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죽막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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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안 죽막동 유적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끝에 위치한 해안 제사 유적으로, 삼국 시대 백제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양 제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1992년 발굴 조사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제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은 해안 절벽 위의 제사 흔적과 함께, 백제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해양 제사 문화 변천 과정을 보여주며, 현재까지도 어부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개양할미 전설과 용왕제가 전해져 가치가 높다. 죽막동 유적은 고대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으며, 2017년 대한민국 사적 제54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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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 죽막동 유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명칭 | 죽막동 제사 유적 |
| 문화재 지정 명칭 | 부안 죽막동 유적 |
| 한글 표기 | 부안죽막동유적 |
| 한자 표기 | 扶安竹幕洞遺蹟 |
| 로마자 표기 | Buan Jungmak-dong Yujeok |
| 위치 정보 | |
| 위치 | 전라북도 부안군 적벽강길 54 (변산면, 수성당) |
| 상세 정보 | |
![]() | |
| 국가 | 대한민국 |
| 유형 | 대한민국의 사적 |
| 지정 번호 | 541 |
| 지정일 | 2017년 10월 19일 |
| 시대 | 삼국시대 |
| 소유자 | 부안군 |
| 관리자 | 전라북도 부안군 |
| 문화재 구역 면적 | 16필지 21,284㎡ |
| 문화재청 ID | 13,05410000,35 |
| 웹사이트 | 문화재청 |
2. 역사
한반도 서남부 부안군 변산반도 끝에 위치한 부안 죽막동 유적은 삼국 시대 백제,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걸쳐 해안 제사가 이루어진 유적이다.[1] 1992년 발굴조사에서 백제, 가야, 통일신라부터 조선을 비롯해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들(제사용 토기, 금속유물, 토제·석제 모제품, 중국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시기는 대부분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이곳에서 행해진 제의에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람들도 다양하게 참여하였고 제사가 끝나면 제기를 포함한 각종 물품을 땅에 묻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고대의 원시적인 제사를 지낸 흔적이 문화경관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백제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까지도 어부들의 안전과 고기잡이를 도와준다는 개양할미(변산반도 앞바다를 수호하는 해신)의 전설이 내려오며,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사적지 내에 위치한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에서 매년 열리고 있어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2. 1. 고대 제사
한반도 서남부 부안군 변산반도 끝에 위치한 부안 죽막동 유적은 삼국 시대 백제,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걸쳐 해안 제사가 이루어진 유적이다.[1]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절벽 위 평탄면에서 노천 제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水聖堂) 부근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제사장은 20×15m² 규모로 추정되며, 출토 유물의 90% 이상은 토기이다. 그 외 금속기, 석제 및 토제 모조품, 옥 제품, 도자기 등도 발견되었다. 3세기 후반경 마한·백제계 제사가 시작되어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본격화되었고, 5세기 중반부터는 왜제(일본제) 석제 모조품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6세기 전반까지 백제, 왜, 가야계 제사가 최성기를 이루었으며, 이 시기 다량의 토기(일부 가야계 토기)와 중국 남조의 청자, 호화로운 마구 등이 출토되었다.
