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소비에트 서부 공세 (1918년-1919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소비에트 서부 공세 (1918년-1919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이 물러간 동유럽 지역에서 볼셰비키 러시아가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한 일련의 군사 작전을 의미한다. 이 공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해외로부터의 혁명" 전략에 따라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혁명을 지원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독립 전쟁 및 분쟁이 발생했으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의 전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붉은 군대는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폴란드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동유럽의 지정학적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18년 전투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1918년 이탈리아군이 아르만도 디아스 장군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피아베 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비토리오 베네토를 점령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시키고 이탈리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 1918년 전투 - 탐페레 전투
    1918년 핀란드 내전 중 핀란드 노동 운동의 중심지 탐페레에서 벌어진 탐페레 전투는 백군의 포위 공격과 격렬한 시가전 끝에 백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양측과 민간인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전투 후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승전 기념물과 희생자 추모 기념물이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 러시아 내전 - 라트비아 독립 전쟁
    라트비아 독립 전쟁은 1918년 라트비아 독립 선포 후부터 1920년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 체결까지 라트비아에서 벌어진 군사적 충돌로, 라트비아 임시정부, 소비에트 러시아, 독일 제국 등 여러 세력이 개입하여 라트비아가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 러시아 내전 - 크론시타트 반란
    크론시타트 반란은 1921년 러시아 크론시타트 해군 기지에서 발생한 반볼셰비키 봉기로, 볼셰비키의 정책에 반발한 수병들이 자유로운 선거 등을 요구하며 일어났지만 무력 진압되었고 레닌의 권력 강화와 신경제정책 도입의 배경이 되었다.
소비에트 서부 공세 (1918년-1919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소비에트 서부 공세 (1918년~1919년)
교전 세력
교전 1백군
에스토니아 역사 (1920-1939)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폴란드
루마니아 왕국
우크라이나
프랑스 제3공화국
대영 제국
오버 오스트
핀란드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자원군
교전 2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임시 폴란드 혁명 위원회
우크라이나 SSR
핀란드 적위대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야니스 푸린슈
요한 라이도네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막스 호프만
지휘관 2유쿰스 바체티스
드미트리 나데요주니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총합: 미상, 70,000+
에스토니아: 19,000
폴란드: ~50,000
병력 규모 2285,000
결과
결과붉은 군대에 의한 발트해 연안 국가와 벨라루스 대부분 점령, 소비에트 공화국 창설 - 라트비아 SSR, 리투아니아 SSR, 벨로루시 SSR

2. 배경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획득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3]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독일 제국이 자국을 제한적으로 독립시켜 완충 지대로 삼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의 독립 약속에 기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몰락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체적으로 해체되면서, 이들은 중부 유럽에 직접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적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지속되면서 이 문제에 간섭할 수 없었다.

독일 제국군이 철수하면서 수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이 지역을 버리고 고국으로 귀환했다. 한때 동맹국이 점령했던 이 지역은 독일이 계획했던 대로 창설된 지역 정부와 독일군이 물러나고 나서 새로이 탄생한 지역 정부, 폴란드, 그리고 이 지역을 볼셰비키 러시아로 통합하고자 하는 볼셰비키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벨라루스인,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심지어는 코자크 족이 세운 새로운 국민 국가가 탄생했다. 내부 투쟁은 벨라루스 정부가 지속적으로 힘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했고, 우크라이나는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단체와 공산주의자, 백군, 새로 탄생한 폴란드군, 그리고 옛 연합군이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면서 더욱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 버려진 지역에서 루마니아, 연합국, 헝가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꼬였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혁명적 대중이 혁명을 원하지만, 더 조직적이고 진보된 볼셰비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가정에 기반한 새로운 전략인 "해외로부터의 혁명"(Revolutsiya izvne)을 실행하고 있었다.[3]

2. 1.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획득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3]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독일 제국이 자국을 제한적으로 독립시켜 완충 지대로 삼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의 독립 약속에 기뻐했다.[3] 그러나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패배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체적으로 해체되면서, 이들은 중부 유럽 내에 직접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3] 당시 독일 제국의 적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이 문제에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개입할 수 없었다.[3]

독일 혁명 소식을 접한 소련 정부는 1918년 11월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무효화하고, 붉은 군대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방향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

2. 2. 독일 제국의 패망과 러시아 내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얻은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어야 했다.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독일 제국이 자국을 제한적으로 독립시켜 완충 지대로 삼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의 독립 약속에 기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몰락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체적으로 해체되면서, 이들은 중부 유럽에 직접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적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지속되면서 이 문제에 간섭할 수 없었다.

