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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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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란 호자는 헝가리 왕국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한 슬로바키아의 정치인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1897년 언론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신문과 주간지를 편집 및 창간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에는 슬로바키아 국민당에서 활동하며 농본주의 사상을 이끌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후에는 농업부 장관, 교육부 장관, 외무부 장관, 총리를 역임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망명 생활을 하다가 미국에서 사망했으며, 2002년 슬로바키아로 유해가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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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호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밀란 호자, 1935년 사진
밀란 호자 (1935년 촬영)
이름밀란 호자
출생일1878년 2월 1일
출생지Szucsány, 헝가리 왕국 (현재 슬로바키아, 수차니)
사망일1944년 6월 27일
사망지미국플로리다주클리어워터
소속 정당슬로바키아 국민당
체코슬로바키아 농업당
직책
체코슬로바키아 외무부 장관재임 시작: 1935년 12월 18일
재임 종료: 1936년 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 총리재임 시작: 1935년 11월 5일
재임 종료: 1938년 9월 22일
이전 수상: 얀 말리페트르
다음 수상: 얀 시로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권한대행재임 시작: 1935년 12월 14일
재임 종료: 1935년 12월 18일
이전 대통령: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다음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

2. 초기 생애 및 언론 활동 (1878-1918)

1906년 밀란 호자의 지지자들


thumb의 제안 지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민족]]

밀란 호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헝가리 왕국 수차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 대학교와 빈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897년 부다페스트에서 언론인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일간지 『Slovenský denník|슬로벤스키 데니크slk』(슬로바키아 일보, 1900–1901)와 주간지 『Slovenský týždenník|슬로벤스키 티즈데니크slk』(슬로바키아 주보, 1903–1914)를 창간하고 편집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언론 사무소 편집인으로 일했다.

정치적으로는 당시 유일한 슬로바키아인 정당이었던 슬로바키아 국민당에 참여하여 주로 농업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슬로바키아 국민 평의회에 가담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2. 1. 출생 및 가계

밀란 호자는 헝가리 왕국 투로츠주의 수차니 (현재 슬로바키아 수차니)에 있는 루터교 교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姓) '호자'는 오스만 제국 정복과 통치 시대에 그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터키어로 주인이자 교사라는 뜻이다.[2]

그는 여러 김나지움에서 수학했는데, 1888년부터 1890년까지는 베스테르체바냐 (오늘날 슬로바키아 반스카 비스트리차)에서, 1890년부터 1894년까지는 쇼프론에서 공부했다. 1896년에는 나기세벤 (오늘날 루마니아 시비우)의 김나지움에서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 이후 부다페스트 대학교와 빈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2. 2. 교육

밀란 호자는 1888년부터 1890년까지 베스테르체바냐 (오늘날 슬로바키아 반스카 비스트리차)의 김나지움에서,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쇼프론에서, 그리고 1896년에 졸업 시험을 통과한 나기세벤 (오늘날 루마니아 시비우)에서 공부했다. 이후 부다페스트와 비엔나의 대학교에 다녔다.

1921년부터는 코메니우스 대학교에서 근대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2. 3. 언론 활동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부다페스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일간지 『Slovenský denníksk』(슬로바키아 일보) 및 주간지 『Slovenský týždenníksk』(슬로바키아 주보)의 편집에 참여했다.

3. 정치 경력 (1905-1938)

밀란 호자는 1905년부터 헝가리 왕국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유일한 슬로바키아 정당이었던 슬로바키아 국민당 소속으로 슬로바키아 농본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제국을 연방 군주국으로 개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슬로바키아 국민 평의회에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 민족 선언에 서명하는 등 신생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전후 수립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농민당의 슬로바키아 지역 지도자로서 토지 개혁 등 주요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국제 농업 사무국 창립에 참여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1921년부터 브라티슬라바코메니우스 대학교에서 근대사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 활동도 병행했다.

호자는 1918년부터 1938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농업부 장관, 교육부 장관, 체코슬로바키아 외무부 장관 등 여러 요직을 거쳐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총리를 역임했다. 초기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주의를 지지했으나 점차 슬로바키아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으며, 총리 재임 중 중부 유럽 국가 간 경제 통합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뮌헨 협정을 수용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3. 1. 헝가리 왕국 시기 (1905-1918)

부다페스트에서 학업을 마친 후, 호자는 부다페스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일간지 『슬로바키아 일보(Slovenský denník)』와 주간지 『슬로바키아 주보(Slovenský týždenník)』 편집에 참여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헝가리 왕국 의회 의원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유일한 슬로바키아 정당이었던 슬로바키아 국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슬로바키아 농본주의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창시자가 되었다. 1906년부터 1914년까지는 당 부의장을 지냈다. 슬로바키아 국민당이 그의 농업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자 독자적인 정당 창당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무산되었다.

