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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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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 1세는 1516년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553년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녀는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며 종교 개혁을 뒤집고 잉글랜드를 다시 교황의 지배 하에 두려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프로테스탄트를 처형하여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메리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으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칼레를 잃는 등 외교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558년 사망했으며,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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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 (잉글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메리는 높은 이마, 얇은 입술, 가운데로 가르마를 탄 머리를 하고 있다
안토니스 모르의 초상화, 1554년
칭호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
통치 기간1553년 7월 – 1558년 11월 17일
대관식1553년 10월 1일
대관식 종류메리 1세의 대관식
선임자제인 (논쟁 중) 또는 에드워드 6세
계승자엘리자베스 1세
배우자펠리페 2세 (공동 군주, 1554년–1558년)
왕가테ュー더
아버지헨리 8세
어머니아라곤의 캐서린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Mary I Signature.svg
스페인 왕비
재위 기간1556년 1월 16일 – 1558년 11월 17일
재위 형태임기
출생과 사망
출생일1516년 2월 18일
출생 장소그리니치, 플라센티아 궁전, 잉글랜드
사망일1558년 11월 17일 (42세)
사망 장소웨스트민스터, 세인트 제임스 궁전, 잉글랜드
매장일1558년 12월 14일
매장 장소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2. 출생

메리 1세는 1516년 2월 18일 그리니치의 플라센시아궁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헨리 8세와 카탈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중 유일하게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았다. 메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카탈리나는 여러 차례의 유산과 사산을 겪었으며, 1511년에 태어난 아들 콘월 공작 헨리는 태어난 지 한 달여 만에 사망했다.[197]

메리는 태어난 지 사흘 만인 2월 21일, 그리니치의 프라이어스 교회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세례를 받았다.[195] 당시 왕족의 세례 관습에 따라 대법관 토머스 울지, 고모할머니인 데번 여백작 캐서린, 그리고 노퍽 여공작 아그네스 하워드 등이 대부모가 되었다.[196] 헨리 8세의 육촌인 솔즈베리 백작부인 마거릿 폴은 메리의 견신례 후원자였으며, 견신례는 세례 직후 거행되었다. 메리의 이름은 아버지 헨리 8세의 여동생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메리 공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메리의 어머니 카탈리나는 본래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튜더와 약혼했으나, 아서가 일찍 사망하자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한 헨리 7세의 결정으로 차남 헨리(훗날 헨리 8세)와 1509년 결혼했다. 당시 헨리 8세는 17세, 카탈리나는 24세였다. 정략결혼이었지만 결혼 초기 부부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에게 카탈리나가 계속해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결국 폐경을 맞이한 것은 왕위 계승에 있어 큰 문제로 여겨졌다.

처음에는 아들을 기대했던 헨리 8세였지만, 건강하게 태어난 딸 메리를 보고 "잉글랜드에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막는 법이 없다"고 말하며 총애했고, 그녀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여겼다. 1520년에는 플랜태저넷가의 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인 솔즈베리 백작부인 마거릿 폴이 메리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어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3. 성장

메리는 1516년 2월 18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국왕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중 유일하게 유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메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캐서린은 여러 차례 유산과 사산을 겪었고, 아들 콘월 공작 헨리를 낳았으나 일찍 사망했다.

메리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그리니치의 프라이어스 교회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세례를 받았다. 대부모로는 대법관 토머스 울지, 고모할머니 데본 백작부인 캐서린, 노포크 공작부인 아그네스 하워드 등이 있었다. 헨리 8세의 육촌인 솔즈베리 백작부인 마거릿 폴은 메리의 견신례 후원자였으며, 1520년에는 메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1] 존 허시, 슬리포드 남작 경은 1530년부터 메리의 시종장이었고, 그의 아내 앤 그레이, 허시 남작부인은 메리의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아라곤의 캐서린, 1520년경, 메리의 어머니


메리는 조숙한 아이로 평가받았다.[11] 1520년 7월, 겨우 네 살 반이었을 때 프랑스 사절단 앞에서 버지널 (하프시코드의 일종)을 연주하기도 했다.[12] 어머니 캐서린은 메리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스페인의 인문주의자 후안 루이스 비베스에게 조언을 구하고 《여아 교육》(De Institutione Feminae Christianae) 집필을 의뢰하여 그 내용에 따라 메리를 교육했다.[13] 덕분에 메리는 아홉 살 무렵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14]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등 외국어와 음악, 무용 등을 배웠다.[15] 헨리 8세는 딸을 매우 아꼈고, 베네치아 대사 세바스티아노 주스티니아니에게 메리가 결코 울지 않는다며 자랑하기도 했다.[16] 메리는 부모를 닮아 창백한 푸른 눈과 붉거나 붉은 금발을 가졌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붉은 뺨을 지니고 있었다.[17]

