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코섬 조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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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코섬 조난 사건은 1871년 류큐 왕국의 조공선이 태풍으로 표류하여 타이완 원주민에게 공격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이 류큐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청나라에 책임을 물어 1874년 대만 침공을 감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난자들은 약탈과 학살을 당했으며, 이 사건은 류큐와 타이완, 일본 간의 역사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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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섬 조난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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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위치 | 타이완 성, 청나라 푸젠 성 |
목표 | 류큐 선원 54명 |
날짜 | 1871년 12월 |
유형 | 학살 |
가해자 | 파이완족 포모사 원주민 |
사망자 | 54명 류큐 선원 |
배경 | |
사건명 | 팔요만 사건 (t=八瑤灣事件) |
관련 사건 | 류큐 표류민 살해 사건 (琉球漂流民殺害事件) |
발생 원인 | 태풍으로 인한 표류, 언어 및 문화 차이, 오해 등 (여러 설 존재) |
피해자 | |
국적 | 류큐 왕국 (미야코 섬 주민) |
인원 | 54명 사망 |
추모 | 나하시 고코쿠지 절에 위령비 존재 (護国寺 (那覇市)) |
기타 | |
관련 사건 | 일본의 타이완 침공 (1874) (무단사 사건의 빌미가 됨) |
참고 | 미야코섬 조난 사건 (宮古島島民遭難事件) 이라고도 불림 무단사 사건 (t=牡丹社事件) 과는 구별됨 |
2. 배경
1609년 류큐 침공으로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게 된 류큐 왕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청나라와 책봉 관계를 지속하는 이중적인 외교 형태를 취했다.[12] 류큐 왕국은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미야코 열도와 야에야마 열도가 류큐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왕국은 이들 지역에 재번을 파견하여 지배를 강화하고, 인두세를 부과했다. 인두세는 만 나이 15세부터 50세까지의 남녀에게 부과되는 세금이었다.[13][14]
2. 1. 류큐 침공
1609년 3월, 사쓰마 번은 군선 100여 척과 병사 3,000여 명을 동원하여 류큐 왕국을 침공, 단 일주일 만에 류큐 전역을 점령하였다. 쇼네이 왕은 사쓰마에 억류되었다가 2년 후 귀국하였으나, '류큐 지배에 관한 법' 15조가 공포되었다. 이 법은 중국과의 무역을 규제하고, 본토(일본) 입국 및 타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2]이로써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을 통해 일본의 막번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동시에 중국과의 책봉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류큐 왕국은 일본 본토의 풍속과 관습을 금지당하고, 형식적으로만 독립 왕국의 체제를 유지했다. 이러한 이중 체제의 상징은 슈리성이었다. 왕이 집무하는 청사는 오른쪽은 일본식, 왼쪽은 중국식으로 지어졌으며, 사쓰마 관리가 방문했을 때는 일본식으로, 중국 책봉사가 방문했을 때는 중국식으로 대응했다.[12]
이러한 상황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쓰마 번이 류큐와 중국 간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고, 중국 측은 체면을 중시하여 이를 묵인했기 때문이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류큐국은 게이초 연간 이래 사쓰마 번의 지배를 막부로부터 위임받았기 때문에 다른 외국의 예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청나라의 정삭을 받들고(속국임), 또한 작위를 받았으므로, 전혀 우리나라에 준할 수 없다"라고 언급하며 류큐의 특수한 지위를 인식했다.[12]
2. 2. 이중 체제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 이후 류큐 왕국은 막번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독립 왕국의 체제를 유지하며 중국과 책봉 관계를 지속하는 이중적인 체제를 갖게 되었다.[12]이러한 이중 체제의 상징은 슈리성이었다. 왕이 집무하는 청사의 오른쪽은 일본식, 왼쪽은 중국식으로 지어졌으며, 사쓰마 관리가 왔을 때는 일본식으로, 중국 책봉사가 방문했을 때는 중국식으로 대응했다.[12] 이는 사쓰마가 류큐와 중국 간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 했고, 중국 측이 체면을 중시하여 이를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류큐국은 게이초 연간 이래 사쓰마 번의 지배를 막부로부터 위임받았기 때문에 다른 외국의 예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청나라의 정삭을 받들고(속국임), 또한 작위를 받았으므로, 전혀 우리나라에 준할 수 없다"라고 언급하며 류큐의 애매한 상황을 인식했다.[12]
3. 사건의 경과
1871년 10월 18일, 미야코섬과 야에야마 제도에서 인두세를 납부한 4척의 배가 나하를 출발했다. 배는 류큐 근해의 게라마 제도에 정박했다가 10월 29일 출발했으나, 11월 1일 강풍을 만나 미야코섬으로 향하던 배 한 척이 표류했다.[16] 11월 5일, 타이완의 산을 발견하고 11월 6일 상륙을 시도했지만, 이 과정에서 3명이 익사했다.
