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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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성은 서진 말기, 동진 시대의 역사가이자 관료이다. 10세 무렵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피난하여 성장했고, 박학다식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동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특히 환온의 성한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안회현후에 봉해졌다. 그는 역사서 《위씨춘추》, 《진양추》 등을 저술했으며, 특히 《진양추》는 환온의 북벌 실패를 기록하여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삼국지》 주석가 배송지가 그의 역사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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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석은 오호십육국시대 전량의 마지막 군주로, 권력 투쟁으로 즉위했으나 혼란스러운 통치와 불안정한 외교 정책을 펼치다 전진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동진으로 망명했다. - 진나라 (위진)의 작가 - 상수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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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 | |
---|---|
기본 정보 | |
이름 | 손성 |
로마자 표기 | Son Sheng |
자 | 안국 |
로마자 표기 | An Guo |
생몰년 | 302년 ~ 373년 (추정) |
국적 | |
국가 | 진(晉) |
직업 | |
직업 | 역사가 |
저서 | |
주요 저서 | 《진양추(晉陽秋)》 |
가계 | |
아버지 | 손초 |
아들 | 손잠 손경 |
2. 생애
손성은 서진 말기에 태어나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했다. 이후 동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젊은 시절 손성은 주역 학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인호, 왕맹, 사상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의 논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5][6] 정계에 입문한 후, 도간, 유량, 환온 밑에서 일했으며, 쓰촨성까지 그를 따라갔다.
역사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위씨춘추』, 『진양추』, 『촉세보』, 『이동잡어』 등을 저술했다. 특히 『진양추』 집필 당시 권력자였던 환온의 북벌 실패를 사실대로 기록하여 아들이 수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전연의 모용준에게 자신의 저작을 보내어 결과적으로 손성의 문장은 지켜졌다.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에서 손성의 저서를 자주 인용하며, "손성과 습착치는 이견을 찾아내어 누설하는 일이 없다"고 칭찬했다. 다만, 사서의 인물 발언을 『좌전』 등에서 유래한 고사로 윤색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서진 말기, 손성의 아버지 손순은 영천 태수를 지냈으나, 전란에 휘말려 도적에게 살해당했다. 손성은 10세 무렵, 전란을 피해 북방에서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피난했다.[3] 성장하면서 박학다식하고 사리에 밝다는 평판을 얻었다.동진 조정에 좌저작랑(佐著作郞)으로 벼슬을 시작했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과 연로한 부모를 위해 녹봉을 찾아 유양 현령(瀏陽令)이 되었다. 형강 이주 자사 도간에게 참군으로 발탁되었고, 후임 유량에게도 참군으로 등용되었다. 유량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자 사마(司馬)를 겸임하며 참군을 계속 맡았다. 당시 승상 왕도와 남만교위 도칭(도간의 아들)의 불화로 유량과 왕도가 서로 의심할 때, 손성이 유량을 설득하여 왕도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2. 2. 환온과의 관계 및 성한 정벌
유량의 뒤를 이어 유익이 부임하면서 손성은 안서자의참군에 임명되었지만, 후에 정위정이 되었다.[3] 환온이 유익의 후임으로 부임하자 손성은 참군이 되어 환온의 성한 정벌에 종군했다.[3] 환온이 이끄는 보병 부대가 성한을 공격할 때, 손성은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하여 도적 떼의 습격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7] 성한 멸망 후, 공을 인정받아 안회현후에 봉해졌다.[3] 성도 입성 시, 촉한 유비의 후손 유현을 만났다.[3]2. 3. 후기 관직 생활 및 사망
환온을 수행하여 종사중랑이 되었고, 관중을 거쳐 낙양까지 진출했다. 작위는 오창현후까지 올랐고, 장사 태수에 임명되었다.[3] 손성은 젊은 시절 가난으로 고생했기에, 출세한 후 재산을 늘리는 데 힘썼으며, 사리사욕을 채웠지만, 환온은 이를 묵인했다.[8]그 후에도 점차 승진하여 비서감, 급사중을 역임했다. 사망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저술 활동
손성은 역사가로서 『위씨춘추』 20권, 『진양추』 32권, 『촉세보』, 『이동잡어』(『이동기』, 『이동평』, 『잡기』로도 불림) 등 다양한 역사서를 저술했다.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을 달 때 손성의 저서를 자주 인용했다.
3. 1. 『진양추』 집필 일화
손성은 『진양추』를 집필하면서, 당시 권력자이자 자신의 은인이었던 환온의 북벌 실패를 가감 없이 기록했다. 환온과 그의 압력을 두려워한 손성의 아들이 내용 수정을 요구했으나, 손성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손성은 자신의 저작을 환온의 정적이었던 전연의 모용준에게 보내어 보존했다.3. 2. 배송지의 평가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에서 손성의 저서를 자주 인용하며, 그의 역사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배송지는 "손성과 습착치는 이견을 찾아내어 누설하는 일이 없다"고 칭찬했다. 다만, 손성이 사서의 인물 발언을 좌전 등의 고사로 윤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비판했다.4. 가계
孫盛|손성중국어은 조위의 중신 손자의 현손이다.
관계 | 이름 | 사망 |
---|---|---|
증조부 | 손자 | 251년 |
고조부 | 손굉(孫宏) | |
조부 | 손초(孫楚) | 293년 |
부 | 손순(孫恂) | 311년 |
아들 | 손잠(孫潛) | |
아들 | 손방(孫放) |
손잠(孫潛)은 자가 제유이며, 예장군 태수를 지냈다. 손방(孫放)은 자가 제장이며, 장사국 상을 지냈다.
5. 역임 관직
관직명 |
---|
부참군(參軍事) |
안회현후(安懷縣侯) |
오창현후(吳昌縣侯) |
장사태수(長沙太守) |
비서감(秘書監) |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Book of Jin
[3]
서적
Book of Jin
[4]
서적
Shih-shuo Hsin-yü
[5]
서적
Shishuo Xinyu
[6]
논문
Chinese Letters and Scholarship in the Third and Fourth Centuries
[7]
서적
Book of Jin
[8]
서적
Book of Jin
[9]
서적
三国志
[10]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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