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슈 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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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슈 파커는 1504년에 태어나 1575년에 사망한 잉글랜드의 종교 지도자이다. 그는 앤 불린의 사제였으며, 1559년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파커는 잉글리칸 교회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학문적 업적과 사본 수집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560년에 발표된 주교들의 '해석과 추가 고려 사항'을 통해 성직자들의 복장 규정을 완화하려 했지만, 청교도와의 갈등을 겪었다. 그의 유산은 학문적 업적과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기증된 사본 수집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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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 파커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매슈 파커 |
로마자 표기 | Matthew Parker |
직함 | 캔터베리 대주교 |
소속 교단 | 잉글랜드 국교회 |
출생일 | 1504년 8월 6일 |
출생지 | 노리지 |
사망일 | 1575년 5월 17일 |
사망지 | 람베스 |
매장지 | 람베스 교회 |
부모 | 아버지: 윌리엄 파커 어머니: 앨리스 파커 |
배우자 | 마거릿 할스턴 |
학력 |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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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직책 | |
대주교 임명 | 1559년 12월 19일 |
임기 종료 | 1575년 5월 17일 |
이전 대주교 | 레지널드 폴 |
다음 대주교 | 에드먼드 그린달 |
사제 서품일 | 1527년 6월 15일 |
주교 서품일 | 1559년 12월 17일 |
주교 서품자 | 윌리엄 발로 |
공동 서품자 | 존 호지킨스 존 스코리 마일스 커버데일 |
서품 장소 | 램버스 궁전 교회 |
2. 초기 생애 (1504년 ~ 1525년)
매슈 파커는 1504년 8월 6일 노리치의 세인트 세이비어 교구에서 윌리엄 파커와 앨리스 파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자녀 중 셋째 아들이었으며, 장남으로 살아남았다.[1]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워스티드 직조공이었고, 1450년부터 1483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들의 서기관이었던 니콜라스 파커의 손자였다.[1] 그의 어머니 앨리스 모닌스는 켄트 출신으로, 1533년부터 1555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와 혼인 관계로 혈족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윌리엄 파커는 1516년경 사망했고, 그의 사망 후 3~4년 안에 앨리스 파커는 존 베이커와 재혼했다. 그들의 아들 존은 나중에 파커의 유언 집행자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1] 매슈 파커의 살아남은 형제자매는 보톨프(사제가 됨), 토마스(노리치 시장이 됨), 마가렛이었다.[1] 그의 어머니는 1553년에 사망했다.[1]
1545년 국왕이 수도원 예배당(en)과 대학을 해산할 수 있도록 하는 의회법이 통과되자, 파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그들의 보고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파괴로부터 구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톡은 다음 통치 기간에 해산되었고, 파커는 넉넉한 연금을 받았다. 1547년 6월, 성직자 결혼이 의회와 종교회의에 의해 합법화되기 전에 노퍽(Norfolk) 지주 로버트 할스톤(Robert Harlestone)의 딸 마가렛과 결혼했다. 그들은 1540년경부터 결혼을 계획했지만, 사제의 결혼이 중죄가 아니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 결혼은 행복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마가렛을 싫어한 것이 나중에 파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들에게는 존(John)과 매슈(Matthew)가 성인이 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켓의 난(en) 동안 그는 노리치 근처 마우스홀드 힐(Mousehold Hill)에서 반군 진영에서 설교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고, 나중에는 그의 비서 알렉산더 네빌에게 반란의 역사를 쓰도록 격려했다.