코가 낮은 소녀, 빨간 머리의 메리


헨리 8세는 메리를 아꼈지만, 왕위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기에 결혼 생활에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18] 메리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캐서린이 폐경기를 맞으면서[19] 헨리 8세가 합법적인 남자 후계자를 얻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1525년, 헨리 8세는 메리를 웨일스로 보내 웨일스 변경 의회(Council of Wales and the Marches)를 명목상 주재하게 했다.[20] 그녀는 루들로 성에 기반을 둔 자신의 궁정을 가졌고,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많은 왕실 특권을 누렸다. 비베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녀를 웨일스 공주라고 불렀으나, 헨리 8세는 공식적으로 이 칭호를 수여하지는 않았다.[21] 메리는 웨일스 변경에서 약 3년간 머물며 정기적으로 런던의 궁정을 방문했고, 1528년 중반 무렵 런던 근처의 홈 카운티스로 거처를 옮겼다.[2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메리의 사촌이자 나중에는 장인


메리가 어렸을 때부터 헨리 8세는 유럽 왕실의 관례에 따라 그녀의 혼담을 추진했다. 메리가 겨우 두 살이었을 때 프랑수아 1세의 어린 아들인 프랑스 도팽 프랑수아와의 혼담이 오갔으나 3년 후 무산되었다.[23] 1522년, 여섯 살의 메리는 스물두 살의 사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약혼했다.[24] 그러나 이 약혼 역시 몇 년 후 카를 5세에 의해 파기되었다.[25] 이후 헨리 8세의 수석 고문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다시 프랑스와의 동맹 및 혼인 협상을 진행했다.[26] 헨리 8세는 메리가 프랑수아 1세 혹은 그의 둘째 아들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는 것을 제안했으나,[27] 결혼 없이도 프랑스와의 동맹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528년에는 메리와 그녀의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의 결혼 가능성이 논의되기도 했다.[28] 당시 베네치아인 마리오 사보르냐노는 메리가 아름다운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 훌륭한 안색을 가진 젊은 여성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29]

4. 헨리 8세의 파혼과 신분 박탈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는 어머니 캐서린 왕비가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렵다고 판단하자, 앤 불린과 재혼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파혼을 결심했다.[218]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자신의 형 아서와 이미 결혼했었기 때문에, 레위기 20장 21절을 근거로 자신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다.[30] 이에 캐서린은 아서와의 결혼이 결코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유효한 결혼이 아니라고 반박했다.[30]

당시 유럽에서는 정략결혼의 무효화가 드물지 않았으나,[218]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고 결혼이 합법하다고 선언했다.[218] 이는 코냐크 동맹 전쟁 중 로마를 약탈했던[30] 캐서린의 조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 때문일 수 있다.[30][218]

결국 헨리 8세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다.[33] 그는 캐서린을 궁정 밖으로 보내 별거시켰고,[219] 1533년 앤 불린과 결혼을 강행했다.[221]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고 앤과의 결혼을 유효하다고 선언했다.[33]

이 결정으로 캐서린은 아서의 미망인 자격인 '웨일스 공비'(Princess Dowager of Wales영어)로 강등되었고,[33] 메리는 공주(Princess)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생아로 간주되어 '레이디 메리'(Lady Mary영어)로 불리게 되었다.[33][221]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헨리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밀려났다(제1계승법 참조).[33][221] 메리의 가신들 역시 해산되었다.[222][34]

메리는 어머니 캐서린과 만날 수 없었고,[219][32] 1531년경부터는 불규칙한 월경과 우울증으로 자주 아팠다. 이것이 사춘기의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기저 질환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220][31] 1533년 12월에는 하트필드 하우스로 보내져, 아기인 엘리자베스의 시녀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223][35]

메리는 앤 불린을 왕비로, 엘리자베스를 공주로 인정하기를 단호히 거부하여 헨리 8세의 분노를 샀다.[224][36] 이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3년 동안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227][39]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메리는 자주 병을 앓았으며,[225][37]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대사였던 유스타스 샤푸이스가 그녀의 조언자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며 헨리 8세에게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226][38] 어머니 캐서린 역시 자주 아팠지만 메리는 병문안조차 허락되지 않았고,[228][40] 1536년 캐서린이 사망했을 때 메리는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처지였다.[229][41]

1536년, 앤 불린이 왕의 총애를 잃고 처형되면서 엘리자베스 역시 사생아로 선언되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다.[43] 헨리 8세가 새로 맞이한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에게 메리와 화해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44] 헨리 8세는 화해의 조건으로 메리에게 자신을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며, 부모의 결혼이 무효였고 자신이 사생아임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메리는 "하느님과 양심"에 따라 저항했으나,[45] 결국 유스타스 샤푸이스와 황제 카를 5세의 설득에 따라 강압적으로 모든 요구 조건에 동의하는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45]

아버지와 화해한 메리는 궁정으로 돌아와 가신과 개인 재산을 돌려받는 등 이전의 지위를 일부 회복했다.[46][47] 한편, 은총의 순례로 알려진 북부 지방의 반란에서 메리의 적법성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메리가 직접 연루되지는 않아 처벌받지 않았다.[50][51] 1537년, 제인 시모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낳고 사망하자 메리는 이복동생의 대모가 되었고, 제인 왕비의 장례식에서 상주(chief mourner) 역할을 했다.[52]

