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베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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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틴 베하임은 1459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상인으로 활동하며, 포르투갈에서 항해술 자문 및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세계 최초의 지구본인 "에르다프펠"을 제작하여 1492년 당시 유럽의 세계관을 보여주었으며, 2023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베하임의 업적에 대한 논란도 존재하며, 아메리카 발견, 레기오몬타누스 제자설, 디오구 강 탐험 동행설, 마젤란 해협 발견 기여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역사적 증거 부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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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하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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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르틴 베하임 |
다른 이름 | 마르틴 폰 베하임, 마르틴 오브 보헤미아 |
로마자 표기 | Martin von Behaim |
개인 정보 | |
출생 | 1459년 ~ 1460년, 뉘른베르크 |
사망 | 1507년 7월 29일, 리스본 |
국적 | 독일 |
직업 | 지도 제작자, 탐험가 |
활동 | |
활동 시기 | 15세기 후반 |
주요 활동 지역 | 포르투갈 |
업적 | |
주요 업적 | 지구의를 제작 |
참고 | 베하임 (크레이터) |
2. 생애
마르틴 베하임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459년부터 1484년까지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상인으로 성장한 초기, 1484년부터 1490년까지는 포르투갈에서 항해술과 천문학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고 서아프리카를 탐험한 시기, 1490년부터 1507년까지는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지구본을 제작하고 다시 파이알 섬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한 시기이다.
베하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거나, 콜럼버스에게 서쪽으로 항해할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베하임이 서쪽으로 항해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콜럼버스와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 베하임은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칭송받았지만, 과학적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고, 그가 쓴 과학 저술도 남아 있지 않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제자라고 주장되기도 했지만, 함께 공부했다는 증거는 없다.
베하임이 디오구 강의 두 번째 발견 항해에 동행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베하임의 기록과 항해 날짜가 일치하지 않으며, 동행했다는 증거도 없다.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함께 항해한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마젤란이 베하임의 지도에서 "남쪽 바다"로 가는 항로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베하임이 직접적인 지식을 가졌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땅의 신비로운 항로를 묘사했을 가능성은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1459-1484)

마르틴 베하임은 1459년 10월 6일 뉘른베르크에서 마르틴 베하임과 아그네스 쇼퍼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르틴은 베네치아를 포함한 유럽 내 장거리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었으며, 1461년에 뉘른베르크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유명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던 베하임은 도시 최고의 문법학교 중 한 곳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유명한 르네상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레기오몬타누스의 제자였을 가능성은 낮다.[1][2]
147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베하임의 삼촌 레온하르트는 15세였던 그를 플랑드르의 메헬렌으로 보내 직물 상인으로서의 경험을 쌓게 했다. 베하임은 그곳에서 의류 판매업자인 조리우스 반 도르프의 사업에 참여했다. 1477년 그들은 안트베르펜을 방문하여 반 도르프가 그의 상품을 독일 상인에게 판매했고, 같은 해 말 베하임은 가족의 친구인 바르텔스 폰 아이브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박람회에 참석했다. 1478년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하임은 직물 무역의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하여 사업 전망을 개선하고자 하는 희망을 표현했다. 이듬해 그는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하여 뉘른베르크 출신인 프리츠 헤벌라인의 염색 공장에 합류했다.[2]
1484년 베하임은 포르투갈로 이주하여 리스본에 거주했다. 이 이주 배경은 불분명하지만, 리스본은 아프리카산 향신료, 노예, 금을 포함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으며, 베하임은 무역 기회를 찾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그는 주앙 2세 왕의 궁정에서 곧 신임을 얻어 항해술과 천문학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 전기 작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베하임이 이 분야들에 대해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가 천체 항해술을 가르쳤거나 포르투갈인들에게 새로운 항해 장비를 소개했다는 주장은, 포르투갈 선원들이 이미 이러한 기술을 알고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반박된다. 그는 과학 장비 수입상으로 활동했을 수 있으며, 당시 최고급 장비는 그의 고향인 뉘른베르크에서 생산되었다.[1][2]
