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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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조가는 칸인류의 적류인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차남 산조 사네유키를 선조로 하는 일본의 씨족이다. 섭가에 버금가는 청화가로 피리와 향도, 의복 조달을 가업으로 삼았으며, 메이지 유신까지 39명의 공경을 배출했다. 특히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메이지 유신의 공신인 산조 사네츠무와 산조 사네토미 부자를 배출했으며, 산조 사네토미는 태정대신을 역임했다. 산조가는 청렴결백을 중시하는 가풍을 유지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공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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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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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 산조 가 (전법륜 산조 가) |
가몬 | 괭이밥에 화초 (산조 화초) |
본성 | 후지와라 북가간인류 적류 |
가조 | 산조 사네유키 |
종별 | 공가(청화가) 화족(공작) |
출신지 | 야마시로국교토 |
근거지 | 야마시로국교토 → 도쿄부도쿄시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산조 사네후사 산조 킨요리 산조 사네쓰무 산조 사네토미 |
지류 | |
지류 | 사가 가 (대신가・후작) 니시산조 가(대신가・백작) 시게노이가 (우림가・백작) 아네노코지가 (우림가・자작) 하나조노가 (우림가・자작) 시카조노가 (남작) 히가시산조가 (남작) 후지와라 성 모리 씨(무가・자작) |
2. 역사
산조 가문은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명문가이다. 시라카와 천황과 도바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관가가 약화된 틈을 타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화가였던 산조 가문은 섭가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으며, 피리, 향도, 의복 조달을 가업으로 삼았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39명의 공경을 배출했으며, 그중 태정대신 5명, 좌대신 5명, 우대신 8명, 내대신 7명을 배출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당주 산조 킨요리가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고나라 천황 즉위 비용을 요청하러 갔다가 스에 하루카타의 반란에 휘말려 사망하기도 했다. 이후 산조니시가에서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었다.
1591년 저택을 나시키쵸로 옮기면서 산조 가문의 가몬인 "이화문"과 산조 사네토미의 변명인 "나시키 세이사이"가 유래했다. 에도 시대에는 가록이 269석에서 469석으로 증가했다.
2. 1. 기원과 헤이안 시대
칸인류는 후지와라노노 모로스케의 10남으로, 칸인태정대신으로 불렸던 후지와라노 킨스에를 시조로 삼고, 시라카와 천황 및 토바 천황의 외척 지위를 독점하면서 섭관가의 약화를 틈타 조정에 중점을 두었다.[2] 칸인류의 적류인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차남 사네유키를 선조로 하는 것이 산조가이다. 사네유키 및 그의 아들 킨노리도 토바 상황의 중신으로서 권세를 떨쳤으며, 특히 사네유키는 태정대신에 올랐다.[2] 사네유키는 하치조(八条)라고도 칭했지만, 아들인 킨노리, 손자인 사네후사가 산조 타카쿠라에 저택을 지은 것으로부터 산조(三条)라는 가호가 정해졌다. 이 저택에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국모인 타이켄몬인도 살고 있었으며, 고시라카와 천황은 이곳에서 자랐다.2대 킨노리는 토바 상황의 후견역으로서 권세를 떨쳤다. 3대 사네후사는 『구매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공사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사네후사의 후계는 장남인 킨후사가 이어받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산죠를 칭했지만, 3남 킨우지도 산죠를 칭했기 때문에 본가의 킨후사류를 속칭 전법륜(転法輪), 킨우지류를 오기마치산죠 또는 사가(嵯峨)로 불러 구별하기도 했다. 사네후사는 의주 공경이나 고시라카와인 벳토 등을 역임한 후, 켄큐 7년(1196년)에 병으로 출가했지만, 그 후에도 세상 사람들에게 공사의 스승으로 칭송받아 "대은교주 어방"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한 그의 여동생 소시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뇨고가 되었다. 그 이후 유직고실에 통달한 가문이라는 가풍이 자손에게도 계승되게 되었다.[3]
2. 2.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칸인류의 적류인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차남 사네유키를 선조로 하는 것이 산조가이다. 사네유키는 하치죠(八条)라고도 칭했지만, 아들인 킨노리, 손자인 사네후사가 산조 타카쿠라에 저택을 지은 것으로부터, 산조(三条)라는 가호가 정해졌다. 이 저택에는 타이켄몬인 (고시라카와 천황의 국모)도 살고 있었으며, 고시라카와 천황은 이곳에서 자랐다.2대 킨노리는 토바 상황의 후견역으로서 권세를 떨쳤다. 3대 사네후사는 『우매기』의 저자로 알려져 공사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사네후사의 후계는 장남인 킨후사가 이어받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산조를 칭했지만, 3남 킨우지도 산조를 칭했기 때문에, 본가의 킨후사류를 속칭 전법륜(転法輪), 킨우지류를 오기마치산죠 또는 사가(嵯峨)로 불러 구별하기도 했다.
