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케 테무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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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뭉케 테무르 칸은 1266년부터 1280년까지 킵차크 한국의 칸으로 재위했다. 그는 쿠빌라이 칸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쿠빌라이의 경쟁자인 카이두 편에 서서 몽골 제국 내 권력 투쟁에 연루되었다. 뭉케 테무르는 동유럽 원정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을 공격했고, 상업을 장려하여 제노바 상인들과 교역을 활발히 했다. 그는 카이두와의 동맹을 통해 일 칸국을 견제하는 한편, 내정을 안정시키고 수도 사라이를 번영시켰다. 뭉케 테무르는 1280년 폴란드 원정 실패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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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는 14세기에 활동한 군사 지도자로서, 칭기즈 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잡고 정복 전쟁을 통해 티무르 왕조를 세웠으며, 군사적 재능과 잔혹함으로 평가받는다. - 테무르 - 코케 테무르
코케 테무르는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워 하남왕에 봉해진 무장으로, 차간 테무르의 양자로서 그의 군대를 이어받아 원나라 권력 다툼에 관여했으나 명나라 군에 패하여 북원으로 후퇴 후 병사했으며,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 뭉케 테무르 칸 | |
|---|---|
| 기본 정보 | |
![]()  | |
| 칭호 | 칸 | 
| 봉기 | 서부 지역 (청색 호르드) | 
| 출생 | 알 수 없음 | 
| 사망 | 1280년 | 
| 사망 장소 | 사라이 | 
| 종교 | 샤머니즘 | 
| 서명 유형 | 탐가 | 
![]()  | |
| 신상 정보 | |
| 아버지 | 토코칸 칸 | 
| 어머니 | 코추 카툰 | 
| 배우자 | 올자이 카툰, 술탄 카툰, 쿠투키 카툰 | 
| 자녀 | 토크타, 토그릴차, 알퀴, 토코메리우스 | 
| 왕가 | 보르지긴 | 
| 왕조 | 킵차크 칸국 | 
| 통치 | |
| 통치 기간 | 1266년 – 1280년 | 
| 전임자 | 베르케 | 
| 후임자 | 토데 몽케 | 
| 이름 | |
| 몽골어 (키릴 문자) | Мөнхтөмөр | 
| 페르시아어 | تيمور مونككه | 
| 로마자 표기 | Möngke Temür | 
2. 초기 통치와 대외 관계
뭉케 테무르는 1267년 큰아버지인 베르케가 사망한 후 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본래 쿠빌라이 칸에 의해 지명되었으나,[4][5] 실제로는 쿠빌라이의 경쟁자인 카이두를 지지했다. 1265년 아릭부케와의 황위 계승 투쟁에서 승리한 쿠빌라이는 서쪽으로 차카타이 가문의 바라크를 파견했고, 오고타이 가문을 계승한 카이두와 분쟁을 벌였다. 뭉케 테무르는 즉위 직후 카이두를 지원하기 위해 5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1269년, 뭉케 테무르는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같은 해 봄, 타라스 강 부근에서 바라크, 카이두와 회맹을 열었다. 이 회의에서 세 사람은 반(反) 원 자세를 취하고, 원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 칸국의 아바카와 싸울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270년 바라크가 사망하고 카이두가 차카타이 칸국을 찬탈하자,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와의 맹약에 위험을 느끼고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쿠빌라이의 원 왕조에 의한 몽골 제국의 종주권을 승인하고 카이두와 관계를 단절했다. 동시에 쿠빌라이로부터 훌레구 가문의 가업과 이란 방면의 영유를 허가받은 일 칸국의 아바카와도 우호적인 사절을 파견하여 국교를 회복했다.
뭉케 테무르는 룸 셀주크 왕조의 이제딘 카이카우스에게 크림 반도의 봉읍을 주었다. 또한, 제노바 등으로부터 상인을 불러들여 수도 사라이를 크게 번영시키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1277년, 쿠빌라이의 아들 노무간과 그의 동생 코코추가 실리, 토크 테무르 등의 반란으로 붙잡혔다. 노무간과 코코추 형제는 뭉케 테무르의 허가를 받아 조치 울루스에 유치되었다가, 뭉케 테무르가 사망한 직후인 1282년에 실리가 바얀에게 항복하면서 쿠빌라이에게 송환되었다. 조치 울루스가 대원조에 결정적으로 적대 행위를 피한 것은 뭉케 테무르의 의모이자 몽케, 쿠빌라이, 훌레구 등의 조카였던 켈미슈 아가 하툰의 주선 덕분이었다.
뭉케 테무르는 독일 상인들이 자신의 영토를 자유롭게 여행하도록 허용했다.[1]
2. 1. 동유럽 원정
뭉케 테무르는 비잔티움 제국(1269~1271년), 리투아니아(1275년), 코카서스의 알란족(1277년)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수행했다.[1] 1268년, 러시아 봉신들을 지원하여 덴마크령 에스토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노브고로드로 군대를 보냈지만, 베젠베르크 전투 이후 철수해야 했다.[1] 1274년, 스몰렌스크가 뭉케 테무르 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1275년, 갈리치아-볼히니아의 공작 레프의 요청에 따라 여러 러시아 공작과 함께 리투아니아로 군대를 파견했다.[1]1277년, 러시아 봉신들의 도움을 받아 알란족 도시 디야드코프에 대한 포위를 끝내고 볼가 불가르족의 카잔 반란을 진압했다.[1]
