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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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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화사는 642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으며, 후삼국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가 이루어진 곳으로, 왕건은 삼국 통일 후 절 이름을 삼화사로 바꾸었다. 조선 개국 이후 수륙재 도량으로 지정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과 화재, 그리고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인한 소실을 겪었다.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과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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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삼화사
이름삼화사
로마자 표기Samhwasa
한자 표기三和寺
종파대한불교조계종
위치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상세 정보
창건자미상
본존미상
추가 정보
웹사이트미상

2. 역사

삼화사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년) 자장율사가 처음 세웠을 때는 흑련대(또는 흥련대)라 불렸다. 이후 864년 범일국사가 중건하며 삼공암이라 개칭하고, 사찰의 성격도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다.

삼공암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기원했던 원찰(願刹)로 알려져 있다. 왕건은 통일 대업을 이룬 후, 고려, 후백제, 신라 삼국 간의 오랜 갈등을 끝내고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로 바꾸었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그의 추종 세력을 삼척 앞바다에 수장시킨 후, 그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삼화사를 수륙재 도량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후 삼화사는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1747년에는 홍수와 산사태로 무너져 터를 옮겨 지었으나, 1820년에 다시 화재를 당해 1824년에 중건되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 말기 의병들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불을 질러 대웅전과 선방 등 200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삼화사는 고려이승휴가 민족의식을 고취한 역사서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과도 관련이 있다. 이승휴는 삼화사 인근에 용안당을 짓고 머물며 저술 활동을 했고, 후에 이 용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여 간장암이라는 암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2. 1. 창건과 중건

삼화사는 642년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 이름은 흥련대였다. 이후 864년 범일국사가 절을 크게 넓히면서 삼공암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의 성격도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환되었다. 삼공암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기원하며 기도했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왕건은 통일을 이룬 후, 고려, 후백제, 신라 세 나라가 갈등을 멈추고 화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로 바꾸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그의 충신들을 삼척 앞바다에 수장시키는 비극적인 사건 이후,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시간이 흘러 1747년, 삼화사는 홍수와 산사태 피해를 입어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820년에 큰 화재로 소실되었고, 4년 뒤인 1824년에 다시 지어졌다. 1907년에는 일제 강점기 의병 일부가 머물렀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불을 질러 대웅전과 선방을 포함한 약 200칸 규모의 건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한편, 삼화사에는 고려 말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가 전해진다. 이 책은 당시 민족의식을 고취한 중요한 역사서로, 이승휴가 10년간 경전 연구에 몰두한 후 삼화사에 기증했으며, 이후 간장암으로 바뀌었다.

2. 2. 고려시대

864년 범일국사가 중건하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불리게 된 이곳은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이었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삼국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에는 고려, 후백제, 신라 삼국이 가졌던 오랜 증오와 갈등을 끝내고 화합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로 바꾸었다.

고려 말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한 역사서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가 삼화사 인근에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제왕운기>를 저술했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탐독한 후 자신이 살던 용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였다. 이 용안당은 이후 간장암(看藏庵)이라는 암자가 되었다.

2. 3. 조선시대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공양왕과 그의 마지막 충신들을 삼척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이후 조선 조정은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시간이 흘러 1747년, 삼화사는 큰 홍수와 산사태로 인해 피해를 입어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후 1820년에는 화재로 절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4년 뒤인 1824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 일부 의병들이 절에 머물고 있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삼화사에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인해 대웅전과 선방을 포함하여 약 200칸에 달하는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2. 4. 근현대

1907년에는 일부 의병들이 머물고 있다는 핑계로 일본군에 의해 방화되어, 대웅전과 선방을 포함한 약 200칸 규모의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2. 5. 이승휴와 제왕운기

고려 말의 문인 이승휴는 삼화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민족의식을 고취한 역사서인 제왕운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승휴는 삼화사 근처에 '용안당'이라는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이후 약 10년 동안 불경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자신이 살던 용안당을 삼화사에 기증하였다. 이 용안당은 후에 '간장암'이라는 암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3. 문화재

삼화사에는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국가 지정 및 시도 지정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과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이 있다.

특히 철조노사나불좌상은 원래 약사불로 알려졌으나, 불상 뒷면에서 발견된 이두 문자로 된 명문을 통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임이 확인되었다. 이 명문은 고대 한국어 표기 방식인 이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3. 1. 삼층석탑 (보물 제1277호)

삼화사 삼층석탑


삼화사 경내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이다. 높이는 4.95m이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를 보여주어 안정감이 느껴지는 탑이다.

3. 2. 철조노사나불좌상 (보물 제1292호)

삼화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불로,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약사불로 알려졌으나, 불상 뒷면에서 조성 당시 새겨진 명문 161자가 발견되고 판독되면서 9세기 중엽(880년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총 10행 161자의 양각으로 새겨진 명문을 판독한 결과, 880년경 시주자가 부모를 위해 결언(決言)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의 가르침에 따라 이 불상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명문은 한자를 우리말 어순에 따라 배열한 이두 문자로 작성되어 있어, 10세기 이후까지 사용된 이두 문자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은 1998년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되었다.

3. 3. 기타 문화재

삼화사에는 여러 문화재가 있다. 대표적으로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과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이 있으며, 이 외에도 운암당 상준대사 부도와 원곡당 대선사 부도 및 비석 등이 있다.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를 보여주는 고려 시대의 탑이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은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철불이다. 처음에는 약사불로 알려졌으나, 불상 뒷면에서 조성 당시 새겨진 명문 161자가 발견되어 판독한 결과,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총 10행 161자의 양각 명문은 880년경 시주자가 부모를 위해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의 가르침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 명문은 한자를 우리말 어순에 따라 배열한 이두로 작성되어 있어 주목받는다. 10세기 이후까지 사용된 이두문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 불상은 1998년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 삼화사가 보유한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4. 템플스테이

삼화사 템플스테이


삼화사에서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1] 자세한 프로그램 정보는 [http://templestay.com/common/intro/intro_program_list.asp?t_id=534-7661 삼화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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