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전쟁 (프톨레마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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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 전쟁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일련의 전쟁으로, 기원전 274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이 전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분열된 제국들의 영토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며, 각 왕조는 코엘레 시리아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특히 제3차 시리아 전쟁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후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셀레우코스 제국은 코엘레 시리아를 획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의 종속국으로 전락하며 쇠퇴했다. 이러한 시리아 전쟁은 로마의 동방 진출을 가속화하고, 지중해 세계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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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엘레 시리아는 고대 시리아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어원에는 아람어 기원설과 그리스어 기원설이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하의 엘레우테루스 강 남쪽 지역을, 로마 제국 시대에는 시리아 코엘레 속주를 의미했다.
시리아 전쟁 (프톨레마이오스)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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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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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기원전 274년–기원전 271년; 기원전 260년–기원전 253년; 기원전 246년–기원전 241년; 기원전 219년–기원전 217년; 기원전 202년–기원전 195년; 기원전 170년–기원전 168년 |
장소 | 코엘레-시리아 |
교전 세력 | |
교전 1 |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
교전 2 | 셀레우코스 제국 마케도니아 |
지휘관 | |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지휘관 |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 클레오파트라 2세 |
셀레우코스 제국 지휘관 |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안티오코스 3세 대왕 필리포스 5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
결과 | |
결과 상세 | 셀레우코스 제국, 소아시아, 코엘레-시리아, 키프로스, 이집트 외부의 기타 프톨레마이오스 영토 병합 마케도니아, 키클라데스 제도 병합 제5차 시리아 전쟁 중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발생 제6차 시리아 전쟁 중 로마의 셀레우코스와 마케도니아에 대한 개입 |
주요 전투 |
2.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디아도코이(후계자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분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엘레 시리아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셀레우코스 1세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2. 1. 디아도코이 전쟁과 코엘레 시리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코엘레 시리아는 처음에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301년, 4년 전에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입소스 전투와 관련된 사건을 이용하여 이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입소스의 승리자들은 코엘레 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옛 동맹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즉 셀레우코스 제국의 창시자에게 할당했다. 권력 상승 과정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움을 받았던 셀레우코스는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어떤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죽은 후, 그들의 후계자들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2.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립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켈레시리아는 처음에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301년, 4년 전에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입소스 전투와 관련된 사건을 이용하여 이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입소스의 승리자들은 켈레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옛 동맹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즉 셀레우코스 제국의 창시자에게 할당했다. 권력 상승 과정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움을 받았던 셀레우코스는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어떤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죽은 후, 그들의 후계자들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3. 제1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74년 ~ 기원전 27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는 영토 확장을 도모했으며,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지배하고 있던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공격해 이를 손에 넣었다.[1]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71년 이 지역을 되찾았고,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다.[1]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시선이 동쪽으로 가 있는 동안, 이복형제인 마가스는 키레나이카의 독립을 선언했다. 마가스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연대하여 이집트를 포위하려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4] 키레나이카는 기원전 25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다시 통합되었다.[1]
제1차 시리아 전쟁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중요한 승리였다. 안티오코스 1세는 초반에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의 프톨레마이오스 지배 지역을 점령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71년까지 이 영토를 재정복하여 카리아와 킬리키아 대부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지배를 확장했다.[3]
3. 1. 안티오코스 1세의 영토 확장 야욕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는 영토 확장을 꾀했으며,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다스리고 있던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1] 그러나 기원전 271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 지역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정복했다.[1]기원전 270년대 중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시리아 연안과 소아시아 남부에서 공세를 취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세와 맞섰다.[4]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외교를 통해 뛰어난 전략가임을 입증했다.[4] 또한,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의 근친혼은 이집트 궁정을 안정시켰다.[4]
3. 2.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반격과 승리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는 영토 확장을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지배하던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71년 이 지역을 되찾았고,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정복했다.[1]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안티오코스 1세와의 대립에서 강력한 통치자이자 숙련된 장군임을 입증했다.[2] 또한, 여동생 아르시노에 2세와의 결혼으로 이집트 궁정을 안정시켜 성공적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2]제1차 시리아 전쟁에서 안티오코스 1세는 초반에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영토를 점령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71년까지 이 영토를 재정복하고 카리아와 킬리키아 대부분으로 지배를 확장했다.[3] 기원전 27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시리아를 침공하여 초전에 승리했고, 국내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안티오코스 1세는 반격을 포기했다.[4]
결과적으로 제1차 시리아 전쟁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승리로 평가된다.[5] 기원전 271년, 이집트는 카리아와 코일레 시리아 지역 대부분을 회복했다.[5]
4. 제2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60년 ~ 기원전 253년)
기원전 261년 안티오코스 2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간의 시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안티고노스 2세는 지중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안티오코스 2세를 지원했다.
