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진수 (서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진수(陳壽)는 《삼국지》의 저자이며, 촉한에서 관료로 시작하여 서진 시대에 좌저작랑 등을 역임했다. 그는 삼국 시대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를 편찬했는데,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았지만 촉한 출신으로 촉나라의 기록도 상세하게 다루었다. 《삼국지》는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다른 저술로는 《고국지》, 《익부기구전》 등이 있다. 그는 29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저술은 중국 사학 발전에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97년 사망 - 왕혼
    왕혼은 조위 장군 왕창의 아들로 서진 시대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며,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상서좌복야와 사도를 역임하다 297년에 사망하여 원공의 시호를 받았다.
  • 진나라 (위진)의 역사가 - 배송지
    배송지는 동진과 유송 시대의 인물로, 진수의 《삼국지》에 대한 방대한 주석 작업인 '배송지주'를 완성하여 《삼국지》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 역량도 발휘하며 역사 연구에 기여했다.
  • 진나라 (위진)의 역사가 - 배잠
    배잠은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유표의 빈객으로 지내다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 대군 태수를 지내며 오환족을 안정시키는 등 치적을 쌓았고, 조비, 조예 시대를 거치며 요직을 역임, 상서령으로 인사 제도 개혁을 주도했으며 진수는 그를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라고 평했다.
진수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성:
이름: 수 (壽)
자: 승조 (承祚)
출생일233년경
출생지촉한 바서군 남충
사망일297년 (64세)
사망지서진 하남군 낙양
직업역사가, 정치인, 작가
주요 작품
주요 작품삼국지
제갈량집
익주지
고국지
관직론
석휘
광국론
친척진부 (조카)
진리 (조카)
진계 (친척)
한자 표기
한자陳壽
간체陈寿
병음Chén Shòu
일본어한자: 陳壽
히라가나: ちん じゅ
로마자: Chin Ju
한국어한글: 진수
한자: 陳壽
로마자: Jin Su
베트남어Trần Thọ
기타
생몰년출생: 건흥 11년 (233년)?
사망: 원강 7년 (297년)?
承祚(승조)
소속 왕조서진
관직태자중서자
주군유선 → 사마염 → 혜제
참고
참고 사항진서 진수전과 화양국지에 따르면 사망 연도가 다르며, 화양국지에서는 "장화가 사망한 300년 이후"로 기록되어 있다.
관련 인물진부와 진리는 진수의 형의 아들이며, 진계는 진리의 사촌이다. 또한 삼국지연의 이탁오본에서는 제100회 총평에서 "진수가 후에 역사책을 편찬할 것을 알았더라면 이때 진식을 죽이지 않는 편이 오히려 좋았을 것"이라고 쓰여 있어, 진수가 진식의 친척인 것처럼 쓰여 있다.

2. 생애

삼국지》의 저자이며, 진수의 부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마속의 참군을 지냈고 제갈량이 마속을 벨 때 머리를 깎이는 곤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일찍이 촉한의 관리를 지냈으며, 초주의 문하에 있었다. 진수가 출사한 후, 촉나라에서 관각영사(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환관 황호에게 핍박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진나라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이후, 진수의 재능을 알아챈 사공 장화의 추천을 받아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좌저작랑(佐著作郞)·양평령(陽平令)을 역임했고, 저작랑·파서군중정(巴西郡中正)으로 전임했다.

진수는 삼국 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그는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나라의 신하였기에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 위나라와 오나라와는 달리 촉나라에는 엄밀한 의미의 사관은 없었지만, 진수는 촉나라의 관리였기 때문에 촉나라 기술의 부족함을 덜 수 있었다.

진나라의 장화는 진수의 뛰어난 안목과 탁월한 재능을 칭찬하고 황제에게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장화의 정적이었던 순욱 등의 훼방으로 진수는 장광 태수로 전임됐다. 이후 진나라의 황제는 진수의 재능을 인정하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했다. 이후 모친이 별세하자 진수는 관직을 버렸다. 낙양에 시신을 묻으라는 모친의 유언을 따랐으나,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예를 어겼다는 이유로 향당의 비난을 받았다.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古國志)》50편,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관사론(官司論)》, 《석휘(釋諱)》, 《광국론(廣國論)》, 《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을 편찬해 중국 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진서》〈진수전〉에서 진수를 평하길, 반고사마천을 이어 이전의 전(典)을 이을 자는 오직 진수 뿐이라고 호평했다.