2. 2. 포르투갈에서의 활동과 탐험 (1484-1490)
1484년 베하임은 포르투갈로 이주하여 리스본에 거주했다. 리스본은 아프리카산 향신료, 노예, 금을 포함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고, 베하임은 무역 기회를 찾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 그는 주앙 2세 왕의 궁정에서 곧 신임을 얻어 항해술과 천문학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베하임이 이러한 분야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가 천체 항해술을 가르쳤거나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새로운 항해 장비를 소개했다는 주장은 포르투갈 선원들이 이미 이러한 기술을 알고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반박된다. 그는 과학 장비 수입상으로 활동했을 수 있으며, 당시 최고급 장비는 그의 고향인 뉘른베르크에서 생산되었다.[1][2]1485년 2월 18일, 베하임은 주앙 2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2]
베하임은 1485년경 서아프리카 항해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디오구 강의 두 번째 원정에 동행했을 가능성은 낮다.[3] 주앙 아폰수 드 아베이루가 이끄는 기니 무역 항해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2]
1486년 조아나 드 마세도와 결혼한 후, 그는 장인인 조세 반 휘르터가 카피탕-도나타리우이자 플랑드르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아조레스 제도의 파이알 섬에 거주했다. 1490년 베하임은 유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3년 동안 그 도시에 머물렀다. 그는 도시 의회의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유명한 지구본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1]
2. 3. 뉘른베르크 귀환과 지구본 제작 (1490-1493)
1490년 베하임은 유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3년 동안 그 도시에 머물렀다.[1] 그는 도시 의회의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유명한 지구본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1] 1493년 플랑드르와 리스본을 거쳐 파이알로 돌아왔다.[2]1491년부터 1493년까지 고향 뉘른베르크에 머물던 중, 화가 게오르크 알브레히트 글로켄톤(Georg Albrecht Glockenthon)과 함께 지구본을 제작하여 에르트아펠(Erdapfel,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대지의 사과”)이라고 명명했다. 이 지구본은 1475년 교황 시스투스 4세가 구상한 지구본을 기반으로 했지만, 자오선과 적도선을 추가하는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 지구본은 알브레히트 뒤러 갤러리와 같은 층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빈에서 진행 중인 Behaim Digital Globe Project에서 고해상도로 디지털화되어 비공개로 보관되어 있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 후 중세의 여러 발견들(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정보 등)을 곳곳에 반영하려고 했다. 최초의 지구본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의 발견들과 비교해도 지리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많다. 서아프리카 해안선도 부정확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카보베르데 제도는 수백 마일이나 잘못 표시되어 있다. 대서양에는 전설 속 섬들이 떠 있지만, 이 섬들은 고립된 중세 기독교 세계에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일본은 해안에서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묘사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카나리아 제도에서 항해로 도달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다. 성 브렌단의 섬도 그려져 있지만, (전시되었을 당시) 이 지구본은 서반구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16도 정도의 오차가 있지만, 현대의 지구본은 오차가 1도 정도이다. 당시에는 아직 정확한 시계(크로노미터)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경도의 정확한 측정이 어려웠다(천문항해).
이 지구본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직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역사적으로 귀중하며, 콜럼버스의 지구관과 잘 일치하며, 그가 왜 서쪽으로 향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콜럼버스와 베하임 모두 정보의 출처는 같았다. 14세기의 아름다운 항해도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세계 최초의 지구본으로 여겨지며, 정확한 각도로 기울어져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1492년 당시 서양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백과사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지구본은 뉘른베르크 시청에 있었지만, 베하임의 유족이 그것을 폐기의 운명에서 구해 보관했다. 2023년 에르트아프펠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10]
2. 4. 파이알 섬 귀환과 말년 (1493-1507)
1493년, 베하임은 플랑드르와 리스본을 거쳐 파이알 섬으로 돌아와 1506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2]베하임은 사업을 위해 리스본을 방문하던 중 1507년 7월 29일 성 바르톨로메오 병원에서 사망했다.[1]
3. 에르다프펠 (Erdapfel)
마르틴 베하임이 제작한 지구본은 '에르다프펠(Erdapfel)'(지구 사과)이라고 불렸으며, 원래 뉘른베르크 시청에 보관되어 있었다. 17세기에 베하임 가문이 소유하게 되었고, 1823년과 1847년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지명과 라벨이 손상되었다. 이후 독일 국립 박물관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누른베르크 천구의라고 불린다.