제2차 시리아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코스 섬 해전에서 안티오코스 2세가 승리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시리아, 팜필리아, 이오니아에서 세력을 잃었고,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투스와 에페소스를 점령했다. 안티고노스 2세의 지원은 코린토스와 할키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중단되었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선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53년,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사망하자, 안티오코스 2세는 이혼한 전처 라오디케 1세와 재결합했다. 베레니케와 라오디케의 갈등은 깊어졌고, 안티오코스 2세 사후 왕위 승계 다툼 과정에서 라오디케는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을 살해했다. 라오디케는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왕위에 올렸다. 베레니케가 살해되자 이집트의 새로운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베레니케의 남동생)는 분노했고, 이것이 제3차 시리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4. 1. 안티오코스 2세의 침공과 마케도니아의 지원
기원전 261년, 안티오코스 2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시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안티고노스 왕조의 왕이었던 안티고노스 2세는 지중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안티오코스 2세를 지원했다.제2차 시리아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코스 섬 해전에서 안티오코스 2세가 승리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시리아, 팜필리아, 이오니아에서 세력을 잃었고,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투스와 에페소스를 점령했다. 안티고노스 2세의 지원은 코린토스와 할키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중단되었는데, 이 반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선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4. 2. 코스 섬 해전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력 약화
기원전 261년 코스 섬 해전에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함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함대를 격파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해전의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킬리키아, 팜필리아, 이오니아에서 영토를 잃었고,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투스와 에페소스를 되찾았다.[1] 이는 지중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상 패권이 쇠퇴했음을 의미한다.4. 3. 전쟁의 종결과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의 결혼
기원전 253년,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 페르노포라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자, 안티오코스 2세는 이혼한 전처 라오디케 1세와 재결합했다. 베레니케와 라오디케의 갈등은 깊어졌고, 안티오코스 2세 사후 왕위 승계 다툼 과정에서 라오디케는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을 살해했다. 라오디케는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왕위에 올렸다. 베레니케가 살해되자 이집트의 새로운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베레니케의 남동생)는 분노했고, 이것이 제3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46년 – 기원전 241년)의 원인이 되었다.5. 제3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41년)
안티오코스 2세가 죽은 뒤, 왕위 후계자 문제로 전처 라오디케 1세와 베레니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각자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베레니케는 자신의 오빠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라오디케 1세가 먼저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을 살해했다.[1]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보복으로 라오디케의 아들 셀레우코스 2세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제3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크도 점령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는 바빌론까지 도달했던 것 같다.[1] 그러나 안드로스 해전에서 안티고노스에게 키클라데스 제도를 빼앗기면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명성은 손상되었다.
기원전 241년 화친 조약이 맺어지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포함한 시리아 북부(안티오크의 항구 포함)를 새로운 영토로 얻었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5. 1. 라오디케와 베레니케의 갈등
안티오코스 2세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을 두고 전처 라오디케 1세와 베레니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1] 베레니케는 자신의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라오디케 1세가 먼저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분노를 일으켜, 그는 라오디케의 아들 셀레우코스 2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제3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켰다.5. 2.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시리아 침공과 승리
안티오코스 2세가 죽은 뒤, 왕위 계승 문제로 전처 라오디케 1세와 베레니케 시라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각자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베레니케는 자신의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라오디케 1세가 먼저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을 살해했다.[1]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이에 대한 복수로 라오디케의 아들 셀레우코스 2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제3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켰다.시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여러 차례 승리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크를 점령하기도 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는 바빌론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1] 그러나 안드로스 해전에서 안티고노스에게 키클라데스 제도를 빼앗기면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명성은 다소 손상되었다.