64명의 생존자는 인가를 찾아 헤매다 한족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은 남쪽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고 이동했지만, 안내자들은 이들의 의복을 빼앗아 갔다. 낙담한 생존자들은 동굴에서 밤을 보낸 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15~6채의 가옥이 있는 마을을 발견했다. 마을 사람들은 밥을 제공했지만, 남은 소지품을 빼앗았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사냥을 간다며 생존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했지만, 의심을 품은 생존자들은 흩어졌다. 다른 인가에서 만난 한 노인은 이들에게 류큐, 나하, 슈리에 대해 물으며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30명 정도의 무리가 쫓아와 이들의 칸자시와 의복을 벗기고, 한두 명씩 끌어내 칼로 목을 베었다.
이후 생존자들은 나하로 돌아갔다.
3. 1. 조난
1871년 11월 30일, 류큐 왕국의 수도 슈리에서 출발한 류큐 조공선 4척이 미야코섬과 야에야마 제도로 향하던 중, 12월 12일 태풍을 만나 표류했다.[4] 야에야마로 향하던 두 척 중 한 척은 침몰했고, 다른 한 척은 타이완 서해안에 도착하여 청나라 관리들의 도움으로 귀환했다.[4] 미야코섬으로 향하던 두 척 중 한 척은 미야코섬에 도착했으나, 다른 한 척은 타이완 남동부 해안 바야오만 근처에서 난파되었다.[4] 이 배에는 69명이 타고 있었고, 이 중 3명은 해안에 도착하려다 사망했다.[4]당시 미야코섬과 야에야마 제도에는 류큐 왕국의 인두세가 부과되고 있었다. 1871년 10월 18일[15], 4척의 배가 이 세금을 납부하고 나하를 출발했다. 바람이 멈춰 게라마 제도에 정박했다가 10월 29일[16]에 출발했으나, 강풍으로 야에야마 선박 1척은 행방불명되고 1척은 타이완에 표착했다. 표착한 배는 12단 돛배로 144석 적재가 가능한 대형 선박이었으며, 야마바루 선(やんばるせん)이라고도 불렸다. 미야코섬에서 출발한 배 1척은 미야코섬에 도착했지만, 나머지 1척이 이 조난 사건에 휘말렸다.
표착 지점은 타이완 남동 해안의 바야오만(현 핑둥현 만저우 향 주펑촌)이었으며, 64명이 상륙했다.
