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에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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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쓰에이 전쟁은 1863년, 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한 영국과 사쓰마 번 사이의 무력 충돌이다. 영국은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사과, 범인 처벌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사쓰마 번이 이를 거부하면서 가고시마에서 해상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결과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강화 조약을 통해 사쓰마 번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서양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사건은 사쓰마 번이 개화 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영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훗날 보신 전쟁에서 동맹을 맺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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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쓰에이 전쟁 - 나마무기 사건
나마무기 사건은 1862년 나마무기 촌에서 사쓰마 번 행렬과 마주친 영국인들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공격받아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막말 정치 혼란 심화, 외국인 배척 운동 격화, 사쓰에이 전쟁의 원인, 대중문화에의 영향 등의 결과를 낳았다.
사쓰에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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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사쓰에이 전쟁 |
로마자 표기 | Satsu-Ei Sensō |
시기 | 1863년 8월 15일 - 8월 17일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영국 |
교전국 2 | 사쓰마 번 |
지휘관 | |
영국군 지휘관 | 오거스터스 레오폴드 쿠퍼 |
사쓰마군 지휘관 | 시마즈 히사미쓰 |
기타 사쓰마군 관련 인물 | 오리타 헤이하치 (年昭), 군부역 이지치 마사하루, 조교 곤도 신자에몬 (宏), 정방 시게노 야스쓰구 (安繹) |
병력 규모 | |
영국군 | 군함 7척 |
사쓰마군 | 연안 포대 1개 |
피해 규모 | |
영국군 사상자 | 전사 13명, 부상 59명, 군함 3척 손상 |
사쓰마군 사상자 | 전사 5명, 상선 3척 파괴 |
기타 피해 | 정크선 5척 파괴 |
결과 | |
결과 | 막부가 생무기 사건 유족에게 부조금을 지급하고 강화. |
배경 | |
배경 | 나마무기 사건 |
기타 정보 | |
관련 전투 | 바쿠마쓰 |
2. 배경
1862년 9월 14일(분큐 2년), 무사시국 다치바나군 나마무기라는 마을 근처에서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에 난입한 영국인들을 사무라이들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막부와 사쓰마번에 공식 사죄, 범인 색출, 배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영국의 요구에 응해 100000GBP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나, 사쓰마 번은 책임을 회피했다. 영국은 사쓰마 번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 행사를 하겠다고 통고했고, 사쓰마 번은 전쟁을 각오하고 이를 거절했다.
나마무기 사건은 불평등 조약으로 치외법권을 누리던 외국인과 일본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요코하마에서는 "가나가와 6향천을 한계로 하고 그 외 각 방향으로 대략 10리"를 외국인 유보 구역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 경계가 모호하여 분쟁의 소지가 있었다.
2. 1. 나마무기 사건
1862년 9월 14일(분큐 2년) 무사시국 다치바나군 나마무기 마을 근처에서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에 난입한 영국인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이 살해당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3] 이 사건으로 영국과 사쓰마번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당시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외국인에게 일본 법을 적용하기 어려웠다.[4]
영국은 이 사건에 대해 막부와 사쓰마번에 공식 사죄, 범인 색출, 배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영국의 요구에 응해 100000GBP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나, 사쓰마 번은 책임을 회피했다. 영국은 사쓰마 번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력 행사를 하겠다고 통고하였고, 사쓰마 번은 전쟁을 각오하고 이를 거절하였다.[3][4][5][6]

이 사건은 고메이 천황의 "양이 칙령"으로 인해 서구인과 일본인 간의 폭력적인 대립이 발생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간몬 해협에서는 미국, 네덜란드 왕국, 제2 프랑스 제국 상선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징벌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다.
