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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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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리랑카 내전은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민족 갈등이 주요 원인으로,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무력 충돌이다. 영국 식민지 시기 타밀족 우대 정책과 독립 후 싱할라어 공용어화 등 차별 정책이 갈등을 심화시켰고, 급진 타밀족 세력인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가 결성되어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여러 차례의 휴전과 재발을 반복하며 진행되었고, 2009년 LTTE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의 사망으로 종결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다수의 타밀족 난민이 발생했으며, 종전 후 복구 및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나, 인권 문제와 권위주의 강화, 경제 위기 등 여러 과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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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붉은색: LTTE의 지배 지역, 주황색: LTTE가 일부 지배한 지역, 노란색: 타밀일람이 영유를 주장하지만 스리랑카 정부의 실효 지배 하에 있는 지역 (2005년 기준)
기본 정보
분쟁 이름스리랑카 내전
다른 이름
분쟁 원인타밀족의 신할라족 중심의 스리랑카로부터의 분리 독립 운동
날짜1983년 7월 23일 - 2009년 5월 18일
장소스리랑카
결과스리랑카 정부군의 승리, LTTE의 괴멸
교전 세력
교전국 1스리랑카 정부군
인도 평화유지군 (1987-1990년)
교전국 1 지원국






















(1987-2009년)
교전국 2[[파일:Tamil Eelam Flag.svg|25px|border]] 타밀일람 해방의 호랑이
[[파일:Bandera del PLOTE (Tàmils).svg|border|25px]] PLOTE
[[파일:Bicolor flag of Tamil Eelam.svg|border|25px]]
교전국 2 지원국[[파일:Flag of Palestine.svg|border|25px]] PLO
[[파일:Red flag.svg|border|25px]] PFLP
(1983-1987년)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주니우스 리처드 자야와르데네 (1983-1989년)
라나싱하 프레마다사 (1989-1993년)
딩기리 반다 위제퉁가 (1993-1994년)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1994-2005년)
마힌다 라자팍사 (2005-2009년)
라마스와미 벤카타라만 (1987-1989년)
라지브 간디 (1987-1989년)
비슈와나트 프라탑 싱 (1989-1990년)
교전국 2 지휘관[[파일:Tamil Eelam Flag.svg|25px|border]]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
[[파일:Bandera del PLOTE (Tàmils).svg|border|25px]]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스리랑카군:
95,000 (2001년)
118,000 (2002년)
158,000 (2003년)
151,000 (2004년)
111,000 (2005년)
150,900 (2006년)
인도 평화유지군:
100,000 (최대)
교전국 2 병력
(보조 부대 제외):
6,000 (2001년)
7,000 (2003년)
11,000 (2005년)
8,000 (2006년)
7,000 (2007년)
(보조 부대 포함):
25,000 (2006년)
30,000 (2008년)
사상자
교전국 1 사상자스리랑카군:
전사 23,327명 이상
부상 60,000명 이상 (군과 경찰)
인도 평화유지군:
전사 1,200명
교전국 2 사상자전사 27,000명 이상 (LTTE 및 기타 타밀 민병대)
포로 11,644명

2. 배경

스리랑카는 다수 민족인 싱할라인(인구의 약 70%)과 소수 민족인 타밀인(인구의 약 20%)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타밀인은 섬의 북부동부에 주로 거주한다.[17] 영국 식민지 시대에 시행된 분할 통치 정책과 독립 이후 1956년 싱할라어 공용어화 등 싱할라인을 우대하는 정책들은 민족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7]

2. 1. 역사적 배경

스리랑카 섬에는 오래전부터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함께 거주해 왔다. 1815년부터 영국이 섬 전체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영국 식민지 시대 동안 영국은 소수 민족인 타밀인을 중용하는 분할 통치 정책을 시행하였다.[17] 이는 다수 민족인 싱할라인의 불만을 야기하는 배경이 되었다.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약 7할은 싱할라인이며, 약 2할은 타밀인으로 주로 섬의 북부동부에 거주한다.[17]

독립 이후에는 다수파인 싱할라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1956년 싱할라어만을 유일한 공용어로 지정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등 싱할라인을 우대하는 정책들이 연이어 시행되었다.[17]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타밀인들은 점차 차별받고 소외되었다. 1972년에는 국가의 공식 명칭을 기존의 '실론'에서 싱할라어식 명칭인 '스리랑카'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타밀족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민족 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7]