이 지구본은 아메리카 발견 직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구본일 뿐만 아니라 1492년 당시 유럽이 알고 있던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가치를 지닌다. 2023년 에르트아프펠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10]
3. 1. 제작 배경 및 과정
1490년 마르틴 베하임이 고향인 뉘른베르크로 돌아오자, 시 의회의 주요 인사들이 지구본 제작을 지원했다. 베하임의 지휘 아래 여러 장인과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지구본을 제작했다. 게오르크 글로켄돈(Georg Glockendon)은 베하임의 지시에 따라 실제 지도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2]이 지구본은 지름이 약 21인치(51cm)이며, 종이죽을 이용하여 만들고 석고로 겉을 칠했다. 나무 삼각대 위에 구체를 올려놓고 두 개의 철제 고리로 고정했다. 글로켄돈이 그린 지도 그림은 양피지 조각에 그려져 구체 주위에 붙여졌다. 지구본에는 2,000개 이상의 지명, 100개 이상의 그림(48개의 깃발과 15개의 문장 포함), 그리고 50개 이상의 긴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주석은 외국의 괴물, 주민, 식물, 동물에 관한 것이다. 또한 무역, 탐험, 마르코 폴로와 같은 유명한 여행가에 관한 내용도 많다.[4]



베하임 지구본에 묘사된 세계 지도는 주로 2세기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의 지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존 만데빌(John Mandeville),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고 고메스(Diogo Gomes) 등 다른 출처의 지리 정보도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베하임이 이용할 수 있었어야 할 최신 포르투갈 지리 데이터가 부족하고, 당시의 지리적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수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
1491년부터 1493년까지 베하임은 고향 뉘른베르크에 머물면서 화가 게오르크 알브레히트 글로켄톤(Georg Albrecht Glockenthon)과 함께 지구본을 제작했다. 이 지구본은 ''에르다프펠''(Erdapfel, 문자 그대로 “대지의 사과”)이라고 불렸다. 1475년 교황 시스투스 4세가 구상한 지구본을 바탕으로 했지만, 자오선과 적도선을 추가하는 등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 지구본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세 시대의 여러 발견들(예: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정보)을 반영하려 했다. 최초의 지구본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의 발견들과 비교하면 지리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많다. 서아프리카 해안선도 부정확하고, 카보베르데 제도는 수백 마일이나 잘못 표시되어 있다. 당시 기술로는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서양에는 전설 속 섬들이 있는데, 이는 고립된 중세 기독교 세계에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일본은 해안에서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묘사에 맞춰져 카나리아 제도에서 항해로 도달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다. 성 브렌단의 섬도 그려져 있다. 전반적으로 16도 정도의 오차가 있지만, 현대 지구본은 오차가 1도 정도이다. 당시에는 크로노미터가 없었기 때문에 경도의 정확한 측정이 어려웠다(천문항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직전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귀중한 지구본이다. 현재 이 지구본은 빈에서 진행 중인 Behaim Digital Globe Project에서 고해상도로 디지털화되어 비공개로 보관되어 있다. 이 지구본은 콜럼버스의 지구관과 일치하며, 그가 왜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콜럼버스와 베하임은 모두 같은 정보 출처를 가지고 있었다. 14세기의 아름다운 항해도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세계 최초의 지구본으로 여겨지며, 정확한 각도로 기울어져 회전하도록 되어 있고, 1492년 당시 서양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백과사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완성된 지구본은 마을 사람들에게 "에르다프펠(Erdapfel)" (지구 사과)이라고 불렸으며, 원래 뉘른베르크 시청에 보관되었다. 17세기에 베하임 가문이 지구본을 소유하게 되었다. 1823년과 1847년에 서투른 복원 작업으로 인해 많은 지명과 라벨이 손상되었다. 이후 뉘른베르크의 독일 국립 박물관이 지구본을 소유하게 되었고, 일반적으로 누른베르크 천구의라고 불린다. 2023년 에르트아프펠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10]