2. 2.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
뭉케 테무르는 샤머니즘 신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가 골든 호르데에 바치는 조공을 면제하는 내용의 자르륵(몽골과 칭기스 왕조 통치자의 면허 또는 서면 지휘관)을 발표했다.[1] 이는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2. 3. 제노바와의 관계
뭉케 테무르의 통치 기간 동안 제노바 상인들은 몽골로부터 크림반도의 카페를 매입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상인들은 몽골 칸에게, 때로는 노가이 칸에게 세금을 납부했다.3. 몽골 제국 내 역학 관계
뭉케 테무르는 쿠빌라이 칸에 의해 킵차크 한국의 칸으로 지명되었으나[4][5], 실제로는 쿠빌라이 칸의 경쟁자인 카이두를 지원하며 복잡한 역학 관계를 형성했다. 표면적으로는 쿠빌라이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카이두와의 동맹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일 칸국과의 관계에서도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와 협력하여 차카타이 칸국을 견제하고, 1269년 탈라스 강 인근에서 카이두, 바라크와 회맹하여 영토를 분할하고 반(反) 원나라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카이두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쿠빌라이와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일 칸국의 아바카와도 우호 관계를 맺는 등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1277년 쿠빌라이 칸의 아들 노무간이 킵차크 한국에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뭉케 테무르는 1278년[8] (혹은 10년 후[9])에 노무간을 석방하여 쿠빌라이 칸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다. 이는 뭉케 테무르가 몽골 제국 내 권력 다툼에서 노무간을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뭉케 테무르는 킵차크 한국의 칸으로서 몽골 제국 내 다양한 세력들과의 관계에서 복잡하고 다면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3. 1. 카이두와의 동맹
뭉케 테무르는 쿠빌라이 칸의 경쟁자인 카이두 편에 섰다.[4][5]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를 지원하여 차가타이 칸국을 견제했다. 1269년,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 차가타이 칸국의 바라크와 함께 탈라스 강 인근에서 회맹하여 영토 분할에 합의했다. 이 회맹에서 세 사람은 반(反) 원나라 정책을 취하고, 원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일 칸국의 아바카와 대립했다.[6]라시드 알 딘은 이 회의가 1269년 봄에 탈라스에서 열렸다고 주장하는 반면, 와사프는 1267년경 사마르칸트 남쪽에서 열렸다고 기록했다. 뭉케 테무르는 그와 카이두가 일 칸국을 침략한 바라크를 꾸짖었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기 위해 차가타이 군대에 대한 일 칸 아바카의 승리를 축하했다.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와의 동맹을 통해 일 칸국의 아바카를 견제하고, 킵차크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아바카는 뭉케 테무르가 그의 칸국에 있는 일부 작업장에서 세수입을 징수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1277년, 북평왕으로 알마리크에 파견되어 온 쿠빌라이의 황자 노무간과 그의 동생 코코추가, 동료였던 실리, 토크 테무르 등의 반란으로 붙잡혀 뭉케 테무르에게 보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뭉케 테무르는 이들을 몽골 세계의 전쟁에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간 형제는 뭉케 테무르가 사망한 직후인 1282년에 바얀에게 항복한 실리에 의해 쿠빌라이에게 송환되었다.[8][9]
3. 2. 쿠빌라이 칸과의 관계
뭉케 테무르는 쿠빌라이 칸에 의해 킵차크 한국의 칸으로 지명되었지만[4][5], 쿠빌라이 칸의 경쟁자였던 카이두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가 차카타이 칸국을 제압하는 것을 도왔고, 일 칸국을 침략하려는 카이두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와 탈라스에서 영토 경계를 정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7]1277년, 쿠빌라이 칸의 아들 노무간이 반란에 연루되어 킵차크 한국에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뭉케 테무르는 1278년[8] (혹은 10년 후[9])에 노무간을 석방하여 쿠빌라이 칸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다. 뭉케 테무르는 노무간을 몽골 세계의 권력 다툼에서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뭉케 테무르는 쿠빌라이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카이두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대원조에 결정적으로 적대 행위를 피하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3. 3. 일 칸국과의 관계