진수에 대한 전기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4세기 동진(晉, 265~420) 시대 장구(常璩)가 저술한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는 7세기 당(唐) 시대 방현령(房玄齡) 등이 저술한 《진서(晉書)》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삼국 시대 촉한(Shu Han)에서 관리로 출사했으나, 촉한 말기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황호(Huang Hao)에게 아첨하기를 거부하여 좌천되어 수도에서 멀리 쫓겨났다. 263년 촉한이 위나라에 정복당한(Conquest of Shu by Wei) 후, 진(Jin)나라 정부에서 장화(Zhang Hua)의 추천으로 관직에 복귀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는 진나라 정부에서 주로 서기 및 비서직을 역임하다가 297년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에게는 200편이 넘는 저술이 있는데, 그중 약 30편은 친척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9]

陳寿(진수)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사료로는, 당(唐)나라 때 편찬된 『진서(晉書)』와 동진(東晉) 시대에 편찬된 『화양국지(華陽國志)』가 있다. 하지만 서로 모순되는 기록도 많이 보인다.

익주(益州) 파서군(巴西郡) 순경구(順慶區) 안한현(安漢縣)을 대표하는 명문가에는 진씨(陳氏), 조씨(趙氏), 엄씨(閻氏), 판씨(范氏)가 있었는데, “안한사성(安漢四姓)”이라 불렸다. 陳寿의 출신은 그중 하나인 “파서진씨(巴西陳氏)”이다.

陳寿는 처음에는 학식이 높은 조주(譙周)에게 사사하여 유학(儒學)과 사학(史學)을 익히고, 촉한(蜀漢)에 벼슬하였다. 그 후의 경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위장군(衛將軍) 제갈첨(諸葛瞻)의 주부(主簿)와 궁중 문고 관리자인 동관비서랑(東觀祕書郎)을 지냈다. 『진서(晉書)』에 따르면,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宦官) 황호(黃皓)의 뜻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좌천이나 강등을 당했다고 한다.[49] 또 아버지의 상중에 병에 걸려 하녀에게 약을 지어 먹게 한 것이 발각되어 불효자로 비난받았다.[51]

촉한 멸망(蜀漢滅亡) 후, 왕숭(王崇), 수량(壽良), 이밀(李密), 이양(李驤), 두렬(杜烈)(두진(杜軫)의 동생)과 함께 수도로 들어갔다. 6명은 익주(益州), 양주(梁州)를 대표하는 인재로 여겨졌다. 그들의 사이는 진(晉)에 벼슬하면서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온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5명과의 우정을 계속 유지했다고 한다. 한동안 벼슬하지 못하다가, 동문이자 옛 동료인 나헌(羅憲)의 추천으로 서진(西晉)에 벼슬하였다. 조작랑(佐著作郎)(7품관)으로 시작하여 저작랑(著作郎)을 지냈고, 두예(杜預)와 장화(張華)의 추천으로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겸 중서시랑(中書侍郎) 영저작랑(領著作郎)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익주(益州)의 지방사인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 문집인 『제갈량집(諸葛亮集)』을 편찬하여 장화(張華), 두예(杜預), 순숙(荀勗)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이 외에도 역시 높이 평가받았다는 『고국지(古國志)』를 저술하였다.[52] 진(晉)의 삼국 통일 후, 『삼국지(三國志)』를 완성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陳寿에게 훌륭한 사관의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또 장화(張華)는 『삼국지(三國志)』를 높이 평가하여, “『진서(晉書)』를 그대에게 맡기고 싶다”고 칭찬했다.[53]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장화(張華)와 순숙(荀勗)은 『고국지(古國志)』를 즐겨 읽었고, 陳寿는 과거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보다 낫다고 극찬했다.[54]

그 후, 장화(張華)는 중서랑(中書郎)에 임명하려고 했지만, 장화(張華)와 대립하고 있던 순숙(荀勗)은 陳寿를 싫어하여 관리에게 무고하여 외지인 장광군(長廣郡) 태수(太守)로 좌천시켰다. 陳寿는 이것을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사퇴했지만, 두예(杜預)의 추천으로 검찰 비서관인 시어사(侍御史) 치서(治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머니(『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계모)가 죽었기 때문에 퇴직하고, 어머니를 유언대로 낙양(洛陽)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고향의 묘에 장사 지내는 예법에 어긋난다고 다시 비난받았다.

