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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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우순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활동한 인물이다. 평양 출신으로, 1909년 서북학회 기관지에 기고하며 민족주의 계몽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본어 신문 평양신문 주필과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3·1 운동 이후 친일 단체 대동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며, 조선총독부의 밀정으로 활동했다.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으며, 1933년 사망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선우순은 성장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젊은 시절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일본어 신문인 평양신문 주필을 지냈고,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1]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1915년 12월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포교 활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동생인 선우갑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기록에 따르면 선우순의 한자는 鮮于金筍으로 전한다. 그대로 읽으면 '''선우금순'''이 되지만 그냥 '''선우순'''이라고 부른다. 사실 금(金)자에 순(筍)자를 더한 '순' 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같은 한자 문화권인 한국, 일본, 중국 등에서도 쓰이지 않는 글자이다. 따라서 금(金)자가 누락되었는데 이것이 성이 바뀌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같은 평양 출신 가수인 선우일선은 본명이 최창선(崔昌善)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독 평안남도 평양시 출신에는 선우순 외에도 선우갑, 선우일, 선우영빈 등 친일 전력자가 많아, 평안북도 정주시 출신의 독립운동가 선우혁, 선우훈 등과 대조를 보였다.
[1]
서적
친일파 99인 2
돌베개
1993-03-01
2. 생애
1919년 3·1 운동 이후, 선우순은 일본 조합교회의 대시국 특별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3·1 운동 후속 시위들을 진정시키고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퍼뜨렸다. 1920년에는 대동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과의 융화와 공존공영을 주장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민원식, 유일선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꼽혔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기도 했다.[1]
이후에도 일선융화, 공존공영 및 독립반대 운동을 펼치다 1933년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성장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9년 박은식과 이동휘의 서북학회 기관지에 기고한 기록으로 보아, 젊은 시절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1]
1910년 일본어 신문인 평양신문 주필을 지냈고, 같은 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에는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전도사 수업을 받았다. 이 과정 또한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 조합교회에서 설립한 평양기성교회 신자로서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 유학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1]
2. 2. 친일 활동
선우순은 1910년 일본어 신문인 평양신문 주필을 지냈고, 같은 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에는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전도사 수업을 받았다.[1]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 조합교회의 대시국 특별 운동(對時局 特別 運動)이 전국에서 이어졌는데, 이때 선우순은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열린 강연회에 적극 참가하여 3·1 운동 후속 시위들을 진정시키고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주지시키는 일에 뛰어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민심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총독부의 수습책을 건의하는 밀정 활동도 병행했다.[1]
1920년 평안도 지방의 친일 인물들을 규합한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선우순은 대동동지회 소속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처럼 일본과 융화하여 공존공영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동동지회는 기관지 《대동신보》와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여 이러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했다.[1]
3·1 운동 이후 민원식, 유일선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친일 인물로 급부상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인 면담 횟수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선우순은 면담 횟수 1위(46회, 2위는 송병준의 33회), 1922년부터 1923년까지 2위(34회, 1위는 민흥식의 36회),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다시 1위(39회, 2위는 이진호의 37회)를 기록하여, 이 기간 중 사이토가 가장 가까이 한 인물이었다. 1919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와 119회나 밀담을 나누어 22일에 1회꼴이었다.[2][3]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1]
독립단 안주 지단장 홍이도(洪彞度) 등 몇 사람의 가출옥을 미끼로 금품을 사취하고 피소되었으나, 총독부는 담당 검사를 일본인으로 교체하면서까지 불기소 처분했다.[1]
이후 일선융화·공존공영 및 독립반대 운동을 하다가 1933년 사망했다.[1]
3. 사후 평가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우순, 선우갑 형제가 포함되었다.
조선총독 사이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물은 밀정으로 악명 높은 선우순이다. 그는 1919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와 119회나 밀담을 나누었다.
4. 이름에 대한 논란
참조
[2]
서적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비평사
1998-11-05
[3]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4]
뉴스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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