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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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의 작곡가로,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음악 교육을 받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러시아 5인조'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 관현악법의 대가로 인정받아 《세헤라자데》, 《러시아 부활절 서곡》과 같은 표제음악을 작곡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나의 음악 생활 연대기》, 《실용 화성법》, 《관현악법 원리》와 같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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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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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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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 |
로마자 표기 | 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 |
출생 | 1844년 3월 18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티흐빈 |
사망 | 1908년 6월 21일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류벤스크 |
국적 | 러시아 제국 |
직업 | 작곡가 |
장르 | 클래식 음악 국민악파 |
학력 | 해군병학교 |
참고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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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대기
벨리키노브고로드 근처 티흐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해군 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밀리 발라키레프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발라키레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그가 러시아 5인조의 일원이 되도록 이끌었다. 해군 복무 중에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작곡 활동을 이어갔고, 러시아 최초의 교향곡을 작곡하여 초연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871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관현악법 및 작곡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등이 있다. 1905년에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학교에서 해직되기도 했으나, 동료들의 반발로 복직되었다.
1881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가 사망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고 정리하는 데 힘썼다. 그가 편곡한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소륵스키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가 재조명되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편집본보다 원곡이 더 선호되기도 했다.
1883년부터 1894년까지는 종무국(궁정 예배당)에서 발라키레프의 조수로 일하며 러시아 정교회의 성찬례 음악을 연구했다. 또한 지휘자로도 활동하며 미트로판 벨랴예프가 후원하는 러시아 교향악 연주회를 지도하고,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러시아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오페라에 집중되었다. 대표적인 관현악곡으로는 교향 모음곡 《세헤라자데》, 《스페인 기상곡》, 서곡 《러시아 부활절》 등이 있다.
말년에 협심증을 앓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908년 류벤스크에서 사망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러시아 교회 음악과 민요 등을 베를리오즈식의 화성과 명쾌한 관현악법으로 처리하는 형식을 써서 '근대 러시아 음악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 조곡 《천일야화》, 오페라 《사드코》, 《금계》, 《트롬본 콘체르토》 등이 있고, 《관현악법 원리》, 《화성학 실습》 등의 음악 이론서도 썼다.[175]
2. 1. 초기 생애
벨리키노브고로드 근처의 티흐빈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해군 학교에 들어가 러시아 해군에 입대했다. 밀리 발라키레프의 음악 클럽과 사귀면서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발라키레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바다에 나가 있지 않는 동안 음악을 가르쳤고, 이로 인해 나중에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해군에 있는 동안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교향곡을 작곡하여 귀국 후 연주하였고, 교향시·가극의 작곡에도 손을 대었다.1859년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861년에 밀리 발라키레프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발라키레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항해 훈련을 받지 않을 때 작곡을 지도하고 격려했다. 발라키레프와의 만남을 통해 훗날 '5인조'의 일원이 되는 다른 작곡가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해군 복무 중 완성한 교향곡 1번(작품 1, 1861~65년)은 1865년 초연되어 호평을 받으며 '러시아인이 쓴 전대미문의 교향곡'이라고 불렸다. 1873년 군에서 제대하기 전까지 관현악곡 『사트코』 초고(작품 5, 1867년)와 『안타르』 초고(작품 9, 1868년), 오페라 『프스코프의 아가씨』 초고(1872년)를 완성했다. 이 초기 작품들은 모두 훗날 개정되었다.
