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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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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희는 후연의 황족으로, 385년에 태어나 407년에 사망했다. 모용수의 아들이자 모용보의 조카로, 393년 하간왕에 봉해졌다. 401년 조카 모용성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후연의 천왕으로 즉위했으나, 정태후를 자살시키고 폭정을 일삼았다. 사치스러운 토목 공사, 고구려와의 잦은 전쟁, 부훈영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407년 풍발의 반란으로 모용운이 추대되자 도주하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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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모용희
도문(道文)
생년385년
몰년407년 9월 16일
시호소문황제(昭文皇帝)
묘호없음
능묘숭평릉(徽平陵)
가족 성씨모용 (慕容)
재위 정보
국가후연
즉위일401년 9월 14일
폐위일407년 9월 16일
이전 통치자모용성
이후 통치자고운 (북연)
연호광시(光始): 401년–406년
건시(建始): 407년
가계
부황모용수
모후단귀빈(段貴嬪)
배우자부훈영 (황후)
자녀없음

2. 생애

모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황후 단씨(段氏)이다. 398년 용성(龍城, 지금의 랴오닝성 조양시)에서 일어난 모반으로 모용보가 죽고 난한이 권력을 잡았을 때, 13세의 모용희는 요동으로 작위가 격하되었다. 모용성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하간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401년 모용성이 죽자, 모용희는 태후 정씨(丁氏)의 지지를 받아 16세의 나이로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이는 모용희가 정씨와 사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즉위 후 모용희의 총애가 귀빈 부훈영에게 쏠리자, 정씨는 불만을 품고 모용희를 폐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자살했다.

이후 모용희는 귀빈 부훈영과 그녀의 언니인 귀인 부융아를 총애하여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이로 인해 용등원(龍騰苑)을 크게 짓고 경운산(景雲山)을 조성하는 등 각종 토목공사를 남발하여 국력을 낭비하였다. 또한 부융아·부훈영 자매가 민간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을 방조하고, 자신도 전국 각지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부융아가 죽자 그녀를 치료하던 왕온(王溫)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후연을 공격하자, 405년 모용희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성을 거의 함락할 뻔했다. 그러나 성에 자신과 황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공격을 늦추는 바람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9] 405년 12월에는 거란을 공격하러 갔다가 겁을 먹고 퇴각하였고, 이듬해 정월에는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407년, 황후 부훈영이 사망하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이미 대렴까지 끝난 을 열고 사망한 부훈영과 성교를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또한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모용희는 통치자로서 잔혹하고 독단적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장군 모용제(慕容提)와 장불(張佛)이 전 황태자 모용정(慕容定)을 옹립하려 하자, 모용희는 어린 조카에게도 자결을 명령했다.

402년, 모용희는 사망한 관리 부모(苻謨)의 두 딸 부송아와 부순영을 후궁으로 들였다. 그는 부순영을 특히 총애했고, 이로 인해 정씨 황후를 소홀히 하였다. 정씨 황후는 질투심과 분노를 느껴 모용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모용희는 곧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403년, 황실 정원 안에 용등원(龍騰苑)을 건설했는데, 그 면적이 2제곱킬로미터가 넘고 2만 명의 강제 노동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정원 안에 높이 57미터, 폭 500계단 규모의 인공 언덕을 건설했다.

404년, 모용희는 용등원에 소요궁(逍遙宮)을 짓고 인공 호수도 건설했다. 노동에 동원된 군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고, 그들 중 절반 이상이 더위와 과로로 사망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 부송아 비가 병에 걸려 사망하자, 모용희는 그녀를 치료하지 못한 의사 왕영(王榮)을 능지처참형에 처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부씨 비가 죽은 후, 모용희는 사냥과 여행을 좋아했던 부황후를 더욱 애지중지했다. 404년 겨울, 그들은 긴 사냥과 순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에서 5,000명이 넘는 호위병이 호랑이나 늑대의 공격, 또는 추위에 노출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405년 봄, 모용희는 부황후와 함께 고구려의 요동(遼東, 현재의 랴오양시, 랴오닝성)을 공격하여 거의 점령할 뻔했으나, 황실 마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성벽을 평평하게 만들라는 명령 때문에 실패했다.

406년, 모용희는 부황후와 함께 거란족을 기습 공격하려다가, 거란족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부황후가 전투를 구경하고 싶어하자 그는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407년, 모용희는 부황후를 위해 칭화전(承華殿)을 지었는데, 그 공사에 흙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흙이 곡물만큼 비싸졌다고 한다. 같은 해 여름, 부황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그녀를 위해 웅장한 무덤을 만들었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자들은 심하게 처벌했다.

