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오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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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오리족은 뉴질랜드 채텀 제도에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1791년 유럽인과 처음 접촉하기 전까지 외부 세계와 고립되어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 마오리족과 마찬가지로 폴리네시아인의 후손으로, 남섬에서 이주해 온 마오리족이 기원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모리오리족은 평화주의 문화를 따랐으나, 1835년 타라나키 마오리족의 침략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노예화되었다. 현재는 문화 부흥 운동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와이탕이 재판소 소송을 통해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모리오리어는 사멸되었지만, 모리오리 문화는 채텀 제도와 뉴질랜드 본토에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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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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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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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채텀 제도 |
인구 (2018년) | 약 1,000명 |
주요 거주 지역 (2013년) | 채텀 제도: 36명 북섬: 354명 남섬: 348명 |
언어 | 영어 마오리어 과거: 모리오리어 |
종교 | 기독교 ( 포함) |
관련 민족 | 마오리족 기타 폴리네시아인 오스트로네시아인 |
지리 | |
주요 섬 | 채텀 섬 (가장 큼) 피트 섬 (두 번째로 큼) (피트 섬 남동쪽) |
주요 장소 | 차탐호 상륙 지점 마오리족의 로드니호 상륙 지점 |
역사 | |
기원 | 폴리네시아인 |
초기 이주 | (채텀 제도) |
평화주의 전통 | 의 가르침 |
유럽인 접촉 | 1791년 |
문화 | |
전통 | 조각 직조 낚시 정원 가꾸기 |
와이나-포노 (평화 유지) | 분쟁 해결을 위한 비폭력적 접근 방식 |
언어 | |
언어 | 모리오리어 (멸종 위기) |
현재 사용 언어 | 영어, 마오리어 |
기타 | |
현재 상황 | 뉴질랜드 정부의 인정 및 보상 노력 |
2. 역사
모리오리족은 뉴질랜드 본토의 폴리네시아인과 같은 뿌리를 가졌으나, 약 1500년경 채텀 제도로 이주한 후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한 원주민이다.[17][75][76][77][78] 이들은 채텀 제도의 춥고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농업 대신 수렵 채집 생활을 영위했으며, 약 2,000명의 인구를 유지했다.[23][80] 특히 자원 부족과 고립된 환경 속에서 갈등을 피하기 위해 평화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으며, 이는 조상 누누쿠-웨누아의 가르침에 따른 것으로, 분쟁 발생 시 폭력을 최소화하고 의식적인 싸움이나 화해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나무 줄기에 조각을 새기는 덴드로글리프(모리오리어: rakau momori|라카우 모모리moh)를 통해 예술적, 의례적 표현을 남겼다.[25]
1791년 영국 HMS 채텀 선원들과의 첫 만남 이후, 유럽 물개 사냥꾼 및 고래잡이들과의 접촉이 이어졌으나, 이 과정에서 인플루엔자와 같은 외부 질병이 유입되어 인구가 감소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모리오리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35년 뉴질랜드 북섬 타라나키 지방의 Ngāti Mutunga|응아티 무퉁가mi와 Ngāti Tama|응아티 타마mi 족 마오리족의 침략이었다.[29][82] 무력으로 침입한 마오리족은 모리오리족의 평화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집단 학살과 노예화를 자행했으며, 식인 풍습까지 저질렀다.[27][28][83] 이 침략으로 인해 모리오리 인구는 1862년까지 불과 101명으로 급감했고, 모리오리 언어 사용 금지 등 극심한 문화 탄압을 겪었다.[29][85][30][86]
