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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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로마 포룸에 위치한 기념물로, 203년에 파르티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과시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카라칼라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은 라틴어 비문과, 파르티아 전쟁의 주요 장면을 묘사한 부조 장식으로 유명하다. 건축 양식은 중앙 아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조 문이 있는 디자인이며, 트라베르틴, 대리석, 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로 건설되었다. 4세기 이후 지반 침강과 홍수로 인해 일부 손상을 입었지만, 교회 건물로 사용되면서 비교적 잘 보존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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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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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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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팔라티노 북서쪽의 로마 포룸 |
좌표 | 좌표: 41°53′34″N 12°29′05″E |
유형 | 개선문 |
로마자 표기 | Arcus Septimii Severi |
이탈리아어 표기 | Arco di Settimio Severo |
건설 정보 | |
건설 연도 | 203년 |
건설 주체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상세 정보 | |
위치 정보 | 로마의 로마 포룸 |
2. 역사
캄피돌리오 언덕 바로 옆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4세기에 로마가 황폐해지면서 지대 전체에 흙이 쌓여 도로까지 뚫렸다. 아치의 기둥은 흙에 묻혔고, 중세와 근대에 걸쳐 오염과 파괴 행위로 인해 어느 정도 파손되었다. 개선문 하부에는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트라베르틴과 대리석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콘크리트와 벽돌을 함께 사용하여 건축되었다. 기둥에는 프로콘네소스 대리석이, 석조에는 펜텔리쿠스 산의 대리석이, 주요 부조 기둥에는 루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5] 대리석 블록은 직사각형 형태로 정밀하게 잘려 수평 또는 수직으로 매우 가깝게 맞춰졌다. 이러한 정밀한 작업 방식은 당시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대리석 블록은 지상에서 절단되었고, 장식 손상을 막기 위해 세부 사항은 블록 배치 후 다듬어졌다.[5]
중세 동안 지속적인 홍수로 개선문을 덮고 있던 흙들이 쓸려나갔지만, 1742년 그림에는 개선문의 절반만 땅 위에 나와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 포룸 로마눔의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1199년에 지어진 성당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성당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개선문은 파괴되지 않았고, 현재 포룸 로마눔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유적이 되었다.
2세기 이후, 로마 황제들은 모든 로마인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들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개선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 이 개선문은 로마 국가가 형성되는 동안 제작된 제국주의 선전의 의도적인 도구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개선문은 파르티아 정벌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의뢰되었지만, 세베루스 왕조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5] 파르티아에 대한 그의 승리는 197년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로 가서 파르티아 제국에 의해 포위된 도시를 되찾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파르티아로부터 로마가 점령했던 니시비스를 되찾은 후, 군대를 이끌고 바빌론의 셀레우키아와 수도 크테시폰과 같은 다른 파르티아 도시들을 점령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시작된 전쟁으로 로마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획득하게 되었다.[7]
셉티미우스와 카라칼라는 이 개선문의 완성을 로마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개선문 이미지가 담긴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5] 동전과 실제 개선문의 묘사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8]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의 아들 게타와 카라칼라를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하도록 결정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은 후, 게타는 그의 형 카라칼라에게 살해당했다.[9]
개선문은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에 세워졌고, 안코나에 있는 트라야누스 개선문처럼 계단으로 열린 장소로 이어져 있었다. 4세기까지 반복된 홍수로 포룸의 지면 수준이 높아져 계단이 묻히고, 문을 평탄한 길이 지나가게 되었다. 대량의 암석 부스러기와 실트가 주변 언덕에서 흘러들어 개선문의 기부는 완전히 그것들로 묻혔다. 중세의 수레와 근대 초기의 교통에 의해 발생한 손상은 받침대 부조 위의 기둥 기부에 지금도 남아 있다.
중세에도 이 저지대는 자주 홍수를 겪어 토사가 퇴적되었기 때문에, 카나레토가 1742년에 이 개선문을 그렸을 때, 지면 위에는 개선문의 윗부분 절반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이 개선문의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이것을 기독교 교회의 일부로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교회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을 때도 개선문은 그 교회의 재산으로 존속하여 다른 건축물 건설을 위해 철거되지 않았다.
315년에, 포룸 로마눔 반대편에 세워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
3. 건축
개선문은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에 세워졌으며, 안코나의 트라야누스 개선문처럼 계단을 통해 열린 공간으로 이어졌다. 4세기까지 반복된 홍수로 포룸의 지면이 높아져 계단이 묻히고 평탄한 길이 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주변 언덕에서 흘러내려온 암석 부스러기와 토사가 개선문 기부를 덮었고, 중세와 근대 초기의 수레와 교통으로 인한 손상이 기둥 기부에 남아 있다.
