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수어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수어청은 인조 반정 이후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1626년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광주 등지의 군무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군영이다. 초기에는 총융청에서 분리되어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왕실 방어 사령부 역할을 했으며, 이후 광주유수부가 수어청을 함께 관리하는 체제로 변화했다. 숙종 대에는 3영 2부 체제로 조직이 개편되었으며, 경기도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병력이 구성되었다. 정조 대에 장용영이 설치되면서 경기 지역의 병력이 장용외영으로 편입되었고, 수어청은 쇠퇴하여 폐지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4년 폐지 - 선혜청
    선혜청은 조선 후기 대동법 시행으로 설립되어 점차 규모가 커진 국가 재정 기관으로, 세금 징수 외에 물가 조절, 구휼 사업, 군량미 관리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으나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어 그 영향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 1894년 폐지 - 웅촌면
    웅촌면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위치하며, 울산의 기원인 우시산국의 중심지로, 신라 시대 우화현으로 불렸고, 현재 9개의 법정리, 26개의 행정리, 85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춘해보건대학교와 국도 제7호선, 울산고속도로 등이 위치해 있다.
  • 조선의 5군영 - 어영청
    어영청은 인조반정 후 왕권 강화와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된 조선의 중앙군으로, 이괄의 난 이후 상비군으로 성장했으나 재정 문제로 축소와 개편을 거쳐 총어영으로 개편 후 폐지되었다.
  • 조선의 5군영 - 금위영
    금위영은 숙종 8년에 설치되어 한양 도성과 궁궐 방어, 순찰, 호위 임무를 수행하며 어영청, 훈련도감과 함께 삼군영 체제를 이루었으나 고종 18년에 장례영에 흡수, 1895년 군제 개혁으로 해체된 조선 후기 중앙군영이다.
수어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조선 문장
조선 문장
국가조선
충성조선 국왕
군 종류조선군
역할수도군
규모16,500명
지휘 구조오군영
주둔지남한산성
조선 수군 깃발
깃발
상세 정보
창설 연도1626년
해체 연도1884년

2. 배경

인조 반정 이후 조선후금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전쟁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인조 즉위년인 1623년, 당시 조선의 북방 방어 대책 중 하나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이괄이 후금과 대치하는 동안 국왕은 강화도로 이동하여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행주산성이 있는 고양군과 더불어 광주목남한산성을 개축하여 수도 방어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1624년(인조 2년)에는 당시 경기감사였던 이서를 총융사로 삼아 총융청을 설립하였다.[8]

남한산성 축조가 진행되던 중인 1626년(인조 4년), 총융청에서 분리되어 수어청이 설치되었다.[6] 이듬해인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애초 계획대로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에서는 후금이 먼저 강화도를 봉쇄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9]

정묘호란 당시까지 수어청은 총융청의 하위 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융청을 이끌던 이서는 어영청이귀와 함께 인조 반정을 주도하고 이후 군사권을 장악한 인조의 핵심 측근이었다.[10] 1634년(인조 12년), 이서가 병으로 사직하고 후임자가 임명되는 과정에서 총융청과 수어청은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11]

병자호란 이후 수어청의 지휘 체계는 혼란을 겪었다. 수어청의 책임자인 수어사는 한양에 머무르고, 남한산성을 포함한 광주목 일대의 행정은 광주목사가 담당하면서 둘 사이에 권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광주목사가 수어사를 겸임하게 하여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기도 하고, 별도의 수어사를 임명하여 이원화하는 등 여러 차례 지휘 체계를 변경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1793년(정조 17년)에 이르러 정리되었다. 정조는 광주를 광주유수부로 승격시키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임하도록 하여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였다. 정조는 이전의 일원화 시도가 자꾸 실패하고 이원화로 돌아간 원인이 수어청의 청사가 여전히 한양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아예 청사를 매각해버렸다. 이 조치로 수어청은 오군영 가운데 다른 군영들과 달리 경기도의 지방군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11]

3. 설립과 발전

인조 반정 이후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선은 수도 방어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총융청을 설립하여 방어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8] 남한산성 축조 이후인 인조 4년(1626년)에는 총융청에서 분리되어 수어청이 설치되었다.[6] 이는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왕의 피난처이자 수도 외곽의 중요 방어 거점인 남한산성의 방어를 전담하기 위한 조치였다.