1860년대 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모리오리족의 문화는 점차 희미해졌다. 순수 혈통의 마지막 모리오리인으로 알려진 토미 솔로몬이 1933년에 사망하면서[34] 모리오리족이 절멸했다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으나, 오늘날 수천 명의 혼혈 후손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모리오리 후손들은 와이탕이 재판소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들은 마오리족의 침략과 노예화, 영국 왕실의 방치, 그리고 마오리 토지 법원의 불공정한 토지 분배 등에 대한 역사적 부당함을 주장했다. 오랜 법적 투쟁과 협상 끝에 2017년 뉴질랜드 정부와 1800만뉴질랜드 달러 규모의 합의에 도달했으며[90][91], 2021년에는 영국 왕실의 공식 사과, 문화 유산 반환, 재정적 보상 등을 포함한 '모리오리 청구 해결 법안'(Moriori Claims Settlement Bill)이 의회를 통과하며 역사적인 권리 회복을 이루었다.[39][40]
2. 1. 기원
모리오리족은 1791년 HMS ''채텀''호가 도착하기 전까지 외부 세계와 격리된 채 채텀 제도에서 살았던 수렵채집인이었다.[17] 그들은 뉴질랜드 본토에서 채텀 제도로 건너온 폴리네시아인 정착민의 후손으로, 이는 마오리족과 같다. 모리오리인은 폴리네시아인의 후예이지만, 채텀 제도의 고립된 환경에 적응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모리오리족의 기원과 문화, 언어에 대한 정보는 상당 부분 추정에 의존한다. 이는 1835년 마오리족의 침략으로 인한 학살, 노예화, 그리고 외부에서 유입된 질병 등으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많은 증거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18]
과거에는 적도 부근의 폴리네시아 섬들에서 직접 채텀 제도로 이주했다는 설도 있었으나, 현재 주류 학설은 모리오리족이 1500년경 뉴질랜드 남섬 남부, 특히 쿡 해협 인근에서 이주해 온 마오리족에 기원을 둔다는 것이다.[75][76][77][78] 채텀 제도 도착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피트 섬의 일부 유물은 1500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탄소 연대 측정 증거는 대부분 1500년 이후를 가리킨다.
남섬 기원설의 근거로는 모리오리어가 남섬의 Ngāi Tahu|응가이 타후mi 이위(부족)가 사용하는 마오리어 방언과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모리오리의 족보("hokopapa")와 마오리의 족보("whakapapa") 비교 결과 등이 제시된다. 모리오리족의 유전적 다양성이 낮은 점은 단 한 번, 혹은 소규모의 이주(카누 한 척 정도)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들은 남섬 남부에서 북쪽으로 항해하다 항로를 벗어나 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채텀 제도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0]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들은 피트 섬에 먼저 정착한 후 채텀 섬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19][20][21][22]
남태평양의 탁월풍 패턴을 고려할 때, 채텀 제도는 폴리네시아인의 이주 과정에서 가장 늦게 정착이 이루어진 곳 중 하나로 추정된다.[75] '모리오리(Moriori)'라는 명칭은 '진짜'를 의미하는 폴리네시아 조어 ''*ma(a)qoli''에서 유래했으며, 마오리어의 '마오리(Māori)'[79]와 동근어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이 있다.
2. 2. 채텀 제도 정착과 적응

채텀 제도는 폴리네시아인들이 원래 살았던 곳보다 더 춥고 환경이 척박했다. 자원은 풍부했지만 종류가 달랐고, 폴리네시아인들이 알던 대부분의 작물은 재배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모리오리인은 농업 대신 수렵 채집 생활 방식을 택했다. 식량은 거의 전적으로 바다에서 얻었으며, 주된 식량은 생선, 물개, 그리고 지방이 많은 어린 바닷새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섬의 인구는 약 2,000명 수준을 유지했다.[23][80]
초기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모리오리인의 생활 방식이 나타나 있는데, 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유럽인의 시각이 반영된 기록일 수 있다.
