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로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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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조선로동당은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병으로 창당된 정당이다. 김두봉이 위원장을, 김일성과 주영하가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삼았다. 창당 이후 대중 조직을 장악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949년 6월 남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으로 전환되었으며, 김일성은 권력을 강화하며 당내 파벌을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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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로동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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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북조선로동당 |
원어 이름 | 北朝鮮勞動黨 |
로마자 표기 | Bukjoseon Rodongdang |
한자 표기 | 北朝鮮勞動黨 |
영어 이름 | Workers' Party of North Korea |
국가 | 북한 |
창당일 | 1946년 8월 28일 |
해산일 | 1949년 6월 30일 |
합병 대상 |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
합병 결과 | 조선로동당 |
본부 | 평양직할시 |
기관지 | '노동신문', '근로자' |
당원 수 | 366,000명 |
당원 수 연도 | 1946년 |
색상 | 빨강 |
청년 조직 | 북조선민주청년동맹 |
선거 연합 | 조국통일민주전선 |
주요 지도부 | |
위원장 | 김두봉 |
부위원장 | 김일성, 주영하, 허가이 |
이념 및 정치 성향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좌 |
관련 단체 | |
청년 조직 | 북조선민주청년동맹 |
아동 조직 | 북조선소년단 |
노동 조직 | 북조선직업총동맹 |
기타 | |
1948년 최고인민회의 의석 | 172/572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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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당 배경 및 과정
북조선로동당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1946년 5월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과 조선신민당(연안파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정당)이 합쳐져 설립되었다. 1946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까지 평양에서 창립대회(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가 개최되었고, 위원장에는 김두봉(전 신민당 위원장, 연안파), 부위원장에는 김일성(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만주파)과 주영하(국내파)가 취임했다.[4]
김두봉은 1949년 6월 남조선로동당과의 합당 때까지 위원장을 역임했지만, 실권은 소련 군정의 지원을 받은 부위원장 김일성(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있었다.
1948년 3월에는 북조선로동당 제2차당대회가 개최되었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으로 북조선로동당은 지도정당이 되었다.
1949년 6월 30일, 남조선로동당과 합병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이는 사실상 북로당에 의한 남로당의 흡수였다. 조선로동당 대회의 회차는 북조선로동당 대회의 회차를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로동당으로서 처음으로 개최한 당대회(1950년)는 "조선로동당 제3차당대회"로 되어 있다.
2. 1. 해방 직후 북한의 정치 상황
해방 직후 북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선신민당을 비롯해 북조선민주청년연맹, 북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민주여성연합 등 여러 사회단체들이 활동했다. 소련 군정은 북한 지역에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고, 이를 위해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4]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조선신민당의 합병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일어난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헝가리 노동자당의 결성과 유사했다. 그러나 두 당의 합병은 쉽지 않았다. 조선신민당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반면, 공산당은 주로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등 사회적 배경과 이념에서 차이가 있었다. 또한,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내부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고, 통합된 당 내에는 서로 다른 공산주의 파벌이 존재했다. 당 창립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의 이념적 기초로 삼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 창립 대회에서 김일성은 "노동당은 전투 단위이자 노동 대중의 선봉대"라며, "당의 순수성, 통일성, 철의 기율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방향을 지지했다.[4]
2. 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조선신민당의 합병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일어난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헝가리 노동자당 결성과 같은 유사한 합병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당의 합병은 간단하지 않았다. 두 당은 간부의 사회적 배경과 이념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선신민당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반면, 공산당은 주로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4] 또한,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내부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통합당에는 서로 다른 공산주의 파벌이 존재했다.[4] 당 창립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의 이념적 기초로 삼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4] 당 창립 대회에서 김일성은 "...노동당은 전투 단위이자 노동 대중의 선봉대입니다. 우리는 당의 순수성, 통일성, 철의 기율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내부의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않고 적과 싸운다면, 그것은 어리석음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2. 3. 합당 과정
1946년 7월, 소련 군정의 주도 하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양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까지 평양에서 창립 대회(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를 열고 북조선로동당을 공식 출범시켰다.[4] 초대 위원장에는 김두봉(전 신민당 위원장)이 선출되었고, 부위원장에는 김일성(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과 주영하가 선출되었다.두 당의 합병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일어난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과 헝가리 노동자당의 결성과 유사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당 사이에는 간부의 사회적 배경과 이념적 차이가 있었다. 조선신민당은 지식인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던 반면, 공산당은 주로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내부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통합당에는 서로 다른 공산주의 파벌이 존재했다.[4] 당 창립 당시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의 이념적 기초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김두봉은 1949년 6월 남조선로동당과의 합당 때까지 위원장을 역임했지만, 실권은 소련 군정의 지원을 받은 부위원장 김일성에게 있었다.