모용희는 즉위 후 황비인 부송아와 황후인 부훈영과 함께 재정을 낭비했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사건내용
용등원 건설403년, 10여 리의 광활한 면적과 2만 명의 노동력을 들여 용등원을 만들고, 원 안에 넓이 500보, 높이 17m이나 되는 경운산(景雲山)을 축조하게 했다.[5]
소요궁 건설404년 여름, 용등원에서 소요궁(逍遙宮)을 건설하게 했다. 소요궁에는 백 개의 방이 있었고, 연못이 만들어졌다. 노동에 동원된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지 못했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더위와 피로로 죽었다.[5]
왕영 처형같은 해, 부송아가 병에 걸리자 용성 사람 왕영(王榮)이 치료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송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왕영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시체를 불태웠다.[5]
유람부송아가 죽은 후, 모용희는 더욱 부훈영과 어울리게 되었고, 404년 겨울에는 둘이 북쪽으로 백록산(현재의 통랴오 시)에 오르고, 동쪽으로 청령(青嶺), 남쪽으로 해양(海陽)에 이르기까지 유람했다. 이에 동행한 5천여 명의 군사들은 호랑이와 이리에 습격당하거나 동사했다.[5]
승화전 건설407년, 부훈영을 위해 승화전(承華殿)을 지었는데, 이 건설로 인해 흙의 가치가 곡물의 가격까지 폭등하게 되자 간언한 신하들을 참수했다.
부훈영 사망같은 해, 부훈영이 사망하자 슬픔에 잠겨 시신을 껴안고 기절했으며, 관을 만들게 한 후 그 안에서 교합했다. 죽만 먹고 신하들에게도 슬퍼하며 울 것을 강요했으며, 울지 못하는 자는 겨자를 입에 넣어 눈물을 짜내게 했다.[2]



이때를 틈타 용성에서 후연의 장군 풍발이 모반을 일으켜 모용운(고운)을 추대하였다. 모반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의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군대가 흩어지면서 용등원으로 달아나 숨어있던 모용희도 사로잡혀 처형되니 향년 22세였다.[9]

2. 1. 초기 생애 및 권력 장악

385년모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황비 단귀빈이다. 393년에 하간왕이 되었다.[2]

396년에 모용수가 사망하자 모용희의 형인 모용보가 즉위했다. 후연은 상을 틈탄 북위의 탁발규의 공격을 받아 중산(中山)이 포위되었다. 397년, 모용보는 중산을 버리고 옛 수도 용성(龍城)으로 달아났다. 이때 모용희와 형제인 모용랑(발해왕)과 모용감(박릉왕)은 아직 어렸기에 성을 나설 수 없었고, 모용륭이 맞이하였다.[3] 398년 북위와의 연이은 전쟁에 불만을 품은 단속골 등은 모용륭의 아들 모용숭을 옹립하여 모용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으로 여러 왕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모용희는 모용숭의 총애를 받아 피해를 면했다.

같은 해, 단속골을 죽인 란한이 모용보로부터 찬탈하자 모용희를 요동공으로 삼아 모용씨의 조상을 제사지내게 했다. 모용희의 조카 모용성이 란한을 죽이고 즉위하자 왕을 공으로 강등시켜 모용희는 하간공이 되었으며, 또한 도독중외제군사·표기대장군·상서좌복야·영중령군이 되었다. 400년, 모용성은 거란고구려를 공격했고, 모용희는 승리에 기여하여 모용성으로부터 그 용맹함이 모용수와 비견되었으나, 책략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용희는 모용성의 백모인 정씨와 친밀한 관계였다. 401년에 모용성이 죽자 여러 신하들은 연장자를 원하여 모용성의 태자 모용정이 아닌 동생 모용원을 추대했지만, 정태후는 태자를 폐하고 모용희를 궁으로 맞이했다. 여러 신하들이 제위를 권하자, 모용희는 모용원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즉위했다. 이로써 천왕을 칭하고 연호를 광시(光始)로 했다.

2. 2. 폭정과 실정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아들로, 황후 단씨(段氏)가 어머니이다. 398년 용성(龍城, 지금의 랴오닝성 조양시)에서 일어난 모반으로 모용보가 죽고 난한이 권력을 잡았을 때, 13세의 모용희는 요동으로 작위가 격하되었다. 모용성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하간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401년 모용성이 죽자, 모용희는 태후 정씨(丁氏)의 지지를 받아 16세의 나이로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 후 모용희의 총애가 귀빈 부훈영에게 쏠리자, 정씨는 불만을 품고 모용희를 폐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자살했다.

