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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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4세기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이자 기독교 신학자이다.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법학 및 수사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기독교에 귀의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설교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부유층의 사치와 부패를 비판하는 설교로 인해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와 갈등을 겪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반대 세력에 의해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동방 정교회에서 중요한 신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설교와 저술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례와 신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서방 교회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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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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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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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 표기 | 그리스어: |
출생지 | 안티오키아 |
출생년도 | 347년경 |
사망지 | 코마나 폰티카(Comana Pontica) |
사망년도 | 407년 |
숭경하는 교파 | 정교회 동방 제 교회 가톨릭 교회 성공회 루터 교회 |
기념일 | 정교회: 11월 13일 (영면 기억,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11월 26일) 1월 27일 (불후체 천이,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2월 9일) 1월 30일 (삼성성자 제,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2월 12일) 서방 교회: 9월 13일 1월 27일 |
칭호 | 정교회: 성자, 신성한 아버지, 대사제 서방 교회: 교회 박사 |
신학적 정보 | |
직업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교부 |
수호 |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육 간질 강사 웅변가 설교자 |
2. 생애
요한네스는 로마 제국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미망인이 된 어머니 밑에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381년 성직자가 되어 점차 명성을 얻었다.[104]
398년, 수도사이자 안티오키아에서 명망 높은 성직자였던 요한네스는 넥타리오스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추대되어 착좌했다.[105] 그러나 그의 착좌를 반대했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테오필로스와, 요한네스에게 직무 태만으로 질책받거나 면직된 일부 성직자들은 그에게 반감을 품었다.[105]
또한, 요한네스는 부유층의 사치를 비판하는 설교를 자주 했는데, 이로 인해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황후는 요한네스의 반대파들과 결탁하여 그를 고발했다.[105]
이후 요한네스는 지지자들과 반대파, 황제 측 사이의 갈등 속에서 체포와 석방, 유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니케아로, 이후 카파도키아의 쿠쿠수스(굑순)로 유배지가 변경되었다.[105]
결국 407년, 더 외진 흑해 연안으로 이송되던 중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코마나 폰티카에서 사망했다. 임종 직전 성찬례를 거행하고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아가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105]
사망 약 30년 후,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고 유해(불후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당시 수많은 민중이 그의 유해를 맞이했다고 한다.[105]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요한은 347년[10][11][12] (일부 자료에서는 349년으로 언급[122]) 로마령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 하타이주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고위 장교였으나 요한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이후 어머니 안투사(Anthusa) 밑에서 자랐다.[13] 안투사가 이교 신자였는지 기독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13] 요한은 368년 또는 373년에 세례를 받았고, 교회의 하위 성직 중 하나인 독경사가 되었다.어머니는 도시에서 영향력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요한은 당대 유명한 이교도 수사학자였던 리바니우스 밑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14] 그는 리바니우스에게서 법학, 수사학,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 등을 배웠으며,[14] 이는 훗날 그가 수사학자 또는 변호사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리바니우스는 요한을 자신이 길러낸 최고의 학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기독교 역사가 소조멘에 따르면 리바니우스는 임종 직전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서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요한네스였을 것"이라며 자신의 후계자로 요한을 생각했음을 내비쳤다고 한다.[15]
나이가 들면서 기독교에 더욱 깊이 헌신하게 된 요한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타르수스의 디오도로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375년경 은둔 수사가 되어 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했다.[16] 이후 약 2년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서서 성경을 암송하는 등 극단적인 고행을 이어갔다.[16] 그러나 이러한 생활 방식으로 인해 위와 신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등 건강이 크게 나빠졌고, 결국 안티오키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16]
2. 2. 은수 생활과 사제 서품
요한네스는 유명한 이교도 수사학자 리바니우스 밑에서 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한 뒤 수사학자가 되었다. 스승 리바니우스는 요한네스를 자신이 길러낸 최고의 학자로 평가했으며, 소조멘에 따르면 임종 직전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서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요한네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22] 이후 안티오키아 학파의 타르수스의 디오도로스에게 신학을 공부하며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어머니 안투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은둔 수사가 되어 성경 읽기와 고행에 전념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고행으로 건강이 크게 나빠지자 결국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381년,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오스 주교에게 부제 서품을 받았다.[122] 멜레티오스 주교가 선종한 후, 386년에는 그의 뒤를 이은 플라비아누스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122]
이후 12년(386년~397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목 활동을 펼치며 《사제직》(De Sacerdotio)이라는 책을 저술했다.[122] 이 시기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 대성당인 금교회(Golden Church)에서 행한 설교, 특히 성경 강해와 도덕적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설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설교는 풍유적 해석을 중시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성경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실용적인 내용이 많았고, 이는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특히 자선과 기부를 강조하며 가난한 이들의 영적, 물질적 필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부와 사유 재산의 남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몸을 존경하고 싶습니까? 그가 헐벗었을 때 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비단 옷을 입고 성전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밖에서 그가 춥고 옷이 없을 때 그를 돌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또한 "네가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습니다... 성찬례 식탁에 금잔이 가득 차 있는데 당신의 형제가 굶어 죽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먼저 그의 배고픔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남은 것으로 제단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19]
