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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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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인(士仁)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촉한의 장군으로, 관우의 부하였으나 손권에게 투항했다. 사인은 형주의 공안을 지키면서 관우와 불화를 겪었고, 번성 전투에서 군량 공급에 소홀하여 관우의 처벌을 두려워했다. 결국 손권의 계략에 넘어가 미방과 함께 오나라에 항복하여 관우의 패배와 죽음에 기여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부사인(傅士仁)으로 등장하며, 관우와의 갈등, 오나라 투항, 이릉 전투에서의 행적을 거쳐 유비에게 처형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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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사仁 (시 런)
군의 (君義, Jūnyì)
출생지유주광양군대흥구
사망 여부알 수 없음
관직 및 역할
직업관리, 장군
소속유비손권

2. 생애

사인은 광양군(廣陽郡) 출신으로, 현재의 베이징시다싱구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형주의 공안현에서 군벌 유비가 형주를 지키도록 임명한 장군 관우의 부하로 복무했다. 관우와의 불화로 사인과 미방은 관우가 번성 전투에 출전했을 때 군벌 손권에게 투항했다. 사인과 미방은 손권의 군대가 여몽의 형주 침공으로 형주를 점령하도록 하여 관우의 패배와 죽음을 초래했다.

사인은 장군으로써 공안(公安)에 주둔하여, 남군태수 미방(糜芳)과 함께 관우(關羽)에 속해 일했으나, 관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6] 219년, 번성 전투 당시 미방과 함께 군자 공급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관우는 돌아온 후 둘을 처벌하겠다고 했다.[7] 손권(孫權)은 그들을 꾀어 내어, 사인은 미방과 함께 동오(東吳)에 항복하였다.[7]

진수의 『삼국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 휘하의 장군으로서 형주의 공안현을 지키고 있었지만, 상관인 관우로부터 얕잡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관우가 번성 전투에 임했음에도 지원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돌아오면 처벌하겠다"는 질책을 받고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손권으로부터 내통 제안을 받자, 강릉성을 지키고 있던 미방과 함께 이에 응하여 그 군대를 맞이했다.

여몽전의 주석에 인용된 『오서』에 따르면, 항복은 손권 휘하의 여몽의 군대가 닥쳐오고 나서의 일로, 처음에는 우번의 회견 요청도 거절했지만, 결국 우번의 설득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고 한다. 그 후, 여몽은 사인을 연행하여 남군까지 쳐들어가, 사인의 모습을 본 그 지역의 태수인 미방 또한 항복했다.

당초 여몽이 관우의 척후를 마비시키고 쳐들어 오자,[8] 사인은 공안에서 여몽을 저지하고 설득하러 온 우번도 만나지 않았으나, 우번의 협박성 편지를 받고 결국 항복했다.[9]

함께 손권에게 항복한 미방은 그 후, 『삼국지』 오주전 등에서 오의 무관으로서 활동한 사적이 보이지만, 사인이 손권에게 항복한 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후에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사서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은 자국에게 배신자인 미방, 사인, 곽포, 반준에 대해 "사령관에게 원한을 품고, 대덕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구할 공도 없이, 배반을 저질러 도망치고, 스스로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두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혹평했다[3]

2. 1. 오나라 투항

사인은 장군으로써 공안(公安)에 주둔하여, 남군태수 미방(糜芳)과 함께 관우(關羽)에 속해 일했으나, 관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6] 219년, 번성 전투 당시 미방과 함께 군자 공급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관우는 돌아온 후 둘을 처벌하겠다고 했다.[7] 손권(孫權)은 그들을 꾀어 내어, 사인은 미방과 함께 동오(東吳)에 항복하였다.[7]

진수의 『삼국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 휘하의 장군으로서 형주의 공안현을 지키고 있었지만, 상관인 관우로부터 얕잡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관우가 번성 전투에 임했음에도 지원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돌아오면 처벌하겠다"는 질책을 받고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손권으로부터 내통 제안을 받자, 강릉성을 지키고 있던 미방과 함께 이에 응하여 그 군대를 맞이했다.

여몽전의 주석에 인용된 『오서』에 따르면, 항복은 손권 휘하의 여몽의 군대가 닥쳐오고 나서의 일로, 처음에는 우번의 회견 요청도 거절했지만, 결국 우번의 설득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고 한다. 그 후, 여몽은 사인을 연행하여 남군까지 쳐들어가, 사인의 모습을 본 그 지역의 태수인 미방 또한 항복했다.