이후 모용희는 귀빈 부훈영과 그녀의 언니인 귀인 부융아를 총애하여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이로 인해 용등원(龍騰苑)을 크게 짓고 경운산(景雲山)을 조성하는 등 각종 토목공사를 남발하여 국력을 낭비하였다. 또한 부융아·부훈영 자매가 민간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을 방조하고, 자신도 전국 각지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부융아가 죽자 그녀를 치료하던 왕온(王溫)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후연을 공격하자, 405년 모용희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성을 거의 함락할 뻔했다. 그러나 성에 자신과 황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공격을 늦추는 바람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9] 405년 12월에는 거란을 공격하러 갔다가 겁을 먹고 퇴각하였고, 이듬해 정월에는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407년, 황후 부훈영이 사망하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이미 대렴까지 끝난 을 열고 사망한 부훈영과 성교를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또한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모용희는 통치자로서 잔혹하고 독단적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장군 모용제(慕容提)와 장불(張佛)이 전 황태자 모용정(慕容定)을 옹립하려 하자, 모용희는 어린 조카에게도 자결을 명령했다.

402년, 모용희는 사망한 관리 부모(苻謨)의 두 딸 부송아와 부순영을 후궁으로 들였다. 그는 부순영을 특히 총애했고, 이로 인해 정씨 황후를 소홀히 하였다. 정씨 황후는 질투심과 분노를 느껴 모용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모용희는 곧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403년, 황실 정원 안에 용등원(龍騰苑)을 건설했는데, 그 면적이 2제곱킬로미터가 넘고 2만 명의 강제 노동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정원 안에 높이 57미터, 폭 500계단 규모의 인공 언덕을 건설했다.

404년, 모용희는 용등원에 소요궁(逍遙宮)을 짓고 인공 호수도 건설했다. 노동에 동원된 군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고, 그들 중 절반 이상이 더위와 과로로 사망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 부송아 비가 병에 걸려 사망하자, 모용희는 그녀를 치료하지 못한 의사 왕영(王榮)을 능지처참형에 처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부씨 비가 죽은 후, 모용희는 사냥과 여행을 좋아했던 부황후를 더욱 애지중지했다. 404년 겨울, 그들은 긴 사냥과 순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에서 5,000명이 넘는 호위병이 호랑이나 늑대의 공격, 또는 추위에 노출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405년 봄, 모용희는 부황후와 함께 고구려의 요동(遼東, 현재의 랴오양시, 랴오닝성)을 공격하여 거의 점령할 뻔했으나, 황실 마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성벽을 평평하게 만들라는 명령 때문에 실패했다.

406년, 모용희는 부황후와 함께 거란족을 기습 공격하려다가, 거란족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부황후가 전투를 구경하고 싶어하자 그는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407년, 모용희는 부황후를 위해 칭화전(承華殿)을 지었는데, 그 공사에 흙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흙이 곡물만큼 비싸졌다고 한다. 같은 해 여름, 부황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그녀를 위해 웅장한 무덤을 만들었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자들은 심하게 처벌했다.

모용희(慕容熙)는 즉위 후 황비인 부송아와 황후인 부훈영과 함께 재정을 낭비했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사건내용
용등원 건설403년, 10여 리의 광활한 면적과 2만 명의 노동력을 들여 용등원을 만들고, 원 안에 넓이 500보, 높이 17이나 되는 경운산(景雲山)을 축조하게 했다.[5]
소요궁 건설404년 여름, 용등원에서 소요궁(逍遙宮)을 건설하게 했다. 소요궁에는 백 개의 방이 있었고, 연못이 만들어졌다. 노동에 동원된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지 못했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더위와 피로로 죽었다.[5]
왕영 처형같은 해, 부송아가 병에 걸리자 용성(龍城) 사람 왕영(王榮)이 치료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송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왕영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시체를 불태웠다.[5]
유람부송아가 죽은 후, 모용희는 더욱 부훈영과 어울리게 되었고, 404년 겨울에는 둘이 북쪽으로 백록산(현재의 통랴오 시)에 오르고, 동쪽으로 청령(青嶺), 남쪽으로 해양(海陽)에 이르기까지 유람했다. 이에 동행한 5천여 명의 군사들은 호랑이와 이리에 습격당하거나 동사했다.[5]
승화전 건설407년, 부훈영을 위해 승화전(承華殿)을 지었는데, 이 건설로 인해 흙의 가치가 곡물의 가격까지 폭등하게 되자 간언한 신하들을 참수했다.
부훈영 사망같은 해, 부훈영이 사망하자 슬픔에 잠겨 시신을 껴안고 기절했으며, 관을 만들게 한 후 그 안에서 교합했다. 죽만 먹고 신하들에게도 슬퍼하며 울 것을 강요했으며, 울지 못하는 자는 겨자를 입에 넣어 눈물을 짜내게 했다.[2]