2. 2. 막부의 대응과 영국의 요구
1862년 9월 14일(분큐 2년), 무사시국 다치바나군 나마무기라는 마을 근처에서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의 행렬에 난입한 영국인들을 사무라이들이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7]영국은 막부와 사쓰마번에 공식 사죄, 범인 색출, 배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영국의 요구에 응해 100000GBP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나, 사쓰마번은 책임을 회피했다. 영국은 사쓰마번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 행사를 하겠다고 통고했고, 사쓰마번은 전쟁을 각오하고 이를 거절했다.[7]
1년 넘게 이어진 사쓰마 번과의 지루한 협상 끝에,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쿠퍼에게 군사 행동을 통해 사쓰마가 자신의 요구에 따르도록 강요하라고 명령했다. 영국 측의 계획을 통보받은 에도 막부는 그 실행을 잠시 늦춰달라고 요청했다.[7]
5일 후, 에도에서 온 막부 부대신이 닐을 방문했지만, 사쓰마 번에 대한 영국의 원정에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쿠가와 막부가 쿠퍼의 함대에 합류하기 위해 군함 한 척을 보낼 의향이 있다고 닐에게 알렸다. 그러나 해당 증기선은 결국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8]
3. 교섭
막부로부터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받은 후에도, 영국은 사쓰마 번에 범인 처벌과 추가 배상금 2만 5000파운드를 요구하며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나마무기 사건 이전에도 영국 공사관 습격 사건(도젠지 사건) 등이 발생하여 영국 내 대일 감정이 악화된 상황이었다. 존 러셀 외무장관은 닐 대리 공사와 동인도·극동 함대 사령관 제임스 호프 중장에게 강경 대응을 지시했다. 닐과 호프는 간몬 해협, 오사카 만, 에도 만 등을 봉쇄하는 해상 봉쇄 작전을 검토했고,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추밀원 회의에서 해상 봉쇄를 포함한 무력 제재 칙령이 가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닐과 호프는 해상 봉쇄를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닐은 호프를 대신하여 동인도·극동 함대 사령관이 된 어거스터스 레오폴드 큐퍼 소장을 요코하마로 불러 막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막부는 프랑스 공사 듀셰느 드 벨쿠르에게 중재를 의뢰하여 배상 교섭이 타결되었다. 이에 닐과 큐퍼는 해상 봉쇄 작전을 중단하고 사쓰마 번과의 직접 교섭을 위해 함대를 이끌고 가고시마로 향했다. 다만, 이 시점까지는 전투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한편, 호프는 해상 봉쇄에도 불구하고 배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육군과 협력하여 교토, 오사카, 에도를 점령하는 계획도 검토했으나, 게릴라전으로 이어질 가능성과 육군 파견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했다.
3. 1. 요코하마에서의 교섭
1863년 6월 24일(분큐 3년 5월 9일), 영국 공사 대리 존 니일은 막부로부터 나마무기 사건의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받았다.[7]8월 6일(6월 22일), 니일은 사쓰마 번과의 직접 교섭을 위해 7척의 함대와 함께 요코하마를 출발했다. 8월 11일(6월 27일) 영국 함대는 가고시마만에 도착하여 가고시마성 아래 남쪽 약 7km의 타니야마 고향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사쓰마는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 데라다야 소동 관계자의 근신도 풀렸다.[6]
영국 함대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함종 | 함명 | 함장 | 지휘관 |
---|---|---|---|
기함 | 유라이얼러스 | J·조슬링 일등해좌 (Captain)[17] | 어거스터스 레오폴드 큐퍼해군 소장 (영국 동인도 함대 사령 장관) |
코르벳 | 펄 | J·보레이스 일등해좌 (Captain)[17] | |
코르벳 | 퍼슈스 | A·킹스턴 해위 (Lieutenant-Commander)[18] | |
코르벳 | 아거스 | L·무어 해위 (Lieutenant-Commander)[18] | |
포함 | 레이스호스 | C·복서 해위 (Lieutenant-Commander)[18] | |
포함 | 코켓 | J·알렉산더 해위 (Lieutenant-Commander)[18] | |
포함 | 하복 | G·풀 해위 (Lieutenant)[18] |
8월 12일(6월 28일), 영국 함대는 더 전진하여 가고시마성 아래 앞노하마 약 1km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함대를 방문한 사쓰마의 사자에게 영국 측은 국서를 제출, 나마무기 사건 범인의 체포와 처벌, 그리고 유족에게 "자녀 양육비"로 2만 5000파운드를 요구했다. 시마즈가는 답변을 유보하고 다음 날 가고시마성 안에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8월 13일(6월 29일), 영국 측은 성내에서의 회담을 거부하고 조속한 답변을 요구했다.
시마즈가는 "나마무기 사건에 관해 책임은 없다"는 답변서를 영국 함대에 제출하고, 영국 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영국 함대는 사쿠라지마의 요코야마 마을·코이케 마을 앞바다로 이동했다.
