으로 부분 재결성되었고, 투와 로이 우드, 미키 시몬즈 등 새로운 음악가들이 합류하여 CD ''토스카니''를 녹음했다.[12] 1999년, 해슬람, 던포드, 시몬즈는 런던 애스토리아에서 캐러밴을 지원하는 단독 트리오 콘서트를 열었다.2001년 3월, ''토스카니'' 발매 지연 이후, 해슬람, 던포드, 설리번, 시몬즈, 레이브 테사르(키보드), 데이비드 J. 키스(베이스/보컬)로 구성된 풀 밴드 투어가 조직되었다. 이 투어는 3월 9일 런던 애스토리아에서 한 차례 콘서트와, 13일 오사카, 14일 나고야, 16일 도쿄에서 3번의 일본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도쿄 콘서트는 녹음되어 ''떠오르는 태양의 땅에서: 일본 라이브 2001''로 발매되었다. 투는 애스토리아 공연에 관객으로 참석했지만, 투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밴드의 대변인이 된 해슬람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추가 투어와 녹음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밴드의 짧은 세 번째 재결성은 곧 종료되었다.
테리 설리번은 2004년에 르네상트라는 스튜디오 그룹과 함께 ''사우스 오브 윈터'' 앨범을 녹음했다.[13] 이 앨범은 르네상스 음악을 연상시키며, 대처-뉴스징어의 가사와 존 투의 키보드 연주가 담겨 있다.
2008년 9월 20일, 존 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셀러스빌의 셀러스빌 극장 1894에서 애니 해슬람과 잔 클로스 밴드와 함께 25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투는 심장마비를 겪었다.
2009년 8월, 해슬람은 던포드와 함께 르네상스 2009(2001년 밴드 멤버들로 구성, "클래식" 라인업의 다른 멤버는 없음)라는 재결성 밴드와 콘서트 투어로 르네상스 40주년을 기념한다고 발표했다.[14]
2010년에는 동부 북아메리카와 일본에서 투어가 진행되었고, 3곡이 수록된 EP가 발매되었으며, 새로운 공식 웹사이트가 개설되었다. 르네상스는 2012년 6월 23일, 니어페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제목으로 매진된 노스이스트 아트 록 페스티벌 마지막 에디션의 헤드라이너로 참여했다.
해산 후, 앤 하즐람은 솔로 활동으로 전환했다. 1990년대부터 던포드의 음악 활동 "마이클 던포즈 르네상스"도 활발해졌고, 2000년에 두 사람이 합류했다. 설리번도 복귀하여 정식으로 활동을 재개하고, 같은 해에 17년 만의 신작인 12번째 앨범 『토스카니』를 발표했다[35]。 2001년에 첫 일본 공연을 개최하는 등, 2002년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한동안 활동이 끊겼지만, 2009년 데뷔 40주년을 계기로 다시 시작했다. 단속적으로 라이브를 진행하고, 2010년에는 일본 공연을 개최했다. 제작 활동도 재개했다.

2012년 11월, 1971년 르네상스 결성 당시부터 주도자였던 마이클 던포드가 뇌출혈로 사망했다[40]。 당시부터 재적 멤버는 하즐람만 남게 되었다.
2013년, 던포드의 유작으로 약 12년 만의 신작인 13번째 앨범 『사라지는 바람』을 발매했다[41]。
2015년 5월, 전성기 시절 키보디스트 존 토트가 런던에서 사망했다[42]。 또한 재시동 이후 오랫동안 재적했던 베이시스트 데이비드 키스가 질병으로 하차했다. 올해 이후 멤버들의 출입이 잦아졌다.
2018년 9월, 8년 만의 일본 공연을 개최했다[43]。
2019년, 결성 50주년을 기념하는 북미 투어를 시작했다. 50주년 기념 특별 공연에는 오리지널 르네상스를 창설한 짐 매카티가 객원으로 출연했다[44]。 또한, 구작의 최신 리마스터반 발매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같은 해 7월, 투병 중이던 데이비드 키스가 사망했다[45]。
2024년, 오리지널 르네상스의 창립 멤버 존 호켄이 사망했다[46]。
4. 2. 40주년 기념 활동
2009년, 밴드 결성 40주년을 기념하여 르네상스는 재결성되었고, 2010년 동부 북아메리카와 일본에서 투어를 진행했다.[14] 이 투어에는 2001년 밴드 멤버들이 참여했으며, "클래식" 라인업의 다른 멤버는 없었다. 2010년에는 3곡이 수록된 EP를 발매하고 새로운 공식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2012년 6월 23일, 르네상스는 노스이스트 아트 록 페스티벌(North East Art Rock Festival)의 마지막 에디션인 NEARE스트 아포칼립스(NEARfest Apocalypse)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2012년 11월, 밴드의 주도자였던 마이클 던포드가 뇌출혈로 사망했다.[40] 2013년, 던포드의 유작으로 약 12년 만의 신작 앨범 『사라지는 바람』을 발매했다.[41]
2015년 5월, 전성기 시절 키보디스트였던 존 토트가 런던에서 사망했다.[42]
2019년, 밴드는 결성 50주년을 기념하는 북미 투어를 시작했으며, 오리지널 르네상스를 창설한 짐 매카티가 특별 출연했다.[44]
4. 3. 마이클 던포드의 사망
2012년 11월, 1971년 르네상스 결성 당시부터 주도자였던 마이클 던포드가 뇌출혈로 사망했다.[40] 당시부터 재적 멤버는 애니 해슬람만 남게 되었다.4. 4. 현재의 활동
1998년, 르네상스는 해슬람, 던포드, 설리번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재결성되었고, 투와 로이 우드, 미키 시몬즈를 포함한 몇몇 새로운 음악가들이 합류하여 ''토스카니''를 녹음했다.[12] 1999년, 해슬람, 던포드, 시몬즈는 런던의 애스토리아에서 캐러밴을 지원하는 단독 트리오 콘서트를 열었다.2001년 3월, ''토스카니'' 발매 지연 이후, 해슬람, 던포드, 설리번, 시몬즈, 레이브 테사르(키보드), 데이비드 J. 키스(베이스/보컬)로 구성된 풀 밴드 투어가 조직되었으며, 3월 9일 런던(애스토리아에서 다시)에서 한 차례 콘서트와 13일 오사카, 14일 나고야, 16일 도쿄에서 3번의 일본 공연을 가졌다. 도쿄 콘서트는 녹음되어 ''떠오르는 태양의 땅에서: 일본 라이브 2001(In the Land of the Rising Sun: Live in Japan 2001)''로 발매되었다. 밴드 대변인이 된 해슬람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추가적인 투어와 녹음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밴드의 짧은 세 번째 재결성은 곧 종료되었다.