387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티오키아에 특별세를 부과하자 시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봉기했다. 격분한 시민들은 황제와 황족들의 조각상을 끌고 다니며 훼손하고 공중 목욕탕을 파괴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분노한 황제는 안티오키아 시 전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플라비아누스 주교가 황제를 설득하여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 당시 사순절 기간 동안 요한네스는 20회가 넘는 설교를 통해 시민들에게 잘못을 뉘우치도록 호소했고, 그의 설교는 시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2. 3.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넥타리오스가 사망하자, 안티오키아에서 명성이 높았던 요한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만장일치 추대로 398년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05]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도 그는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 때문에 많은 반발을 샀고 적들도 생겨났다.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이 요한네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받자 그를 제거하려 했다.[105] 또한 요한네스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 수사들에게 독신 생활을 요구하는 등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이러한 강직함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테오필로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테오필로스는 요한네스의 지위를 질투했으며, 요한네스에게 직무 태만으로 질책받거나 면직된 주교들도 그에게 반감을 품었다.[105]
403년, 테오필로스는 '참나무 시노드'에서 요한네스를 여러 죄목으로 모함하여 기소했고, 요한네스가 출석하지 않자 그를 단죄하고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켰다. 에우독시아 황후는 이를 기회 삼아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요한네스를 비티니아로 유배 보냈다.[123][105] 그러나 요한네스를 존경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테오필로스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때마침 지진이 일어나고 에우독시아 황후가 유산하자, 황후는 불안감에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네스를 다시 불러들이도록 촉구했다.[124] 참나무 시노드는 무효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독시아 황후가 대성당 바깥 아우구스테움 광장에 자신의 은상(銀像)을 세우려 하면서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125] 결국 다음 해 열린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와의 불화와 황후 비판 설교 등을 이유로 다시 퇴임 명령이 내려졌으나 요한네스는 불복했다. 404년 부활절 세례식 도중 황제의 군대가 난입하여 신자들을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요한네스의 지지자들은 희생되었다.[126] 요한네스 자신도 다시 해임되어 카파도키아의 굑순으로 유배되었다.[126][105] 그의 유배 소식에 또다시 폭동이 일어나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이 불타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124]

유배를 떠나기 직전, 요한네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1세, 밀라노 주교 베네리우스, 아퀼레이아 주교 크로마티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다.[29][30][31][123]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지원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하려 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 황제를 압박하여 요한네스를 돕고자 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3] 405년, 교황이 요한네스를 변호하기 위해 브레시아의 가우덴티우스 주교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고 감금한 뒤 이탈리아로 돌려보냈다.[33][123]
요한네스는 쿠쿠수스 유배지(404년~407년)에서도 서신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34] 유배지에는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했다.[105] 그의 영향력을 우려한 당국은 407년, 그를 더 외진 흑해 연안의 피티우스(현재 조지아)로 다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혹독한 이송 과정에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인 407년 9월 14일 코마나 폰티카(현재 터키 토카트 주의 귀메넥)에서 사망했다.[34][126][105] 그는 코마나의 바실리스쿠스 성당 부속 성직자들의 공동체 앞에서 성찬례를 행한 뒤,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el"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35][124][105]
그의 죽음은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 사이의 감정적 골을 깊게 만들었다. 요한네스가 사망한 지 약 31년 후인 438년, 총대주교 프로클로스의 노력으로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에우독시아 황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러주었다.[127][105] 콘스탄티노폴리스 해협은 그의 유해를 맞이하려는 군중의 배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105]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십자군 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하는 과정에서 그의 유해는 파헤쳐져 로마로 옮겨지는 비극을 겪었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안장되었다.[128][129]
요한네스의 유배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제니퍼 배리는 그가 아리우스주의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웬디 메이어와 제프리 던을 포함한 다른 역사가들은 "증거의 과잉은 요한의 떠난 직후와 사망 후 몇 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요한파와 반요한파 진영 사이의 투쟁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며,[36] 당시 교회 내 정치적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2. 4. 갈등과 유배
397년 넥타리오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안티오키아에 있던 요한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만장일치 추천과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임명으로 39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되었다.[105] 그는 뛰어난 학식과 명쾌한 설교로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탐욕을 강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 설교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특히 청빈 의무를 지키지 않는 성직자들을 추방하고, 사제, 수녀, 수사들에게 독신 생활을 요구하는 등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요한네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받자 그를 제거하려 했다.[105] 또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테오필로스 역시 요한네스의 강직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요한네스의 착좌를 반대했으며, 요한네스에게 직무 태만으로 질책받거나 면직된 성직자들과 함께 그를 미워했다.[105]
403년, 테오필로스는 '참나무 시노드'를 열어 요한네스를 여러 죄목으로 기소했다. 요한네스가 시노드에 출석하지 않자, 테오필로스는 그를 유죄로 판결하고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켰다. 에우독시아는 이 기회를 이용해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설득하여 요한네스를 비티니아로 유배 보냈다.[123]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존경하던 대주교의 유배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로스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그날 밤 지진이 일어나고 황후 에우독시아가 유산하자, 황후는 불길함을 느껴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네스를 다시 불러들이도록 촉구했다.[124] 참나무 시노드는 무효화되었고 요한네스는 복귀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우독시아가 대성당 바깥 아우구스테움 광장에 자신의 은상(銀像)을 세우려 하자, 요한네스는 이를 우상숭배에 가깝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황후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125] 다음 해(404년) 열린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와의 불화와 황후 비판 등을 이유로 요한네스는 다시 해임 명령을 받았으나 불복했다. 404년 부활절 세례식 도중 황제의 군대가 난입하여 신자들을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요한네스의 지지자들은 큰 희생을 치렀다.[126] 결국 요한네스는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카파도키아의 쿠쿠수스 (굑순)로 유배되었다.[105][33] 그의 유배 소식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다시 폭동이 일어나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이 불타기도 했다.[124]
