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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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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재는 1020년에 태어나 1077년에 사망한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 기(氣)를 우주의 근본 물질로 보는 기일원론을 주장하며 성리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지방관을 역임하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으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주요 저서로는 《정몽》, 《서명》 등이 있으며, 그의 철학은 주희, 왕양명 등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장재는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만세에 태평을 열 것이다'라는 호탕한 기질을 보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오경박사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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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

2. 생애

장재


장재는 1020년 함양부(鳳翔府)위현 횡구(橫渠)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현의 지사직(知事職)으로 있던 부친을 잃었다.[12] 젊었을 때 범중엄을 만나 병사(兵事)에 대해 말하였다.[12] 범중엄은 "유자(儒者)에게는 자연히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를 즐길 만한 것이 있다. 어찌하여 병담(兵談) 같은 것을 좋아하는가"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그에게 주었다.[12] 장재는 거기서 비로소 (道)를 구할 것을 결심하고 한때 불교노장사상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6경(六經)의 학문으로 돌아왔다.[12]

1056년, 장재는 '''주역(周易)'''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이는 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 정씨 형제를 처음 만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우(嘉祐) 2년(1057년) 38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기주(祁州)·부주(鄜州)·위주(渭州)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12] 당시 황제인 북송신종은 그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왕안석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신병을 이유로 향리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을 다하였다.[12]

1069년, 장재는 황제에게 추천되어 수도의 정부에 자리를 얻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에 반대하여 고향 횡곡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강의에 전념했다. 이 기간은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데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1076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정오(正蒙)'''를 완성하여 제자들에게 전달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수도로 소환되어 고위직에 복귀했으나, 겨울에 병이 들어 다시 사직했다. 고향 횡곡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77년 길에서 사망했다. 장재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1241년 유교 사당에 배향되었다.

“천지(天地)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生民)을 위해 도(道)를 세우고, 지난 성현(聖賢)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太平)을 열 것이다”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호걸의 기질을 지녔다.

장재 사후 그의 제자 대부분은 정씨 형제(정이, 정형)의 학파에 참여했다. 그의 사상은 주로 정씨 형제와 주희(朱熹)의 노력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주희는 장재를 도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존경했다.

3. 사상

장재는 기(氣)를 우주의 근본 물질이자 만물 생성의 원리로 보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기(氣)의 응집과 분산을 통해 세상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한다고 보았으며, 인간 역시 기(氣)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설명했다.[12] 이러한 기(氣)의 무형무감 상태를 기의 신(神)이라 하였으며, 태허(太虛) 또는 태화(太和)라고 하였다.[13]

장재는 태허를 기(氣)의 본래 상태, 즉 아직 개별적인 사물로 분화되기 이전의 무형(無形)의 상태로 보았다. 그는 태허와 기(氣)를 '일물양체(一物兩體)'의 관계, 즉 태허즉기(太虛卽氣)와 같이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13]

장재는 인간의 본성을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도덕적 수양을 통해 기질(氣質)을 정화하고 천지지성(天地之性)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제한다"라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는 훗날 주희(朱熹)에게 높이 평가되었다.[13]

또한, 장재는 개인의 수양과 사회생활에서 예(禮)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불교노장사상을 배척하며 유교의 독립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13]

3. 1. 기 철학

장재의 형이상학은 주로 『주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장재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기(氣, qi)라 불리는 원초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장재에게 있어 기는 물질과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힘, 즉 음(陰)과 양(陽)을 포함한다. 흩어지고 희박한 상태의 기는 보이지 않고 비물질적이지만, 응축되면 고체나 액체가 되어 새로운 속성을 갖게 된다. 모든 물질적인 것은 응축된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氣)가 아닌 것은 없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중요한 윤리적 함의를 지닌다.[12]

장재는 기(氣)를 그의 존재론적 우주론의 기초로 삼았는데, 이는 중국 철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장재에 따르면, 기 또는 생명력은 우주의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물질이다. 기(氣)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음(陰)과 양(陽)의 두 원리에 따른 활동의 명확한 패턴을 따른다. 응축에서 분산으로, 또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의 변화는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주 전체에서 어떤 것도 다른 것의 반복은 아니며, 마음이 정확히 같은 두 사람은 없다. 물리적 세계의 영속적인 운동은 외부 힘에 의한 것이 아니며, 기(氣) 자체가 모든 변화와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력 있고 자기 운동하는 힘이다.[13]