> "그들은 극도로 게을러서, 오직 배고픔에 시달릴 때만 음식을 찾았으며, 주로 바다에서 밀려온 것에 의존했는데, 좌초된 고래, 범고래 또는 돌고래는 특히 진미였으며, 종종 해안가로 밀려오는 물개나 고래 지방 덩어리 또한 그러했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좋은 영혼의 선물로 여겨졌다."[24]
푸나무(그린스톤)와 같은 문화적으로 중요한 자원이나 풍부한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리오리인은 나무 줄기에 조각을 새기는 덴드로글리프(모리오리어: ''라카우 모모리'', rakau momori)를 통해 의례적인 필요를 충족시켰다. 대부분의 덴드로글리프는 인간의 형태를 묘사하지만, 물고기나 새 같은 다른 문양도 있다.[25] 이들 중 일부는 하푸푸 / J M 바커 역사 보호 구역에 보존되어 있다.[25]
모리오리 사회는 인구가 적고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평화주의 문화를 발전시켜 전쟁을 엄격히 피했다. 분쟁이 발생하면 의식적인 싸움이나 화해를 통해 해결했다. 전쟁과 식인 풍습을 금지한 것은 그들의 조상인 누누쿠-웨누아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 "...사람들이 화를 내고 그러한 분노 속에서 치고 싶다는 의지를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엄지 손가락 두께의 막대기로만, 그리고 팔 길이 한 뼘으로 쳐야 하지만, 살갗이 긁히거나 피가 처음 보이면, 모든 사람은 명예가 만족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구전)
이러한 평화주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제한된 자원을 보존하고, 이스터 섬의 사례와 같이 자원 고갈이나 인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는 파괴적인 전쟁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전쟁 경험과 훈련의 부족은 훗날 북섬에서 온 마오리족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사회가 거의 파괴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모리오리인은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부 남자아이를 거세하기도 했다.[26][81]
2. 3. 유럽인과의 접촉 (1791-1835)
모리오리족과 처음으로 접촉한 유럽인은 1791년 11월 29일, 더스키 사운드를 경유하여 영국에서 북태평양으로 항해하던 HMS 채텀의 선원들이었다. ''채텀''의 선장 윌리엄 R. 브로턴은 섬의 이름을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존 피트, 제2대 채텀 백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고 영국의 영토로 선언했다. 상륙대는 채텀섬 북동 해안의 카잉가로아 항구에 도착했다. 유럽인들이 상륙하자 모리오리족은 처음에는 숲으로 후퇴했다. 70년 후 모리오리족의 구전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유럽인들이 피우는 파이프와 입고 있는 옷 때문에 불의 신을 품고 있는 여성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숲에서 돌아온 모리오리 남성들이 상륙대를 만났다. 짧은 기간의 적대감은 선원들이 모리오리족의 창 끝에 선물을 놓으면서 곧 진정되었지만, 교역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을 찾아 그 지역을 탐사한 후 선원들은 다시 모리오리족의 공격성을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오해가 발생하여 폭력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모리오리인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HMS ''채텀''은 모든 선원을 태우고 섬을 떠났다. 브로턴의 일기와 지역 구전 모두 양측이 이 사건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며, 어느 정도는 서로의 과잉 반응을 자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러한 첫 접촉의 아쉬움 덕분인지, 1804년에서 1807년 사이 어느 시점에 다음 유럽 선박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는 비교적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시드니에서 온 물개 사냥꾼들이었고, 이들이 경험한 환대는 곧 모리오리족이 친절하다는 평판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적어도 한 명의 모리오리족이 뉴질랜드 본토를 방문하여 마오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더 많은 배가 오면서 물개 사냥꾼들은 몇 달 동안 섬에 머무르기도 했다. 물개 사냥꾼과 고래잡이들은 점차 채텀 제도를 그들의 활동 거점으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모리오리족과 자원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돼지와 감자가 섬에 새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모리오리족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하며 식량과 의복의 원천이었던 물개는 유럽인들의 사냥으로 인해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일부 유럽 남성들은 모리오리 여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이후 마오리들이 섬에 도착하여 와레카우리(Wharekauri)에 자신들의 마을을 건설했는데, 이는 채텀 제도의 마오리식 이름이 되었다.
1830년대 중반, 채텀 제도의 인구는 약 1,600명으로 추산되었으나, 인플루엔자와 같은 외부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의 약 10%에서 20%가 사망했다. 특히, 병에 걸렸을 때 냉수에 몸을 담그는 마오리족과 유사한 당시의 치료 방식은 인플루엔자의 치명성을 더욱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2. 4. 타라나키 마오리족의 침략 (1835-1868)

1835년, 뉴질랜드 북섬의 타라나키 지방 출신으로 웰링턴에 거주하던 Ngāti Mutunga|응아티 무퉁가mi와 Ngāti Tama|응아티 타마mi 족의 마오리족 일부가 채텀 제도를 침략했다. 1835년 11월 19일, 마오리족 500명(남성, 여성, 어린이 포함)이 총, 곤봉, 도끼 등으로 무장하고, 유럽인의 배 ''로드 로드니''(Lord Rodney)를 탈취[29][82]하여 채텀 제도에 도착했다. 이 배에는 재배용으로 쓸 78ton의 감자도 실려 있었다.