3. 2. 학살
1871년 12월 18일 아침, 서쪽으로 향하던 류큐인들은 파이완족을 만나 쿠스쿠스 마을로 안내받아 음식, 물, 숙소를 제공받았다.[4] 쿠스쿠스 현지인에 따르면 물은 보호와 우정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밤에 쿠스쿠스 주민들에게 강탈당했다는 주장도 있다.[4] 아침에 사냥꾼들이 사냥을 떠나면서 류큐인들에게 머물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무장한 사람들과 참수설에 놀란 류큐인들은 사냥대가 떠난 사이 도망쳤다.[5]이들은 73세의 객가 무역상인 덩톈바오의 집으로 피신했다. 파이완족 남자들은 류큐인들을 찾아내 끌어내 죽였고, 일부는 싸움에서 죽거나 도망치다 잡혔다. 이 학살로 54명이 사망했고, 3명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혔다. 9명의 류큐인들은 덩톈바오의 집에 숨어 있었다.[5] 이들은 폴리아크(바오리)라는 다른 객가 정착지로 이동하여 덩톈바오의 사위인 양유왕에게 피난처를 찾았다. 양유왕은 세 명의 몸값을 마련하고 생존자들을 40일 동안 보호한 후 타이난으로 보냈다.[5]
생존자 시마부쿠로 카메의 증언에 따르면, 살해 직전 번산물(蕃産物) 교역업자 료우 로우세이(凌老生)의 집에 도망쳐 온 조난자들이 있었고, 마을에서 쫓아온 번인(蕃人)들은 술 2통을 요구했지만 료우 로우세이의 집에는 술통이 없었다.[17] 카메와 그의 부모는 료우 로우세이의 눈짓을 알아차리고 다락 밑에 숨었다. 몇몇은 이미 문 밖으로 끌려 나갔고, 붙잡힌 띠를 뿌리치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잡혀 끌려가 살해된 사람도 있었다. 일행 중 붙잡힌 우라사키 킨은 소와 교환되었고, 히라라는 옷감 5필과 교환되어 화를 면했다.[18] 현장은 쌍계구(双渓口)의 벌판이었고, 범행은 많은 번사(蕃社)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지인 덩톈바오와 린아지우는 생존자를 숨겨주었고, 토지 유력자 양유왕도 협력하여 보호에 힘썼다. 이들은 현지인을 달래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했다. 현장에는 50여 구의 머리 없는 시체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양유왕은 자택에서 40일 동안 생존자 12명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정성껏 보호했고, 타이완부성(현 타이난시)으로 보냈다.
3. 3. 원인
파이완족이 류큐인들을 살해한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언어 및 문화적 오해: 류큐인들이 파이완족의 손님 접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고 달아난 것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파이완족의 전통에서는 낯선 사람이 제공하는 물을 마시는 것은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인데, 류큐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러한 합의를 위반하는 행위로 해석되었을 수 있다.[9]
- 경제적 요인: 난파된 선원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쿠스크스 마을의 자원이 고갈되었고, 결국 류큐인들이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9]
- 파이완족 사회의 특성: 당시 타이완 원주민 사회는 서로 다른 부족 간의 경계심이 강했고, 적대 부족이나 이종족의 목을 베는 풍습(출초)이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사건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 몸값 요구설: 생존자인 시마부쿠로 카메의 증언에 따르면, 조난자들이 번산물(蕃産物) 교역업자의 집에 숨었을 때, 파이완족이 술을 요구했으나, 술이 없어 조난자들을 끌고가 살해했다고 한다. 일부는 소나 옷감과 교환되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17] zh의 집에 숨어있던 조난자들을 끌고가 살해했다는 증언이 있다.[18]
- 식인 풍습설: 가고시마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가 메이지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죽인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 "뇌를 꺼내 약용으로 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타이완 원주민에게는 적대 부족의 목을 베는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야코섬 조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사건의 여파
무단사 사건은 일본, 청나라, 류큐 왕국 사이에 복잡한 외교 문제로 번졌으며, 1874년 대만 침공의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류큐 왕국이 멸망하고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874년 일본은 청나라와 협상을 통해 배상금 [40]을 받아내고,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인정받았다.[42] 다만 일본의 전비는 배상금의 10배에 달했다.[41]
협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청나라는 일본의 대만 출병을 '보민(保民)의 의거(義擧)', 즉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한다.
- 청나라는 유족에게 조위금을 지급한다.
- 일본군이 만든 도로와 숙소는 유료로 양도받는다.
- 양국은 본 건에 관한 문서를 모두 없앤다.
- 청나라는 대만의 생번(生蕃)을 단속하여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한다.
- 일본군은 1874년 12월 20일까지 철수한다.
이 조약으로 류큐 백성은 "일본국 속민"으로 표현되어,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승인하게 되었고, 이는 류큐 처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42]
조난 사건 이후 1872년 9월 14일 류큐번이 설치되었고, 1874년 4월 대만 출병이 일어났다. 1875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에 대해 청나라와의 책봉 및 조공 관계를 폐지하고 메이지 연호를 사용하라는 등의 명령을 내렸지만, 류큐는 청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다. 쇼타이는 청나라에 조공을 계속했지만, 1879년 메이지 정부는 쇼타이를 도쿄로 강제 연행하여 류큐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4. 1. 일본의 반응
일본은 이 사건을 류큐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삼아, 청나라에 항의하고 타이완 출병을 강행했다.[7][8]1872년 9월, 일본은 류큐 처분을 통해 류큐 국왕을 폐위시켰다.[7] 사건 당시 류큐 왕국은 독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청나라 정부에게 파이완족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청나라 정부는 "그 지역에는 문명이 닿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일축했다.[7]
1873년 3월 9일, 메이지 천황은 소에지마 타네오미에게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렸다.