2. 3. 몰락

모용성이 죽은 뒤, 모용희는 태후 정씨(丁氏)의 지지를 받아 태자 모용정(慕容定)과 평원 모용원(慕容元)을 제치고 16세의 나이로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이는 모용희가 태후 정씨와 사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9] 그러나 즉위 후 모용희의 총애가 귀빈 부훈영에게 쏠리자, 정씨는 이에 불만을 품고 사촌인 상서 정신(丁信)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시키려 했다. 이를 눈치챈 모용희는 정씨를 핍박하여 자살시키고 정신을 주살하였다.[9]

이후 모용희는 귀빈 부훈영과 그녀의 언니인 귀인 부융아를 총애하여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용등원(龍騰苑)을 크게 짓고 그 안에 경운산(景雲山)을 조성하며, 소요궁(逍遙宮)·감로전(甘露殿)·홍광문(弘光門)을 짓고 천하거(天河渠)·곡광해(曲光海)·청량지(淸涼池)를 파는 등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낭비하였다. 또한 부융아·부훈영 자매가 민간에 다니며 잔치를 벌이는 것을 방조하였고, 그 자신도 전국 각지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9] 부융아가 죽자 그녀를 치료하던 왕온(王溫)을 잔인하게 죽였다.[9]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후연을 공격하자, 405년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성을 거의 함락하였으나, 성에 자신과 황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성을 깎아 평지가 되길 기다려 짐이 마땅히 황후와 더불어 수레를 타고 들어가리라,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9]는 명령을 내려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405년 12월에는 북으로 거란을 공격하러 출정하였다가 거란의 기세에 겁을 먹고 소득 없이 퇴각하였다. 그러나 황후 부훈영이 이에 따르지 않자 목표를 변경, 치중도 버리고 3천여 리를 달려 이듬해 정월에는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9]

407년, 황후 부훈영이 사망하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을 열고 이미 대렴까지 했는데 사망한 부훈영과 성교했다.[9]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고 곡하지 않는 자를 조사하여 벌을 주었으며,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맨발로 황후 부훈영을 들고 무덤 안에다 묻어두고 장례를 치루었다.[9] 이때를 틈타 용성에서 후연의 장군 풍발이 모반을 일으켜 모용운(고운)을 추대하였다. 모반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의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군대가 흩어지면서 용등원으로 달아나 숨어있던 모용희도 사로잡혀 처형되니 향년 22세였다.[9] 모용희는 통치자로서 잔혹하고 독단적이었으며, 그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사람은 누구에게든 가혹하게 대했다.[9]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모용수
어머니단태후
배우자부훈영황후, 404년 책봉, 407년 사망
배우자부융아소의, 황후 추존, 부훈영의 언니, 404년 사망


4. 평가

모용희는 통치 기간 동안 잔혹하고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즉위 직후 모용연에게 자결을 명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정과 정신, 모용연을 처형했다.[1]

후궁인 부송아와 부순영을 총애하여 황후 정씨의 질투를 샀고, 결국 정씨는 모용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자결해야 했다.[1]

모용희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용등원(龍騰苑) 건설에는 2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고, 소요궁(逍遙宮) 건설과 인공 호수 조성으로 군인들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1]

부송아 비가 사망하자 의사 왕영을 능지처참하고 시신을 불태웠으며, 이후 부순영 황후를 더욱 총애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잦은 사냥과 순행으로 많은 호위병들이 사망했고, 부황후의 무리한 요구로 관리들이 처형되기도 했다.[1]

405년 봄, 모용희는 부황후와 함께 고구려의 요동을 공격했으나, 부황후와 함께 황실 마차를 타고 들어가기 위해 성벽을 평평하게 하라는 명령 때문에 점령에 실패했다.[1]

406년에는 거란족을 기습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모용운은 이때 화살을 맞고 모용희의 잔혹함을 두려워하여 관직을 사임했다.[1]

407년, 부황후를 위해 칭화전(承華殿)을 지었는데, 흙값이 곡물값만큼 비싸졌다고 전해진다. 부황후가 사망하자 시신성애를 저지르고 웅장한 무덤을 만들었으며, 관리들에게 강제로 울게 하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자들을 처벌했다.[1]

모용희의 폭정은 결국 풍발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풍발은 모용운을 천왕으로 추대하고 궁궐을 점령했다. 모용희는 도망쳤으나 붙잡혀 아들들과 함께 참수되었다.[1]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2011년부터 2012년까지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배우 조인표가 모용희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Tales about Chinese Emperors: Their Wild and Wise Ways Hai Feng Publishing Company
[2] 서적 晋書
[3] 서적 資治通鑑
[4] 서적 資治通鑑
[5] 서적 資治通鑑
[6] 서적 資治通鑑
[7] 문서 国号は「燕」のままだが、この時後燕は滅んで[[北燕]]になったとされる。ただし慕容雲は後燕の皇族で、実質的な建国者は馮跋であるため、高雲を[[後燕]]最後の皇帝とする場合もある。
[8] 서적 晋書
[9] 서적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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