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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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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이반 왕조는 칭기즈 칸의 장남 조치의 다섯 번째 아들 시반의 후손들이 세운 여러 왕조를 통칭하며, 특히 부하라 칸국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 이후의 정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15세기 초 조치 울루스 동부에서 아불-하이르 칸이 우즈베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손자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은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샤이바니 제국을 건설했다. 샤이반 왕조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남부를 지배하며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사파비 왕조의 침공과 내부 분열로 쇠퇴하여 1599년 남계가 단절되었다. 샤이반 왕조는 부하라를 문화적, 건축적 수도로 삼아 칼란 모스크, 미르 아랍 마드라사, 압둘라 2세 마드라사 등 다양한 건축물을 건설했으며, 은화를 사용하며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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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반 왕조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이름샤이바니 왕조
우즈베크어Шайбонийлар (Shayboniylar), 아랍 문자: شەيبانىيلەر
페르시아어شیبانیان (Shaybânyân), 키릴 문자: Шайбониён
카자흐어Шайбанилар (Şaibanilar), 아랍 문자: شايبانيلار
기원킵차크 칸국
모계보르지긴 가문
국가우즈베크 칸국
시비르 칸국
부하라 칸국
지역남러시아
중앙아시아
건국1428년경
건국자아불 하이르 칸
해체1599년경
마지막 통치자피르 무함마드 칸
전통수니 이슬람
칭호
문장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의 격자형 벽 유목민 천막.
역사
성립1428년
분열1468년
통일1500년
재분열1540년
재통일1552년
멸망1599년
정치
정치 체제칸국
수도사마르칸트
부하라
주요 지도자아불 하이르 칸 (1428년 – 1468년)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 (1500년 – 1510년)
쿠추쿤지 칸 (1510년 – 1531년)
압둘라 2세 (1583년 – 1598년)
피르 무함마드 2세 (1598년 – 1599년)
언어
공용어튀르크어
페르시아어

2. 명칭

샤이반 왕조라는 명칭은 칭기스 칸의 장남인 조치의 다섯째 아들, 시반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때문에 '샤이반 왕조'라고 불리는 왕조는 하나가 아니다. 부하라 칸국을 비롯하여 히바 칸국, 시비르 칸국 등이 샤이반 왕조에 속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부하라 칸국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 이후의 정권을 특정하여 샤이반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3. 역사

무함마드 샤이바니. 샤이반 왕조의 창시자.


샤이반 왕조는 15세기 조치 울루스 동부에서 활동한 우즈베크 유목 집단을 기반으로 한다. 칭기즈 칸의 손자 시반의 후예인 아불-하이르 칸(1428년~1468년 통치)이 분산된 우즈베크 부족을 통합하며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그의 사후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1496년 경, 아불-하이르 칸의 손자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1500년~1510년 통치)은 티무르 왕조의 쇠퇴를 틈타 우즈베크 세력을 재결집했다. 그는 1500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마 와라 안나흐르의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헤라트, 부하라, 발흐 등을 정복하여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샤이반 왕조를 건국했다. 그러나 1510년 사파비 왕조이스마일 1세와의 메르브 전투에서 패사하며 그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함마드 샤이바니 사후, 그의 친족들이 칸위를 계승하며 부하라 칸국(1505년~1598년)과 호라즘(히바) 칸국(1511년~1695년)을 통치했다. 이 시기 티무르 왕조의 후예 바부르와의 경쟁 끝에 그를 인도로 몰아내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왕조는 내부 분열을 겪기도 했으나 바라크 칸에 의해 1552년 재통일되었다.

압둘라 2세(1583년~1598년 통치) 시대에 샤이반 왕조는 최성기를 맞았다. 그는 수도를 부하라로 옮기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으며, 호라산과 호라즘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1598년 압둘라 2세 사후 혼란이 이어졌고, 1599년 피르 무함마드 2세의 사망으로 샤이반 가문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모계 혈통을 이은 바키 무함마드가 칸위에 오르며 자니 왕조(아스트라한 왕조)가 시작되었다. 한편, 샤이반 가문은 1563년부터 시비르 칸국을 통치하기도 했으나, 1598년 러시아에 의해 멸망했다.