독일 제국군이 자국으로 철수하면서 수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이 지역을 버리고 고국으로 귀환했다. 한때 동맹국이 점령했던 이 지역은 독일이 계획했던 대로 창설된 지역 정부와 독일군이 물러나고 나서 새로이 탄생한 지역 정부, 폴란드, 그리고 이 지역을 볼셰비키 러시아로 통합하고자 하는 볼셰비키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벨라루스인,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심지어는 코자크 족이 세운 새로운 국민 국가가 탄생했다. 내부 투쟁은 벨라루스 정부가 지속적으로 힘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했고, 우크라이나는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단체와 공산주의자, 백군, 새로 탄생한 폴란드군, 그리고 옛 연합군이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면서 더욱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 버려진 지역에서 루마니아, 연합국, 헝가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꼬였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대중이 혁명을 원하지만 더 조직적이고 진보된 볼셰비키의 도움 없이는 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반한 새로운 전략인 "해외로부터의 혁명"(Revolutsiya izvne)을 실행하고 있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혁명은 "총검으로 가져와야" (붉은 군대) 하며, "키예프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길이 이어지고, 프스코프와 빌뉴스(빌니우스)를 통해 독일 혁명과 연결되는 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든 전선에서 공세! 서부 전선에서 공세, 남부 전선에서 공세, 모든 혁명 전선에서 공세!" 이 개념은 1918년에 개발되었지만, 1920년에 처음으로 그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Wojennaja Mysl i Riewolucija'', 3/1920, 미하일 투하체프스키).[3]

2. 3. 볼셰비키의 "해외로부터의 혁명" 전략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혁명적 대중이 혁명을 원하지만, 더 조직적이고 진보된 볼셰비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가정에 기반한 새로운 전략인 "해외로부터의 혁명"(Revolutsiya izvne)을 실행하고 있었다.[3] 레프 트로츠키는 혁명은 붉은 군대의 "총검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언급했다.[3] 키예프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길이 이어지고, 프스코프빌뉴스(빌니우스)를 통해 독일 혁명과 연결되는 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3] 볼셰비키는 "모든 전선에서 공세! 서부 전선에서 공세, 남부 전선에서 공세, 모든 혁명 전선에서 공세!"를 외쳤다.[3] 이 개념은 1918년에 개발되었지만, 1920년에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Wojennaja Mysl i Riewolucija'' (3/1920)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했다.[3]

이 전략은 붉은 군대를 통해 동유럽 지역을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볼셰비키는 주변 국가에 혁명을 전파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3. 주요 분쟁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얻은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독일 제국이 자국을 제한적으로 독립시켜 완충 지대로 삼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의 독립 약속에 기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서부 전선으로 몰락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체적으로 해체되면서, 이들은 중부 유럽 내에 직접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적이었던 러시아 제국러시아 혁명이 지속되면서 이 문제에 간섭할 수 없었다.[3]

독일 제국군이 자국으로 철수하면서, 한때 동맹국이 점령했던 지역은 독일이 계획했던 지역 정부, 독일군 철수 후 등장한 지역 정부, 폴란드, 그리고 이 지역을 볼셰비키 러시아로 통합하려는 볼셰비키 간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벨라루스인,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코자크 족 등이 세운 새로운 국민 국가가 탄생했다. 내부 투쟁으로 벨라루스 정부는 지속적인 힘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우크라이나는 아나키스트 단체, 공산주의자, 백군, 폴란드군, 옛 연합군 등이 뒤섞여 더욱 복잡한 상황이었다. 루마니아, 연합국, 헝가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은 독립 투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 러시아와 충돌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대중이 혁명을 원하지만, 조직적인 볼셰비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가정하에 "해외로부터의 혁명"(Revolutsiya izvne)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실행했다. 레프 트로츠키는 혁명이 "총검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키예프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과, 프스코프와 빌뉴스(빌니우스)를 통해 독일 혁명과 연결된다고 말했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모든 전선에서 공세! 서부 전선, 남부 전선, 모든 혁명 전선에서 공세!"를 외쳤다.[3]

3. 1. 핀란드 내전 (1918)