젊은 시절의 메리
1544년의 메리


헨리 8세는 말년에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의 노력 등으로 마음을 돌려,[62] 1543년 왕위 계승법(제3계승법)을 통해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에드워드 다음의 왕위 계승 서열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이 법에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법적으로는 사생아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63]

5. 왕실 복귀와 복권

1536년, 헨리 8세는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을 간통, 근친상간, 반역 등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 역시 박탈했다.[230]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유산을 반복하자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앤 불린이 처형된 후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된 제인 시모어는 메리와 헨리 8세의 화해를 주선했다.[231] 헨리 8세는 메리에게 자신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인정하라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232] 메리는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대사 유스타스 샤퓌와 사촌인 황제 카를 5세의 설득으로 결국 아버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233]

문서에 서명한 뒤 메리는 왕실로 복귀하여 이전의 지위를 일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리치먼드궁, 웨스트민스터궁, 햄프턴코트궁 등 여러 궁궐에 거처를 마련했으며[234], 이전 공주 시절의 재산과 시녀들도 돌려받았다. 메리는 최고급 의복을 입고 카드 도박을 즐기는 등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235]

그러나 메리의 지위 회복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은 여전히 불안감을 느꼈다. 1536년, 메리를 다시 후계자로 공식 인정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은총의 순례라는 반란이 일어났으나[236], 헨리 8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메리가 이 반란에 직접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237]

1537년,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가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으나 산욕열로 사망했다. 메리는 계모 제인 시모어의 장례식에서 애도를 주도했으며,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이복동생 에드워드의 대모가 되었다.[238]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은 메리는 다시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었다. 1539년 신성로마제국의 영주인 팔츠-노이부르크 공작 필립과의 혼담이 있었으나, 필립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무산되었다.[239] 이후 추밀원 수장 토머스 크롬웰은 클레페 공국과의 동맹을 위해 클레페 공작 빌헬름 1세와 메리의 결혼을 추진하려다, 대신 헨리 8세와 빌헬름 공작의 여동생 아나 폰 클레페 공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240] 그러나 헨리 8세는 아나의 외모에 실망했고,[241] 결혼은 6개월 만에 무효화되었다. 이 결혼을 주선했던 토머스 크롬웰은 메리와 결혼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1540년 처형되었다.[242][243]

1541년,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에 반대하며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캔터베리 대주교 레지널드 폴과 갈등을 빚었다. 헨리 8세는 폴을 직접 처벌할 수 없자, 그의 어머니이자 메리의 대모이자 전 가정교사였던 솔즈베리 여백작 마거릿 폴을 반역죄로 처형했다.[244] 이 사건은 메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245]

1542년, 헨리 8세는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마저 간통 혐의로 처형했다. 왕비가 공석이 되자 헨리 8세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메리를 불러 여주인 역할을 맡도록 했다.[246][247]

1543년, 헨리 8세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와 결혼했다.[248] 캐서린 파는 메리를 비롯한 헨리 8세의 자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미 아들 에드워드가 있었기에 왕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든 헨리 8세는 1544년, 왕위계승법을 개정하여 에드워드 다음으로 메리와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법적으로 사생아 신분이었던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 서열에 복권되었다.[249] 다만 '공주(Princess)' 칭호는 돌려받지 못하고 '레이디(Lady)' 칭호로 남았다.

6. 에드워드 6세 시기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왕위는 당시 9세였던 에드워드 6세가 계승하였다. 메리는 노퍽서퍽에식스의 왕실 영지와 헌스던, 보리유를 상속 받았다.[250] 에드워드 6세가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섭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개신교 세력이 주도하던 의회는 이 시기에 잉글랜드 교회의 전례를 통일하고 공동기도서를 발간하며 가톨릭과는 다른 신학과 전례를 규범화하였다.

한편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던 메리는 의회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였고, 사촌이자 어린 시절 약혼자이기도 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에게 외교적 압력을 요청하였다.[251] 에드워드 6세 재위 기간 동안 메리는 자신의 영지에 머무르며 궁정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252] 1550년 오랜만에 궁정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13세의 국왕 에드워드는 34세의 누이 메리에게 자신의 종교 정책을 따르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질책하였고, 메리는 모멸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253] 점차 고조되는 종교적 갈등 때문에 유럽으로의 망명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254] 에드워드 6세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의 추정 상속인인 메리에게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도록 계속 촉구했지만, 메리는 이를 거부했다.[255] 이는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7. 제인 그레이

1553년 7월 6일,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가 폐 감염(아마도 결핵으로 추정)으로 1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256] 에드워드 6세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이미 왕위계승권을 회복한 메리가 정당한 계승자였다. 그러나 의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꺼렸다. 당시 섭정이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종교만을 이유로 메리의 계승권을 박탈할 수 없었기에, 메리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모두의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다.[257] 대신 그는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손녀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를 새로운 왕위 계승자로 내세웠다.