이후 제사는 계속되었지만, 출토품은 지대에서의 공헌 용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계 제사로만 바뀌었다. 8세기에는 제사 건물이 세워져 옥내 제사로 전환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수성당(水城堂)은 그러한 옥내 제사의 흔적으로 추측된다.[1]
죽막동 유적은 중국 남조, 백제, 가야, 왜 사이의 국제 교류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죽막동이 제사장으로 사용된 것은 해안 해식동 신앙과 더불어, 항해 곤란 지역에서 배 정박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의 오키노시마 제사 유적과 함께 고대 국제 교류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출토 유물에 따르면 죽막동 유적에서의 제사는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전반에 최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수도를 475년 웅진(현 공주시), 538년 사비(현 부여군)로 옮긴 웅진 시기에 해당한다. 즉, 고구려의 압박을 받은 백제가 남방을 지향하며 교류를 활발히 한 시기를 나타내는 유물로 볼 수 있다. 무령왕릉(무령왕: 523년 사망)에서 발견된 왜(倭)산 고야마키(高野槙) 관재, 영산강 유역의 왜계 전방후원분 10여 기의 축조 등과 함께 죽막동 유적의 관련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유적 지역은 2017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사적 제541호로 지정되었다.[2]
2. 2. 중세 이후 제사
한반도 서남부 부안군 서쪽 끝 변산반도(邊山半島) 첨단부에 위치한 삼국 시대 백제,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걸친 해안 제사 유적이다.[1] 명칭인 '죽막동'은 지명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해 발견되었고, 1992년에 동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에서는 절벽 위의 평탄면에 노천 제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거기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행해졌다고 생각된다. 특히 수성당(水聖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 부근에서 백제 시대의 제사장이 발견되었으며, 그 넓이는 20×15제곱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이 제사장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90% 이상은 토기이며, 그 외에 금속기・석제 모조품・토제 모조품・옥 제품・도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3세기 후반경 마한・백제계 제사가 시작되어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본격화되었다. 5세기 중반부터는 거울 모양・칼 모양 등 다양한 왜제(일본제) 석제 모조품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6세기 전반까지 백제・왜・가야계 제사가 최성기를 맞았으며, 이 시대의 다량의 토기(일부에 가야계 토기)가 출토되었고, 중국 남조의 청자, 호화로운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 후에도 제사는 계속되지만, 출토품은 지대에서의 공헌 용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계 제사로만 바뀌었다. 8세기에는 제사 건물이 세워져 옥내 제사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있는 수성당(水城堂)은 그러한 옥내 제사의 흔적으로 추측되고 있다.[1]
죽막동 유적은 중국 남조・백제・가야・왜 사이에서 전개된 국제 교류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여겨진다. 죽막동의 땅이 제사장으로 사용된 것은 해안에 있는 해식동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항해 곤란 지역이었던 일대에서 당지가 배 정박의 적지였던 것이 요인으로 여겨진다.
유적 지역은, 2017년 10월 19일에 '부안 죽막동 유적'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541호로 지정되었다.[2]
3. 출토 유물
3. 1. 주요 유물
4. 역사적 의의
부안 죽막동 유적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요한 길목에 있는 변산반도의 서쪽 끝 해안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뱃길 안전과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해양 제사가 이어져 오는 곳이다.[1]
1992년 발굴조사에서 백제, 가야, 통일신라부터 조선을 비롯해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들(제사용 토기, 금속유물, 토제·석제 모제품, 중국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시기는 대부분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이곳에서 행해진 제의에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람들도 다양하게 참여하였고 제사가 끝나면 제기를 포함한 각종 물품을 땅에 묻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1]
한반도 서남부, 부안군 서쪽 끝의 변산반도 첨단부에 위치한 삼국 시대 백제,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걸친 해안 제사 유적이다. 발굴 조사에서는 절벽 위의 평탄면에 노천 제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행해졌다고 추정된다. 수성당(水聖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 부근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의 제사장은 20×15제곱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3세기 후반경 마한·백제계 제사가 시작되어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본격화되었다. 5세기 중반부터는 다양한 왜제(일본제) 석제 모조품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6세기 전반까지 백제·왜·가야계 제사가 최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시대의 다량의 토기(일부에 가야계 토기)와 중국 남조의 청자, 호화로운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 후에도 제사는 계속되었지만, 출토품은 지대에서의 공헌 용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계 제사로만 바뀌었다. 8세기에는 제사 건물이 세워져 옥내 제사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수성당(水城堂)은 그러한 옥내 제사의 흔적으로 추측된다.[1]