2. 2. 음악원 교수 및 결혼
1871년, 27세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실기 작곡 및 관현악법(오케스트레이션) 교수가 되었으며,[65] 오케스트라 반의 지도자도 겸임했다.[33] 그는 현역 해군 신분을 유지했으며, 제복을 입고 수업을 진행했다.[40]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사드코(Sadko)》와 《안타르(Antar)》를 통해 관현악법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지만,[46] 음악 이론 지식은 부족했다.[46] 그는 대위법을 작곡하거나 코랄을 화성적으로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화음 이름이나 음정조차 알지 못했다.[46]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조언에 따라,[49][50] 그는 독학으로 음악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53]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동안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스로 "최고의 '학생'(림스키코르사코프 강조)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54] 그는 3년간 작곡을 중단하고, 교재를 통해 대위법, 푸가, 코랄, ''아카펠라'' 합창 등을 익혔다.[55][65] 그는 1874년 이전에 작곡했던 작품들을 수정하며 완벽을 추구했다.[65]
교수직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고,[57] 그는 1871년 12월 나데즈다 림스카야코르사코바(Nadezhda Purgold)에게 청혼하여 1872년 7월에 결혼했다.[58][57]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가 신랑 들러리를 섰다.[57]

나데즈다는 남편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훌륭한 비평가였다.[65]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으며,[63][64] 남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64] 림스키코르사코프 부부는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59] 그중 아들 안드레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학자가 되었다.[61]
2. 3. 중기: 창작 슬럼프와 극복
1877년 중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소설 ''5월의 밤''을 오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그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작품이었고, 그의 아내 나데즈다는 그들이 약혼했을 때 함께 읽었던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쓰라고 격려했다.[84] 1877년 이전에도 이 작품에 대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점차 구체화되었다. 1878년 초, 그는 본격적으로 작곡에 착수하여 그해 11월 초에 오페라를 완성했다.[79]림스키코르사코프는 ''5월의 밤''이 자신의 창작 활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밝혔다. 오페라에 상당한 대위법 음악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위법의 속박을 벗어던졌다"고 강조했다.[85] 그는 민속적인 멜로디를 사용하여 오페라를 작곡했고, 미하일 글린카의 스타일과 매우 흡사한 투명한 방식으로 악보를 구성했다.[55] ''5월의 밤''과 이후의 ''눈 처녀'' 작곡은 비교적 수월했지만,[86] 1881년부터 1888년 사이에는 창작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작품을 편집하고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이고르 공''을 완성하는 데 몰두했다. (무소륵스키는 1881년에, 보로딘은 1887년에 사망했다.)[117]
2. 4. 후기: 왕성한 창작 활동
1881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가 사망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고 정리하는 일에 매진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편곡한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은 원곡보다 더 널리 연주되기도 했다.[94]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소륵스키의 독창성이 인정받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편집한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작품은 오히려 원곡이 더 선호되기도 한다.1886년부터 러시아 교향곡 콘서트가 시작되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창작 침체기에서 벗어나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117] 그는 이 콘서트를 위해 특별히 《세헤라자데》, 《스페인 기상곡》, 《러시아 부활절 서곡》을 작곡했다.[117] 그는 이 세 작품에 대해 "대위법적 장치의 사용이 상당히 감소하고, 모든 종류의 형상을 강력하고 기교적으로 개발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작품의 기술적 관심을 유지한다"고 언급했다.[95]
2. 5. 말년과 죽음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학생 시위를 지지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직에서 해직당했다.[175] 이에 동료 교수들이 반발하여 사임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결국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복직되었다.이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반체제적 성향의 오페라 《황금 수탉》을 작곡하였으나, 초연은 지연되었다. 이 작품은 결국 그가 사망한 후인 1909년에 초연되었다.[175]
말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협심증을 앓았다.[175] 그는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류벤스크에서 사망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175]
3. 주요 작품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관현악 작품으로 서양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오페라는 기악 작품보다 더 다채로운 관현악 효과와 훌륭한 성악 작법을 보여주며 한층 복잡하다.[124] 1889년 3월, 카를 묵이 지휘한 니벨룽의 반지 공연을 보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관현악 기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오페라 작곡에 몰두했으며, 바그너의 영향은 그의 관현악법에도 영향을 주었다.[111]
1892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창작에 복귀했다. 1893년부터 1908년까지 18개월마다 오페라를 완성하여 총 11편을 작곡했다.[117]