기원전 241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포함한 시리아 북부 해안 지역을 새로운 영토로 얻었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5. 3. 안드로스 섬 해전과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명성 손상
안티오코스 2세가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셀레우코스 2세를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바빌론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안드로스 해전에서 안티고노스 2세에게 키클라데스 제도를 잃으면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명성은 손상되었다.[1]6. 제4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19년 ~ 기원전 217년)
안티오코스 3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에 오르자 셀레우코스 1세가 과거 구축한 제국 영토(동쪽은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북쪽은 헬레스폰토스, 남쪽은 시리아)를 다시 되찾으려 하였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전 영토를 장악하려 하였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와 시리아에 눈을 돌렸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치하의 이집트는 사법의 부정과 그리스인 우위의 통치 구조에 대한 토착 이집트인들의 불신 등으로 약해져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더 이상 관료들에게 대항할 만한 권력을 갖지 못했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려 하였고, 기원전 219년에 제4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켜 피에리아 지방과 페니키아 여러 도시를 탈환했다. 그러나, 이집트 본토 침공은 자제했다. 안티오코스는 되찾은 영토를 통합하면서도 페니키아에 머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의 외교적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재상인 소시비오스는 군대의 모집과 훈련에 착수했다. 소시비오스는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이집트인으로부터도 병사를 모집했고, 그 결과 3만 명의 이집트인 중장보병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부대를 이끌고 이집트군은 안티오코스 군대를 맞이하여, 이푸소스 전투 이후 가장 대규모의 회전인 라피아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로 인해 안티오코스의 이집트 진출은 좌절되었다.[1]
프톨레마이오스의 승리는 켈레-시리아에 대한 그의 통제력을 유지하게 해주었고, 약한 왕은 심지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되찾기 위해 안티오코스의 제국으로 더 진격하는 것을 거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이후 몇 년 동안 경제 문제와 반란으로 인해 계속 약화되었다. 라피아에서 싸웠던 이집트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적 감정이 발전했다. 자신감에 차고 훈련된 그들은 이집트 반란을 일으켜 상 이집트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웠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기원전 185년경에 마침내 이 지역을 재정복했다.
6. 1. 안티오코스 3세의 시리아 재침과 이집트의 혼란
안티오코스 3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에 오르자 셀레우코스 1세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기원전 221년까지 그는 반란을 일으켰던 메디아와 페르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주시했다.이집트는 궁정 음모와 사회 불안으로 인해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새로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통치는 어머니인 베레니케 2세의 살해로 시작되었고, 어린 왕은 곧 궁정 관리들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그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절대 권력을 남용했고, 이는 백성들에게 큰 분노를 샀다.
안티오코스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기원전 221년에 침공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마침내 기원전 219년에 제4차 시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재탈환했으며, 페니키아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안티오코스는 즉시 이집트를 침공하는 대신 1년 넘게 페니키아에 머물면서 새로운 영토를 공고히 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으로부터의 외교적 제안을 들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의 재상 소시비우스는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현지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3만 명 이상의 원주민을 팔랑기테로 입대시켜 이집트 원주민들로부터도 징집했다. 이러한 혁신은 효과를 보았지만,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안정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기원전 217년 여름, 프톨레마이오스는 라피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와 맞붙어 승리했다.
6. 2. 소시비오스의 군대 개혁과 라피아 전투
소시비오스는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면서, 현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3만 명 이상의 이집트 원주민을 팔랑기테로 징집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군대 개혁은 기원전 217년 여름, 라피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투는 80여 년 전의 이프소스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1]라피아 전투의 승리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켈레-시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7. 제5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급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불과 4세로 즉위하자, 이집트 궁정에서는 권력 투쟁이 촉발되었다. 이 갈등은 재상 아가토클레스와 소시비오스에 의해 선왕의 왕비이자 누이인 아르시노에 3세가 살해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소시비오스의 최후는 불명확하지만, 아가토클레스는 분노한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에게 린치를 당하기 전까지는 섭정직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섭정은 어떤 고문관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고, 이집트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 혼란을 틈타,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202년에 코엘레 시리아 침공을 재개했다. 그는 이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협의하여, 이집트 밖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정복하고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안티오코스는 이 지역을 빠르게 석권했다. 셀레우코스군은 가자에서 잠시 좌절했지만, 기원전 200년 여름에 요르단강 상류 근처의 파니움 전투에서 이집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한편,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로마 공화국은 필리포스 5세와 안티오코스 3세에게 이집트 침공을 단념하라고 요구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급격히 팽창한 영토와 인구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이집트산 곡물의 수입을 중시한 로마는, 이집트의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필리포스와 안티오코스 모두 이집트 본토 침공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로마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기원전 198년,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 시리아 정복을 완료하고, 카리아와 킬리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안 요새를 습격했다. 격화된 왕실 내부의 분쟁과 함께 이집트 사제들의 지원으로 확장된 남부 이집트에서의 대반란은,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전역에 혼란과 반동을 일으켰다. 경제적인 문제는 프톨레마이오스 정부로 하여금 과세를 증가하게 만들었고, 이집트인의 불만을 더욱 높였다. 기원전 195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내정에 집중하기 위해 대폭 양보하는 강화 조약을 셀레우코스 왕조와 맺었다. 제5차 시리아 전쟁의 결과, 셀레우코스 왕조는 코엘레 시리아를 소유하게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했다.
