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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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6세기 헝가리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 이자벨라 야기엘론의 섭정 통치 기간을 거쳐 단독 통치를 시작했고, 종교 개혁과 관용 정책을 펼쳤다.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하여 종교적 자유를 옹호했으며, 슈파이어 조약을 통해 헝가리 왕위를 포기하고 트란실바니아 공작이 되었다. 1571년 사망하며 자폴랴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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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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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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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샤포야이 야노시 지그몬드 |
출생일 | 1540년 7월 7일 |
출생지 | 부다, 헝가리 왕국 |
사망일 | 1571년 3월 14일 |
사망지 | ジュラフェヘールヴァール, 트란실바니아 (현재의 루마니아 앨바 율리아) |
매장지 | ジュラフェヘールヴァール, 성 미카엘 대성당 (현재의 루마니아 앨바 율리아) |
가문 | 자폴야 가문 |
아버지 | 사포야이 야노시 |
어머니 | 이사벨라 야기에론카 |
종교 | 로마 가톨릭 (1540–1562) 루터교 (1562–1564) 칼뱅주의 (1564–1568) 유니테리언 (1568–1571) |
통치 | |
헝가리 왕 | 1차 통치: 1540년 9월 13일 – 1551년 7월 19일 2차 통치: 1556년 11월 25일 – 1570년 8월 16일 |
대립 왕 |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
트란실바니아 공작 | 1570년–1571년 |
오폴레와 라치부시 공작 | 1551년–1556년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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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문 및 시대적 배경
요한 서포여이는 16세기 초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술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에 헝가리 군이 대패하자, 헝가리 귀족들은 요한 서포여이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유력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왕으로 선포하면서 헝가리는 내전에 휩싸였다.
요한 서포여이는 16세기 초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가 헝가리 군대에 큰 타격을 주자, 헝가리 귀족 대부분은 요한 서포여이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일부 유력 귀족들은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왕으로 선포하면서 헝가리는 수십 년간 내전에 휩싸였다.
1529년 요한은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모하치에서 술레이만 1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췄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요한과 페르디난트 모두 헝가리 전체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1538년 2월 24일, 양측은 바라드 조약을 체결하여 각자 점유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했다. 자식이 없던 요한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영토(헝가리 왕국의 중부 및 동부)를 페르디난트가 통치할 권리를 인정했다. 다만, 요한은 아들이 태어날 경우 아들이 자신의 세습 영토를 상속받을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요한의 영토를 보호하지 못했다.
1539년 3월 2일, 52세의 요한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22세 딸 이자벨라 야기엘론과 결혼했다. 인문주의 학자 파올로 지오비오와 안툰 브란치치는 이자벨라가 당대 가장 교육받은 여성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3. 유년 시절
요한은 페르디난트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고자 1529년 모하치에서 술레이만 1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췄다. 그러나 요한과 페르디난트 모두 헝가리 전체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1538년 2월 24일, 두 왕의 사절은 바라드 조약을 체결하여 각자 보유한 영토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자식이 없던 요한은 자신이 죽은 후 헝가리 중부 및 동부 영토를 페르디난트가 통치하는 것을 인정했고,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가문 영토를 상속받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요한의 영토를 보호할 수 없었다. 1539년 3월 2일, 52세의 요한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22세 딸 이자벨라 야기엘론과 결혼했다. 인문주의 학자 파올로 지오비오와 안툰 브란치치는 이자벨라가 당대 가장 교육받은 여성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요한 지그몬드는 1540년 7월 7일 부더에서 태어났다. 트란실바니아 원정 중이던 요한은 아들의 출생 소식을 듣고 병사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다음 날 요한은 병에 걸려 7월 21일 또는 22일에 사망했다. 그는 임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페르디난트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요한 사후, 재무관 죄르지 마르티누치는 요한 지그몬드의 상속 재산을 확보하고자 부다로 향했다. 헝가리 의회는 1540년 9월 13일 마르티누치의 제안으로 요한 지그문트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헝가리 성관을 쓰지는 못했다. 의회는 이자벨라, 마르티누치, 페테르 페트로비치, 벌린트 퇴뢰크를 어린 왕의 후견인으로 임명했다.