핀란드는 1917년까지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1917년의 독립 선언은 핀란드를 통일시키는데 실패했으며, 민족주의자인 핀란드 백위군과 사회주의 세력인 붉은 핀란드가 대립하는 양상을 띄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18년 1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군대의 지원을 받은 붉은 핀란드 군이 핀란드 백위군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1]

붉은 핀란드군은 1918년 2월 대규모 공세를 펼쳤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3월부터는 핀란드 백위군이 반격을 시작했고, 템페레 전투에서 붉은 핀란드군을 격파하면서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다. 1918년 4월에는 독일 제국의 군대가 핀란드 백위군을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스웨덴, 폴란드, 에스토니아에서도 의용군이 핀란드 백위군을 지원하였다.[1] 결국 5월 15일 붉은 핀란드 군이 항복하면서 내전은 끝나게 되었고, 러시아군은 1918년 11월에 핀란드에서 철수하였다.[1]

3. 2.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1918-1920)

1918년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 에스토니아는 1918년 2월 독립을 선포했고, 2월 24일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독일 제국군이 2월 25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을 점령하면서 임시 정부는 멸망했다.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이 항복하면서 에스토니아인들은 다시 독립적인 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군대는 에스토니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1918년 11월 28일 나르바에 주둔한 에스토니아 국경 수비대를 공격했고, 이로써 러시아 사회주의 군과 에스토니아 군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4]

초기에 러시아 사회주의 군은 에스토니아 군대를 압박하여 에스토니아 영토의 절반 가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1919년 12월 23일 영국 해군 부대가 에스토니아 군을 지원하고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해군 순양함 2척을 나포하면서 에스토니아군은 해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군대는 탈린에서 34km 떨어진 아이나지를 점령했다.

1919년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에스토니아 군은 핀란드 의용군과 연합하여 1919년 1월 라그나 전투와 파유 전투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백군, 잉그리안 인들의 의용군이 에스토니아에서 창설된 외국인 용병 부대에 편입되었다. 1919년 5월부터 에스토니아는 공세로 전환하여 러시아 사회주의 군과 발트 해 독일군 부대를 공격했다. 1919년 6월, 라트비아와 연합한 에스토니아는 체시스 전투에서 발트 해 독일군 부대에 승리했다. 11월 18일부터 12월 30일까지는 크리바수 전투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당시 전선은 페트로그라드 인근까지 뻗어 있었다.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제7 적군의 그도프 및 얌부르크 파견대는 1918년 11월 22일 나르바 시를 방어하던 독일 제405 보병 연대를 공격했다. 제6 적 사단은 12월 24일 새로 창설된 에스토니아 육군의 제4 및 제5 연대에서 타파 철도 분기점을 점령하고 수도 탈린 인근까지 진격했다. 11월 29일, 나르바에서 얀 안벨트가 이끄는 에스토니아 볼셰비키들은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이라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남부 에스토니아에서는 제49 적 라트비아 사수 연대가 12월 17일 발가 철도 분기점을, 12월 24일에는 타르투 시를 점령했다. 에스토니아군은 1919년 1월 2일부터 5일까지 전선 전체에서 제7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틀 후 에스토니아군은 에스토니아에서 소비에트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핀란드 자원 해병 여단이 제6 적 사단의 후방에 상륙했고, 제1 에스토니아 사단은 1월 18일 나르바를 점령했다.

이후 북동부 전선은 나르바강을 따라 안정되었다. 남부 에스토니아에서는 에스토니아 특공대 형태의 타르투마 파르티잔 대대가 1월 31일 파유 전투에서 붉은 라트비아 사수 연대를 발가에서 몰아냈다. 제7 적군은 일시적으로 에스토니아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2월 16일 적군은 에스토니아를 탈환하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이른바 에스토니아 적 사수 부대를 포함한 소비에트군은 3월 15일까지 세토마 지역, 바스텔리나 및 래피나를 점령했다. 에스토니아 제2 사단은 반격하여 3월 28일까지 페체리를 탈환했다. 유사한 전투가 아이나지–스트렌치–알루크스네 전선을 따라 에스토니아군과 라트비아 적군의 북부 집단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이 전선은 북라트비아에서 안정되었다. 나르바강을 따라 위치한 에스토니아 제1 사단은 제7 적군의 공격을 격퇴했다.[4]

3. 3. 라트비아 독립 전쟁 (1918-1920)