당초 여몽이 관우의 척후를 마비시키고 쳐들어 오자,[8] 사인은 공안에서 여몽을 저지하고 설득하러 온 우번도 만나지 않았으나, 우번의 협박성 편지를 받고 결국 항복했다.[9]

함께 손권에게 항복한 미방은 그 후, 『삼국지』 오주전 등에서 오의 무관으로서 활동한 사적이 보이지만, 사인이 손권에게 항복한 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후에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사서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은 자국에게 배신자인 미방, 사인, 곽포, 반준에 대해 "사령관에게 원한을 품고, 대덕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구할 공도 없이, 배반을 저질러 도망치고, 스스로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두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혹평했다[3]

2. 2. 투항 이후

사인은 장군으로써 공안에 주둔하여, 남군태수 미방과 함께 관우에 속해 일했으나, 관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6] 219년, 번성 전투 당시 미방과 함께 군자 공급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관우는 돌아온 후 둘을 처벌하겠다고 했다.[7] 손권은 그들을 꾀어 내어, 사인은 미방과 함께 동오에 항복하였다.[7]

여몽이 관우의 척후를 마비시키고 쳐들어 오자,[8] 사인은 공안에서 여몽을 저지하고 설득하러 온 우번도 만나지 않았으나, 우번의 협박성 편지를 받고 결국 항복했다.[9] 진수의 『삼국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 휘하의 장군으로서 형주의 안현성을 지키고 있었지만, 상관인 관우로부터 얕잡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관우가 번성 전투에 임했음에도 지원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돌아오면 처벌하겠다"는 질책을 받고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손권으로부터 내통 제안을 받자, 강릉성을 지키고 있던 미방과 함께 이에 응하여 그 군대를 맞이했다.

오서』에 따르면, 항복은 손권 휘하의 여몽의 군대가 닥쳐오고 나서의 일로, 처음에는 우번의 회견 요청도 거절했지만, 결국 우번의 설득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고 한다. 그 후, 여몽은 사인(士仁)을 연행하여 남군까지 쳐들어가, 사인의 모습을 본 그 지역의 태수인 미방 또한 항복했다.

함께 손권에게 항복한 미방은 오의 무관으로서 활동한 사적이 보이지만, 사인(士仁)이 손권에게 항복한 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양희의 계한보신찬은 촉한의 배신자인 미방, 사인(士仁), 곽포, 반준에 대해 "사령관에게 원한을 품고, 대덕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구할 공도 없이, 배반을 저질러 도망치고, 스스로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두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혹평했다[3]

3. 평가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사인은 '''부사인'''(傅士仁)으로 등장한다. 번성 전투에 앞서 관우미방과 부사인을 선봉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지만, 그날 밤 부주의하게 야영지에 불을 내는 실수를 저지른다. 관우는 이들의 과실을 벌하려 했으나, 비시가 탄원하여 용서하고 매질한 후 남군과 공안현을 각각 지키도록 재배치한다.

여몽의 형주 침공 때, 여몽은 부사인의 소꿉친구인 유반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고, 부사인은 이에 응한다. 이후 부사인은 여몽의 명으로 미방을 설득하여 항복시킨다. 미방은 보급품을 제때 전달하지 못하면 관우에게 처형당할 수 있다는 위협 때문에 투항을 결심한다.

이릉 전투 전에 부사인과 미방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엿듣고, 마충을 암살한 후 관우의 머리를 가지고 유비에게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흥(관우의 아들)에게 처형을 명한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73회부터 관우 휘하의 장수 "부사인"으로 등장한다. 사자 비시를 환대하는 연회에서 실화를 일으켜 관우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는다. 이후 벌의 일환으로 공안을 지켰지만, 소꿉친구인 우번의 설득을 받아 항복한다. 부사인은 미방에게도 항복을 강요한다(제75-76회). 이릉 전투에서는 손권 휘하의 무장으로서 종군한다. 그러나 유비군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가 미방·부사인을 죽이고 투항하자는 상담을 듣고, 그들 또한 두려움을 느껴 관우의 직접적인 원수인 마충을 살해한다. 그 수급을 가지고 유비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지만, 관우의 원수로서 용서받지 못하고 참살된다(제83회).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그 최후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의 아들 관흥에게 참수된다.

4. 1. 관우와의 갈등

삼국지연의에서 사인은 '''부사인'''(傅士仁)으로 등장한다. 번성 전투에 앞서 관우미방과 부사인을 선봉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지만, 그날 밤 부주의하게 야영지에 불을 내는 실수를 저지른다. 관우는 이들의 과실을 벌하려 했으나, 비시가 탄원하여 용서하고 매질한 후 남군과 공안현을 각각 지키도록 재배치한다.