유배를 떠나기 전, 요한네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1세, 밀라노 주교 베네리우스, 아퀼레이아 주교 크로마티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다.[29][30][31]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지원을 받아 사태에 개입하려 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네스를 도울 것을 압박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를 거부했다.[123] 405년, 교황은 브레시아의 가우덴티우스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했지만,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의 입성조차 막고 감금한 뒤 돌려보냈다.[33]
유배지에서도 요한네스는 서신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쿠쿠수스로 찾아와 그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원했다.[105] 이에 당국은 그를 더 외진 곳인 흑해 연안의 피티우스 (현재 조지아)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407년 가을, 새 유배지로 향하던 중 혹독한 환경 속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코마나 폰티카 (현재 터키 토카트 주의 귀메넥)에서 사망했다.[126][34] 그의 마지막 말은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el"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영광)이었다고 전해진다.[124][35]
요한네스의 유배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제니퍼 배리는 그가 아리우스주의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웬디 메이어와 제프리 던 등 다른 역사가들은 요한네스 사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진 요한파와 반요한파 간의 극심한 갈등에 주목하며, 정치적 및 교파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36]

요한네스의 죽음은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사이의 감정적 골을 깊게 만들었다. 그가 죽은 지 약 31년 후인 438년 1월 28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프로클로스(434–446)의 노력과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우독시아의 아들)의 허가로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성 사도 교회에 안치되었고, 황제가 직접 엄숙한 장례를 치렀다.[127][38] 콘스탄티노폴리스 해협은 그의 유해를 맞이하려는 민중들의 배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105]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면서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로 돌아와 성 제오르지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128][129]
2. 5. 복귀와 재유배
요한네스 대주교가 비티니아로 유배되자 그를 존경하던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로스 대주교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같은 날 밤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지진이 일어나고 황후 에우독시아가 유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황후는 이를 불길하게 여겨 황제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네스를 다시 불러들이도록 촉구했다.[124] 결국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요한네스를 복귀시켰고, 그를 단죄했던 참나무 시노드는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황후 에우독시아가 대성당 근처 아우구스테움 광장에 자신의 은으로 만든 동상(은상)을 세우려 하자, 요한네스 대주교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다시 황후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다음 해(404년)에 열린 종교회의에서는 알렉산드리아와의 해묵은 불화와 더불어, 요한네스가 설교에서 황후를 비판했다는 점[125]을 들어 다시 그의 퇴위를 결정했다.
요한네스 대주교는 퇴임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404년 부활절 세례 의식 도중 황제의 군대가 대성당에 난입하여 신자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으며, 요한네스의 지지자 다수가 희생되었다.[126] 이 사건 직후 요한네스는 다시 대주교직에서 해임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가 수도를 떠나 유배길에 오르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124]
2. 6. 죽음과 명예 회복

동로마 황후 에우독시아와의 갈등은 황후가 대성당 바깥 아우구스테움 광장에 자신의 은상(銀像)을 세우려 하면서 다시 격화되었다.[125] 요한네스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결국 다음 해(404년)에 열린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회와의 불화 및 황후에 대한 비판 등을 이유로 다시 면직되었다.[125]
요한네스는 퇴임 명령을 거부했다. 404년 부활절 세례 의식이 진행되던 중, 황제의 군대가 대성당에 난입하여 신자들을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요한네스의 지지자들이 다수 희생되었다.[126] 결국 요한네스는 다시 해임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자,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나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다.[124]
유배를 떠나기 직전, 요한네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교황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협력하여 이 문제에 개입하려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네스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3]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이 파견한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입성을 거부당하고 감금되었다가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 지역의 새로운 유배지인 피티우스(Pityus)로 이송되던 중, 코마나(Comana Pontica)에서 사망했다.[126][105] 뙤약볕과 비를 피하지 못하고 계속 걷게 하는 등 혹독한 이송 과정이 그의 쇠약한 몸을 더욱 악화시켰다.[105] 임종 직전 성찬례를 집전하고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독사 토 테오 판톤 헤네켄el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이었다고 전해진다.[124][105] 그의 죽음은 이미 벌어져 있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사이의 감정적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요한네스는 사망 직후부터 성인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36] 그의 사후 약 31년이 지난 43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프로클로스의 노력으로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프로클로스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요한네스를 기리는 설교를 통해 분열되어 있던 요한네스 지지자들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여론을 형성했으며[37][38], 황제의 허가를 얻어 그의 유해(불후체)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했다. 438년 1월 28일, 그의 유해는 성 사도 교회에 안치되었다.[38]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에우독시아 황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직접 장례를 엄숙하게 거행했다.[127] 콘스탄티노폴리스 해협은 그의 유해를 맞이하려는 민중들의 배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105]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소속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약 800년이 지난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방 정교회와의 화해 제스처로 요한네스의 유해를 다시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반환하여 이장하도록 했다.[128][129]
동방 정교회에서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를 카파도키아 교부인 바실리오스, 그레고리오스 신학자와 함께 '세 위대한 성직자(성교부)이자 세계적 교사'로 존경하며, 매년 1월 30일을 세 성교부 축일로 기념한다.[39] 또한 동방 정교회는 그를 위해 여러 축일을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월 27일(코마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물 이송 기념), 9월 14일(선종 기념일), 11월 13일(선종 소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날짜를 기념, 10세기 이후 9월 14일 축일에서 옮겨짐) 등이 있다.[40][41][42][43][44]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1908년 교황 비오 10세가 그를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45] 그의 설교 중 파스카 설교는 동방 정교회에서 부활절 자정 성무일도 때 낭독되는 것으로 유명하다.[46]
2. 7. 유해 반환
407년 가을, 소아시아 폰투스의 새로운 유배지 피티우스로 가던 중 코마나 폰티카(Comana Pontica)에서 사망하였다.[126][105] 그의 마지막 말은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독사 토 테오 판톤 헤네켄grc(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영광)이었다고 전해진다.[124][105]그가 죽은 지 약 30년 후인 43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프로클로스의 노력으로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받았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으며,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그를 유배 보냈던 황후 에우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러주었다.[127] 콘스탄티노폴리스 해협은 그의 유해를 맞이하려는 민중들의 배로 가득 찼다고 한다.[105]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하는 과정에서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지는 비극을 겪었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결정으로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현 이스탄불)로 돌아와 이장되었다.[128][129]