3. 2. 내용 및 특징

1490년 베하임이 누른베르크로 돌아온 후, 시 의회의 주요 인사들이 지구본 제작에 자금을 지원했다. 베하임의 지휘 아래, 장인과 기술자 팀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지구본을 제작했다. 게오르크 글로켄돈(Georg Glockendon)은 베하임의 명세에 따라 실제 지도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2]
이 지구본은 직경 약 51cm이며, 종이죽의 일종으로 만들어져 석고로 코팅되었다. 구체는 나무 삼각대 위에 놓여 있고 두 개의 철제 고리로 고정되었다. 글로켄돈의 지도 그림은 양피지 조각에 그려져 구체 주위에 붙여졌다. 지구본에는 2,000개 이상의 지명, 100개 이상의 그림 삽화(깃발 48개와 문장 15개 포함), 50개 이상의 긴 설명이 담겨 있다. 많은 주석은 외국의 괴물과 그 주민들, 식물과 동물에 관한 것이다. 또한 무역, 탐험, 마르코 폴로와 같은 유명한 여행가들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4]
베하임 지구본에 묘사된 세계 지도는 주로 2세기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의 지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 존 만데빌(John Mandeville), 그리고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고 고메스(Diogo Gomes)를 포함한 다른 출처의 지리 정보도 결합하고 있다. 베하임이 이용할 수 있었어야 할 최신 포르투갈 지리 데이터가 부족하고 당시 지리적 이해를 반영하지 않는 수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1]
마을 사람들에 의해 "에르다프펠(Erdapfel)" (지구 사과)이라고 불리게 된 완성된 지구본은 원래 누른베르크 시청에 보관되어 있었다. 17세기에 베하임 가문이 지구본을 소유하게 되었다. 1823년과 1847년에 서투른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많은 지명과 라벨이 손상되었다. 이후 누른베르크의 독일 국립 박물관이 지구본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누른베르크 천구의라고 불린다.
이 지구본은 아메리카 발견 직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지구본일 뿐만 아니라 1492년 당시 유럽이 알고 있던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이기도 하다.
1491년부터 1493년까지 고향 뉘른베르크에 머물던 중, 화가 게오르크 알브레히트 글로켄톤(Georg Albrecht Glockenthon)과 함께 지구본을 제작하여 에르트아프펠(Erdapfel,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대지의 사과”)이라고 명명했다. 1475년 교황 시스투스 4세가 구상한 지구본을 기반으로 했지만, 자오선과 적도선을 추가하는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최근까지 게르마니셰스 국립 박물관의 알브레히트 뒤러(뉘른베르크를 독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든 주역) 갤러리와 같은 층에 전시되어 있었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 후 중세의 여러 발견들(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정보 등)을 곳곳에 반영하려고 했다. 최초의 지구본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의 발견들과 비교해도 지리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많다. 서아프리카 해안선도 부정확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카보베르데 제도는 수백 마일이나 잘못 표시되어 있다. 대서양에는 전설 속 섬들이 떠 있지만, 이 섬들은 고립된 중세 기독교 세계에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일본은 해안에서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묘사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카나리아 제도에서 항해로 도달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다. 성 브렌단의 섬도 그려져 있지만, (전시되었을 당시) 이 지구본은 서반구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16도 정도의 오차가 있지만, 현대의 지구본은 오차가 1도 정도이다. 당시에는 아직 정확한 시계(크로노미터)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경도의 정확한 측정이 어려웠다(천문항해).