한편, 나라하라 키자에몬 등은 영국 함선이 급수·식량을 요구한 데 대해 기습을 계획했다. 카이에다 노부요시, 구로다 기요타카, 오야마 이와오 등은 국서에 대한 답사로 과일·수박 장수로 변장하여 함대에 접근했다(수박 장수 결사대). 사자를 가장한 일부는 승선에 성공했지만, 함대 측의 경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선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기습 작전은 중지되고, 나라하라 등은 퇴거했다.
8월 14일(7월 1일), 니일 대리 공사는 시마즈가의 사자에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무력 행사에 나설 것을 통고했다. 시마즈가는 개전을 각오하고, 당주·시마즈 시게히사와 후견인·시마즈 히사미츠는 가고시마성이 영 함대의 함포 사정권 내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본영으로 정한 가고시마 근재 니시다 마을(현·가고시마시 토키와)의 센간지로 이동했다. 아울러 가미마치·시모마치의 상인 지역에도 피난 지시를 내렸다.
3. 2. 가고시마에서의 교섭 결렬
6월 27일(8월 11일) 어거스터스 레오폴드 쿠퍼 소장이 이끄는 영국 해군 함대가 긴코 만에 도착하여 사쓰마 번에 국서를 제출했다. 국서에는 나마무기 사건의 범인 체포 및 처벌, 유족에 대한 배상금 25000GBP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6]영국 함대는 기함인 HMS ''Euryalus'' (닐 탑승), HMS ''Pearl'', HMS ''Perseus'', HMS ''Argus'', HMS ''Coquette'', HMS ''Racehorse'', 건보트 HMS ''Havock''로 구성되었다.[6]
시마즈가는 답변을 유보하고 다음 날 가고시마 성 안에서 회담할 것을 제안했으나, 6월 29일(8월 13일) 영국 측은 이를 거부하고 조속한 답변을 요구했다.
결국 시마즈가는 "나마무기 사건에 관해 책임은 없다"는 답변서를 제출하며 영국 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영국 함대는 사쿠라지마의 요코야마 마을·코이케 마을 앞바다로 이동했다.
4. 전투 경과
7월 2일 새벽, 영국 함대는 사쓰마 번의 기선 3척(덴유마루(天佑丸), 하쿠호마루(青鷹丸), 아오타카마루(青鷹丸))을 나포했다. 사쓰마 번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정오에 육상 포대 80문을 동원해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20] 영국군은 기선을 잃은 사쓰마 번이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라 방심하여 대응이 늦어졌고, 14시경에 100문의 포로 반격을 시작했다. 큐퍼 제독은 함선을 나포한 상태로는 전투가 어렵다고 판단, 귀중품을 챙긴 뒤 세 척의 배를 소각했다.
예상 밖의 반격과 거친 날씨에 영국군은 고전했고, 대파 1척, 중파 2척, 사상자 63명(기함 유라이아라스의 함장, 부함장을 포함한 사망자 13명, 부상자 50명)의 피해를 입었다. 사쓰마 번은 비전투원 5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해 인적 피해는 영국군보다 적었지만, 영국 함대의 포격으로 가고시마성과 가고시마 시내의 민가와 관공서가 불타는 등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7월 4일 영국군은 탄약과 석탄을 소모하고, 기함 함장과 부함장의 전사 등 인적 피해를 고려해 사쓰마에서 철수하여 요코하마로 향했다.