7. 1.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죽음과 이집트의 혼란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불과 네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섭정 문제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 갈등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왕비이자 누이인 아르시노에 3세가 재상 아가토클레스와 소시비우스에 의해 살해되면서 시작되었다. 소시비우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가토클레스는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군중에 의해 린치를 당하기 전까지 얼마 동안 섭정직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섭정은 한 고문관에서 다른 고문관으로 계속 바뀌었고, 왕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7. 2. 안티오코스 3세의 코엘레 시리아 침공과 파니움 전투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불과 네 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이집트는 혼란에 빠졌다. 섭정 자리를 두고 벌어진 권력 투쟁은 재상 아가토클레스와 소시비우스가 선왕의 왕비이자 누이인 아르시노에 3세를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소시비우스의 운명은 불분명하지만, 아가토클레스는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군중에게 린치를 당하기 전까지 섭정직을 유지했다. 섭정은 계속 바뀌었고, 왕국은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었다.이러한 혼란을 틈타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 시리아를 다시 침공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나누기로 합의했다. 비록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빠르게 코엘레 시리아 지역을 장악해 나갔다. 가자에서 잠시 발목이 잡히기도 했지만, 요르단강 상류 부근에서 벌어진 파니움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에 큰 타격을 입히고 중요한 항구인 시돈을 점령했다.
7. 3. 로마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기원전 200년, 로마의 사절단은 필리포스 5세와 안티오코스 3세에게 이집트 침공을 삼가라고 요구했다. 로마는 이집트에서의 곡물 수입이 인구 지원에 중요했기에, 두 군주에게 이집트를 침략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로마의 요구에 응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98년에 코엘레 시리아 정복을 완료하고 카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나머지 해안 요새를 습격했다.[1]이집트 내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왕국 전역에 혼란이 발생했다. 경제 문제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정부는 세금을 인상했고, 이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불을 붙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내정에 집중하기 위해 기원전 195년 안티오코스 3세와 화해 협약을 맺었다. 그 결과, 셀레우코스 왕조는 코엘레 시리아를 소유하게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하게 되었다.[1]
8. 제6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170년 ~ 기원전 168년)
기원전 170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벌어진 제6차 시리아 전쟁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170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섭정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같은 해 이집트의 단합을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부인이자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통치자로 선언되었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는 펠루시움과 같은 중요한 전략적 도시를 빠르게 점령하며 우위를 점했다. 이집트인들은 전쟁이 시작되자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고,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축출되었으며, 새로운 섭정인 코마누스와 키네아스로 교체되었다. 그들은 특사를 파견하여 안티오코스 4세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고자 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12]를 자신의 후견 하에 두고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알렉산드리아 백성들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의 보급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기원전 169년 말에 군대를 철수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철수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그의 형제들은 화해했다. 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것에 분노한 안티오코스 4세는 다시 이집트를 침략했다. 이집트인들은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 원로원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견했다. 그 사이, 안티오코스 4세는 키프로스와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고 있었다. 수도 외곽 엘레우시스에서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만난 안티오코스 4세는 그와 로마에 머무는 동안 친구였기에 반갑게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포필리우스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물러나라는 원로원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13]
안티오코스 4세는 고려할 시간을 갖기를 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모래 위에 원을 그리며 그 안에서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의 최후통첩에 굴복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을 ‘엘레우시스의 날’이라고 부르며, 이날은 제6차 시리아 전쟁과 안티오코스 4세의 이집트 정복 야욕을 좌절시킨 날로 기록되었다.
