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환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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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승환은 대한제국 시기의 군인으로, 1869년에 태어나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항거하여 자결했다. 그는 1887년 무과에 급제하고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이후 복위 운동을 준비했으나 중단하고, 군대 해산령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함"을 한탄하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휘하 부대의 봉기를 이끌어 남대문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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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 (186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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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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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박승환 |
한자 이름 | 朴昇煥 |
로마자 표기 | Bak Seung-hwan |
출생일 | 1869년 9월 7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반촌 |
사망일 | 1907년 8월 1일 |
사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서소문 병영 |
묘지 | 알 수 없음 |
가족 관계 | |
부 | 박주표 |
모 | 남양 홍씨 |
자녀 | 박정흡(아들) |
친척 | 박대종(손자), 박왕종(손자) |
군사 경력 | |
소속 | 대한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97년 ~ 1907년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육군 참령(소령) |
지휘 | 대한제국 육군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알 수 없음 |
알려진 공훈 | 남대문 전투 조직 |
서훈 | |
훈장 내역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
기타 정보 |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박승환(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박승환은 1869년 9월 7일 한성부 반촌(泮村)에서 박주표(朴周杓)와 남양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9][1]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6년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897년 졸업 후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9][2] 이후 군에서 경력을 쌓아 1904년 육군 참령(소령)으로 진급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을 맡았다.[9][3][4]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07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자 궁궐에 들어가 복위를 시도하려 했으나 고종에게 해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중단했다.[9] 같은 해 8월 1일, 제3차 한일 협약에 따른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이에 항거하여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등의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9][1]
박승환의 자결 소식은 휘하 장병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남대문 전투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2] 봉기 진압 후 일제는 그의 명예를 훼손하려 했으나,[1] 그의 죽음은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한 배경에는 박승환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9] 2003년 8월에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1869년 9월 7일 한성부 반촌(泮村)에서 아버지 박주표(朴周杓)와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9][2]1896년 9월 28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9][2] 당시 무관학교 교장이었던 이학균은 일본 제국의 영향력 확대에 맞서 민족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는데, 이는 박승환의 신념 형성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3] 1897년 3월 21일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현재의 소위 계급)로 임관하여 친위대에 배치되었다.[9][2]
이후 군 내부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아나갔다. 1899년 11월 11일 육군 부위(중위)로 진급하여 시위대 제1연대 제2대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고,[3] 1900년 7월 23일에는 육군 정위(대위)로 진급하여 제1친위연대 제1대대 제1중대장을 맡았다.[3]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시위대 제1연대 중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3] 1904년 2월 15일 육군 참령(현재의 소령 계급)으로 진급하여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이라는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다.[9][3][4]
2. 2. 대한제국군 복무
1896년 9월 28일 무관학교에 입학하여[2] 민족주의자인 교장 이학균의 영향을 받았다.[3] 1897년 3월 21일 졸업 후 육군 보병 참위(소위)로 임관하여 친위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중위(1899년 11월 11일), 대위(1900년 7월 23일)를 거쳐 1904년 2월 15일 육군 참령(소령)으로 진급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이 되었다.[9][3][4]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07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자 궁궐에 들어가 복위를 시도했으나 고종에게 해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중단했다. 같은 해 7월 24일 체결된 제3차 한일 협약의 부속 비밀 협정에 따라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결정되자, 일제는 대대장 이상 장교들을 조선 주차 일본군 사령부로 소집했다. 박승환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병을 핑계로 불응하고 서소문 병영에 머물렀다.[8]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박승환은 군대 해산으로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병영으로 찾아온 일본군 장교 앞에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종묘와 사직이 이미 망했고 나라의 방위도 이에 따라 사라졌으니, 나는 군인의 신분으로 의리상 구차히 살 수 없다."라는 유서를 남겼다.[1]
박승환의 자결 소식은 즉시 휘하 장병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격분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봉기하여 남대문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2] 봉기가 진압된 후 일제는 박승환의 죽음을 폄훼하려 했으나,[1] 그의 의로운 죽음은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배경에는 박승환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도 있었다.
