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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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세웅은 북주와 수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무장이다. 그는 북주 무제 휘하에서 북제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고, 수나라에서는 번우의 반란을 진압하고 토욕혼을 정벌하는 등 여러 전공을 세워 관직이 올랐다. 608년에는 옥문도행군대장으로 돌궐과 함께 이오를 공격하여 승리했고,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참전했으나 패전하여 면직되기도 했다. 이후 다시 기용되어 활약했으나, 617년 이밀을 토벌하기 위해 하간에서 두건덕과 싸우다 패하여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청렴하고 용맹한 장수로 평가받았으며, 아들로는 설만술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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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세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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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설세웅(薛世雄) |
출생일 | 555년 |
출생지 | 하동군 분음현(지금의 산시성 완룽현) |
사망일 | 617년 (63세) |
사망지 | 탁군 |
사망 원인 | 분사(憤死) |
국적 | 북주 → 수나라 |
별칭 | 자(字)는 세영(世英) |
경력 | 우친위거기장군 → 우감문랑장 → 우익위장군 → 우후위장군 → 동북도대사 겸 연군태수 → 좌어위대장군 겸 탁군유수 |
직업 | 장군 |
칭호 | 의동삼사, 정의대부(훈관과 산관) |
적수 | 두건덕 을지문덕 |
자녀 | 설만숙, 설만균, 설만철, 설만비 |
관련 활동 | (주요 참전) 여수전쟁 하간 전투 |
2. 생애
설세웅은 북주 경주의 자사 설회(자: 도홍)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북주 무제 휘하에서 북제를 토벌하여 공적을 세워 수두독에 임명되었다. 수나라 개황 연간에는 여러 전공으로 의동삼사・우친위거기장군에 이르렀다.[1] 604년 수 양제 즉위 후 번우의 소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나섰고, 우감문랑장으로 전임되었다. 양제를 따라 토욕혼을 토벌하여 통의대부에 올랐다.
세웅은 청렴하고 신중했으며, 전장에서 승리해도 약탈이나 횡령을 하지 않아 양제에게 칭찬받았다. 양제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세웅을 훌륭한 사람이라 칭찬하며 우익위장군에 임명했다.
608년, 옥문도행군대장이 되어 돌궐 계민가한과 함께 이오를 공격하게 되었다. 옥문관에 도착했지만, 계민가한은 맹약을 어기고 오지 않았다. 이에 세웅은 고립된 군대로 막하연적을 넘어 이오로 향했다. 이오는 수군이 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요격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세웅의 군대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항복을 요청했다. 세웅은 한나라 옛 이오성의 동쪽에 성을 쌓고 신이오라 이름 짓고, 은청광록대부 왕위를 남겨두고 귀환했다. 양제는 기뻐하며 세웅을 정의대부로 올렸다.
612년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서 옥저도군장[2]을 맡아 우문술과 함께 평양에서 패했다. 백석산에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정예 기병 200명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귀환했다. 패전 책임으로 면직되었다.[3] 613년 두 번째 고구려 원정 때 우후위장군으로 다시 기용되어 답돈도로 진격했다. 오골성에 도착했을 때 양현감의 난 소식이 들려와 군을 돌렸다. 양제가 유성에 도착하자 동북도대사가 되어 탁군 태수를 대행하며 회원진에 주둔했다. 12개 군의 병마를 동원하여 돌궐을 공격하고 변방 밖을 순찰하고 귀환했다. 614년 세 번째 고구려 원정 때 좌어위대장군이 되어 탁군유수를 겸임했다.
617년, 이밀이 낙양으로 쳐들어오자, 탁군 군사를 모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간성 남쪽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두건덕을 토벌하려 했다. 두건덕은 정예 병력 수백 명[6]으로 야습을 감행했다. 안개가 짙어 군 통솔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상황 파악도 어려워 대패했다. 세웅과 측근 수십 기[8]는 하간성으로 도망쳤다. 병을 얻어 탁군으로 돌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향년 63세였다.