죽막동 유적은 중국 남조·백제·가야·왜 사이에서 전개된 국제 교류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죽막동이 제사장으로 사용된 것은 해안에 있는 해식동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항해 곤란 지역이었던 일대에서 배 정박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출토 유물에 따르면 죽막동 유적에서의 제사는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전반에 최성기를 맞이한다. 이 지역을 지배한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수도를 한산성(현 서울특별시)에서 475년에 웅진(현 공주시), 538년에 사비(현 부여군)로 옮기는데, 최성기의 연대는 웅진 시기에 대체로 해당한다. 즉,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은 백제가 남방을 지향한 시기이며, 죽막동 유적의 유물은 그 당시 교류의 활발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이에는 무령왕릉(무령왕: 523년 사망)에서의 왜(倭)산 고야마키(高野槙) 관재의 사용이나, 영산강 유역에서의 왜계 전방후원분 10여 기의 축조도 보이고 있으며, 이들과 죽막동 유적과의 관련성도 지적된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고대의 원시적인 제사를 지낸 흔적이 문화경관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백제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까지도 어부들의 안전과 고기잡이를 도와준다는 개양할미(변산반도 앞바다를 수호하는 해신)의 전설이 내려오며,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사적지 내에 위치한 부안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에서 매년 열리고 있어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1]
4. 1.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 과정
부안 죽막동 유적은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문화와 국제교류를 보여주는 제사유적으로, 발굴 조사 결과 백제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4]한반도 서남부, 부안군 서쪽 끝의 변산반도 첨단부에 위치한 삼국 시대 백제,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걸친 해안 제사 유적이다. 발굴 조사에서는 절벽 위의 평탄면에 노천 제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행해졌다고 추정된다. 수성당(水聖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 부근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의 제사장은 20×15제곱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3세기 후반경 마한·백제계 제사가 시작되어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본격화되었다. 5세기 중반부터는 다양한 왜제(일본제) 석제 모조품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6세기 전반까지 백제·왜·가야계 제사가 최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시대의 다량의 토기(일부에 가야계 토기)와 중국 남조의 청자, 호화로운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 후에도 제사는 계속되었지만, 출토품은 지대에서의 공헌 용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계 제사로만 바뀌었다. 8세기에는 제사 건물이 세워져 옥내 제사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수성당(水城堂)은 그러한 옥내 제사의 흔적으로 추측된다.[1]
죽막동 유적은 중국 남조·백제·가야·왜 사이에서 전개된 국제 교류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죽막동이 제사장으로 사용된 것은 해안에 있는 해식동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항해 곤란 지역이었던 일대에서 배 정박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4. 2. 고대 국제 교류의 증거
변산반도의 서쪽 끝 해안절벽 위에 있는 부안 죽막동 유적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요한 길목에 있으며,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뱃길 안전과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해양 제사가 이어져 오는 곳이다.1992년 발굴조사에서 백제, 가야, 통일신라부터 조선을 비롯해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들(제사용 토기, 금속유물, 토제·석제 모제품, 중국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시기는 대부분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이곳에서 행해진 제의에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람들도 다양하게 참여하였고 제사가 끝나면 제기를 포함한 각종 물품을 땅에 묻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고대의 원시적인 제사를 지낸 흔적이 문화경관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백제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까지도 어부들의 안전과 고기잡이를 도와준다는 개양할미(변산반도 앞바다를 수호하는 해신)의 전설이 내려오며,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사적지 내에 위치한 부안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에서 매년 열리고 있어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출토 유물에 따르면 죽막동 유적에서의 제사는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전반에 최성기를 맞이한다. 이 지역을 지배한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수도를 한산성(현 서울특별시)에서 475년에 웅진(현 공주시), 538년에 사비(현 부여군)로 옮기는데, 최성기의 연대는 웅진 시기에 대체로 해당한다. 즉,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은 백제가 남방을 지향한 시기이며, 죽막동 유적의 유물은 그 당시 교류의 활발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이에는 무령왕릉(무령왕: 523년 사망)에서의 왜(倭)산 고야마키(高野槙) 관재의 사용이나, 영산강 유역에서의 왜계 전방후원분 10여 기의 축조도 보이고 있으며, 이들과 죽막동 유적과의 관련성도 지적된다.
5. 현대의 계승
6. 사적 지정
부안 죽막동 유적은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문화와 국제교류를 보여주는 제사유적이다.[4] 발굴 조사 결과 백제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4]
참조
[1]
백과사전
부안죽막동제사유적(扶安竹幕洞祭祀遺蹟)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
웹사이트
부안 죽막동 유적(扶安 竹幕洞 遺蹟)
http://www.heritage.[...]
大韓民国文化財庁
[3]
간행물
「부안 죽막동 유적」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예고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9064호, 399-400면
2017-08-02
[4]
간행물
「부안 죽막동 유적」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문화재청고시제2017-127호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9113호, 158-159면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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