> 짐이 듣건대, 대만 섬의 생번이 여러 차례 우리 백성을 도살한다고 한다. 만약 버려두고 묻는다면, 후환이 어찌 그치겠는가. 지금 그대 종신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그대 종신은, 가서 이를 신리(道理のあること主張する: 도리에 맞는 것을 주장하다)하여, 짐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흠아(두려워하여 받들라)
류큐를 관할하던 가고시마현 참사관 오야마 쓰나요시는 일본 정부에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출병을 건의했다.[7] 1873년 비츄국 (오카야마현) 카시와지마 촌의 배의 선원 4명이 대만에 표착하여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 안팎에서 대만 정벌 논의가 높아졌다.
같은 해 특명 전권 대사로 청나라에 건너간 외무경 소에지마 타네오미는 수행원인 야나기하라 마에미츠에게 이 건을 따져 물었지만, 청나라의 교섭 창구인 이부상서 마오창시는 "원주민은 '화외의 백성'(국가 통치가 미치지 않는 자)이다"라는 책임 회피의 답변을 할 뿐이었다.
군인이나 사족의 강경론에 밀린 일본 정부는 1874년 (메이지 7년), 대만 출병을 단행했다.[7] 이 군사 행동은 모란사 사건(牡丹社事件), 정대의 역(征台の役)이라고도 불린다.
1874년 (메이지 7년) 4월, 사이고 주도에게 대만 정벌의 명이 내려졌다.[35]
> 대만 번지 처분에 대해, 너 종도에게 명하여 사무 도독으로 삼는다. 무릇 육해군 업무에서 상벌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위임한다. 우리나라 사람을 폭살한 죄를 묻고, 상당한 처분을 행할 것. 만약 그 죄에 복종하지 않을 때는, 임기응변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칠 것. 우리나라 사람이 그곳에 이를 때, 토인의 폭행을 받지 않도록, 능히 방비하는 방법을 세울 것.

이때 청나라 정부가 이의를 제기했고, 이전에는 부추기던 미국 대사와 영국 공사가 갑자기 의견을 바꿨다. 미국 공사 핑검은 국외 중립을 선언했고,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도 출병을 비판했다. 오쿠마 대신은 출병 중지를 전했지만 사이고는 동의하지 않았고, 일본 군대의 사기도 매우 높았으며, 출항을 막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였다.
사이고는 육군 소장 타니 타테키와 해군 소장 아카마쓰 노리요시를 거느리고 출항했다. 청나라 정부 해방역인의 요구도 무시하고[38] 일본군은 격렬하게 침공하여, 숙번, 생번 각 사는 항복했다. 최종적으로 모란사와 가오스부쓰사의 수령도 항복했다. 사이고 주도는 번인과의 교환에 힘썼다.[39] 또한 주도는 살해된 피해자의 유골을 모아, 현지인으로 구조에 나섰던 양 등의 협력을 얻어 현지에 묘를 만들었다.
일본에게 있어 류큐 표류민 조난 사건은 청나라의 반응을 살피는 시험대였으며, 나아가 타이완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으므로, 일본에 의한 단순한 정의 집행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있다.