이러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일부 급진화된 타밀족 인사들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 단체인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2. 2.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의 등장

심화되는 민족 갈등 속에, 1972년 벨피라이 프라바카란은 스리랑카로부터 무력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타밀의 호랑이(TNT)를 결성했다. TNT는 1975년 북부 자프나 시장을 암살하는 등 테러 활동을 계속했고, 같은 해 TNT를 모체로 타밀엘람 해방의 호랑이(LTTE)가 결성되었다.[18]

3. 내전의 전개

1983년 7월, LTTE스리랑카 정부군을 공격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도 콜롬보에서 싱할리족에 의한 대규모 타밀족 학살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크게 네 차례의 주요 충돌과 평화 협상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 제1차 내전 (1983년 - 1987년): LTTE와 정부군 간의 충돌이 격화되었으며, 1985년 인도의 중재로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다. 1987년 인도는 인도 평화유지군을 파병했으나, LTTE와의 관계 악화로 교전 상태에 이르렀고 1990년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했다.[40]
  • 제2차 내전 (1990년 - 1995년): 1990년 평화 협상 결렬로 내전이 재개되었다. 이 기간 LTTE는 인도 전 총리 라지브 간디(1991년)와 스리랑카 대통령 라나싱헤 프레마다사(1993년)를 암살하는 등 공세를 강화했다. 1995년 다시 휴전에 합의했다.
  • 제3차 내전 (1995년 - 2002년): 1995년 4월 또다시 휴전이 깨지고 전투가 재개되었다. LTTE는 스팅어 미사일 사용, 공군 기지 및 국제공항 습격 등 강력한 군사력을 보여주었다. 2002년 노르웨이의 중재로 무기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 평화 협상 (2002년 - 2006년):
    순찰 중인 LTTE 소형정(2004년)
    정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최종 합의에는 실패했다. 이 시기 LTTE 내부에서 동부 사령관 '카루나 암만'이 이탈하여 정부군 측에 합류하는 분열이 발생했으며[19],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로 큰 피해를 입었다.[19]
  • 제4차 내전 (2006년 - 2009년): 2005년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 취임 이후 긴장이 고조되다가 2006년 7월, 정부가 LTTE 섬멸을 목표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하면서 마지막 내전 단계에 돌입했다.[19] 중화인민공화국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은[1][2][3][4] 총력전을 펼쳐 LTTE의 주요 거점을 차례로 함락시켰다.[20] LTTE는 강력히 저항했으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2009년 1월 2일 행정 수도 킬리노치 함락에 이어 1월 25일 마지막 거점 무라이티부까지 잃었다.[19] LTTE는 소수의 병력과 민간인 인간 방패를 이용해 최후 항전을 벌였으나,[19] 2009년 5월 18일 최고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이 사살되면서 조직은 완전히 붕괴되었다.[41][19] 다음 날인 5월 19일, 라자팍사 대통령이 26년간 이어진 내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19]

3. 1. 제1차 내전 (1983년 - 1987년)

1983년 7월, 자프나 근교 틴네벨리에서 LTTE스리랑카 정부군을 공격하여 병사 1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도 콜롬보에서는 싱할리족에 의한 반타밀족 폭동이 일어나 많은 타밀족이 학살당했다. 이에 타밀족들이 무력으로 맞서면서 본격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LTTE와 정부군 간의 충돌과 학살이 이어졌으나, 1985년 7월 인도의 중재로 부탄의 수도 팀푸에서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인도는 타밀족 다수가 거주하는 국가로서 중재에 나섰다.

1987년 7월부터 인도는 스리랑카에 인도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초기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불교를 믿는 싱할리족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으나, LTTE의 무장 해제 문제를 둘러싸고 LTTE와 대립하게 되면서 교전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인도 평화유지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3년 만인 1990년 3월에 철수했다.[40]

3. 2. 제2차 내전 (1990년 - 1995년)

1990년 6월 7일, 평화 협상이 실패하면서 휴전이 깨지고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는 1991년 5월 21일, 스리랑카에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정했던 인도의 전 총리 라지브 간디를 암살했다. 이어 1993년 5월 1일에는 스리랑카라나싱헤 프레마다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계속되는 충돌 끝에 1995년 1월 7일, 스리랑카 정부군과 LTTE는 다시 휴전에 합의했다.