4. 1. 영국 함대의 기선 나포
7월 2일(8월 15일) 새벽, 영국 함대는 사쓰마 번의 기선 3척(덴유마루(天佑丸), 하쿠호마루(青鷹丸), 아오타카마루(青鷹丸))을 나포했다.[19][21][22] 사쓰마 번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정오에 육상 포대 80문을 동원하여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20] 영국군은 기선을 잃은 사쓰마 번이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라 방심하여 대응이 늦어졌고, 14시경에 100문의 포로 반격을 시작했다. 큐퍼 제독은 함선을 나포한 상태로는 전투가 어렵다고 판단, 귀중품을 챙긴 뒤 세 척의 배를 소각했다.4. 2. 영국 함대의 가고시마 포격
7월 2일 새벽, 영국 함대는 사쓰마 번의 증기선 3척(덴유마루, 하쿠호마루, 아오타카마루)을 나포했다.[21][22] 사쓰마 번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정오에 육상 포대 80문을 동원해 선제 공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사쓰마 번이 기선을 잃고 전의를 상실했다고 방심하여 대응이 늦어졌고, 14시에 100문의 포로 반격했다. 큐퍼 제독은 함선을 나포한 상태로는 전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귀중품을 꺼낸 뒤 세 척의 배를 소각했다.예상 밖의 반격에 영국군은 고전했으며, 이로 인해 대파 1척, 중파 2척, 사상자 63명(기함 유라이아라스의 함장, 부함장을 포함한 사망자 13명, 부상자 50명)의 피해를 입었다. 사쓰마 번의 인적 피해는 영국보다 적었지만(비전투원 사망 5명, 부상자 18명), 영국 함대의 포격으로 가고시마성과 가고시마 시내의 민가와 관공서가 불타는 등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오후 7시경, 포격전에 참가하지 않은 "하복"은 단독으로 포대가 없는 해안으로 이동하여 정박 중인 류큐 선박 3척과 휴가국나카군의 아카에 선 2척을 습격하여 소각했다. 그 후, 동료 함 "퍼슈스"도 가세하여 대포나 로켓탄을 사용하여 근대 공장군을 갖춘 번영 집성관 일대를 공격하여 모두 파괴했다.[33]

4. 3. 사쓰마번의 응전과 피해
7월 2일 정오, 사쓰마 번은 육상 포대 80문을 동원해 영국 함대에 선제 공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사쓰마 번이 기선 3척을 잃고 전의를 상실했다고 방심하여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100문의 포로 반격을 시작했다. 큐퍼 제독은 나포한 함선들을 처리하기 위해 귀중품을 꺼낸 뒤 소각했다.예상 외의 반격과 거친 날씨로 인해 영국군은 고전했다. 영국군의 피해는 대파 1척, 중파 2척, 사상자 63명(사망 13명, 부상 50명)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기함 유라이아라스의 함장과 부함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쓰마 번의 인적 피해는 비전투원 5명 사망, 부상자 18명으로 영국군보다 적었다.
그러나 영국 함대의 포격으로 가고시마성과 가고시마 시내의 민가와 관공서 등이 불타는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약 500채의 민가 가옥이 파괴되었는데, 이는 도시 지역의 약 5%에 해당하며 류큐 대사관도 파괴되었다.
오후 3시경, 벤텐나미토 포대의 29 拇함포(봄벤포) 탄환 1발이 "유라이얼러스" 군기실(함교)에서 폭발하여 함장과 부장 등 장교가 전사했다.[26][41] 큐퍼 제독은 부상을 입었지만 생존했다.[29]
오후 3시 10분, "레이스호스"가 좌초되었으나, 다른 함선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32]
오후 7시경, "하복"과 "퍼슈스"는 집성관 일대를 공격하여 파괴했다. 또한, "하복"은 류큐 선 3척과 휴가국나카군의 아카에 선 2척을 습격하여 소각했다.[33]
오후 8시경, 함포 사격으로 인해 민가(350여 호), 무사 저택(160여 호), 절사(조코묘지, 후단코인, 쿄코쿠지, 반냐인) 등이 소실되었다.[33]
7월 3일(8월 16일), 영국 함대는 시가지와 양안의 다이바를 포격하여 시가지 및 시마즈 저택을 연소시켰다. 덴포잔 포대(모래 양륙장)에서 반격이 있었지만, 그 후 다이바에서의 반격은 멈추었다.
사쓰마 번은 전기 점화 장치를 이용한 수중 폭탄 3기를 설치했지만, 영국 함대가 진로를 변경하여 실패했다.
4. 4. 영국 함대의 철수
7월 4일 영국 함대는 탄약과 석탄을 소모하고, 기함 함장과 부함장의 전사 등 인적 피해를 고려하여 사쓰마에서 철수하여 요코하마로 향했다.5. 전투 결과
사쓰에이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사쓰마 번은 포대 공격으로 영국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가고시마 시가지와 주요 시설이 파괴되는 등 물적 피해가 컸다.
