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은 1888년 인도에서 태어나 1975년에 사망한 철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나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인도의 부통령을,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인도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라다크리슈난은 동양과 서양 사상을 연결하려 노력하며, 힌두교를 옹호하고 서양 철학과 종교 사상을 통합했다. 그는 신(新) 베단타의 대표적인 인물로, 직관을 강조하는 철학을 전개했으며, 종교의 다양성을 계층적으로 분류했다. 라다크리슈난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1931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54년에는 바라트 라트나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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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리슈난은 1903년 5월, 14세 때 10세였던 먼 친척 시바카무와 정략결혼했다.[10] 부부는 다섯 딸(파드마바티, 루크미니, 수실라, 순다리, 샤쿤탈라)과 아들 사르베팔리 고팔을 두었다. 아들 고팔은 저명한 역사학자가 되었다. 라다크리슈난의 가족 구성원들은 학계, 공공 정책, 의학, 법률, 금융, 비즈니스,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증손자인 VVS 락스만은 전 인도 크리켓 선수이자 NCA 이사이다. 시바카무는 1956년 11월 26일에 사망했으며, 그들은 약 53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은 1888년 9월 5일, 당시 마드라스 관구 (현재 타밀나두주 티루발루르구) 노스 아르코트구의 티루타니에서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다.[10][11][12][13][14][15] 그의 가족은 안드라프라데시주 넬로르구 사르베팔리 마을 출신이다.[7][8] 그는 6남매 중 넷째였으며, 어린 시절을 티루타니와 티루파티에서 보냈다.[9] 그의 아버지는 지역 ''자민다르''(지역 지주) 밑에서 일하는 하급 세무 관리였다.
라다크리슈난은 티루타니에 있는 K. V. 고등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1896년에는 티루파티에 있는 헤르만스부르크 복음주의 루터교 선교 학교와 왈라자페트에 있는 정부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았으며, 벨로르에 있는 보리스 칼리지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F.A. (예술 학사) 과정을 마친 후, 16세에 마드라스 대학교 부속 마드라스 기독교 칼리지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고, 같은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도 마쳤다. 라다크리슈난은 수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으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사촌으로부터 철학 교과서를 물려받아 우연히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16]
그는 학사 학위 논문으로 "베단타의 윤리학과 형이상학적 전제"를 썼는데,[19] 이는 베단타 체계에 윤리가 없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의 교수 윌리엄 메스톤과 알프레드 조지 호그는 그의 논문을 칭찬했으며, 이 논문은 그가 스무 살 때 출판되었다.
라다크리슈난은 기독교 교사들의 인도 문화 비판이 자신의 믿음을 흔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도 철학과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와 "무지한 서구 비판"에 대한 힌두교 옹호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호그 교수를 '존경받는 스승'이자 "인도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훌륭한 기독교 사상가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17][18] 칼리지 교장 대행이었던 윌리엄 스키너 교수는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가진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고, 라다크리슈난은 그의 추천으로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첫 직장을 얻었다. 라다크리슈난은 그의 초기 저서 중 하나를 윌리엄 스키너에게 헌정했다.
라다크리슈난은 1903년 5월, 14세 때 10세였던 먼 친척 시바카무와 정략결혼했다. 그들은 53년간 결혼 생활을 했으며, 다섯 딸과 아들 사르베팔리 고팔을 두었다.
2. 2. 학문적 경력
라다크리슈난은 학창 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고등학교 교육을 위해 벨로르에 있는 보리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F.A. (예술 학사) 과정을 마친 후, 16세에 마드라스 기독교 칼리지(마드라스 대학교 부속)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했으며, 같은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16]
라다크리슈난은 수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으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생이었던 그는 같은 칼리지를 졸업한 사촌이 철학 교과서를 넘겨주면서 우연한 계기로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16]
그는 학사 학위 논문을 "베단타의 윤리학과 형이상학적 전제"에 대해 썼는데,[19] 이는 "베단타 체계에 윤리가 없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을 의도했다.[19] 그의 교수 두 명인 윌리엄 메스톤과 알프레드 조지 호그는 라다크리슈난의 논문을 칭찬했으며, 그의 논문은 그가 스무 살일 때 출판되었다.