수도로 돌아온 陳寿는 황태자 사마위(司馬遹)의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었지만, 『진서(晉書)』에 따르면 그 직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와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했다고 되어 있으며, 회제(惠帝)가 陳寿의 재능을 인정하는 말을 남길 정도로 칭찬했고, 장화(張華)도 구경(九卿)에 임명하려고 했다고 한다.[56] 『진서(晉書)』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재임 중인 원강(元康) 7년(297년)에 65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원강(元康) 9년(299년)에 사마위(司馬遹)가 폐태자 된 후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아직 생존해 있었다. 장화(張華)는 영강(永康) 원년(300년)에 실각하여 처형되지만, 陳寿가 이에 연좌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 후 낙양(洛陽)에서 죽었다고 한다.[57] 『진서(晉書)』에서는 원강(元康) 7년(297년)에 65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출생년도는 건흥(建興) 11년(233년)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사망 연도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2. 1. 촉한에서의 관직 생활

진수는 일찍이 촉한에서 관리를 지냈으며, 초주(譙周)의 문하에서 수학했다.[1] 촉나라에서 관각영사(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으나,[2] 환관 황호(黃皓)에게 아첨하지 않아 핍박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3][49]

진수의 부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마속(馬謖)의 참군을 지냈고 제갈량(諸葛亮)이 마속을 벨 때 곤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진수는 《사기》와 《춘추삼전》을 읽었으며,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에 매우 정통했다.[1]

촉한 말년(250년대~260년대경), 많은 관리들이 권력을 가진 환관 황호(黃皓)에게 아첨했지만, 진수는 이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 좌천되었고 촉나라의 수도인 성도에서 멀리 쫓겨났다.[3]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진수가 衛將軍 주부(主簿), 동관비서랑(東觀秘書郎; 사서관리), 산기시랑(散騎侍郎), 황문시랑(黃門侍郎)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아버지의 상중에 병에 걸려 하녀에게 약을 지어 먹게 한 것이 발각되어 불효자로 비난받기도 했다.[51]

2. 2. 서진에서의 관직 생활

진수(陳寿)는 《삼국지》의 저자로, 촉한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마속의 참군이었고, 제갈량이 마속을 처형할 때 곤형을 받았다. 진수는 초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촉한에서 관각영사(觀閣令史)를 지냈으나, 환관 황호에게 핍박받아 벼슬에서 쫓겨났다.[49]

서진 건국 후, 장화의 추천으로 서진의 관리가 되었다. 장화는 진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효렴으로 추천하고 ''좌저작랑''(佐著作郎)에 임명되었고 양평현(陽平縣)의 현령(令)을 겸임했다.[4] 진수는 ''저작랑''(著作郎)으로 승진하여 파서군(巴西郡)의 중정(中正)으로 임명되었다.[5]화양국지》는 그가 평양후(平陽侯)의 승상(相)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

진수는 삼국 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기술했으며, 촉나라 출신이었기에 촉나라 관련 기록의 부족함을 덜 수 있었다.

장화는 진수를 중서랑(中書郎; 궁궐 서기관)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순욱의 방해로 장광 태수로 전임되었다.[7]화양국지》에 따르면 순욱은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의 위서에 불만을 품고 같은 관서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아 진수를 장광군 태수로 재배치했다.[8]

278년,[9] 두유의 추천으로 어사치서(御史治書; 감찰관)에 임명되었다.[10][11] 모친상을 당했을 때, 모친의 유언에 따라 낙양에 장사 지냈으나, 고향에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12]화양국지》는 이 사건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돌아가신 분은 진수의 생모가 아닌 계모였으며, 계모는 아버지(안한현)와 함께 매장되기를 원하지 않았다.[13]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古國志)》,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등을 편찬하여 중국 사학 발전에 공헌했다. 《진서(晉書)》〈진수전〉에서는 반고사마천(司馬遷)을 이어 이전의 전(典)을 이을 자는 오직 진수 뿐이라고 호평했다.