사쓰마 측 인적 피해는 기온노스 포대에서 세이쇼 키요타로(도쿠후)가 전사하고[26], 카와카미 류에를 포함한 수비병 6명이 부상당했으며[37], 오키코지마 포대에서 포수 2명이 부상당했다[38] . 시가지에서는 수비병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물적 피해로는 대포 8문, 화약고, 가고시마성 내 시설, 슈세이칸, 주전국, 사찰, 민가 350여 호, 번사 저택 160여 호, 증기선 3척, 류큐 선박 3척, 아카에 선박 2척이 소실되었다. 특히 함포 사격으로 인한 화재로 시가지의 "10분의 1"이 소실되었다.
영국 함대는 전함 1척 대파, 2척 중파, 63명의 사상자(사망 13명, 부상 50명, 부상자 중 7명 사망[36])를 기록했다.
1863년 8월 15일, 가고시마 공격 당시 전투 대열에 있던 영국 함대는 다음과 같다.
함명 | 함종 | 건조년도 | 톤수 | 승무원 | 출력 | 비치된 포 |
---|---|---|---|---|---|---|
유라이어러스 Euryalus | 프리깃 증기 스크류 | 1853년 (개조) | 적재량 2371톤 (bm톤) 배수량 3125 영국톤 | 540 | 400NHP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x5 40파운드 암스트롱포x8 기타 22문 가고시마 포격 당시 칼로네이드포x16 추가 |
펄 Pearl | 코르벳 증기 스크류 | 1855년 | 적재량 1469톤(bm톤) 배수량 2187 영국톤 | 400 | 400NHP | 68파운드포x1 10인치포x20 |
코케트 Coquette | 포함 증기 스크류 | 1855년 | 적재량 677톤(bm톤) | 90 | 200NHP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x1 10인치포x1 32파운드포x1 20파운드포x2 |
아거스 Argus | 슬루프 증기 외륜 | 1852년 | 적재량 981톤(bm톤) 배수량 1630 영국톤 | 175 | 300NHP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x1 10인치포x1 32파운드포x4 |
퍼시어스 Perseus | 슬루프 증기 스크류 | 1861년 | 적재량 955톤(bm톤) 배수량 1365 영국톤 | 175 | 200NHP | 40파운드 암스트롱포x5 32파운드포x12 |
레이스호스 Racehorse | 포함 증기 스크류 | 1860년 | 적재량 695톤(bm톤) 배수량 877 영국톤 | 90 | 200NHP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x1 10인치포x1 32파운드포x1 20파운드포x2 |
하보크 Havock | 건보트 증기 스크류 | 1856년 | 적재량 232톤(bm톤) | 37 | 60NHP | 68파운드포x2 |
5. 1. 인적 피해
영국군은 기함 유라이아라스의 함장 존 조슬링과 부함장 윌모트를 포함하여 13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했다.[36] 사쓰마 번 측은 5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5. 2. 물적 피해
사쓰마 번은 가고시마성과 시가지의 민가, 관공서, 집성관 등이 불타고, 번의 증기선 3척(天佑丸, 青鷹丸, 青鷹丸)과 류큐 선박 3척 등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38]영국 측은 함선 1척 대파, 2척 중파, 63명의 사상자(사망 13명, 부상 50명)가 발생했다. 특히 기함 유라이어러스의 함장과 부함장이 전사하는 등 지휘부에 큰 피해를 입었다.
영국 함대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함명 | 함종 | 손해[41] |
---|---|---|
유라이어러스 Euryalus | 프리깃 (증기 스크류) | 전사 10명 부상 21명 |
펄 Pearl | 코르벳 (증기 스크류) | 부상 7명 |
코케트 Coquette | 포함 (증기 스크류) | 전사 2명 부상 4명 |
아거스 Argus | 슬루프 (증기 외륜) | 부상 6명 |
퍼시어스 Perseus | 슬루프 (증기 스크류) | 전사 1명 부상 9명 사망 4명 |
레이스호스 Racehorse | 포함 (증기 스크류) | 함체 대파 부상 3명 |
하보크 Havock | 건보트 (증기 스크류) | 없음 |
조정은 시마즈 가문의 존왕양이 실행을 칭찬하며 포상을 내렸다. 그러나 요코하마로 돌아간 영국 함대 내에서는 전투 중지 및 철수에 대한 불만이 병사들 사이에서 커져갔다.[39]
한편, 영국 의회 및 국제 여론은 영국 측이 막부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얻은 데다가 가고시마성 아래 민가에 대한 함포 사격은 필요 이상의 공격이었다고 비판하며 큐퍼 제독을 비난했다.