라다크리슈난 자신에 따르면, 호그와 다른 기독교 교사들이 인도의 문화에 대해 비판한 것은 "나의 믿음을 흔들고 내가 의지했던 전통적인 지지대를 흔들었다."라고 하였다.
기독교 비평가들의 도전은 나에게 힌두교를 연구하고 그 안에서 무엇이 살아 있고 무엇이 죽었는지 알아내도록 했다. 스바미 비베카난다의 기업가 정신과 웅변에 의해 일깨워진 힌두교도인 나의 자존심은 선교 기관에서 힌두교에 부여된 대우에 깊이 상처받았다.영어
이는 그가 인도 철학과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와 "무지한 서구 비판"에 대한 힌두교의 평생 옹호로 이어졌다. 동시에 라다크리슈난은 호그 교수를 '나의 존경받는 스승'이자 "인도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훌륭한 기독교 사상가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 또한, 칼리지 교장 대행이었던 윌리엄 스키너 교수는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가진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증언하여 그가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첫 직장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라다크리슈난은 그의 초기 저서 중 하나를 윌리엄 스키너에게 헌정했다.
'''아베다의 정신'''
라다크리슈난은 《베단타의 윤리학》에서 영국 비평가들에 대한 고뇌를 표현하며, 독일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오리엔탈리스트인 막스 뮐러의 말을 인용한다.
라다크리슈난은 이 철학이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며, "도덕에서 개인은 '아베다'의 정신, 즉 무차별의 정신을 배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사랑과 형제애의 윤리로 이어진다"고 언급한다.
"다른 모든 개인은 당신과 동등하게 간주되어야 하며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베단타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이 부자이(Bujjai)가 그린 그림에 텔루구어로 "Radhakrishnayya"라고 서명한 모습
1909년 4월, 라다크리슈난은 마드라스 총독부 대학(Madras Presidency College)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1918년에는 마이소르 대학교(University of Mysore)의 철학 교수로 선발되어 마하라자 대학교, 마이소르(Maharaja's College, Mysore)에서 가르쳤다.[26][27] 당시 그는 ''The Quest'', ''Journal of Philosophy'', ''International Journal of Ethics''와 같은 유명 학술지에 많은 논문을 썼고, 그의 첫 번째 저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철학''(The Philosophy of Rabindranath Tagore)을 완성했다. 그는 타고르의 철학을 "인도 정신의 진정한 발현"이라고 믿었다. 그의 두 번째 저서인 ''현대 철학에서의 종교의 지배''(The Reign of Religion in Contemporary Philosophy)는 1920년에 출판되었다.
1921년 그는 캘커타 대학교(University of Calcutta)의 킹 조지 5세 정신 및 도덕 과학 석좌 교수로 임명되었다. 1926년 6월 영국 제국(British Empire) 대학교 연합 회의와 1926년 9월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열린 국제 철학 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Philosophy)에 캘커타 대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1929년 해리스 맨체스터 칼리지, 옥스퍼드(Harris Manchester College, Oxford)에서 생의 이상에 대한 히버트 강연(Hibbert Lecture)을 맡아 진행했고, 이 강연은 이후 ''삶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An Idealist View of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1929년, 맨체스터 칼리지의 J. 에스틀린 카펜터 교장이 사임한 자리에 초청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에게 비교 종교에 대한 강의를 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1931년 6월 1931년 생일 서훈(1931 Birthday Honours)에 기사로 서임되었고,[28] 1932년 4월 인도 총독(Governor-General of India)인 프리먼 프리먼-토마스, 제1대 윌링던 후작(Freeman Freeman-Thomas, 1st Marquess of Willingdon)에 의해 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29] 그러나 그는 인도 독립 이후 이 작위를 사용하지 않았으며,[30] 대신 '박사'라는 학위를 선호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안드라 대학교(Andhra University)의 부총장(vice-chancellor)을 역임했다. 그는 첫 번째 졸업식 연설에서 자신의 고향인 안드라 프라데시(Andhra Pradesh)에 대해 연설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Serge Ivanoff)가 1953년에 그린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의 초상화.