뒤이어 1835년 12월 5일, 같은 배를 이용해 400명의 마오리족이 추가로 도착했다. 첫 번째 그룹이 도착한 후, 두 번째 그룹이 오기 전에 침략자들은 12세 모리오리 소녀를 살해하고 그 살점을 기둥에 매달아 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모리오리족 일부를 노예로 삼고 다른 이들을 살해했으며, 식인 풍습까지 자행하며 집단 학살을 시작했다. 두 번째 그룹이 도착하자, "족장이 이끄는, 머스킷, 곤봉, 토마호크로 무장한 전사 무리가 아무런 경고나 허락, 인사도 없이 모리오리족의 영토와 정착지를 돌아다녔다. 침략자들이 특정 지역을 원하면 그곳 주민들의 땅을 빼앗았고, 그곳에 살던 모리오리족은 이제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였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모리오리족 장로들은 테 아와파티키(Te Awapatiki)라는 정착지에서 후이(회의)를 소집했다. 침략해 온 마오리족이 자신들의 평화주의 원칙(누누쿠의 법)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부 장로들은 누누쿠의 원칙이 더 이상 현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타파타(Tapata)와 토레아(Torea)라는 두 족장은 "누누쿠의 법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생존 전략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라고 선언하며 평화 유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침략자 마오리족은 모리오리족의 평화 결정을 머스킷 전쟁 당시 흔했던 관행처럼 전쟁 준비를 위한 기만으로 해석했다.
이 오해는 와이탕이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학살을 촉발했고, 살아남은 모리오리족은 노예화되었다.[27] 한 모리오리 생존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타라나키 침략자들은] 우리를 양처럼 죽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포에 질려 덤불 속으로 도망쳐 땅굴이나 숨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 피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발각되어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살해당했다." 한 타라나키 마오리족 정복자는 "우리는 우리의 관습에 따라 그들을 소유했고,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도망치지 못했다..."[28][83]고 설명했다. 침략자들은 모리오리 인구의 약 10%를 의례적인 방식으로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여성과 아이들을 해변에 묶어 놓고 며칠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행위도 포함되었다.[84]
학살 이후 살아남은 모리오리족은 노예 신세가 되었고, 타라나키 마오리 침략자들은 모리오리 언어 사용을 금지했다. 또한 모리오리족에게 그들의 신성한 장소에 배설물로 더럽히도록 강요하며 모욕을 주었다.[29][85] 모리오리족은 같은 모리오리족이나 타라나키 마오리족과 결혼하거나 자녀를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뉴질랜드 본토에서 행해지던 일반적인 노예 제도와는 다른 형태의 억압이었다.[30][8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모리오리 여성들이 마오리족 주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 소수의 모리오리 여성은 나중에 마오리족이나 유럽인 남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일부 모리오리족은 채텀 제도 밖으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1842년에는 소수의 마오리족과 그들의 모리오리 노예들이 아남극의 오클랜드 제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물개 사냥과 아마 재배를 하며 약 20년간 생존하기도 했다.[31][32][87] 침략 직전 약 2,000명으로 추산되던 모리오리 인구는 1862년까지 단 101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모리오리 집단 학살은 희생된 인구 비율로 볼 때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집단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된다.[33]
2. 5. 분산과 동화

모리오리족은 1860년대 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얻었지만, 인구가 적어 문화가 점차 희석되었다. 침략 이전에도 모리오리 언어와 문화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젊은 세대는 Māori|마오리어mi를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을 모리오리족으로 여겼다. 모리오리 문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기록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다시는 이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1900년경 채텀 제도에는 스스로를 모리오리족이라고 밝힌 사람이 12명에 불과했다.
순수 혈통의 마지막 모리오리인으로 알려진 토미 솔로몬이 1933년에 사망했지만[34], 오늘날에는 수천 명의 혼혈 후손들이 살고 있다. 뉴질랜드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모리오리족의 인구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한편, 1843년 독일 모라비안 형제단 소속 남성 선교사들이 도착했다. 3년 뒤 모리오리 여성들과 몇 차례 결혼이 이루어졌으며, 현재 모리오리 인구의 일부는 이들 선교사의 후손이다.