3. 설교와 저술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이자 다작의 저술가로 명성을 떨쳤다.[66] 안티오크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사목 활동 기간 동안 그는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과 통찰력 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담은 수많은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을 따라 성경을 문자적이고 실용적으로 해석하여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때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관련된 풍유적 해석도 사용했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화법, 그리고 뛰어난 웅변술 덕분에 그의 설교는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속기사들에 의해 기록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설교는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자선을 강조하는 내용, 이교 문화와 관습을 경계하는 내용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때로는 논쟁적인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설교 활동 외에도 그는 『사제직에 관하여』와 같은 중요한 신학 논문들과 다수의 서신을 포함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와 저술은 다른 그리스 교부들의 저작보다 더 많이 현존하며[85], 오늘날까지도 그의 신학 사상과 영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동방 기독교에서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삼대 성직자 중 한 명으로 존경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그리스어 원본뿐만 아니라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85]
3. 1. 주요 설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안티오크에서 12년 동안(386–397년) 사제로 봉직하며, 특히 성경 구절과 도덕적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설을 담은 설교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설교는 안티오크의 대성당인 황금 교회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성경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실용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이는 성경의 풍유적 해석을 선호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는 대조적인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직접적인 설교 방식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는 자선 기부를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 필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부와 개인 재산의 남용을 강하게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몸을 존경하고 싶습니까? 그가 헐벗었을 때 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비단 옷을 입고 성전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밖에서 그가 춥고 옷이 없을 때 그를 돌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또한 "네가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습니다... 성찬례 식탁에 금잔이 가득 차 있는데 당신의 형제가 굶어 죽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먼저 그의 배고픔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남은 것으로 제단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19]
또한 그는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고 설교하며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경계했다.
그의 설교가 가진 영향력은 387년 안티오크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난다. 당시 시민들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가족 조각상을 훼손하는 소동을 벌이자, 크리소스토모스는 사순절 기간 동안 20편 이상의 설교를 통해 시민들에게 잘못을 뉘우치도록 호소했다. 이 설교는 시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안티오크는 황제의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문화 속 이교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극장, 경마 등 대중적인 이교 오락과 향락을 강하게 비난했으며, 특히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을 질책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에게 아모스나 오바댜가 누구인지, 사도나 예언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묵묵부답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 말이나 기수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궤변가나 수사학자보다 더 엄숙하게 대답할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된 후에도 그의 설교는 직설적이었으며, 때로는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와 같은 권력자들과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의 과도한 옷차림을 비판하는 설교가 황후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여겨지면서 에우독시아의 미움을 샀다. 또한 자신의 대성당 근처에 세워진 에우독시아의 은제 조각상 헌정식을 이교적이라고 비난하며, "다시 헤로디아가 광분하고, 다시 춤을 추며, 다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기를 원한다"고 설교하여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상기시키며 황후를 강하게 비판했다.[26] 이러한 설교들은 그가 두 차례 추방되는 원인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대한 설교에서는 '예수를 저주하는 자'를 악령에 씌어 난폭하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했다.[130]
현재까지 전해지는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집은 방대하며, 신약성경(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과 구약성경(특히 창세기)에 대한 수백 편의 주석 설교를 포함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창세기 67편, 시편 59편, 마태오 복음서 90편, 요한 복음서 88편, 사도행전 55편 등이 있다. 이 설교들은 속기사들에 의해 기록되어 유포되었으며, 당대의 수사학적 관습을 따르면서도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 유대교 비판 설교 ===
안티오크에서 사제 생활을 시작한 첫 2년(386–387년) 동안, 크리소스토모스는 유대인 축제나 안식일 준수, 할례, 성지 순례 등 유대교 관습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 소위 "유대교화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8편의 설교를 했다.[52] 당시 안티오크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교류가 잦았는데, 크리소스토모스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기독교인들의 신앙 정체성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53] 그는 특히 기독교 여성들이 유대교 전례의 장엄함이나 로쉬 하샤나의 쇼파르 소리에 매료되어 회당을 찾는다고 비판했다.[54]
이 설교들은 그리스어로 Κατὰ Ἰουδαίων|카타 유다이온el, 라틴어로는 Adversus Judaeos|아드베르수스 유다이오스la('유대인들을 반대하여')로 알려져 있다.[55] 이 설교들은 당시 논쟁에서 흔히 사용되던 수사학적 형식인 '프소고스'(psogos, 비난)의 형태를 띠고 있어, 상대를 강하게 비난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문학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크리소스토모스를 현대적인 의미의 "반유대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집단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고[57],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체했다는 대체 신학적 관점을 드러낸다는 비판도 존재한다.[56] 그의 영향력 때문에 이 설교들은 결과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서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 동성애 비판 설교 ===
크리소스토모스는 로마서 1장 26절에 대한 네 번째 설교에서 동성애를 강하게 비판했다.[58] 그는 남성 간의 성행위를 "자연에 대한 모욕"으로 규정하며, 특히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남성이 지속적인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59] 또한 여성 간의 동성애 역시 비판하며, 이러한 행위의 원인을 "사치"로 지목했다. 그는 동성애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지옥에서의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59] 일부 학자들은 크리소스토모스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초기 기독교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소돔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우호적인 도시'에서 '성적 범죄가 만연한 도시'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60] 그러나 유다서 등 신약성경에서 이미 소돔의 죄를 동성애와 연결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61][62]