에드워드 6세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존 더들리는 메리를 런던으로 불러 구금하려 했으나, 메리는 이 음모를 미리 경고받고[258] 급히 이스트앵글리아로 피신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공작은 가톨릭 교도들이 주축이 된 인클로저 반대 운동인 케트의 난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전력이 있었다.[259] 메리는 추밀원에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임을 선언하라는 편지를 보내고[260], 제인 그레이를 몰아내기 위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261]

7월 10일, 제인 그레이는 런던탑에 들어가 왕위 계승을 공식 선언했지만, 메리는 13일 노리치에서 자신의 즉위를 선언했다. 메리에게 지지자들이 모여들면서 이는 민중 봉기로 번져 런던으로 향했다. 노섬벌랜드 공작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참패했다. 내전을 두려워한 의회는 명분 없는 제인 그레이 추대를 주도한 노섬벌랜드 공작을 버리고 7월 19일 메리 지지를 선언했다.[262] 제인 그레이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9일 만에 폐위되어 런던탑에 갇혔다.[263] 노섬벌랜드 공작과 그의 아들 길포드 더들리 역시 체포되었다.

1553년 8월 3일, 메리는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와 함께 런던에 입성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264]

바이엄 쇼 그림, 「1553년 공주 엘리자베스와 함께 런던으로 들어가는 메리 1세 여왕」(1919)


민중들이 메리를 지지하며 봉기한 이유는 헨리 8세의 유언에 명시된 왕위 계승 순서(에드워드-메리-엘리자베스)를 에드워드 6세의 유언이 무시하고, 단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방계인 제인 그레이를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에드워드 6세의 진정한 뜻인지 의심했고, 제인이 노섬벌랜드 공작의 꼭두각시가 될 것을 우려했다. 메리는 이러한 민심을 이용하여 "잉글랜드 최초로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제인 그레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메리가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는 와이엇 반란이 일어났다. 토머스 와이엇 2세는 켄트에서 군대를 일으켜 메리를 폐위하고 엘리자베스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 반란에는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인 서퍽 공작도 연루되었다.[96] 반란이 진압된 후, 와이엇, 서퍽 공작, 제인 그레이, 그리고 그녀의 남편 길포드 더들리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98]

8. 재위 기간

에드워드 6세1553년 7월 6일 1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추밀원은 노섬벌랜드 공 존 더들리의 계획에 따라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메리는 사전에 위험을 감지하고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도움으로 런던을 탈출했다.[265] 7월 10일 제인 그레이가 왕위 계승을 공식 선언했지만, 메리는 13일 노리치에서 자신의 즉위를 선언했다. 헨리 8세의 유언에 따른 정당한 계승권자인 메리에게 지지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민중 봉기로 번져 런던으로 진군했다. 노섬벌랜드 공은 이를 진압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7월 19일 추밀원도 메리 지지를 선언했고, 런던에 입성한 메리는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266] 민중이 메리를 지지한 것은 헨리 8세의 유언을 어기고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만으로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한 에드워드 6세의 유언에 대한 의구심과, 제인이 노섬벌랜드 공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메리는 이러한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널리 국민의 지지를 받은 여왕"이 되었다.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즉위했지만, 메리 1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재위 초기부터 가톨릭 복귀를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런던탑에 갇혀 있던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스티븐 가디너 등 가톨릭 귀족들을 석방하고 측근으로 등용했으며,[265] 시녀장으로 수전 화이트를 임명하는 등 왕실 내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을 중용했다.[268] 추밀원의 다수가 제인 그레이 지지에 동조했었기에 메리는 이들 모두에게 반역죄를 묻기 어려웠고, 대신 가톨릭 귀족을 중용하는 방식을 택했다.[267] 1553년 10월 1일, 메리 1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269]

메리 1세의 재위 기간은 가톨릭 신앙을 복원하려는 시도와 그로 인한 갈등이 두드러졌다. 종교 개혁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형했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부정적인 별명을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종교정책 참조)

가톨릭 왕조를 잇기 위해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으나, 이는 잉글랜드의 스페인 종속 우려와 국내 반발을 낳았고, 결국 잉글랜드를 이탈리아 전쟁에 휘말리게 하여 대륙 영토인 칼레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세한 내용은 #결혼, #외교정책 참조) 결혼 후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상상임신으로 밝혀져 큰 실망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상상임신 참조) 또한 재위 기간 동안 계속된 흉작과 기근, 무역 쇠퇴 등으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제 참조)

메리 1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부정적이었으나, 최근 역사 수정주의 관점에서는 다른 해석도 나온다. 당시 종교 개혁이 아직 잉글랜드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가톨릭 관습에 애착을 가졌기에 가톨릭 복귀가 큰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펠리페 2세와의 결혼 역시 당시 튜더 가문의 후계 구도와 귀족 간 권력 다툼 가능성을 고려한 선택이었으며, 결혼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과 외교적 실책은 재위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고 잉글랜드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8. 1. 결혼

즉위 당시 37세였던 메리 1세는 후계자를 낳아 잉글랜드 교회가톨릭으로 복귀시키고자 결혼을 서둘렀다. 후계자가 없다면 개신교도인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이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85] 에드워드 코트네이나 추기경 레지날드 폴 등이 잉글랜드인 신랑 후보로 거론되었으나,[86] 메리는 사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87] 1553년 티치아노가 그린 펠리페의 초상화가 메리에게 전달되었다.[271][88]

1553년 펠리페 2세의 초상. 티치아노의 작품.