2. 3. 《삼국지》 편찬

진수는 《삼국지》의 저자로, 촉한에서 관각영사를 지냈으나 환관 황호(黃皓)에게 핍박받아 벼슬에서 쫓겨났다. 진나라 건국 이후, 장화의 추천으로 관직에 복귀하여 좌저작랑, 양평령 등을 역임했다.

진수는 삼국 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기술했으며, 촉나라 출신이었기에 촉나라 관련 기술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룰 수 있었다.[62] 280년 이후 3세기에 걸쳐 65권으로 구성된 『삼국지』는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로 나뉘어 저명한 인물들의 전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19]

약 297년에 쓰여진 위지(魏志, 『위서』)의 본문. 위나라(曹魏)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장화는 진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황제에게 추천하려 했으나, 순욱 등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진수는 치서시어사에 임명되었고, 모친상 이후 고향에 묘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했다.

진수의 『삼국지』는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9] 하후湛은 자신이 집필 중이던 『위서』를 버릴 정도였고,[60] 유협은 손승의 『진양추』나 『위략』, 『오록』, 『강표전』 등을 비판하며 진수의 『삼국지』를 칭찬했다.[61]

진수 사후, 반규의 상소로 『삼국지』 필사 칙명이 내려져 사실상 공인된 역사서가 되었고,[63] 태종 시대에 정사로 인정받았다.[63]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 《익부기구전》 등을 편찬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지』의 부지(步騭) 전 부분, 둔황 사본 중 하나

2. 4. 말년

진수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버렸고, 모친의 유언에 따라 낙양에 시신을 묻었으나,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당시의 예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49][51]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古國志)》,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관사론(官司論)》, 《석휘(釋諱)》, 《광국론(廣國論)》, 《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 등을 편찬하여 중국 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52]

진서(晉書)》〈진수전〉에서는 반고사마천을 이어 이전의 전(典)을 이을 자는 오직 진수 뿐이라고 호평했다.[39]

진서(晉書)』에 따르면, 진수는 진혜제(晉惠帝)의 재위 기간 중인 297년에 65세(동아시아식 나이 계산)로 질병으로 사망했다.[15] 그러나 『화양국지(華陽國志)』는 진수가 300년 이후에 사망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진서』의 사망 연도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17] 『화양국지』에 따르면 진수는 팔왕의 난(八王之亂) 중에 장화가 사망한 뒤, 낙양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재능과 업적은 사망 당시 그의 지위에 반영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17]

3. 《삼국지》



|thumb|약 297년에 쓰여진 위지(魏志, 『위서』)의 본문. 위나라(曹魏)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80년 이후 3세기에 접어들 무렵, 진수는 그의 대표작인 65권짜리 『삼국지』(三國志,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후한 말기와 삼국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본서는 『위서』(魏書, Book of Wei), 『촉서』(蜀書, Book of Shu), 『오서』(吳書, Book of Wu)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당시 저명한 인물들의 전기가 주를 이룬다.

진수는 그의 저술로 당대의 칭송을 받았으며 뛰어난 역사가로 평가받았다. 같은 시대의 다른 역사가 하후잠 역시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 Wei Shu)를 집필하였으나, 진수의 『삼국지』를 읽은 후 자신의 저술을 파기하였다. 장화는 『삼국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진수에게 “『진서』(晉書, Book of Jin) 집필의 책임을 당신에게 맡겨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진수는 『삼국지』를 저술한 후 이처럼 높이 평가받았다.[19]

3. 1. 구성 및 특징

『삼국지』는 편찬 당시부터 뛰어난 역사서로 명성이 높았다. 하후湛은 『삼국지』를 보고 자신이 집필 중이던 『위서』를 버렸다고 한다.[60] 남제유협은 손승의 『진양추』나 『위략』, 『오록』, 『강표전』 등의 저술들을 쓸데없이 꾸미고 검증하기 어려운 내용이거나 내용이 공허하여 중요한 것에 대한 서술이 적다고 비난하는 한편, “진수의 『삼국지』만은 글에 통찰과 지식이 고루 갖춰져 있으며, 순욱과 장화가 사마천과 반고에 비견한 것도 헛된 칭찬이 아니다”라고 칭찬했다.[61]