수어청 설치 이후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게 되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남한산성에서 항전했는데[9], 이는 수어청과 남한산성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수어청은 총융청의 지휘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총융사 이서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10] 인조 12년(1634년) 이서가 물러나면서 수어청은 총융청과 실질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11] 그러나 이후 수어청의 수장인 수어사와 남한산성 일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광주목사(이후 부윤) 사이에 지휘권 다툼이 계속되었다.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어사와 광주부윤의 겸직(단원화)과 분리(이원화)를 반복하며 지휘 체계를 여러 차례 변경했다.[11][3]

이러한 혼란은 정조 17년(1793년)에 이르러 정리되었다. 정조는 광주를 광주유수부로 승격시키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도록 하여 지휘 체계를 일원화했다. 또한 수어청의 청사를 한양에서 남한산성으로 완전히 이전시켜[11], 수어청이 명실상부한 남한산성 전담 방어 기구이자 오군영 중 유일하게 경기도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지방군으로서의 성격을 확립하였다.[11]

3. 1. 초기 설립

수어청의 설립은 《속대전》에 따르면 인조 4년(1626)에 남한산성을 고쳐 쌓고 광주 등지의 군사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청(廳)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다른 기록에서는 수어청이 실제로 설치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2][3]

남한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세력을 키운 후금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도 외곽의 방어 기지 또는 비상시 피난처로 다시 지어졌다. 구체적으로 인조 2년(1624년) 7월부터 인조 4년(1626년) 11월까지, 총융사 이수(李洙)의 총괄 지휘 아래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초기 남한산성 축성 과정에는 당시 경기 감사였던 이서(李曙)도 관여했다.[2][3]

하지만 필요한 방어 시설과 체제가 완전히 갖추어지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 때문에 호란 이후에야 본격적인 방어 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인조 6년(1628년) 11월에는 광주부윤 이시명(李時明)을 남한산성 총융사로 임명하고, 산성 안으로 관아를 옮기는 등 방어 체제 구축을 시작했다.[2] '수어사(守禦使)'라는 명칭은 정묘호란 직후인 1632년경 처음 등장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실질적인 수어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3]

3. 2. 조직 변화와 지휘 체계

인조 반정 이후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선은 전쟁 대비에 나섰다. 인조 즉위년인 1623년에는 수도 방어 강화를 위해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1624년(인조 2년) 이서를 총융사로 삼아 총융청을 설립했다.[8] 남한산성 축조 이후인 1626년(인조 4년), 총융청에서 분리되어 수어청이 설치되었다.[6] 정묘호란(1627년) 당시 인조는 계획대로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병자호란(1636년) 때는 후금이 강화도를 먼저 봉쇄하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수밖에 없었다.[9]

초기 수어청은 총융청의 예하 기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총융사 이서는 어영청이귀와 함께 반정을 주도한 인조의 핵심 측근이었다.[10] 1634년(인조 12년) 이서가 병으로 사직하면서 후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총융청과 수어청이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11] 수어사(守禦使)라는 직책은 인조 10년(1632년)경 처음 임명된 것으로 추정되며, 실록에는 그해 11월 이정일(李廷一)이 수어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2] 초기에는 광주 목사가 성 방어 책임자를 겸하다가 수어사가 전담하게 되었고, 이듬해 부사(副使)가 별장(別將)으로 바뀌면서 수어사-별장 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남한산성은 경기 지역 군사를 통제하는 총융사, 광주 목사, 수어사의 삼영 체제 아래 있었기에 완전한 독립 군영은 아니었다.[2]

수어청은 남한산성을 지휘본부로 하여, 왕실의 방어 사령부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이후 수어청의 수장인 수어사는 주로 한양에 머물렀고, 남한산성을 포함한 광주목 일대의 행정은 광주부윤(병자호란 중 목사에서 승격)이 담당하면서 둘 사이에 권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11][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여러 차례 지휘 체계를 변경했다. 때로는 광주부윤이 수어사를 겸하게 하여 지휘 체계를 일원화했고(단원 체제), 때로는 별도의 수어사를 임명하여 이원화하는 방식이 반복되었다.[11][3] 이러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3]

연도지휘 체계 변화
숙종 9년 (1683년)숙종단원 체제
숙종 16년 (1690년)숙종이원 체제
영조 26년 (1750년)영조단원 체제
영조 35년 (1759년)영조이원 체제



효종 7년(1656년)경에는 인근 지역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속영(屬營) 체제가 발전하고, 산성 진입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때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에서 약 1만 6천 명의 병력이 동원될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3][2] 현종 4년(1663년)에는 이 지방 동원 체제가 4영 3부 체제로 개편되어, 총 2만 명 규모의 수성군(守城卒)을 확보하고 승군(僧軍)도 조직되었다. 이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2]