이 결혼은 광범위한 반대에 부딪혔다. 잉글랜드 하원과 많은 신하들은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아래 놓이거나 외국의 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다.[272][90][91] 또한, 마틸다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짧고 논쟁적인 통치를 제외하면 메리는 실질적인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이었기에, 당시 관습법인 정배권(coverture)에 따라 여왕의 권리와 재산이 남편에게 귀속될 수 있다는 전례 없는 문제도 제기되었다.[273][99] 스티븐 가디너와 같은 가톨릭 측근조차 결혼에 반대했으며,[275][92] 개신교도들은 스페인 종교 재판의 도입을 두려워했다.[93] 프랑스 역시 스페인-잉글랜드 동맹을 경계했다.[95] 이러한 반대는 결국 켄트에서 토머스 와이엇이 엘리자베스 옹립을 주장하며 일으킨 와이어트의 난으로 번졌다.[276][96] 반란은 진압되었고 와이엇과 서퍽 공작, 레이디 제인 그레이, 그리고 그녀의 남편 길퍼드 더들리 경 등이 처형되었다.[194][98] 엘리자베스는 반란 연루 혐의로 런던탑에 두 달 동안 수감된 후 우드스톡 궁전에 가택 연금되었다.[277][98]

메리는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다. 사상 초유의 여왕과 외국 군주의 결혼에 따라 메리 여왕 결혼법이 제정되어 각종 의례와 권한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펠리페는 "잉글랜드 국왕" 칭호를 얻었으나, 실제 통치권은 메리에게 종속되었다. 그는 메리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거나 외국인을 관직에 임명할 수 없었으며, 잉글랜드는 합스부르크의 전쟁에 군사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없었다.[278][101] 펠리페는 이러한 조건에 불만이었지만, 결혼을 정치적, 전략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여겨 수락했다.[279][102] 그의 측근 루이 고메스 데 실바는 이 결혼이 저지대 국가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280][103] 메리에게 이 결혼은 가톨릭 후계자를 얻을 기회였고, 태어날 자녀는 잉글랜드 왕위뿐 아니라 펠리페의 장남 돈 카를로스가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 스페인 제국까지 상속받을 가능성이 있었다.[281][104] 카를 5세는 결혼 전 펠리페에게 나폴리 왕국과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국 왕위를 양도하여 그의 지위를 높여주었다.[282][105] 두 사람은 1554년 7월 25일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06] 펠리페는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을 섞어 소통했다.[283][107]

메리와 펠리페, 한스 에워스 그림


1554년 9월 메리는 월경이 멈추고 체중이 느는 등 임신 징후를 보였으나,[108] 이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데서 비롯된 상상 임신으로 밝혀졌다.[117][118] 1555년 8월, 펠리페는 플랑드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났고, 메리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120][121] 펠리페는 1556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한 후 1557년에 잠시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 이후 메리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194] 이 결혼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에 휘말려 프랑스에게 패배했고, 대륙에 남아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1558년에 잃었다(칼레 포위전).[194]

결혼 생활과 후계자 문제 모두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메리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후계자는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외에는 없었지만,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평생 증오했으며 죽기 전날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그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194]

8. 2. 상상임신



1554년 9월, 메리 1세는 월경이 멈추고 체중이 늘었으며 아침에 메스꺼움을 느끼는 등 임신으로 보이는 증상을 보였다. 메리 본인을 포함하여 주치의와 거의 모든 궁정 사람들은 그녀가 임신했다고 믿었다.[284][108] 당시에는 출산 중 산모가 사망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의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메리가 출산 중 사망할 경우 남편 펠리페 2세가 섭정을 맡도록 하는 법안(1554년 반역법)을 통과시켰다.[285][109]

1555년 4월, 메리는 후계자 출산을 확신하며 그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를 궁정으로 불러들여 임신의 증인으로 삼았다.[286][110] 한편, 베네치아 대사 조반니 미치엘리는 펠리페 2세가 메리 사후 잉글랜드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도,[287][111] 메리의 임신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288] 펠리페 2세 본인 역시 매형인 막시밀리안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리의 임신 여부에 대해 불확실함을 내비쳤다.[112]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메리
한스 에워스가 1554년에 그린 메리. 그녀는 두 개의 다이아몬드 아래에 튜더 진주가 세팅된 보석 펜던트를 착용하고 있다.