1553년 7월, 매슈 파커는 캠브리지에서 노섬벌랜드 공작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당시 공작은 메리 1세의 즉위에 반대하는 원정을 위해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다.[14] 노섬벌랜드를 지지했고 기혼자였던 파커는 새로운 정권 하에서 수석 사제직과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학장직을 비롯한 다른 모든 지위를 박탈당했다.[14]
엘리자베스 1세는 온건한 성향의 인물을 원했고, 최고 고문인 윌리엄 세실의 추천으로 파커를 선택했다. 앤 불린은 1536년 처형되기 전, 딸 엘리자베스의 영적 안녕을 파커에게 맡겼다. 파커는 엘리자베스 1세가 대주교에게 기대하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결혼한 성직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엘리자베스 1세는 파커의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파커는 노리치의 파이브리지 스트리트(현재 매들린 스트리트)에서 자랐다.[1] 그는 아마 집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나중에 주로 성직자였던 여섯 명의 사람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고 회상했다.[1] 그의 전기 작가 존 스트라이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1]
1520년, 16세의 파커는 캠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리처드 커퍼 밑에서 베네트 칼리지(현재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공부했다.[2] 1520년 3월 20일, 6개월간의 대학 생활 후 그는 장학금을 받고 베네트 칼리지의 성서 서기가 되어 세인트 메리 호스텔에서 칼리지 내 방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1] 캠브리지에서 그는 마르틴 루터의 저작을 읽을 수 있었고, 유럽 대륙 출신의 결혼한 신학자들의 책에 접근할 수 있었다.[2] 그는 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성직자 결혼을 옹호했다.[2] 그는 토마스 빌니의 그룹과 연관되어 대학 시절 내내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2] 그는 1525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2]
3.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1525년 ~ 1547년)
파커는 1527년 4월 20일에 부제로, 두 달 후인 6월 15일에는 사제로 서임되었다.[3] 9월에는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3]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그가 캠브리지에서 공개적인 논쟁에 연루된 증거는 없다.[3] 1527년 이단으로 고발되어 취소했던 빌니(Bilney)는 2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캠브리지로 돌아와 자신의 취소를 후회하며 노퍽 전역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1531년 8월, 빌니는 재발 이단자로서 화형 선고를 받았다. 파커는 8월 19일 노리치에서 그의 처형에 참석했고, 그 후 화형대에서 취소했다는 비난이 제기되자 빌니를 변호했다.[3]
1527년경,[3] 파커는 추기경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가 옥스퍼드의 추기경 칼리지로 초대한 캠브리지 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파커는 크랜머와 마찬가지로 울지의 초대를 거절했다.[3]
파커는 1528년 문학 석사 학위를 받기 시작했다.[3] 1533년 크랜머로부터 설교 허가를 받았고, 곧 캠브리지와 그 주변에서 인기 있는 설교가가 되었지만, 그의 설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3] 그는 당시 성직자들에게 적용된 ''10개조 신앙고백''을 준수해야 했을 것이다.[3]
앤 불린(Anne Boleyn)의 궁정에 소환된 후 그는 그녀의 사제가 되었다.[14] 그녀의 영향으로 1535년 서퍽(Suffolk)의 스토크바이클레어(Stoke-by-Clare)에 있는 세속 수도원장 칼리지의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547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14]
파커는 스토크바이클레어에서 학장직을 맡는 동안 캠브리지 대학교의 펠로우직을 유지했다. 그의 전기 작가 V.J.K. 브룩(V.J.K. Brook)은 파커에 대해 "그의 새로운 직책은 그에게 그가 헌신하게 된 시골의 행복하고 조용한 은퇴처를 제공했다"고 언급했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건물의 후원을 추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평가했다.[14] 파커는 스토크에서 정기적인 설교가 이루어지도록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여 칼리지를 변화시켰다. 파커 학장 재임 기간 동안 캠브리지에서 학자들이 강의를 하러 왔고, 소년 합창단 교육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구내에 지역 소년들을 위한 무료 문법학교가 세워졌다.[14] 그의 성공적인 칼리지 재건은 명성을 널리 알렸고, 그는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좋은 일을 언급하여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칼리지는 1547년 헨리 8세 사후까지 지위를 유지했다.[14]