그의 오페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 '''역사극:''' 프스코프의 아가씨,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황제의 신부
- '''민속 오페라:''' 5월의 밤, 크리스마스 이브
- '''동화와 전설:''' 눈 아가씨, 믈라다, 사드코, 불멸의 카슈체이, 술탄 황제의 이야기,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시와 성녀 페브로니아의 전설, 황금 닭
제목 | 초연 연도 | 비고 |
---|---|---|
프스코프의 아가씨 | 1873년 | |
5월의 밤 | 1880년 | |
눈 아가씨 | 1881년 | 「곡예사의 춤」 유명 |
믈라다 | 1892년 | 오페라 발레 |
크리스마스 이브 | 1895년 | |
사드코 | 1898년 | 「인도의 노래」 유명 |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 1898년 | |
황제의 신부 | 1899년 | |
술탄 황제의 이야기 | 1900년 | 「왕벌의 비행」 유명 |
불멸의 카슈체이 | 1902년 | |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시와 성녀 페브로니아의 전설 | 1907년 | |
황금 닭 | 1909년 |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수십 곡의 가곡, 민요 편곡, 실내악, 피아노 곡도 작곡했다. 피아노 음악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지만, 많은 가곡은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만큼 서정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러시아 성악가들의 주요 레퍼토리에 포함된다.[139]
그는 세속적인 곡 외에도 러시아 정교회 예배를 위한 합창 작품을 썼다. 무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전례'의 일부를 작곡하기도 했다.[142][143][144]
3. 1. 교향곡
- 교향곡 1번 마단조 (1판: 1861~1865년, 2판: 1884년)
- 교향곡 3번 (1판: 1866~1873년, 2판: 1886년)
3. 2. 관현악곡
트롬본 협주곡 내림 나장조(1877년),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슈투크 내림 마장조(1877년), 글린카 주제에 의한 변주곡 사단조(1878년), 피아노 협주곡 올림 다단조 작품 30 (1882년~1883년), 세 개의 러시아 노래에 의한 서곡 작품 28 (1866년 / 1879~80년), 러시아 주제에 의한 신포니에타 작품 31 (1880년-1884년), 묘전에 작품 61 (1904년), 두비누슈카 작품 62 (1905년), 축사 (1907년), 나폴리의 노래 (1907년) 외에 자작 오페라를 기초로 한 관현악곡이 다수 있다.순수 관현악 작품은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서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전반적인 품질 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주로 표제음악적인 성격을 띤다. 표제음악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자연스러웠는데, 그에게는 "심지어 민속 주제에도 일종의 프로그램이 있다."[139] 그는 경력의 두 기간, 즉 처음에는 음화(音畵) 《사드코》(1867년 / 1869년 / 1892년), 《안타르》(제2 교향곡, 작품 9로도 알려짐)로, 1880년대에는 《세헤라자데》, 《스페인 기상곡》, 《러시아 부활절 서곡》으로 이 장르에서 대부분의 관현악 작품을 작곡했다.
두 번째 범주의 작품은 그의 제1, 제3 교향곡과 신포니에타와 같이 더 학문적이다.[139]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비표제음악은 잘 만들어졌지만 그의 표제음악과 같은 수준의 영감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판타지가 필요했다.[139]
제목 | 연도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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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환상곡 작품 6 | 1867년 / 1889년 | ||||||||||||||||||||||||||||||||||||||||||||||||||||||||
음화(音畵) 《사드코》 작품 5 | 1867년 / 1869년 / 1892년 | 1867년도 판의 제목은 《빌리나 "3. 3. 협주곡
3. 4. 오페라림스키코르사코프는 서양에서 관현악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오페라는 기악 작품보다 더 다양한 관현악 효과와 훌륭한 성악 작법을 제공하며 더 복잡하다.[124]그의 오페라는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3. 5. 실내악3. 6. 기타림스키코르사코프는 수십 곡의 가곡, 민요 편곡, 실내악, 피아노 곡을 작곡했다. 피아노 음악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지만, 많은 가곡은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노골적인 서정성에서는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에 미치지 못하지만, 러시아 성악가들의 표준 레퍼토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139]림스키코르사코프는 또한 세속적인 곡과 러시아 정교회 예배를 위한 합창 작품을 썼다. 후자에는 (그의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전례'의 일부를 설정한 곡이 포함된다.[142][143][144]
4. 작풍 및 영향
화려하지만 객관적이고 간결한 작풍으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민요와 문학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관현악법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론서인 "관현악법 원리"와 같은 실천 이론에 관한 저작을 여러 편 남겼으며, 특히 화성학 교과서는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해군 장교로서의 경험도 있어 바다 묘사에 능했으며, 오페라 《사드코》와 교향 모음곡 《셰헤라자데》에는 항해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171] 5. 공감각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을 특정 색상과 연결하여 인식하는 공감각을 가지고 있었다.[176] 그가 인식한 음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6. 저작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저서로는 자서전과 화성법 및 관현악법에 관한 책이 있으며,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170] 그는 1892년에 러시아 음악에 대한 포괄적인 텍스트와 현재는 분실된 미지의 주제에 대한 원고, 총 두 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170]
참조
[1]
웹사이트
Nicolas Rimsky-Korsakow: Fantasie de Concert (Si mineur) pour Violon et Orchestre sur des themes russes
https://www.ozon.ru/[...]
M. P. Belaieff
202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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