1555년 4월 말, 메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서 런던 교구에서는 감사례가 열렸고 이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289][114] 그러나 5월과 6월이 지나도록 출산 소식이 없자, 메리의 임신이 사실은 상상임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290][115] 메리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시녀장 수전 클라렌시에스(수전 화이트)조차 프랑스 대사에게 메리가 상상임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털어놓았다.[291][116]

결국 1555년 7월, 메리의 부풀었던 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상상임신이었음이 명확해졌다.[292][117] 이는 후계자를 낳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때문에 유발된 상상임신일 가능성이 높지만,[293][118] 메리 자신은 이를 자신의 왕국 내 "이단자들을 용인"한 것에 대한 "신의 형벌"로 여겼다.[294][119] 일부에서는 난소 종양의 증상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194] 메리의 임신이 거짓으로 드러난 1555년 8월, 펠리페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플란데런으로 떠났다.[295][120] 이 일로 메리는 깊은 상심과 우울증에 빠졌는데, 베네치아 대사 미치엘리는 이를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라고 기록했다.[296][121]

상상임신 소동 이후, 메리는 엘리자베스와 화해하고 그녀를 궁정에 계속 머물게 했다.[297] 엘리자베스는 10월까지 궁정에 머물며 어느 정도 호의를 회복한 것으로 보였다.[122] 메리가 아이를 낳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자, 펠리페 2세는 다음 왕위 계승자인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 당시 또 다른 왕위 계승 후보로는 가톨릭 신자인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있었으나, 잉글랜드 내 계승 서열은 엘리자베스가 더 높았다. 펠리페 2세는 메리에게 엘리자베스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자신의 사촌인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시키도록 설득했다. 이는 가톨릭 왕위 계승을 보장하고 잉글랜드 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으나, 엘리자베스 본인이 완강히 거부했고 의회의 반대도 심해 실현되지 못했다.[298][123]

8. 3. 종교정책

1555년 주조된 메달. "메리, 잉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라는 문구를 새겼다.


메리 1세는 즉위 초 신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1553년 9월 개신교 신학자 다수를 런던탑에 투옥했다. 여기에는 존 브레드포드, 휴 라티머, 존 후퍼와 같은 잉글랜드 국교회 인물뿐 아니라, 루터교회의 존 로저스 등이 포함되었다.[299]

종교개혁으로 여러 신앙이 생겨났지만, 메리 1세는 이들을 모두 가톨릭에서 벗어난 이단으로 간주했다. 1553년 10월에 열린 첫 의회에서 메리 1세는 자신의 부모인 헨리 8세와 카탈리나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던 에드워드 시대의 종교법을 폐지했다.[300] 또한, 가톨릭 교회법에 따라 성직자의 독신 의무를 다시 부과하며, 1539년의 6개조 법령으로 회귀시켰다. 이로 인해 당시 결혼했던 성직자들은 지위를 박탈당했다.[301]

메리 1세의 최종 목표는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는 것이었으나, 이미 교회의 재산이 새 소유주들에게 넘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완전한 원상 복귀는 어려웠다. 메리 1세는 남편 펠리페 2세교황 율리오 3세와 수개월간 논의한 끝에, 수도원 토지 등 이미 소유권이 이전된 교회 재산은 새 소유주에게 인정하는 조건으로 잉글랜드 교회를 다시 로마 가톨릭 관할 아래 두기로 합의했다.[302] 1554년 말 교황이 이 조건을 수락하자, 잉글랜드에서는 과거의 이단처벌법이 부활했다.[303]

이단처벌법은 중대한 이단 행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약 800명의 부유한 개신교도들이 망명을 택했다. 이들 중에는 존 폭스와 같은 인물도 있었다.[304] 부활한 이단처벌법은 공개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표방하는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305] 1555년 2월 5일 첫 처형이 집행되었고, 런던탑에 갇혔던 개신교 신학자들이 차례로 화형대에 올랐다.[306]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는 투옥된 상태에서 동료 주교들이 화형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다.[307] 그러나 메리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했으며, 크랜머는 처형 직전 자신의 개종 의사를 철회했다.[308] 메리 1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처형된 사람은 총 283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화형 방식으로 집행되었다.[309] 이 때문에 메리 1세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192][193] 처형된 주요 인물로는 토마스 크랜머 외에도 휴 라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등이 있다.[192]

수백 년 전의 형벌인 화형을 집행하는 것은 당시 가톨릭 내부에서도 잔혹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펠리페 2세의 수행원으로 온 프란치스코회 수사 알폰소 데 카스트로는 화형 집행에 반대했고,[310] 다른 수행원 시몬 레나르는 "잔인한 처벌이 반란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311] 그럼에도 메리 1세는 재위 기간 내내 가혹한 종교 정책을 고수했다. 대중들은 이러한 잔혹 행위가 펠리페 2세의 영향 때문이라고 여겼고, 이는 잉글랜드 내 스페인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312] 개신교도들은 메리 1세에 의해 처형된 이들을 순교자로 기렸다.[313]

