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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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벨라루스 출신의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으로, 프랑스에서 철학자로 활동했다. 앙리 베르그송의 지도 아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프라하 프랑스 학원에서 가르치고, 소르본 대학교 윤리 철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실존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형이상학적 사상을 펼쳤으며, 베르그송, 셸링 철학 연구를 바탕으로 도덕, 시간, 음악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특히 용서와 악의 문제에 대한 그의 엄격한 입장은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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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Vladimir Jankélévitch |
출생일 | 1903년 8월 31일 |
출생지 | 프랑스 부르주 |
사망일 | 1985년 6월 6일 (향년 81세)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국적 | 프랑스 |
로마자 표기 | Vladimir Jankélévitch |
학력 | |
모교 | 고등사범학교 릴 대학교 |
경력 | |
근무 기관 | 툴루즈 대학교 릴 대학교 파리 대학교 팡테옹-소르본 대학교 |
사상 | |
주요 관심사 | 형이상학 윤리학 음악 시간성 |
주요 저서 | 《미덕론》 (Le traité des vertus) 《알 수 없음과 거의 없음》 (Le-je-ne-sais-quoi et le presque-rien) 《도덕의 역설》 (Le paradoxe de la morale) 《죽음》 (La mort) 《돌이킬 수 없음과 향수》 (L'Irréversible et la nostalgie) |
영향 | 앙리 베르그송 게오르크 지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레프 셰스토프 |
영향을 준 인물 | 에마뉘엘 레비나스 아놀드 데이비슨 자크 데리다 신시아 플뢰리 카트린 클레망 |
철학 | |
철학 분야 | 서양 철학 |
철학 학파 | 대륙 철학 베르그송주의 생철학 |
2. 생애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1903년 프랑스 부르주에서 러시아 제국 영토(현재의 벨라루스) 출신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슈무엘은 의사이자 헤겔, 셸링, 프로이트 등의 저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지식인이었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인간의 실존, 도덕, 시간 등 다양한 주제를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한 철학자이다. 사르트르, 라캉 등과 동시대 인물이지만, 프랑스 현대 사상의 주류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들뢰즈, 세르 등은 그의 철학을 언급하기도 했다.[3]
1922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 교수의 지도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브레이에의 지도 아래 ''Le Traité : la dialectique. Ennéade I 3 de Plotin''에 대한 DES 논문(diplôme d'études supérieures|디플롬 데튀드 쉬페리외르프랑스어)을 마쳤다.[2] 이는 대략 MA 논문에 해당한다. 1926년에는 아그레가시옹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학생 시절에는 블랑슈비크, 브레이에, 바알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프라하 프랑스 학원(Institut français de Prague|프랑스어)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셸링에 대한 박사 학위를 썼다. 1931년에 첫 단행본 『베르그송』을 출판했다. 1932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주 논문: 『후기 셸링 철학에서의 정신의 오디세이』, 부 논문: 『죄의식의 가치와 의미』). 1933년 프랑스로 돌아와 리옹의 파르크 고등학교와 툴루즈 대학교, 릴 과학 기술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군에 소집되어 부상을 입었지만, 부상 중에 비시 정권의 대 유대인 정책에 의해 제대, 더욱이 교직을 박탈당하고 1941년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종전 후, 라디오 음악 방송의 고문을 맡은 후, 교직에 복귀했다. 1949년에 『덕론』을 출판했다. 1951년부터 소르본 대학교(1971년 이후 파리 제1대학교)의 윤리 철학 교수로 임명되어 1978년까지 가르쳤다. 그의 강의는 시민에게 공개되었으며, 라디오에서도 방송되었다. 1978년 정년 후에도 3년간 명예 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다.
1965년에 나치 전범의 공소 시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명확하게 "공소 시효 없음"의 논전을 펼쳤다. 또한 1968년의 5월 혁명 당시에는 데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학생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던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다.
1982년에는 유대계이면서도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침공에 대한 항의 데모에 참가했다.
1985년, 파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3. 사상
초기에는 베르그송과 셸링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철학을 연구했고, 이후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베르그송에게서는 도덕론을, 셸링에게서는 후기 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철학에 반영했다. '나쁜 양심', '아이러니', '순수와 불순' 등 도덕적 의식에 대한 섬세한 논의를 전개했다.[3]
전쟁 중과 전쟁 후, 소르본에서 강의하며 『덕론』을 중심으로 한 도덕론과 『제1철학』 등 형이상학을 다각적으로 탐구했다. 그의 윤리학 강의는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는 "절대적으로 타자(l'Absolument-autre)"를 강조했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질서(le tout-autre-ordre)",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l'ineffable)", "알 수 없는 것(le je-ne-sais-quoi)", "신비(le mystère)" 등으로도 표현된다.[4]
1965년 나치 전범의 공소 시효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그의 사상은 더욱 주목받았다. 이후, 시간의 역행 불가능성, 사건의 일회성, 과거의 취소 불가능성이라는 계기를 더욱 강조하였다.[5]
3. 1. 음악론
장켈레비치는 철학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편의 음악론을 저술했다. 포레, 라벨론에서는 구체적인 악곡 분석에 독립적인 장을 마련해 두었다는 특징이 있다.[3] 이후 드뷔시, 쇼팽론 등도 저술했다.[4] 특히, 음악 연주 행위의 즉흥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시간의 역행 불가능성, 사건의 일회성, 과거의 취소 불가능성이라는 그의 사상적 특징과 연결된다.[5] 음악론의 집대성으로서 전 7권의 『음악에서 침묵으로』를 계획했지만, 제1권(포레론), 제2권(드뷔시론), 제5권(리스트론)만 출간되었다.[5]
4. 주요 저작
출판 연도 | 원제 | 한국어 번역 제목 (출판사) |
---|---|---|
1931 | Henri Bergson | 앙리 베르그송 |
1933 | 'LOdyssée de la conscience dans la dernière philosophie de Schelling'' | 셸링의 마지막 철학에서의 의식의 오디세이 |
1936 | 'LIronie ou la bonne conscience'' | 아이러니 혹은 좋은 양심 |
1939 | Ravel | 라벨 |
1949 | Traité des vertus | 미덕론 |
1961 | 'La Musique et lIneffable'' | 음악과 형언할 수 없음 |
1966 | La Mort | 죽음 |
1967 | Le pardon | 용서 |
1974 | 'LIrréversible et la nostalgie'' | 돌이킬 수 없음과 향수 |
1981 | Le Paradoxe de la morale | 도덕의 역설 |
5.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사상은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본질과 도덕적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며, 특히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고민하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의 저작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그의 용서와 악에 대한 철학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조
[1]
논문
Phenomenon and Enigm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98
[2]
서적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Key Themes and Thinkers
John Wiley & Sons
2009
[3]
웹사이트
Vladimir Jankélévitch - Philosophie, musique, morale
https://jankelevitch[...]
[4]
서적
フランスの異邦人
中公新書
1984
[5]
서적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Key Themes and Thinkers
John Wiley & Son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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