1267년 베르케가 사망하면서 뭉케 테무르는 칸의 자리에 올랐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아릭부케와의 황위 계승 투쟁에서 승리한 쿠빌라이가 1265년에 서쪽으로 파견한 차카타이 가문의 바라크와 오고타이 가문을 계승한 카이두 사이에 화해와 결렬이 반복되고 있었다.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 편에 서서 즉위 직후 5만 명의 병력을 지원했다.[4][5] 1269년, 베르케의 뒤를 이어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에게 사절을 파견하고, 봄에는 차가타이 가문의 바라크와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와 타라스 강 부근에서 회맹(會盟)하여 바라크에게 마 와라 알나흐르의 3분의 2를 영유하도록 약속하고, 카이두와 뭉케 테무르는 나머지 3분의 1을 절반으로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바라크는 영토의 목초지가 적다고 주장하며, 이듬해 봄에 자이훈 강을 건너 아바카가 다스리는 이란 지역을 침공하여 부족분을 보충하려 했다. 이 회견에서 세 사람은 반(反) 원 자세를 취했고, 원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 칸국의 아바카와 싸웠다. 그러나 1270년 바라크가 패사하고, 카이두가 차카타이 한국을 찬탈하면서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와의 맹약을 맺는 것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쿠빌라이의 원 왕조에 의한 몽골 제국의 종주권을 승인하고 카이두와 관계를 끊었다. 동시에 쿠빌라이로부터 훌레구 가문의 가업과 이란 방면의 영유를 허가받은 일 칸국의 아바카와도 우호적인 사절을 파견하여 국교를 회복했다.
뭉케 테무르는 카이두와 함께 일 칸국을 침략한 바라크를 꾸짖었지만, 속으로는 차카타이 군대에 대한 일 칸 아바카의 승리를 축하했다. 두 사람은 아마도 1270년대까지 서로 싸웠을 것이나, 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전투가 발생했음을 부인한다.[7] 1270년대까지 그들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 조약 외에도 아바카는 뭉케 테무르가 일 칸국 내 일부 작업장에서 세수입을 징수하는 것을 허용했다.
아바카 이후 맺어진 일 칸국과의 평화는 뭉케 테무르 사후 아르군 시대인 1290년 3월 말, 코카서스를 넘어 군대를 파견하면서 깨졌으나 패퇴했다. 이 전투 이후 다시 일 칸국과의 평화가 맺어져 가잔 칸 시대까지 이어졌다.
4. 내정
뭉케 테무르는 내정에 힘을 기울여 국가 안정을 도모하고 상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노바 등 외국 상인들과 교역하며 수도 사라이를 크게 번영시켰다.
4. 1. 룸 셀주크 왕조와의 관계
룸 셀주크 왕조의 이제딘 카이카우스가 베르케의 만년에 조치 울루스로 망명해 오자, 뭉케 테무르는 그에게 크림반도의 봉읍을 주었다.5. 가족 관계
| 배우자 | 출신 부족 | 자녀 | 
|---|---|---|
| 올제이 카툰 | 콩기라트 | |
| 술탄 카툰 | 후신 | |
| 쿠투키 카툰 | 불명 | 뫼르류크 | 
| (이름 불명) | 불명 | 
뭉케 테무르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다. 콩기라트 부족 출신의 올제이 카툰, 후신 부족 출신의 술탄 카툰, 쿠투키 카툰 등이 있었다.[11] 뭉케 테무르의 아들 토크타와 토그릴차의 아들 우즈베크 칸은 후에 킵차크 한국의 칸이 되었다.
6. 사망과 유산
1280년에 사망했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집사』에서는 히즈라력 681년(서기 1281년 4월 11일 ~ 1282년 3월 31일)로 기록되어 있다. 뭉케 테무르의 사후, 그의 아들이 뒤를 이을 예정이었지만, 유력 장군이었던 노가이의 개입으로 일족 중 연장자였던 토데 뭉케가 칸으로 즉위하면서 킵차크 한국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6. 1. 일 칸국과의 관계 변화
1290년 3월 말, 뭉케 테무르 사후 킵차크 한국은 코카서스를 넘어 일 칸국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이 전투 이후 다시 일 칸국과의 평화가 맺어져 가잔 칸 시대까지 이 관계가 계속되었다.참조
[1] 
서적
 
The Mongols
 
[2] 
서적
 
Universal History
 
[3] 
서적
 
New History of Yuan
 
[4]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Part 2. The So-Called Tartars of Russia and Central Asia. Division 1
 
[5] 
서적
 
Khubilai kan
 
[6] 
서적
 
The history of Mongol conquests
 
[7] 
서적
 
Mamluk Ilkhanid war
 
[8] 
문서
 
Rene Grousset
 
[9]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Mongol Empire
 
[10] 
문서
 
『[[元史]]』巻117,列伝4の朮赤(ジョチ)伝には「朮赤者、太祖長子也……朮赤薨、子抜都嗣。抜都薨、弟撒里答嗣。撒里答薨、弟'''忙哥帖木児'''嗣。忙哥帖木児薨、弟脱脱忙哥嗣…」とある。ここでジョチ・ウルス歴代頭首を全て兄弟関係にあるとするのは『元史』の誤謬である。
 
[11] 
문서
 
宇野1993,89-91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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