『삼국지』는 위를 정통으로 다루었지만, 위를 정통으로 한 유사 서적은 대부분 『위서』( 왕침의 저술 등)처럼 위 단독의 제목으로 되어 있었다. 촉한과 오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위서』에서 서술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진수는 제목상으로는 삼국을 동등하게 다루었고, 본문 또한 『위서』, 『촉서』, 『오서』로 삼국을 나누어 다룬 데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원래 촉한에 벼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경어의 사용 등에서 촉한을 비교적 잘 다루려는 태도가 보인다. 의 이덕림은 『중답위수서』에서 “진수는 촉의 사람이므로 위를 한의 역적이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62]

『삼국지』는 사사(私撰)였지만, 진수 사후 양주 대중정·상서랑인 반규의 상소를 받아 『삼국지』를 필사하라는 칙명이 내려 사실상 공인된 역사서가 되었다.[63] 그 후 의 태종 시대에 정사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고국지』, 『익주기구전』 등 『삼국지』 이외의 그의 저술은 현존하지 않는다.

3. 2. 논란과 비판

진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러 비난과 논란에 직면했다.[20] 송나라의 학자 당긍(唐庚)은 그의 저서 『삼국잡사(三國雜事; Sanguo Zashi)』에서 역사가로서의 진수를 두 가지 이유로 비판했다.[20]

첫 번째는 삼국 시대 위(魏)의 관리였던 정의와 그의 동생 정의(丁廙)의 아들들이 진수에게 곡식 1000 석(斛)을 뜯어내려 했다는 것이다.[21] 진수가 『삼국지』에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이 곡식을 주지 않자 전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서(晉書)』는 이 일화 앞에 "혹운(或云)" 즉 "소문"이라는 말을 붙였다.[21] 청나라의 학자 판매(潘眉)는 진수가 정씨 형제에게서 곡식을 뜯어내려 했다는 『진서(晉書)』의 기록을 "근거 없는 말"이라고 비판했다.[22] 그는 정씨 형제가 위나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거나 중요한 업적을 남긴 유명한 관리가 아니었음을 지적하며, 그들이 유명한 관리였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또한 정씨 형제가 형제간의 다툼을 부추기고 위나라 황실에 불안정을 초래했기 때문에 역사 기록에 전기를 남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22]

두 번째는 진수가 촉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그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지』에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겼다는 것이다.[23] 진수의 아버지는 촉나라 장군 마속(馬謖)의 군사 고문이었는데, 228년 제갈량이 계릉(街亭)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마속을 처형했을 때, 진수의 아버지도 연루되어 髡(곤: 머리털을 깎는 형벌)의 형을 받았다.[23] 제갈첨은 이전에 진수를 얕잡아 본 적이 있었다. 진수가 『삼국지』에서 제갈량과 제갈첨의 전기를 쓸 때, 그는 그들에 대해 "제갈량의 강점은 군사 지휘가 아니었고, 뛰어난 군사 지휘관의 기지가 부족했다. 제갈첨은 문학에만 뛰어났고, 과장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평했다.[23] 청나라 학자 조익(趙翼)은 『진서(晉書)』에서 진수가 『삼국지』에서 제갈량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무지한 말"이라고 반박했다.[24] 그는 제갈량이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군사 지휘 능력을 반드시 그의 강점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논평했다. 또한 진수는 『제갈량집(諸葛亮集)』과 『삼국지』 제갈량 전기 말미의 그의 개인적인 논평에서 제갈량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24]

진수는 유선(劉禪)의 전기에 촉한(蜀漢)에는 사관(史官)이나 역사 편찬 기관이 없었다고 적고, 이를 그들의 관리들에 대한 전기가 부실한 이유로 삼았다.[25] 당굉은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대 문서에서 군주가 하는 말마다 한 명의 사관이 기록하고 행동마다 또 다른 사관이 기록하도록 했다는 내용은 과장된 표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26] 그는 역사가의 역할과 정부의 다른 직무를 겸임한 과거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쓰여진 《주례(周禮)》를 예로 들며, 당시에는 지방의 군벌들조차 사관 기구를 두었으므로 촉한에 갑자기 사관 기구가 없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26]

탕굉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래로 그의 시대까지 모든 역사서에서는 국가의 상황에 관계없이 그 국가가 스스로 사용한 명칭을 사용해 왔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진수는 촉한에 대해서만 예외를 둔 유일한 역사가였다. 촉한은 존재하는 내내 유비(劉備)와 유선이 항상 "한(漢)"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들이 한나라(漢朝)의 계승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촉"은 그들의 국가가 위치한 지리적 명칭이었지만, 위나라(魏)와 진나라(晉)는 촉한의 한나라 계승 주장을 깎아내리기 위해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진수는 그의 저서에서 "촉"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탕굉의 견해로는 이는 후원자를 달래고 개인적인 적의를 표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정성을 저버린 행위였다.[28]