2. 6. 와이탕이 재판소 소송과 권리 회복 운동
1980년대 후반, 일부 모리오리 후손들은 와이탕이 재판소를 통해 뉴질랜드 정부에 소송을 제기했다. 와이탕이 재판소는 1840년 와이탕이 조약 체결 이후 영국 왕실의 행위 또는 부작위가 조약의 약속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해 마오리족이 제기한 소송을 심리하고 권고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이 소송은 재판소가 두 원주민 집단(모리오리족과 응가티 무퉁가 마오리족)의 상반된 주장을 다루어야 했던 첫 사례였다. 소송의 주요 쟁점은 1842년 영국 왕실의 채텀 제도 병합, 모리오리족이 노예로 억류된 상황에 대한 정부의 방치, 그리고 1870년 마오리 토지 법원이 섬 영토의 97%를 응가티 무퉁가에게 할당한 결정이었다.1992년, 모리오리족의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실로드 어업 거래를 통해 뉴질랜드 어업권의 상당 부분이 마오리족에게 할당되었으나, 추가적인 조약 관련 어업 소송은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오리족, 모리오리족, 그리고 채텀 제도의 파케하(유럽계 뉴질랜드인) 주민들이 어업권을 놓고 경쟁하는 동시에, 국제 및 본토의 이익을 배제하기 위해 협력하는 복잡한 배경 속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채텀 제도 소유권에 대한 재판소의 판결 결과는 모리오리족이 실로드 거래에서 할당된 어업권의 일부를 확보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졌다. 모리오리족의 소송은 1994년 5월부터 1996년 3월까지 심리되었으며, 재판소는 모리오리족의 주장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이후 영국 왕실과 모리오리족 간의 협상으로 이어져, 2017년 1800만뉴질랜드 달러 규모의 합의가 이루어졌다.[90][91] 영국 왕실과 모리오리족은 2019년 8월 13일에 최종 합의서에 서명했다.[37][38] 2021년 11월, 뉴질랜드 의회는 '모리오리 청구 해결 법안'(Moriori Claims Settlement Bill)을 통과시켜 모리오리족의 와이탕이 조약 관련 절차를 공식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법안에 따른 합의 패키지에는 영국 왕실의 공식 사과, 문화적 및 영적으로 중요한 토지의 반환, 1800만뉴질랜드 달러의 재정적 보상, 그리고 테 완가 석호(Te Whanga Lagoon) 관리권의 50% 공동 귀속 등이 포함되었다.[39][40]
3. 문화
모리오리 문화는 채텀 제도의 독특한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했다. 폴리네시아 조상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춥고 자원이 다른 환경 속에서 수렵 채집 생활과 평화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았다. 특히 조상 누누쿠-웨누아의 가르침에 따라 전쟁을 금지하고 분쟁을 의례적으로 해결하는 전통을 세웠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보존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3][80]
또한, 모리오리인은 나무 줄기에 형상을 새기는 독특한 예술인 덴드로글리프(rakau momori|라카우 모모리mi)를 발전시켰다.[25] 이는 주로 인간 형상을 묘사하며, 그들의 정신 세계와 의례를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 유산이다.
19세기 마오리족의 침략과 이후 유럽인과의 접촉 과정에서 큰 시련을 겪었으나, 20세기 후반부터 모리오리 문화는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모리오리어와 전통 노래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44][45][95][96] 2005년에는 새로운 마라에인 코핑가 마라에가 건립되어[41][92] 문화 부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 모리오리인들은 조상의 평화주의 정신을 계승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44][47][95][98]
3. 1. 전통 문화
채텀 제도는 모리오리인의 초기 정착민들이 떠나온 폴리네시아 본토보다 더 춥고 혹독한 환경이었다. 자원은 풍부했지만 종류가 달랐고, 폴리네시아인들이 알던 대부분의 작물은 재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모리오리인은 농업 대신 수렵 채집 생활 방식을 택했다. 식량은 거의 전적으로 바다에서 얻었는데, 주로 생선, 물개, 그리고 지방이 많은 어린 바닷새를 통해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섬은 약 2,000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23][80] 초기 유럽인들의 기록 중 하나는 모리오리인의 생활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극도로 게을러서, 오직 배고픔에 시달릴 때만 음식을 찾았으며, 주로 바다에서 밀려온 것에 의존했는데, 좌초된 고래, 범고래 또는 돌고래는 특히 진미였으며, 종종 해안가로 밀려오는 물개나 고래 지방 덩어리 또한 그러했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좋은 영혼의 선물로 여겨졌다.[24]
푸나무(그린스톤)와 같은 문화적으로 중요한 자원이나 풍부한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리오리인은 덴드로글리프(나무 줄기에 형상을 새기는 것, 모리오리어로 ''라카우 모모리(rakau momori)'')를 통해 의례적인 필요를 충족시켰다. 대부분의 모리오리 덴드로글리프는 인간의 형상을 묘사하지만, 물고기나 새를 묘사한 문양도 있다.[25] 이러한 조각 중 일부는 현재 하푸푸 / J M 바커 역사 보호 구역에 보존되어 있다.[25]
모리오리 사회는 인구가 적고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분쟁이 발생하면 의식적인 싸움이나 화해를 통해 해결하는 평화주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전쟁과 식인 풍습을 금지한 것은 그들의 조상인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의 가르침, 즉 '누누쿠의 법'에 따른 것이다.