8월, 페르디난트의 사절은 바라드 조약에 따라 요한의 영토를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상 헝가리에서 서포여이 군대를 지휘하던 페테르 페레니와 컬로처 대주교 프러뇨 프런코판은 페르디난트에게 투항했다. 이슈트반 마이러트는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요한 지그몬트 지지자 대부분을 추방했다. 페르디난트의 사절 히에로니무스 와스키는 술레이만에게 바라드 조약을 알리고 헝가리 통합에 동의를 구했으나, 술레이만은 요한 지그문트를 지지하며 와스키를 체포했다.
1541년 10월,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비셰그라드, 바츠, 페슈트, 터터,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지만 부다는 함락하지 못했다.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는 1541년 5월 4일 다시 부다를 포위했다. 술레이만은 6월에 헝가리 내전을 틈타 대군을 이끌고 이스탄불을 떠났다. 몰다비아 공국의 페트루 라레쉬는 술레이만의 명령으로 이슈트반 마이러트를 체포하고,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7월 말 요한 지그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8월 26일, 술레이만이 부다에 도착하기 전 로겐도르프는 포위를 풀었다.
술레이만은 요한 지그문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이자벨라가 딸을 낳았다는 소문을 듣고 어린 왕을 만나고 싶어했다. 8월 29일, 헝가리 영주 6명(마르티누치, 퇴뢰크 포함)이 술레이만의 진영으로 요한 지그문트를 데려갔다. 예니체리는 부다를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로 헝가리 수도를 무혈 점령했다. 퇴뢰크는 술탄의 진영에서 체포되었다. 술레이만은 요한 지그문트가 매년 10,000 플로린을 바치는 조건으로 티서 강 동쪽 영토를 유지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3. 1. 섭정 통치
1541년 9월 5일, 이자벨라와 마르티누치(프라테르 죄르지)는 어린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성관을 가지고 부더를 떠났다. 이자벨라와 야노시 지그몬드는 자폴리야 가문의 옛 영지 중심지인 리파에 정착했다. 10월 18일, 야노시 지그몬드는 데브레첸에서 영내 각 현에서 모인 대표들과 만났다. 대표들은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2월 29일, 야노시 지그몬드 측 대표 마르티누치와 페르디난트 1세 측 대표 세레디 카스파르가 잘루 조약을 체결했다. 잘루 조약에 따르면 헝가리는 페르디난트 1세 아래에서 재통합되지만, 상 헝가리에 있는 자폴리야 가문의 영토 권리는 보장되었다.
1542년 3월 29일, 트란실바니아 3국은 이자벨라에게 오스만 제국 영토에 가까운 리파에서 트란실바니아로 이주할 것을 요청했다. 4월에 트란실바니아 주교가 사망하자, 의회는 주교령을 왕실 영토에 편입시켰다. 6월, 이자벨라와 야노시 지그몬드는 귈러페헤르바르로 옮겨 주교의 궁전에 살게 되었다.
8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잘루 조약을 승인했다. 11월, 파르티움 귀족 대표들도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싸울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군대는 페슈트를 탈환하거나 오스만군을 격파할 수 없었다. 12월 17일, 페르디난트 1세를 대리하여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역을 접수하기 위해 세레디 카스파르가 잘루에 왔지만, 이자벨라는 그를 거부했다. 3일 후,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잘루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 결의에 트란실바니아 작센족 대표들은 반대했다.
이자벨라와 마르티누치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다. 1543년 2월에 의회가 이자벨라의 우위를 인정했지만, 그 후에도 마르티누치는 국정과 재정을 계속 관장했다. 6월, 야노시 지그몬드의 국가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첫 공납이 이루어졌다. 같은 달, 크론슈타트의 루터교 신자 작센인 성직자들이 귈러페헤르바르에서 이자벨라와 마르티누치 앞에서 가톨릭 사제들과 토론을 벌였다. 마르티누치는 이 작센인들을 이단 혐의로 법정에 세우려 했지만, 결국 작센인들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1544년 4월, 토르더 의회는 여행자는 방문하는 곳의 종교적 관습을 존중해야 한다는 규정을 정했다. 이는 이 지역에 종교 개혁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1544년 8월, 파르티움의 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의회에서 마르티누치는 대법관이 되었다. 1555년 말까지, 과거 페르디난트 1세를 따랐던 베레그 주, 서볼치 주, 서트마르 주, 웅 주, 젬플렌 주가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46년 상반기, 오스만 군이 베체와 베치케레크의 두 요새를 포위했다. 1547년에 쉴레이만 1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형인 카를 5세와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체결했지만, 쉴레이만 1세는 야노시 지그몬드의 국가를 이 평화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쉴레이만 1세가 야노시 지그몬드 국가의 일부를 오스만 제국에 병합하려 한다고 생각한 이자벨라와 마르티누치는 1548년에 헝가리 통합을 위한 페르디난트 1세와의 협상을 재개했다. 1549년 9월 8일, 마르티누치와 페르디난트 1세의 사절 살름의 니콜라우스가 니르바토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이자벨라와 야노시 지그몬드는 왕위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실레시아의 오폴레 공국, 라치부슈 공국과 100000florin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이 조약 내용의 실행을 거부하고 귈러페헤르바르에 머물렀다. 그러자 마르티누치는 귈러페헤르바르를 포위하고 1550년 10월에 이자벨라를 항복시켰다.