6. 강화 교섭과 전쟁의 처리
9월 28일 (11월 11일)부터 10월 5일 (11월 15일)까지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에서 사쓰마 번과 영국 간 강화 교섭이 세 차례 진행되었다. 이 교섭을 통해 사쓰마 번은 영국과의 관계를 깊게 하였고, 서구 문명의 우수성을 재인식하였다.
사쓰마 번은 나마무기 사건의 배상금으로 2만 5000 파운드 (63000냥)를 막부로부터 빌려 영국에 지불했지만, 이후 막부에 반환하지 않았다. 또한 강화 조건 중 하나였던 나마무기 사건 가해자는 "도망 중"이라는 이유로 처벌되지 않았다.
이후 영국은 사쓰마 번을 높이 평가하며 관계를 긴밀하게 발전시켰다. 2년 후 공사 해리 파크스가 사쓰마를 방문했고,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우는 많은 사쓰마 번사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6. 1. 강화 교섭
10월 5일(11월 15일) 막부의 중재로 사쓰마 번과 영국은 요코하마의 영국 대사관에서 강화 협정을 맺었다. 사쓰마 번은 막부로부터 25000GBP를 빌려 영국 측에 지불했다. 강화 조건 중 하나였던 나마무기 사건 가해자 처벌은 '도망 중'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쓰마는 결국 닐의 요구에 굴복하여 영국에 25000GBP를 지불했지만, 이는 1869년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과 메이지 정부로의 교체로 인해 갚지 못하고 막부로부터 빌린 돈이었다.[1] 시마즈가는 25000GBP에 상당하는 6만 300냥을 막부로부터 빌려 지불했지만, 막부에 반환하지 않았다.[2]
강화 교섭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날짜(음력) | 날짜(양력)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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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 11월 11일 | 제1차 화해 담판.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 접견실에서 시마즈가의 시게노 아쓰노조 등이 닐 대령과 담판을 벌였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결렬되었다. 막부 측의 중재로 차회 담판이 결정되었다. |
10월 4일 | 11월 14일 | 제2차 화해 담판. 시마즈 측과 닐 공사 양측 모두 기존 입장을 고수하여 협상이 결렬되고, 차회 담판이 결정되었다. |
10월 5일 | 11월 15일 | 제3차 화해 담판. 사도와라 시마즈가의 가바야마, 노세 등이 막부 측의 설득을 받아들여 사쓰마 측에 화해를 촉구했다. 시게노 등은 영국으로부터 군함 구입을 조건으로 부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의결했고, 영국 측은 군함 구입 알선을 승낙했다. |
6. 2. 나마무기 사건 가해자 처벌 문제
10월 5일 막부의 중개 하에 사쓰마 번과 영국은 요코하마의 영국 대사관에서 강화를 맺었고, 사쓰마 번은 막부로부터 25000GBP를 차용해 영국 측에 지불했다. 강화 조건 중 하나였던 나마무기 사건 가해자의 처벌은 '도망 중'이라는 이유로 이행되지 않았다.7. 전쟁의 영향 및 평가
사쓰에이 전쟁은 사쓰마번이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깨닫고 양이(攘夷)에서 개화 중심으로 입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4] 영국은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 번의 군사력을 높게 평가하였고, 프랑스를 견제할 정치적 목적으로 막부를 지지하던 이전의 방침을 바꿔 사쓰마 번과 관계를 깊게 한다.[4]
사쓰마 번은 영국에 배상금 25000GBP를 지불해야 했는데, 이 돈은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빌린 것이었다. 영국은 배상금을 받은 대가로 사쓰마 번과 증기 군함을 공급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갈등은 사쓰마 번과 영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의 시작점이 되었고, 이는 그 후의 보신 전쟁에서 주요 동맹이 되었다.[4]
7. 1. 사쓰마번의 변화
사쓰에이 전쟁은 사쓰마번이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깨닫고 양이(攘夷)에서 개화 중심으로 입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4] 영국은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 번측의 군사력을 높게 평가하였고, 프랑스를 견제할 정치적 목적으로 막부를 지지하던 이전의 방침을 바꿔 사쓰마 번과 관계를 깊게 한다.[4]
사쓰마는 결국 닐의 요구에 굴복하기로 결정하고 영국에 25000GBP를 지불했다. 이는 1869년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과 메이지 정부로의 교체로 인해 갚지 못하고 막부로부터 빌린 돈이었다.[4] 그들은 리처드슨의 살인범들을 밝혀내 재판에 넘기지도 않았지만, 배상금을 받은 영국은 사쓰마 번과 증기 군함을 공급하는 조약을 체결했다.[4] 아이러니하게도 이 갈등은 사쓰마 번과 영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의 시작점이 되었고, 이는 그 후의 보신 전쟁에서 주요 동맹이 되었다.[4] 처음부터 사쓰마국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개방과 서구화를 선호했다.[4]