『진서(晉書)』에 따르면, 진수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기록을 왜곡했다는 소문이 그가 생존해 있던 시절부터 돌았다.[64] 또한, 제갈량이 자신의 아버지를 처벌하고, 자신이 아들 제갈첨에게 소외된 것을 원망하여 제갈량의 전기에 "임기응변의 군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일까"라며 낮게 평가하고, 제갈첨을 "서화에 능하고 명성이 실력보다 과장되었다"라고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65]

왕은(王隱) 『진서(晉書)』 등 유사 서적에 진수에 대한 악평이 기록되어 일찍부터 퍼져 있었다.[66] 하지만 제갈첨에 대해서는 동진(東晉)의 간보(干寶)도 『진기(晉紀)』에서 국가를 지키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충효를 다한 점은 평가하면서도, 능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진수의 곡필을 지적하는 것으로 가장 비판을 받은 것이 고귀향공(高貴郷公) 살해 경위이다. 서진에 섬겼다는 입장상, 그 젠양(禪讓)이라는 정통성에 대해 중대한 결함을 줄 수 있는 이 건에 대해 진수는 은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당대(唐代)의 고증학자 유지기(劉知幾)는 저서 『사통(史通)』에서, 앞서 언급한 『진서(晉書)』의 정의 일화를 근거로, 전기를 저술하는 동기에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진수를 여러 역사가와 함께 "기언의 간적(記言の奸賊), 댁필의 흉인(戴筆の凶人)"이라고 욕하고, "시어(豺虎)의 먹이로 던져 넣어도 상관없다"고 격렬하게 규탄했다.[67]

『진서(晉書)』에 유래하는 진수의 곡필설을 부정하는 논의도 있다. 명나라 때 왕지견(王志堅)이 『독사상어(讀史商語)』에서 제갈량의 용병의 약점은 기책이 없었던 데 있다고 평가했다.[69]

진수는 위(魏)를 정통 왕조로 다루었지만, 촉(蜀)에 대해서는 유비를 "선주(先主)", 유선을 "후주(後主)"라고 부르고, 즉위 시의 조서(詔書)를 모두 게재하는 등 특별 대우했다. 주의존(朱彝尊)은 이것을 촉을 정통 왕조로 하고 싶어하는 진수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보고 있지만, 위를 정통 왕조로 하고 있던 서진 시대에 진수의 기록이 문제시되었던 흔적은 없다. 그러나 동진 시대 이후, 습착치(習鑿齒) 등에 의한 촉한 정통론이 높아짐에 따라, 진수가 촉한을 정통으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이 더해지게 되었다. 유지기는 진수가 조조와 조비의 악행에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종시 하자 없는" 유비의 일은 그 장점을 평가하지 않고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비난했다.[70]

그 밖에도, 진수가 당시의 정권인 서진 자체에 아첨하여 그 정당성을 높이는 기록을 했다는 지적이 많이 존재한다.

3. 3. 영향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는 편찬 당시부터 뛰어난 역사서로 명성이 높았다. 하후湛은 『삼국지』를 보고 자신이 집필 중이던 『위서』를 버렸다고 한다. 남제유협은 손승의 『진양추』나 『위략』, 『오록』, 『강표전』 등의 저술들을 쓸데없이 꾸미고 검증하기 어려운 내용이거나 내용이 공허하여 중요한 것에 대한 서술이 적다고 비난하는 한편, “진수의 『삼국지』만은 글에 통찰과 지식이 고루 갖춰져 있으며, 순욱과 장화가 사마천과 반고에 비견한 것도 헛된 칭찬이 아니다”라고 칭찬했다.