이자벨라는 1551년 5월에도 페트로비치 페테르와 파토치 페렌츠 등과 함께 니르바토르 조약 시행을 막으려 했지만 마르티누치에게 패했다. 7월 19일, 이자벨라는 실레시아 두 공국과 140000florin을 대가로 자신과 야노시 지그몬드의 퇴위를 인정받아야 했다. 2일 후, 이자벨라는 성관을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리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탈도에게 넘겨주었다. 7월 26일, 의회는 두 사람의 퇴위를 인정하고 페르디난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3. 2. 폴란드 망명
1551년 8월 6일, 이자벨라와 야노시 지그몬드는 지지자인 페트로비치 페테르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를 떠났다。그들은 먼저 상 헝가리의 카사 (현 슬로바키아령 코시체)에 머물렀고, 이어서 1552년 3월 오폴레로 이동했다。그러나 주어진 실레지아 공국군이 빈약한 것을 간파하자, 그들은 4월 말까지 폴란드로 떠났다。이후 망명 모자는 크라쿠프, 바르샤바, 사노크 등 폴란드의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야노시 지그몬드는 자주 들소 사냥을 갔고, 숙부인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에게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그러나 야노시 지그몬드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간질과 만성 장 질환에 시달렸다。
동시대 역사가이자 이자벨라의 적 중 한 명이었던 페렌츠 포르가치는, 이자벨라가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불량배들과 어울리거나 술을 마시도록 방임하는 "부끄러운" 양육 방식을 했다고 비판했다。다만, 야노시 지그몬드의 교육에는 헝가리인 차키 미하이와 폴란드인 보이체흐 노보폴스키와 같은 인문주의 학자들이 참여했다。노보폴스키의 영향으로, 야노시 지그몬드는 신학 논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헝가리 동부에서는 페르디난트 1세가 충분한 용병을 보내지 않아 방어 체제가 취약한 상태였다。1551년 후반, 카스타르도는 프라테르 게르지가 오스만 제국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암살했다。1552년 여름, 오스만 제국이 바나트의 저지대를 점령했다。
1553년 3월, 술레이만 1세가 이자벨라에게 헝가리 귀환을 요청했다。페트로비치 페테르가 반 페르디난트 1세 반란을 일으켰고, 세켈리인의 집회도 야노시 지그몬드에 대한 신종을 선언했다。그러나 두 반란 모두 9월 말까지 진압되었다。1554년 4월, 술레이만 1세는 헝가리에 야노시 지그몬드를 복귀시키는 방침을 결정했다。 페트로비치 페테르에게 바나트의 두 곳의 요새를 주었다。 합스부르크가와 전쟁 중이던 프랑스 국왕앙리 2세도 이자벨라에게 귀국을 권했고, 자신의 딸을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1555년, 술레이만 1세는 트란실바니아 제후들에게 야노시 지그몬드에 저항하지 말고 따르도록 요구했다。 그 해 말까지, 트란실바니아 삼개 국민의 대표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원군을 파견하거나 그들과의 주종 관계를 포기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하는 진정을 했다。1556년 전반, 페트로비치 페테르가 트란실바니아를 기습했다。 3월 12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야노시(1세) 왕의 아들" 야노시 지그몬드(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6월 1일, 이자벨라와 야노시 지그몬드의 귀국을 요구하는 사절이 폴란드로 보내졌다。 2주 후, 페르디난트 1세는 술레이만 1세에게 과거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토에서 철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했다。
4. 헝가리 귀환과 통치
1556년,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오스만 제국 술레이만 1세의 요구에 따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이자벨라를 복위시켰다. 1556년 10월 22일, 세 민족의 대표들은 클루지나포카(현재 루마니아의 클루지나포카)에서 이들을 성대하게 맞이했고, 의회는 미성년자인 아들을 대신하여 이자벨라에게 국정을 관리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몇 달 동안 아바우이, 비하르, 괴뫼르 등 트란실바니아 외부의 여러 현도 야노시 지그몬드의 통치를 인정했다.