4. 2. 청나라의 반응
1871년에 발생한 미야코섬 조난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청나라 정부에 파이완족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그 지역에는 문명이 닿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일축했다.[7] 당시 류큐 왕국은 독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청나라에 책임을 물었다.1873년, 특명 전권 대사로 청나라에 건너간 외무경 소에지마 타네오미는 수행원인 야나기하라 마에미츠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따졌다. 하지만 청나라의 교섭 창구인 이부상서 마오창시는 "원주민은 '화외의 백성'(국가 통치가 미치지 않는 자)이다"라는 책임 회피성 답변을 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타이완 원주민들이 자국 통치권 밖에 있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했고, 이는 일본에게 1874년 대만 침공의 명분을 제공했다.[8]
4. 3. 타이완 출병
1871년 11월 (메이지 4년) 미야코섬 주민 조난 사건을 계기로, 1872년 (메이지 5년) 가고시마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 등이 '''대만 정벌론'''을 제기하며 스스로 정벌하겠다고 요청했다.[31]일본 정부는 류큐번이 일본과 청나라 양쪽에 속해 있는 관계를 언젠가 결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무경 소에지마 타네오미는 대만 정벌의 뜻을 품고, 미국 공사이자 찰스 드롱, 미국인 샤를르 루장드르(이선득)를 정부 고문으로 초빙했다.[32] 이듬해 정부 방침이 결정되었다. 류큐 측은 청나라를 자극하지 않고 양속 관계를 유지하길 바라며 일본 정부에 출병 중단을 간청했지만, 오하마 이쿠코는 사실과 다른 정보 전략이 시가 신문 지상에서 전개되고 있었다고 밝혔다.(당시 시가현령은 훗날 류큐 처분관 마쓰다 미치유키)[33]
1873년 (메이지 6년) 3월 9일, 메이지 천황은 소에지마 타네오미에게 칙어를 내렸다.
소에지마는 1873년 기함 류쇼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했다. 톈진에서 이홍장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후 베이징으로 가 청나라 황제를 알현했다. 알현 방식에 대해 옥신각신하던 중 그는 대만 사건에 대한 청나라 조정의 처치를 물었다. 총리 부문 대신(군기 대신 문상)은 "생번과 숙번이 있으며, 왕화에 복종하는 자를 숙번이라 하고, 복종하지 않는 생번은 화외에 두어 지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는 일본의 대만 정벌 근거를 제공했지만, 문서가 아닌 구두 언질에 그쳤다.[34] 일본은 "귀국이 화외의 백성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백성을 해치는 잔인한 번인을 징벌할 것이다. 훗날 이의가 없도록 하라"라고 명확히 했다.
소에지마는 귀국하여 보고했다. 그러나 1873년 (메이지 6년) 10월 정한론에 패배하여 물러났다. 1874년 (메이지 7년) 4월, 사이고 주도에게 대만 정벌 명이 내려졌다.[35]
이때 청나라 정부가 이의를 제기했고, 이전에 부추기던 미국 대사와 영국 공사가 갑자기 의견을 바꿨다. 미국 공사 핑검은 국외 중립을 선언했고,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도 출병을 비판했다. 오쿠마 대신은 출병 중지를 전했지만 사이고는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 군대의 사기도 매우 높아 출항을 막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였다. 미국, 영국 배를 사용하는 계획은 실현이 어려워졌다. 칙서를 내세워 5월 3일, 병력 3658명을 거느리고 군함 닛신, 묘슌이 나가사키에서 출항했다. 이어서 다이유마루, 메이코, 운송선 산포마루와 나가사키에 입항한 미국 상선 샤스페리를 구입하여 고사고마루[36] 로 삼았고, 영국 배 델타호를 매수하여 샤료라고 이름 짓고 5월 16일에 출항했다.[26][37]
사이고는 육군 소장 타니 타테키와 해군 소장 아카마쓰 노리요시를 거느리고 출항했다. 청나라 정부 해방역인의 요구도 무시하고[38] 일본군은 격렬하게 침공하여, 숙번, 생번 각 사는 항복했다. 최종적으로 모란사와 가오스부쓰사 수령도 항복했다. 사이고 주도는 번인과의 교환에 힘썼다.[39] 또한 주도는 살해된 피해자 유골을 모아, 현지인으로 구조에 나섰던 양 등의 협력을 얻어 현지에 묘를 만들었다.