공가로서의 가격은 섭가에 버금가는 청화가로 대대로 피리와 향도(香道), 의복 조달을 가업으로 삼았다. 메이지 유신 때까지 산조가가 배출한 공경의 수는 39명이다. 그 중 태정대신까지 오른 사람은 5명, 좌대신 5명, 우대신 8명, 내대신 7명이다.
전국시대의 당주 킨요리는 스오·나가토 2국의 센고쿠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고나라 천황의 즉위 비용 염출을 부탁하러 야마구치로 갔지만, 그곳에서 오우치 가문의 중신 스에 하루카타의 반란에 휘말려 칼로 자살했다. 킨요리의 뒤를 이은 양자 사네노리도 요절했지만, 분가인 산죠니시가에서 사네츠나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을 이었다.
1591년(덴쇼 19년)에 고쇼 동쪽, 나시키쵸로 저택을 옮겼다. 산조가 가문의 괭이밥에 화초(片喰に唐花)는 "이화문(梨花紋)"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나시키쵸에서 유래한다. 또한, 산죠 사네토미가 시치쿄오치 때 사용한 변명(変名) "나시키 세이사이(梨木誠斎)"도 여기서 유래한다.
에도 시대의 가록은 269석 정도였고, 후에 469석 정도로 증가했다.
2. 3. 메이지 유신과 산조 사네토미
메이지 유신 때까지 산조가가 배출한 공경의 수는 39명이다. 그 중, 태정대신까지 오른 사람은 5명, 좌대신 5명, 우대신 8명, 내대신 7명이다.[1]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까지는 메이지 유신의 공신 산조 사네쓰무와 산조 사네토미 부자를 배출했다. 특히, 산조 사네토미는 내각총리대신이 생길 때까지의 수상에 해당하는 우대신과 태정대신(사상 최후) 직을 맡은 것으로 저명하다.[1]
1869년(메이지 원년) 산조 사네토미에게 유신의 공으로 5천 석의 상전록이 하사되었다. 공가에서는 이와쿠라 토모미와 대등한 최고 수령액이었다. 1876년(메이지 9년) 가록과 상전록이 대체된 금록공채 금액은 6만 5천 엔으로, 구 공가화족 중에서는 가장 고액이었지만, 구 공가화족의 공채액은 구 다이묘화족과는 큰 격차가 있었다. (구 다이묘화족 1위인 시마즈가는 132만 2845엔)[1]
화족령 시행에 의해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산조 사네토미는 최상위 작위인 공작에 서임되었다. 구 세이카 가 당주는 원칙적으로 후작이었지만, 산조가는 에도 막부 말기 유신에서의 공적으로 처음부터 공작에 서임되었다.[1] (그 후 1911년(메이지 44년) 도쿠다이지가가 도쿠다이지 사네쓰네의 공적으로, 1920년(다이쇼 9년) 사이온지가가 사이온지 긴모치의 공적으로 각각 공작에 올랐다.)
