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 (벼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마는 고대 중국의 관직으로,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오관 중 하나로 군정 및 군무를 관장했으며, 초나라에서는 영윤과 함께 군권을 행사했다. 한나라에서는 대사마가 설치되었고, 후한 시대에는 태위로 변경되었다. 수·당나라 이후에는 병부상서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군의 장수를 보좌하는 역할로도 존재했으며, 지방관으로 주(州)의 자사를 보좌하는 역할도 했다. 당나라 시대에는 좌천된 관료에게 주어지는 직책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는 사대부들이 동지의 칭호로 사용했다.
수·당 이후 삼성 육부 체제에서 사마는 병부상서의 다른 이름(아칭)으로 사용되었다.[4]
동주와 전국 시대에는 사마가 각 군에 배치되어 군 장수를 보좌했다. 한(漢)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장군이 막부(사령부 또는 군 정부)를 열었고, 휘하에 보좌역으로 사마가 배치되었다.[8] 송나라에서는 사마가 동인흑수(銅印黑綬)와 강(絳, 짙은 붉은색) 의복, 무관을 착용했다. 수나라에서는 주(州)에 사마 대신 치중이 배치되었다.
2. 중앙 정부의 관직
2. 1. 주나라 ~ 한나라
서주 시대에는 삼공을 최고 관직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육경을 두었으며, 사도, 사마, 사사, 사공, 사구를 오관이라 불렀다. 사마는 군정(軍政)과 군무(軍務)를 관장했다. 춘추전국 시대, 초는 영윤과 대사마 두 직책을 두었는데[4],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사마 장 중군, 영윤 장 좌, 우윤 자신 장 우과신"과 같이 두 직책 모두 군권을 가지고 있었다. 군의 통제는 당시 상황에 따라 달라졌으며, 제도적으로 엄격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대사마를 두고, "대사마 장군"과 같은 부가호를 붙이기도 했다[6]。 무제는 대장군과 동격으로 표기장군을 정하기도 했다. 후한에서는 대사마가 태위(太尉)로 이름이 바뀌었다.
2. 2. 수나라 ~ 당나라
서주가 시작되었을 때, 삼공을 최고 관직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육경을 두었으며, 특히 사도, 사마, 사사, 사공, 사구를 오관이라 불렀다. 사마는 군정(軍政)과 군무(軍務)를 관장했다. 춘추전국 시대, 초는 "영윤"과 "대사마" 두 직책을 두었다[4]。《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사마 장 중군, 영윤 장 좌, 우윤 자신 장 우과신" 등과 같이, 두 직책 모두 군권을 가지고 있었다. 군의 통제는 그 당시 상황에 따라 달라졌으며, 제도적으로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대사마를 두고, 더 나아가 "대사마 장군"과 같은 부가호를 붙이기도 했다[6]。그 외에도 무제는 대장군과 동격으로 표기장군을 정하기도 했다. 후한에서는 대사마가 태위(太尉)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당 이후의 삼성 육부 체제에서는 병부상서의 다른 이름(아칭)으로 사마가 사용되었다.
3. 군사 지휘관
3. 1. 동주 ~ 전국시대
동주와 전국 시대에는 각 군에 사마(司馬)가 배치되었다. 사마는 군의 장수를 보좌하고 대부를 따르는 지위에 있었다. 《위료자》에는 "(병사) 백 명에는 졸(卒) 한 명, 천 명에는 사마(司馬) 한 명, 만 명에는 장(將) 한 명을 (두어) 명령한다. (그렇게 하면) 소수로 다수를 벌하고, 약함으로 강함을 벌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7] 이를 보면 사마의 직책은 장군 아래에 있었다.
3. 2. 한나라 ~ 위진남북조 시대
동주와 전국 시대에는 각 군에 사마(司馬)가 배치되었다. 군의 장수를 보좌하고, 대부를 따르는 지위였다. 《위료자》에는 "(병사) 백 명에는 졸(卒) 한 명, 천 명에는 사마(司馬) 한 명, 만 명에는 장(將) 한 명을 (두어) 명령한다. (그렇게 하면) 소수로 다수를 벌하고, 약함으로 강함을 벌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7] 이를 보면 사마의 직책은 장군 아래에 있었다.
한(漢)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장군이 막부(사령부 또는 군 정부)를 열었고, 부에는 보좌역으로 사마가 배치되었다.[8] 사마소는 산도를 행군사마로 임명했으며, 호삼성은 "행군사마의 호칭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9]
4. 지방관
당나라 시대에는 주에 사마를 두어 자사를 보좌하게 했지만, 실제 직무는 없었고 주로 좌천된 자에게 주어졌다. 815년 백거이는 월권 행위를 지적받아 강주(현재의 장시성주장시)의 사마로 좌천되었으며, 여기서 명작 《비파행》을 썼다.[10]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는 사대부들이 동지의 우아한 칭호로 사마를 사용했다.[10]
4. 1. 당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주에 사마(司馬)를 두고 자사를 보좌하게 했지만, 실제 직무는 없었고 주로 좌천된 자에게 주어졌다. 815년 백거이는 월권 행위를 지적받아 강주(현재의 장시성주장시)의 사마로 좌천되었다. 그는 여기서 명작 《비파행》을 썼다. 그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10]: 좌중에서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리는가, 강주 사마의 푸른 옷깃을 적시네.
4. 2. 명나라 ~ 청나라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사대부들은 동지의 우아한 칭호로 사마를 사용했다.[10]참조
[1]
서적
Gu Hanyu Da Cidian
Shanghai Lexicographical Publishing House
[2]
논문
Non-Translation and Functional Translation--Two Sinological Maladie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1954-05
[3]
웹사이트
Official Titles of the Han Dynasty: A Tentative List Compiled for The Han Dynasty History Project
http://library.uoreg[...]
University of Washington
2013-03-21
[4]
문서
史記·楚世家
[5]
문서
春秋左氏傳/成公#成公十六年
[6]
문서
後漢書卷一下・光武帝紀第一下
[7]
문서
尉繚子 第1巻3「制談」
[8]
문서
三国志·蜀志·姜維传
[9]
문서
資治通鑑·魏元帝咸熙元年
[10]
웹사이트
琵琶行|収蔵品紹介
http://www.hakusason[...]
白沙村荘 橋本関雪記念館
2020-09-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