라트비아에스토니아와 마찬가지로 1918년 11월 17일 라트비아 인민 위원회를 수립했다. 1918년 11월 18일, 리가에서 라트비아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이에 반발한 러시아 적군이 1918년 12월 1일 라트비아를 침공했다.[1] 1918년 1월 5일 라트비아 제1독립여단이 창설되었지만, 라트비아 임시 정부는 옐가바에서 리에파야로 후퇴하였다.[1] 1918년 3월 3일, 연합 독일군과 라트비아 군이 러시아 적군을 상대로 반격을 시작하여, 3월 10일 살두스를 탈환했다.[1] 그러나 발트 해 독일군 부대가 라트비아와 러시아 적군의 대립을 틈타 1919년 5월 22일 수도 리가를 점령했다.[1]

라트비아는 발트 해 독일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에 맞서 에스토니아와 연합하여 반격을 가했다.[1] 1919년 5월 16일에는 에스토니아 부대가 라트비아 북부에서 러시아 적군을 상대로 공세를 시작했고, 같은 해 친독일 임시 정부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과 휴전 조약을 맺었다.[1] 이후 1920년 폴란드가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 적군을 공격하였다.[1] 다우가프필스 전투에서 러시아 적군이 패배하자,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0년 8월 리가 조약을 통해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했다.[1]

3. 4. 벨라루스 지역 분쟁

1918년 12월 10일, 붉은 군대는 거의 저항 없이 민스크에 진입하여 단명한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을 종식시켰다.[3] 1919년 1월 1일,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SSRB)이 스몰렌스크에서 선포되었고, 1월 8일 SSRB 정부는 민스크로 이전했다.[3]

한편, 서부 벨라루스 전역에는 폴란드와 벨라루스 자위 부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주로 현지 징집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신문에서 "붉은 위협"으로 묘사된 것으로부터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이 지역에서는 비슷한 볼셰비키 집단도 활동했으며, 양측 간에 일련의 충돌이 일어났다.[3]

1919년 첫 주 빌나에서 벌어진 폴란드-소련 간의 투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였다. 폴란드 민병대가 소련 서부 군대의 첫 번째 조직 부대가 도시에 진입한 후 철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폴란드군은 자위 부대를 돕기 위해 동쪽으로 부대를 파견하기 시작했고, 소련도 반대 방향으로 같은 조치를 취하면서 공개적인 충돌은 불가피해졌다.[3]

3. 5. 우크라이나 지역 분쟁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이후, 볼셰비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18세기와 19세기에 합병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현재의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국가 지역은 독일 제국에 양도되었고, 독일은 이들 국가에 완충국으로서 제한적인 독립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패배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인해 미텔유로파 계획은 무산되었다.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독일이 세운 꼭두각시 정부, 지역 민족주의 정부, 폴란드, 그리고 이 지역을 소비에트 러시아에 통합하려는 볼셰비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민족 정부가 수립되었다. 벨라루스에서는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해 어떠한 정부도 지속적인 권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세력, 공산주의자, 백군 운동, 다양한 우크라이나 정부, 그리고 재건된 폴란드군 사이의 계속된 갈등으로 인해 더욱 복잡했다.

볼셰비키는 "해외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추진했다. 레프 트로츠키는 혁명이 "총검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키예프를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과 연결하고, 프스코프와 빌뉴스(빌니우스)를 통해 독일 혁명과 연결된다고 역설했다.

붉은 군대는 1918년 12월 10일, 별다른 저항 없이 민스크에 진입하여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을 멸망시켰다. 1919년 1월 1일,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스몰렌스크에서 선포되었고, 1월 8일 정부는 민스크로 이전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벨라루스 자위 부대가 벨라루스 서부 지역에 나타나 볼셰비키 세력과 충돌했다. 1919년 초, 빌나를 둘러싼 폴란드-소련 간의 투쟁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전조였다.

1919년 1월 12일, 소련 최고 사령부는 네만강 방향으로의 정찰을 명령했고, 2월 12일에는 부크강까지 정찰 범위를 확대했다. 유쿰스 바체티스는 새로운 서부 사령부에 틸지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코벨, 리브네까지 "심층 정찰"을 수행할 것을 지시했다.

볼셰비키의 목표 중 하나는 동유럽과 중부 유럽을 거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발생한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실제로 비스툴라강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작전의 주된 목표는 전후 동유럽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독립적인 정부가 등장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폴란드-소련 충돌은 2월 중순 베레자 카르투스카와 모스티 마을 부근에서 발생했다. 소련의 공세는 2월 말에 중단되었고, 폴란드군과 소련군 사이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1918년 초, 베사라비아는 몰도바 민주 공화국으로 두 달 동안 독립 상태를 유지하다가 루마니아와 통합되었다.[5] 소비에트는 이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고, 무력으로 이 지역을 탈환하려 했으나 드네스트르 강을 따라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는 데 그쳤다. 러시아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 지역은 볼셰비키의 공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되었다.