2004년, 테리 설리번은 르네상트라는 이름의 스튜디오 그룹과 함께 ''사우스 오브 윈터''라는 앨범을 녹음했다.[13] 이 앨범은 르네상스의 음악을 연상시키며, 대처-뉴스징어의 가사와 존 투의 키보드 연주가 담겨 있다.
2008년 9월 20일, 존 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셀러스빌에 있는 ''셀러스빌 극장 1894''에서 애니 해슬람과 잔 클로스 밴드와 함께 25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투는 심장마비를 겪었다.
2009년 8월, 해슬람은 던포드와 함께 르네상스 2009(2001년 밴드 멤버들로 구성되었으며, "클래식" 라인업의 다른 멤버는 없음)라는 이름의 재결성 밴드와 콘서트 투어를 통해 르네상스 40주년을 기념한다고 발표했다.[14]
2010년에는 동부 북아메리카와 일본에서 투어가 진행되었고, 3곡이 수록된 EP가 발매되었으며, 새로운 공식 웹사이트가 개설되었다. 르네상스는 2012년 6월 23일, NEARE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제목으로 매진된 노스이스트 아트 록 페스티벌의 마지막 에디션의 헤드라이너로 참여했다.
2013년 4월, 르네상스의 새 앨범 ''Grandine il Vento''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내지에 던포드에게 헌정되었다. 이 앨범은 2014년 4월에 세 곡의 보너스 트랙이 추가되어 ''Symphony of Light''로 재발매되었다.
''Symphony of Light''는 짧은 곡과 타이틀 곡, "The Mystic and the Muse"와 같은 더 길고 프로그레시브한 트랙의 조합으로 밴드의 초창기 작품과 비슷한 방향을 따른다. 밴드에는 "Cry to the World"에서 플루트를 연주한 이언 앤더슨과 "Blood Silver Like Moonlight"에서 해슬람과 듀엣을 부른 존 웨튼과 같은 유명 게스트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모든 음악은 던포드가 썼으며, 던포드에게 헌정된 "Renaissance Man"은 레이브 테사르가 썼다. 모든 가사는 해슬람이 썼으며, 앨범 아트워크는 해슬람의 그림 'Symphony of Light'를 특징으로 한다.[22]
랄프 그레코 주니어는 "''Symphony of Light''는 풍부한 프로덕션, 암시적인 가사, 훌륭한 연주, 그리고 오직 애니 해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뛰어난 목소리로 번성한다"라고 평했다.[23]
현재 라인업은 밴드의 초창기 시절만큼 영국적이지 않으며, 미국 출신 멤버 5명과 미국에 거주하는 영국 출신 멤버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슬람은 솔로 활동으로 전환했고, 1990년대부터 던포드의 음악 활동 "마이클 던포즈 르네상스"도 활발해졌다. 2000년에 두 사람이 합류했고, 설리번도 복귀하여 정식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같은 해에 17년 만의 신작인 12번째 앨범 『토스카나』를 발표했다.[35] 2001년에 첫 일본 공연을 개최하는 등, 2002년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한동안 활동이 끊겼지만, 2009년 데뷔 40주년을 계기로 다시 시작했다. 단속적으로 라이브를 진행하고, 2010년 일본 공연을 개최했으며, 제작 활동도 재개했다.
2012년 11월, 1971년 르네상스 결성 당시부터 주도자였던 마이클 던포드가 뇌출혈로 사망했다.[40] 당시부터 재적 멤버는 하즐람만 남게 되었다.
2013년, 던포드의 유작으로 약 12년 만의 신작인 13번째 앨범 『사라지는 바람』을 발매했다.[41]
2015년 5월, 전성기 시절의 키보디스트 존 토트가 런던에서 사망했다.[42] 또한 재시동 이후 오랫동안 재적했던 베이시스트 데이비드 키스가 질병으로 인해 하차했다. 올해 이후 멤버들의 출입이 잦아졌다.
2018년 9월, 8년 만의 일본 공연을 개최했다.[43]
2019년, 결성 50주년을 기념하는 북미 투어를 시작했다. 50주년 기념 특별 공연에는, 오리지널 르네상스를 창설한 짐 매카티가 객원으로 출연했다.[44] 또한, 구작의 최신 리마스터반 발매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같은 해 7월, 투병 중이던 데이비드 키스가 사망했다.[45]
2024년, 오리지널 르네상스의 창립 멤버 존 호켄이 사망했다.[46]
5. 르네상스의 영향과 한국
르네상스는 한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노벨라의 히라야마 테루츠구는 르네상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22]
5. 1. 다른 음악가들에게 미친 영향
노벨라의 멤버인 히라야마 테루츠구는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받아 밴드명이나 악곡명에 그 흔적을 남겼다.[22]6. 구성원
퍼커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