이 지구본은 최고(最古)의 지구본일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직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역사적으로 귀중하다. 현재 이 지구본은 빈에서 진행 중인 Behaim Digital Globe Project에서 고해상도로 디지털화되어 비공개로 보관되어 있다. 이 지구본은 콜럼버스의 지구관과 잘 일치하며, 그가 왜 서쪽으로 향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콜럼버스와 베하임 모두 정보의 출처는 같았다. 14세기의 아름다운 항해도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세계 최초의 지구본으로 여겨지며, 정확한 각도로 기울어져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1492년 당시 서양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백과사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지구본은 뉘른베르크 시청에 있었지만, 베하임의 유족이 그것을 폐기의 운명에서 구해 보관했다. 2023년 에르트아프펠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10]
3. 3. 역사적 의의 및 가치
마르틴 베하임의 에르다프펠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구본으로, 1492년 당시 유럽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가치를 지닌다. 베하임이 1490년 누른베르크로 돌아온 후, 시 의회의 지원을 받아 장인들과 함께 제작하였다. 게오르크 글로켄돈(Georg Glockendon)이 베하임의 지시에 따라 지도를 그렸다.[2]지구본은 직경 약 51cm(21인치)로, 종이죽을 석고로 코팅하여 만들었다. 나무 삼각대 위에 놓여 있고 두 개의 철제 고리로 고정되어 있다. 양피지에 그려진 글로켄돈의 지도에는 2,000개 이상의 지명, 100개 이상의 그림(깃발 48개, 문장 15개 포함), 50개 이상의 긴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외국의 괴물, 주민, 동식물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무역, 탐험,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같은 여행가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4]
지도 제작에는 2세기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의 지리 정보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마르코 폴로, 존 만데빌(John Mandeville),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고 고메스(Diogo Gomes) 등의 자료도 참고했다. 그러나 베하임이 이용할 수 있었던 최신 포르투갈 지리 데이터가 부족하여 당시 지리적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오류가 많다.[1]
"에르다프펠(Erdapfel)"(지구 사과)이라고 불린 이 지구본은 원래 누른베르크 시청에 보관되었으나, 17세기에 베하임 가문이 소유하게 되었다. 1823년과 1847년에 복원 작업을 거쳤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지명과 라벨이 손상되었다. 현재는 독일 국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누른베르크 천구의라고도 불린다.
1491년부터 1493년까지 베하임은 고향 뉘른베르크에서 화가 게오르크 알브레히트 글로켄톤과 함께 지구본을 제작하고 에르다프펠(Erdapfel, “대지의 사과”)이라 명명했다. 이는 1475년 교황 시스투스 4세의 지구본을 기반으로 자오선과 적도선을 추가한 것이다.
에르다프펠은 알브레히트 뒤러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빈에서 진행 중인 Behaim Digital Globe Project에서 고해상도로 디지털화되어 비공개 보관 중이다.
이 지구본에는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과 함께 마르코 폴로 여행기 정보 등 중세의 발견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해안선, 카보베르데 제도 위치 등 지리적 오류가 많고, 대서양에는 전설 속 섬들이 묘사되어 있다. 일본은 해안에서 1500마일 떨어진 곳에 묘사되어 카나리아 제도에서 항해로 도달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으며, 성 브렌단의 섬도 그려져 있다. 전반적으로 16도 정도의 오차가 있는데, 이는 당시 크로노미터 부재로 경도 측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천문항해).