7. 2. 영국과의 관계 변화
영국은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 번의 군사력을 높게 평가하였고,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막부를 지지하던 이전의 방침을 바꿔 사쓰마 번과 관계를 심화시켰다.[1] 사쓰마 번은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깨닫고 양이에서 개화 중심으로 입장을 바꾸었다.[1]사쓰마는 결국 닐의 요구에 굴복하여 영국에 25000GBP를 지불했다. 이 돈은 1869년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과 메이지 정부로의 교체로 인해 갚지 못하고 막부로부터 빌린 것이었다. 리처드슨 살인범들을 밝혀내 재판에 넘기지도 않았지만, 영국은 사쓰마 번과 증기 군함을 공급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갈등은 사쓰마 번과 영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의 시작점이 되었고, 이후 보신 전쟁에서 주요 동맹이 되었다. 처음부터 사쓰마국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개방과 서구화를 선호했다.[1]
8. 기타 논란 및 이설
암스트롱 포는 이 전투에서 폭발과 불발탄이 많다는 사실이 실전에서 밝혀지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모든 주문이 취소되었다는 이설이 있다. 그러나 당시 사건을 전하는 신문에서는[41] 영국 함대 측의 부상자 이름과 상처의 상세 내용, 전투 상황 등이 게재되어 있으며, 파열탄의 착탄 폭발에 의한 피해를 보여주는 등, 암스트롱 포의 폭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기함 유라이얼러스에는 사쓰마 측의 박격포탄 등이 수 발 명중했으며, 그 파열탄에 의해 함대 전체 사상자 수의 4할 이상을 하나의 함선에서 차지했다. 유라이얼러스에서의 사상자는 31명에 달했으며[41], 그 상세한 상황으로 볼 때 포의 폭발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피해는 제한된 범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44]。 사쓰마 측의 10인치 포탄에 의해 유라이얼러스의 갑판에 설치된 제3번 포가 직격탄을 맞았으며, 그 포병들이 한꺼번에 사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8. 1. 암스트롱 포 논란
사쓰에이 전쟁에서 최신 무기였던 암스트롱 포는 폭발과 불발이 잦다는 문제가 드러나 영국 해군에서 모든 주문이 취소되었다. 이후 수출 제한이 풀리면서 일본에도 수입되는 계기가 되었다.[43]1863년 8월 26일 가고시마 전쟁 당시 상황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는 영국 함대의 부상자 명단과 피해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암스트롱 포 폭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41] 기함 유라이얼러스함은 사쓰마번의 포탄에 맞아 큰 피해를 입었고, 함선 한 척에서 전체 사상자의 40% 이상이 발생했다. 유라이얼러스함의 사상자는 31명에 달했지만,[41] 자세한 상황을 보면 암스트롱 포 폭발로 인한 피해는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44]
사쓰마 측의 10인치 포탄이 유라이얼러스함 갑판의 제3번 포에 명중하여 포병들이 한꺼번에 사망한 사건은 암스트롱 포 폭발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참조
[1]
문서
Howe p. 279
[2]
문서
Denney, p.19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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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man, pp. 68–6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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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man, p. 7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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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man, p.7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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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k 2002, p. 92.