1536년 앤 불린 체포 직전, 그녀는 딸 엘리자베스를 파커에게 맡겼고, 그는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14] 그는 1535년 7월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1537년에는 헨리 8세의 사제로 임명되었으며, 1538년 7월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
1539년 그는 스토크바이클레어의 반대자들에 의해 대법관 토마스 오들리에게 고발되었는데,[14] 그들은 그를 이단으로 고발하고 "부활절, 유물 및 기타 세부 사항에 대한 불충성스러운 언어"를 사용했다고 비난했다. 오들리는 그 혐의를 기각하고 파커에게 "계속해서 그런 적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촉구했다.[3] 1541년에는 왕실의 승인을 보여주는 엘리 대성당(Ely Cathedral)의 두 번째 교구 목사로 임명되었다.[14]
1544년 12월 4일, 헨리 8세의 추천으로 파커는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칼리지 관리에 대한 헌신으로 현재 두 번째 설립자로 여겨진다.[14] 선출되자 그는 재정을 정비하고 건물을 수리하며 새로운 건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학장 관사, 칼리지 강당, 많은 학생 방이 개선되었다.[14] 그는 새로운 장학금을 설립하여 코퍼스 크리스티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14]
1545년 1월, 코퍼스 학장직을 맡은 지 두 달 만에 파커는 대학의 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 중 그는 학생들이 공연하고 칼리지가 검열한 연극 ''파마키우스(Pammachius)''를 둘러싸고 캠브리지 대학교 총장 스티븐 가디너(Stephen Gardiner)와 갈등을 겪었는데, 이 연극은 낡은 교회 제도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파커는 연극의 성격에 대해 조사해야 했지만, 이후 대학 당국을 대신하여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14]
4.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의 경력 (1547년 ~ 1553년)
파커의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관계는 시대와 함께 발전했고, 그는 온건파인 에드워드 시무어, 1대 서머셋 공작보다는 존 더들리, 1대 노섬벌랜드 공작 치하에서 더 높은 승진을 거두었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독일 출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 마르틴 부서가 잉글랜드로 망명한 후 그의 친구가 되었고, 1551년 부서의 장례 설교를 했다. 1552년 그는 부유한 링컨 대성당의 수석 사제(주교 밑의 지위)에 임명되었다.
5. 메리 1세 치하에서의 몰락 (1553년 ~ 1558년)
하지만 그는 메리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국외로 떠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망명 생활을 했고 메리 여왕에 의해 순교한 사람들을 이상화했던 더 열렬한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그를 달갑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사가 제임스 D. 웬은 파커가 이 기간 동안 슈롭셔 솔턴 홀의 정치가 로랜드 힐 경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4][5] 힐은 제네바 성경 출판과 관련이 있으며 1559년 파커와 함께 교회 사건 위원으로 활동했다.
슈롭셔 솔턴에 있는 로랜드 힐 경과 그의 시골 본부. 힐이 종교개혁 반대 운동 중 위험에 처했던 파커와 그의 학술 자료를 솔턴에 숨겨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파커는 권위를 존중했고, 그의 차례가 왔을 때 그는 일관되게 다른 사람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임무를 기꺼이 맡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승진시키려 했던 것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 캔터베리 대주교 (1559년 ~ 1575년)
1559년 8월 1일, 파커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서임할 주교를 찾기 어려워 12월 19일 윌리엄 바로우, 존 스코리, 마일즈 커버데일, 베드퍼드 주교 존 호드킨스가 램베스에서 서임식을 거행했다. 1604년 예수회 신부 크리스토퍼 홀리우드가 네이그스 헤드 여관에서의 부적절한 서임 의혹을 제기했으나, 신빙성을 잃었다. 파커의 서임은 왕권 최고주의에 의해서만 법적으로 유효했으며, 사용된 에드워드 서임식 예문은 메리 튜더에 의해 폐지되었고 1559년 의회에서 재정되지 않았다.
파커는 대중의 열정을 불신했고, "대중"이 교회의 개혁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그는 영감을 주는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토마스 탈리스는 그의 이름을 딴 ''파커 대주교의 시편집을 위한 아홉 개의 선율''을 작곡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가이자 학자였으며,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파커는 세속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개신교 일부의 예식 변경 요구, 장로파의 주교제 폐지 요구, 보수파의 변화 반대 등 교회 정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559년부터 발생한 예복 논쟁에서 여왕은 파커의 목표 달성을 바라면서도 강력한 통합 시도는 거부하여, 파커는 청교도 흐름에 대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1566년 파커가 간행한 『광고록』은 왕의 허락 없이 출판해야 했다.