카나레토가 1742년에 개선문을 그렸을 때는 잦은 홍수로 인한 토사 퇴적 때문에 개선문의 윗부분 절반만 지면 위에 드러나 있었다. 개선문이 잘 보존된 것은 기독교 교회의 일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전한 후에도 개선문은 교회 재산으로 남아 철거되지 않았다.
315년 로마 포룸 반대편에 세워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
3. 1. 구조
개선문은 로마 포룸의 초기 기단 부분에 세워졌다. 중앙 아치는 유려하게 장식된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 옆에 보조 문들이 1개씩 달려있다. 이와 같은 디자인은 근대 개선문 양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높이는 약 23m이고, 너비는 25m이다. 날개가 달린 승리의 여신이 조각되어 있으며, 남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들의 동상이 서 있던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2]
이 개선문은 원래 트라베르틴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로마 포룸의 고대 레벨에서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중앙 아치길은 풍부하게 코퍼 처리된 반원형 볼트로 덮여 있으며, 각 측면 아치길로 이어지는 측면 개구부가 있는데, 이는 많은 초기 근대 개선문에서 모방된 특징이다.[2] 개선문에는 두 세트의 부조가 있다. 첫 번째 세트는 아치 꼭대기의 각 면에 있는 4개의 큰 패널로 구성되며, 두 번째 세트는 4개의 아치길 안쪽에 설치된 8개의 패널로 구성된다.[3]
세 개의 아치길은 교각 위에 있으며, 이는 복합 기둥으로, 받침대 위에 있다. 스팬드럴에 승리의 여신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남쪽 교각의 계단은 기념비 꼭대기로 이어진다. 이전에는 개선문 꼭대기에 황제와 두 아들의 동상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콰드리가'')와 병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4]
주요 건축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개선문을 빠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숙련된 기술로 작업했다.[5] 기둥, 교각, 처마 장식을 사용한 전통적인 방식에도 불구하고, 건축가가 질감의 효과를 표현하고 두드러지고 다재다능한 평면을 보여주는 스타일은 고전 양식에서 벗어난 힌트를 보여준다. 학자 리처드 브릴리언트에 따르면, 개선문에 나타난 다양한 스타일은 여러 다른 작업장과 조각가들이 관여했음을 나타낸다. 이는 의뢰를 신속하게 완료하는 방법이었다. 브릴리언트는 모티브에 대한 동일한 모델이 부조 전체에서 작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식별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패널, 중간 부조, 기둥 받침대와 같은 개별 섹션조차도 별도의 예술가에게서 비롯되었을 분명한 기술이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5]
개선문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파사드의 그림자는 기둥과 3차원 처마 장식으로 깊어졌다. 파사드는 네 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현관을 만드는 포르티코로 만들어졌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의 테트라스틸 파사드는 기둥 뒤에 깊은 현관과 같은 공간이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5]
3. 2. 양식
개선문은 트라베르틴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포룸의 고대 지면에서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중앙 아치길은 풍부하게 코퍼 처리된 반원형 볼트로 덮여 있으며, 양쪽 측면 아치길로 이어지는 개구부가 있는데, 이는 많은 초기 근대 개선문에서 모방된 특징이다.[2] 높이는 약 23m이고, 너비는 25m이다. 세 개의 아치길은 교각 위에 있으며, 복합 기둥이 받침대 위에 있다.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스팬드럴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남쪽 교각의 계단은 기념비 꼭대기로 이어지며, 이전에는 개선문 꼭대기에 황제와 두 아들의 동상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콰드리가'')와 병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4]
주요 건축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개선문을 빠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숙련된 기술로 작업했다.[5] 기둥, 교각, 처마 장식을 사용한 전통적인 방식에도 불구하고, 건축가가 질감의 효과를 표현하고 두드러지고 다재다능한 평면을 보여주는 스타일은 고전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학자 리처드 브릴리언트에 따르면, 개선문에 나타난 다양한 스타일은 여러 다른 작업장과 조각가들이 관여했음을 나타낸다. 이는 의뢰를 신속하게 완료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브릴리언트는 모티브에 대한 동일한 모델이 부조 전체에서 작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식별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패널, 중간 부조, 기둥 받침대와 같은 개별 부분조차도 별도의 예술가에게서 비롯되었을 분명한 기술이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5]
개선문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파사드의 그림자는 기둥과 3차원 처마 장식으로 깊어졌다. 파사드는 네 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현관을 만드는 포르티코로 만들어졌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의 테트라스틸 파사드는 기둥 뒤에 깊은 현관과 같은 공간이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5]
4. 장식
개선문은 포룸 로마눔의 초기 기단 부분에 세워졌으며, 중앙 아치는 유려하게 장식된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양 옆에 보조 문들이 1개씩 달려있다. 이 디자인은 근대 개선문 양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높이는 약 23m이고, 너비는 25m이다. 날개가 달린 승리의 여신이 조각되어 있으며, 남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들의 동상이 서 있던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개선문은 트라베르틴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원래는 고대 포룸의 지면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도록 설계되었다. 중앙 아치도는 반원형 볼트로 전체가 격자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양쪽 아치도 사이에는 측면 개구부가 통하고 있다.