[7]
문서
In Rennie, p. 381
[8]
문서
Rennie, p. l382
[9]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12-03
[10]
문서
祇園洲砲台伍長税所淸太ただ一人の戦死者
[11]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p.136-138
[12]
서적
The Anglo-Japanese Alliance, 1902-1922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12-25
[13]
문서
流弾により7月2日は守衛兵3人死亡、負傷5人、7月2日は守衛兵1人死亡
[14]
문서
当時は[[アイルランド島]]全体がイギリス領であった。
[15]
문서
「英艦隊が前の浜に停泊するや、忠義公は軍役奉行[[折田平八]](年昭)、軍賦役[[伊地知正治]]、助教[[今藤新左衛門]](宏)、庭方[[重野安繹|重野厚之丞]](安繹)を旗艦に遣わし、その来意を問はしめたり、・・・」
[16]
서적
幕末維新変革史 上
岩波書店
2012
[17]
문서
当時のイギリス海軍には少佐 (Lieutenant-Commander) に相当する階級が無く、佐官は“Captain”と“Commander”二等級であった。19世紀前半までの“Captain”は「勅任艦長」、“Commander”は「[[海尉]]艦長」と一般的に訳されるが、この頃にはこれらは階級へと変化しており、役職名であるそれらの訳語も不適切である。よって、“Captain”は一等海佐とする。
[18]
문서
当時のイギリス海軍では、“Lieutenant-Commander”は正式の階級ではなく、古参の“Lieutenant”に許される称号であった。また、尉官は(現在でも)二等級なので、“Lieutenant”は「海尉」とする。
[19]
문서
「・・・然れども未た宣戦の布告なきに、何を以て我が船を掠奪せんとするやと、抗論して肯ぜざりしも、・・・」
[20]
웹사이트
世界最強のイギリス海軍に挑んだ「薩英戦争」の思わぬ結末とは | 和樂web 美の国ニッポンをもっと知る!
https://intojapanwar[...]
2024-04-10
[21]
문서
「・・・突然にこの汽船の舷側に横着し、五六十人乱入したり。我が船員驚き一方ならず、しかして五代、松木等の船長にそれ引き渡しを要請せり。然れども未た宣戦の布告なきに、何を以て我が船を掠奪せんとするやと、抗論して肯ぜざりしも、遂に彼等の威嚇に力及ばず・・・」
[22]
문서
「・・・天佑丸にては、乗組員中に抵抗する者もありたるに依り之を捕縛し、・・・太鼓役の師匠本田彦次郞の如きは、敵の士官と闘争せんとしたる為め銃剣に突かれ、海中に飛び込み行方不明となれり、・・・吉留直次朗は佩刀を渡せ渡さぬと争ひしが背後より英兵に剣を以て突かれ、・・・」
[23]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p.128-129
[24]
문서
捕獲に向かいたる五艦は脇元沖に至り、・・・
[25]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128
[26]
서적
島津久光公實記(二)
[27]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p.129-130
[28]
문서
旗艦の砲門に命中して甲板上に炸裂し、艦橋に在って指揮せる艦長・・・
[29]
문서
「・・・船将外一人と3人で檣棚に上り、望遠鏡を以て砲台より発射することを認め、急に号令して各船戦闘の準備をなさしめる中、一丸飛来て第二の船将を打たおし棚をも打砕き、余外一人も墜落、その時左腕を傷め今なおかくのごとしと疵所を示せり。」
[30]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132
[31]
문서
「午後3時10分頃、200碼(ヤード)まで進撃して、遂に砲台前の浅瀬に擱坐し、船体はなはだ傾斜し、大砲を発射することは能はず、・・・或は伝ふ同艦は機械に故障あり、運転の自由を欠きしが、遂に吹き流され座州したるものなりと。」
[32]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135
[33]
서적
元帥公爵大山巌』p.136
[34]
서적
薩藩海軍史(中巻)』p.538
[35]
서적
薩藩海軍史(中巻)』p.540
[36]
서적
薩英戦争
朝日新聞社
[37]
서적
元帥公爵大山巌
[38]
서적
元帥公爵大山巌
[39]
뉴스
The Progress of the Japanese War
New York Times
1863-10-04
[40]
문서
[41]
간행물
鹿児島戦争之英文新聞紙翻訳・全
http://www.jacar.go.[...]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42]
문서
[43]
서적
日本の戦艦
[44]
문서
[45]
문서
[46]
뉴스
[47]
방송
幻の大艦隊 〜イギリスから見た薩英戦争〜
200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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