여몽의 형주 침공 때, 여몽은 부사인의 소꿉친구인 유반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고, 부사인은 이에 응한다. 이후 부사인은 여몽의 명으로 미방을 설득하여 항복시킨다. 미방은 보급품을 제때 전달하지 못하면 관우에게 처형당할 수 있다는 위협 때문에 투항을 결심한다.

이릉 전투 전에 부사인과 미방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엿듣고, 마충을 암살한 후 관우의 머리를 가지고 유비에게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흥(관우의 아들)에게 처형을 명한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73회부터 관우 휘하의 장수 "부사인"으로 등장한다. 사자 비시를 환대하는 연회에서 실화를 일으켜 관우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는다. 이후 벌의 일환으로 공안을 지켰지만, 소꿉친구인 우번의 설득을 받아 항복한다. 부사인은 미방에게도 항복을 강요한다(제75-76회). 이릉 전투에서는 손권 휘하의 무장으로서 종군한다. 그러나 유비군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가 미방·부사인을 죽이고 투항하자는 상담을 듣고, 그들 또한 두려움을 느껴 관우의 직접적인 원수인 마충을 살해한다. 그 수급을 가지고 유비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지만, 관우의 원수로서 용서받지 못하고 참살된다(제83회).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그 최후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의 아들 관흥에게 참수된다.

4. 2. 오나라 투항과 최후

사인은 삼국지연의에서 '''부사인'''(傅士仁)으로 등장한다. 부사인은 친구 우번의 권유로 손권에게 투항하였으며, 미방을 설득하여 함께 투항하도록 했다. 221년, 오의 무장 마충의 부장으로 미방과 함께 참전했으나, 촉한군 앞에서 오나라 군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동료 미방과 함께 마충의 목을 베어 장남에게 항복했지만, 분노한 유비는 이들을 관흥에게 넘겼고, 관흥은 이들의 목을 베어 관우 영전에 바쳤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 휘하의 장수로 등장하며, 비시를 환대하는 연회에서 실화를 일으켜 관우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는다. 이후 공안을 지켰지만, 소꿉친구인 우번의 설득을 받아 항복하고, 미방에게도 항복을 강요한다.

이릉 전투에서는 손권 휘하의 무장으로서 종군했으나, 유비군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껴 마충을 살해하고 유비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려 했다. 그러나 관우의 원수로서 용서받지 못하고 참살된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아니라 관흥에게 참수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4. 3.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73회부터 관우 휘하의 장수 "부사인"으로 등장한다. 사자 비시를 환대하는 연회에서 실화를 일으켜 관우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는다. 이후 벌의 일환으로 공안을 지켰지만, 소꿉친구인 우번의 설득을 받아 항복한다. 부사인은 미방에게도 항복을 강요한다(제75-76회).

이릉 전투에서는 손권 휘하의 무장으로서 종군한다. 그러나 유비군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가 미방·부사인을 죽이고 투항하자는 상담을 듣고, 그들 또한 두려움을 느껴 관우의 직접적인 원수인 마충을 살해한다. 그 수급을 가지고 유비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지만, 관우의 원수로서 용서받지 못하고 참살된다(제83회).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그 최후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의 아들 관흥에게 참수된다.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2] 문서 陳寿の『三国志』では、関羽伝のみ読み仮名|'''傅士仁'''|ふしじん、その他の伝では'''士仁'''と表記する。『[[資治通鑑]]』や『三国志演義』は'''傅士仁'''表記を取る。[[清]]の[[李慈銘]]はこれを誤りと批判し、盧弼の『三国志集解』はまた、「後漢には二文字の姓が多いため、'''傅士仁'''は誤りとは言えない」と述べる。
[3] 문서 『三国志』蜀書 楊戯伝掲載『季漢輔臣賛』
[4] 문서 《삼국지》에서는 관우전을 제외하면 모두 사인으로 표기하지만 관우전에서는 '''부사인'''(傅士仁)으로 표기되며, 《자치통감》과 《삼국지연의》도 이를 답습했다.
[5] 문서 양희,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
[6] 문서 진수, 《계한보신찬주》(《삼국지》 권45 등장종양전에 실려 있다)
[7] 문서 진수, 《삼국지》 권36 관장마황조전
[8] 문서 진수, 《삼국지》 권54 주유노숙여몽전
[9] 문서 장발, 《오록》(《삼국지》 권54 주유노숙여몽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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