이자벨라는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쳐 칼뱅주의가 파르티움과 클루지나포카를 중심으로 확산되도록 했다. 1559년, 이자벨라는 페르디난트 1세와 새로운 협상을 시작하여, 페르디난트 1세가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고 티서 강 동쪽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1559년 9월 18일 이자벨라 왕대비는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머니 이자벨라가 사망하면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다.
4. 1. 헝가리 귀환
1556년 10월 22일, 세 민족의 대표들은 클루지나포카(현재 루마니아의 클루지나포카)에서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성대하게 맞이했다. 의회는 아직 미성년자인 아들을 대신하여 이자벨라가 국정을 관리할 권리를 확인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아바우이, 비하르, 괴뫼르 등 트란실바니아 외부의 여러 카운티(현) 또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통치를 인정했다.
이자벨라는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채택하여 특히 파르티움과 클루지나포카에서 칼뱅주의의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1559년 이자벨라는 페르디난트와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페르디난트가 그의 딸 중 한 명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고 티서 강 동쪽의 땅에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통치를 확인해 준다면 아들의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왕대비 이자벨라는 1559년 9월 18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2. 단독 통치
Szapolyai János Zsigmond|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hu의 단독 통치는 어머니 이자벨라 야기에우워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새로운 칭호를 채택하는 대신, 계속해서 자신을 ''렉스 엘렉투스''(선출된 왕)라고 칭했다. 크리스토퍼와 스테판 바토리 형제,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다른 고문들은 국정 운영에 계속 참여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중 한 명과의 결혼을 제안하는 동시에 페르디난트 1세의 통치하에 있는 헝가리 지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으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지만 평화는 유지되었다.야노시 지그몬드는 종교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다양한 신학 학파 대표들 간의 여러 토론을 시작했다. 첫 번째 토론은 1560년 1월 메디아슈에서 루터교와 칼뱅주의 사제들 사이에서 열렸다. 1년 반 후, 야노시 지그몬드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와 독일의 다른 신학 센터에 편지를 보내 두 개신교 학파의 주요점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1561년 12월, 야노시 지그몬드의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중 한 명인 멜키오르 발라사가 페르디난트 1세에게로 투항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발라사의 영지를 점령하려 했지만, 그의 군대는 1562년 3월 4일 호도드에서 격파당했다. 발라사에 의해 선동된 세케이인 평민들은 1550년대에 제한되었던 고대 자유(세금 면제 포함)를 회복하기 위해 봉기했다. 야노시 지그몬드의 군대는 5월에 그들을 격파했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말뚝형에 처해지거나 신체 훼손을 당했다. 의회는 배심원으로 평민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세켈리의 특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을 채택했다. 세케이 지방에 "세켈리 공격"과 "세켈리 후회"라는 두 개의 새로운 왕실 성이 세워졌다. 발라사의 반란 이후 트란실바니아 외 대부분의 군은 야노시 지그몬드에서 페르디난트 1세로 충성을 바꿨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 군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야노시 지그몬드는 심지어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지 않겠다고 제안했지만, 1562년 7월에 거절당했다.
원래 가톨릭 신자였던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2년 말 전에 루터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루터교와 칼뱅주의 신학자들 간의 토론은 계속되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자신의 궁정 의사였던 조르지오 비안드라타 (그는 반삼위일체론자로서 루터교나 칼뱅주의의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를 시노드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루터교와 칼뱅주의 성직자들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1564년 4월 그들의 의견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의회는 6월에 별도의 칼뱅주의 종파의 존재를 인정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또한 칼뱅주의를 채택하고 다비드 페렌츠를 자신의 궁정 설교자로 임명했다.
1564년 7월 25일, 페르디난트 1세는 사망했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뒤를 이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562년 합스부르크가에게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야노시 지그몬드의 군대는 1562년 말 이전에 사투마레, 하다드, 바이어마레를 점령했지만, 라자루스 폰 슈벤디의 반격은 1565년 3월에 소메슈 강에 도달했다. 1565년 3월 13일, 야노시 지그몬드와 막시밀리안 2세의 사절단은 사트마르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야노시 지그몬드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자신의 세습 통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왕의 칭호를 포기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또한 막시밀리안 2세의 여동생인 토스카나 대공녀 조안나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4월 21일에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도록 강요했다. 야노시 지그몬드와 테메슈바르 파샤인 하산은 연합하여 에르되드, 나지바냐 및 사트마르를 탈환했다. 그는 사트마르 조약에 대한 설명을 위해 이스탄불에 있는 술탄을 알현하려 했지만, 술레이만 1세는 그가 직접 헝가리로 갈 것이라고 그에게 알렸다.