3. 당내 파벌 갈등과 김일성의 권력 장악
북조선로동당은 북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이 1946년 5월에 개칭)과 조선신민당(연안파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정당)이 합쳐져 설립되었다.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창립대회(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에서 위원장은 김두봉(전 신민당 위원장, 연안파), 부위원장은 김일성(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만주파)과 주영하(국내파)가 맡았다.[4]
김두봉은 1949년 6월 남조선로동당과의 합당 때까지 위원장직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소련 점령군의 지원을 받는 부위원장 김일성에게 있었다. 1948년 3월에는 북조선로동당 제2차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북조선로동당은 창당 초기부터 소련파, 국내파, 연안파, 유격대파 등 여러 파벌 간의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파벌 갈등은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고, 김일성은 이 과정에서 정적을 숙청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1947년 초에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어 4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당원들이 제명되었다.[4] 제2차 당 대회에서 오기섭을 비롯한 국내파 주요 인물들은 김일성의 공격을 받았다.[4]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으로 북조선로동당은 지도 정당이 되었다. 1949년 6월 30일, 남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북조선로동당에 의한 남조선로동당의 흡수였다. 조선로동당 대회의 회차는 북조선로동당 대회의 회차를 계승하여, 조선로동당으로서 처음 개최한 당대회(1950년)는 "조선로동당 제3차당대회"로 불린다.
3. 1. 주요 파벌
북조선로동당은 창당 당시 크게 네 개의 파벌로 구성되었다. 각 파벌은 당 지도부에서 일정 비율의 의석을 차지하며 권력을 분점했다.[6][7][8]- 소련파: 호가이가 이끌었으며, 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한국계 러시아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북한에 주둔한 적군 소속이거나 민간인이었다. 많은 이들이 통역관이나 러시아어 강사로 활동했다.[9]
- 국내파: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에 남아 투쟁했던 공산주의자들로, 오기섭, 주영하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이들은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노동당과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4]
- 연안파: 무정을 시작으로 김두봉, 최창익 등이 이끌었으며, 중국 산시성에 거주하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한국 망명자들이었다. 이들은 마오쩌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유격대파: 김일성이 이끌었으며, 1931년 일본이 점령한 만주에서 활동했던 전직 유격대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소련으로 이동하여 적군에 징집되기도 했다.
각 파벌은 당 지도부에 비례적으로 대표되었다. 당의 첫 정치국에서 소련파는 3명, 연안파는 6명, 국내파는 2명, 유격대파는 2명의 구성원을 차지했다. 유격대파는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작은 파벌이었지만,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당 내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3. 2.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
1947년 초, '내부' 공산주의 계파, 즉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어 4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당원들이 제명되었다.[4]1948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제2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14] 제2차 당 대회 당시 당은 2만 9,762개의 당 세포로 조직된 72만 5,762명의 당원을 주장했다.[5]
제2차 당 대회에서 오기섭, 정달현, 최용달, 이봉수 등 국내파 주요 인물들은 김일성의 공격을 받았다. 오기섭은 당 중앙위원회에는 재선출되었지만, 하급 정부 기업의 직책으로 좌천되었다.