지휘 체계의 혼란은 정조 대에 이르러 정리되었다. 정조 17년(1793년), 정조는 광주목을 광주유수부로 승격시키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도록 하여 지휘 체계를 완전히 일원화했다. 또한, 잦은 이원화의 원인이 한양에 남아있는 수어청 청사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매각하였다. 이 조치로 수어청은 오군영 중 유일하게 경기도의 지방군 성격을 뚜렷하게 갖게 되었다.[11]

수어청의 지휘관 계급 구조는 다른 수영(守營)과 유사했으며, 다음과 같았다.[4]

계급역할
사(使)최고 지휘관 (수어사)
부사(副使)/별장(別將)부지휘관
군장(軍將)사단장급
별장(別將)여단장급 (위의 별장과 역할 구분 필요 시 상세 기술)
천총(千總)연대장급
파총(把總)대대장급
초관(哨官)중대장급



부대 구성은 초기에는 실제 전투력과 방어 병력에 중점을 두었으나, 정조 시기 본부가 남한산성으로 완전히 이전된 후에는 포수(砲手, 포병)의 비중이 점차 증가했다.[4] 비상시에는 광주, 양주, 죽산 등 인근 지역의 소거군(所居軍)이 동원되어 남한산성을 방어했다.[3] 수어청의 재정은 북관병마절도사와 마찬가지로 둔전(屯田) 개척, 비농산물 생산, 군수 유지 등 자체적인 경제 기반에 의존했지만, 항상 부족했고 규모의 협소함을 벗어나기 어려웠다.[2]

4. 조직



수어청은 경기도 관할 아래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조직된 군영이었다.[3] 그러나 조직 운영 과정에서 군사적 권한을 가진 수어사(守禦使)와 행정을 담당하는 광주부윤 사이에 권한 다툼과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3]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조직 개편이 시도되었다. 예를 들어, 수어청 본영을 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의 지위를 격상시켜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는 방식(단원 체제)과, 별도의 수어사를 임명하여 산성을 방어하게 하는 방식(이원 체제) 사이에서 변화가 거듭되었다.[3] 특히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수어사와 광주부윤 간의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해졌고, 이는 숙종과 영조 대에 걸쳐 지휘 체계의 잦은 변경으로 이어졌다. 숙종 9년(1683년)에는 단원 체제, 숙종 16년(1690년)에는 이원 체제, 영조 26년(1750년)에는 다시 단원 체제, 영조 35년(1759년)에는 이원 체제로 바뀌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3]

수어청 조직의 기본적인 틀은 1632년경 수사(守使)라는 직책이 도입되면서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후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수어(守禦) 체제가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3] 비상시에는 광주, 양주, 죽산 등 인근 지역에 소속된 속오군이 동원되어 남한산성 방어에 투입되었다.[3]

4. 1. 병력

효종 시기 수어청의 병력은 경기도의 광주읍, 죽산진, 양주진 3개 진과 강원도의 원주진, 회양진 및 충청도의 충주진 등에 소속된 병사 1만 6천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번갈아 근무하는 번상군(番上軍) 형태로 운용되었다.[5]

1663년(현종 4년)에는 수어청 체계를 4영 3부제로 개편하며 소속 속영(屬營)에 변화를 주었다.[11] 충주와 회양은 각각 영주 및 북로 보호를 이유로 성내 진입에서 제외되었고, 광주, 양주, 적산, 원주로 4개 영을 구성했다. 좌영은 경기도 각 읍의 부대로, 우영은 호서 지역 보병 부대, 영서 지역 신병 8,800명, 홍주·경성·서평의 구 부대 300명으로 이루어졌다. 총 2만 명의 수성졸(守城卒)과 산성 승군(僧軍)으로 4영 3부 체제를 구성했다.[2] 이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남북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경기도뿐 아니라 적의 침투 예상 경로에 있는 다른 지역 군사까지 통합하여 방어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2]

이후 1704년(숙종 30년)에는 3영 2부 체제로 다시 개편되었다. 3영은 광주, 죽산, 양주에 설치되었고, 총 5사(司) 25초(哨)로 구성되었다.[3] 2부는 좌부와 우부로 나뉘어 아병(步兵) 16초, 마병(騎兵) 3초 및 훈련마보군, 친위군 등으로 이루어졌다.[3] 이 3영 2부 체제는 병사 1만 6천 5백 명과 이들을 지원하는 표하군(標下軍), 군수 노비 등을 합하여 총 3만 2천여 명 규모였다.[5][3] 수어청 수비의 주력 부대는 경기도 출신의 속오군과 하급 병사들이었으며[4], 특히 아영(牙兵)이라 불린 하급 병사들은 둔전(屯田)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했다.[2]