3. 3. 제3차 내전 (1995년 - 2002년)

1995년 4월 19일 휴전이 깨지면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 (LTTE)는 스팅어 미사일을 이용해 정부군의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2001년 7월 24일에는 콜롬보 교외에 위치한 스리랑카 공군 기지를 습격하고,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에 있던 스리랑카 항공 소속 여객기를 공격하는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2월 22일,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평화 협상에서 노르웨이 정부의 중재로 마련된 평화 협정(무기한 휴전)에 서명했다.

3. 4. 평화 협상 (2002년 - 2006년)



정전 기간 동안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는 총 6차례에 걸쳐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은 태국의 푸껫 주와 나콘빠톰 주, 노르웨이 오슬로, 독일 베를린, 일본 가나가와현 등지에서 열렸다. 스리랑카 정부 측이 제안한 연방제 도입을 통한 평화 실현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양측은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기간 중인 2004년 3월, LTTE 내부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동부 지역 사령관이었던 விநாயகமூர்த்தி முரளிதரன்|비나야가무르티 무랄리타란ta(일명 '카루나 암만' 대령)이 조직에서 이탈하여 '카루나파'를 결성하고 스리랑카 정부군 측에 합류했다. 이후 카루나파는 LTTE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19]

2004년 12월에는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이 발생하여 스리랑카 연안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특히 LTTE가 장악하고 있던 북부와 동부 지역의 피해가 컸다. 당시 찬드리카 쿠마라투웅가 정권은 LTTE와 공동으로 재난 복구 작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지만, 스리랑카 대법원이 이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19]

3. 5. 제4차 내전 (2006년 - 2009년)

2005년 11월 마힌다 라자팍사가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스리랑카 정부와 LTTE 사이에는 휴전 위반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다. 이는 흔히 '저강도 분쟁' 상태로 표현되었다. 라자팍사 정권은 초기에는 LTTE와의 평화를 모색했으나, 2006년 4월 LTTE가 휴전 협상 이탈을 선언하고 같은 달 육군 사령관 사라트 폰세카에 대한 자살 폭탄 테러(폰세카는 중상을 입었으나 생존했다)가 발생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19] 결정적으로 2006년 7월, 동부 주 바티칼로아 현 북부에서 농업 용수가 차단된 사건을 계기로 스리랑카 정부는 LTTE 섬멸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19]

2006년 7월 26일, 스리랑카 공군이 LTTE의 기지를 공습하면서 제4차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9] 스리랑카 정부는 인권 침해 문제를 이유로 미국의 지원이 중단된 상황에서,[1][2][3][4] 중화인민공화국파키스탄으로부터 대규모 자금 및 군사 지원을 받았다.[1][2][3][4] 이를 바탕으로 이전까지 거의 투입되지 않았던 해군공군까지 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쳤다.[20]

이에 맞서 LTTE는 2006년 10월 해상 타이거(Sea Tiger) 부대를 동원해 남부 갈레 항구를 공격하고, 2007년 3월에는 수도 콜롬보 근교의 카투나야카 공군 기지를 야간 공습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했다.[19] 그러나 2007년 7월, 정부군이 LTTE에서 분리된 카르나파와 연계하여 경제적 중심지였던 동부 주를 함락시키면서 LTTE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LTTE의 본거지인 킬리노치에 대한 공습으로 LTTE의 2인자이자 정치 부문 책임자였던 수파야 파람 타밀셀반이 사망하여 조직에 큰 타격을 입었다.[19] 2008년 1월,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 체결했던 휴전 협정을 공식적으로 파기하였다.[19]

정부군은 공세를 더욱 강화하여 2008년 8월에는 서해안의 해상 타이거 거점을 공략했다. 2009년 1월 2일에는 LTTE의 행정 수도였던 킬리노치를 점령했고, 같은 달 25일에는 마지막 도시 거점인 무라이티부마저 함락시켰다.[19]

정부군에 쫓긴 LTTE는 2009년 4월, 무라이티부 북부 해안가의 약 20km2에 불과한 좁은 지역으로 몰렸다. 이들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약 20만 명의 타밀인 난민을 인간 방패로 삼아 최후 항전을 벌였다.[19] 정부군은 4월 20일부터 대규모 난민 구출 작전을 개시하여 15만 명이 넘는 난민이 이 지역을 탈출했다. 5월 들어 국제 사회가 뒤늦게 난민 보호를 위한 휴전을 요구했지만, 승리를 눈앞에 둔 스리랑카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계속했다.[19]