6. 1.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와 임명
엘리자베스 1세는 중도적인 종교 정책을 추구하며 온건한 인물을 원했고, 앤 불린의 총애를 받았던 매슈 파커를 대주교로 선택했다. 1559년 8월 1일, 파커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메리 1세의 압정 이후, 파커를 성별할 권리와 의사를 가진 주교를 찾기 어려워 12월 19일까지 성별식을 치를 수 없었다. 성별식은 램버스에서 거행되었으며, 윌리엄 버로우, 존 스코리(en), 마일즈 커버데일(en), 존 호지킨스가 집례했다.[1]
이 성별의 정당성에 대해 '나그스헤드의 이야기'라는 이의가 제기되었으나, 이는 1604년 반 종교 개혁파 예수회 수도사 크리스토퍼 홀리우드가 날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국왕 수장권과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성직 수임식이 메리 1세 시대에 폐지된 점을 근거로 파커의 주교 임명이 부족하며, 사도 계승이 끊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이 주장을 일축하고, 식의 내용과 정당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1]
파커는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의 총애를 받았으며, 앤은 1536년 처형되기 며칠 전 딸 엘리자베스의 종교적 행복을 파커에게 맡겼다. 파커는 기혼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엘리자베스 1세가 바라는 대주교에게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1]
파커는 일반 시민들의 종교적 광신에 의혹을 품고 "사람들은 교회 개혁 지지자여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는 스스로 앞장서서 개혁을 하는 리더는 아니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교리, 기도서, 교회 소책자, 찬송가는 없다. 파커 협회는 56권의 서적을 발간했지만, 그중 파커의 이름을 딴 것은 서간문 한 권뿐이다. 파커는 엄격하고 온건한 인물이었고, 학자이자 경건한 기독교인이자 도덕가였다. 그의 역사 연구는 "De antiquitate ecclesiae"(고대 기독교에 관하여)를 증명했고, 아서(en), 매슈 패리스(en), 토마스 월싱햄(en) 등의 저술은 웨스트민스터의 매슈(en)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
파커는 예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여, 그가 번역한 시편이나 그가 만든 추수감사절 및 예배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종교 개혁에서 파괴된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사본들을 수집했다. 그것들은 그가 학장을 역임했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세워진 파커 도서관(en)에 소장되어 있다.[1]
6. 2. 성직 서임 논란
매슈 파커의 서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 그 성사적 유효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896년 교황청 위원회(Apostolicae Curae)는 성공회 서품이 "절대적으로 무효"라고 선고했다. 위원회는 모든 법적 및 예배적 요건을 충족하는 서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안수와 기도를 통한 "연속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황은 "형식과 의도의 결함"으로 인해 그 의식이 사도 계승(로마 가톨릭의 유효성 최소 요건)에 따라 주교를 임명하기에 불충분했다고 주장했다.[7] 구체적으로 영국 의식은 "형식", 즉 더 높은 단계의 사제로 간주되는 희생 제사 주교를 창설하려는 "의도"를 언급하지 않았고, 희생 제사를 드릴 권한을 상징하는 성배와 성반을 건네는 것과 같은 특정한 "물질"이 없다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고 여겨졌다.
1897년 캔터베리와 요크의 성공회 대주교들은 ''Saepius Officio''에서 교황의 주장을 거부했다.[7] 이 반박은 성공회 서품식에 사용된 형식과 의도의 충분성을 보여주기 위해 작성되었다. 대주교들은 서품식 서문에서 기존의 성직 서품을 계승하려는 의도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고 썼다. 파커의 서품자들이 사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있거나 서품 의식에서 명확하게 밝힌 행위를 할 의도가 부족하더라도, 교회를 대신하여 성사의 직무자들이 행한 의식의 말과 행동(식문)이 중요하며, 행위자들의 의견(옳든 그르든), 내면의 심적 상태 또는 도덕적 조건은 유일한 결정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3세기 이후로 로마 가톨릭 교회(및 기타)에서도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주교들에 따르면, 희생 제사 사제직에 대한 필요한 언급은 9세기 이전의 고대 가톨릭 서품 예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효하다고 간주하는 일부 현재 동방 가톨릭 교회 동방 의례 서품 예배나 정교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주교들은 특정한 공식을 ''sine qua non''으로 하는 것이 행위의 본질이나 유효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모든 서품 의식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두 가지 구성 요소는 기도와 안수였고, 이러한 점에서 성공회 의식 자체의 말은 서문에 명시된 대로 참여자들의 의도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했다. 그들은 유일하게 고정되고 확실한 성사적 공식은 세례 의식이라고 지적했다.[7] 주교는 이미 사제이기 때문에 "희생 제사 사제"로서 서품할 필요가 없으며, 단 ''per saltim'', 즉 부제에서 주교로 서품될 때 그 사람이 사제와 주교가 동시에 되는 경우를 제외한다. 이러한 관행은 중단되고 금지되었다.[8] 영국 서품식으로 서품받은 사제들 중 메리 1세에 의해 재서품을 요구받은 사람은 없었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고 일부는 재성유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9] 반대로 결혼한 성직자에 대해 불만을 가진 여왕은 1553년 통치 초기에 전체의 약 15%로 추산되는 모든 결혼한 성직자들에게 아내를 내치라고 명령했다.