4. 4. 전후 처리
일본은 청나라와 협상을 통해 배상금을 받아내고,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인정받았다.[40][42] 이는 류큐 처분으로 이어져 류큐 왕국은 멸망하고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다.1872년 9월, 일본은 류큐 처분을 통해 류큐 국왕을 폐위시켰다. 사건 당시 류큐 왕국은 독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청나라 정부에게 파이완족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고, 청나라 정부는 "그 지역에는 문명이 닿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일축했다.[7] 1874년, 일본 관료들은 54명의 류큐인 사망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1874년 대만 침공을 감행했다.[8]
일본 정부는 오쿠보 도시미치를 베이징에 파견하여 청나라와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은 9월 10일에 시작되어, 청나라 군기대신 공친왕, 대학사 문선 등이 대표로 참여했다. 협상은 난항을 겪었고,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 토마스 웨이드의 중재로 호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배상금 50만 냥을 지불하고 일본의 대만 출병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했다.[40] 다만 일본의 전비는 이의 10배에 달했다.[41]
이 조약에 의해, 양국은 류큐가 일본 영토이며, 대만은 청나라 영토임을 인정했다. 또한, 류큐 백성을 "일본국 속민"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조약상 류큐가 일본의 판도임을 청일 양국이 승인하는 형태가 되었고, 류큐 처분을 진행하는 데 있어, 일본에 유리한 결과가 되었다.[42]
조난 사건 이후 1872년 9월 14일 류큐번이 설치되었고, 1874년 4월 대만 출병이 일어났다. 1875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에 대해 청과의 책봉과 조공 관계 폐지, 메이지 연호 사용 등을 명령했지만, 류큐는 청과의 조공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다. 청나라는 류큐의 조공 금지에 항의하는 등 외교적 갈등이 있었으나, 쇼타이는 청나라에 대한 조공을 계속했다. 1879년, 메이지 정부는 쇼타이를 도쿄로 강제 연행하여 류큐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5. 역사적 유산
미야코섬 조난 사건은 현지인과 일본, 청나라, 그리고 류큐 왕국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조난 사건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와 각 지역의 역사적 유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지 주민들은 조난당한 류큐인들을 구조하고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덩톈바오(鄧天保), 린아지우(林阿九)는 생존자들을 숨겨주었고, 양유왕(楊友旺)은 이들을 40일 동안 자신의 집에서 보호하며 식사를 제공했다.[19] 이들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묘를 만들고 유해를 매장하는 등 인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21]
1874년 타이완 출병 당시, 일본군은 현지에 세워진 묘를 발견하고 사기를 높였다고 한다.[43][44] 일본군은 묘를 개수하고 "대일본 류큐 번민 54명 묘(大日本琉球藩民五十四名墓)"라는 비석을 세웠으나, 훗날 일본 중심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1928년에는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고, 1979년에는 대만 조난자 묘참단이 현지를 방문하여 묘참을 하는 등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력이 이어졌다.[45][47] 희생자들의 유해는 1875년 나하시에 매장되었다가 1898년 호코쿠지로 이전되었고, 1980년 묘가 재개수되어 희생자들의 성명이 새겨졌다.[48]
이 사건은 류큐와 타이완, 일본 모두에게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특히 류큐와 타이완에서는 구술 역사와 증언을 통해 사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9] 2004년부터는 화해 방문이 이루어지는 등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9]
5. 1. 일본
마타요시 세이키요 교수에 따르면, 이 사건은 두 가지 이유로 역사적으로 중요했다. 첫째, "류큐 열도가 일본에 속한다는 판결"을 낳았고, 둘째, "이후 일본의 대만 점령과 식민지화를 위한 발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7]일본 원정군은 대만 구조대가 만든 묘 앞에 기념탑을 세우고 두개골 44개를 수집했으며, 10개의 두개골은 수습하지 못했다. 두개골은 처음에는 나가사키로 옮겨졌고, 그 다음에는 나하로 옮겨져 그곳에 매장되었으며, 나중에는 같은 도시의 고코쿠지(오키나와)에 안치되었다. 1980년, 묘는 새롭게 만들어졌고, 미야코섬에서 관련 인사들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묘비는 파이완족과 오키나와인들로부터 일본 중심적인 시각을 담고 있으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9]