세 개의 아치도는 교각으로 지지되며, 그 전면은 받침대 위의 복합식 오더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교각에는 기념비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4. 1. 다락방
개선문은 승리를 과시하고 제국주의적 선전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장식은 필수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개선문은 로마식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직적 상승을 보여주고, 설계자가 어떻게 수평적 포인트를 추가했는지 보여준다.다락방의 장식은 황실의 업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세베루스 시대의 동전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다락방 꼭대기에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와 도금된 청동으로 만든 두 명의 기수가 있었다.[6] 이 조각들은 트로피를 들고 있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락방은 개선문의 비문을 장식적으로 틀을 잡도록 설계되었다.[5] 이는 글자의 도금과 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글자에 금박을 입혔기 때문에 햇볕이 좋은 날에는 반사 때문에 문장을 읽기 어려웠겠지만, 오후에는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락방 기단의 다웰 구멍은 꽃이나 트로피 상징과 같은 금속 장식이 부착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락방에는 비문 주변에 장미 문양이 있고 레즈비언 키마티온이 있는 처마 장식과 아칸서스 띠가 있는 이중 몰딩이 있다. 개선문은 코린트식 기둥을 사용한 제국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을 사용한다.[5]
4. 2. 부조
개선문 전체에는 많은 부조가 있다. 아치 입구의 스팬드럴 근처에는 황제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아다니는 빅토리아가 있다. 빅토리아 아래에는 사계절을 나타내는 네 개의 조각상이 있다.[4] 전쟁 포로들은 지상층에 가장 가까운 받침대에 묘사되어 있다. 아치를 지나가는 방문객들은 이 이미지들을 보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제국 승리를 상기하게 된다. 이 포로들 중 일부는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고, 다른 일부는 손을 뒤로 한 채 로마 병사가 그들 뒤에 서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획득한 전리품과 노획물은 네 개의 주요 부조 아래에 묘사되어 있다. 전리품은 큰 동물이 끄는 수레에 실려 운송되고 있다.[5] 아치에는 파르티아 제국과의 로마 전쟁 장면을 보여주는 네 개의 주요 부조 패널이 있다.[5]

- 부조 1: 195년 첫 번째 파르티아 전쟁 당시 니시비스 포위를 나타낸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전쟁 후 니시비스를 보호해야 했던 기사이다. 니시비스는 파르티아와의 첫 번째 전쟁의 원인 (전쟁의 도화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첫 번째 패널에 묘사되었다. 패널 하단에 있는 작은 건물은 오스르오네와 아디아베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패배한 후 니시비스 포위 동안 세워진 로마 군영을 나타낸다. 다수의 인물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첫 번째 파르티아 전쟁에서 오스르오네와 아디아베네를 물리친 전투를 나타낸다.[4]
- 부조 2: 이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 패널의 한 해석은 로마의 동맹국인 에데사의 반란 장면이라는 것이다. 하단 부분은 전투처럼 보이지만, 대신 다른 에데사 인물들 앞에서 황제에게 항복하는 아브그루스 왕의 항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5] 중앙 부분은 왕이 황제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패널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은 이 장면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하트라시 사이의 합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황제가 창을 아래로 든 모습은 그의 공격성이 부족함을 암시한다. 다른 인물은 굴복하는 이론과 달리 무릎을 꿇지 않는다.[4]
- 부조 3: 이 패널은 수도 쪽 면에 있으며 두 번째 파르티아 원정의 부조이다. 부조 왼쪽에 로마군이 셀레우키아를 공격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 도망치는 인물들은 파르티아 병사들이고, 부조 상단에는 로마군에게 항복하는 시민들이 묘사되어 있다.[5]
5. 비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의 라틴어 비문은 개선문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개선문이 봉헌될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아들 카라칼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통치했다. 비문 중간의 괄호 안 부분은 원래 그의 다른 아들 게타를 언급했으나, 카라칼라가 게타를 기억말살형에 처하면서 수정되었다.[5]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임페라토르·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마르쿠스의 아들, 세베루스 피우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국가의 아버지, 파르티아 정복자, 아라비아 정복자 및 아디아베네 정복자, 최고 신관, 호민관 11회, 임페라토르 칭호 11회, 집정관 3회, 프로콘술 및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의 아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펠릭스(=카라칼라) 황제, 호민관 6회, 집정관, 프로콘술, ''국가의 아버지 / 최고, 최강의 국가 지도자'' / 국가를 재건하고 로마의 지배권을 확장한 것을 기리며 / 국내외에서 자신의 수많은 덕을 보여준 것에 대하여. 로마 원로원과 시민(SPQR)"[12]