...사람들이 화를 내고 그러한 분노 속에서 치고 싶다는 의지를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엄지 손가락 두께의 막대기로만, 그리고 팔 길이 한 뼘으로 쳐야 하지만, 살갗이 긁히거나 피가 처음 보이면, 모든 사람은 명예가 만족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 구전
이러한 평화주의 원칙 덕분에 모리오리인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제한된 자원을 보존하고, 전쟁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자원 낭비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이스터 섬과 같은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에서 발생했던 파괴적인 자원 고갈이나 인구 감소를 막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외부의 침략에 대한 대비 부족으로 이어졌고, 훗날 북섬에서 온 마오리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고 거의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모리오리인은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사회적 조절 방법으로 일부 남자 아이들을 거세하기도 했다.[26][81]
현재 사멸된 모리오리어는 동부 폴리네시아어군에 속하며, 마오리어 및 쿡 아일랜드 마오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서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어휘 면에서는 마오리어와 약 70%를 공유했지만, 문법과 발음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최근에는 사라진 언어의 흔적을 보존하고 되살리기 위해 학습 자료를 제작하는 등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44][48]
3. 2. 문화 부흥 운동

오늘날 모리오리족이 직면했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는 채텀 제도와 뉴질랜드 본토에서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 부흥은 2005년 1월, 채텀 섬에 새로운 마라에(폴리네시아의 전통적인 집회소)인 코핑가 마라에가 건립되고 평화 협약이 갱신되면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다.[41][92] 2016년 기준으로, 이 마라에는 약 800명의 모리오리 후손과 3,000명 이상의 관련 자녀들이 등록되어 있다.[42][93] 코핑가 마라에와 호코메네타이 회의소는 채텀 섬의 와이탕이 마을에 위치한다.[43][94]
2001년부터는 모리오리어 어휘와 노래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44][45][95][96] 모리오리족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600만뉴질랜드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받기도 했다.[46][97] 알바트로스는 모리오리 문화에서 여전히 중요한 상징이다. 코핑가 마라에의 디자인에서도 알바트로스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일부 모리오리족은 평화의 상징으로 알바트로스 깃털을 머리에 꽂기도 한다.[44][45][95][96] 과거 갈등 관계였던 응가티 무퉁가족과의 관계도 개선되었으며, 비폭력 정신은 오늘날 모리오리족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44][47][95][98]
문화 유산 보호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02년, 뉴질랜드 정부는 채텀 섬 동해안의 타이아(Taia) 지역 토지를 매입하여 보호 구역으로 지정했으며, 이 구역은 모리오리족과 정부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또한 모리오리족은 섬에 남아있는 전통적인 나무 조각인 ''라카우 모모리''(''rākau momori'')를 보존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45][96]
4. 언어
현재 사멸된 모리오리어는 동부 폴리네시아어군에 속하며, 마오리어 및 쿡 아일랜드 마오리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상호 이해가 가능했다. 마오리어와는 어휘의 약 70%를 공유했지만, 문법과 발음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44][48]
현재 모리오리인들은 주로 영어를 사용하며, 일부는 마오리어도 사용한다. 사멸된 모리오리어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학습 자료를 제작하려는 현대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99][95]
5. 정치