1936년 라다크리슈난은 옥스퍼드 대학교(University of Oxford)의 동양 종교 및 윤리학 스팔딩 교수(Spalding Professor of Eastern Religion and Ethics)로 임명되었고,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All Souls College, Oxford)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같은 해와 1937년에 그는 노벨 문학상(Nobel Prize)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다른 수상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명 과정은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1960년대에도 이 상에 대한 추가 지명이 꾸준히 이어졌다. 1939년 마단 모한 말라비야(Madan Mohan Malaviya)는 그를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Banaras Hindu University, BHU)의 부총장으로 초청했다. 그는 1948년 1월까지 부총장으로 재직했다.
2. 3. 정치 경력
라다크리슈난은 학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비교적 늦게 정치에 입문했다. 1931년 국제 연맹 지적 협력 위원회에 지명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했을 때, 라다크리슈난은 유네스코에서 인도를 대표했으며(1946–52), 이후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 주재 인도 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또한 인도 제헌 의회에도 선출되었다. 1952년 인도 최초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인도의 두 번째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라다크리슈난은 인도 국민 회의 당적을 갖지 않았으며, 인도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자 속의 정치인'과 같았다. 그의 정치적 동기는 힌두교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무지한 서구 비판"에 대한 힌두교 방어에 있었다.
라다크리슈난이 인도 대통령이 되자,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9월 5일 그의 생일을 기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내 생일을 기념하는 대신, 9월 5일을 스승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 제 자랑스러운 특권이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31] 이후 그의 생일은 인도에서 스승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32]
미국대통령 존 F. 케네디와 인도 대통령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왼쪽)이 회담 후 백악관을 떠나고 있다. 1963년 6월 4일, 인도 외무부 장관 락슈미 N. 메논이 백악관 서관 입구에서 케네디 대통령 뒤를 걷고 있다.
3. 철학
라다크리슈난은 동서양 사상을 연결하려 노력했으며,[37] "무지한 서구의 비판"에 맞서 힌두교를 옹호하는 동시에, 서양 철학과 종교 사상을 통합했다. 그는 힌두교를 직관 또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 파악된 사실에 기반한 과학적 종교로 보았다.[39] 라다크리슈난에 따르면, "종교 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경험적이 되어야 하며 종교적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39] 그는 이러한 경험주의가 베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라다크리슈난은 서양 문화와 철학에 정통했지만, 그것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서양 철학자들이 객관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화의 신학적 영향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42]
3. 1.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현대적 해석
라다크리슈난은 신(新) 베단타의 가장 저명한 대변인 중 한 명이었다.[38] 그의 형이상학은 불이(不二) 베단타에 기반을 두었지만, 현대적 이해를 위해 불이 베단타를 재해석했다.[39] 그는 경험 세계의 현실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를 절대자 또는 브라만에 기반을 두고 지지받는 것으로 보았다.[39] 또한 아디 샹카라의 ''마야'' 개념을 재해석하여, 마야를 엄격한 절대적 관념론이 아닌 "궁극적으로 현실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 오해"로 보았다.[39]
'''아베다의 정신'''