1910년 선거 이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측근이 되었다. 호자는 헝가리 왕국을 슬로바키아를 포함한 여러 민족 국가로 구성된 연방 군주국으로 전환하자는 상세한 계획을 대공에게 제안했다. 대공은 연방화가 억압받는 비-마자르 민족과 군주국 간의 유대를 강화할 것이라고 희망했지만, 그의 계획은 헝가리 정치 엘리트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밀란 호자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준비에 참여했다. 그는 1918-1919년 슬로바키아 국민 평의회의 일원이었으며, 1918년 슬로바키아가 새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에 공식적으로 합류한 슬로바키아 민족 선언의 서명자였다.

3. 2.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참여 (1918)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밀란 호자가 구상했던 독자적인 정당 창당 계획은 무산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을 위한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슬로바키아 국민 평의회에 가담하여(1918-1919년 활동) 독립 운동에 힘썼으며, 1918년에는 슬로바키아 민족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슬로바키아가 새롭게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공식적으로 합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3.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시기 (1918-193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밀란 호자는 슬로바키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농민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토지 개혁, 농지 과세 법안 통과, 강제 신디컬리제이션, 행정 개혁 등 여러 분야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전간기에는 유럽 농업 정당들의 기관인 국제 농업 사무국 창립 멤버로서 체코슬로바키아 및 국제 농업 운동의 핵심 대표로 활동했다.

1921년부터는 브라티슬라바코메니우스 대학교에서 근대사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전간기에 많은 슬로바키아 신문과 잡지 설립을 도왔으며, 이를 통해 강력한 정치적, 이념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의 정치 관련 글들은 ''Články, reči, štúdie 1-6'' (1930–1934; 논문, 연설, 연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호자는 1918년부터 1938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정부 요직을 거쳤다.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직책기간
헝가리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대표1918년–1919년
내무부 국무장관1919년
법 통일 및 행정 조직부 장관1919년–1920년, 1926년–1929년
농업부 장관1922년–1926년, 1932년–1935년
교육부 장관1926년–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외무부 장관1935년–1936년
체코슬로바키아 총리1935년–1938년



1920년대에 호자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주의자였으며, 이는 그가 프라하 중앙 정부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내 슬로바키아의 특수한 필요를 고려하려 했기 때문에 체코 정치인들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나아가 그는 반(反)중앙집권적(즉, 반 프라하) 슬로바키아 정당 블록 창설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점차 변화하여 1938년에는 슬로바키아인을 별도의 민족으로 인정하고 완전한 주권을 옹호했으며, 그해 여름에는 연방주의, 자치주의, 자치 행정 아이디어를 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중앙집권적 구조 변화를 정부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려 했다. 이는 그해 가을 슬로바키아 자치가 선포되기 전에 이루어진 구상이었다.

총리 재임 중이던 1936년부터 1937년까지 호자는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를 특혜 관세에 기반하여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제 통합 구상이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결국 호자 정부는 1938년 뮌헨 협정을 받아들여야 했고, 이로 인한 압력으로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4. 망명 및 사망 (1938-1944)

쿨핀에 있는 밀란 호자의 흉상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밀란 호자는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스위스프랑스(1939년), 영국(1940년)을 거쳐 1941년부터는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망명 기간 동안 호자는 제2차 세계 대전체코슬로바키아의 미래를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1939년 10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내 슬로바키아의 상황에 대한 각서를 공동 작성하며, 1938년에 구상했던 자신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다시 제시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파리에서 슬로바키아 저항 운동의 최고 기구인 슬로바키아 국민 의회를 설립하고 의장을 맡았다.

1940년 1월, 슬로바키아 국민 의회는 체코 국민 의회와 통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의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런던에 있던 에두아르트 베네시가 이끄는 망명 정부와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했다.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된 후, 영국 보안군은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의회 구성원들을 구금했는데, 이는 베네시 그룹 측 스파이들의 공작 결과였다. 호자는 결국 타협하여 1940년 11월 베네시 정부 국무원의 직책을 수락했으나, 실질적인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간 호자는 중앙 유럽 국가들의 연방 창설 구상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담은 책 ''중앙 유럽 연방''을 1942년에 출판했다. 이 계획은 당시 미국의 지식인들과 미국 국무부 관리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전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밀란 호자는 플로리다주에서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이탈리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여러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002년 6월 27일, 그의 유해는 고향인 슬로바키아 마틴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5. 가족

그의 아들은 정치인인 페도르 호자이며, 밀란 호자 자신은 정치인이자 시인인 미할 밀로슬라프 호자의 조카이다.

참조

[1] 웹사이트 Milan Hodža at osobnosti.sk http://www.osobnosti[...]
[2] 서적 Zoraki Diplomat Bilgi Yayin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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