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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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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카 율리아는 로마 시대에 건설된 바실리카로, 주로 민사 재판소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건설을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쳤다. 바실리카는 재판 기능 외에도 시민들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체스나 체커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제공했다. 410년 로마 약탈로 파괴된 후,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101m x 49m 크기의 직사각형 기초 부분과 일부 잔해만이 남아있다. 15세기부터 시작된 발굴을 통해 바실리카의 구조와 역사적 가치가 연구되었으며, 로마 포룸의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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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율리아
개요
컴퓨터 생성 이미지
컴퓨터 생성 이미지
위치레기오 VIII 포룸 로마눔
건축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유형바실리카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 내 위치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 내 위치
평면도
평면도
상세 정보
이탈리아어 명칭Basilica Giulia
라틴어 명칭Basilica Julia
건설 시작기원전 46년
재건기원후 238년

2. 역사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바라본 바실리카 율리아 유적


바실리카 율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4년경 건설을 시작하여[16][17]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된[2][3] 포룸 로마눔의 주요 공공건물이다. 기존 바실리카 셈프로니아 자리에 세워졌다.[2][3]

완공 직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서기 12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재건 및 확장되었고,[4][5][16] 이후에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서기 199년)와 디오클레티아누스(서기 283년) 황제 시기에 화재 후 복원되었다.[4] 서기 416년에는 도시 총독 가비니우스 베티우스 프로비아누스에 의해 마지막으로 기록된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그리스 조각상 여러 점을 옮겨와 전시하기도 했다.[2][4]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로 부분적으로 파괴된[11] 이후 점차 폐허가 되었으며, 중세에는 건축 자재로 약탈되거나 교회, 작업장 등으로 일부 활용되었다.[5][12] 유적 발굴은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으나 초기에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13] 18세기 말[14]과 19세기[15]의 체계적인 발굴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2. 1. 건설과 초기 역사 (기원전 1세기 ~ 서기 1세기)

중앙 기둥 지지대의 재건된 잔해. 상단부의 넓은 부분은 하단부 아치를 시작하는 부분이다.


바실리카 율리아의 건설은 기원전 54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되었다.[16]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건설 자금으로 사용했으며,[17] 이를 위해 기존에 있던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를 철거했다.[2][3]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는 기원전 169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집과 여러 상점을 허물고 지은 건물이었다.[2][3]

카이사르 사후,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건설을 마무리하고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카 율리아로 명명했다.[2][3] 시설은 기원전 46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16] 그러나 첫 번째 바실리카 율리아는 완공 직후인 서기 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4][5]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바실리카를 재건하고 확장하여 서기 12년에 자신의 양아들인 가이우스루키우스에게 다시 헌정했다.[4][5][16]

바실리카는 주로 민사 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내부에는 타베르나(상점)와 정부 사무실, 은행 업무를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4] 특히 1세기에는 상속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첸투무비리(Centumviri, 백인 법정)의 회의 장소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4][16][17] 플리니우스 (젊은이)는 그의 저서에서 이곳에서 열렸던 상속 관련 재판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다.[9][17] 또한 수에토니우스칼리굴라 황제가 바실리카 지붕 위에서 아래 포룸에 모인 군중에게 돈을 뿌리며 즐거워했다는 일화를 전한다.[9][10]

법정 기능 외에도 바실리카 율리아는 로마 시민들이 즐겨 찾는 만남의 장소였으며, 포르티코의 대리석 바닥에는 시민들이 체스체커와 유사한 게임을 즐겼던 흔적으로 보이는 8x8 격자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9]

2. 2. 로마 제정 시대의 활용 (서기 1세기 ~ 5세기)

바실리카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된 후 로마 제정 시대 동안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완공 직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기원 12년에 개축 및 확장되었다.[16]

주된 기능은 민사 재판소였으며, 시설 내에는 타베르나(상점 또는 식당)와 관공서 사무실도 있었다. 특히 상속 문제를 다루는 특별 민사 재판소인 Centumviri|켄툼비리lat(백인 법정)의 회의 장소로 유명했다.[16][17] 소 플리니우스는 그의 서신에서 바실리카 율리아에서 열린 재판을 묘사했는데, 한 예로 80세 노인이 새 신부를 맞이하고 열흘 만에 사망하자 기존 상속인에서 제외된 사람이 제기한 소송을 다루었다고 기록했다.[17]

또한 로마 시민들의 회합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포르티코(열주랑)의 대리석 바닥에는 체스체커와 유사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8x8 눈금이 새겨진 곳도 있었다.