일본 정부는 오쿠보 도시미치를 베이징에 파견하여 청나라와 협상을 진행했다. 청나라는 이 사건을 일본의 정당한 행동으로 인정하고, 유족에게 조위금을 지급하기로 했다.[40] 이 조약으로 류큐는 일본 영토로, 대만은 청나라 영토로 인정되었다. 또한 류큐 백성을 "일본국 속민"으로 표현하여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명확히 하였고, 이는 류큐 처분을 진행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42]
1872년 류큐번이 설치되고, 1874년 타이완 출병이 일어났다. 1879년 메이지 정부는 쇼타이 왕을 도쿄로 강제 연행하여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청나라의 반응을 살피고, 타이완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5. 2. 류큐와 타이완
류큐어를 사용하는 류큐인들과 파이완어를 사용하는 타이완 원주민들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구술 역사와 증언을 통해 전해져 왔다.[9] 롄스 푸난앙은 "우리 민족과 미야코에 있던 상대방 모두 희생자였지만, 슬픈 점은 그들의 후손들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까지 140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9] 2004년부터 미야코/류큐 선원과 파이완 후손들 간의 화해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다.[9]전후에도 미야코섬과 타이완 사이의 왕래는 빈번했다. 오키나와 전투 전후 시기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미야코섬에서 타이완으로 강제 피난했다. 사키시마 제도에서 규슈 이북으로의 조직적인 피난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피난은 간혹 있었다.[64][65][66][67]
현재에도 미야코섬과 타이완 간에는 고등학교, 중학교 수준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68][69] 1997년 1월, 미야코 상공회의소 일행이 타이완 남부 관광 여행을 갔을 때 미야쿠니 후미오는 최초로 묘 참배를 했다. 같은 해 4월에 두 번째 묘 참배를 했는데, 사이고가 세운 〈류큐 번민 54명 묘〉의 글자는 읽을 수 있었지만, 〈대일본〉의 글자는 지워져 있었다.[70] 사건 현장은 타이완 3군 훈련장 안에 있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2005년 6월, 타이완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사죄하고 싶다며 후손들이 오키나와, 미야코섬을 방문해 일본 측 후손과 우호적인 악수를 나누었다.[71]
5. 3. 묘와 기념비
1874년 대만 출병 당시, 일본군은 타이완 원주민들이 만든 묘 앞에 기념탑을 세웠다.[9] 일본군은 수습한 44개의 두개골을 나가사키를 거쳐 나하로 옮겨 매장했고, 이후 고코쿠지에 안치했다.[9] 1980년, 묘는 새롭게 만들어졌고, 미야코섬에서 관련 인사들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묘비는 일본 중심적인 시각을 담고 있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9]현지인 덩톈바오(鄧天保)와 린아지우(林阿九)는 생존자들을 숨겨주고, 토지 유력자 양유왕(楊友旺)도 협력하여 이들을 보호했다.[19] 이들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장에 묘를 세웠고, 두개골을 제외한 유해를 매장했다.[21] 이후 통푸(統埔)에 분묘를 다시 세웠고, 대만 출병 당시 일본군에 의해 이곳에 기념비가 세워졌다.[21] 이 기념비에는 "대일본 류큐 번민 54명 묘(大日本琉球藩民五十四名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43][44]
1928년에는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고, 구조자와 그 자손들이 참례하여 묘전제가 거행되었다.[45] 묘역은 약 117.76m2 (약 36평)에 달한다.[46]
1979년에는 대만 조난자 묘참단이 대만을 방문하여 현지에서 묘참을 했다. 이 자리에는 구조자의 자손들도 참석했다.[47]
희생자 54구의 유해는 1875년 나하시 와카사의 '카미노케'에 매장되었다가, 1898년 나미노우에의 호코쿠지로 이전되었다.[48] 이곳에는 당시 지사였던 나라하라 시게루가 쓴 '대만 조난자 비'가 건립되었다.[48] 1980년에는 묘가 재개수되어 희생자들의 성명이 새겨졌다. 묘전제에는 구조자의 자손들과 미야코지마의 유족들이 참석했다.[48]
6. 한국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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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건을 다룬 작품
- 巴代중국어 저, 우오즈미 에츠코 역, 암초 (소후칸, 2015년)
- 히라노 쿠미코 저, 《모란사 사건: 마부이의 행방 - 일본과 대만, 각각의 화해》 (슈코샤, 2019년 5월 20일, ISBN 978-4-90421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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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から宮古島に謝罪に訪問、2007年に和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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