8. 4. 외교정책

칼레가 잉글랜드의 영토로 표시된 1477년의 지도


헨리 8세 시대부터 시작된 아일랜드 식민화 정책은 메리 1세 치세에도 계속되었다. 잉글랜드는 오늘날의 레이시주를 퀸즈 카운티(Queen's County)로, 오펄리주를 킹즈 카운티(King's County)로 이름을 바꾸고 잉글랜드인들을 이주시켰다.[314]

메리 1세는 모계 혈통을 통해 스페인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사촌인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는 가톨릭 강국인 스페인과의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으나, 잉글랜드가 스페인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로 국내의 반대가 심했다. 토마스 와이어트 등이 켄트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되었다.[194] 결국 메리는 1554년 7월, 11살 연하인 펠리페와 결혼했다.

1556년 1월 카를 5세가 사망하고 펠리페 2세저지대 국가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유럽의 정세는 변화했다. 펠리페 2세는 1556년 2월 프랑스와 휴전했지만, 저지대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긴장은 계속되었다. 1557년 3월,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메리 1세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설득했다. 메리 1세는 이에 동의했지만, 에드워드 6세 시절부터 누적된 재정 적자를 이유로 의회는 강하게 반대했다.[315]

의회의 반대로 전쟁 참여가 지연되던 중, 1557년 6월 와이어트 반란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던 토머스 스타포드가 군대를 이끌고 스카버러성을 점령하며 메리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316] 이 전쟁에서 교황 바오로 4세가 프랑스의 편을 들면서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317]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의 전쟁(제6차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은 생캉탱 전투에서 합스부르크가 군대가 프랑스에 대승을 거두면서 스페인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318], 잉글랜드는 이 전쟁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1558년, 프랑스군이 칼레를 점령하면서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 본토에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영토를 상실했다(칼레 포위전). 이 사건은 메리 1세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319], 메리 1세 본인도 이를 매우 비통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홀린셰드 연대기는 메리 1세가 "내가 죽어 심장을 열어보면, 그 안에 칼레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320] 펠리페 2세와의 결혼과 그로 인한 스페인 의존적 외교 정책은 결국 잉글랜드의 국익 손실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8. 5. 경제

메리 1세의 초상이 새겨진 실링 주화


메리 1세 치세 동안 잉글랜드는 지속적으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끊임없는 비와 홍수로 인해 작황이 부진하여 기근이 발생하였다.[321][152] 또한, 당시 잉글랜드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안트베르펀 중심의 직물 무역이 쇠퇴하면서 국가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22][153]

메리의 남편인 스페인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만, 제로섬 게임을 당연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부로부터 거의 이득을 얻지 못했다.[323][154] 펠리페 2세는 전쟁 지원 등 다양한 외교적 요구를 하며 잉글랜드로부터 받기만 할 뿐, 경제적 지원은 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잉글랜드 사략선들은 대서양에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해왔으나, 메리 1세는 남편의 국가에 대한 약탈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323][155]

이에 메리 1세 정부는 새로운 무역 활로를 모색했다. 아메리카 대신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는 한편, 세바스티안 카보트가 총독으로 있던 모스크바 회사에 왕실 칙허장을 부여하여 러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하도록 지원했다.[324][156] 이러한 정책에 따라 존 록이나 윌리엄 타워슨과 같은 모험가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며 교역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했다.[325][158] 디오고 호멘에게 세계 지도를 제작하도록 의뢰하기도 했다.[157]

펠리페 2세와 메리 1세의 모습이 함께 새겨진 식스펜스 (1554년)


재정적으로 메리 1세의 정권은 증가하는 정부 지출과 중세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 사이의 불균형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159] 잉글랜드는 오랫동안 의회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관례가 있었고, 이로 인해 세금 항목들이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특히 새로운 수입품에 대한 관세 규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중요한 수입원을 놓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리 정부는 1558년, 모든 수입품에 대한 관세율을 명시한 개정된 '요율서'(Book of Rates)를 발간했다. 이 세율표는 이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인 1604년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326][160] 메리는 에드워드 시대부터 재무경을 맡아온 윌리엄 폴렛을 유임시켜 수입 징수 시스템 감독을 맡겼다.[159]

한편, 헨리 8세에드워드 6세 시대에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화 개혁 계획을 수립했으나, 이 계획은 메리 1세 사후에야 실행되었다.[161]

9. 사망

1557년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설득하기 위해 메리 1세를 찾은 이후, 메리는 다시 한번 자신이 임신했다고 믿었다.[327][162] 그녀는 1558년 3월 출산을 예상하고, 자신이 출산 후 사망할 경우 펠리페 2세가 섭정이 되도록 유언장을 작성하였다.[328][163] 그러나 이번에도 임신은 사실이 아니었고, 메리는 결국 자신의 후계자가 개신교도인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329][164]