라다크리슈난은 《베단타의 윤리학》에서 영국 비평가들에 대한 고뇌를 표현하며,[19] "베단타 체계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현재 철학적인 유행이 되었다"라고 썼다. 그는 독일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오리엔탈리스트인 막스 뮐러가 "베단타 철학은 윤리의 중요한 영역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우리는 처음, 중간, 끝에 윤리를 발견하며, 베단타 철학자처럼 신성한 것에 몰두한 정신이 세상, 육체, 그리고 다른 권력의 일반적인 유혹에 희생될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라다크리슈난은 이 철학이 우리(사람들)가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다르지 않게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그가 "아베다의 정신"을 소개하는 부분이다.[20] 그는 "도덕에서 개인은 '아베다'의 정신, 즉 무차별의 정신을 배양해야 한다"라고 하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사랑과 형제애의 윤리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개인은 당신과 동등하게 간주되어야 하며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베단타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3. 2. 직관과 종교적 경험
"직관"[39], 즉 "종교적 경험"[39]은 라다크리슈난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그는 의식적 사고를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지식의 원천으로서 직관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윌리엄 제임스, F. H. 브래들리, 앙리 베르그송, 프리드리히 폰 휘겔 등의 저술과 비베카난다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라다크리슈난에 따르면, 직관은 자기 증명적('svatassiddha'), 자기 입증('svāsaṃvedya'), 자체 발광('svayam-prakāsa')적인 성격을 갖는다.[39] 그는 《삶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An Idealist View of Life)》에서 순수 지성적 사고와 대비되는 직관적 사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41] 그는 '직관'이 모든 종류의 경험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39]
라다크리슈난은 여덟 가지 종류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39]
종류
설명
인지적 경험
감각 기관을 통한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
감각적 경험
감각을 통해 얻는 쾌락, 고통 등의 주관적 느낌
담론적 추론
논리와 추론을 통한 결론 도출
직관적 이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앎
정신적 경험
내면의 생각, 감정, 의지 등의 경험
미적 경험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하는 경험
윤리적 경험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 경험
종교적 경험
신성함, 초월성, 궁극적 실재 등과 관련된 경험
3. 3. 종교 분류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에게 신학과 교리는 지적 형식화이며, 종교적 경험 또는 "종교적 직관"의 상징이다.[39] 라다크리슈난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이해에 따라 종교의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계층적으로 분류했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최고 위치에 두었다.[39]
라다크리슈난은 1926년 옥스퍼드 맨체스터 칼리지에서 강연한 내용을 모은 저서 《삶의 힌두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힌두교는 우리가 신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면서 꾸준히 위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절대자를 숭배하는 자가 최고 등급이며, 그 다음이 인격신을 숭배하는 자, 그다음이 라마, 크리슈나, 붓다의 화신을 숭배하는 자이며, 그 아래는 신, 조상, 현자를 숭배하는 자들이 있고, 가장 낮은 등급은 하찮은 힘과 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라다크리슈난에게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직관에 기반한 힌두교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였다.[39] 그는 베단타가 가장 직접적인 직관적 경험과 내적 실현을 제공하며, 이는 그것을 가장 높은 형태의 종교로 만든다고 보았다.[39] 그는 다른 종교들을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해석으로 보았다.[39]
4. 영향 및 평가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은 학문적 업적과 더불어 정치 경력도 쌓았다.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정치 경력에 앞섰으며, 1931년 국제 연맹 지적 협력 위원회에 지명되면서 "서구에서 인도 사상에 대한 권위자이자 현대 사회에서 동양 기관의 역할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자"로 인정받았다.
인도 독립 후, 라다크리슈난은 유네스코에서 인도를 대표(1946-1952)했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 주재 인도 대사를 역임했다. 또한 인도 제헌 의회에도 선출되었다. 그는 1952년 인도의 초대 부통령, 1962년에는 인도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7년까지 재임했다.
라다크리슈난은 인도 국민 회의 배경이나 인도 독립 운동 경력은 없었지만, '그림자 속의 정치인'으로 불렸다. 그의 정치적 동기는 힌두교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무지한 서구 비판"에 대한 힌두교 방어에 있었다. 그는 동서양 사상을 연결하려 노력했으며,[37] 서양 철학과 종교 사상을 힌두교에 통합했다.