산조 사네토미가 위독할 때, 메이지 천황이 직접 병문안을 왔으며, 천황으로부터 직접 정1위에 올랐다. 칙어에는 천황이 어렸을 때부터 보필을 받아 아버지 사네쓰무와 함께 국가에 이바지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정1위의 생전 수여는 미나모토노 마사코가 1146년(큐안 2년)에 서위한 이후 745년 만이며, 남성으로는 후지와라노 나가테가 770년(호키 원년)에 서위한 이후 1121년 만이다. 산조는 일어나 칙서를 보려고 했지만, 이미 몸을 움직이기에는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사쿠라이 요시타카의 낭독을 듣고 감격했다. 사네토미가 사망하면서 천황은 3일간 조회를 일시 정지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1]
1885년(메이지 18년) 칙허에 의해 산조 사네무츠를 제신으로 모시는 나시노키 신사가 건설되었고, 1915년(다이쇼 4년) 사네토미도 제신으로 모셔졌다.[1]
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69년(메이지 원년) 산조 사네토미에게 유신의 공으로 5천 석의 상전록이 하사되었다. 이는 공가에서는 이와쿠라 토모미와 대등한 최고 수준이었다. 1876년 (메이지 9년) 가록과 상전록이 금록공채로 대체되었는데, 산조 가는 6.5만엔으로 구 공가화족 중 가장 액수가 컸다. 그러나 구 다이묘화족과는 큰 격차가 있었는데, 시마즈 가는 1322845엔이었다.1884년 (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에 따라 산조 사네토미는 최상위 작위인 공작에 봉해졌다. 구 청화가 당주는 원칙적으로 후작이었으나, 산조 가는 에도 막부 말기 유신에서 세운 공적을 인정받아 처음부터 공작이 되었다. 이후 1911년 (메이지 44년) 도쿠다이지가가 도쿠다이지 사네츠네의 공적으로, 1920년 (다이쇼 9년) 사이온지가가 사이온지 킨모치의 공적으로 각각 공작에 올랐다.
산조 사네토미가 위독해지자 메이지 천황이 직접 병문안을 왔고, 천황은 그에게 정1위를 수여했다. 칙어에는 천황이 어릴 때부터 보필을 받고 아버지 사네츠무와 함께 국가에 이바지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정1위의 생전 수여는 미나모토노 마사코가 1146년 (큐안 2년)에 받은 이후 745년 만이며, 남성으로는 후지와라노 나가테가 770년 (호키 원년)에 받은 이후 1121년 만이었다. 산조는 일어나 칙서를 받으려 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사쿠라이 요시타카의 낭독을 듣고 감격했다. 산조 사네토미가 사망하자 천황은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산조 공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시나가와구 카미오사키에 있었다.
1885년 (메이지 18년) 칙허에 의해 산죠 사네무츠를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나시노키 신사가 건설되었고, 1915년 (다이쇼 4년) 산조 사네토미도 제신으로 모셔졌다.
3. 가풍과 가훈
산조 가는 청렴결백을 의미하는 '청백(清白)' 두 글자를 전통 정신이자 가풍으로 삼았다. 산조 사네하루는 "산조 가의 가정은 청검하고 간소하여 거의 중류 무사의 가정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녹봉은 469석 5두였습니다"라고 에도 막부 말기 산조 가의 생활 수준에 대해 언급했다.[1] 사네하루에 따르면 에도 막부 말기의 교카에 '세 푼도 안 되는 나시키마치의 덴포센(天保銭) 충의의 일은 백 번도 더 알고 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산조 사네츠무 가문이 청빈하면서도 충의의 성심이 풍부했던 것을 격찬한 것이다. 당시 산조 가는 빈곤의 극치에 달해 저택은 여기저기 비가 새는 곳이 있었고, 그 수리 비용도 마련하지 못해 비가 오면 저택 안에 물웅덩이가 생겨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녔다. 산조 가는 결코 뇌물을 받지 않고 '청백'의 가훈을 관철했기 때문이다.[1]
4. 분가
메이지 11년(1878년)에 간행된 『화족류별록(華族類別禄)』에 따르면, 산조가에서 분가했거나 산조가의 분가에서 다시 분가한 가문은 다음과 같다.