4. 결과

붉은 군대는 독일 제국군이 철수하면서 생긴 공백지를 통해 1918년 12월 10일에 거의 저항 없이 민스크에 진입,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을 종식시켰다. 1919년 1월 1일, 스몰렌스크에서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SSRB)이 선포되었고, 1월 8일 정부는 민스크로 이전했다.[4]

소련의 서진과 폴란드의 벨로루시 동진으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폴란드 사이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양측 군대는 국지전을 벌였고, 이는 1919년 4월 폴란드의 빌뉴스 공세로 시작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의 전주곡이었다.[4]

5. 역사적 의의

노먼 데이비스는 저서 ''백색 독수리, 붉은 별''(1972)에서 이 공세에 대한 포괄적인 역사적 분석을 수행하면서, 공세의 암호명인 "비슬라 목표"를 언급했지만, 이는 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데이비스는 "비슬라 목표"가 소련 공세의 암호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용어는 당시 폴란드 및 소련 역사학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투하체프스키의 회고록 제목인 "비슬라 강 너머로의 원정"(''Pokhod za Vislu'')을 참고할 수 있다. 이 공세는 ''비슬라 작전''(폴란드어 ''Operacja Wisła''에서 유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6] 그러나 "비슬라 작전"은 다른 사건을 지칭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5. 1.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핀란드에스토니아의 독립 전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독립운동 전략과 전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독립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주독립의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했다. 핀란드는 1917년까지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독립을 쟁취했다. 에스토니아는 1918년 2월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했으나, 독일 제국군에 의해 수도 탈린이 점령되면서 멸망했다. 그러나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이 항복하면서 에스토니아는 다시 독립적인 정부 수립을 시도했고,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타르투 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았다.[4]

5. 2. 동유럽 지역의 지정학적 변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획득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독일 제국이 제한적인 독립을 부여하여 완충 지대로 삼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의 독립 약속에 고무되었다. 그러나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체적으로 해체되면서, 이들 국가는 중부 유럽에 직접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적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지속되면서 이 문제에 간섭할 수 없었다.[3]

독일 제국군이 자국으로 철수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이 지역을 버리고 고국으로 귀환했다. 한때 동맹국이 점령했던 이 지역은 독일이 계획의 일환으로 창설한 지역 꼭두각시 정부, 독일군 철수 후 등장한 지역 민족주의 정부, 폴란드, 그리고 이 지역을 볼셰비키 러시아에 통합하려는 볼셰비키 간의 갈등의 장이 되었다. 벨라루스인,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심지어는 코자크 족이 세운 새로운 국민 국가가 탄생했다. 내부 투쟁은 벨라루스 정부가 지속적인 힘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아나키스트 단체, 공산주의자, 백군 운동, 다양한 우크라이나 정부와 부활한 폴란드군, 그리고 옛 연합군이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루마니아, 연합국, 헝가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버려진 지역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붉은 군대는 병력이 증가하고 있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물러나는 서방의 방어 병력("Западная завеса")을 대체할 충분한 병력을 모아 1917년 러시아가 잃었던 영토를 독일군이 철수하는 대로 되찾을 수 있었다. 독일 혁명 소식을 접한 소련 정부는 1918년 11월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무효화하고, 붉은 군대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방향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16일에 새로 창설된 서부군은 1918년 11월 17일 밤, 철수하는 독일 제국군이 만든 작전 공백으로 진입했다.[4]

참조

[1] 웹사이트 Boganmeldelse: For Dannebrogs Ære - Danske frivillige i Estlands og Letlands frihedskamp 1919 af Niels Jensen http://www.chakoten.[...] 2011-06-18
[2] 서적 Ülevaade Eesti Vabadussõjast 1918–1920 http://www.ksk.edu.e[...] Kaitseliidu kirjastus
[3] 서적 Józef Piłsudski: marzyciel i strateg Wydawnictwo ALFA
[4] 서적 Estonian War of Independence 1918–1920 Esto
[5] 서적 Eastern Europe, Russia and Central Asia 2003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23-09-02
[6] 멀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