3. 2. 주요 저술
현재 전해지는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 중에는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와 같은 설교가 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대한 설교에서는 '예수를 저주하는 자'를 악령에 씌어 난폭하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며 비판했다.[130]크리소스토모스는 안티오크에서 사제로 봉직한 12년(386–397년) 동안, 특히 성경 구절 해설과 도덕적 가르침에 대한 통찰력 있는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성경 여러 책에 대한 설교들이다. 그는 설교에서 자선 기부를 강조하고 가난한 이들의 영적, 육체적 필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부와 개인 재산의 남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스도의 몸을 존경하고 싶습니까? 그가 헐벗었을 때 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비단 옷을 입고 성전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밖에서 그가 춥고 옷이 없을 때 그를 돌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또한 "네가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습니다... 성찬례 식탁에 금잔이 가득 차 있는데 당신의 형제가 굶어 죽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먼저 그의 배고픔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남은 것으로 제단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19]
그의 성경 이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해석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인 문자적 해석에 가까웠다. 이로 인해 그의 설교 주제는 실용적이었고 성경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설교 방식은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안티오크 시절, 그의 설교가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387년, 시민들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 가족의 조각상을 훼손하는 소동을 벌이자, 크리소스토모스는 사순절 기간 동안 20편 이상의 설교를 통해 시민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이 설교들은 시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안티오크는 황제의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시절(397-404년)에도 그의 설교는 계속되었으나, 더욱 격동적인 상황에 놓였다. 그는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의 사치와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는데, 특히 아야 소피아 근처에 세워진 에우독시아의 은 조각상 헌정식을 이교적이라 비난하며 "다시 헤로디아가 광분하고, 다시 춤을 추며, 다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기를 원한다"[26]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빗댄 것으로, 결국 그의 두 번째 추방으로 이어졌다.[27]
크리소스토모스의 현존하는 설교집은 방대하며, 신약성경(특히 사도 바울 서신)과 구약성경(특히 창세기)에 대한 수백 편의 주석 설교를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창세기에 대한 67편, 시편에 대한 59편, 마태오 복음서에 대한 90편, 요한 복음서에 대한 88편, 사도행전에 대한 55편의 설교가 남아 있다. 이 설교들은 속기록으로 기록되어 유포되었으며, 당시 수사학적 관습을 따르면서도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도시 문화 속 이교 관습에 대한 비판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극장, 경마 등 대중적인 오락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을 질책했으며, 부자들에게는 과시적 소비를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이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데, 당신의 배설물을 은제 변기에 담아 받을 만큼 그러한 존경을 표하는가?
이와 더불어, 그는 자선의 필요성과 금식과 기도와 함께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글을 썼다. 예를 들어 "자선 없는 기도는 결실이 없다."
설교 외에도 여러 논문들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부제 시절(386년 이전)에 쓴 초기 논문인 ''수도 생활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자녀를 수도원에 보내려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미 그의 시대에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아들들을 수도사들에게 교육받도록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고 썼다.[63] 390/391년에 작성된 ''사제직에 관하여''는 사제직에 대한 그의 숭고한 이해를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지침''과 ''신의 본질의 불가해성에 관하여''[64] 등의 저술과 여부제 올림피아스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를 썼는데, 이 중 17개가 남아 있다.[65]
크리소스토모스는 기독교 전례, 특히 성찬 예식(성체 성사) 거행에 사용되는 신성한 전례의 기도문과 의식을 개정하여 교회의 전례 생활을 조화롭게 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동방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신성한 전례''를 일반적인 성찬 전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그의 정확한 기여 정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다.[66]
4. 신학 사상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뛰어난 설교가이자 저술가로서, 그의 신학 사상은 동방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서방 기독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지만, 그의 저술은 다른 그리스 교부들의 저작보다 더 많이 현존하며 오늘날까지 연구되고 인용되고 있다.[66] 그는 일반적으로 바실리오스 대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세 위대한 성직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신학은 주로 설교를 통해 표현되었는데, 이는 성경 해석, 특히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로의 저작과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준다. 그의 성경 해석 방식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을 따라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비유적 해석을 사용하기도 했다.
크리소스토모스의 신학 사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사회 윤리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그는 설교를 통해 당시 만연했던 부자들의 사치와 과시적 소비를 강하게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과 돌봄을 강조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여러 병원을 설립하는 등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선 없는 신앙은 공허하다고 역설했다.[22][23]
또한 그는 기독교 전례, 특히 성찬례 거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개정한 기도문과 의식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찬예배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동방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전례 양식이다.[66] 다만 그의 정확한 기여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그의 주요 저술로는 부제 시절에 쓴 ''수도 생활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 사제직에 대한 그의 높은 이해를 보여주는 ''사제직에 관하여'', 그리고 ''예비 신자들을 위한 지침'', ''신의 본질의 불가해성에 관하여'' 등이 있다.[64] 또한 여부제 올림피아스에게 보낸 17편의 편지도 남아 있다.[65]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당시 도시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비판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직자 개혁을 시도했지만, 저항에 부딪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66] 그의 신학 사상은 설교와 저술을 통해 후대에 전해졌으며, 특히 동방 기독교 신학과 영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4. 1. 성경 해석
크리소스토모스의 현존하는 설교집은 방대하며, 특히 신약성경 (특히 사도 바울의 저작)과 구약성경 (특히 창세기)에 대한 수백 편의 주석 설교를 포함하고 있다. 그의 주석 작품 중에는 창세기에 대한 67편의 설교, 시편에 대한 59편, 마태오 복음서에 대한 90편, 요한 복음서에 대한 88편, 사도행전에 대한 55편이 있다.이 설교들은 속기사들이 기록하여 이후에 유포되었으며, 그의 시대와 장소의 수사학적 관습에 따라 형성되었지만, 직접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그의 설교 신학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예: 성경적 사건을 더 문자적으로 해석)을 많이 보여주지만, 그는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더 관련이 있는 많은 비유적 해석을 사용한다.