김일성은 대회 연설에서 국내파를 공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당은 적절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산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약한 지방 및 도 조직을 북한의 강력한 중앙 조직 아래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1945년 10월 중순에 북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의 일부 동지들은 과거의 분파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중략) 자신의 동굴에 시야가 맞춰지고 개인 영웅주의에 빠져 있던 이러한 소집단의 지도자들은 "중앙 본부(서울)를 지지한다"는 핑계로 북한 중앙국 설립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음모를 감추기 위해 "북한 지부 설립은 당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4]
4. 북조선로동당의 활동과 정책
북조선로동당은 1946년 8월 창당 이전부터 여러 대중 조직을 관리하며 사회 각 부문을 통제했다.[12] 조선애국전선에 속해 있던 북조선로동당과 조선신민당은 통합 후 조선인민위원회 의석의 36%를 차지하며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김두봉이 위원장이 되었고, 김일성은 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10] 1947년 마을 및 구역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북조선로동당 당원은 70,454석 중 57.7%의 의석을 차지했다.[10]
1947년 9월 16일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은 '문학예술 발전과 대중문화 사업 활성화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 정책의 기반을 마련했다.[11]
북조선로동당은 로동신문과 근로자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로동신문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의 집권당 기관지로서 여러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로동신문은 당의 대중 신문이었고, 군중로자(후에 근로자로 변경)는 당의 이론 잡지였다.[14] 두 간행물은 나중에 조선로동당이 인수했다.[15]
4. 1. 대중 조직 장악
북조선로동당은 1946년 8월 창당 이전부터 여러 대중 조직을 관리했다.[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청년동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노동총련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여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농민동맹 등이 그 예이다.[12] 이러한 조직들을 통해 북조선로동당은 사회 각 부문을 통제했다.4.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조선애국전선에 속해 있던 북조선로동당과 조선신민당은 통합 후 조선인민위원회 의석의 36%를 차지하며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김두봉이 위원장이 되었고, 김일성은 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10] 1947년 마을 및 구역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북조선로동당 당원은 70,454석 중 57.7%의 의석을 차지했다.[10]1947년 9월 16일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은 당의 문화 정책에 대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후에 '문학예술 발전과 대중문화 사업 활성화에 관하여'로 출판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11]
4. 3. 기관지 발행
북조선로동당은 로동신문과 근로자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로동신문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의 집권당 기관지로서 여러 가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노동신문』은 당의 대중 신문이었고, 『군중로자』(후에 『근로자』로 변경)는 당의 이론 잡지였다. 이러한 간행물 발행 결정은 제1차 당대회에서 이루어졌다.[14] 두 간행물은 나중에 조선로동당이 인수했다.[15]
5. 남조선로동당과의 합당 및 조선로동당으로의 전환
1949년 6월, 북조선로동당은 남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창립했다.[1] 이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남한 내 좌익 세력과의 통합을 추진한 결과였다.
5. 1. 합당 배경
1948년 9월 초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212명의 대표 중 102명이 북조선로동당 출신이었다. 최고인민회의는 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김일성을 내각총리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10]북조선로동당은 남한 내 좌익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추진했으며, 1949년 6월 24일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1]
5. 2. 합당 과정
1949년 6월 24일, 북조선로동당은 남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했다.[1] 6월 30일,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공식 출범하였다. 이는 사실상 북조선로동당에 의한 남조선로동당의 흡수 통합이었다. 조선로동당 대회의 회차는 북조선로동당 대회의 회차를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로동당으로서 처음으로 개최한 당대회(1950년)는 "제3차 당대회"로 되어 있다.5. 3. 조선로동당으로의 계승
조선로동당은 북조선로동당의 당 대회 회차를 계승했다. 1949년 6월 30일, 남조선로동당과 합병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북조선로동당에 의한 남조선로동당의 흡수였다.[1] 1956년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는 북조선로동당의 역사를 이어받아 제3차로 명명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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