진 회제(晉懷帝) 재위 시절, 진수가 죽은 후, 범준(范頵) 등 관리들은 진 회제에게 상소를 올려, '고인이 된 중서시어사(中書侍御史)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에는 좋은 교훈이 담겨 있으며,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고 있어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들은 비록 글의 문체가 (사마)상여의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그 메시지는 더 간결하고 명확하다며 삼국지를 수집하여 복제할 것을 요청했다. 진 회제는 이를 승인하고, 하남윤(河南尹)과 낙양령(洛陽令)에게 서기들을 진수의 집으로 보내 삼국지를 베껴 쓰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

『삼국지』는 삼국 중 위를 정통으로 다루었지만, 위를 정통으로 한 유사 서적은 대부분 『위서』( 왕침의 저술 등)처럼 위 단독의 제목으로 되어 있었다. 촉한과 오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위서』에서 서술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진수는 제목상으로는 삼국을 동등하게 다루었고, 본문 또한 『위서』, 『촉서』, 『오서』로 삼국을 나누어 다룬 데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원래 촉한에 벼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경어의 사용 등에서 촉한을 비교적 잘 다루려는 태도가 보인다. 의 이덕림은 『중답위수서』에서 “진수는 촉의 사람이므로 위를 한의 역적이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국지』는 사사(私撰)였지만, 진수 사후 양주 대중정·상서랑인 반규의 상소를 받아 『삼국지』를 필사하라는 칙명이 내려 사실상 공인된 역사서가 되었다. 그 후 의 태종 시대에 정사로 인정받았다.

5세기, 송 문제(宋文帝)는 진수의 삼국지가 너무 짧고 포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배송지(裴松之)에게 삼국지에 주석을 달도록 명령했다. 배송지는 429년에 그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수집한 새로운 자료들을 포함시키고, 자신의 개인적인 주석을 덧붙였다. 배송지의 주석은 삼국지의 길이를 원래의 거의 두 배로 늘렸다.

4. 기타 저술

진수(陳壽)는 제갈량의 저술을 수집하여 『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 촉 상국 제갈량의 저술집)』을 편찬하였다.[29] 장화(張華)는 진 무제에게 이 글을 재구성하여 24권으로 편찬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 수량(壽亮) 또한 제갈량의 저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는 진수의 원본과 상당히 달랐고, 다시 쓰여져 『제갈량고사(諸葛亮故事; 제갈량의 이야기)』가 되었다.[30]

후한(後漢) 시대 건무 연간(25~56년) 이후 정보읍(鄭伯邑), 조언신(趙彥信), 진신보(陳申伯), 축원령(祝元靈), 왕문표(王文表) 등은 『파촉기구전(巴蜀耆舊傳; 파촉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을 공동 집필했다. 진수는 『파촉기구전』이 충분히 포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확장, 10권으로 된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益州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을 완성했다.[31] 그의 저술은 관료 문리(文立)에 의해 무제에게 바쳐졌고, 무제는 이를 칭찬했다.[32]

진수의 다른 저술로는 50권으로 된 『고국지(古國志; 고대 국가들의 기록)』가 있으며, 높은 찬사를 받았다.[31][33] 역사적 사례를 사용하여 개혁을 논한 7권의 『관사론(官司論; 관료에 대한 논문)』, 『석휘(釋諱; 휘(諱)를 설명함)』, 『광국론(廣國論)』,[34] 『위명신주(魏名臣奏; 조위(曹魏)의 저명한 관리들의 상소)』 등이 있다.[35]

5. 평가

과거로부터 배우고, 그 반성을 증진하고 공고히 한다고 평가받았다.[43]

초주/譙周중국어는 진수에게 "그대는 반드시 학문적 재능으로 이름을 날리겠지만, 분명 평판을 해칠 것이다. 그것 또한 불행이 아니겠는가. 깊이 신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59]

상서랑(尚書郎) 이랑/李驤중국어( 이복/李福중국어의 아들)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선배였으며, 촉한(蜀漢)에 있을 때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촉한이 멸망하고 서진(晉) 시대가 되자, 사소한 일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져 결별하고 서로 비방하며 공격했기 때문에 당시 지식인들에게 비난받았다.[58] 이후 이랑이 진나라에 벼슬하려고 했을 때, 진수가 이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랑은 벼슬을 포기하고 촉으로 돌아가 은퇴한 명사로서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6. 가계

진수의 형의 아들 진부(陳符)는 자가 장신(長信)이며, 문장에 뛰어났다. 진수를 이어 저술조교(Assistant Gentleman of Writing)를 역임했으며, 상렴현(上廉縣)의 현령(令)을 지냈다.[36]