8. 1. 전쟁 발발의 배경과 원인
기원전 170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섭정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 안티오코스 4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12] 같은 해, 이집트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부인이자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통치자로 선언되었다.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펠루시움 등 주요 전략 도시를 빠르게 점령하며 우위를 점하자,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시작한 것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축출되고, 코마누스와 키네아스가 새로운 섭정으로 교체되었다. 이들은 안티오코스 4세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12]를 자신의 후견 하에 두고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백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의 보급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기원전 169년 말에 군대를 철수했다.[13]
셀레우코스 왕조는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기원전 188년 아파메이아 조약에서 로마 공화국이 부과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들은 이미 코일레-시리아를 통제하고 있었고, 동쪽에서 부상하는 파르티아 제국을 막는 데 바빴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새로운 전쟁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부 불화와 반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약화시켰다. 특히 군주의 권력이 약해졌고, 알렉산드리아 유력 귀족들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집트 민족주의 운동 세력도 커졌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코일레-시리아를 되찾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을 수 있지만, 기원전 180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섭정 클레오파트라는 전쟁이 무의미하다는 데 동의했든, 셀레우코스 왕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든, 궁정의 평화파를 지지했다.[2] 클레오파트라 1세는 기원전 176년에 사망했지만,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는 아직 10세에 불과하여 섭정이 계속 필요했다. 환관이자 노예였던 에울라에우스와 레나에우스가 젊은 이집트 왕의 섭정이 되었다.[3]
새로운 분쟁의 원인은 불분명하다. 두 강대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양측 모두 로마(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얽매여 있었음)에 사절을 보내 서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170년,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이 이집트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공동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세 형제의 나이는 10세에서 16세 사이였다. 원인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섭정 에울라에우스와 레나에우스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에게 공식적인 전쟁 선포를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문제를 찾으려는 욕망, 친전파의 정치적 이득,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얼마나 쉬울지에 대한 엄청난 오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
8. 2. 안티오코스 4세의 이집트 침공과 알렉산드리아 포위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는 펠루시움과 같은 중요한 전략적 도시를 빠르게 점령하며 군대를 움직였다.[12] 이집트인들은 전쟁이 시작되자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고, 에우라이우스와 레나이우스는 전복되었으며, 두 명의 새로운 섭정인 코마누스와 키네아스로 교체되었다. 그들은 특사를 파견하여 안티오코스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고자 했다.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그의 후견 하에 두고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 했다.[12]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알렉산드리아 백성들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을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의 보급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기원전 169년 말에 군대를 철수했다.[12]8. 3. 로마의 개입과 "엘레우시스의 날"
기원전 168년, 로마 원로원은 안티오코스 4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돕기 위해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견했다. 그 사이, 안티오코스 4세는 키프로스와 멤피스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고 있었다. 수도 외곽 엘레우시스에서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만난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친구였기에 반갑게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포필리우스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물러나라는 원로원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13]안티오코스 4세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겠다고 요청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모래 위에 원을 그리며 그 안에서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의 최후통첩에 굴복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을 ‘엘레우시스의 날’이라고 부르며, 이 날은 제6차 시리아 전쟁과 안티오코스 4세의 이집트 정복 야욕을 좌절시킨 날로 기록되었다.[13]
9. 시리아 전쟁의 영향
시리아 전쟁은 헬레니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크게 쇠퇴하였다. 두 왕조는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였고, 이는 결국 로마의 동방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참조
[1]
웹사이트
Ptolemy III chronicle
https://www.livius.o[...]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Judaea and Mediterranean Politics 219 to 161 B.C.E.
Brill
1998
[7]
서적
L'histoire politique du monde hellénistique
Editions du Seuil
[8]
서적
Tales of High Priests and Taxes: The Books of the Maccabees and the Judean Rebellion against Antiochos IV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문서
안티오코스 4세의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를 낳았다. 이들 남매는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가 되고, 결혼하였다.
[13]
서적
L'histoire politique du monde hellénistique
Editions du S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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