여기서 기울임체 부분 ''"P(atri) P(atriae) / OPTIMIS FORTISSIMISQUE PRINCIPIBUS"''은 카라칼라 황제의 동생이자 공동 황제였던 게타가 암살된 후, 다마나티오 메모리아에가 행해졌기 때문에 수정된 부분이다. 원래 문구는 "P(ublio) SEPTIMIO L(ucii) F(ilio) GETAE NOB(ilissimo) CAES(ari)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루키우스의 아들, 게타·고귀한 카이사르"였다.[13]
남동면과 북서면의 비문 내용은 동일하다.[12]
6. 현대의 모습
315년에 포룸 로마눔 반대편에 세워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
6. 1. 보존 및 복원
캄피돌리오 언덕 바로 옆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4세기에 로마가 황폐해지면서 흙이 쌓여 도로가 뚫렸고, 기둥이 묻히는 등 중세와 근대의 오염과 파괴 행위로 인해 어느 정도 파괴되었다. 하지만 개선문 하부에는 그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5]중세 동안 지속적인 홍수로 흙이 쓸려나갔지만, 1742년 그림에는 개선문의 절반만 땅 위에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 포룸 로마눔의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1199년에 지어진 성당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성당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후에도 개선문은 파괴되지 않았고, 현재 포룸 로마눔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유적이 되었다.[2]
개선문에서 가장 훼손된 부분은 침식으로 인해 표면이 마모되고 부조 패널이 어두운 껍질로 덮인 것이다. 탄화수소 연기는 대리석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취약한 코팅을 두껍게 만들었으며,[5] 불에 의한 손상은 개선문 왼쪽 첫 번째 큰 패널에서 소성으로 인해 나타난다. 개선문 밖으로 돌출된 코니스와 상단에도 손상이 있지만, 이를 제외하면 개선문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세베루스 왕조의 숙련된 석공과 건축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마모와 자연 현상에도 불구하고 기념물이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카피톨리노 언덕 기슭,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코린트식 기둥 3개가 있는데, 이는 유피테르 토난스 신전의 잔해이다.[10] 원래는 계단을 통해 중앙 개구부로 이어졌는데, 이는 안코나의 트라야누스 개선문과 유사하다. 4세기경 침식 작용으로 포룸의 지면이 높아지면서 아치 아래로 처음으로 도로가 생겼다. 주변 언덕에서 쓸려 내려온 토사와 침전물이 많아 기둥 기저부까지 아치가 파묻혔다. 중세 시대와 초기 근대 시대의 바퀴 달린 차량에 의한 손상은 받침대 부조 위에 있는 기둥 기저부에서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중세 시대에는 저지대 포럼의 반복적인 홍수로 인해 많은 퇴적물과 잔해가 유입되어, 카날레토가 1742년에 그림을 그렸을 때 아치의 상반부만 지상에 노출되었다. 아치가 비교적 잘 보존된 것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산티 세르지오 에 바코 알 포로 로마노 교회에 기증하면서 기독교 교회 건물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아치의 절반은 치미니 가문 소유였으며, 이 가문이 구조물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새에는 아치 꼭대기에 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교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아치는 교회의 재산으로 남아 다른 건축물 건설을 위해 철거되지 않았다.[2]
참조
[1]
서적
The Life and Reign of the Emperor Lucius Septimius Severus
L’Elon Musk
[2]
서적
Roman art and architecture
Thames & Hudson
[3]
논문
The Arch of Septimius Severus at Lepcis Magna
1951-12
[4]
논문
The Arch of Septimius Severus in the Roman Forum: a Re-Consideration
2013
[5]
서적
The Arch of Septimius Severus in the Roman Forum (Memoirs of the American Academy in Rome, 29)
American Academy in Rome
[6]
서적
Handbook of Roman art: a survey of the visual arts of the Roman world
Phaidon
[7]
서적
The Severan Dynas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서적
Handbook of Roman art: a survey of the visual arts of the Roman world
Phaidon
[9]
서적
Rome Alive : a Source-Guide to the Ancient City
Ill: Bolchazy-Carducci
[10]
서적
The Congregational magazine, for the year 1834
https://books.google[...]
Jackson and Walford
[11]
간행물
CIL 06, 1033
[12]
웹사이트
Arch of Septimius Severus
http://archive1.vill[...]
University of Virginia
2023-08-12
[13]
웹사이트
碑文を書き換えた例
https://blog.excite.[...]
デザインの現場 小林章の「タイプディレクターの眼」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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