3. 1. 건국 이전



15세기 전반, 조치 울루스 동부(구 오르다 울루스)에서는 '''우즈베크'''라고 불리는 유목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을 이끈 인물은 칭기즈 칸의 장남 조치의 다섯째 아들 시반의 후예인 아불-하이르 칸(1428년~1468년 통치)이었다. 그는 몽골 시대부터 이름이 알려진 불쿠트부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여, 시반 가문에 적대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사라이 정권(조치 울루스)에서 독립했다.

아불-하이르 칸 치하에서 샤이바니 왕조는 분산된 우즈베크 부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튜멘과 투라 강 주변 지역에서 시작하여 시르다리야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430년/1431년에는 티무르 왕조의 영토였던 호라즘으로 원정했으며, 1446년에는 킵차크 초원 동부를 통일했다. 같은 해, 아불-하이르 칸은 시르 강 중류 유역의 오아시스 도시인 수그나크, 사우란, 우즈겐드를 점령하여 정치적·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토카 테무르 가문의 케레이와 자니베크 칸이 아불-하이르 칸에게 반발하여 별도의 집단을 형성하고 모굴리스탄 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이 카자흐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아불-하이르 칸은 1451년 티무르 왕조의 아부 사이드가 사마르칸트를 탈환하는 것을 돕는 등, 티무르 왕조의 원군 요청에 종종 응하기도 했다.

1468년 아불-하이르 칸이 사망하자 우즈베크의 울루스는 분열 상태에 빠졌고, 그 대부분은 케레이 칸과 자니베크 칸이 지배하는 카자흐 칸국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1496년/1497년, 아불-하이르 칸의 손자인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1500년~1510년 통치)이 티무르 왕조의 쇠퇴를 틈타 시르 강 중류 유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분열된 우즈베크 집단을 다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샤이반 왕조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그는 이후 사마르칸트, 헤라트, 발흐, 부하라 등을 정복하여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단명한 샤이바니 제국을 세웠다.

3. 2. 건국과 발전



15세기 전반, 조치 울루스 동부(구 오르다 울루스)에서는 '우즈베크'라 불리는 유목 집단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이끈 인물은 조치의 다섯째 아들 시반의 후예인 아불-하이르 칸(재위: 1428년 - 1468년)이었다. 그는 몽골 시대부터 알려진 불쿠트부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여, 시반 가문에 적대적인 세력을 몰아내고 사라이 정권(조치 울루스)으로부터 독립했다. 1430년 혹은 1431년에는 티무르 왕조 영토인 호라즘으로 원정했으며, 1446년에는 킵차크 초원 동부를 통일했다. 같은 해, 아불-하이르 칸은 시르 강 중류 유역의 오아시스 도시인 수그나크, 사우란, 우즈겐드를 점령하여 정치적,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토카 테무르 가문의 케레이와 자니베크 칸이 아불-하이르 칸에게 반기를 들고 별도의 집단을 형성하여 모굴리스탄 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카자흐라고 부른다. 1451년, 아불-하이르 칸은 티무르 왕조의 아부 사이드의 난에 협력하여 사마르칸트 탈환을 도왔으며, 이후에도 종종 티무르 왕조의 원군 요청에 응했다.