라다크리슈난은 비교 종교 및 철학 분야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39] 그의 힌두교 전통 옹호는 인도와 서구 세계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 민족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39] 또한 그의 저술은 베단타를 "힌두교의 본질적인 세계관"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4. 1. 긍정적 평가
라다크리슈난은 동서양 철학 모두에 정통한 학자로서, 특히 인도와 서양을 잇는 '살아있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37] 그는 인도 철학과 서양 철학 양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그의 저술은 서양의 힌두교, 인도 및 동양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39]
라다크리슈난은 신(新) 베단타의 가장 저명한 대변인 중 한 명이었다.[38] 그는 현대적 이해를 위해 불이(不二) 베단타를 재해석하였으며,[39] 경험 세계의 현실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를 절대자 또는 브라만(Brahman)에 기반을 두고 지지받는 것으로 보았다.[39] 그는 샹카라의 ''마야'' 개념을 재해석하여, 마야를 엄격한 절대적 관념론이 아닌 "궁극적으로 현실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 오해"로 보았다.[39]
라다크리슈난의 철학에서 "직관"[39]은 의식적인 사고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지식의 원천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저서 《삶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An Idealist View of Life)》에서 직관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1]
라다크리슈난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구별했다.[39]
종류
설명
인지적 경험
감각적 경험, 담론적 추론, 직관적 이해
정신적 경험
미적 경험, 윤리적 경험, 종교적 경험
4. 2. 비판적 평가
라다크리슈난의 사상은 영원주의적, 보편주의적 주장과 동서양 이분법 사용으로 인해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39] 영원 철학라다크리슈난에 따르면, 우파니샤드의 예언자부터 타고르와 간디와 같은 현대 힌두교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신성한 통일성"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이질적인 문화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사이에 본질적인 공통성"도 존재한다. 이는 르네 게농, 신지학 협회, 현대 영성에서 동방 종교의 현대적인 인기에 관한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1970년대 이후, 영원주의적 입장은 본질주의 때문에 비판받아 왔다. 사회 구성주의자들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하며, 이러한 "경험"은 문화적 결정 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매개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미카엘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종교 또한 개인적인 경험이나 타고난 감정, 예를 들어 ''sensus numinosus''(루돌프 오토)와 같은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습득하고 학습한 행동 패턴에 더 많이 의존한다.
라인하트는 "영원주의적 주장에 관계없이, 현대 힌두교 사상은 역사의 산물"이며, "지난 200년 동안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연구되고 표현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이는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은 라다크리슈난에게도 마찬가지이며, 다른 신(新)베단타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서구의 비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인도와 그 문화에 대한 서구의 지배적인 이해를 사용했다.
리처드 킹에 따르면, 식민지 인도학자들과 신-베단타 학자들은 힌두교의 본질로서 베단타, 그리고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힌두교의 신비로운 본질의 전형적인 예"로 격상시켰고, 이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유용하게 작용하여,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인도 종교의 정점으로 널리 알렸다. 이는
> ...식민 지배에 맞서 힌두교도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기회"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수체타 마줌다르와 바산트 카이와르에 따르면,
>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정치화된 종교가 생성한 범주적 영역 내에서 계속 활동했다 [...] 오리엔탈 문명을 옹호하는 과장된 주장이 제기되었다.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의 "베단타는 종교가 아니라, '가장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미'에서 종교 그 자체이다"라는 진술은 상당히 전형적이다.