장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뿐이며 현상의 개체는 기가 응취한 객감(客感) 또는 객형(客形)이라고 주장하였다.[12] 또한 기의 본래의 모양, 즉 자(姿: 아직 개체를 형성하지 않은 상태의 기)는 태화(太和) 또는 태허(太虛)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태화(太和) 또는 태허(太虛)는 사람에게 감각되지 않는 것, 즉 유(幽)로, 기의 지정한(至靜: 지극히 고요한) 상태라고 하였다.[12]

장재의 우주론(형이상학적 사유)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명명되는데, 이는 노자의 "(有)는 (無)에서 생(生)한다"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13] (有)가 (無)에서 생(生)하지 않는다면 (有)는 (有)에서 생(生)하는 것인데, 장재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철저한 (有)의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현상 세계의 모든 개체는, 사람까지도 음양 2기(陰陽二氣)의 동정(動靜) 승강(昇降) 부침(浮沈) 등에 의한 운동의 결과로 해서 생성된 것이다. 그 음양 2기도 실제는 기(氣), 즉 1기(一氣)이므로 이 기가 객감(客感) 객형(客形)을 취하는 것이 현상의 성립이며, 이 세계의 만변만화가 생하는 까닭이라고 장재는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기(氣)가 흩어지면 무형무감이어서 사람에게 감각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13]

이런 기(氣)의 무형무감의 상태가 기의 (神)이요, 또 그것을 태허(太虛) 또는 태화(太和)라고 하였다.[13] 따라서 태허 태화는, 기가 현상으로서의 객감 객형을 취하면서 변화하기 이전 근본의 온전한 (靜)의 상태이므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도덕론으로 이어져 "(虛)와 기(氣)가 합하여 (性) (名)이 있다"고 한 것같이 태허 태화는 또 사람 본래의 자태의 (性)이 된다.[13] 은 사람에게 일반적인 것이요, 구체적으로는 지성(至誠)이다. 그래서 (誠)을 얻는다는 것, 즉 지성(至誠)에 이른다는 것이 (性)을 얻는 것이며 (性)을 다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13]

3. 2.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

장재는 성인(聖人)이 "우주와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교리를 중시했는데, 이는 고전 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신유학 체계를 확장한 것이다. 그는 인(仁), 즉 인애(仁愛)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고전 유학의 핵심 가르침이었다. 공자맹자에게 인(仁)은 인간 사회와 하늘(天)의 도리를 연결하는 유대이자 우주의 근본적인 도덕 구조의 기초였다. 장재는 이러한 인(仁)의 속성을 우주 전체로 확장하여, 소우주와 대우주가 상호 보완적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점은 우주의 근본적인 선함과 목적, 그리고 개인이 성인의 이상을 실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1]

장재는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유교불교도교와 명확하게 구분하려고 했다. 그는 우주와 그 과정이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고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도교불교가 구원을 얻기 위해 주어진 우주로부터 근본적인 탈피를 강조하는 반면, 유교는 이 세상, 즉 기(氣)의 세계에서 성취와 궁극적인 정체성을 발견한다고 주장했다. 성인은 기(氣)의 궁극적인 실재성과 그 고유한 선함을 받아들이고, 우주 자체의 구조 전체에 인(仁)이 스며들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우주와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1]