다비드 페렌츠는 그의 설교에 삼위일체 반대 사상을 포함하기 시작했고, 이는 데브레첸의 칼뱅주의 주교인 페테르 멜리우스 유하스를 격분시켰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1566년 4월에 죄르페헤르바르에서 열렸다. 토론 후 야노시 지그몬드는 데브레첸의 칼뱅주의 출판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또한 콜로스바르, 마로스바사르헤이 및 나지바라드에 프로테스탄트 대학 설립을 후원했다. 페트루스 라무스와 종교 개혁의 다른 주요 학자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그가 죄르퍼헤르바르의 왕립 대학을 아카데미로 발전시키고 싶어했음을 보여준다. 1560년대 베니스에서 출판된 이탈리아 시집은 야노시 지그몬드를 "르네상스 후원자"라고 칭송했다.
1566년 여름, 술탄 술레이만은 합스부르크 영토를 상대로 한 그의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다뉴브 강변의 제문에 도착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400명의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을 대동하고 술탄의 진영으로 급히 갔다. 야노시 지그몬드와 그의 주요 고문들이 술탄의 텐트 앞에서 엎드리자, 술레이만은 야노시 지그몬드의 세습 통치자 지위를 확인했다. 목격자 무스타파 셀라니키에 따르면, 술탄은 야노시 지그몬드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7월 28일 술탄의 명령에 따라 상부 헝가리를 침략했다. 그러나 술레이만이 9월 6일에 시게트바르 포위전에서 사망하자,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이 무렵 피렌체 공작 코시모 1세에게 쓴 편지에서 용병 지오반안드레아 그로모는 야노시 지그몬드를 "매우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생각에 예민하고, 현명하며, 침착하고, 근면하고 용감하다"고 묘사했다. 그로모는 야노시 지그몬드가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폴란드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를 잘 구사하고 그리스어와 터키어도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6년 11월에 칼뱅주의 주교를 그의 왕국에 있는 루마니아인들의 유일한 종교 지도자로 임명했다. 의회는 또한 칼뱅주의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한 모든 루마니아인 사제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이 결정은 시행되지 않았다. 다비드 페렌츠와 조르지오 비안드라타의 영향을 받은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7년 초부터 삼위일체 반대 사상에 수용적이 되었다.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원으로 다비드는 그의 견해를 홍보하기 위해 다섯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우상 숭배로 비난했다.
야노시 지그몬드와 하산 파샤는 1567년 3월에 상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야노시 지그몬드는 여름에 심각한 병에 걸렸다.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그의 후계자를 선출할 때 그의 유언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 오스만 술탄 셀림 2세는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에게 그들의 군주를 자유롭게 선출할 권리를 부여했다. 오래지 않아 야노시 지그몬드는 회복되었다.
4. 3. 종교 개혁과 관용 정책
야노시 지그몬드는 종교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여러 종파 대표들을 모아 여러 차례 신학 토론회를 개최했다. 첫 번째 토론회는 1560년 1월 메드예슈 (현재 루마니아령 메디아슈)에서 열렸으며, 루터교와 칼뱅주의 성직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1년 반 후, 야노시 지그몬드는 비텐베르크 대학교 등 독일의 종교 개혁 중심지에 서신을 보내 루터교와 칼뱅주의 교리의 요점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원래 가톨릭 신자였던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2년 말까지 루터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루터교와 칼뱅주의 신학자들 간의 토론을 계속하게 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는 반삼위일체론의 궁정 의사 조르지오 비안드라타를 종교 회의 의장으로 임명하여 루터교와 칼뱅주의 성직자를 화해시키려 했지만, 1564년 4월 양측의 의견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6월, 의회는 칼뱅주의를 독립된 교파로 승인했다. 야노시 지그몬드도 칼뱅주의를 채택하고, 다비드 페렌츠를 궁정 설교자로 임명했다.