라인하트는 라다크리슈난의 포괄적 접근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하며, 이는 "베단타적 진리라는 보호 아래 종교적 차이를 포섭하기 위한 신학적 계획"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라인하트에 따르면, 이러한 논리의 결과는 공동체주의이며, 이는 "하나의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익을 가지며, 이러한 이익은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이익과 상반된다"는 생각이다.[44] 라인하트는 힌두교의 종교성이 민족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며, "신-힌두교 담론은 라모한 로이와 비베카난다와 같은 사상가들이 처음 내디딘 발걸음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인하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라모한 로이, 비베카난다, 라다크리슈난의 철학에서 [...] 호전적인 힌두교도들의 의제로 이어지는 명확한 인과 관계는 없다. 탈식민주의식민주의는 인도인들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식민주의적 지식 형태"[39]의 영향은 라다크리슈난의 저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호울리에 따르면, 라다크리슈난이 동양을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서양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식 형태로 구분한 것은 18세기와 19세기에 구성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동양"이나 "서양"의 철학적, 종교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상된" 것이다.[39]
1990년대 이후, 힌두교의 '구성'과 '표상'에 대한 식민주의적 영향은 힌두교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서양의 인도학자들은 인도와 그 문화를 더욱 중립적이고 정보에 입각한 방식으로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반면에 인도 학자들은 서양의 지식과 이해 방식에 지배받지 않고 인도 전통에 기반하고 이를 통해 정보를 얻는 지식과 이해 형태를 확립하려 노력하고 있다.
라다크리슈난이 남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북부에 위치한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 교수직"에 임명되자 벵골 지식인 엘리트 출신 다수가 불만을 품었고, 벵골 출신이 아닌 사람의 임명에 비판적이었던 ''더 모던 리뷰''(The Modern Review)가 비판의 주된 수단이 되었다. 1921년 칼카타에 도착한 직후 라다크리슈난의 저술은 ''더 모던 리뷰''에서 정기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라다크리슈난이 2권으로 된 ''인도 철학'' (1923년과 1927년)을 출판했을 때, ''더 모던 리뷰''는 그가 벵골 학자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자료 사용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편집자 주에서 ''더 모던 리뷰''는 "라다크리슈난 교수의 저서는 이 학술지에 서평으로 접수되지 않았으므로, ''더 모던 리뷰''는 이에 대한 어떠한 의견도 제시할 입장이 아닙니다."라고 인정했다.
1929년 1월호 ''더 모던 리뷰''에서 벵골 철학자 자두나트 신하는 1925년에 출판된 자신의 1922년 박사 학위 논문인 ''인도의 지각 심리학''의 일부가 1927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인도 철학 II''의 "파탄잘리의 요가 체계" 장에서 그의 스승 라다크리슈난에 의해 복사되었다고 주장했다. 신하와 라다크리슈난은 ''더 모던 리뷰''에서 여러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신하는 자신의 논문의 일부를 라다크리슈난의 출판물과 비교하며 총 110개의 "차용" 사례를 제시했다. 라다크리슈난은 신하와 자신이 모두 동일한 고전 텍스트를 사용했고, 자신의 번역은 표준 번역이었으며, 따라서 번역의 유사성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책을 출판하기 전에 그 주제에 대해 강의했고, 신하의 논문이 출판되기 전인 1924년에 그의 책이 출판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쿠푸스와미 사스트리, 간가나트 자, 랄리니 강굴리와 같은 학자들은 라다크리슈난이 1922년부터 해당 노트를 배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더 모던 리뷰''의 편집자 라마난다 차테르지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랄리니 강굴리의 편지를 게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신하의 편지는 계속 게재했다. 라다크리슈난 출판사의 총 편집자 머어헤드 교수는 그의 미국 체류로 인해 출판이 3년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1929년 여름, 이 분쟁은 법적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라다크리슈난은 "학자이자 공인으로서 라다크리슈난의 명성을 파괴하려는 조직적인 노력" 에 대응하여 신하와 차테르지를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손해 배상으로 100000INR를 요구했고, 신하는 라다크리슈난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여 20000INR를 요구했다. 이 소송은 1933년 5월에 합의되었고, 합의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소송 서류와 ''더 모던 리뷰'' 지면에 제시된 모든 주장이 철회되었다."
5. 서훈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1931)[65]
인도의 공화국 독립(1947년) 이전에 서임을 받았으므로, 이름 앞에 '경(Sir)'을 쓸 수 있는 정식 작위이다. 그러나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은 생전에 '경' 보다는 '박사(Dr.)' 호칭을 주로 씀에 따라 경의 호칭은 잘 붙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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