파커는 1527년 로마와 단절되기 전에 라틴 의례로 서품받았다. 따라서 이 의식에 따르면 그는 "희생 제사 사제"였으며, 주교로 서품됨으로써 더 이상 추가될 것이 없었다. 아일랜드 교회의 서품도 성공회 서품에 대한 광범위한 비난의 일부로서 단죄되었다. 당시 교황은 에드워드 서품식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1534년부터 1553년까지 행해진 서품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효하지만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법적 및 교회법적 요건과 관련하여, 정부는 서품을 위한 모든 요건이 충족되도록 노력했다. 18명의 메리 시대 주교 중 누구도 파커의 서품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주교들은 예배, 교리 및 왕권 최고의 변화에 관한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었다. 하원은 변화를 승인했고, 상원은 압력을 받은 후 21대 18로 승인했다. 성찬 교리에 있어서 더 가톨릭적인 어조로 양보가 이루어졌고, 에드워드 6세 통치 2년차(1548년 1월~1549년), 라틴 의례가 여전히 합법적인 예배 형식이었을 때 사용되던 미사 예복과 기타 전통적인 성직자 복장의 사용이 허용되었다(1559년 기도서의 '장식 규정'은 1549년 BCP에 명시된 허용 사항을 언급).
정부는 메리 1세에 의해 은퇴하거나 망명했던 네 명의 주교를 모집했다. 윌리엄 바로우(치체스터 주교)와 존 호드킨스는 1536년과 1537년에 라틴 의례로 로마 교황청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견해에 따르면 유효한 서품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의 서품은 ''Apostolicae Curae''에 명시된 정의에 따른 기준을 충족했다. 존 스코리와 마일즈 커버데일은 1551년에 1550년 영국 서품식으로 크랜머, 호드킨스, 리들리에 의해 동일한 날 서품받았는데, 그들은 각각 1532년, 1537년, 1547년에 라틴 의례로 서품받았다. 이 서품식은 형식과 의도에서 결함이 있다고 여겨졌다. 파커의 네 명의 서품자 모두 로마 교황청과 당시 분열 상태에 있던 영국 교회에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서품받은 주교들에게 서품받았다. 두 명의 서품자가 로마에서 유효성을 인정받은 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서품식이 물질, 형식, 의도에서 결함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로마는 그 서품을 "무효"라고 간주했다.
파커는 대주교로 재직한 첫해에 11명의 새로운 주교 서품에 참여했고, 이전 통치 기간에 서품받은 두 명의 주교를 임명했다. 1559년 8월 1일, 파커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메리 1세의 압정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앞두고 파커를 성별할 권리와 의사를 가진 네 명의 주교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 12월 19일까지 성별식을 치를 수 없었다. 성별식은 램베스에서 거행되었는데, 성별을 집행한 네 명의 주교는 전 바스 및 웰즈 주교 윌리엄 버로우, 전 치체스터 주교 존 스코리, 전 엑서터 주교 마일즈 커버데일, 베드퍼드 주교 존 호지킨스였다.