요한의 사회적, 종교적 세계는 도시 생활에서 지속적이고 만연한 이교주의의 존재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문화 속의 이교주의였으며, 그의 설교에서 그는 대중적인 이교적 오락, 즉 극장, 경마, 그리고 휴일을 둘러싼 향락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특히 그는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에게 아모스나 오바댜가 누구인지, 사도나 예언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묵묵부답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 말이나 기수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궤변가나 수사학자보다 더 엄숙하게 대답할 것이다.
요한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궁핍한 자들에 대한 그의 배려를 강조하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주제를 되풀이하며, 그는 부자들에게 물질주의를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촉구하며, 종종 그의 모든 수사적 기술을 사용하여 부유한 사람들이 과시적 소비를 포기하도록 부끄럽게 만들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이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데, 당신의 배설물을 은제 변기에 담아 받을 만큼 그러한 존경을 표하는가?
이와 더불어, 그는 자선의 필요성과 금식과 기도와 함께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글을 썼다. 예를 들어 "자선 없는 기도는 결실이 없다."
4. 2. 사회 정의
현재 전해지는 크리소스토모스 대주교의 설교 중에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그는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며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고 설교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호화로운 사교 모임을 열지 않았는데, 이는 대중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부유층과 일부 성직자들에게는 반감을 샀다. 성직자 사회에 대한 그의 개혁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는 방문 설교자들에게 보상 없이 각자의 교회로 돌아가 봉사하라고 지시했다.[21]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여러 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22][23]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다. 그는 마태오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라 부유한 사람들에게 물질주의를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때로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부자들의 과시적 소비를 비판하기도 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이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데, 당신의 배설물을 은제 변기에 담아 받을 만큼 그러한 존경을 표하는가?
그는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금식과 기도와 함께 자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선 없는 기도는 결실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적 관심은 당시 만연했던 이교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극장, 경마 등 대중적인 이교적 오락과 향락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을 꾸짖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에게 아모스나 오바댜가 누구인지, 사도나 예언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묵묵부답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 말이나 기수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궤변가나 수사학자보다 더 엄숙하게 대답할 것이다.
405년경에는 페니키아와 인근 지역에서 사원을 파괴하며 황제의 반 이교도 법을 시행하던 기독교 수도자들을 도덕적,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28]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프로클로스 같은 후대 인물들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파괴를 크리소스토모스의 업적으로 돌렸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도시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이 비판받던 상황에서, 크리소스토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직자들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상당한 저항에 부딪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66]
4. 3. 유대교와 기독교 관계
안티오크에서 사제로 활동하던 초기 2년(386–387년) 동안, 요한네스는 그의 신자들 중 유대교 축제나 다른 유대교 관습에 참여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8편의 설교를 했다.[52] 이 설교들은 주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 관습을 따르는 기독교인들, 소위 "유대교화된 기독교인들"을 겨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다. 그의 설교는 '프소고스'(ψόγος|프소고스grc, psogos)라는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적 전통에 따라 매우 강하고 타협 없는 비판의 형태를 띠었다.이 설교들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 관습에 참여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요한네스 자신의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데 있었다. 그는 설교에서 유대인 축제 참여, 안식일 준수, 할례 시행, 유대교 성지 순례와 같은 유대교 관습을 따르는 "유대교화된 기독교인"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안티오크에서는 361년 이후 유대교 신앙이 다시 활기를 띠고 관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가 잦았는데, 요한네스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기독교인들의 신앙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53]
요한네스는 특히 기독교 여성들이 회당에 자주 드나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들이 유대교 전례의 장엄함과 로쉬 하샤나(유대교의 새해 첫날)에 울리는 쇼파르(양각 나팔) 소리를 좋아하고, 당시 관습처럼 유명 설교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위해 회당을 찾는다고 주장했다.[54] 요한네스가 지역 교회와 더 큰 교회 계층 내에서 차지했던 영향력 때문에, 그의 이러한 설교는 반유대주의 감정을 확산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설교들은 그리스어로 '카타 이우다이온'(Κατὰ Ἰουδαίων|카타 이우다이온ell)이라 불리며, 라틴어로는 '아드베르수스 유다이오스'(Adversus Judaeos|아드베르수스 유다이오스lat), 영어로는 'Against the Jews'(유대인을 반대하여)로 번역된다.[55] 이 설교집의 초기 편집자인 베르나르 드 몽포콩은 제목에 "유대인에 대한 담론이지만, 실제로는 유대교화하고 유대인과 함께 금식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전달되었다"는 주석을 달았다.[55]
교부학 연구자들은 4세기 말에 특정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칠 때, '프소고스'라는 수사학적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이 형식은 문학적 관습상 반대자를 매우 강하게 비난하는 방식을 취했다. 따라서 요한네스를 오늘날의 기준으로 "반유대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용어 사용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요한네스의 신학이 유대교를 기독교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대체 신학의 한 형태이며 반유대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56]
그의 설교는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집단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57] 요한네스는 유대인을 도둑, 야수, "자신의 배만 채우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으며,[114] "만약 유대교 의식이 신성하고 존귀하다면, 우리의 구원의 길은 틀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의 길이 옳다면 – 물론 우리는 옳지만 – 그들의 길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유대인의 불신앙을 광기로 몰아세웠다.[115] 또한 그는 유대인들이 아버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아들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성령의 도움을 거부했으므로 그들의 회당은 "악마의 거처"가 아니겠냐고 말했다.[116] 이러한 주장은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 반유대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천 년 후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대인 혐오로 이어지기도 했다.[114] 다니엘 골드하겐과 같은 학자들은 요한네스와 같은 인물들의 주장이 후대에 영향을 미쳐,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해로운 존재나 악의 화신으로 여기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115] 실제로 요한네스의 '유대인에 대한 설교'(Adversus Judaeos|아드베르수스 유다이오스lat)[117]는 20세기에 나치당이 유대인 박해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빈번하게 인용하기도 했다.[118][119]
5. 유산과 영향
크리소스토모스는 방대한 양의 설교집을 남겼는데, 특히 신약성경(사도 바울의 저작 포함)과 구약성경(창세기 포함)에 대한 수백 편의 주석 설교가 포함된다. 그의 주요 주석 작품으로는 창세기에 대한 67편, 시편에 대한 59편, 마태오 복음서에 대한 90편, 요한 복음서에 대한 88편, 사도행전에 대한 55편의 설교가 있다. 이 설교들은 속기사들이 기록하여 유포되었으며, 당시 수사학적 관습을 따르면서도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의 설교 신학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관련된 비유적 해석도 사용했다.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교주의가 여전히 만연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극장, 경마, 휴일의 향락과 같은 대중적인 이교 오락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을 꾸짖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에게 아모스나 오바댜가 누구인지, 사도나 예언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묵묵부답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 말이나 기수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궤변가나 수사학자보다 더 엄숙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의 설교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주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다. 그는 마태오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라 부유한 사람들에게 물질주의를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것을 촉구했으며, 때로는 수사학적 기교를 동원해 과시적 소비를 비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이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데, 당신의 배설물을 은제 변기에 담아 받을 만큼 그러한 존경을 표하는가?