결국 5월 중순 정부군이 연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5월 17일 LTTE 대변인 셀바라사 파스마나탄이 전투 포기를 발표했다. 다음 날인 2009년 5월 18일, LTTE 창설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이 스리랑카군에게 사살되었고 그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LTTE 지도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41][19]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5월 19일 의회 연설을 통해 26년간 지속된 내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19]

4. 내전 이후

스리랑카 내전은 2009년 5월 스리랑카 정부군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이후 스리랑카 사회는 여러 복잡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본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후 복구와 타밀족 국내 실향민의 재정착 노력이 이루어졌고, 한동안 경제 성장과 치안 개선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전 종식 과정과 그 이후 마힌다 라자팍사 당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강화되었고, 무리한 인프라 개발 정책은 훗날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내전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민간인 희생과 전쟁 범죄 의혹은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조사 요구와 비판을 낳았으며,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족 공동체 간의 진정한 화해와 책임 규명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4. 1. 전후 복구 및 재건

내전으로 인해 약 28만 명의 타밀족이 국내 실향민이 되었으며, 내전 종결 이후 이들의 재정착(귀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종전 직후인 2010년에는 과거 주요 전장이었던 북부주에서 22.9%라는 높은 GDP 성장률을 기록했으며[21], 스리랑카 전체적으로도 6~8%대의 경제 성장이 지속되는 등 복구가 이루어졌다.[22]

2014년까지 테러는 재발하지 않았고, 2013년에는 스리랑카 내 95% 지역에서 지뢰 제거 작업이 완료되었다. 또한, 2013년 9월에는 과거 LTTE의 주요 거점이었던 북부주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큰 혼란 없이 마무리되면서 치안 상황도 개선되는 추세를 보였다.[23]

그러나 이러한 복구 과정 이면에는 문제점도 지적된다. 내전 종식 과정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마힌다 라자팍사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으며,[24] 전후 인프라 개발을 위해 해외로부터 과도하게 자금을 조달한 것은 이후 2022년 스리랑카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는 경제 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25] 이처럼 내전은 종결 이후 스리랑카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연합 등 국제 사회에서 계속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23]

4. 2. 권위주의 강화와 경제 위기

내전 종식은 마힌다 라자팍사 Mahinda Rajapaksa영어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24] 또한 전쟁 이후 인프라 개발을 위해 해외로부터 많은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는 훗날 2022년 스리랑카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는 경제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25] 이처럼 내전은 종식 이후 스리랑카 역사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3. 인권 문제

2010년 6월, 유엔(UN)의 반기문 사무총장은 전문가 패널을 임명하여 스리랑카 내전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 2011년 4월 25일, 마르주키 다루스만(인도네시아)을 의장으로 하는 전문가 위원회는 보고서를 제출했다.[26]

전투 격화로 인해 피난하는 사람들 (2009년)


이 보고서는 제4차 이람 전쟁 마지막 5개월 동안 민간인 사망자가 4만 명에 달하며, 스리랑카 정부군과 LTTE 양측 모두에게 국제 인도법 및 인권법 위반 행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27] 보고서가 지적한 주요 인권 침해 및 위반 행위는 다음과 같다.

  • 스리랑카 정부 측:
  • * 광범위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살해
  • * 병원 및 인도주의 시설 공격
  • * 인도주의적 지원 거부
  • * 분쟁 피해자 및 생존자(국내 실향민, LTTE 구성원 포함)의 인권 침해
  • * 분쟁 지역 외 언론 및 정부 비판 세력의 인권 침해

  • LTTE 측:
  • *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이용
  • * LTTE 지배 지역 탈출 시도 민간인 살해
  • * 민간인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무기 사용
  • * 아동 징병
  • * 민간인 강제 노역 동원
  • * 자살 폭탄 테러로 민간인 살해


또한 보고서는 스리랑카 정부가 구성한 "과거의 교훈·화해위원회 (LLRC)"가 내전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는 데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 방송국 채널 4는 스리랑카의 고타바야 라자팍사 국방장관이 LTTE 간부 포로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을 보도하고, 스리랑카 정부를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28][29] 유엔 인권이사회의 필립 알스턴 특별보고관은 채널4가 공개한 포로 살해 영상이 진본이라고 보고했다.[30]