1468년 아불-하이르 칸이 사망하자 우즈베크의 울루스는 분열 상태에 빠졌고, 그 대부분은 케레이 칸과 자니베크 칸이 지배하는 카자흐 칸국으로 흡수되었다. 1496년 혹은 1497년, 아불-하이르 칸의 손자인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티무르 왕조의 쇠퇴를 틈타 시르 강 중류 유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우즈베크 집단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1500년,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마 와라 안나흐르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후 페르가나 분지, 타슈켄트, 호라즘 지방 등을 차례로 정복했으며, 1507년에는 헤라트를 점령하여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호라산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는 발흐부하라까지 정복하며 단명한 샤이바니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카자흐 원정과 하자라족 원정에 실패하면서 지지 기반이 약화되었고, 사파비 왕조샤 이스마일(재위: 1501년 - 1524년)의 침공을 받아 메르브 교외에서 전사했다(1510년).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 사후, 그의 숙부, 사촌, 형제들이 차례로 칸위를 계승했다. 샤이바니 가문의 후손들은 1505년부터 1598년까지 부하라 칸국을, 1511년부터 1695년까지 호라즘(히바) 칸국을 통치했다.

1511년, 티무르 왕조의 잔존 세력인 바부르는 샤 이스마일의 원조를 받아 사마르칸트를 일시적으로 탈환했지만, 이듬해 샤이바니 왕조의 우즈베크 군에게 패배했다. 바부르는 결국 인도로 피신하여 무굴 제국을 건국했다(1526년). 바부르를 몰아낸 샤이바니 왕조는 다시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았으나, 바부르와의 전투에서 활약한 우바이둘라가 칸위에 오르면서 그의 영지였던 부하라가 점차 중심지가 되었다. 우바이둘라 사후 압둘라 1세가 계승했지만, 그의 사후에는 압둘라 가문의 사마르칸트 정권과 우바이둘라 가문의 부하라 정권으로 나뉘어 대립하며 국가가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1552년 바라크 칸(나우루즈 아흐마드 칸)에 의해 통일되면서 종식되었다.

바라크 칸 사후에는 압둘라 2세가 실권을 잡았다. 그는 일족의 최고 연장자인 숙부 피르 무함마드를 칸위에 앉혔고, 1561년 피르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아버지 이스칸다르를 칸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배후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1557년에는 수도를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옮겨 부하라 칸국 시대를 열었다. 1583년, 이스칸다르가 사망하자 압둘라 2세는 마침내 칸위에 올라 샤이바니 왕조의 중앙 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1584년 아무다리야 강 상류의 바다흐샨을 점령하고, 1588년에는 헤라트와 호라산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1593년 혹은 1594년에는 히바 칸국령의 호라즘 지방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 남부 대부분을 판도에 넣었다. 이로써 샤이바니 왕조의 최성기를 이룩한 압둘라 2세였지만, 1598년에 사망했다.

압둘라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압둘 무민은 인망이 없어 즉위 6개월 만에 암살당했고, 칸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북쪽의 카자흐 칸국이 침공해 왔으나, 새로운 칸 피르 무함마드 2세는 이를 격퇴하고 샤이바니 왕조를 지켜냈다. 그러나 1599년, 피르 무함마드 2세마저 사망하면서 샤이바니 왕조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에 카자흐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타가이 가문의 자니 무함마드를 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자니 무함마드 본인이 "샤이바니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칸위에 올라야 한다"며 거절했다. 결국 자니 무함마드의 아들이자 압둘라 2세의 조카(모계)인 바키 무함마드가 칸위에 올랐다. 이후의 왕조는 자니 무함마드의 이름을 따 자니 왕조, 또는 그들의 출신지인 아스트라한의 이름을 따 아스트라한 왕조라고 부른다.

한편, 샤이바니 가문이 통치한 또 다른 국가로는 1563년 왕위를 찬탈한 시비르 칸국이 있었다. 마지막 칸인 쿠춤은 1598년 러시아인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는 부하라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차르에 의해 모스크바로 끌려가 결국 시비르스키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3. 3. 최전성기와 쇠퇴

1511년, 티무르 왕조의 잔존 세력인 바부르사파비 왕조샤 이스마일의 도움을 받아 사마르칸트를 되찾았지만, 이듬해 샤이반 왕조의 우즈베크 군대에게 패배했다. 결국 바부르는 인도로 피신하여 1526년 무굴 제국을 세우게 된다. 바부르를 몰아낸 샤이반 왕조는 다시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바부르와의 전투에서 활약한 우바이둘라 칸이 칸의 자리에 오르자, 그의 영지였던 부하라가 점차 왕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우바이둘라 칸 사후에는 압둘라 1세가 뒤를 이었으나, 그가 죽자 압둘라 가문의 사마르칸트 정권과 우바이둘라 가문의 부하라 정권으로 나뉘어 대립하며 국가가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1552년 바라크 칸이 통일을 이루면서 끝났다.