이 성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나그스헤드의 이야기'라고 불리는 전혀 증거가 없는 이의가 있어 오늘날까지도 이 성별과 파커의 명성을 훼손하고 있지만, 이는 1604년 반 종교 개혁파 예수회 수도사 크리스토퍼 홀리우드가 날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파커의 성별의 정당성은 국왕 수장권에만 근거하고 있었으며, 이 성별에 사용된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성직 수임식은 메리 1세 시대에 폐지되었고, 1559년 의회에서도 효력이 부활하지 않았다. 이것을 근거로 로마 가톨릭 교회 측은 파커를 주교로 임명하는 데는 부족하며, 따라서 사도 계승이 끊겼다고 주장했다 (나그스헤드의 이야기 참조).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이 주장을 일축하고, 식의 내용과 정당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6. 3. 종교 정책과 갈등
파커는 세속 정치와 거리를 두었고 엘리자베스 1세의 추밀원에도 임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정치는 그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일부 복음주의 개혁가들은 예배 의식 변경과 특정 성직자 성복 착용을 선택적으로 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초기 장로교도들은 주교제를 원하지 않았고, 보수파는 이러한 모든 변화에 반대하며 헨리 8세 시대 교회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여왕 자신도 주교의 특권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결국 그것을 왕권의 중요한 보루 중 하나로 인정했다. 파커는 여왕이 자신의 순응을 확보하려는 시도에 대한 승인(''임프리마투르'')을 거부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라고는 주장했기에, 의회, 종교회의 또는 왕실의 지원 없이 청교도 정서의 급증에 맞서야 했다.[15]
1560년에 발표된 주교들의 ''해석과 추가 고려 사항''은 1559년의 규정보다 낮은 성복 기준을 허용했지만, 커버데일(파커를 서임한 주교 중 한 명)과 같이 런던에서 불복종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반 성복 성직자들의 욕구에는 미치지 못했다.[15]
파커가 1566년 반 성복파를 억제하기 위해 발표한 ''광고록''은 왕실의 승인 없이 발표되어야 했고, 존 폭스가 파커의 승인으로 출판한 ''교회법 개혁''은 왕실, 의회 또는 공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의회는 심지어 주교들이 신앙 문제를 결정할 권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파커는 피터 웬트워스에게 "확실히, 그런 문제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지요"라고 말했지만, 웬트워스는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께 맹세하는 바, 무엇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교황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을 교황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교황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라고 반박했다.[15]
성복에 대한 논쟁은 교회 통치와 권위의 전 영역에 걸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커는 1575년 5월 17일에 사망했는데, 청교도의 "통치" 사상이 "결국 여왕과 그녀에게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망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성공회 사제들에게 이상적인 모범을 보였다.[15]
7. 말년과 죽음 (1575년)
파커는 세속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추밀원에 임명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 정치는 그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일부 복음주의적 개혁가들은 예배 의식 변경과 적어도 특정 성직자 성복을 착용하지 않을 선택권, 심지어는 완전한 금지까지 요구했다. 초기 장로교도들은 주교를 원하지 않았고, 보수파는 이러한 모든 변화에 반대하며 헨리 8세 시대 교회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15] 여왕 자신도 주교의 특권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결국 그것을 왕권 최고의 보루 중 하나로 인정했다. 파커는 여왕이 자신의 순응을 확보하려는 시도에 대한 승인(''임프리마투르'')을 거부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라고는 주장하여 실망했다. 따라서 파커는 의회, 종교회의 또는 왕실의 지원 없이 청교도 정서의 급증을 막아야 했다.
1560년에 발표된 주교들의 ''해석과 추가 고려 사항''은 1559년의 규정보다 낮은 성복 기준을 허용했지만, 커버데일(파커를 서임한 주교 중 한 명)과 같이 런던에서 불복종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반 성복 성직자들의 욕구에는 미치지 못했다.[15]
파커가 1566년 반 성복파를 억제하기 위해 발표한 ''광고록''은 특별한 왕실의 승인 없이 발표되어야 했고, 존 폭스가 파커의 승인으로 출판한 ''교회법 개혁''은 왕실, 의회 또는 공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의회는 심지어 주교들이 신앙 문제를 결정할 권리를 다투기도 했다. 파커는 피터 웬트워스에게 "확실히, 그런 문제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지요"라고 말했다. 이에 웬트워스는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께 맹세하는 바, 무엇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교황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을 교황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교황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성복에 대한 논쟁은 교회 통치와 권위의 전 영역에 걸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커는 1575년 5월 17일에 사망했는데, 청교도의 "통치" 사상이 "결국 여왕과 그녀에게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망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성공회 사제들에게 이상적인 모범을 보였다.[15]
그는 램버스 궁전 예배당에 묻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근처의 매튜 파커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8. 유산
매슈 파커는 역사 연구와 저서 편집에 힘썼으며, 특히 ''De antiquitate Britannicæ ecclesiae''와 애써르, 매슈 패리스, 토마스 월싱햄, 웨스트민스터의 매슈 등의 저서를 편집했다. 1572년에는 주교 성경을 영국 국민에게 제공했으며, 공동기도서 작성과 39개조 신앙고백 검토 및 승인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파커는 1567년에 에인샴의 앨프릭이 지은 고대 ''삭슨어 성찬 강론''을 출판하고, ''A Testimonie of Antiquitie Showing the Ancient Fayth in the Church of England Touching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ude of the Lord''를 통해 화체설이 고대 영국 교회의 교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했다.[13]
그는 이전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집한 귀중한 사본들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기증했다. 파커 도서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소장품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다. 일부 책들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11] 온라인 파커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이러한 사본들의 디지털 이미지를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다.