에르다프펠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직전에 만들어져 역사적으로 귀중하며, 콜럼버스의 지구관과 일치하여 그가 서쪽 항해로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이유를 보여준다. 14세기의 항해도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세계 최초의 지구본으로서 1492년 당시 서양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과학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2023년, 에르다프펠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10]
4. 논란과 비판
마르틴 베하임의 업적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일부는 베하임 자신이, 다른 일부는 초기 전기 작가들이 제기한 것이다. 20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이러한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중 많은 부분이 문서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어떤 경우에는 기존 문서와 정면으로 모순된다는 결론을 내렸다.[1][2]
4. 1. 아메리카 발견 주장
요한 크리스토프 바겐자일(Johann Christoph Wagenseil)은 1682년에 베하임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1][2] 다른 저술가들은 베하임이 적어도 콜럼버스에게 서쪽으로 항해할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하임이 발견 여행을 위해 서쪽으로 항해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베하임과 콜럼버스가 리스본에서 만났을 가능성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러한 만남을 언급한 적이 없다.4. 2. 레기오몬타누스의 제자설
20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베하임의 업적에 대한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중 많은 부분이 문서적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기존 문서와 모순된다는 결론을 내렸다.[1][2]베하임은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칭송받았지만, 과학적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나 그가 쓴 과학 저술은 남아 있지 않다. 베하임은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레기오몬타누스의 제자라고 주장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베하임이 소년이었을 때 뉘른베르크의 이웃이었지만, 그들이 함께 공부했다는 증거는 없다.
4. 3. 디오구 강 탐험 동행설
전기 작가들은 베하임이 디오구 강(Diogo Cão)의 두 번째 발견 항해에 동행했다고 주장했다.[1][2] 베하임은 1485년에 자신이 했던 아프리카 항해에 대한 혼란스러운 기록을 남김으로써 이러한 오해에 기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베하임의 날짜는 이 항해의 날짜와 일치하지 않으며, 베하임이 강과 함께 항해했다는 독립적인 증거는 없다.4. 4. 마젤란 해협 발견 기여설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과 함께 항해한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는 마젤란이 베하임이 만든 지도에서 얻은 "남쪽 바다"로 가는 항로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1][2] 역사가들은 베하임이 그러한 항로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의심하지만, 그는 마젤란이 결국 발견한 해협으로 해석한 알려지지 않은 땅의 신비로운 항로를 묘사했을 수 있다.[6]대항해시대에는 포르투갈이 다양한 해도를 사들였으며, 부정확하거나 신화적인 의심스러운 것도 포함되었다. 주앙 2세와 친분이 있었던 마르틴 베하임이 지도와 해도를 팔았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중에는 미지의 땅으로 가는 신비로운 경로를 그린 것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마젤란이 서쪽 항로 개척 탐험에 나섰을 때 혼란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젤란 항해에 동행했던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마젤란이 부분적인 해도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육지가 발견되기 전부터 그것을 분석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피가페타에 따르면, 두 번째 해도는 마젤란의 머릿속에만 있었고, (특히 스페인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른 사람에게 수로를 찾을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6]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태평양으로 통하는 항로 개척에 베하임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피가페타의 일기에 그 수로의 해도 작성자로 베하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6] 마젤란 자신에 따르면, 예전에 마르틴 베하임이 제작한 해도에 "남쪽 바다"(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발견하고 명명한 바다)로 통하는 해협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으며, 반드시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 해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7] 피가페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하지만, 에르난도(마젤란)는 그것이 매우 신비로운 해협을 항해로 통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것이 그려진 지도를 포르투갈 왕실의 보물 창고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지도는 마르틴 베하임이라는 뛰어난 사람이 만든 것이다.”[8]
마르틴 베하임이 마젤란 해협 발견에 어떤 종류의 공헌을 했을지는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단순히 다른 사람이 그린 해도를 베껴 그렸을 뿐일지도 모른다.[9]
5. 평가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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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Görz, 2007
2007
[2]
서적
Ravenstein, 1908
1908
[3]
서적
Diffie & Winius, 1977
1977
[4]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1998
1998
[5]
웹사이트
Martin Behaim Portuguese geographer and navigator
https://www.britanni[...]
[6]
웹사이트
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
http://www.liberlibe[...]
2007-06-13
[7]
간행물
The Representation on Maps of the Magalhaes Straits before Their Discovery
1948
[8]
서적
Navigazioni e viaggi
RAMUSIO
1554
[9]
서적
Wagenseil, Nuremberg 1682
1682
[10]
웹사이트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https://www.unesco.o[...]
UNESCO
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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