해외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 타밀계 이민자들 (2009년, 캐나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스리랑카 정부는 유엔 전문가 보고서의 권고를 전면 거부했다.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정부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자가스 자야슬리야 중장은 전쟁 범죄 지적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2011년 8월 1일, 스리랑카 국방부는 반박 보고서를 통해 LTTE를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테러 조직"으로 규정하며 그들의 만행을 강조하고, 정부는 인도적으로 행동하며 민주주의 회복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31][32] 채널4 보도에 대해서는 영상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며, 해외 타밀 디아스포라 네트워크가 LTTE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한편, 스리랑카 정부의 LLRC는 2011년 11월 20일 라자팍사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민간인 살해 및 항복자에 대한 불법 행위 증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는 내전 중 범죄가 입증될 경우 국내 사법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33]

스리랑카 정부는 LTTE 섬멸을 테러 대응의 성공 사례로 국제 사회에 홍보하기도 했다. 2011년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수도 콜롬보에서 "테러 대책 세미나: 스리랑카의 경험"을 개최하여 일본을 포함한 54개국을 초청했다.[34][35] 또한 정부는 해외 LTTE 잔당의 위협을 주장하며, 2011년에는 인도 타밀나두주에서 훈련받은 테러리스트 150명이 잠입했다고 발표했으나, 스리랑카 주재 인도 대사관은 이를 부인했다.[36]

내전 종결 이후에도 인권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2013년 2월 26일, 휴먼라이츠워치는 스리랑카 정부, 군, 경찰에 의한 타밀계 주민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강간, 성적 학대, 고문 등 75건의 사례를 제시하며, 많은 경우 영장 없이 체포·납치되어 LTTE 연관성을 자백받기 위해 남녀를 불문하고 성폭력과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밝혔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를 전쟁 범죄로 규정했지만, 스리랑카 정부는 "날조"이자 "LTTE 지지파의 선전"이라고 일축했다.[37] 미국의 '세일럼 뉴스'는 스리랑카 군인들이 살해한 여성과 아이들의 사진을 전리품처럼 촬영했다는 의혹을 보도하기도 했다.[38][39]

유엔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스리랑카 정부와 국제 사회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권고했다.

  • 스리랑카 정부와 LTTE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국제 인도법 및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성실한 조사 실시
  • 국가에 의한 모든 폭력 중단
  • 시신 등을 유족에게 반환하고 장례 허용
  • 사망자 및 실종자에 대한 신속하고 무료 사망진단서 발급
  • 모든 생존자에게 심리사회적 지원 제공
  • 모든 난민 석방 및 희망 거주지로의 이주 지원
  • 모든 생존자의 일상 복귀를 위한 임시 지원 제공
  • 실종자 조사 및 소재 파악 (유엔 강제실종 실무위원회 초청 포함)
  • 현재 구금 중인 모든 사람의 이름과 구금 장소 공개
  • 유엔 인권이사회(UNHRC)는 2009년 5월 특별회의 결의 재검토를 위한 회의 소집