바라크 칸이 사망한 후에는 압둘라 2세가 실권을 잡았다. 그는 일족 중 가장 연장자인 숙부 피르 무함마드 1세를 칸으로 내세웠고, 1561년 피르 무함마드 1세가 사망하자 아버지 이스칸다르 칸을 칸으로 옹립한 뒤 배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1557년에는 수도를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옮기면서 부하라 칸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1583년, 아버지 이스칸다르 칸이 사망하자 압둘라 2세는 마침내 직접 칸의 자리에 올라 샤이반 왕조의 중앙 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1584년 아무다리야 강 상류의 바다흐샨 지역을 점령했고, 1588년에는 헤라트호라산 지방을 장악했다. 이어 1593년1594년에 걸쳐 히바 칸국의 영토였던 호라즘 지방까지 정복하며 중앙아시아 남부 대부분을 판도에 넣었다. 이 시기 샤이반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598년 최전성기를 이끈 압둘라 2세가 사망하면서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압둘 무민은 인망을 얻지 못하고 즉위 6개월 만에 암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틈타 북쪽의 카자흐 칸국이 침공해왔으나, 새로 칸이 된 피르 무함마드 2세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하지만 1599년 피르 무함마드 2세마저 사망하면서 샤이반 왕조의 남성 직계 후손이 끊어지게 되었다.

샤이반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자, 카자흐 칸국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타가이 가문의 자니 무함마드를 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자니 무함마드 본인이 "샤이반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칸이 되어야 한다"며 사양했다. 결국 그의 아들이자 압둘라 2세의 조카(압둘라 2세의 여동생의 아들로, 모계로 샤이반 가문의 혈통을 이음)인 바키 무함마드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샤이반 왕조는 막을 내리고, 자니 무함마드 가문이 세운 자니 왕조(출신지를 따 아스트라한 왕조라고도 불림)가 시작되었다.

3. 4. 분열



1468년 아불-하이르 칸이 사망하자 우즈베크의 울루스는 일시적으로 분열 상태에 빠졌고, 그 상당수는 케레이 칸과 자니베크 칸이 이끄는 카자흐 칸국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아불-하이르 칸의 손자인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우즈베크 집단을 재통합하여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세웠으나, 그의 죽음은 다시 왕조의 분열로 이어졌다.

1510년 메르브 전투에서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사파비 왕조이스마일 1세에게 패배하고 사망하자, 샤이반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 1511년, 티무르 왕조의 후예인 바부르가 샤 이스마일의 지원을 받아 사마르칸트를 일시적으로 탈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샤이반 왕조의 우즈베크 군대가 바부르를 격파하면서 마 와라 안나흐르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패배한 바부르는 결국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도에서 무굴 제국을 건국했다(1526년).

바부르를 몰아낸 후 샤이반 왕조는 다시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았지만, 칸위 계승 과정에서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대 바부르 전투에서 활약했던 우바이둘라 칸이 칸위에 오르자, 그의 본거지였던 부하라가 점차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우바이둘라 칸 사후 압둘라 1세가 뒤를 이었으나, 그의 사후에는 압둘라 가문의 사마르칸트 정권과 우바이둘라 가문의 부하라 정권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며 국가가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열 상태는 1552년 바라크 칸(나우루즈 아흐마드 칸)이 두 정권을 통합하면서 종식되었다. 이후 압둘라 2세의 통치 아래 샤이반 왕조는 중앙 집권화를 이루고 최성기를 맞이했지만, 그의 죽음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했다.