정조 개편 이후 수어청 병력 대부분은 경기도 속오군이었고, 이들은 3년에 한 번꼴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근무했다.[11]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실제 군역 대신 군포 납부로 병역을 대신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정조 시기 이후 군납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인원은 5천 명이 넘었으나, 상당수가 군포도 내지 않고 군역도 서지 않는 문제를 보였다.[5] 결국 19세기에 이르러 수어청은 전투 부대로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7]

한편, 수어청은 경기도 소속으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했기에, 군사적 권한을 가진 수사(守使)와 행정을 담당하는 광주부윤(廣州府尹)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좌·우영(左右營)의 아병(亞兵)이 도성에서 근무하고, 남한산성 관할 시 부윤이 부사(副使)를 겸임하는 이원적 체제를 채택했으나,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3]

4. 2. 편제

조선군의 기본 편제는 초(哨)로, 대략 120명에서 125명 가량의 부대였다. 초 아래로는 대(隊)와 오(伍)가 조직되어 있었다. 초의 상위 부대로는 5개의 초가 모인 사(司), 5개의 사가 모인 부(部)가 있었고, 이를 총괄하는 단위를 군영(軍營)이라 하였다.[12] 수어청은 남한산성의 방어를 위한 군영으로, 그 아래에 3개의 속영(屬營)인 전영(前營), 중영(中營), 후영(後營)을 두었다. 이들 영의 지휘관인 영장(營將)은 각각 광주판관, 양주목사, 죽산부사가 겸임하였다.[11] 정조의 개편 이후 수어청의 편제는 아래와 같다.[11][5][6]

'''수어청의 편제'''
관직품계인원병력비고
수어사(守禦使)종2품1 명-광주부윤이 겸직
중군(中軍)종2품1 명-부사령관 및 참모의 역할
전영장(前營將)정3품1 명4 사 2,608 명광주판관이 겸임
중영장(中營將)정3품1 명4 사 2,608 명양주목사가 겸임
후영장(後營將)정3품1 명4 사 2,608 명죽산부사가 겸임
좌부별장(左部別將)정3품1 명마병 2초 250명, 4 사 1,991 명마병 지휘관
우부별장(右部別將)정3품1 명마병 2초 250명, 4 사 2,000 명마병 지휘관



각 사는 5개의 초로 이루어져 있었고, 초마다 종9품의 초관(哨官)이 배치되었다.[6] 초관은 군졸 중에서 시험을 통해 선발하여 임명한 하급 무관이었다. 이 외에도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고 평소 병졸의 훈련을 담당하는 기패관(旗牌官)[13]과 군졸 중 기예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기마병을 관리하게 한 하급 무관인 별무사(別武士)도 운용하였다.[14] 수어청에는 군관(軍官), 한량군관(閑良軍官), 권무군관(勸武軍官), 이속군관(移屬軍官), 부료군관(付料軍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군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군포를 내고 군역을 대신하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6] 일반 병사로 군역을 서는 것보다 군관의 명예를 얻을 수 있어 신청자가 많았다.[15][16]

수어청은 오군영의 다른 군영들처럼 방어 태세를 위한 편제를 갖추었으나, 실제 운영에서는 여러 이유로 번상(番上, 교대 근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다. 역병이나 흉년 등을 이유로 20년간 소집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11]

수어청의 편제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1632년경 수사(守使)라는 명칭이 도입되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1636년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수어 체제가 확립되었다.[3] 1656년(효종 7년)경에는 인근 지역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성을 방어하는 속영(屬營) 체제가 발전했다. 초기에는 광주, 죽산, 양주 및 강원도 원주진, 충청도 휘양진, 충주진 등에서 1,6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임시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3][2] 이 시기 수사가 광주 부윤을 겸임하면서 판관(判官)이 전체 진영의 지휘관을 맡기도 했다.[3]

효종 7년경에는 산성 진입 체제가 확립되어, 경기도의 광주, 여주, 이천, 청산진, 양주진과 강원도의 원주진, 청양진, 충청도의 진주 등에서 총 1만 6천 명의 병력이 동원될 수 있도록 편제되었다. 그러나 실제 지휘는 수사 관할 하에 광주 방어사가 경기도 3영기(營基)를 책임지고, 다른 도의 병력은 도지사, 보좌관, 방어사의 지시에 따라 남한산성에 진입하는 방식이었다.[2] 현종 4년(1663년)에는 이 지방 체제가 4영 3부 체제로 변경되었다. 충주와 영원(淮陽)이 제외되고 광주, 양주, 적산, 원주로 4개 영이 편성되었다. 좌영은 경기도 각 읍의 부대로, 우영은 호서 지역 보병과 영서 지역 신병 등으로 구성되어 총 2만 명의 수성졸(守城卒)과 산성 승군(僧軍)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북방과 남방의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내외영 체제였다.[2]