아들로는 설만술, 설만숙, 설만균, 설만철, 설만비가 있었는데, 모두 무명으로 알려졌다.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설세웅은 북주의 경주 자사 설회(자: 도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하며 지휘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 형세가 정연했다. 17살 나이에 북주 무제가 북제를 평정할 때 종군하여 그 공으로 수도독(帥都督)이 되었다.[1] 수나라 건국 후로도 수 차례 전공을 세워 의동삼사(儀同三司) 우친위거기장군(右親衛車騎將軍)에 올랐고, 양제가 즉위하자 우감문랑장(右監門郞將)으로 옮겼다. 토욕혼(토곡혼) 정벌에도 참가하여 통의 대부(通議大夫)까지 받았다.2. 2. 고구려-수 전쟁 참전
612년 제2차 여수전쟁에서 설세웅은 24개 군 중 좌(左) 제11군[2] 옥저도군을 맡았다. 별동대로 뽑혀 우문술, 우중문 등과 함께 평양까지 갔다가 철수하던 중 을지문덕에게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패하였다. 백석산(白石山)에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해 사면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설세웅은 파리한 병사들로 방진(方陣)을 짜고 기병 200명과 함께 돌파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갑옷이 무거워 칼을 빨리 휘두를 수 없다며 갑옷을 벗어던지는 용맹함을 보였다. 고구려군이 점차 물러나자 병사를 풀어 물리치고 돌아왔으나, 잃은 것이 많았다. 유사룡은 참수형에 처해지고 다른 장수들은 작위가 박탈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으나,[3] 설세웅은 이 행적 덕분에 면직되었다.613년 제3차 여수전쟁에 참전하여 우후위장군(右候衛―)을 받고 답돈도(蹋頓道)군으로서 오골성으로 향했으나 양현감의 난이 터져 철수하라는 명을 받았다. 614년 제4차 여수전쟁에도 좌어위대장군(左禦衛―)이 되어 종군하였다.
2. 3. 하간 전투와 죽음
와강군이 봉기하여 낙양이 위협받고 중원이 혼돈에 빠지자 617년 7월(음력) 그 토벌을 위해 30,000명을 이끌고 남하하다가 하간군(河間郡) 칠리정(七里井)에서[5] 두건덕을 만나 진을 쳤다. 두건덕은 정예병 수천 명을 늪지에 매복시키고는 병사들이 죄다 도망간다고 거짓 소문을 냈다. 설세웅은 자신이 두려워서 그런 줄 알고 경계가 해이해졌다. 두건덕이 이를 알고는 몸소 정예병 수백 명[6]과 함께 밤에 몰래 기습하였다. 때마침 안개가 짙게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세웅군의 진영은 붕괴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며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여기서 만여 명이 죽었다.[7] 설세웅은 주변의 수십 기(騎)만[8] 인솔한 채 하간성으로 물러났다. 그 수치심과 울분에 병이 나서 탁군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분사했다. 나이 63세였다.3. 성품과 평가
설세웅은 청렴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도 약탈이나 횡령을 하지 않아 양제에게 칭찬을 받았다. 양제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설세웅을 "청렴하고 바르며 절개가 있어 옛사람의 기질이 있다"라고 칭찬하며 우익위장군에 임명했다.[1] 주라후, 주법상, 이경, 설세웅, 모용삼장은 모두 용맹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부귀를 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2]
살수대첩 당시 수나라 군대가 거의 전멸할 위기에 처했을 때, 설세웅의 용맹 덕분에 소수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가계
참조
[1]
서적
자치통감
[2]
서적
수서
[3]
서적
자치통감
[4]
문서
수나라 말기의 대규모 농민 반란군
[5]
서적
신당서
[6]
서적
자치통감
[7]
서적
구당서
[8]
서적
구당서와 신당서
[9]
서적
신당서, 수서, 북사, 구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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