궁정 설교자 다비드 페렌츠는 설교 속에 반삼위일체론의 주장을 더하기 시작했다. 이에 칼뱅주의 성직자인 멜리우스 유하스 페테르가 격노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6년 4월 죄르페헤르바르에서 삼위일체를 주제로 한 공개 토론을 개최했다. 이 토론회 후, 야노시 지그몬드는 데브레첸의 칼뱅주의 인쇄소에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콜로주바르, 마로슈바샤르헤이 (현재 루마니아령 트르구무레슈), 너지바러드에 프로테스탄트 학교를 세울 때에도 자금 지원을 했다. 이 학교들은 16세기 안에 고등 학교(콜레기움)가 되었다. 야노시 지그몬드가 페트루스 라무스 등 종교 개혁을 선도하는 학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죄르페헤르바르의 왕립 고등 학교를 대학교(아카데미아)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60년대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이탈리아 시에서는, 야노시 지그몬드가 "르네상스의 후원자"라고 칭송받고 있다.
1566년 11월, 야노시 지그몬드는 영내 루마니아인의 종교 개혁을 지도하는 직책에 칼뱅주의 성직자를 임명했다. 의회는 모든 루마니아인 성직자에게 칼뱅주의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고, 거부하는 자는 추방한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1567년 전반부터 다비드 페렌츠와 조르지오 비안드라타의 영향으로 야노시 지그몬드는 반삼위일체론의 교리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원을 받아, 다비드는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는 서적을 5권 출판했다. 그는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우상 숭배자로 비난했다.
1568년, 투르다에서 의회가 열려 설교자들이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로 타인에게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으며, "신앙은 신의 선물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토르다 칙령은 16세기 유럽에서 매우 진보적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성직자에게만 후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종교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유니테리언, 정교, 아르메니아 정교, 유대교, 이슬람교 신자들도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568년에는 죄르페헤르바르에서 3월 8일부터 17일까지 열린 것을 시작으로 삼위일체를 주제로 한 신학 토론회가 잇따라 개최되었다. 1569년에는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반삼위일체론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칼뱅주의 성직자 카로이 페테르가 야노시 지그몬드의 편향성을 비판하자 야노시 지그몬드는 멜리우스 유하스 페테르가 비칼뱅주의 성직자를 박해하고 있다고 하며, 멜리우스에게 "교황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비난했다. 1569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너지바러드에서 칼뱅주의와 반삼위일체론(유니테리언)의 최대 신학 토론회가 열렸다. 승패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야노시 지그몬드는 이 토론회를 거쳐 반삼위일체론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야노시 지그몬드는 역사상 유일한 유니테리언 군주가 되었다.
야노시 지그몬드가 개종한 후 그의 측근들 대부분도 유니테리언주의로 기울었다. 역사가 팔다 가보르에 따르면, 이 개종에는 기독교 세계에 머무르면서도 거리를 두려는 야노시 지그몬드의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가 케울 이슈트반은 "신은 유일하다!"라는 간명한 생각이 유니테리언주의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특히 세케이인의 농민이나 콜로즈바르의 도시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진 배경에 있다고 말한다.
5. 트란실바니아 공작
슈파이어 조약(1570)을 통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막시밀리안 2세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왕위를 포기했다. 그 대신 "트란실바니아 공작이자 헝가리 왕국의 영주"라는 새로운 칭호를 채택했으며, 자신의 영토가 헝가리 왕국의 일부이며 사후에는 막시밀리안 2세 또는 그의 상속자에게 귀속될 것임을 확인했다.
병세가 악화된 야노시 지그몬드는 1571년 3월 14일 알바율리아에서 사망했다. 트란실바니아 영주들은 그의 죽음을 며칠 동안 비밀로 했다. 그는 유니테리안 의식에 따라 알바율리아의 알바율리아 성 미카엘 대성당에 묻혔다.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7년 재상 미하이 차키와 재무관 가스파르 베케스가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유언과 유서를 작성했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그의 삼촌인 폴란드의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그의 세 고모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부인 조피아, 안나 야기에우워와 카타르지나 야기에우워에게 유증했다. 그는 자신의 서재를 알바율리아의 개신교 학교에 기증했다.
결혼하지 않았고 상속자를 남기지 않은 야노시 지그몬드는 자폴야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었다. 그의 유언에서 그는 새로운 군주를 선택할 수 있는 국회의 권리를 보장했다. 세 민족의 대표자들은 로마 가톨릭교도 스테판 바토리를 선출했고, 그는 트란실바니아 보예보드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지지를 받은 가스파르 베케스는 선거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바토리는 그 결과 발생한 내전에서 승리하여 그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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