바실리카는 이후에도 화재 피해를 겪었으며, 238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개축되었다. 그러나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릭 1세가 이끄는 로마 약탈 과정에서 파괴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2. 3. 쇠퇴와 멸망 (5세기 이후)

바실리카 율리아는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면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서서히 폐허가 되었다.[11] 특히 중세와 초기 근대 시대에는 건물의 대리석이 생석회를 만드는 데 귀중한 재료로 여겨져 약탈되었다. 생석회는 모르타르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며, 초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가마터의 잔해는 건물 구성 요소 대부분이 이러한 방식으로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5]

폐허가 된 바실리카의 일부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7세기에서 8세기경부터 건물의 남은 부분을 이용하여 교회가 들어선 것으로 보이며,[5] 이 교회는 일반적으로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기록에 언급되는 Santa Maria de Cannapara|산타 마리아 데 카나파라la 교회로 여겨진다.[5]

바실리카의 다른 부분들은 중세 시대에 여러 직업군이 점유하여 사용했다. 11세기에는 대리석 세공인들, 즉 marmorarii|마르모라리이la가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나머지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여 대리석 건축 장식을 수리하고 판매하는 작업장으로 활용했다. 동쪽 통로는 교황령의 삼베 제조업자들이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해당 구역은 Cannaparia|카나파리아la라고 불리게 되었다. 16세기에는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던 바실리카 부지가 인접한 Ospedale della Consolazione|오스페달레 델라 콘솔라치오네it 병원 환자들의 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12]

3. 구조

바실리카 율리아는 로마 포룸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비쿠스 유가리우스(Vicus Iugarius), 동쪽으로는 비쿠스 투스쿠스(Vicus Tuscus)라는 두 개의 중요한 고대 도로와 짧은 면이 접해 있었다.[6]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복원된 후, 바실리카의 정면은 2층 높이의 아케이드(아치형 회랑)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각 층의 아치 사이에는 카라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도리스식 기둥이 장식되어 있었다.[8]

3. 1. 건물 외관



현재 바실리카 율리아가 있던 자리에는 직사각형의 영역이 남아 있으며, 지면에서 약 1m 높이로 평평하게 조성되어 있고 그 안에는 뒤섞인 돌덩어리들이 놓여 있다. 바실리카의 비아 사크라를 향했던 측면을 따라 대리석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으며,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을 향한 바실리카 끝 부분에도 더 높은 계단(이곳의 지면은 더 낮다)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원래 건물의 기초 부분은 101m × 49m 크기의 직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6] 바실리카 중앙에는 82m × 16m 크기의 넓은 광장이 있었고, 주변은 7.5m 폭의 대리석 원주로 지탱된 열주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16] 현재는 건물을 지탱했던 기둥과 벽 대부분이 사라지고 기초 부분의 초석만 남아 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약간의 벽과 함께 원주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3. 2. 내부 구조



바실리카 율리아의 1층은 동서 방향으로 총 5개의 통로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중앙 통로는 82m × 18m 크기의 넓은 홀을 형성했으며, 3층 높이에 달하는 지붕으로 덮여 있었다.[2] 중앙 홀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인접 통로들은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돌 기둥으로 구분되었다. 이 기둥들은 콘크리트 아치를 지지하는 동시에, 상층부를 받치는 역할도 했는데, 이 상층부는 공공 갤러리로 이용되었다.[5]

바닥재는 공간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앙 홀 바닥은 화려한 여러 색상의 대리석 판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이는 인접한 통로들의 단순한 흰색 대리석 바닥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7] 또한, 포르티코(열주랑) 바닥의 흰색 대리석에는 시민들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새긴 것으로 보이는 선들이 남아있다. 쿠리아를 마주보는 위층의 돌에는 체스체커와 유사한 게임을 위한 8x8 격자무늬가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3. 3. 내부 시설

바실리카에는 민사 법원타베르나(상점)가 있었으며, 정부 사무실과 은행 업무를 위한 공간도 제공했다.[9] 1세기에는 상속 문제를 관장하는 첸투무비리(백인 법정)의 회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9][16][17] 소 플리니우스는 그의 서간에서, 80세 아버지가 새 아내를 맞이한 지 열흘 만에 딸(Attia Viriola)을 상속에서 제외한 사건[17]을 이곳 법정에서 다루었다고 기록했다.[10]