진부의 아우 진리(陳蒞)는 자가 숙도(叔度)이며, 양주(梁州)의 별가(別駕)를 지냈다. 이후에는 기왕(齊王)이자 표기장군(驃騎將軍)인 사마유(司馬攸) 휘하에서 일했으며, 낙양(洛陽)에서 죽었다.[37]

진리의 사촌쯤 되는 친척 진계(陳階)는 자가 달지(達之)이며, 이주 자사의 주부(主簿), 보중령(褒中令), 영창군(永昌郡) 서부도위(西部都尉), 건녕(建寧) 및 흥고(興古)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진계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38]

진부, 진리, 진계는 진수에게 귀속되는 200편이 넘는 저술 중 10편 이상을 각각 저술했다.[39]


참조

[1]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2]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3] 서적 Jin Shu vol. 82
[4] 서적 Roberts 1991
[5] 서적 Jin Shu vol. 82
[6]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7] 서적 Jin Shu vol. 82
[8] 서적 Jin Shu vol. 82
[9] 서적 Zizhi Tongjian vol. 80
[10] 서적 Jin Shu vol. 82
[11]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12] 서적 Jin Shu vol. 82
[13]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14] 서적 Jin Shu vol. 82
[15] 서적 Jin Shu vol. 82
[16] 서적 Zizhi Tongjian vol. 83
[17]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18]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19] 서적 Jin Shu vol. 82
[20] 서적 Jin Shu vol. 82
[21] 서적 Jin Shu vol. 82
[22] 서적 Sanguozhi Kaozheng vol. 5
[23] 서적 Jin Shu vol. 82
[24] 서적 Ershi'er Shi Zhaji vol. 6
[25] 서적 Sanguozhi vol. 33
[26] 서적 Sanguozhi vol. 33
[27] 서적 Three Kingdoms Miscellaneous Cases
[28] 서적 Three Kingdoms Miscellaneous Cases
[29] 서적 Jin Shu vol. 82
[30]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31] 서적 Jin Shu vol. 82
[32]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33]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34]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35] 서적 隋書 Zhonghua Publishing
[36]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08
[37]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08
[38]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08
[39]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08
[40] 서적 Jin Shu vol. 82
[41] 서적 Huayang Guozhi vol. 11. 08
[42] 서적 Jin Shu vol. 82
[43] 서적 Huayang Guo Zhi vol. 11. 01
[44] 서적 Jin Shu vol. 82
[45] 웹사이트 Nanchong, Real Source of Culture of Three Kingdoms http://www.sc.gov.cn[...] General Office, Sichuan Provincial People's Government 2014-06-20
[46] 웹사이트 Wanjuan Tower http://www.sichuan-t[...] China Chengdu Greatway Tour Co., Ltd. 2014-06-20
[47] 위키소스 『華陽国志』巻11陳寿伝 https://wikisource.o[...]
[48] 웹사이트 『李卓吾先生批評三国志』第100回 https://archive.wul.[...] 羅貫中、李贄 2024-05-27
[49]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50] 논문
[51]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52]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53]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54] 위키소스 『華陽国志』巻11陳寿伝 https://wikisource.o[...]
[55] 위키소스 『華陽国志』巻11陳寿伝 https://wikisource.o[...]
[56] 위키소스 『華陽国志』巻11陳寿伝 https://wikisource.o[...]
[57] 위키소스 『華陽国志』巻11陳寿伝 https://wikisource.o[...]
[58] 위키소스 『華陽国志』巻11陳寿伝 https://wikisource.o[...]
[59]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60]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61] 위키소스 『文心雕龍』巻4史伝第十六 https://wikisource.o[...]
[62] 위키소스 『重答魏收書』 https://wikisource.o[...]
[63]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64]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65] 위키소스 『晋書』巻82陳寿伝 https://wikisource.o[...]
[66] 서적 三国志巻35董厥伝注引孫盛異同記
[67] 위키소스 『史通』巻7曲筆第二十五 https://wikisource.o[...]
[68] 위키소스 『史通』巻7曲筆第二十五 https://wikisource.o[...]
[69] 웹사이트 読史商語巻2 https://ctext.org/wi[...] 2024-05-27
[70] 위키소스 『史通』巻7探賾第二十七 https://wikisource.o[...]
[71] 서적 「古典中国」における史學と儒教 汲古書院 20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