8. 1. 학문적 업적
파커의 역사 연구는 그의 저서 ''De antiquitate Britannicæ ecclesiae''와 애써르, 매슈 패리스(1571), 토마스 월싱햄, 웨스트민스터의 매슈(1571) 등의 저서 편집에서 잘 드러난다. ''De antiquitate Britannicæ ecclesiæ''는 1572년 램베스에서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대주교가 인쇄공, 판화가, 채색사들을 고용하고 있었다고 한다.[13]파커는 1572년에 그의 요청으로 시작되어 그의 감독 하에 준비되고 그의 비용으로 출판된 ''주교 성경''을 영국 국민에게 제공했다. 1563년부터 1568년까지 그는 이 작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다. 그는 ''공동기도서'' 작성에도 주요한 역할을 했는데, 고대 전례에 대한 그의 숙련된 지식이 크게 기여했다. 그의 전례에 대한 숙련된 지식은 시편 번역에서도 나타난다.[13] 39개조 신앙고백이 1562년에 성직자들에 의해 검토되고 승인된 것도 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파커는 1567년에 에인샴의 앨프릭이 지은 고대 ''삭슨어 성찬 강론''을 출판했다. 그는 ''A Testimonie of Antiquitie Showing the Ancient Fayth in the Church of England Touching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ude of the Lord''를 출판하여 화체설이 고대 영국 교회의 교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했다.[13] 파커는 그의 서기관 존 조셀린과 함께 원고 연구에 협력했다.
8. 2. 사본 수집
파커는 주로 이전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집한 귀중한 사본들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그의 대학에 남겼다.[10] 그는 그의 서기관 존 조셀린과 함께 원고 연구에 협력했다.파커 도서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소장품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으며, 일부 책들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11] 이 소장품에는 성 에르켄월드에 관한 중요한 초기 자료 모음인 ''Miracula Sanct Erkenwaldi''가 포함되어 있으며, 매슈 파커 소장품(Parker 161)에 12세기 사본으로 보존되어 있다.[12]
온라인 파커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이러한 모든 사본의 디지털 이미지를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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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Norwich Maps
http://www.norwich-h[...]
Michael and Frances Holmes
2020-11-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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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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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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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tmary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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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Volum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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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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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Saepius Offi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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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Saepius Officio
[10]
논문
Old English Manuscripts in the Early Age of Print: Matthew Parker and his Scribes
University of Tennessee
2016
[11]
논문
Ancient Letters and Old Paper: How Matthew Parker (1504-1576) Understood Medieval Books
2023
[12]
서적
Selected Early English Poems IV St Erkenwald
Oxford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A testimony of antiquity concerning the sacramental body and blood of Christ; written in the old Saxon tongue before the conquest: being a homily appointed, in the reign of the Saxons, to be spoken at Easter, as a Charge, to the People. Together with the two epistles of Ælfric on the same Subject. First published, with a preface, by Matthew Parker, Archbishop of Canterbury; and the Whole regularly attested by his Grace and fourteen other Bishops; with divers other Personages of Honour and Credit. With an appendix; shewing, I. That the Doctrine of our Saxon Ancestors was the same with that of the Primitive Church, concerning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II. Comparing such Doctrine with what has been lately advanced, on the same Subject, in a Book intituled, A Plain Account of the Nature and End of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https://wellcomecoll[...]
2022-01-07
[14]
기타
[1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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