1598년 압둘라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압둘 무민이 칸위를 계승했으나, 인망을 얻지 못하고 즉위 6개월 만에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샤이반 왕조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이 틈을 타 북쪽의 카자흐 칸국이 침공해왔다. 새로 칸위에 오른 피르 무함마드 2세가 카자흐 칸국의 침공을 격퇴하며 위기를 넘겼지만, 1599년 그마저 사망하면서 샤이반 왕조의 남성 직계 후손이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이는 결국 샤이반 왕조의 종말과 새로운 자니 왕조(아스트라한 왕조)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4. 문화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페르시아 문학 작품을 차카타이-튀르크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행정 등 주요 분야에서는 여전히 페르시아어가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다.

4. 1. 건축

샤이반 왕조는 부하라를 왕조의 문화 및 건축 중심지로 삼아 많은 건축 사업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켰다.[2] 16세기 초에는 칼란 모스크가 대대적으로 재건되었고, 1530년에는 미르 아랍 마드라사가 세워지는 등[2] 주요 종교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이 건축물들은 샤이반 왕조의 종교적, 문화적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 후반에는 부하라 시내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들이 건설되었고, 특히 1562년부터 1587년 사이 남북 간선도로에는 금세공인, 모자 판매인, 환전상을 위한 세 개의 돔형 지붕을 덮은 시장, 즉 차르수 시장이 조성되었다.[3] 여러 개의 돔 때문에 '탁스(Taqs)'라고도 불린 이 시장들은 서로 500m 이내 거리에 위치했으며,[4] 주변에는 많은 사람과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상 숙소(caravanserais)와 대규모 마드라사(madrasas)들이 들어섰다.[5] 이를 통해 활기찬 상업 중심지가 형성되어 상품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으로 통치했던 압둘라 칸 2세는 코쉬 마드라사를 구성하는 모다리 칸 마드라사(1567년)와 자신의 이름을 딴 압둘라 2세 마드라사(1588-1590년)를 건설했다.[6] 이 마드라사들은 신학 교육을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압둘라 2세 마드라사는 복잡한 타일 장식과 통치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으로 유명하다.[7][8]

압둘라 칸은 또한 사르라판 목욕탕이라는 중요한 공공시설도 건설했다. 이 목욕탕은 중앙의 팔각형 목욕 공간을 중심으로 사방에 방들이 배치된 구조였다. 이 방들은 단순한 휴식부터 사업 논의, 대화, 게임 등 다양한 활동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남성 구역과 여성 구역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었는데, 남성 구역에는 타일로 정교하게 장식된 예배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던 반면, 여성 구역은 장식이 비교적 적고 별도의 칸막이가 없었다.

4. 1. 1. 칼란 모스크

샤이반 왕조는 부하라를 왕조의 문화적, 건축적 수도로 삼으면서 수많은 건축 사업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켰다.[2] 부하라의 대규모 모스크인 칼란 모스크는 1121년에 처음 건설되었다.[2] 그러나 16세기 초 샤이반 왕조 시대에 돌기둥, 아치, 288개의 볼트를 추가하며 완전히 재건되었다.[2] 이 모스크는 5개의 돔이 있는 궁전과 모스크로 구성된 종교 단지의 일부였다.[2]

1530년 우바이둘라 칸의 통치 아래, '미르 아랍'으로 알려진 셰이크를 기리기 위해 미르 아랍 마드라사가 이 단지에 추가되었다.[2] 칼란 모스크 맞은편에 세워진 미르 아랍 마드라사는 중앙 안뜰을 둘러싼 2층 구조의 교실을 갖추고 있었다.[2] 단지 내부 대부분은 석고 조각 천장과 화려한 색상의 타일 작업으로 장식되었으나, 현재 타일 작업과 벽의 비문 대부분은 남아있지 않다.[2]