이와 함께 그는 자선의 필요성과 그것이 금식, 기도와 함께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주 강조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괴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악마의 파괴자이자 다이아나 신전의 전복자"라고 불렀고, 후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프로클로스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두 주장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설교 외에도 요한의 여러 논문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작품인 ''수도 생활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386년 이전)는 자녀를 수도원에 보내려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쓰였다. 크리소스토모스는 당시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아들들을 수도사들에게 교육받도록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고 썼다.[63] 또 다른 중요한 저술로는 ''사제직에 관하여''(390/391년)가 있는데, 이 책은 그의 초기 생애와 사제직에 대한 그의 높은 이상을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지침'', ''신의 본질의 불가해성에 관하여''[64], 그리고 여부제 올림피아스에게 보낸 17편의 편지[65] 등이 남아있다.

당시 도시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이 비판받던 상황에서, 요한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직자들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저항에 부딪혀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뛰어난 설교가였으며[66], 그의 설교와 저술은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인용된다. 신학자로서 그는 동방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며, 일반적으로 그리스 교부 중 삼대 성인으로 꼽히지만, 서방 기독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의 저술은 다른 그리스 교부들의 저술보다 더 많이 현존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를 18개 조항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기도와 주님의 기도의 의미에 대한 그의 성찰을 인용하고 있다.
개신교 성직자들 역시 그를 높이 평가했다. 리처드 살터 스토르스는 그를 "사도 시대 이후 진리와 사랑의 신성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준 가장 웅변적인 설교자 중 한 명"이라고 칭했고,[69] 19세기 존 헨리 뉴먼은 요한을 "밝고, 쾌활하며, 온화한 영혼; 섬세한 마음"이라고 묘사했다.[70]
요한의 유산은 여러 음악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여기에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작품번호 31 (1910),[71]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작품번호 41, 우크라이나 작곡가 키릴로 스테첸코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아르보 패르트의 ''연도''(크리소스토무스의 24개의 기도문을 하루의 각 시간대에 맞춰 작곡)[72], 그리고 알렉산더 그레차니노프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1번, 작품번호 13 (1897),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2번, 작품번호 29 (1902), ''가정 전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3번), 작품번호 79 (1917) 및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전례'' 4번, 작품번호 177 (1943) 등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에는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명을 가진 등장인물 멀리건이 나온다. 멀리건의 금으로 덮인 치아와 그의 언변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가 그에게 부여한 '황금의 입'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준다.[73] "[멀리건]은 옆으로 시선을 돌려 낮고 긴 휘파람을 불어 불렀고, 잠시 매료된 듯 주의를 기울이며 잠시 멈췄다. 그의 희고 고른 치아는 금빛으로 반짝였다. 크리소스토무스."[74]

후기 중세 시대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 관한 전설이 생겨났다. 전설에 따르면, 은둔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사막에서 고통받는 왕족 공주를 만났다. 요한은 처음에는 그녀가 악마라고 생각하여 돕기를 거부했지만, 공주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면 맹수에게 잡아먹힐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받아들여 동굴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간음의 죄가 저질러졌고, 당황한 요한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공주를 절벽 아래로 던졌다. 그런 다음 그는 면죄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갔지만 거절당했다. 자신의 끔찍한 범죄의 본질을 깨달은 크리소스토모스는 죄를 속죄할 때까지 땅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수년 동안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며 들풀과 뿌리를 먹으며 살았다. 그 후, 공주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요한의 아기에게 젖을 먹였고, 아기는 기적적으로 그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마지막 장면은 15세기 후반부터 판화가와 예술가들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이 주제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1496년경에 묘사했고,[75] 한스 제발트 베함과 루카스 크라나흐 (아버지) 등도 묘사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전설을 그의 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거짓말''(1537)에서 기독교 성인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다루었다.[76][77]
5. 1. 동방 정교회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동방 정교회에서 특히 공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고유 축일 외에도 유해 이동 기념일, 다른 성인과의 합동 축일 등이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정교회 역사상 이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주석서와 설교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된다. 그의 수많은 설교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매우 짧은 설교인 파스카 설교 (''Hieratikon'')로, 부활절의 첫 예배인 자정 오르토스 (마틴스)에서 낭독된다.[46] 그의 부활절 설교 중 하나는 부활 대축일 예배의 일부로 채택되어 반드시 낭독될 정도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407년 유배지로 가는 길에 코마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438년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가, 사망 30년 후인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 황제 치세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된 그의 제자 프로클루스(434–447)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었다.[78]
그러나 요한의 유해 대부분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면서 로마로 옮겨졌다. 이후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그의 뼈 일부가 정교회로 반환되었으며,[79][80][81] 2004년부터 이스탄불의 성 조지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82]
그의 두개골은 그리스 북부 아토스 산의 바토페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기에 13세기 십자군의 약탈을 피했다. 1655년, 러시아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의 요청으로 두개골은 러시아로 옮겨졌고, 수도원은 보상으로 2000RUB를 받았다. 1693년, 바토페디 수도원이 두개골 반환을 요청하자 표트르 대제는 두개골을 러시아에 두는 대신 수도원에 4년마다 500RUB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는 1735년까지 이 지불 기록이 남아있다. 두개골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 승천 대성당에 보관되다가 1920년 소비에트 연방 정부에 의해 압수되어 은 유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88년, 러시아의 기독교 수용 1,000주년을 기념하여 두개골은 다른 중요 유물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되었고, 엘로호보의 주현 대성당에 보관되다가 복원된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바토페디 수도원은 여전히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두개골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성인의 두개골을 숭배한다. 이탈리아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피사의 ''달 포초'' 예배당 역시 성인의 두개골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 요한의 오른손은 아토스 산의 필로테우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으며,[83]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유해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84]
중세 중반부터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대바실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삼위일체 대주교(Οι Τρείς Ιεράρχες|이 트리스 이에라르헤스el, Три Святителя|트리 스뱌티텔랴ru, Three Holy Hierarchs영어)로 공경받으며 합동 축일을 가지게 되었다. 정교회에서는 이를 "삼위일체 대주교 성 대 바실리오스,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금구 이오안 축일"로 기념하며, 축일은 율리우스력 1월 30일(그레고리력 2월 12일)이다. 일본 정교회에서는 성체 예식 등의 공기도에서 이 축일이 기념되는 경우는 드물다. 도쿄 부활 대성당(니콜라이도)의 동쪽 지성소에 있는 두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삼대 교부 중 대 바실리오스(남쪽)와 금구 이오안(북쪽)의 이콘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대 바실리오스가 제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체 예식의 예배문을 간략화하여 정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비잔틴 전례에서 통상 사용되는 "금구 이오안 성체 예식"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현재 사용되는 형태는 그 이후의 부가적인 요소들이 더해져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교회에서 성체 예식은 다른 예배와 마찬가지로 성가로 불린다.