5.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China aided Sri Lanka bloodbath https://economictime[...] The Economic Times 2009-06-08
[2] 웹사이트 China fuels Sri Lankan war https://www.japantim[...] ジャパンタイムズ 2009-03-04
[3] 웹사이트 How Beijing won Sri Lanka's civil war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10-05-23
[4] 웹사이트 China's aid revealed in Sri Lanka's victory parade https://www.thenatio[...] The National 2009-06-09
[5] 간행물 Armed Conflicts Database http://acd.iiss.org/[...]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6] 웹사이트 Opposition leader rebutts [sic] Sri Lankan government claims https://web.archive.[...]
[7] 웹사이트 Humanitarian Operation - Factual Analysis, July 2006 - May 2009 http://www.defence.l[...] 스리랑카 국방부 2011-08-01
[8] 논문 Psychological Management of Combat Stress—A Study Based on Sri Lankan Combatants http://mailer.fsu.ed[...]
[9] 웹사이트 Sri Lanka Assessment 2007 http://satp.org/satp[...] Satp.org
[10] 뉴스 Sri Lankan army deaths revealed http://news.bbc.co.u[...] 2009-05-22
[11] 뉴스 LTTE killing spree http://www.dailynews[...] Daily News 2009-06-03
[12] 웹사이트 Sri Lanka Database – Casualties of Terrorist violence in Sri Lanka http://satp.org/satp[...] Satp.org
[13] 웹사이트 Eelam War IV: Imminent End http://www.southasia[...]
[14] 웹사이트 Tamils mark 25-years of Tiger sacrifice http://www.tamilnet.[...] TamilNet
[15] 웹사이트 4073 LTTE cadres killed in ongoing battle http://us.rediff.com[...]
[16] 웹사이트 Sri Lankan experience proves nothing is impossible http://www.sundayobs[...] The Sunday Observer 2011-06-05
[17] 웹사이트 Vol.40 スリランカ内戦の終結~シンハラ人とタミル人の和解に向けて https://www.mofa.go.[...] 외무성 2009-07-07
[18] 웹사이트 第11章 スリランカ紛争史年表 https://www.ide.go.j[...] ジェトロ 2002-03
[19] 웹사이트 現地リポート スリランカ—内戦終結 https://www.ide.go.j[...] ジェトロ 2009-08
[20] 웹사이트 スリランカの内戦をめぐる中国とインド http://www.ide.go.jp[...] ジェトロ 2012-03
[21] 웹사이트 Sri Lanka's Northern province has recorded the highest GDP growth rate of 22.9 per cent last year http://www.asiantrib[...] Asian Tribune 2011-07-18
[22] 웹사이트 スリランカ、内戦経てインド洋経済圏の要所に http://www.nikkei.co[...] 日本経済新聞 2014-01-12
[23] 웹사이트 内戦終結から5年、スリランカの課題を考える http://www.jica.go.j[...] JICA 2014-05-13
[24] 웹사이트 スリランカ武力紛争の軍事的解決がもたらしたもの-大統領への集権化と民族問題の政治的解決の停滞という逆説- https://www.mofa.go.[...] 외무성 2011
[25] 웹사이트 なぜ、スリランカで抗議行動は起きたのか? 経済危機から政治危機へ https://www.ide.go.j[...] 2022-04
[26] 웹사이트 REPORT OF THE SECRETARY -GENERAL'S PANEL OF EXPARTS ON ACCOUNTABILITY IN SRI LANKA http://www.un.org/Ne[...]
[27] 웹사이트 スリランカ内戦に関する国連専門家レポート(要約) http://www.ide.go.jp[...]
[28] 웹사이트 ゴタバヤ・ラージャパクサ・スリランカ国防・都市開発次官による玄葉外務大臣への表敬 平成24年3月23日 https://www.mofa.go.[...] 외무성 2012-03-23
[29] 웹사이트 Sri Lanka's killing Fields(スリランカのキリング・フィールド) http://www.channel4.[...]
[30] 웹사이트 スリランカの主な出来事(2010年1月1日-1月31日) https://www.lk.emb-j[...] 주 스리랑카 일본대사관
[31] 웹사이트 HUMANITARIAN OPERATION FACTUAL ANALYSIS JULY 2006 - MAY 2009(人道作戦の事実に基づく検証 2006年7月-2009年5月) http://www.defence.l[...] 스리랑카 국방부
[32] 웹사이트 テロリズムを撃破出来たスリランカ人の経験 http://www.defence.l[...] 스리랑카 국방부
[33] 웹사이트 外務省 最近のスリランカ情勢 http://www.mofa.go.j[...] 외무성
[34] 웹사이트 Defence Seminar - Sri Lanka Army http://www.defsemina[...] 스리랑카 국방부
[35] 웹사이트 スリランカ:戦争犯罪隠ぺいのための軍事会議 招待された国は出席すべきでない アカウンタビリティの実現が必要 2011年05月25日 http://www.hrw.org/j[...] 휴먼라이츠 워치 2011-05-25
[36] 웹사이트 スリランカ内政・外交(2012年4月1日-4月30日) 1.外交その他 https://www.lk.emb-j[...]
[37] 뉴스 スリランカ:強姦される 警察・軍に拘束中のタミル系住民たち 内戦終結後も続く 政治的性暴力 2013年02月26日 http://www.hrw.org/j[...] ヒューマン・ライツ・ウォッチ 2013-02-26
[38] 뉴스 FLASHBACK: Sex Abuse and Murder in Sri Lanka- New Photos Emerge http://www.salem-new[...] Salem-News.com 2012-03-08
[39] 뉴스 Why Did Sri Lanka Kill So Many Children? http://www.salem-new[...] Salem-News.com 2012-11-21
[40] 뉴스인용 <기획탐구> 지구촌 화약고, 분쟁지역 현황 ④스리랑카 https://news.naver.c[...] 2017-09-30
[41] 뉴스인용 스리랑카 26년 내전 종식 https://news.naver.c[...] 2017-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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