1558년 5월부터 메리의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330][165] 오늘날 의학계에서는 그녀의 병환을 난소 낭종이나 자궁암으로 추정하며, 이러한 질병이 그녀의 상상임신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331][166] 건강이 악화된 메리는 결국 5년 남짓한 재위 기간 끝에 1558년 11월 17일, 42세의 나이로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사망했다. 이날은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대주교 레지널드 폴 역시 사망한 날이었다. 메리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마지못해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332] 당시 브뤼셀에 있던 펠리페 2세는 여동생 후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리의 죽음에 대해 "나는 그녀의 죽음에 합당한 슬픔을 느꼈다"고 적었다.[167][332]

메리의 사망 이후 왕위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계승되었다.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333] 메리는 유언으로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 옆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12월 1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어 결국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무덤을 쓰게 되었다.[334][168] 훗날 제임스 1세는 두 사람의 무덤에 "왕국과 무덤에서 동반자로서, 우리 자매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부활의 희망 속에서 여기 잠들다(Regno consortes et urna, hic obdormimus Elizabetha et Maria sorores, in spe resurrectionislat)"라는 비문을 새겼다.[168] 메리가 사망한 11월 17일은 이후 200년 동안 '압제로부터 해방된 날'로 기념되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1세의 무덤

10. 사후

메리 1세는 즉위부터 재위까지 끊임없이 경쟁자를 상대해야 했지만,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지킨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이었다. 헨리 8세수장령 이후 억압받던 가톨릭 신도들은 메리 1세의 통치를 환영했으나[335], 개신교도들은 메리 여왕을 냉혹한 군주로 기억했다. 메리 1세 사후 잉글랜드에서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확고히 성립되었고, 이에 따라 국교회를 탄압했던 메리 1세는 광기 어린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17세기에는 이러한 종교적 박해에 대한 기억이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칭을 만들어냈다.[336]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학자 존 녹스는 그의 저서 ''여성에 대한 괴물 같은 통치에 반대하는 첫 번째 나팔 소리''(1558)에서 메리 1세를 공격했고,[171] 존 폭스는 1563년 발간한 《폭스의 순교사》(원제: ''Acts and Monuments'')에서 그녀를 비난했다.[337][172] 폭스의 책은 오랜 세월 동안 메리 1세 통치의 부당한 박해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메리를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묘사하여 이후 수 세기 동안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72] 역사가 루시 우딩은 메리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묘사에 여성혐오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메리가 한편으로는 '복수심에 불타고 사납다'는 비난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범에 대한 관용이나 남편에게 권위를 양보하는 등의 이유로 '무기력하고 약하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고 비판했다.[338][130]

20세기까지 메리 1세는 오랫동안 폭군으로 그려졌으나, 오늘날 이러한 평가는 보다 유보적인 태도로 변화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급작스러운 종교적 변화 시기에 발생한 갈등에 대해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의 입장을 종합하여 시대를 조망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339] 20세기 중반 H. F. M. 프레스콧이 메리가 편협하고 권위적이었다는 전통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 이후,[173]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수정주의 역사학은 학계에서 그녀의 평판을 어느 정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174] 크리스토퍼 헤이그와 같은 역사가들은 당시 종교 축제와 가톨릭 관습의 부활이 대체로 환영받았다고 주장하며,[175] "메리 통치 말년은 개신교의 승리를 위한 끔찍한 전주곡이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 세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76]

메리 1세의 확고한 가톨릭 신앙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 헨리 8세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외교적으로는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긴 군주로 기억되지만,[340][181] 경제적으로는 후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재정 개혁, 해군 확장, 해외 식민지 탐험 정책 등이 실제로는 메리 1세 통치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341][183]

윈체스터 주교 존 화이트는 메리의 장례식에서 "그녀는 왕의 딸, 왕의 누이, 왕의 아내였으며, 여왕이자 그 자체로 왕이었다"고 칭송했다.[169] 실제로 메리는 여러 경쟁자와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성공적으로 계승한 최초의 여왕이었으며, 통치 초기에는 특히 잉글랜드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동정을 받았다.[170]

하지만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은 신하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종교 정책은 깊은 반감을 샀으며,[180] 칼레 상실은 국가적 자존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181] 연이은 흉작 역시 대중의 불만을 키웠다.[181] 남편 펠리페 2세는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고, 메리는 그의 부재와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메리 사후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182] 존 린가드와 같은 일부 가톨릭 역사가들은 메리의 정책 실패가 본질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통치 기간이 짧았고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 등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178] 또한 당시 유럽 대륙의 가톨릭 반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잉글랜드 활동을 메리의 핵심 종교 자문이었던 레지날드 폴 추기경이 허용하지 않은 점도 지적된다.[179] 그럼에도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메리를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시각도 존재했다. 수십 년 후 존 스록모튼의 묘비명에 "행복한 기억의 여왕 메리"라고 새겨진 것이 그 예이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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