2. 3. 일제 침략과 항거
대한제국군 참령(소령)으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07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위를 빼앗기자 궁중에 들어가 복위 운동을 시도하려 했으나, 고종에게 해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중단했다.[9]같은 해 7월 24일 체결된 제3차 한일 협약에 따른 비밀 협약(부속 각서)에 의해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이 결정되었다. 일제는 군대 해산을 위해 대대장 이상의 장교들을 조선 주차군 사령부로 소집했으나, 박승환은 불길한 예감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서소문 병영에 머물렀다.[8] 그는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해왔으나, 군대가 해산되면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박승환은 병영으로 호출하러 온 일본군 장교 앞에서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내용과[9] "종묘와 사직이 이미 망했고 나라의 방위도 이에 따라 사라졌다. 나는 군인의 신분이니 의리상 구차히 살 수가 없다."[1]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가 지휘하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 일부는 분노하여 봉기했고, 이는 남대문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2] 봉기가 진압된 후, 일제는 박승환의 명예를 훼손하려 시도했다.[1]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응징이자, 박승환의 원수를 갚은 의거로 평가받는다.
2. 4. 자결과 남대문 전투
대한제국군 참령(소령)으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07년, 고종 황제가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제위를 빼앗기자 궁중에 들어가 복위 운동을 시도하려 했으나, 고종에게 해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중단했다.[9]같은 해 7월 24일 체결된 정미 7조약에 따른 비밀 협약(부속 각서)으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결정되었다. 8월 1일, 군대 해산을 위해 대대장 이상의 장교들을 일본군 사령부로 소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박승환은 불길한 예감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서소문 병영에 머물렀다.[8] 그는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해왔으나, 군대 해산으로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자결을 결심했다. 병영으로 찾아온 일본군 장교 앞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9] 종묘와 사직이 이미 망했고 나라의 방위도 이에 따라 사라졌다. 나는 군인의 신분이니 의리상 구차히 살 수가 없다.[1]
박승환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가 지휘하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분노하여 봉기했고, 이는 남대문 전투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2] 봉기가 진압된 후 일본 정부는 박승환의 명예를 훼손하려 시도했다.[1] 이후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박승환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 사후
(내용 없음)
3. 1. 명예 회복과 추서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2][5][6] 2003년 8월에는 대한민국의 국가지정 인물로 선정되었다.[6]3. 2. 대중문화 속 박승환
박승환의 발언과 자결은 2018년 대한민국 TV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에서 묘사되었으며, 남대문 전투 또한 다루어졌다.4. 계급 변동
wikitext
날짜 | 계급/품계 | 비고 |
---|---|---|
1897년 3월 21일 | 보병 참위 | 소위에 해당 |
1898년 5월 9일 | 6품 승진 | |
1898년 9월 12일 | 정3품 승진 | |
1899년 11월 11일 | 부위 | 중위에 해당 |
1900년 7월 23일 | 보병 정위 | 대위에 해당 |
1903년 12월 26일 | 종2품 승진 | |
1904년 2월 15일 | 참령[10] | 소령에 해당 |
5. 가족 관계
- '''아버지''': 박주표(朴周杓)
- '''어머니''': 남양 홍씨
- '''아들''': 박정흡
- * '''손자''': 박대종(朴大鐘, 1917 ~ 1995)[11]
- * '''손자''': 박왕종(朴王鐘, 1936 ~ )[7]
참조
[1]
웹사이트
박승환
https://terms.naver.[...]
2022-06-05
[2]
웹사이트
전쟁·군사정보 > 이달의 호국인물: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
2022-06-05
[3]
웹사이트
박승환
https://e-gonghun.mp[...]
공훈전자사료관
2022-10-16
[4]
웹사이트
박승환-대한제국군 강제해산명령에 순국으로 응답한 장교
https://terms.naver.[...]
Navercast
2020-01-25
[5]
웹사이트
박승환
https://terms.naver.[...]
2022-06-05
[6]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Independence merit public information: Park Seung-hwan
https://e-gonghun.mp[...]
2023-07-03
[7]
웹사이트
축구인.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선수로 출전했으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거쳐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광복회 부회장을 지냈다. 출처
https://newslibrary.[...]
Kyunghyang Shinmun
1995-08-17
[8]
서적
2010
[9]
웹인용
박승환-대한제국군 강제해산명령에 순국으로 응답한 장교
https://terms.naver.[...]
네이버캐스트
2020-01-25
[10]
문서
음력 1903년(고종 40년) 12월 30일
[11]
뉴스
축구인.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선수로 출전했으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거쳐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광복회 부회장을 지냈다. 출처 부음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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