4. 1. 2. 미르 아랍 마드라사

샤이반 왕조는 부하라를 왕조의 문화적, 건축적 중심지로 삼아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으며, 이는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2] 부하라의 대표적인 모스크인 칼란 모스크는 원래 1121년에 세워졌으나, 16세기 초 샤이반 왕조 시대에 돌기둥, 아치, 288개의 볼트를 더하며 대규모로 재건되었다.[2] 이 모스크는 5개의 돔을 가진 궁전과 모스크로 이루어진 종교 복합 단지의 일부였다.[2]

1530년, 우바이둘라 칸의 통치 아래 '미르 아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셰이크를 기리기 위해 미르 아랍 마드라사가 이 단지 내에 세워졌다.[2] 미르 아랍 마드라사는 칼란 모스크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중앙 안뜰을 둘러싼 2층 높이의 교실 건물 형태를 갖추고 있다.[2] 건물 내부는 석고 조각으로 장식된 천장과 다채로운 타일로 꾸며졌으나, 현재는 타일 장식과 벽에 새겨진 글귀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2]

4. 1. 3. 압둘라 2세 마드라사

16세기 후반, 으로 통치하던 압둘라 칸 2세는 모다리 칸 마드라사와 압둘라 2세 마드라사라는 두 개의 주요 건축물을 건설했는데, 이 둘을 합쳐 코쉬 마드라사라고 부른다. 압둘라 2세의 어머니에게 바쳐진 모다리 칸 마드라사가 1567년에 먼저 지어졌다. 이후 1588년에서 1590년 사이에 압둘라 칸 2세는 자신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또 다른 마드라사인 압둘라 2세 마드라사를 건설했다.[6]

압둘라 2세 마드라사의 장식은 기하학적인 별 문양, 다양한 모양, 테두리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유약 타일 패턴이 특징이다.[7] 또한 이 마드라사에는 통치자의 이름이 새겨진 여러 비문이 있다. 이 비문들은 세로선을 길게 늘어뜨린 형태의 아랍 문자로 쓰여졌다.[8] 이 대규모 마드라사는 신학 교육을 위한 학교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8]

4. 2. 화폐

티무르 제국의 통치자 샤 루흐가 15세기 초에 만든 통화 단위인 'tanka-i shahrukhi'는 샤이반 왕조가 사용한 은화의 기반이 되었다. 16세기에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인도 북서부에서 널리 사용된 샤이반 왕조 은화는 넓고 얇은 형태를 가졌으며, 후기 티무르 총독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이 동전의 대부분은 지름이 최소 약 2.54cm이며, 너비는 약 2.79cm에서 약 3.05cm 사이였다. 압둘라 칸 2세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동전은 가장 넓은 지점의 지름이 거의 약 3.56cm에 달했으며, 그만큼 두께는 더 얇아졌다.