구 공가(公家) 14가문 | 오기마치산조가에서 분가한 옛 다이묘 토다가 6가문 |
---|---|
위 가문들을 합쳐 총 20가문이 산조가의 분가로 기록되어 있다. 메이지 19년(1886년)에는 히가시산조가가 산조가에서 분가하여 화족 가문이 되었지만, 『화족류별록』이 메이지 11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이 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사이온지가와 도쿠다이지가는 간인류에 속하므로, 이 두 가문과 그 분가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산조가의 분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족류별록』에서는 사이온지가와 도쿠다이지가를 산조가와는 다른 계통으로 취급하고 있다. (산조가는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차남 사네유키의 후손, 사이온지가는 킨자네의 4남 미치스에의 후손, 도쿠다이지가는 킨자네의 5남 사네요시의 후손이다.)
5. 역대 당주
대 | 초상화 | 이름 | 친족 관계 | 관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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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산죠 사네유키 |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차남 | 종1위 | 태정대신[1] | |
2 | ![]() | 산죠 킨노리 | 선대의 아들 | 정2위 | 내대신[1] |
3 | -- | 산죠 사네후사 | 선대의 3남 | 정2위 | 좌대신[1] |
4 | -- | 산죠 킨후사 | 선대의 3남 | 종1위 | 태정대신[1] |
5 | -- | 산죠 사네치카 | 선대의 장남 | 종1위 | 내대신[1] |
6 | -- | 산조 킨치카 | 선대의 아들 | 정2위 | 내대신[1] |
7 | -- | 산죠 사네시게 | 선대의 아들 | 종1위 | 태정대신[1] |
8 | -- | 산죠 킨시게 | 선대의 아들 | 종1위 | 내대신[1] |
9 | -- | 산죠 사네타다 | 선대의 양자 (선대의 동생) | 종1위 | 내대신[1] |
10 | -- | 산죠 킨타다 | 선대의 아들 | 종1위 | 내대신[1] |
11 | -- | 산죠 사네후유 | 선대의 아들 | 종1위 | 태정대신[1] |
12 | -- | 산죠 킨후유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우대신[1] |
13 | -- | 산죠 사네카즈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좌대신[1] |
14 | -- | 산죠 킨아츠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우대신[1] |
15 | -- | 산죠 사네요시 | 선대의 아들 | 종1위 | 태정대신[1] |
16 | -- | 산죠 킨요리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좌대신[1] 다이네이지의 변에서 사망 |
17 | -- | 산죠 사네노리 | 선대의 양자 | 종4위상 | 좌근위중장 |
18 | -- | 산죠 사네츠나 | 선선대의 양자 | 정3위 | 곤츄나곤 증우대신 |
19 | -- | 산죠 킨히로 | 선대의 양자 | 정2위 | 곤다이나곤 |
20 | -- | 산죠 사네히데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좌대신[1] |
21 | -- | 산죠 킨토미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우대신[1] |
22 | -- | 산죠 사네하루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좌대신[1] |
23 | -- | 산죠 킨카네 | 선대의 아들 | 종3위 | 좌근위중장 |
24 | -- | 산죠 킨아츠 | 선대의 동생 | 종2위 | 곤다이나곤 |
25 | -- | 산죠 사네아키 | 선대의 양자 | 종1위 | 우대신[1] |
26 | -- | 산죠 스에하루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우대신[1] |
27 | -- | 산죠 사네오키 | 선대의 아들 | 종1위 | 우대신[1] |
28 | -- | 산죠 킨오사 | 선대의 아들 | 종1위 | 내대신[1] |
29 | ![]() | 산죠 사네츠무 | 선대의 아들 | 종1위증정1위 | 내대신[1] 증우대신 |
30 | -- | 산죠 킨무츠 | 선대의 차남 | 종2위 | 곤츄나곤 |
31 | ![]() | 산죠 사네토미 | 선대의 동생 | 정1위 | 우대신[1] 태정대신[1] 임시 내각총리대신[1] 공작 |
32 | ![]() | 산죠 킨요시 | 선대의 차남 | 정3위 | 귀족원 의원[1]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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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 | 산조 킨타카 | 선대의 아들 |
참조
[1]
웹사이트
三條公爵家本(三條文庫)
https://www.lib.u-to[...]
2023-05-11
[2]
Kotobank
三条家
2022-11-08
[3]
Kotobank
三条実房
2022-11-08
[4]
Internet Archive
日本随筆大成 第三期 第十三巻 P84
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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