수어청은 기본적으로 3개의 영(營)과 2개의 부(部) 체제로 조직되었으며, 주력 부대는 경기도 출신 병력이었다.[4] 병사들은 속오군(束伍軍)과 아병(牙兵)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아병은 둔전(屯田)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병사였다. 초기 이원적 체제 하에서는 아병이 좌·우 별장에게 예속되었으나, 산성 통일 이후에는 좌별장은 여주 목사가, 우별장은 이과 별장이 관할하게 되었다.[2]

숙종 30년(1704년)경에는 "3영 2부" 체제로 점차 전환되었다. 3개의 영은 광주, 죽산, 양주에 설치되었고, 각 영은 5사(司) 25초(哨)로 구성되었다. 2개의 부(좌부, 우부)는 아병(16초), 마병(3초), 훈련마보군, 친위군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3영 2부 체제는 병력 16,500명과 표하군(標下軍), 군수 노비 등 지원 인력을 포함하여 총 32,000명 규모였다.[3] 또한, 북한산성 방어사령부에 북한산성청이 있었던 것처럼, 수어청에도 남한산성청이 있어 광주유수 겸 수어사 아래 별도 조직이 운영되었다.[2]

이러한 편제에도 불구하고 수어청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도에 소속되어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면서, 군사적 권한을 가진 수사(守使)와 행정을 담당하는 광주부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좌·우영의 아병이 도성에서 근무하고, 남한산성 관할 시에는 부윤이 부사(副使)를 겸임하는 이원적 체제를 채택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3] 재정 또한 북관병마절도사와 마찬가지로 둔전 개척, 비농산물 생산 등에 의존했지만 항상 부족하여 규모의 협소함을 벗어나기 어려웠다.[2]

4. 3. 재정

수어청의 재정은 북관병마절도사와 마찬가지로 둔전 개척, 비농산물 생산, 군수 유지 등 자체적인 경제 기반에 의존했지만, 항상 부족했고 그 규모의 협소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2]

5. 쇠퇴와 폐지

정조(正祖) 재위 기간 동안 수어청은 남한산성에 상시 주둔하게 되었으나, 소속된 표하군(票下軍), 아병(亞兵), 별파진(別破陣), 경주병(慶州兵), 승군(僧軍) 등은 실제 전투 능력 면에서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군관의 수가 5,000명에 달했지만, 효율적인 지휘 체계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고, 후기에는 그 효용성을 거의 상실했다.[2]

제도적으로는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운영은 미흡했다. 예를 들어, 흉작이나 전염병, 왕의 행차 등의 이유로 성조(왕이 행하는 의례)와 같은 중요한 행사가 20년 동안 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2] 특히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장용영을 창설하면서 상황은 더욱 변했다. 경기도 지역의 군사력 대부분이 장용외영으로 편입되면서, 광주유수를 겸임하며 경기 지역 방어의 한 축을 담당했던 수어청은 더 이상 군영으로서의 편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3][2] 결국 수어청은 어영청과 함께 사실상 폐지되었고, 그 기능은 남한산성의 요새 방어 역할로 축소되어 광주유수와 광주 부윤의 관할 아래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수어청은 중앙 군영 체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군사 조직의 성격을 잃게 되었다.[3][2]

6. 청사


  • 본영(本營):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다.[17]
  • 조방(朝房):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었으며, 14칸 규모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임란의 경험에서 나온 조선 후기의 수도 방어 체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1
[2] 웹사이트 "(2) 수어청"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1
[3] 웹사이트 수어청 (守禦廳)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1-01
[4] 웹사이트 수어청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1
[5] 문서 수어청 https://encykorea.ak[...]
[6] 문서 수어청 http://dh.aks.ac.kr/[...]
[7] 문서 수어청 http://contents.hist[...]
[8] 문서 대전회통 해설 - 병전 해설 https://www.krpia.co[...]
[9] 웨이백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강화도 http://www.ganghwane[...] 강화뉴스 2023-11-05
[10] 문서 인조반정 http://contents.hist[...]
[11] 문서 수어청 http://contents.hist[...]
[12] 문서 군제 https://encykorea.ak[...]
[13] 문서 기패관 http://dh.aks.ac.kr/[...]
[14] 문서 별무사 http://dh.aks.ac.kr/[...]
[15] 문서 군관 http://dh.aks.ac.kr/[...]
[16] 문서 권무군관 http://dh.aks.ac.kr/[...]
[17] 문서 때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이전과 한성부로의 재이전을 반복하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