5. 역대 칸



칭호이름재위 기간

아불 하이르 칸 이븐 다울라트 샤이크 이븐 이브라힘 칸
1428년1468년

샤이크 하이더
샤 부다그 칸 이븐 아불 하이르 칸
1468년

아불 파트
무함마드 샤이바크 칸 이븐 샤 부다그 칸 이븐 아불 하이르 칸
1500년1510년

쿠춘주 무함마드 빈 아불 하이르 칸
1512년1531년

무자파르 알 딘
아부 사이드 빈 쿠춘주
1531년1534년

아불 가지
우바이다울라 빈 마흐무드 빈 샤 부다그
1534년1539년

압둘라 빈 쿠춘주
1539년1540년

압달 라티프 빈 쿠춘주
1540년1552년

나우루즈 아흐메드 빈 순주크 빈 아불 하이르 칸
1552년1556년

피르 무함마드 칸 빈 자니 베그
1556년1561년

이스칸데르 빈 자니 베그
1561년1583년

부주르그 칸
압둘라 칸 우즈벡
압둘라 칸 빈 이스칸데르
1583년1598년

압둘 무민 빈 압둘라 칸
1598년

피르 무함마드 칸 빈 술레이만 칸 빈 자니 베그
1598년1599년


6. 샤이바니 왕조 가계도



아불-하이르 칸 (1428년~1468년 통치) 치하에서 샤이반 왕조는 분산된 우즈베크 부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튜멘과 투라 강 주변 지역에서 시작하여 시르다리야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의 손자이자 왕조의 이름이 유래된 무함마드 샤이바니 (1500년~1510년 통치)는 사마르칸트, 헤라트, 발흐, 부하라를 정복하여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단명한 샤이바니 제국을 세웠다. 샤 이스마일 1세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숙부, 사촌, 형제들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1505년부터 1598년까지 부하라 칸국을, 1511년부터 1695년까지 호라즘(히바) 칸국을 통치했다.

샤이반 왕조가 통치한 또 다른 국가는 1563년에 왕위를 차지한 시비르 칸국이었다. 마지막 칸인 쿠춤은 1598년 러시아의 침략으로 폐위되었다. 그는 부하라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차르에 의해 모스크바로 끌려가 결국 시비르스키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칭호이름재위 기간
그들은 서시베리아를 통치한 조치의 다섯 번째 아들인 시반의 후손이었다. 나중에 주요 세력이 분열되어 트란스옥시아나로 이동하여 유명한 칸인 우즈베크 칸의 이름을 따서 우즈베크(Ozbeg)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시베리아에 남은 세력은 시비르 칸국을 세웠고 16세기까지 존속했다.
아불 하이르 칸 이븐 다울라트 샤이크 이븐 이브라힘 칸1428년 – 1468년

샤이크 하이더
샤 부다그 칸 이븐 아불 하이르 칸1468년

아불 파트
무함마드 샤이바크 칸 이븐 샤 부다그 칸 이븐 아불 하이르 칸1500년 – 1510년
쿠춘주 무함마드 빈 아불 하이르 칸1512년 – 1531년

무자파르 알 딘
아부 사이드 빈 쿠춘주1531년 – 1534년

아불 가지
우바이다울라 빈 마흐무드 빈 샤 부다그1534년 – 1539년
압둘라 빈 쿠춘주1539년 – 1540년
압달 라티프 빈 쿠춘주1540년 – 1552년
나우루즈 아흐메드 빈 순주크 빈 아불 하이르 칸1552년 – 1556년
피르 무함마드 칸 빈 자니 베그1556년 – 1561년
이스칸데르 빈 자니 베그1561년 – 1583년

부주르그 칸
압둘라 칸 우즈벡
압둘라 칸 빈 이스칸데르1583년 – 1598년
압둘 무민 빈 압둘라 칸1598년
피르 무함마드 칸 빈 술레이만 칸 빈 자니 베그1598년 – 1599년
부하라 칸국은 자니드라고도 알려진 새로운 왕조, 즉 투카이-테무리드 또는 아슈타르칸 왕조 (아스트라한 칸의 후손)에게 넘어갔다.


*''중요한 칸은 굵게 표시''.

참조

[1] 서적 Shiban Han divani Ankara, Türkiye
[2] 학술지 Architecture and Fine Arts in the Shaybanid Period 1970
[3] 학술지 Economic and Social Aspects of the Public Architecture of Bukhara in the 1560's and 1570's 1987
[4] 서적 Islamic Arts Phaidon
[5] 학술지 Economic and Social Aspects of the Public Architecture of Bukhara in the 1560's and 1570's 1987
[6] 학술지 Economic and Social Aspects of the Public Architecture of Bukhara in the 1560's and 1570's 1987
[7] 학술지 On the Kond style of Islamic tiling: a study in practical Islamic geometry 2017
[8] 학술지 Two Foundation Inscriptions for 'Abd-Allah Khan in Buildings of Bukhara 2016
[9] 문서 小松 2000
[10] 서적 『中央ユーラシアを知る事典』 平凡社
[11] 문서 坂本(2006)p.60
[12] 논문 16세기 중앙아시아 신흥국가들의 몽골제국 계승성 연구:우즈벡·카자흐칸국과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단국대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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