이곳은 로마 시민들이 즐겨 찾는 만남의 장소였으며, 공공 회의 장소와 상점도 갖추고 있었지만 주된 기능은 법정이었다. 포르티코(열주랑)의 대리석 바닥에는 체스체커와 유사한 놀이를 즐기기 위해 새겨진 8x8 정사각형 격자무늬 게임판이 남아 있다.[2] 시민들이 이러한 보드 게임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1층 내부는 5개의 통로로 나뉘었으며, 중앙 홀은 82m x 18m 크기에 3층 높이의 지붕으로 덮여 있었다.[2] 중앙 홀 바닥은 화려한 다색 대리석 판으로 포장되었고, 주변 통로는 흰색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대조를 이루었다.[7]

서기 416년, 도시 총독 가비니우스 베티우스 프로비아누스가 바실리카를 복원하면서 그리스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와 티마르코스(Timarchus)의 작품 여러 점을 건물 정면 중앙 근처에 전시했다. 이 복원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 새겨진 조각상 받침대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2][4]

4. 고고학적 발굴



바실리카 율리아는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면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점차 폐허로 변했다.[11] 특히 중세와 초기 근대에는 건물의 대리석과 석회화가 생석회를 만드는 데 귀중하게 사용되어 상당 부분 유실되었다. 초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가마 유적은 이러한 파괴가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5]

폐허의 일부는 중세 시대에 교회(''산타 마리아 데 카나파라'')로 개조되거나[5], 대리석 세공인이나 삼베 제조업자들이 작업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하기도 했다.[12] 16세기에는 인근 병원의 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12]

바실리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으나, 초기 발굴은 유적 보존보다는 귀중한 석재를 재사용할 목적으로 이루어져 파괴적인 측면이 강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보다 체계적인 발굴과 일부 복원 작업이 시도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바실리카 율리아의 유적은 이러한 발굴 과정을 통해 드러난 것으로, 지면보다 약 1m 높게 조성된 직사각형의 기초 부분과 뒤섞인 돌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아 사크라를 향한 쪽으로는 대리석 계단이 길게 남아 있으며,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방향으로도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4. 1. 초기 발굴 (15세기 ~ 18세기)

바실리카 율리아에 대한 최초의 발굴은 15세기 말과 16세기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귀중한 석회화와 대리석을 재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1496년에는 로마 추기경 아드리아노 카스텔레시가 자신의 로마 궁전인 토를로니아 궁전 정면을 짓기 위해 유적에서 석회화를 채취했다.[13] 이후 1500년, 1511–12년, 1514년에도 추가 발굴이 있었다.[13]

18세기에 들어서도 발굴은 계속되었다. 1742년에는 바실리카 아래를 지나는 고대 로마의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의 일부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파괴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바닥을 덮고 있던 Giallo antico(황색 대리석)가 벗겨져 석공에게 팔렸다.[13] 또한, 슈발리에 프레덴하임은 1788년 11월부터 1789년 3월까지 발굴을 진행하여 남아있던 채색 대리석 포장재 상당수를 해체하고 많은 건축 파편을 제거했다.[14]

4. 2. 19세기 이후 발굴

1850년, 피에트로 로사는 현장을 발굴하여 단일 대리석 기둥과 석회화 지지대를 재건했다. 1852년에는 스투코(stuccoworkeng) 코퍼링이 있는 콘크리트 아치 부분들이 발굴되었지만 1872년에 파괴되었다.[15]

참조

[1] 뉴스 A Topographical Dictionary of Ancient Rome http://archive1.vill[...]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Rome and Environs: An Archaeological Guid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 서적 The Roman Forum: A Reconstruction & Architectural Guid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Remains of Ancient Rome
[5] 뉴스 A Topographical Dictionary of Ancient Rome https://penelope.uch[...] Ox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Rome and Environs: An Archaeological Guid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7] 서적 The Remains of Ancient Rome
[8] 서적 The Remains of Ancient Rome
[9] 서적 The Remains of Ancient Rome
[10] 문서 Caligula
[1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ights.seinda[...] 2013-05-26
[12] 서적 The ruins and excavations of ancient Rome; a companion book for students and travelers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 Co.
[13] 서적 The Ruins and Excavations of Ancient Rome;a companion book for students and travelers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 Co.
[14] 서적 The ruins and excavations of ancient Rome; a companion book for students and travelers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 Co.
[15] 서적 Rome: an Oxford archaeological guide Oxford University Press 1998-03
[16] 간행물 Basilica Julia https://penelope.uch[...] Oxford University Press
[17] 간행물 Basilica Julia https://penelope.uch[...] Encyclopaedia Rom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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