2001년, 모리오리족의 주요 정치 단체 두 곳이 연합하여 호코테히 모리오리 신탁(Hokotehi Moriori Trust)을 설립했다.[45][49][96][100] 하지만 일부 내부 분쟁은 여전히 남아있다.[50][101] 뉴질랜드 정부는 이 신탁을 와이탕이 조약 관련 협상에서 모리오리족을 대표할 권한을 가진 단체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호코테히 모리오리 신탁은 2004년 마오리 어업법(Māori Fisheries Act 2004)에 따라 공인된 이위(iwi) 단체이며, 2004년 마오리 상업 양식 어업 청구권 합의 법(Māori Commercial Aquaculture Claims Settlement Act 2004)에 따라 인정받은 이위 양식 어업 단체이기도 하다. 신탁은 자원 관리법 1991에 따라 자원 이용 허가와 관련하여 '이위 당국'으로서 모리오리족을 대표하며, 투호노(Tūhono) 조직이기도 하다. 이 자선 신탁은 총 10명의 이사(수탁자)에 의해 운영되며, 이들은 채텀 제도, 북섬, 남섬에서 각각 파견된 대표들이다. 신탁의 본부는 채텀 제도의 오웬가에 위치해 있다.[43]
6. 대중 문화 속 모리오리족
19세기 말 퍼시 스미스와 엘스던 베스트의 글을 바탕으로, 마오리족이 뉴질랜드 본토에서 더 원시적인 마오리 이전의 모리오리족을 몰아냈다는 잘못된 이론이 등장했다. 이 이론은 모리오리족을 멜라네시아 기원의 키 작고 피부가 어두운 인종으로 묘사하며, 채텀 제도의 모리오리족이 이 초기 인종의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술적으로 더 발전했다고 여겨진 마오리족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인종차별주의적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식민주의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51][52][102][103] 유럽 정착민 입장에서는 마오리족을 뉴질랜드의 원주민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신들의 정착을 합리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51][52]
그러나 인종적으로 구별되는 마오리 이전의 모리오리족이라는 가설은 20세기 들어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받고 부정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인류학자 H. D. 스키너(1923년),[53][104] 민족학자 로저 더프(1940년대),[54][105] 역사학자이자 민족지학자인 아서 톰슨(1959년),[106] 그리고 마이클 킹(2000년, ''모리오리: 재발견된 사람들''),[107] 제임스 벨리치(2002년),[56] ''테 아라: 뉴질랜드 백과사전''의 K. R. 호우 등이 있다.[54][10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오리족이 마오리족보다 먼저 도착했고 매우 다르다는 잘못된 생각은 20세기 초에 널리 퍼졌다.[57][108] 특히 1916년 ''뉴질랜드 학교 저널'' 기사와[58][71] 1934년 A. W. 리드의 교과서 ''마오리의 아오테아로아 도래''[58][71]를 통해 여러 세대의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가 전파되었고,[59][109]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학계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대중에게서 바로잡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60][110]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모리오리족에 대한 왜곡된 묘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데이비드 미첼의 2004년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이를 2012년에 영화화한 작품은 19세기 중반 채텀 제도에서 마오리족에 의한 모리오리족 노예화를 다루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모리오리족 노예 '아우투아' 역에 모리오리족과 외모가 전혀 다른 가나계 영국인 배우 데이비드 자시를 캐스팅했다는 비판이 있었다.[61] 또한, 학자 가브리엘 S. 에스트라다는 영화가 마오리족의 노예 문화를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 노예제와 유사하게 부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지적했다.[61][111][112]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묘사는 대중문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오류로 지적된다.[62][113]
7. 주요 인물
- 조이 마텡가 애쉬턴
- 크리스틴 하비
- 누누쿠-웨누아: 1835년 마오리족의 침략 당시, 테 아와파티키에서 열린 모리오리족 장로 회의에서 평화주의 원칙인 '누누크의 법칙'을 고수할 것을 주장한 주요 장로 중 한 명이다. 마오리족의 호전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누쿠-웨누아와 타파타(Tapata), 트레아(Torea) 같은 장로들은 이 원칙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닌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이 회의는 평화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침략해 온 마오리족은 이를 전쟁 준비로 오인하여 대량 학살과 노예화를 자행했다.
- 키티 카라카 리와이
- 토미 솔로몬
- 히라와누 타푸
- 브렌든 투우타
- 토로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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