4. 주요 저서


  • 《정몽(正蒙)》: 장재의 대표적인 철학 저서로, 그의 기 철학우주론을 담고 있다. 장재가 향리로 내려간 후의 저작으로, 그의 만년인 50세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13] 전 9권이며 각권은 2편으로 되어 있다.[13]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편은 1권에서 4권 정도까지인데, 그 중에서도 〈태화편(太和篇)〉, 〈성명편(誠明篇)〉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13] 주희가 중요시한 문헌이었으며,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왕선산(王船山)이 《장자정몽주(張子正蒙註)》을 지었다.[13]
  • 《서명(西銘)》: '천인합일(天人合一)과 '만물일체(萬物一體)' 사상을 담은 짧지만 심오한 글이다. 《정몽》과 같이 장재의 만년의 저작일 것으로 여겨진다.[15] 2정자(二程子)는 《서명》을 매우 칭송하였다.[15] 주자의 《서명해(西銘解)》가 있다.[15]
  • 《동명(東銘)》[12]
  • 《경학리굴(經學理窟)》[12]
  • 《역설(易說)》[12]

5. 평가

장재는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독창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여 성리학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기일원론은 주희를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성리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왕양명, 왕부지 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11]

장재는 『역경』과 『중용(中庸)』에 의거하여 만물의 생성을 음양(陰陽) 이기(二氣)의 집산(集散)으로 설명하고, “태허(太虛)”를 그 본체로 삼았다. 태허는 무형(無形)이며, 기(氣)는 유형(有形)이지만 이 둘은 일물양체(一物兩體), 태허즉기(太虛卽氣)라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성을 “기질의 성(氣質之性)”과 “천지의 성(天地之性)”의 양면에서 고찰하고, 도덕의 근원은 “태허=천지의 성”에 있다고 설명하며, 기질을 정화하여 천지의 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치한다”는 견해는 후대의 주희에 의해 이정(二程)보다 낫다고 평가되었다. 개인 수양과 사회생활에서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불교도교를 배척하며 유교의 독립성을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1960년대 중국에서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장재의 철학이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민족주의중화인민공화국의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장재와 그의 영향을 받은 왕부지는 철학사상 최고의 인물로 취급되었다.[11] 하지만, 시마다 켄지와 같은 학자는 객관적 유심론(주자학)과 주관적 유심론(양명학)의 대립이야말로 성리학의 중심이며, 장재의 유물론적 계보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낮다고 평가한다.

6. 가계

장재의 후손들은 오경박사 칭호를 받았다.[1][2][3][4]

1452년, 맹자의 56대손 맹희문과 안회의 59대손 안희혜, 주돈이의 12대손 주면, 정호정이 형제의 17대손 정극인, 주희의 9대손 주정이 오경박사 칭호를 받았다. 1456~1457년에는 증자의 60대손 증질취가, 1622년에는 장재의 후손이, 1630년에는 소옹의 후손이 같은 칭호를 받았다.[9][10]

대수이름
아들장인(張因)
손자장염(張炎)
4대손장선(張選) - 송고종을 따라 남중국으로 갔다.
5대손장진(張晉), 장지(張智), 장일준(張一俊)
6대손장정(張霆)
7대손장일명(張日明)
8대손장곡면(張谷勉)
9대손장사영(張士榮), 장사명(張士名)
10대손장문운(張文運)


참조

[1] 서적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4-15
[2] 웹사이트 P.494-5.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www.forgotten[...] 2016-04-17
[3] 웹사이트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s://archive.org/[...]
[4] 서적 Men of Letters Within the Passes: Guanzhong Literati in Chinese History, 907-1911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5] 웹사이트 熾天使書城----明史 http://www.angelibra[...]
[6] 웹사이트 Kanripo 漢籍リポジトリ : KR2m0014 欽定續文獻通考-清-嵇璜 https://www.kanripo.[...]
[7] 웹사이트 ●欽定續通典卷三十一 職官九-续通典-四大名著文学网 http://www.sidamingz[...] 2016-10-04
[8] 웹사이트 周敦颐 http://www.zhangzhiy[...]
[9] 웹사이트 The Ritual Formation of Confucian Orthodoxy and the Descendants of the Sage https://www.research[...]
[10] 학술지 The Ritual Formation of Confucian Orthodoxy and the Descendants of the Sage https://www.jstor.or[...] 1996
[11] 서적 島田1967年、pp.162-164
[12] 백과사전 장재
[13] 백과사전 정몽
[14] 뉴스 좌우명 https://www.cctimes.[...] 충청타임즈
[15] 백과사전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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