전통적인 선율과 성가는 동유럽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 정교회에 존재하지만, 근세 이후 "금구 이오안 성체 예식"을 바탕으로 작곡한 작곡가들도 다수 등장했다.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작품이 음악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체 예식에 사용되는 언어는 각국 현지어를 주로 사용하므로, 현재에도 성체 예식 등 예배에 사용하는 곡은 각 지역 교회가 각자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 기념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관련 주요 축일은 다음과 같다.
- 1월 27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유해의 콘스탄티노플 이송
- 1월 30일, 삼대 교부 공경
- 9월 14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선종
- 11월 13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5. 2. 가톨릭교회
금구 이오안은 서방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106] 그의 강론, 서간, 논고는 카이사레아의 바실리, 시리아의 에프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등의 저작과 함께 서방의 수도원에서 개인적으로 읽히거나 공개적으로 낭독되었다.[106] 신학자로서 그는 동방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서방 기독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평가받는다.그의 가르침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1997년[107]의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도 확인된다. 교리서는 18개 조항에서 그를 인용하며, 특히 기도의 목적과 주님의 기도의 의미에 관한 그의 성찰을 중요하게 다룬다.[107] 교리서 2825항에는 그의 설교 일부가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겸손해야 함을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덕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동시에 그리스도는 기도하는 우리 각자에게 온 세상일을 생각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나의 안에서 혹은 너희 안에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오류가 제거되어 진리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모든 악이 파괴되어 다시 덕이 번성하며, 지상에서도 천상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소중히 여겨지기 때문입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In Matthaeum homilia'' 19, 5: PG 57, 280).[108]
요한의 유해 대부분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되어 로마로 옮겨졌다.[79][80][81] 그러나 그의 유해 일부는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동방 정교회로 반환되었다.[79][80][81]
가톨릭교회[110] 및 일부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성공회, 루터교회 등)에서는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의 기도"(Prayers of St. John Chrysostom)로 알려진 기도문들을 사용한다.[111] [112]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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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のキリスト教会はまだ正教会とカトリック教会に分離していなかったので金口イオアンは正教会の主教で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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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ヨハネ・クリゾストモを考察 教皇一般謁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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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チカン放送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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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date 聖人カレンダ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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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パウロ女子修道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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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 原文校訂による口語訳 創世記』フランシスコ会聖書研究所訳、中央出版社、1958年、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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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トリック教会のカテキズム』(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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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Sketches, Volum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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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ユダヤ主義の歴史 第1巻 キリストから宮廷ユダヤ人まで
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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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通のドイツ人とホロコースト
ミネルヴァ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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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米文学のなかのユダ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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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ILIES AGAINST THE JEWS (Adversus Juda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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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and Legacies: The Meaning of the Holocaust in a Changi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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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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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ニカイア教父とニカイア後教父: シリーズ I
[121]
문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유익한대로 채워주시며, 이 세상에서 당신의 진리를 깨닫고 후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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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초대교회사
총신대학교출판부
199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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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ing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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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John Chrysostom, Archbishop of Constantin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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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 Scholasticus, op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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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총신대학교출판부
199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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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ohn Chrysos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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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of John paul II to the Ecumenical Patriarch of constantinople His Holiness Bartholomew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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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tican returns relics to Orthodox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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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ks of John Ow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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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ner of Truth Trust
19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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